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94
94화. 구원의 요람(4)
「지역 최초로 성역이 선포되었습니다.」
박정우로 인해 전국에 송출된 이 문구는 단연 만인의 최대 화두가 됐다.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한다는 생존 법칙만이 유효하던 세계에 또 다른 선택지가 생긴 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 성역이란 것이 정말 안전지대인지는 알 수 없고 어디에 나타난 건지, 존재하긴 하는 건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성역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자들에겐 유일한 희망이었고, 강자들에겐 새로운 정복 대상이 나타난 셈이었으니까.
* * *
“넌 뭐 아는 거 없냐.”
서행 중인 열차 안에서 민구가 물었다.
이에 바닥에 축 늘어진 냄새가 콧바람을 내뿜었다.
* 가야 해.
“……그건 누구나 다 알지.”
냄새는 아까부터 성역으로 가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구원자라고 해서 이 사태를 꿰뚫고 있는 건 아닌 듯.
어쩌면 이 모든 일에 지쳐서 그저 좀 쉬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
민구는 냄새를 뒤로하고서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량진에서 장어 떼를 붙인 채 내달리던 이 열차는 어느새 신길역 근처까지 와 있었다.
맞은편 선로에 탈선한 열차가 더러 보이는 걸로 봐선 이 동네도 온전한 상태는 아닐 터.
아니나 다를까,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땅딸보’가 미리 통보했다.
“승강장까진 못 들어갑니다. 곧 정차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두십시오.”
“저쪽은 길이 막혀 있어서 그렇습니까?”
“예.”
땅딸보의 말에 따르면 현재 열차가 다닐 수 있는 노선은 극소수였다.
사실상 기존 노선은 전부 마비됐다고 봐야 하고, 보조 선로가 존재하는 일부 노선만 짧게 운행할 수 있는 상태였다.
단, 매번 기관사가 직접 내려서 선로를 조정해 준다는 가정하에서다.
이마저도 보조 선로까지 이동하는 동안 길이 막히지 않아야 했다.
그러니까 이 열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매 순간 극악의 확률을 뚫어 내며 이동 중이었던 거다.
‘우릴 버리고 갈 만했군.’
민구는 납득했다.
더군다나 이 열차엔 남영과 용산역에서 합류한 백여 명의 사람이 탑승 중이었다. 이들 입장에선 겨우 서너 명을 살리자고 진입로 근처에서 정차하는 모험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열차를 타고 어디로 갈 생각이었습니까?”
민구의 물음에 땅딸보가 객실 상단에 붙은 노선도를 바라봤다.
“듣기론 인천에 커다란 대피소가 마련됐다고 하더라고요. 인천시 차원에서 빠르게 대응했다고 합니다.”
“아, 정말입니까.”
민구는 이제 인간이 하는 일에 별 기대가 없었기에 대충 맞장구를 쳐주기만 했다.
그래도 민간인 백 명을 끌고서 어떻게든 나아가 보려는 땅딸보의 선의엔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본인이 지닌 능력에 비해 너무 큰 짐인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제 열차도 더 못 굴리고……. 도보로 인천까진 못 갈 텐데.’
민구와 냄새가 열차 지붕에서 장어 떼와 싸우고 있을 당시 기특하게도 땅딸보가 지원을 와 줬는데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민구가 보기에 정수를 천 개 정도 가지고 있을까 싶은 수준의 각성자였다.
그러니 땅딸보의 파트너인 ‘멀대’도 뭐 비슷한 형편일 것이다.
“차라리 성역이라는 데를 찾아가 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민구가 노파심에 의견을 내자 땅딸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딘지만 안다면 당장 가고 싶긴 하죠.”
그리고 때맞춰 열차가 감속을 시작했다.
끼이이이…….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육중한 차체가 선로 한가운데에 섰고, 곧 모든 문이 개방됐다.
취이이익!
-각자 최소한의 짐만 챙겨서 내린 뒤 대표들의 지시를 따라 주십시오.
기관실에서 내보낸 방송이다.
이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이 각자 배낭을 짊어지고서 객실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이 와중에 캐리어가 간혹 보이는 걸 봐선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자들이 있는 듯.
“…….”
