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07)
학생회장 선거전 (8)
학생회장 선거는 학기초 행사 중에서도 학생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행사다.
특히, 2년이나 연임한 전 학생회장 베로스가 졸업한 시점이다. 비교적 온건하고 조용하게 임기를 지내온 베로스지만, 나름대로 학사 직원들과 학생들 사이의 의견을 잘 조율하면서 큰 사고 없이 임기를 마친 괜찮은 학생회장이었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학생회장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실베니아의 운영방침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면서, 원한다면 각 학부의 수석들을 포함한 여러 학생인력들을 동원할 수 있고, 유사시에는 거의 교장에 준하는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다.
또한, 그 상징성도 결코 가볍지 않다. 일단 실베니아에서 학생회장직을 맡아본 경험이 있는 학생은 졸업 후에도 그 경력 하나만으로 여러 마탑과 황실 요직, 여러 도시의 관리 인력으로 발탁되는 경우가 많다.
혈통이 괜찮은 인물 같은 경우에는 아예 황도를 중심으로 정계에 발을 들이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 뜻이 높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어보는 자리다.
오벨관 앞쪽부터 학생 광장 초입까지 탁 트인 그 공간은 이미 수많은 학생들로 가득 들어차있었다. 학사 측에서 따로 안전 요원을 투입할 정도로 대단한 규모의 인파다.
오벨관 1층에 마련된 연단도 결코 작지 않은 크기였지만, 맨 뒤의 인파까지 그 목소리가 닿을지는 미지수였다. 물론 확성 마법을 활용하겠지만, 그게 완벽하지는 않다.
“이상입니다.”
– 와아아아아아!
학생회장 후보는 총 네명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두 사람은 바로 로르텔과 타냐였다.
페니아 황녀의 지지를 받으며 출마한 로스테일러 가문의 후계자와, 학사 생활동의 경제권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엘테 상회의 회주 대리.
둘 사이의 대결구도는 학생들이든 학사 직원들이든 모두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야 어느 정도는 그 결과가 보였다.
– 차기 학생회장 로르텔!
– 이 나이에 상단을 이끄는 리더십이라면… 분명 학생 회장도 잘 해낼거야!
– 로르텔 케헬른만큼 학생회장에 적임인 자가 또 없어…!
– 공약에도 진정성이 느껴지잖아…! 애초에 엘테 상회를 대표하는 사람이 왜 학생회장 같은 걸 하려 하겠어! 분명 명확한 뜻이 있기 때문이겠지!
– 믿고 밀어줄만하다…! 차기 학생회장은 로르텔이야!
로르텔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연단을 내려오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연단을 내려오는 길에도 팔을 흔들며 제 존재감을 과시한 로르텔은, 레이스가 잔뜩 달려 화려한 드레스의 매무새를 정리하며 자기의 차례를 잘 마무리 했다.
로르텔은 학생회장이 될 마음이 없다.
그 사실을 아는 자들은 끽 해봐야 엘테 상회의 직원들 몇 명 뿐이다.
허나, 대중들의 함성 속에서 웃으며 퇴장하는 로르텔의 지금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 이대로 학생회장으로 당선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평생을 상인으로 살아온 로르텔이 정말로 엘테 상회의 업무를 내려놓고 학생회장직에 집중할 리가 없건만, 지금 로르텔의 모습은 그 누가 보아도 학생회장이 되려고 혼신을 다하고 있는 듯 한 것이다.
대중의 호응조차도 가장 압도적이다.
엘테 상회의 실권자로서 긴 시간 동안 제 능력을 입증해보였고, 마치 대중의 입맛을 딱딱 아는 듯한 공약 선정도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학사 직원들을 통해 여러 정치 자금을 적절히 풀어 수석들 사이에서 여론도 제법 좋다.
‘위세가 드높을수록 추락할 때의 이목이 확 끌리는 법이지.’
로르텔은 팔을 계속 흔들면서 눈으로 빙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로르텔은 그 행적이 화려했었던 만큼, 적 또한 많다. 대중을 상대로 일하다 보면 언제나 아군만을 두고 살 수는 없다.
특히 로르텔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만한 세력들이라면… 엘테 상회에서 밀어붙였던 갖가지 요구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여러 거래처들일 것이다.
