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04)
학생회장 선거전 下 (5)
학생회장 선거가 성큼성큼 다가오면서 학사 분위기도 점점 더 고조되어 간다.
어떤 후보들이 나올지에 대해서는 학생들 사이에서 이미 어느정도 윤곽이 잡혀있는 모양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페니아 황녀에 대한 관심사는 하늘을 찌를듯 해, 학업 말고는 관심이 없는 학생들마저도 페니아 황녀의 출마 선언은 기다리고 있을 지경이었다.
“오늘 오전을 기점으로 로르텔 케헬른이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호위 기사 클레르가 가져온 정보에 페니아 황녀 또한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엘테 상회의… 로르텔 케헬른이요…? 본인이 직접 말이에요?”
“예.”
페니아 황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함을 드러냈다.
로르텔 케헬른은 물밑에서 활동하는 뒷세계의 실권자이지, 이렇게 전면에 드러나는 자리를 차지하려 드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거기다 엘테 상회의 실무를 보고 있는 로르텔이다. 업무량이 많은 학생회장직까지 겸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정말로 학생회장직에 오른다면, 상회 쪽 업무는 거의 보지 못한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로르텔 성격에 그런 선택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르의 정보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이중 삼중으로 검증된 정보만을 엄선해서 들고 오기 때문이다.
“심상치 않네요… 확실한 건, 안 그래도 생활동 권역을 꽉 잡고 있는 그녀가 학생회장직까지 차지하게 된다면… 이 실베니아 안에서는 그야말로 왕처럼 군림할 수 있게 될 거라는 점이군요. 그건 되도록… 막고 싶네요.”
“황녀님께서라면…”
“하지만… 전 학생회장이 될 마음이 없어요.”
페니아 황녀는 클레르의 진언을 딱 잘라내었다.
황족 숙소 개인실의 으리으리한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이윽고 페니아는 결론을 내렸다.
“내빈용 객실에 있는 타냐양을 만나러 가야겠어요.”
*
“언제까지고 숨어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에요. 타냐양.”
황족 숙소의 1층에서도, 복도를 깊숙이 들어가 몇 번이나 꺾어야 나오는 내빈용 객실.
그곳은 청소하는 사용인들이 아닌 이상에야 그 누구도 들어와 볼일 없는 외진 공간이었다.
제국의 외곽에 떨어져있는 아켄섬의 지리적 특성상, 묵고 갈 정도로 귀한 내빈이 행차하는 경우는 잘 없다. 따라서 내빈용 객실은 건축 관례상 지어졌을 뿐 그 역할을 다하고 있진 못했다.
그래도 도망쳐온 타냐의 보금자리 정도는 되어주었으니,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완전히 낭비까지는 아니었던 셈이다.
페니아 황녀가 방 안에 들어갔을 때에는, 타냐는 테이블에 가만히 앉은 채 부르르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페니아 황녀님…”
“생전 에드 로스테일러가 로르텔 케헬른과 얼마나 각별한 사이였는가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어쨌든 그 상인은 작정하고 타냐양을 확보할 생각처럼 보였거든요.”
언제나 에드 로스테일러를 옹호하던 로르텔의 모습은 페니아 황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둘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로르텔에게 있어서 에드는 꽤 의미가 깊은 인물이 아닐까 하는 유추까지는 할 수 있었다.
“어쨌든 타냐양이 뭘 하려든 간에, 일단 에드 로스테일러를 살해했다는 혐의부터 벗어야 해요.”
“하지만… 제가 생각해도 이 정도의 정황 증거가 모여있으면 제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썩… 좋은 상황은 아닌 셈이에요.”
“…그럼, 타냐양의 의견을 물을 수 밖에 없겠네요.”
페니아 황녀는 윤기가 흐르는 백금발 머리칼을 한 켠으로 쓸어넘긴 채, 타냐의 맞은 편 테이블에 와 앉았다.
불타는 듯한 금발에 이목구비까지 에드 로스테일러를 빼닮은 소녀를 보고 있으면, 그녀의 과오를 주워담기도 전에 어이없이 죽어버린 그 남자가 다시금 떠오른다.
그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같은 과오를 반복할 수 없다는 뜻을 다짐할 수는 있었다.
“타냐양이 에드 로스테일러를 죽이도록 교사한 게 아니라면, 대체 누가 주도한 것일까요?”
그 질문은, 페니아 황녀가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품고 있었던 의문과도 맞닿아있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깊고도 깊은 어둠. 그 편린이라도 발견해 채낼 수 있다면… 타냐를 도운 일이 아예 무의미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타냐는 시선을 내리깔고 머뭇거렸다.
