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06)
학생회장 선거전 下 (7)
-화아악!
거대한 창은 가로로 한 번 크게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격풍을 일으킨다.
자세를 낮추고 무게중심을 아래로 잡아, 몰아치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리지 않도록 버텼다.
“갑니다.”
그나마도 공격조차 아니었다. 직스는 저 거대한 창을 그저 고쳐잡은 것 뿐이다.
그대로 허공에서 몸을 박차더니, 내가 서있는 바로앞에 착지한다. 그와 동시에 몸을 한바퀴 돌리며 휘두른 창의 궤적은 커다란 반원을 그린다.
받아낼 수 없는 위력이다. 흘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나는 바닥에 거의 몸을 붙이다시피 하며 첫 일격을 피하는데 성공했지만, 너무 회피 동작이 커서 반격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기세는 여전히 직스 쪽에 있었다.
그대로 창을 한 번 고쳐잡더니, 이번엔 자세가 완전히 낮아져서 회피하기 힘든 나를 향해 엄청난 속도의 찌르기가 들어온다.
피할 여력이 안된다. 그렇다면 최대한 피해가 없는 방어 수단을 강구해야만 했다.
-파앗
-푸욱.
순식간에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판단이 끝났는지, 수원발현으로 피어난 근처 물웅덩이 속에 숨어있던 암사자 레이시아가 튀어나와 직스의 창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것은 막았다기 보다는 대신 찔렸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다.
커다란 포효 소리, 그리고 피어오르는 물보라와 함께 레이시아의 소환이 강제로 해제되었다.
“큭!”
귀를 찌르는 포효 소리에 눈을 찌푸린 직스는, 제 몸을 바쳐서까지 움직임을 저지하던 사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해냈다. 아주 약간의 틈을 벌기 위함이다.
저렇게 큰 창은 공격 범위도 어마어마하게 넓고, 위력도 엄청나서 상대하기 까다롭지만… 가까이 달라붙으면 오히려 공격하기가 까다로워지는 약점이 있다.
레이시아가 만들어낸 아주 약간의 틈에 재빠르게 파고든 뒤, 직스의 창으로는 공격하기 까다로운 근거리 난타전을 유도했다. 일단 단검을 들고 파고 드는데 성공했다면, 상대는 창이 가지는 이점을 제대로 활용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직스는 모든 실전 상황에서 최선의 대처를 해내는 결투의 대가다.
– 카앙!
피어오르는 마력이 비어있는 직스의 왼손에 모여들더니, 적당한 길이의 아밍소드가 되어 내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막아낸다.
제 몸보다도 커다란 창을 오른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면서, 파고든 적에 대한 근거리 대응은 왼손에 들린 검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나는 혀를 차고 마력을 모아 ‘발화’ 마법을 구현해냈다. 피어오르는 불길이 직스와 나 사이를 갈랐다.
그러나 직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창을 한 번 크게 휘둘러, 마력으로 구현해낸 불길을 자기 마력을 덧씌워 진화시켜버린다.
“상대의 시야를 가리고 다른 방향으로 허를 찌르는 공격을 주로 구사하시는군요.”
역량의 차이를 기교로 메우는 꼼수는 널리고 널렸다. 허나 그런 것들로 근본적인 힘의 차이를 좁히는데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나 직스는 그런 눈속임이 거의 통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한 상대다.
처음 한 번이야 상대의 싸움 스타일을 몰라서 허용했다고 쳐도, 두 번 세 번 부터는 완전히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어쭙잖게 심리전을 거는 것보다는, 화력 차이로 찍어누르는 것이 에드 선배님 같은 스타일을 상대할 때는 확실하죠.”
