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95
95화. 구원의 요람(5)
‘……색다르네.’
동훈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선웅을 쳐다봤다.
이건 조선웅식 대화법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최악 대신 차악을 선택했다는 점에선 정우와 다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선웅에겐 일말의 애착이 남아 있었다. 인간에 대한 애착 말이다.
진심이 지글거리는 눈빛으로 이런 말을 할 줄 알았으니까.
“지금부터 단 한 명이라도 도망을 가거나 무기를 꺼내 들면 여러분을 모두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의 기회라도 붙잡으세요. 부탁합니다.”
“대, 대체 그게 무슨…….”
8인의 외부인은 이 자리에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몸을 벌벌 떨면서도 섣불리 도망가지 못했다.
선웅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기회라도 붙잡으라는.
“저희에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외부인 그룹의 리더가 양손을 천천히 펼쳐 보이며 자세를 낮췄다.
이에 선웅이 아직은 적막할 뿐인 성역을 슥 둘러봤다.
“여기에 집을 짓고 밭도 꾸려서 정말 ‘성역’을 만들 겁니다. 이곳으론 괴물이 들어오지 못하거든요.”
그러자 외부인들의 얼굴에 일순 희망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어진 본론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다 받아 줄 순 없어요. 그래서 성역 발전에 필수적인 인원만 선별하고 있습니다.”
“필수적인 인원이라 하시면……?”
외부인 리더의 이 질문엔 중성이 대답했다.
“건축가, 전기공, 농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아…….”
감이 온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리더의 낯빛이 이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형사는…… 필수 인원 목록에 없습니까?”
이 사내는 전직 경찰이었던 것이다.
“으음.”
중성이 짧게 침음하며 선웅을 슬쩍 봤다가 정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됩니다. 차세대 할당제만으로도 잉여 인력이 많이 생길 겁니다. 그러니 경찰까지 필요하진 않아요. 치안 쪽으로 돌릴 사람은 앞으로 많이 생길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대번에 반려됐다.
정우가 말한 ‘잉여 인력’이란 임산부의 남편을 의미했다. 이를테면 성호처럼 말이다. 특출한 기술이 없어도 방주에 탑승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케이스.
그렇다고 그들을 놀게 놔둘 텐가? 정우는 ‘남편들’을 육체 노동자와 치안 인력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미, 미, 미쳤어……! 이 사람들 제정신이 아니라고!”
정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외부자가 사색이 돼서 뒷걸음쳤다.
그저 하루라도 더 버티는 게 중요한 일반인의 입장에선 차세대 할당제니 뭐니 하는 것들이 전부 소름 돋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동호 씨! 일단 가만히 있어요! 그러다 다 죽습니다!”
외부자 리더가 점점 빠르게 뒷걸음 중인 사내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동호라는 남자는 이미 이성이 마비된 것 같았다.
“맞아! 이대론 다 죽어……!”
그가 몸을 급히 돌리자 살집 덕분에 불룩해 보이던 셔츠가 묵직하게 흔들렸다.
홱.
끝내 제자리에서 뻗어 나가고만 다리. 육중한 기척이 났다.
하지만 도주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정신 차려!”
번개처럼 달려든 리더가 그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았기 때문이다.
퍼억.
“으엑!”
동호가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고, 그사이 전직 경찰이라던 리더가 황급히 정우와 선웅의 눈치를 봤다.
방금 이 뚱땡이의 행동이 ‘도주 판정’을 받은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일단 정우는 잠자코 있었고, 따라서 결정권은 선웅에게 넘어갔다.
“……조심해요.”
선웅이 정수를 뿜는 대신 주의를 준다. 그러자 리더가 명심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마에선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다들 어서…… 기회가 있을 때 말해요. 자신이 여기에서 뭘 할 수 있는지.”
고비를 넘긴 리더가 나머지 외부인을 재촉했다.
성역에 자기 자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됐음에도 다른 사람들을 챙기는 것이다.
‘대단하네. 저런 캐릭터는 처음인데. 단순히 이타심인가, 아니면 리더로서의 의무감인가.’
중성은 내심 감탄하면서 정우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정우의 얼굴에선 그 어떤 동요도 감지할 수 없었다.
반면 선웅은 온몸이 짜릿해지는 느낌에 주먹을 꽉 쥐기까지 했다.
‘저 사람은 꼭 살려 두고 싶다. 저런 책임감과 의지도 어떻게 보면 재능이고 기술이야.’
설령 저것이 극한의 합리주의로 인한 모습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결과적으론 그 가치가 사람을 살리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성이라는 게 다른 것이 아니다. 저것이 바로 사람다움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시키는 일은 뭐든 다 하겠습니다……!”
“저도요!”
이윽고 외부인들이 각자의 목숨을 영업해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요점을 잡지 못한 건지 그저 살려 달라고 외치기만 하는 수준이었다.
“혹시 교사는 필요 없으십니까? 5년 정도 학생들을 가르쳐 본 경험이 있는데…….”
“저, 저는 필라테스 강사예요. 물리 치료사 자격증이랑 한식 조리 기능사 자격도 가지고 있고요.”
더러는 이렇게 자신의 특기를 구체적으로 밝혀 왔지만 방주에 태울 정도는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그냥 다 죽이고 다음 방문객들을 기다리는 게 나을 것이다. 정우의 말대로 조만간 사람들이 사방에서 밀려들 테니까.
‘제길…….’
선웅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드리워지자 상황을 지켜보던 중성이 외부인 측 리더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아까 형사라고 하셨는데, 그럼 그냥 경찰이 아니라 수사관이신 거 아닙니까? 실례지만 어느 과 소속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건 중성이 다소 무리를 해 가며 던져 준 동아줄이었다. 저 형사는 정우가 한차례 반려한 인물이었으니까.