살인범으로 지목당한 카덱과 녹스는 로스테일러 가문의 오랜 가신이다.
가신이라는 신분은 단지 개인이 아니라, 가문의 위광을 등에 업고 있는 존재들이란 뜻이다.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 행동거지 하나하나까지 조심하도록 교육 받는 자들이기도 했다.
그런 자들이 가문의 뜻과 전혀 무관한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몇프로나 될까.
심지어 파견된 신분으로 이 아켄섬이라는 타지까지 와서, 과거 자기들이 섬기던 도련님을 직접 찔러 죽일 정도라면… 독단은 절대로 아니다.
일이 꼬여서 범죄 행각 자체는 들통나고 말았지만, 어쨌든 그런 살인을 지시한 흑막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 건…. 아마…”
타냐 또한 알고 있다. 자신이 지시하지 않았다면… 카덱과 녹스에게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지시할 수 있을만한 인물은 많지 않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까지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존경해 마지 않는 아버지, 크레핀 로스테일러다.
그가 아니면 카덱과 녹스로 하여금 에드 로스테일러를 죽이도록 명령할 수 있는 자는 없다.
“…”
망설이는 타냐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페니아 황녀는 그 배후를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었다. 애초에 페니아 황녀 또한 한 없이 어두운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속내를 의심해왔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기서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평생을 믿고 따르던 아버지가 그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했다는 사실이… 타냐에게는 바로 수긍하기는 힘든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카덱과 녹스가 이 실베니아에 온 이유… 저를 보좌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명분일 뿐이고.. 실상은 에드 오라버니를 죽이기 위해서였군요.”
문득 생각 정리가 끝났는지, 타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타냐양…”
“저는 단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던 거네요.”
타냐는 고개를 푹 수그린채 조용히 이야기했다.
그러고보면 타냐의 일생은 늘 그런 식이었다.
매사 스스로 판단해 무언가를 이루어낸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철든 뒤로는 어딘가 맛이 가버린 에드의 폭정 아래에서 힘을 가다듬어 왔다.
이 실베니아에 온 뒤로도 한 것이라고는… 오로지 로스테일러의 위광에 업혀 마치 뭐라도 이뤄본 사람인 양 콧대를 높이고 다니는 것 밖엔 없었다.
타냐의 삶에 있어서 로스테일러라는 뒷배가 없었다면, 온전히 그녀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애초에 귀한 집의 영애로 태어났다는 걸 제하면 그냥 조금 공부를 많이 했을 뿐인 그 나잇대의 소녀일 뿐이다.
그 사실이 다시금 뼈저리게 사무쳐, 고개를 숙인 채로 코끝을 훌쩍였다.
그래도 시답잖게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이윽고 다시금 고개를 빳빳이 든 채 페니아를 바라보는 모습에는, 겁 먹은 듯한 기색은 꽤 많이 사라져 있었다. 억지로라도 눈물을 참아내고 굳건한 표정을 지어보려고 하는 것이 페니아에게는 정말 인상 깊었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인간이란 하나 같이 거만하고 탐욕스러워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그런 편견에 빠져 에드를 떠나보낸 페니아다. 이젠 타냐의 저런 모습까지 보고나니… 조금씩 그녀의 심리에 내재되어있던 로스테일러에 대한 편견이 허물어져 간다.
“저는 역시… 학생회장 선거에 나갈게요. 페니아 황녀님.”
“쉽진 않을 거에요. 살해혐의까지 뒤집어 쓴 상태잖아요.”
“맞아요, 쉽진 않겠지만… 이렇게 궁지에 몰린 저를 도와주신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저는 이렇게 주눅들어 있기만 해서는 안 돼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쥔 채 허리를 빳빳이 편 타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에드 오라버니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던 아버님이에요. 갑자기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계기는 아마… 제가 근황을 알리는 편지에 오라버니에 대한 내용을 썼기 때문일 거에요.”
“…그렇다는 건…”
“네, 맞아요. 어떻게 보자면… 에드 오라버니가 그렇게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건 바로 저에요.”
물론 그걸 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냐는 그냥 평소처럼 근황을 알렸을 뿐이다.
그게 에드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될 거라는 예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펼쳐진 상황은 이렇게 되었다.
“실베니아에 와서 확인한 것이 있어요. 이제는 세상에 없는 오라버니지만, 이 배움의 땅 실베니아에서 많은 것이 변해 있었어요. 오라버니가 세상을 뜨는 그 날까지 저는 끝끝내 그 의심을 놓지 못했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 있어요.”