예시로 들만한 가장 최근 건이라면, 라플라스 베이커리에 식자재 납품을 거의 하지 않았던 일일까. 과잉 발주를 넣어서 우선적으로 물자를 보급 받으려 했던 괘씸한 주인이 문제였던 사건이다.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정리해보자면… 엘테 상회는 생활동 상권을 책임지고 있다는 그 입장 때문에, 여러 공적인 명분을 들어 생활동 내의 거래처들에게 거의 갑질에 준하는 횡포를 부리기도 한 것이다.
대개 그 명분은 그럭저럭 정당했으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다.
하나 같이 로르텔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 것이지만, 가면 갈수록 드높아지는 로르텔의 위세에 이렇다 할 불만을 표하진 못하고 있었을 터.
로르텔은 그런 앙심조차도 이용해먹는 사람이다.
‘지금쯤 자료도 전부 돌았겠지.’
연단에서 완전히 내려온 로르텔은 화려하게 몸을 장식하고 있던 장신구를 하나씩 떼내었다. 푸른 장미 모양 머리핀, 검붉은 구슬이 달린 귀걸이, 치렁치렁 달린 레이스들. 그런 허례허식들을 하나씩 제거 할 때마다 비로소 상인으로 되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연단 앞에는 리엔나 비서와 앞잡이 듄이 정중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엘테 상회의 직원들이었다.
로르텔은 벗은 장신구를 대충 그들 손에 들려주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오벨관 1층으로 들어갔다.
“카덱과 녹스는?”
“예정대로 탈출했습니다.”
“좋아요. 거래처 쪽에 흘린 자료들은?”
“미끼를 물었습니다. 아마 선거 기간 중에 폭로되겠지요.”
비서들과 주고 받는 짧은 대담. 필요한 보고 사항만 정확하게 전해들은 로르텔은 오벨관 입구에서 다시금 광장쪽을 바라 보았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중이 하나같이 로르텔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지만, 로르텔의 표정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대중의 지지란 마치 바닷물과도 같아, 밀물처럼 밀려오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썰물처럼 쓸려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엘테 상회 측에서 생활동 쪽 거래처들에 푼 자료에는, 로르텔이 주도한 상회 자금 횡령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로르텔 자신이 만들어낸 자료다.
애초에 로르텔은 엘테 상회와 자기 자신을 한 몸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상회 자금을 횡령할 이유도 없다.
그저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끌어내릴 흠집이 필요했을 뿐이다.
로르텔에게 앙심을 품은 거래처들이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두고 넘길 리가 없다. 능력있고 도덕적인 이미지를 구축해놓은 로르텔에게 흠집을 내기 위해… 횡령 정황과 그 부도덕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겠지.
신고자의 익명을 어느정도 보장해주기만 한다면, 로르텔의 뒤통수를 칠 거래처들이야 널리고 널린 것이다.
청렴함이 요구되는 학생회장직에 그런 횡령 사건은 정말 치명적인 스캔들이다.
대중의 지지를 두루 받던 로르텔이 한순간에 추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로르텔과의 대척점에 서있던 또 다른 후보, 타냐에게로 몰려들 것이 확실하다. 대비 효과도 가장 극적이게 연출될 것이다.
군자의 몰락에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세상을 호령할 것 같았던 자가 부질없이 추락하는 순간이야말로 모든 대중의 시선이 한 데 모이는 때다.
그 순간을 잡아 타냐의 굳건함을 드러낼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 로르텔은 기꺼이 대중을 적으로 돌린다.
그것이, 가장 돈이 되니까.
“로르텔 회주 대리. 정말 이런 계획으로 괜찮습니까?”
문득 리엔나 비서가 로르텔에게 물었다. 주제 넘은 질문이었다.
로르텔은 일생을 악인으로 살았다. 악역을 자처하는 것에 구태여 망설이는 인물이 아니다.
악명과 불명예가 그 뒤를 따르겠지만, 로르텔에게는 신체의 일부나 다름 없는 것들이다.
로르텔은 무대 위에서 빛을 한몸에 받으며 제 존재감을 뽐내는 타입이 아니다. 보통은 그 장막의 뒤에 서있는 입장이다.
그렇기에, 그 무대 위에 설 자를 신중히 고르는 것이다.
“어머.”