민구는 한심하단 표정으로 캐리어 주인들을 바라보다가 외과의 최성재가 슬그머니 인파 속에 숨는 걸 보고서 그를 끄집어냈다.
“곧잘 뒈지는 걸 좋아합니까? 그래도 저 녀석이 완전히 회복할 때까진 못 보내 줍니다.”
“그, 그런 게 아니고요……!”
성재가 손을 내저으며 변명하다가 막 열차에서 내린 냄새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크릉.
주변에 낯선 인물이 많아 긴장했는지 냄새의 몸은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워…….”
다들 냄새를 피해 좌우로 갈라졌고, 땅딸보와 멀대도 새삼 겁먹은 얼굴로 민구와 네발짐승을 번갈아 봤다.
“어르신은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혹시 괜찮으시다면…….”
동행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장어들과의 전투를 통해 자신들의 힘으론 장기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을 테니까.
하지만 민구는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민간인과 그걸 보고도 가만히 두는 두 리더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싶진 않았다. 이미 일행이 충분히 많기도 했고.
“됐습니다. 우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민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 멀리, 선로 맞은편에서부터 무언가 보였기 때문이다.
“아, 씨발.”
민구가 대상의 정체를 인지하고 욕을 내뱉는 데까진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접근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으니까.
“어어!”
“세, 세상에.”
뒤늦게 고개를 돌린 열차 측 사람들이 기겁하며 자신들의 대표자를 바라봤다.
그러나 땅딸보와 멀대는 제자리에 돌처럼 굳어서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많아서였다. 너무나도.
끼르륵, 끼륵!
끼륵! 끼륵!
노량진에서 본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다가오고 있는 건 수천, 아니 어쩌면 만 단위에 이를지도 몰랐다.
얼마나 많으면 검은 해일처럼 보이겠는가.
“냄새야, 이 사람들 태우고 저리로 쭉 달려라. 달리는 데만 신경 써.”
“미, 민구 씨?”
민구의 지시에 정혜가 눈을 휘둥그레 떴고, 그사이 냄새가 몸을 들이밀며 그녀를 태웠다.
이어선 세준이 냄새의 엉덩이 쪽에 몸을 실으면서 남은 자리를 채웠다.
“저는요? 저는?”
당황한 성재가 울 듯한 표정으로 매달리자 민구가 눈을 시퍼렇게 빛내며 이야기했다.
“그쪽은 나랑 같이 가면 됩니다. 어떻게든 살려는 줄 테니 걱정 마시오.”
그러더니 냄새의 뒷다리를 툭 치면서 얼른 가라는 신호를 줬다.
캬릉!
냄새가 날카롭게 울며 질주를 시작했고, 이내 민구의 시선이 아직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열차 측 사람들에게 닿았다.
그러곤.
휙.
허공을 사선으로 가른 민구의 팔.
“억……?”
상상도 못한 광경에 성재가 경악했다.
땅딸보와 멀대가 네 토막으로 흩어지고 있었으니까.
“무, 무, 뭐, 뭣……!”
성재는 사고회로가 완전히 마비된 채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자 민구가 그를 강제로 일으키며 다급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저 사람들이 시간을 많이 벌어 주진 못할 겁니다.”
민구가 말한 ‘저 사람들’이란 열차에 타고 있던 탑승객들.
즉, 백여 명의 민간인을 미끼로 쓰겠다는 의미였다.
* * *
경기도 남양주, 성역의 동쪽 경계선 근처.
‘외부인’들의 모습을 확인한 중성은 눈을 꾹 감았다. 너무나도 전형적인 일반인이었기 때문이다.
선량함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처음은 쉽게 갈 줄 알았더니.’
차라리 작정하고 약탈을 위해 온 자들이었다면 모든 게 수월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무고한 사람보다는 강도를 죽이는 것이 좀 더 마음이 편할 테니까. 대리자인 조선웅의 마음 말이다.
“…….”
한편 정우는 팔짱을 낀 채 저 멀리서부터 줄지어 접근 중인 사람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거리가 좁혀지면 본보기로 한 사람을 죽여요. 그럼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뉠 겁니다. 반항하거나, 묻는 말에 진실만 내놓거나.”
이 말에 선웅이 창백해진 얼굴로 헛기침했다.
“일단 어떤 사람들인지 대화를 해 보고 나서…….”