에드의 캠프에 찾아가 차를 대접받던 때를 떠올려 본다.
끝끝내 에드라는 사람의 심성을 믿지 못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치우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럽다.
배움의 땅 실베니아에 와서, 학업에 정진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비로소 예전처럼 멀쩡해진 듯한 에드의 느낌. 너무 갑작스러워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타냐에게 다정히 대해주는 에드 로스테일러를 향해 살가운 미소 한 번 지어주지 못했다.
그 죽음의 계기조차 자신이라고 한다면, 그건 자신이 업고 가는 수밖에 없다.
그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남아, 에드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만이 망자가 된 그에게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타냐의 눈에 의지가 돌아온다. 공허하던 눈동자도 어느정도 제 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로르텔 선배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제게 함부로 그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권력을 손에 쥘 거에요. 적어도 이 아켄섬 안에서만큼은… 함부로 절 위협할 수 없을 정도로요.”
“지금 상태로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는 건… 굉장히 불리할 거에요. 무엇보다 살인 교사 혐의로 학사 조사를 받아야하는 상태니까요.”
“아직 ‘혐의’이고 ‘용의자’일 뿐이지, 제 혐의가 확정된 건 아니잖아요. 엄밀히 말하면 아직 전 범죄자가 아니에요. 당장 이 은둔 생활을 끝내고 조사만 잘 받으면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지 못할 이유도 없고요. 애초에 카덱과 녹스가 묵묵히 입을 닫고 있으니, 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제 혐의가 확정이 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물론, 규정상 학생회장 선거의 후보자가 될 수 있냐 없냐의 문제만으로 끝나진 않는다.
살인 혐의가 달려 있다는 것은, 선거전에 있어서 후보자로서 말도 안되는 흠결이 될 것이다. 그런 흠결을 달고 학생회장 자리에 도전하겠다는 건 지나친 오만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타냐의 표정에는 의지가 살아있었다.
페니아 황녀는 그런 타냐의 모습을 보자 은은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럼 제가… 공식적으로 타냐 양을 지지해드리도록 할까요.”
페니아 황녀의 공식적인 지지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를 타냐가 모를 리가 없다.
그와 동시에 페니아 황녀가 정치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지게 될거란 사실도… 명약관화하다.
타냐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페니아를 쳐다보자, 신경쓰지 말라는 듯 페니아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또한 생전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못 갚은 빚이 있거든요.”
지그시 감은 눈에는 많은 뜻이 내포되어있다.
그 잔악한 상인에게 이 학교가 통째로 넘어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다는 점.
궁지에 몰린 타냐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죽은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결국 사과하지 못했다는 부채의식까지 동해… 페니아로 하여금 타냐의 손을 들게 만든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과, 타냐 로스테일러의 연합이었던 것이다.
* [ 지, 지금쯤 말을 걸어봐도 될까요? ] [ 가만히 놔둬라, 좀. 머그 네가 참견할 일이었으면 진즉에 널 부르셨겠지. ] [ 하지만… 벌써 두시간 째 바위에 앉아서 미동조차 없으시잖습니까. 곧 있으면 밀물 때인데, 슬슬 동굴쪽으로 들어가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 [ 에드 도련님이 바보인 줄 아나. 물 들어오면 알아서 움직이시겠지. ]
레이시아와 머그가 티격태격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생각하며 가만히 앉아있었던 탓일까, 정령들도 슬슬 이상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정령이라고 해서 항상 주변을 상주하는 것은 아니다. 유체 상태가 되어 주변을 떠돌거나, 아예 자립심 강한 고위 정령들은 따로 활동하기도 하니… 이처럼 긴 시간을 붙어 있는 정령들도 생각보다 흔치는 않은 것이다.
머그와 레이시아는 딱히 어디 가는 일 없이 거의 내 주변에서 맴돌았으므로, 내가 묘한 낌새를 보이면 저렇게 소곤거리고는 했다. 반면 메릴다는 그냥 주변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이 섬 전체가 제 것인양 돌아다니는데, 또 중요할 때는 휙휙 나타나주니 큰 상관은 없긴 하다.
“흠…”
내가 한참동안 바위에 앉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로르텔과 나누었던 대화다.
– ‘저는 학생회장 자리를 팔아치울거에요.’
– ‘쉽지 않은 여정이겠지만, 들인 노력만큼이나 돌아올 이익도 크거든요.’
