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Style Savior Archetype RAW novel - Chapter 97
97화. 불가항력(1)
강남구 삼성동, 대성 그룹의 서울 특별 본부 16층.
두 사내가 창가에 서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제길, 맛이 너무 좋은 거 아니냐.”
쓴웃음을 짓고 있는 이 사내는 특수전단 3팀장 김형수.
비록 자판기에서 뽑아낸 것이긴 했지만 이 시국에 커피를 마신다는 건 엄청난 사치였다. 그리고 형수도 그걸 잘 알기에 이 순간을 즐겼다.
지금도 바깥의 누군가는 커피는커녕 물 한 잔 마시지 못하고 달리는 중일 것이다.
괴물이나 짐승 또는 같은 인간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서.
“예, 이 정도면 아주 양호합니다.”
형수의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눈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쭉 들이켰다.
특수전단 6팀장 박동원.
일상생활에서도 군대식 말투를 쓰는 게 그 나름의 유머 방식이었다. 실제로 군에 오래 몸담았던 인물이기도 하고 말이다.
“양호는 무슨…… 미친 새끼.”
형수가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서 슬쩍 웃자 동원의 눈매가 한층 크게 휘었다.
“그나저나 회의가 많이 길어지네요. 너무 시간을 지체하는 거 아닙니까?”
동원이 슬슬 진지한 화제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형수의 이마가 대번에 찌그러졌다.
“회사라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놈의 회의, 보고, 결재. 이게 뭔 뻘짓이냐.”
슥.
손목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9시 20분이었다.
오늘 아침, 성역이 선포됐다는 문구가 출현한 뒤로부터 1시간이 훌쩍 지나 버린 것이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신중히 대응해야 하는 일은 맞지만 현장에 직접 투입되는 실무자 입장에선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일단 사람부터 쫙 뿌려 두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거 아니야? 성역이 어디에 붙은 곳인지도 모르면서 방침은 무슨 방침이야.’
꾸득.
형수는 자신도 모르게 종이컵을 구겼다.
보고만 받는 ‘높으신 분’들은 알 턱이 없다. 저 바깥의 상황이 얼마나 빠르게 변해 가는지 말이다.
현장에서 마주치는 각성자의 수준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길에선 민간인을 결코 만날 수 없었다. 전부 피신처를 찾아 도시 구석구석 흩어진 탓이다.
이젠 특수전단 요원들도 어떤 임무를 나가든 무사 귀환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팀만 해도 북악산에 방문했다가 난데없이 구원자를 만나 궤멸하지 않았던가.
‘우리 예상보다 세상이 더 미쳐 돌아가고 있어.’
어쩌면 특수전단은 더 이상 강자 축에 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쪽이 콘크리트 벽을 믿고 곤히 자는 동안 저 바깥에선 무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 테니까.
“오늘이 3일째지?”
이건 이 사태가 시작된 이래 생긴 형수의 입버릇이었다. 회사원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알면서도 거듭 확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
그런데 왜인지 동원의 대답이 없다.
“왜?”
형수는 무심코 상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입에 종이컵을 문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동원이 눈에 들어왔다.
“뭔데 그래?”
불현듯 찾아오는 불길함.
그는 동원의 시선을 따라 유리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행히 하늘은 맑았다. 진입로 같은 게 나타나서 괴물을 쏟아 내고 있지도 않았고.
그러다가.
“어?”
마침내 작은 이물질을 감지했다.
점점 커지는 듯한 흰색 점.
헬기 한 대가 삼성동 상공을 가로질러 이리로 오고 있었다.
“보안실은 아니지?”
형수의 물음에 동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향도 다르고, 애초에 거긴 침투를 타고 갔습니다.”
아군은 검은색 헬기를 타고 나갔다는 소리다.
본부장의 지시로 여의도 쪽에 파견 나간다고 했으니 만에 하나 헬기를 바꿔서 돌아왔대도 저 방향에서 올 리는 없었다. 저긴 강동 방향이었으니까.
“그럼 저건…….”
‘저건 뭐야?’라고 물으려던 형수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뒤늦게 생각난 것이다. 블루 리스트에 적혀 있던 ‘구원자A’, 박정우의 세부 사항 말이다.
‘02호 흰색 의료 헬기 습득.’
리스트를 통째로 달달 외우고 있었기에 자신이 봤던 문장 그대로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정말 이상한데요.”
