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96
96화. 구원의 요람(6)
“이성태라고 합니다.”
36세, 경기 북부 광역 수사대 출신의 형사.
정우와 ‘투표권자’들이 함께 뽑은 방주 탑승자로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정우는 이제 곧 성역을 떠날 테니까 말이다.
“환영합니다, 성태 씨.”
중성이 뻣뻣하게 서 있는 구원자와 대리자를 대신해 인사말을 건넸다.
아까는 몰랐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성태의 덩치가 상당히 크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저…….”
갑자기 성태가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더니 다른 팔로 뒤춤을 더듬었다.
무기를 꺼내려는 것이다.
“……!”
일순 모두의 표정이 굳었으나 중성만큼은 내색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꺼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슥.
이윽고 나타난 성태의 무기. 예상대로 검정 리볼버였다.
딸그락, 촤락.
성태는 아주 능숙한 동작으로 약실을 비워 내고서 총알과 함께 권총을 건넸다.
“…….”
서서히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 사내가 민간인이 아닌 형사라는 게 확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깥 세계에서는 정수의 높고 낮음이 모든 걸 결정하지만 이곳 성역은 그렇지 않다. 최상위 구원자의 비호 아래 불완전하나마 인간의 상식과 체계가 작용한다.
따라서 기성 세계에서 체계를 수호하던 사람의 편입 장면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음,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어선 선웅이 대리자 권한으로 성태를 방주에 태웠다.
그러자 틱, 하는 특유의 소리와 함께 그의 손목에 각인이 새겨졌다.
“엇.”
따끔한 느낌에 놀라는가 싶던 성태의 얼굴이 곧 평소대로 돌아갔다. 웬만해선 쉽게 당황하지 않는 듯.
정우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선웅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이제 20자리 남았군요. 앞으론 더 신중해야 할 겁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선웅이 고개를 숙이며 화답한다.
|현재 10/30 개체를 탑승자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방주 탑승 권한을 승인받은 뒤부터 선웅의 눈에도 방주 현황이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실 방주의 자리가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30이란 숫자가 그렇게 적어 보일 수 없었다.
심지어 진입로를 하나 폐쇄해 봐야 겨우 10자리가 추가될 뿐이지 않은가.
앞으로 밀려올 인파를 전부 쳐 내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심란해졌다.
“정우 씨는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이윽고 나온 구원자에 대한 단골 질문. 이번엔 중성의 물음이었다.
이에 정우가 동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무 늦기 전에 대성을 방문할 생각입니다. 이동 중에 진입로가 보이면 가급적 바로 닫아 둘 테니 한동안 방주가 계속 커질 겁니다.”
슬슬 헬기에 연료도 채워야 하고 성역 선포가 전국에 알려진 이상 가장 가까이 있는 위협인 대성을 놔둬선 안 됐다.
헬기를 운용할 수 있는 조직인 만큼 이미 성역을 찾아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성에서도 별 소득이 없다면 그때부턴 지자체를 돌아야 해.’
정우의 머릿속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꽉 차 있었다.
3일 차부터 등장한 ‘장어’의 살상력도 큰 변수. 며칠 더 지나면 민간인이라고 할 만한 자들이 전부 사라지지 않을까? 사람들이 피신해 있을 만한 장소도 최대한 둘러봐야 했다.
“이륙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용헌이 다가와 나지막한 음성으로 보고했고,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웅에게 마지막 지침을 내렸다.
“혹시 선웅 씨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거든 정수를 44개 청구하세요. 그럼 복귀하란 신호로 알고 최대한 빠르게 돌아오겠습니다.”
황무지 상태인 성역에선 전화를 걸 수도 받을 수도 없다. 그러니 정수 청구를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자는 이야기였다.
“……예, 알겠습니다.”
대리자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게 뭘까? 선웅은 44개를 청구할 상황이 오지 않길 바라면서도 정우의 말을 머릿속에 새겼다.
“그럼 이제 갑시다.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겁니다.”
마침내 정우가 발을 떼기 시작했다.