3막 2장, 학생회장 선거전.
내 기억이 맞다면… 3막 중간보스인 ‘재앙의 연금술사 클로드’ 토벌전을 앞두고 겪는 징검다리 에피소드다.
주인공 테일리의 주변 인물 구도가 격변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나리오인 것이다.
악역 타냐 로스테일러는 페니아 황녀와의 경쟁 구도를 끝까지 유지하며… 결국 처참히 패퇴한다.
보스랍시고 나오지만 딱히 전투 장면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학생회장 선거전은 철저하게 학사 내부의 권력 경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 테일리는 페니아 황녀의 세력을 적극 지지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테일리는 학기 초에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된통 당했다. 그런 테일리가 로스테일러 가문의 인물들에게 항상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따라서 타냐 로스테일러를 상대로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타냐 또한 거만한 악역영애로서 소모되는 인물이고 말이다.
어쨌든 테일리는 페니아의 편에서서 학생들을 설득한다. 당연히 시나리오상 전교생을 설득하고 다니는 무모한 짓을 시킬 리 없다. 플레이어에게 그런 짓을 일일이 시키고 있으면, 지루해서 다 떨어져 나가버릴 것이다.
그래서 시나리오에서 테일리가 하는 일은… 각 학년의 수석들을 만나며 페니아를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일이었다. 시스템적으로는 각 학년 수석들의 지지여부가 결국 후보의 당선 여부를 가르는 변수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렇게 총 설득 가능한 인원 8명 중 5명 이상을 설득해내면 페니아가 당선되고, 타냐는 꼴사납게 저항하다가 끝끝내 추한 모습으로 낙선하게 되는 것이다.
설득 과정에서 각 인물 별로 요구하는 갖가지 서브 퀘스트를 깨게 되는데, 각 학생들이 요구하는 퀘스트 조건이 모두 다르다. 은근히 머리 아픈 파트였던 기억이 남아있다.
“일단 수석 학생들의 지지가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나는 그리 혼잣말을 내뱉고, 턱을 몇 번 다시 쓸었다.
설득 가능한 인원은 각 학년의 중도파 2명씩으로 정해져 있다.
1학년 마법부 수석 요제프, 연금부 수석 클로드.
2학년 전투부 수석 클레비어스, 연금부 수석 엘비라.
3학년 전투부 수석 드레이크, 연금부 수석 아탈란테.
4학년 전투부 수석 다이크, 마법부 수석 트레이시아나.
이 8명 중 5명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선거 승리의 핵심 조건이었다.
1학년 전투부 수석 웨이드는 이미 페니아 황녀를 지지하고 있고, 4학년 연금부 수석 도로시는 이미 타냐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논외다.
또한, 2학년 마법부 수석 루시와 3학년 마법부 수석 예니카는 끝끝내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았었다. 루시는 귀찮아서. 예니카는 완전 중립이라서.
“흠…”
정사대로라면 그리 흘러갔어야 했지만, 실상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고 나니 당연스럽게도 이리저리 비틀려 있다.
1막에서부터 조금씩 생겨난 균열은, 3막에 이르러서는 걷잡을 수도 없이 그 눈덩이가 불어나 있다. 선거 구도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 지금 시점에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대로 철저하게 흘러가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다만, 후일 크레핀 토벌전에서 큰 도움이 될 페니아 황녀가 권력을 잡아주는 것만큼은 원래 구도대로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잘한 흐름까지 다 맞출 수는 없어도, 후일을 대비할 큰 흐름 만큼은 맞아떨어져 줘야 내 입장에서도 편했다.
다만… 로르텔이 한 말들은 도저히 흘려넘길 수가 없었다.
– ‘저는 일단 타냐를 학생회장으로 만들 거에요. 무슨 수를 써서든.’
굽이치는 파도를 배경삼아, 연갈색 바위에 앉아 무릎을 안고서는 빙긋하고 미소를 짓는다.
그 속내에는 능구랑이가 수천마리는 들어차 있을 것이 분명한, 엘테 상회의 거상이다.
왜 타냐를 학생회장으로 만드려는 거냐고 묻자, 기억 속의 소녀가 답한다.
– ‘그야, 선배님 동생이니까요.’
그 대답은 로르텔이 머릿속에서 짜맞춘 모범 답안일 뿐이다.
로르텔의 꿍꿍이는 언제나 여기서 끝인가 싶으면 더 깊은 부분이 남아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상황을 좌시하고 있을 순 없는 것이다.