다시금 직스의 몸에서부터 구현된 마력이 무기들을 만들어낸다. 단검부터 투핸디드 소드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온갖 종류의 검들이 허공을 부유하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고위 마법 ‘마나 무장 ? 검무’. 기본이 되는 고위 마법 마나 무장에 염동계 마법이 접목된 응용 마법이다. 구현된 무기들은 굳이 술자의 손을 타고 휘둘러지는 게 아니라, 제 혼자서 허공을 춤추며 상대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 카앙! 카앙!
얼추 스무개가 넘어보이는 검들이 한 데 모여 달려들었다.
핵심 전력인 암사자 레이시아를 잃은 상태다. 지금에 와서는 마력 소비도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썩 좋은 상황은 아니다.
그래도 저 수많은 검들의 공격 중에 하나라도 맞으면 바로 승부는 끝이난다. 나는 이를 악물고 온 몸의 마력을 끌어내어, 다시금 혼신을 다해 중위 불 마법 ‘일점 폭발’을 발현해냈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다.
모든 검을 전부 없애두지 않으면 반드시 허를 찔린다. 그러므로 거진 스무 번이 넘어가는 일점 폭발을 한 번에 구현해내, 직스의 검들을 하나 하나씩 짚어 순식간에 터뜨려버렸다.
– 콰광! 콰광! 카가가가가가각!
중위 마법 ‘일점 폭발’은 시전 속도가 말도 안되게 빠른 대신에 마력 효율을 포기해야만 한다.
즉, 들인 마력에 비해 위력은 그리 강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일반인이라면 일격에 치명타를 입게 되겠지만, 전투 상황을 상정한 적이라면 이 일격에 나가떨어지는 일은 드물다.
그렇게 효율이 구린 기술을 수십번을 연사했으니, 자연스럽게 마력은 바닥이 보이기 시작한다.
-후우우우우욱
그리고 그 사실을, 마법부 차석인 직스가 캐치해내지 못할 리가 없다.
폭발 마법으로 인해 피어오른 연기 사이에서 날아드는 찌르기. 시야가 완전히 탁 트인 상황이 아니었기에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 파악!
빗나간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그 창대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서로 간에 손이 파르르 떨리는 가운데 잠깐동안 힘겨루기가 이어진다.
“마력이 바닥나셨군요. 기초 방어 마법을 구현할 마력조차도 남아 있지 않으신 겁니까. 확실히 그럴만 합니다.”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럼 이만 끝내겠습니다.”
직스는 이를 악문 채 양손으로 창대를 휘둘러서 내 손을 뿌리쳤다. 그대로 나가떨어진 내 몸은 잠시 허공을 부유하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가까스로 착지했다.
직스가 다시금 고위 마법, 마나 무장을 통해 수많은 무기들을 구현해낸다. 염동 마법까지 익힌 직스가 저 수많은 검들이 춤추는 사이로 창질을 해대면… 단순 근접전으로는 그 누가와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상대인 나는 마력이 동난 마법사다. 이제 기초 마법을 쓰는 것 조차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해야한다. 사실상 승부는 이미 끝나있었다.
대련은 언제나 진지하게 해야하는 것.
직스의 그런 성격을 반영하듯, 그는 승리를 결정지을 마지막 일격을 시전했다.
연습은 언제나 실전처럼. 제 아무리 역량의 차이가 나는 상대라 할지라도 절대로 얕보지 않고, 상대를 인정하고, 반드시 최선을 다할 것.
그런 직스의 태도가 인상이 깊어서… 나는 결국 마지막 수단까지 꺼내들었다.
– 파아아앙!
“뭣…”
나는 품속에서 ‘충격 강화 파동구’를 꺼내 꽉 쥐어서 터뜨렸다.
분명 내 마력은 바닥이 나 있는 상황이건만, 나를 중심으로 거대한 힘이 발산되어 직스가 구현한 검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마공학용품의 위력이다.
– 화아아아악!
이번 대련에서 나는 마공학용품을 단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굳이 그런 외부 수단까지 동원해가며 구질구질하게 이기려 들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저렇게까지 진심으로 임해준다면, 나로서도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동원하는 것이 예의에 맞다.