이번 학생회장 선거의 후보는 네 명이었다. 허나 로르텔에 앞선 두 후보자는 세력도 미약하고 관심사도 떨어지는 편이라 큰 의미가 없었다.
허나, 이 다음에 연단에 올라설 자는 여러모로 대중의 시선을 받고 있는 자였다.
“긴장한 것 같구나, 타냐.”
로르텔 다음 차례로 연단에 올라설 타냐가 입을 꾹 다문 채로 로르텔의 앞에 서있었다. 스커트 자락을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 로르텔을 지나쳐, 저 연단 위로 올라가 출마 선언을 해야 한다.
온 인파가 로르텔의 이름을 연호하는 곳에서, 살인 교사 혐의라는 무게추를 단 채,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내면서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
그건 거의 고문에 가까운 행동이다. 그 누구도 아닌 타냐가 스스로 감당해야할 일이었다.
“저는…”
이어지는 타냐의 말에 로르텔은 약간이나마 놀랐다.
“저는… 에드 오라버니를 죽이지 않았어요.”
로르텔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태도가 꽤나 굳건했다.
에드가 은둔 생활에 들어가고 나서 거의 2주.
황족 숙소에서 제 발로 뛰쳐나와, 직접 자기를 의심하는 학사 조사진과 실랑이를 벌이고, 결백을 증명하려 애쓰면서, 학생회장 선거까지 준비하는 강행군을 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칠대로 지쳐있는 모습이다. 허나 강단 있는 태도에는 제법 생명력이 깃들어 있었다.
로르텔만 보면 벌벌 떨며 기죽어 있던 모습도 이젠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대등하게 바로 서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하는 모습이다.
타냐는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후, 로르텔을 지나쳐서 연단 쪽으로 나아갔다.
*
소름끼치는 정적이 감돌았다.
광장에 모여든 학생들의 인파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말소리 하나 오가질 않았다.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로르텔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로 가득찼던 것에 비하면… 같은 광경이 맞나 싶을 정도다.
연단에 바로 서서 내려다보면, 학생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온다.
1학년 수석 웨이드와 4학년 수석 다이크가 학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앞자리에 서있고.
그 외에 인파의 구석에는 어느새 상처가 나았는지 칭칭 감았던 붕대를 모두 푼 클레비어스가 보이고, 그 옆 쪽에는 엘비라의 얼굴도 보인다.
맨 뒤쪽에는 검성 테일리가 팔짱을 낀 채 쳐다보고 있고, 그의 동반자인 아일라도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외에도 비행 마법의 대가 오닉스, 수석조교 아니스, 재앙의 연금술사 클로드, 마탑의 최연소 연구자 요제프, 시약 연성 전문가 도로시, 낭만가 음유시인 아델, 원소 마법의 대가 트레이시아나…
한 명 한 명 읊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실베니아의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가득한 장소.
그 앞에 똑바로 서서, 타냐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이번 학생 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될 타냐 로스테일러입니다.”
로르텔에 앞서 나왔던 미약한 군소 후보들조차도 그리 인사를 보내면 박수 정도는 보내주었다.
그러나 인파는 완전히 침묵했다. 그래도 잠시간 군데군데에서 박수를 치는 소리가 두어번은 나왔으나, 인파 대부분이 박수는커녕 미동조차도 없으니… 그나마 있던 박수소리도 순식간에 멎어버렸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가, 타냐는 숨을 한 번 집어 삼키고 말았다.
무겁게 자리한 시선들 하나 하나가 마치 자기 숨을 옥죄는 듯 하다. 로스테일러라는 가문의 위광에 힘입어 직접적인 야유를 받고 있진 않지만, 그 싸늘하게 식은 수백 수천개의 눈동자들이 타냐에게 묻는 듯 하다.
살인범이 무슨 회장 선거에 나오냐고. 그렇게까지 학생회 권력이 탐이 났냐고.
그 소름끼치는 광경은, 성격에 따라서는 평생 갈 트라우마로 남아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허, 읍…”
순간적으로 타냐는 숨이 멎어들어갔지만, 어떻게든 티를 내지는 않았다.
타냐는 마치 굳건한 바위와도 같은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이 연단 위에 올라 선 것은─”
그렇게 한동안 타냐의 말이 이어진다.