허나… 무슨 수를 취해야할지도 애매하다. 일단 지금의 나는 공식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 부질없는 죽은 척부터 빨리 끝내야만, 여러모로 움직이기 편해질 듯 하다.
*
“관련 제출 서류들 여기에 모아놓았습니다. 정말로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셨군요, 로르텔 회주 대리.”
“어머, 고마워요. 리엔나 비서. 거기 두고 가면 돼요.”
로르텔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며, 붉은 머리를 한 귀염상의 비서에게 간단히 지시했다.
대부분의 일을 비서 없이 직접 처리하는 로르텔이기에, 엘테 상회 실베니아 지부의 말단 직원인 리엔나는 업무를 받았을 때 별 일이다 싶었다. 확실히, 학생회 선거 관련한 업무까지 로르텔이 도맡아 하기에는 그 업무량이 너무 많았다.
의아한 점은, 그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학생회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정말 당선이라도 되면 상회 일을 때려치기라도 할 생각인 것인가.
“로르텔 회주 대리. 저…”
“쓸 데 없는 질문은 하지 말자구요.”
리엔나가 뭘 궁금해하고 있는지 다 간파하고 있는 것처럼, 로르텔은 서류를 넘기는 손을 멈추지 않으면서 지그시 대답했다.
“어차피… 학생회장 같은 거 할 마음 없어요.”
“예? 그럼 이 서류들은…”
문득 휙휙 서류 위에서 춤추던 로르텔의 손이 멈췄다. 가만히 서있는 깃펜 밑으로 잉크가 조금씩 퍼져나간다.
“질문은 필요한 것만 할래요?”
세상에서 가장 자애롭고 아리따운 미소지만, 리엔나는 문득 소름이 돋아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얼른 집무실 문을 닫고 나갔다.
홀로 남은 로르텔은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깃펜을 움직인다.
“어차피… 다~ 알게 되는데…”
타냐 로스테일러는 로르텔을 두려워하고 있다. 겉보기에 로르텔은 타냐가 에드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포지션을 유지하고, 대놓고 보복을 암시하면서, 로르텔은 타냐를 압박하는 ‘채찍’이 된다.
반면, 페니아든 타냐든 간에… 그들은 공식적으로 사망한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묘한 부채의식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 남자의 진심어린 모습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모질게 대하며, 끝끝내 죽는 그 날까지 그대로 방치하고 말았다는 심리적 부채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둘의 성격적인 기질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대로 남겨두고 부채질하면, 둘의 의식 안에서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사내의 존재는 점점 더 각별해지고, 손댈 수 없는 성역 같은 것으로 발전하리라.
그럼 에드 로스테일러가 생환했을 때, 쌓여있는 부채의식과 보상심리가 그제서야 개화하면, 그 둘에게 있어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남자의 인정과 행동은 거부하기 힘든 ‘당근’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부채감을 자극하면, 결국 정신을 차려보면 모두 에드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는 상황까지 몰아갈 수 있다. 사람 심리란 궁지에 몰릴수록 그렇게 더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를 위한 채찍이 바로 로르텔 자신이다.
반발감과 인정을 오가며 손아귀 위에서 누군가를 정복하고, 자신에 맞게 조율해가는 처세술.
채찍과 당근을 모두 손에 쥐고, 조금씩 차기 학생회장을 제 손아귀 안으로 밀어넣는 모습은 마치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인형사 같다.
상도의 세계에서 사람 사이를 조율하며 살아온 세월이 인생의 절반이다. 질척질척한 권력싸움은, 이제 로르텔에게는 숨쉬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
“있잖아, 벨.”
“24일 하고 3시간 남으셨습니다.”
“…”
이제는 자동 응답 장치처럼 대답부터 튀어나오는 벨이었다.
그러나, 날짜는 줄어들지 않는다.
루시는 개인실 의자에 무릎을 안은 채 앉아서, 비스듬하게 의자를 딸깍대고 있었다.
-쿠당탕!
이윽고 균형을 잃고 엎어졌다. 바닥에 하릴없이 쓰러져서 천장을 올려다보지만, 여전히 세상은 미동조차 없다.
“죽여줘………….”
“그럴 순 없습니다.”
“죽여줘………!!!”
다시는 감정에 휩쓸려 난동을 피우지 않으리라 반성하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치러야할 죗값이 아직도 3분의 2나 남아있었다.
묵념.
“…”
점잖게 서있는 메이드장 벨의 얼굴만이, 세상 속이 후련하다는 듯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루시는 그 얼굴이 너무나도 야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