“이 정도 가지고는…!”
직스가 구현해낸 염동검은 모두 파동에 날아갔지만, 직스 본인의 몸을 날려버릴 정도의 파동은 구현해내지 못했다. 내 마력 감응에도 한계가 있는 고로, 내가 만든 마공학 용품으로 구현해내는 파괴력도 그 정도 수준을 넘어서긴 힘들다.
“일단 한 번… 유효타만 들어가면…!”
직스의 전투 경험이 직감적으로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마력이 바닥난 마법사. 방어 마법조차 펼칠 수 없는 상대.
일단 접근을 허용하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한다. 그 사실을 여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직스는 창을 든채 파고든다.
거기서, 내 마지막 수를 꺼내들 차례가 된다.
– 카아아앙!
그렇게 직스의 공격은 방어 마법에 막혔다.
“뭐…?”
그럴 수 있다.
직스의 일격은 어지간한 마력 효율 가지고는 원만하게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지만, 그래도 많은 마력을 투자하면 내 수준의 방어 마법으로도 한 번 정도는 튕겨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공격할 마력조차도 없었는데, 어떻게 방어 마법을 구현해냈냐는 것이다.
“흐읍!”
꽉 쥔 주먹 속에 있는 것은, ‘글래스트의 불사조 반지’다.
지금 시점에서 내 최대 전력은 고위 바람 정령 ‘메릴다’를 현현 시키는 것이다.
글래스트의 불사조 반지를 통해 마력을 당겨쓰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당분간 마력은 한 톨도 쓸 수 없는 패널티에 빠지게 되겠지만 말이다.
연습 대련에서 그 정도 패널티를 감당해가면서까지 메릴다를 다룰 이유는 없다.
다만, 고위 바람 정령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언제나 ‘현현’이라는 극단적인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령들은 현현해서 싸우는 것만이 정령사를 돕는 유일한 방법이라 알고 있는 학생들이 많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정령식 따위를 발현해 어딘가에 부여함으로써 제 능력의 일부를 정령사가 손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상시 발동 스킬로 전투를 보조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령 고유 스킬… 이를테면 일시적으로 화염 저항을 폭증 시켜주는 머그의 마법이나, 맨 땅에서 자기가 활동할 수 있는 수원을 발현해내는 레이시아의 마법 따위를 제공 받을 수도 있으니…
잡아먹는 마력을 좀 줄이면, 그 보조 수단을 활용하는 선에서 정령의 능력을 구현해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메릴다는 태생부터가 너무 강대한 정령인지라, 고유 스킬을 구현해내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마력이 든다는 점이 문제다. 그래도 ‘현현’시키는 데에 들어가는 마력에 비하면 훨씬 낫다.
그 정도 차원의 능력 구현은… 마력을 조금만 당겨쓰더라도 감당 가능한 수준인 것이다. 그래도 적지는 않은 양이긴 하지만…
“크으으윽!”
저쪽이 전력으로 나와주니, 이 쪽도 전력으로 나가주는 게 예의에 맞다.
– 화아아아악.
완전히 바닥난 마력이 어떻게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직스는 이내 막대한 바람에 직격당했다.
제대로 자세를 잡고 서있는 것조차 힘든지, 무게중심을 최대한 낮춘 채로 앞을 바라본 순간…
그 앞에, 소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새하얀 백발에 새하얀 원피스. 황금색 눈동자.
[ 마력을 끌어다 써도 겨우 이 정도 모습으로 현현시키는 게 한계인가. 하긴, 갈음의 제단에서 날 불러냈을 때에 비하면 훨씬 열악한 환경이긴 하지. 그 때는 루시도 있었고. ] [ 그래도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구나. 에드. ]직스가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해내기도 전에, 소녀가 그 가냘픈 손을 허공을 향해 휙하고 휘둘렀다.