그러자 정우가 대번에 꾸짖었다.
“독심술이라도 할 줄 아십니까? 그리고 여유롭게 통성명부터 할 시간은 없을 겁니다. 곧 다른 방향에서도 사람들이 들어올 테니까.”
그러더니 몇 마디를 덧붙였다.
“보호막은 미리 쳐두십시오. 상대가 총을 가졌다면 지금쯤 꺼내 들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정말로 접근해 오던 사람 중 하나가 수상한 행동을 했다.
뭔가를 확인하듯 허리 뒤쪽을 손으로 더듬은 것이다.
“……!”
순간적으로 흥분한 선웅이 팔을 뻗으려 하자 정우가 제지했다.
“가급적이면 상대가 전부 모일 때까지 기다려요. 그래야 실력 행사를 했을 때 상대가 도망갈 엄두를 못 냅니다.”
상대가 전부 뿔뿔이 흩어져 버리면 일부를 죽이는 수밖에 없으니 그만큼 인재를 건질 확률도 낮아진다는 게 정우의 설명이었다.
“…….”
일종의 구원자 속성 수업.
이 대화 속에서 정우의 판단 기준과 그간의 경험이 조금씩 드러났기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보호막.”
정우가 다시 짧게 지시했고, 곧 선웅이 일행을 감싸는 돔형 보호막을 전개했다.
“보호막을 보고도 계속 오네요.”
명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외부인들을 쳐다본다.
“명색이 성역인데 찾아오는 족족 다 죽일 거라곤 생각을 못한 거 아니겠습니까.”
태휘가 씁쓸하다는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사이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식별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성역의 경계면에서 경고음이 더 울리지 않는 걸 보니 지금 시야에 들어온 자가 전부인 것 같았다.
총 아홉 명.
대부분 20대에서 40대 사이였고, 남녀 비율이 대략 7 대 3 정도 됐다.
‘전부 성인이네. 부부도 없는 것 같고.’
선웅이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은 정우의 눈앞에 어린아이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차세대 할당제로 인해 10세 이하의 아동을 방주에 태울 수 있게 됐으니까.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젠 오히려 성인으로만 이루어진 생존자 그룹이 최악의 경우에 가깝게 됐다.
눈앞에 나타난 이들처럼 말이다.
“저…… 여기가 성역인가요? 저희도 받아 주실 수 있습니까? 여의치 않다면 즉시 떠나겠습니다.”
이 그룹의 리더로 보이는 사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까 뒤춤을 만지던 그 수상한 자다.
그동안 나머지 여덟 외부인은 허허벌판인 성역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몇 번씩이나.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집 한 채 세워져 있질 않으니.
이에 선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두어 발자국 나아갔다.
“어디서 오신 겁니까?”
언젠가 봤던 정우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는 중이었다.
“음, 의정부에서 오는 길입니다.”
“의정부요? 애초에 여길 오려던 건 아니실 텐데. 의정부는 왜 떠나신 거죠?”
선웅이 의외로 대화를 잘 끌어간다. 이것 역시 정우의 카피이긴 했지만.
“의정부 상황이 많이 좋지 않아서요. 무정부주의로 흘러간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더 머물다간 큰일이 날 거 같아서 떠나왔습니다.”
사내는 대답을 곧잘 하면서도 뭔가를 직감했는지 서서히 물러섰다.
“그런데 여긴 뭐죠……? 정말 성역이 맞습니까? 잠은 어디서들 주무세요?”
위험 게이지 같은 것이 갑자기 솟구친 느낌.
분위기가 급변할 기미를 보이자 용케 침착함을 유지하던 선웅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우선 대화를…… 대화부터 합시다.”
아마 그는 자신의 대사가 이상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을 거다.
“여기 뭔가 수상…….”
결국 위화감을 느낀 외부인 중 하나가 뒤로 달아나려는 순간.
푸아아악!
난데없이 시퍼런 빛줄기가 놈을 덮쳤다.
“……!”
깜짝 놀란 모두가 발원지로 고개를 돌리자 예상과 달리 선웅이 팔을 뻗은 채 서 있었다.
“집은…… 곧 지을 거니까, 대화 좀 합시다. 제발.”
이 대사엔 정우마저 입을 슬그머니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