6팀장 박동원은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는지 관제실로 무전을 넣으려 하고 있었다.
그래도 헬기를 타고 온다면 대성 측 사람이거나 협력업체 관계자일 거라고 생각한 거다.
이에 형수가 그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동원아.”
“……예.”
“혹시 모르니까 일단 애들 모아서 옥상으로 올라가. 관제실엔 내가 알아보고 연락 줄게.”
박동원이 오전 동안 보안실장 대리를 맡기로 해서 가능한 주문이었다.
덕분에 동원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형수만이 조용히 침음을 흘렸다.
* * *
두두두두…….
프로펠러 소리가 요란하게 몰아치는 와중에 정우는 다소 허탈함을 느꼈다.
대성 측 본부에 너무 쉽게 진입해서였다.
물론 도심에서 대공포가 날아들고 하는 것까지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뭔가 대응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원래 이렇습니까? 누가 보면 여기가 제 회사인 줄 알겠습니다.”
정우의 말에 용헌이 뒤를 돌아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설마 정우 씨가 이리로 직행하리란 건 예상조차 못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용헌은 왜인지 송구한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봐도 특수전단까지 운용하던 대성치곤 너무 허술한 모습이었으니까.
내심 잔뜩 긴장하고 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래도 마중은 나온 것 같은데요.”
창밖을 바라보던 동훈이 이 헬기의 착륙 예정지인 빌딩 옥상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옥상에 마련된 착륙장 근처로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굳이 헬기를 격추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 아닐까요? 괜히 헬기가 건물에라도 처박히면 그게 더 손해일 것 같은데.”
동훈이 색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이에 용헌이 어깨를 으쓱했고, 정우는 잠자코 옥상의 사내들을 바라봤다.
‘12명.’
아직 정수량이 보일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지만 서 있는 자세만 봐도 잘 훈련된 자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일부는 총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
식욕이 돋았다고 해야 할까, 정우는 순간적으로 흥분했다.
무장하지 않았다는 건 총기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정수량이 많다는 뜻 아니겠는가.
성역에서부터 날아들 정수 청구를 원 없이 받아 주려면 정수를 얼마나 가지고 있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던 터다. 강력한 상대는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예전부터 느끼던 거지만 대성에게 빚을 많이 지는 것 같네.’
헬기가 착륙을 시도할 때쯤 되자 비로소 저쪽에서도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 같았다.
몇몇이 서로를 쳐다보며 무어라 말을 주고받더니 갑자기 헬기를 향해 정수를 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츠즈즛! 츠즛!
기체를 감싼 보호막에서 파열음 같은 것이 나긴 했지만 표면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명일이나 태휘 같은 사람이 ‘괘, 괜찮은 겁니까……?’라고 물어 왔겠으나 지금 기내에 있는 일반인은 동훈과 용헌 둘뿐이었다.
무려 우주가 정해 준 주치의와 대성의 배신자.
헬기가 정수 파동으로 샤워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제대로 뽑아 왔구나.’
정우는 내심 감탄했다.
퉁!
이윽고 헬기가 옥상에 내려앉았다.
“연료 저장고는 저쪽에…… 있습니다.”
착륙을 마친 용헌이 옥상 구석의 컨테이너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거칠게 싸우더라도 저곳만큼은 보존해 달라는 뜻이었다.
“예, 상황이 정리되면 급유부터 시작하세요.”
정우는 이 말을 하면서 헬기 문을 힘껏 젖혔다.
드르륵!
그러자 세찬 바람이 기내를 마구 쑤셨고, 동시에 헬기를 공격하고 있던 사내들의 얼굴이 시야에 들이박혔다.
하나같이 겁에 질린 표정.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들이 죽고 난 뒤에 벌어질 일이었다.
대성이 붕괴하면 이 지독한 세계로부터 누가 가족을 지켜 줄 것인가? 인류의 미래는 누가 보장해 주나?
“씨발!”
보안실장 대리로 이 자리에 와 있던 6팀장 박동원이 욕을 내뱉었다.
김형수가 서둘러 자길 이리로 올려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이 개새끼! 지 처자식만 건지러 갔구나.’
본부의 맞은편 아파트가 바로 대성 그룹의 직원 숙소다. 동원을 포함해 이 자리 모두의 가족도 그곳에 있었다.