고위 바람 정령 메릴다의 고유 스킬, ‘상승 기류’.
일대의 모든 것들을 전부 허공으로 띄워 올리고, 몸의 자유를 빼앗는 마법이었다.
직스 또한 바람 마법에 일가견이 있다. 제 마력으로 메릴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 의미 없는 저항은 안하는 게 나을걸. ]바람 원소 마법으로 메릴다에게 비벼보려 드는 것은 오만이다. 바람의 고위 정령 메릴다는 모든 바람 마법의 상성관계에서 우위를 가진다.
– 파악!
직스의 몸은 그대로 허공을 부유해,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노출된다.
제 아무리 강인한 전사라 할지라도 허공에서는 온전히 제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그대로 위치조차 고정되어버리니, 회피 기동을 할 수도 없다.
“크윽!”
초인에 가까운 순발력으로 재빨리 상황 파악을 끝낸 직스가 공격 마법을 구현해내려는 순간.
– 콰아아아아앙!
중위 불 마법 ‘일점 폭발’이 다시 한 번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직격탄이었다.
[ 그래, 깔끔하게 끝났네. ]마법으로 인한 여파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불완전하게 구현되어 소녀의 형상을 한 메릴다가 스커트를 몇 번 털었다.
“이런 형태로 현현하는 건 처음 보네, 메릴다.”
[ 마력 효율은 훨씬 낫지? 물론 할 수 있는 일에는 온갖 제약이 걸리지만. ]“…”
[ 안 그래도 요즘 웬 이상한 스토커가 들러 붙어서 따라다니는 통에 되도록 이런 모습은 하고 싶지 않았어. 피부에 털도 모자라서 춥기만 하고, 꼬리가 없으니 몸에 균형을 잡기도 묘하단 말이지. 또 입은 왜 이렇게 작은지, 말 할 때마다 볼이 턱턱 걸리는 기분이야. 원래 입이라는 게 이렇게 볼 옆까지 쭉쭉 찢어져 있어야 벌리는 맛이 있지, 안 그래? ]제 입에 양 검지를 넣고 볼을 쭉쭉 벌리면서 실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사람한테 늑대의 감상을 이야기 해봐야 공감해주기 힘들다고 말하려던 차…
-파앗!
연기 사이에서, 마력으로 이루어진 레이피어를 든 직스가 총알처럼 뛰쳐나왔다.
그렇게 무방비한 상태에서, 방어 자세를 취할 겨를도 없이 중위 마법을 직격당했는 데도 전투 가능한 상태를 유지한 것이다.
필시 말도 안되는 순발력으로 방어 마법을 구현해낸 것이 분명하다.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일부 충격은 흡수해낸 것이다.
창이 아니라 레이피어의 형태인 것은, 필시 그 거대한 창을 들어올릴 힘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일 터.
– 카앙!
반쯤 동물적인 감각으로 레이피어를 피했지만, 이내 마력의 형태가 변하더니 직스의 무기가 다시금 커다란 롱소드로 변한다.
깜짝 놀란 메릴다가 뭔가 대응하려고 몸을 움직인 순간, 이미 직스의 칼 끝은 내 목 언저리에 들이밀어져 있었다.
“…”
“…”
[…]잠시간의 정적. 숨을 헐떡대며 몰아쉬는 직스의 검 끝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동원 가능한 온갖 마법적 수단을 전부 사용하고, 꼼수에 가까운 비기까지 전부 활용한 참이다. 당겨쓴 마력도 그 양이 막대한 수준은 아니지만, 일단 전부 바닥나긴 했다.
마력이 없는 상태로 근접 전사에게 이 정도 거리를 내주었다는 것의 의미.
이윽고 나는 양팔을 올린 채 조용히 이야기 했다.
“네가 이겼다. 직스.”
– 카강, 캉!
그 말이 끝나자마자 직스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이윽고, ‘마나 무장’의 효과가 사라지자 그 검도 마력으로 화해 없어졌다.