용헌과 동훈이 얼른 그의 뒤를 따랐고, 이어선 성역에 남게 된 사람들이 배웅을 위해 움직였다.
* * *
비슷한 시각.
여의도의 서쪽 진입부인 서울교 끝자락.
기진맥진한 상태로 달리던 민구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훅, 후욱.”
거친 숨소리에 다들 그가 너무 지쳐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조, 조금 쉬는 게 좋겠죠? 괴물들도 더는 따라오지 않는 것 같은데…….”
정혜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 내며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그러나 민구의 신경은 전혀 다른 곳에 몰려 있었다.
우웅, 우우우웅, 우웅.
고장이 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쉬지 않고 진동하는 그의 휴대폰.
주머니에서 꺼내 보니 여태 받지 못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문자와 부재중 전화 기록이 몰려들고 있었다.
여의도로 진입하면서 여태 끊어져 있던 신호가 복원된 것이다.
‘아니, 이 시국에 누가 전화를……?’
이 사태가 터진 직후면 모를까, 민구가 알기로 이제 와서 연락을 해 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번호를 아는 사람도 극히 드물고 말이다.
툭.
문자함을 열어 보니 비슷비슷한 내용의 메시지가 수십 개가량 쌓인 게 보였다.
눈에 띄는 공통 키워드는 ‘대성 그룹’, ‘긴밀히 모시고 싶다’ 등의 생뚱맞은 이야기들.
“무슨 일이에요?”
이상한 기색을 감지한 정혜가 천천히 다가왔다.
“웬 놈이 자기가 대성 그룹 사람이라고 좀 만나잡디다.”
민구는 짜증 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날숨을 깊게 내뱉었다.
그도 대성이 어떤 회사인지는 잘 알았다. 그러나 그들과 자신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지 않던가. 여태 그 어떤 접점도 없었는데 왜 갑자기?
‘세상이 망해 가니 별 미친놈들이 다 나타나는구나.’
민구는 이게 그저 기분 나쁜 장난일 거라고 여겼다. 진짜 대성 쪽에서 보내온 문자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우웅……! 우우웅!
대번에 또 휴대폰이 진동했다.
“전화…… 온 거 아니에요?”
정혜가 살짝 겁먹은 얼굴로 민구의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누군가 통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민구도 이쯤 오자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사뭇 긴장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곤.
슥.
상대의 전화를 받았다.
“예, 박민구입니다. 누구십니까?”
그러자 휴대폰 저편에서부터 어떤 사내의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행입니다. 아직 무사하시군요. 저는 대성 그룹 보안실장 정명규라고 합니다.
대성 그룹 보안실장? 민구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령 이 사람이 정말 대성 측 사람이라 해도 이 통화 자체가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지요? 전화 제대로 하신 게 맞습니까?”
이에 상대가 낮게 웃었다.
-조금 놀라셨지요? 다름이 아니라 아드님 문제로 전화 드렸습니다.
“……?”
민구는 이제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서 있었다.
아들이라 함은 정우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겠는가.
-제가, 구원자예요.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도 알고요.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첫날, 행운동에서 자신이 구원자라 밝혀 오던 그 녀석 말이다.
“제 아들놈이 지금 거기에 있습니까?”
-아직 그런 것까지는 아니지만…….
이 뒤로 상대가 무어라 더 이야기했으나 민구는 마저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씨발.”
-예?
서울교 맞은편에서부터 장어들이 몰려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벌써 신길역 일대를 다 먹어 치운 것인가? 아무튼 비상이다.
“내가 지금 좀 급해서 통화는 나중에 해야겠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정확한 위치를 말씀해 주시면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가 다급해졌으나 민구는 이미 한창 달리는 중이라 제대로 듣질 못하고 있었다.
-아버님? 아버님!
“헉, 헉.”
민구의 거친 호흡 아래로 냄새의 울음이 배경음처럼 깔렸다.
크르릉!
녀석도 장어 떼를 보고서 긴장한 것이다.
-……?
방금 무슨 소린가 싶었는지 상대가 순간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데시벨을 올렸다.