“예. 경기 북부 광역 수사대 소속입니다.”
대번에 튀어나온 답변.
이 말에 중성이 정우를 바라보며 재고를 요청했다.
“광역 수사대 출신이면 치안이 아니라 수사 인력이라고 봐야 합니다. 적어도 한 명쯤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람이 많아지면 분명 범죄도 발생할 텐데요.”
사실상 선웅을 대신해 중성이 총대를 멘 셈이었다. 분위기를 보니 다른 사람들도 형사만큼은 살렸으면 하는 눈치였고.
“진심이십니까? 이 시점에 수사관을 채용하겠다는 게?”
정우가 처음으로 중성에게 날 선 목소리를 쐈다.
이미 간파한 것이다. 수사 인력이니 뭐니 하는 건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이런 상황이 앞으로 수백 번은 더 있을 겁니다. 벌써 이렇게 느슨해지면 곤란한데요. 사람이 좋아 보이면 다 살려 줄 겁니까? 중성 씨마저 이러는 건 아주 의외입니다.”
슥.
정우의 팔이 외부인들을 향해 뻗어 올라갔다. 본인이 직접 처형하려는 것이다.
이건 성역에 자치권을 주려던 정우의 마음이 흔들렸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강경한 그의 태도에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맙소사…… 내 실책이다.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중성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얼굴로 정우를 바라봤다.
냉철하기 그지없는 이 구원자의 동공은 이미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곤.
파아앗!
끝내 정수를 뿜어내고 말았다.
“아아악!”
누군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고, 곧 푸른빛이 모두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으……!”
다들 조만간 처참한 광경을 보게 되리라 예상했다. 발목 내지는 손끝 정도만 남은 시체들 말이다.
그러나 정작 보게 된 것은.
“어…… 어어?”
양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명일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오, 이런.”
동훈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광대가 툭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 누구도 감히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안 됩니다. 이번만큼은……!”
전에 없이 단호한 선웅의 목소리.
그런데 소리의 발원지가 아까와는 달랐다.
다름 아닌 정우와 외부인들의 사이였으니까.
츠즈즛, 츠즛.
선웅의 몸을 중심으로 펼쳐진 보호막에는 흰색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정우의 정수 파동을 가까스로 막아 낸 것이다.
“제정신입니까? 지금…….”
정우는 화가 난 표정으로 선웅을 응시했다.
이 미련한 대리자가 빌려 간 정수라고 해 봐야 8만 개. 이에 반해 정우에겐 20만 개 이상의 정수가 남아 있었다.
즉, 선웅은 방금 본인의 목숨을 건 거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우 씨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역이나 방주를 허투루 사용할 마음은 결코 없습니다. 다만……!”
스아앗!
선웅이 작심한 얼굴로 뒤를 돌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외부인들을 정리했다.
단 한 명, 광역 수사대 출신 형사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 사람만큼은 꼭 살려 두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깊게 숙여진 대리자의 고개.
정우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선웅이 목숨까지 걸어 버린 마당이라 뭘 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당장 대리자를 어디에서 더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심지어.
쿵, 쿵!
쿵!
더 논의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쿠쿵, 쿵, 쿵!
쉬지 않고 울리는 외부인 경고음. 이번엔 못해도 수십 명은 될 것 같았다.
“좋습니다. 어떻게 돌아갈지 한번 봅시다.”
정우는 결국 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오전 9시경.
태휘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붉게 물든 대지를 응시했다.
농지를 가급적 이곳과 멀리 떨어진 곳에 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시체를 거름으로 해서 농사를 짓기엔 좀 그렇지 않은가.
“으음.”
명일도 다소 거북한 얼굴을 하고서 낮은 신음을 흘렸다.
머리 반쪽 또는 발목. 가끔은 하반신 전부.
확실히 선웅은 정우보다 잔해를 많이 남겼다. 살인이 익숙지 않고 정수 제어도 미숙한 탓일 것이다.
그럼에도 대리자로서 해야 할 일은 꾸역꾸역 해냈다.
사색을 하고서도 30명이나 되는 외부인을 전부 죽여 버렸으니까.
안타깝게도 이번 방문객 중엔 기술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
“괜찮은 걸까요……? 사람이 갑자기 변해 버리는 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닌데.”
명일이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저 멀리서 정우와 대화 중인 선웅을 지켜봤다.
그러자 중성이 팔짱을 낀 채로 나지막이 말했다.
“하루 사이에 사람이 변했을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그럼요? 억지로 저러고 있단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두고 봐야 알겠죠.”
중성은 적당히 대화를 끊었다. 입 밖으로 내기엔 분란의 소지가 있는 생각이었으니까.
‘선웅 씨는 정우 씨보다 자신이 성역을 돌보는 게 낫겠다고 결론 내린 거야. 아까 그 일로 마음을 정했을 거다.’
이것 역시 어떻게 보면 최악 대신 차악을 선택하는 행위.
정우를 성역에서 떼어 두려면 대리자인 선웅이 제 역할을 해야만 한다. 이 때문에 그가 이를 악물고 박정우의 카피를 자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슥.
마침내 대화가 끝났는지 정우가 중성에게 이리로 오라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아마 떠나기 전 몇 가지 지침을 주려는 것일 터.
중성도 정우에게 조달을 요청해야 할 물건들이 있었기에 서둘러 달려갔다.
이제 이 공동체는 구원자 없는 일상을 대비해야 한다. 이게 가능하도록 만들려면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