그리고 직스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은 채로, 한동안 숨을 몰아쉬고만 있었다. 지칠대로 지쳐있는 모습이었다.
“허억, 허억… 한 수 잘 배웠습니다. 겨우 1년 만에 이 정도 단련을 하셨다니… 평생을 단련만 하며 살아온 제 입장에선 영 믿기 힘들군요.”
나 또한 밀려오는 피곤함에 제대로 서있기 힘들었다.
간만에 정말 한계까지 몸을 밀어붙인 느낌이 들었다.
*
“…그러게 둘 다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예니카가 동굴에서 나와 바위 지대로 왔을 때 즈음엔, 나도 직스도 대자로 바닥에 나자빠져 있는 상태였다.
둘 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겨우 몸을 가누고 있는 것이, 이제 막 스파링이 끝난 복싱 선수들 같은 모습이다.
예니카가 떠다 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땀을 북북 닦아내리며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늦봄의 선선한 바람 덕분에 덥진 않았다. 가끔씩 들이치는 파도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서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하기를 20분 쯤.
직스가 합하고 기합을 넣더니, 휙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이야기 했다.
“학사 내부 정보입니다만. A반 일정 조율 때문에 트릭스관에 찾아갔다가 우연찮게 학사 직원들 사이에서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직스는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한다.
“카덱과 녹스가 탈출했다고 합니다. 선배님을 죽인 당사자로 지목되어있는 범인들이요.”
“…”
“트릭스관의 삼엄한 경비를 어떻게 뚫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아직 공표는 안됐다고 합니다. 괜한 혼란을 초래해봤자 수색에 혼선만 생기니 납득은 갑니다. 일단은 추적이 먼저겠지요.”
그리고 나서 직스는 한숨을 푹 흘렸다.
“덕분에 선배님을 살해했다는 타냐의 혐의는 가면 갈수록 더 풀어내기 힘들어지고 있는 와중입니다.”
“그래… 듣긴 했다.”
“선배님은 꼼짝없이 여기서 나갈 수 없는 상태셨을테니, 예니카 선배님이 전해주신 정보만으로 단편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니 학사 상태가 어떤 느낌인지, 타냐가 어떤 여론과 마주하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페니아와 타냐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했다.
아마도 이 다음부터 이어질 말이 직스의 본론일 것이다.
“페니아 황녀님이 저를 호출하셔서, 황족 숙소에 다녀왔습니다.”
“…역시 타냐는 황족 숙소에 숨어있었나 보군.”
“예. 타냐의 증언에 따라 제게 여러 가지 추궁을 하시더군요. 에드 선배님을 살해한 것이 타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왜 학사에 적극적으로 증언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냐고…”
루시의 오필리스관 습격 사건 때 누구보다도 타냐를 옹호해준 것이 바로 직스다.
그런 직스가 이런 상황에 함구하고 있는 것은, 페니아의 입장에서는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저는 묵언했습니다. 확실치 않은 정보를 증언할 수는 없다고 둘러대기도 했지요. 왜냐하면… 에드 선배님은 에드 선배님 나름대로 목숨을 걸고 있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실제로 암살 시도를 당했다. 여기서 추가적인 대처를 하지 않으면 또 목숨이 위험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즉, 이쪽도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와중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으니, 다소 타냐가 억울한 부분이 있어도 직스는 눈 감고 모른 체 했던 것이다.
“허나, 카덱과 녹스가 탈출했다면 이제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들이 로스테일러 가문에 모든 상황을 보고하면, 로스테일러 가문 측은 선배님을 사망했다고 판단하겠지요.”
직스 치고는 드물게도 제 의견을 피력했다.
“일단 로스테일러 저택과 이 아켄섬 사이의 물리적 거리 뿐만 아니라, 다소 폐쇄적인 학사 내부 요건을 생각해보면… 로스테일러 가문에서 선배님의 생존을 재차 확인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요. 타냐가 직통으로 편지를 쏴서 보고하지 않는 이상에는.”