-아버님! 응답 좀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후읍, 흡.”
마침내 민구가 휴대폰에 귀를 갖다 댔다.
“다 해결할 수 있다면서 나는 왜 찾는 거요?”
-…….
정곡을 찌른 질문에 상대가 처음으로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자 민구가 역으로 주문했다.
“여기 여의도요. 국회 쪽으로 가 있을 테니 최대한 강한 사람 좀 많이 보내 주시오. 늦기 전에 와야 할 텐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근처에 괴물 같은 게 있는 상황입니까?
이 물음에 민구가 그저 맑을 뿐인 여의도 하늘을 슬쩍 바라봤다.
“예, 하늘에서 뭐가 막 쏟아지고 있습니다.”
* * *
오전 9시 16분.
정우가 탄 헬기는 강동과 하남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발밑으로 보이는 고속 도로는 차량으로 가득 찬 상태였고, 당연하게도 움직이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고도가 그리 높지 않은 상황이라 고속 도로 좌우로 쌀알처럼 흩어진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는 시체들.
수십 중의 추돌 사고에서 용케 살아남았던 이들일 것이다. 그러나 고속 도로를 벗어나기엔 부상이 심각했고, 결국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천천히 죽어 갔으리라.
“차라리 즉사하는 게 나았을 텐데 말입니다.”
정우가 말없이 고속 도로를 응시하고 있자 동훈이 자신의 감상을 덧붙였다.
“예, 그랬겠죠.”
정우는 짤막하게 대답하고서 간만에 휑해진 헬기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짐도 많이 걷어 냈으니 앞으로 여덟 명 정도는 더 태울 수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쾌적한 비행은 어렵겠지만.
“대성 본부가 부산에도 큰 게 하나 있는데, 그곳까지 가실 생각이십니까?”
이번엔 용헌이 기내 채널을 통해 물어 왔다.
‘아, 이 사람 대성 출신이었지.’
정우는 자신의 전속 조종사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를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럼 용헌으로선 지금 자기 직장을 박살 내러 가는 상황 아닌가?
“글쎄요, 부산도 보통 혼란한 게 아닐 것 같은데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그 본부란 게 남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서울 쪽 상황부터 좀 보죠.”
무턱대고 부산까지 가기엔 아직 성역이 안정화되지 않아서 위험부담이 컸다.
또한 이 나라 남부에도 순위권 구원자가 하나쯤은 있지 않았을까?
대성이 서울에서 그랬던 것처럼 남부 지방에서도 정수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면 그 동네 구원자가 알아서 처신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태 겪어 본 지역이라고 해 봐야 이 나라 전체로 따지면 극히 일부일 뿐이야. 활동 반경을 넓히기 전에 내실부터 다져야 한다.’
아무리 1위 구원자라고 해도 전국의 진입로를 혼자 닫을 순 없다.
종래엔 순위권 구원자들이 구역을 나눠서 진입로를 폐쇄해야 할 것이다.
다만 지금은 너 나 할 것 없이 생존하기에도 벅찬 상태라 협력의 여지가 없었다.
정우 자신만 해도 순위권 구원자를 만난다면 죽일 생각부터 할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오히려 서로 마주치지 않는 게 공익을 위한 일일지도 몰랐다.
“대략 5분 뒤 서울 본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착륙지는 어떻게 할까요?”
용헌이 정우에게 착륙지 지정을 요청해 왔다.
이대로 그냥 본부를 향해 비행할지, 아니면 안전한 곳에 헬기를 숨겨 둘지 결정해 달라는 거다.
이에 정우가 조종석의 유리창으로 시선을 줬다.
근방에 진입로가 있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전해 보이는 지역도 없었다.
“그 본부란 게 고층 빌딩인가요?”
“지상 20층, 지하 5층 정도 됩니다.”
“그럼 옥상에 착륙해요. 저와 있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
정우의 말에 용헌이 고개를 뒤로 돌리려다 말았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29만 개의 정수를 삼킨 국내 1위 구원자.
적어도 이 나라에선 이 사내 곁보다 더 안전한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