“이봐, 잠깐!”
동원이 손을 내보이며 헬기 안을 향해 무어라 이야기하려는 순간.
파앗.
짙푸른 정수 파동이 현장을 뒤덮었다.
푸아아악!
살점이 파열하는 소리가 동원의 귓가를 긁었고, 이내 푸른빛이 사라졌을 땐 현장을 꽉 채우고 있던 요원들도 싹 사라져 있었다.
남은 건 넷…… 정도인 것 같다.
‘미, 미친! 영상보다 훨씬 강하잖아.’
동원은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에 숨을 헐떡이며 뒤로 물러섰다.
북악산에서 2팀이 전멸하던 영상은 그도 봤다. 당시에도 상대가 보통이 아님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 이건 상식을 초월할 정도였다.
방금 요원 12명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 반격까지 해낸 거 아닌가?
정수 운용의 원리를 안다면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툭.
휑해진 착륙장 위로 운동화의 고무 밑창이 가볍게 닿았다.
대성이 ‘구원자A’라고 기록해 둔 박정우가 그들의 머리 위에 발을 딛는 순간이다.
“티, 팀장님……!”
이미 기세가 꺾인 나머지 요원들은 정우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뭔가 해 주길 바라며 동원을 바라봤다.
그러나 팀장이라고 다를 게 있겠는가.
‘제기랄.’
동원은 헬기에서 내려온 구원자가 당장 이쪽을 죽이지 않는 것에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아직 대화의 여지가 있는 것 같다고.
그리고 정말로 정우가 입을 열었다.
“마저 해요. 아까 하려던 말.”
사실 정우는 성역에서 선웅에게 가르쳤던 그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상대에게서 진실을 듣고 싶거든 압도적인 힘을 먼저 보여 줘라.
“저, 저희는 그냥 총알받이입니다. 본대는 이미 도망 중이에요. 지금 빨리 가시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필요한 거, 다 드리겠습니다.”
동원은 필사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전투태세를 완전히 풀지도 않았다.
상대가 이쪽을 살려 둘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저 많은 정수가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본대?”
정우는 이 말을 하며 발치의 패스파인더를 바라봤다.
정말로 정수 표식이 동쪽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슥.
그가 표식을 따라 고개를 끝까지 돌리자 자연스레 큼직한 아파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긴 뭡니까? 숙소인가?”
“……!”
정우의 이 말에 동원이 화들짝 놀랐다.
‘이…… 이 새끼 지금 뭐 하는 거야?’
설마 독심술이라도 하는가?
동원으로선 결코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저기엔 본인의 가족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다른 요원들도 마찬가지.
“어떻게든 막는 게 맞습니다! 이대로 보내선 안 돼요!”
팍!
결국 요원 하나가 이를 악문 채 정우에게 달려들었다. 사실상 자살행위였다. 시선을 끌어서 나머지에게 공격 기회를 주려는 거다.
하지만 남은 요원 중 전투 경험이 가장 많은 동원은 이게 개죽음이 될 거란 걸 알았다.
그래서 부하의 투신에 호응하는 대신 아주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슈아아앗!
보유한 정수 4만3천 개 전량을 투사체로 빚어서 쏘아 보낸 것이다.
다름 아닌 맞은편의 아파트를 향해서.
“어!”
막 공격에 합세하려던 다른 요원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다 이내 팀장의 의도를 깨닫고는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일종의 긴급 경보인 것이다.
관제실로 무전을 쳐 봐야 회의 중인 윗분들부터 대피시킬 테니 숙소에 직접 경고하는 방법을 택한 것.
반면 정우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안 닿을 텐데.”
“뭣……?”
동원이 되묻는 사이 첫 번째 투신자가 증발했다.
푸아악!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요원이 달려들었지만 정우는 마치 벌레 잡듯이 그들을 쳐 냈다.
“4만 개론 어림없다고요.”
“설마.”
아무리 적이지만 정수에 관해선 통달한 인물일 터.
동원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자신이 정수를 쏘아 보낸 방향을 곁눈질했다.
그러자 마침 색이 흐려지기 시작한 투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더니 곧.
삿.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
동원의 목 안쪽에서부터 처참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만약 8만 개를 가지고 있었다면 저편에 경고라도 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16만 개?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젠 상관이 없게 됐다.
그의 시야는 이미 푸른빛으로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