그렇다. 제 아무리 로스테일러 가문이라 할지라도 제국 외곽에 있는 이 아켄섬에, 이미 죽었다고 보고된 나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하려고 사람을 파견하는 일은 없을 터.
만약 나의 생존을 재확인하려면 소문의 힘을 빌려야 한다. 아켄섬에 파문 당한 로스테일러 가문의 후손이 아직도 살아있더라~ 라는 소문.
그런 소문이 학교 바깥까지 퍼져나가려면, 내부 인력들이 아켄섬 밖으로 나가는 방학 시즌은 되어야 한다. 그 방학 시즌을 한참 지나고 나서 제법 운이 좋아야 로스테일러 저택까지 소문이 닿을 것이다.
그럼 거기서부터 다시 직접 사람을 보내 나의 생존을 확인하고, 다시 암살 계획을 수립하고, 제 인력을 실베니아 학사에 파견할 명분을 찾고… 이런 과정들이 다시 반복되려면… 지금부터 시작해서 최소 반년은 걸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 정도 시간만 끌 수 있어도 된다. 그 쯤 되면 로스테일러 가문에는 시나리오에 따라 슬슬 망조가 든다. 가문 전체가 위기에 빠질테니 나 따위는 신경쓸 겨를도 없게 될 확률이 크다.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황족 숙소에서 만났던 타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야기가 연결이 안되는 느낌이지만, 일단은 직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직접 만났다고?”
“예. 아무래도 저는 극한의 상황에서까지 타냐를 옹호해준 사람이잖습니까. 제법 신뢰해주더군요.”
직스는 잠시간 말을 끊더니, 한숨을 푹 쉬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몰골이 말이 아니더군요. 하긴, 타냐의 학사 생활을 상상해보자면… 피폐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습니다. 예니카 선배님도 잘 아시겠지요.”
“응… 맞아.”
예니카는 내게 떠다 준 물을 내려놓고서는 천천히 이야기했다.
“에드한테도 이미 얘기 했지만, 학사의 조사를 받으면서 학생회장 선거 준비도 하고 있고, 살인범으로 내몰린 상태로 여론까지 최악이야. 그래도 이 악물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더라구. 아마 페니아 황녀님이 정치적 부담을 지면서까지 타냐를 지지해준 것도 그런 모습이 안타깝기 때문이었겠지.”
“예니카 선배님 말씀대로입니다.”
직스는 바위에 걸터앉은 채로 슬슬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궁지에 몰린 채 너무 오래 버텼습니다. 그 나잇대 소녀가 버틸만한 부담이 아닐테지요. 얼마 안가서 무너질겁니다.”
직스는 단지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다.
“오늘 저녁에 학생회장 선거 후보들의 출마 선언이 있을 겁니다. 전통적으로 학생회의 본거지였던 학생 광장 옆의 오벨관 1층에서 이루어지겠죠. 연단 앞에서 학생들의 엄청난 비난, 혹은 의심의 눈초리를 감당해내야 할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직스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이상은 주제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
나는 가만히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페니아가 아닌 타냐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도 엄청나게 많은 의미를 가진다.
후일 로스테일러 가문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해줄 페니아 황녀를 학생회장으로 두는 것과, 로스테일러 가문의 일원인 타냐를 학생회장으로 두는 것.
그 차이는 후일 어떤 결과를 낳을지 도저히 예상할 수 없다. 그리고 이미 비틀리기 시작한 정사 또한, 이를 기점으로 말도 안되게 꺾여나가기 시작하겠지.
중요한 분기점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선택은 나의 몫이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나의 몫이다.
만약 이번 기회에 타냐를 옹호한다면, 누명을 푼 타냐는 학생회장으로서의 입지가 탄탄해져, 정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후보가 될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페니아 황녀의 지지를 받고, 물 밑으로는 로르텔이 밀어 붙이고 있는 후보다.
당선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일 것이다.
그것은… 구색이나마 유지되던 미래의 흐름을… 내 손으로 완전히 비틀어 꺾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허나, 타냐는 이미 너무 많이 고통 받았다.
단지 페니아 황녀의 라이벌로서 일회성 악역으로 지나갔을 뿐인 인물에 불과했을 터인데.
말도 안되는 운명의 흐름과 맞서야 하는 입장에 처하고 말았으니… 그 원인을 찾아보면 결국 이 시나리오에 남아 있어선 안되는 인간의 존재다.
바로 에드 로스테일러. 나의 존재가 그 원인인 것이다.
물론, 내게도 사정이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으며, 내 입장에서는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처절한 싸움을 하다 치달은 상황이다. 나는 타인을 생각하느라 내 목숨을 내다 버릴 정도의 성인 군자는 아니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넓디 넓은 세상에 그나마 존재하는 이 몸뚱아리의 핏줄이자… 아무런 죄 없이 운명의 풍파에 맞서야 하는 그 소녀를 방치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나마 로스테일러의 이름을 공유할 수 있었던 동생의 존재가 처음엔 얼마나 반가웠었나.
이미 비틀리기 시작한 정사의 흐름과 저울질 해봤을 때, 이 양팔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게 마땅한가.
가진 인맥과 능력을 어떻게든 동원하면, 페니아 황녀가 학생 회장 선거에 출마하도록 어떻게든 설득하거나 유도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
죄책감이 되었든, 로스테일러 가문에 대한 적개심이 되었든 간에… 이용하고 자극해볼만한 방법은 많았다.
문득 자각한 것은, 내가 그리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에드 선배님.”
“더 이야기 안해도 된다.”
나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삶에 있어 중요한 선택들이란, 대개 이런 식으로 단박에 정해지곤 하는 것이다.
학생회장 선거 출마 선언은 오늘 저녁이라고 했었나.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린채…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그래… 이 은둔 생활도 슬슬 끝낼 때가 됐다.”
*
문득, 소녀의 옛 기억이 피어오른다.
오래된 기억이 으레 그렇듯, 빛이 많이 바래있다.
그래도 한 장면 한 장면 그러모아 하나의 추억으로 승화시켜보니, 제법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제국에서 모두의 찬사를 받는 귀족가. 그곳의 삼남매가 손을 맞잡은 채 꽃이 피는 동산으로 나들이를 간다.
아르웬과 에드, 그리고 타냐가 콧노래를 부르며… 꽃을 꺾어 머리에 묶어주고, 아리따운 풍경에 감탄하며… 싱그러운 봄 향기와 함께 손을 맞잡는다.
어찌보면 그것이 마지막 추억이라 할 수 있을까. 그 뒤로 이어지는 타냐의 삶은 언제나 무거운 압박과 책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행복한 시절도 있었던 듯 하구나. 나지막한 독백과 함께 눈을 떠보면, 둔중한 현실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오벨관 1층.
타냐를 바라보는 자들의 눈은 모두 하나 같이 어두운 의심이 자리하고 있다.
악질적인 살인 혐의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문 채 학생회장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권력욕에 찌든 자를 바라보는 눈빛이다.
군중의 무거운 적대 앞에 타냐는 바로 선다.
그 적의로부터 도망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설령 활로가 없다 해도 나아간다.
이런 상황에 학생회장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리는 인간들이 한 가득이지만, 타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 오는 오필리스관에서, 구태여 불가능에 도전하는 자들을 잔뜩 보았다.
부질없어 보이지만, 그 의지에는 반드시 어떤 숭고함이 깃드는 것이리라. 그리 믿으며 연단에 바로 섰다.
대중의 야유 따위는, 살아온 인생의 역경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