그러나, 5분이 흐르고 10분이 흘러도 대중은 완전히 침묵한다.
중간 중간 연설의 흐름이 끊기거나, 일차적인 결론이 날 때마다 박수를 쳐주던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정반대다.
어떻게든 말을 이어나가고 있지만, 타냐도 충분하리만치 느끼고 있다. 지금 이 침묵은 타냐에게 보내는 무언의 압박이다.
적당히 하고 내려가라. 그 누구도 너를 지지 하지 않는다. 제 아무리 페니아 황녀의 지지를 받은 후보이자 고귀한 공작가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학생회장의 직위를 맡을 인재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타냐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어나갔지만, 끝끝내 대중은 반응하지 않았다.
눈물이 고이려는 걸 억지로 참아내었다. 여기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간 정말로 모든 게 끝장이다.
끝까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아무렇지 않은 듯 연기를 해내야만이 이 앞에 바로설 수 있다.
타냐는 여러 학생 시설의 실질적인 복구안과, 학사 재정 구조에 대한 실질적인 개선책, 장학 제도 확대, 학생 처우 개선에 대한 여러 구체적인 방안을 계속해서 떠들어댔지만… 그 누구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연설 시간은 끝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럼… 지금까지…”
– 살인범!
어떤 용기있는 자일까. 아니, 오히려 용기가 없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인파 사이에 숨어 익명에 기댄 채 타냐에게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가 한차례 울려 퍼진다.
그 외침은… 음식 속에 한 방울 떨어져 있는 독약처럼, 미약하지만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마치 목이라도 졸리는 것 같은 압박감이 타냐의 호흡을 막았다. 그래도 타냐는 기적적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서 당장 주저앉고 싶다.
– 살인 교사 혐의에 대해 해명해주세요!
– 로스테일러 가문의 내부 알력 다툼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역시 부정하시는 건가요?
– 학생 소식지에 실린 정보만 보면… 마치…
– 이런 상황에 학생 회장 선거에 출마한 게 적절한 처신인가…?
– 몰라…! 근데 나 같아도 로스테일러 명함 달고 실베니아에 입학했으면 학생회장 자리 한 번 노려보고 싶긴 하겠다…!
– 그렇네. 일단 당선되면 대박이잖아…!
–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살인 교사 혐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건가…?
이윽고 웅성대는 소리가 조금씩 커져가기 시작했다.
자기들 딴에는 귓속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 조용히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 중 일부가 귀에 들려오는 것만으로도 타냐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린다.
이 시점에서 타냐는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더 이상 바로 서있을 수가 없어서, 연단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사실 무모한 짓이긴 했다.
이런 상황에 이렇게 연단에 올라서는 짓 자체가 멍청한 짓이다. 그래도 더 이상 도망치기는 싫었다.
타냐 로스테일러가 기세등등하게 실베니아에 입학해서 한 일이라고는, 그저 놀라고, 휘둘리고, 도망치는 일 밖에 없었다. 평생동안 고개를 푹 숙인 채 기회만 보고 살아오던 삶인데, 정작 기회가 와서는 덜덜 떨고만 있는 제 모습이 너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까스로 마무리 멘트를 던진 타냐는 핑핑 돌아가는 듯한 세상 풍경 속에서 정신을 부여잡았다. 적어도 이 연단 위에서만큼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제 방으로 돌아가서 베개를 움켜쥔 채 눈물을 쥐어짜는 수가 있어도, 이 인파들 앞에서만큼은 강인한 인간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 콰당탕!
그러나, 세상 일이 언제나 제 마음처럼 되던가.
결국 끝끝내 정신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연단을 내려가지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모습이 마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듯 해서… 인파들 사이로 미약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푸크흡!
-크큭!
-우, 웃지마…! 나도 웃기잖아…!
웅성대는 인파를 뒤로한 채, 타냐는 제 얼굴을 감싸쥐었다. 적어도 눈물을 보이는 일만큼은 없어야 했다.
그래도 비탄이 가슴을 조금씩 좀먹어 들어갔다. 이제는 한계에 달했다고 해야할까.
이제 슬슬 할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 때 쯤이었다.
─인생의 전환점이란, 늘 그렇듯 갑작스럽게, 예고 없이, 한줄기 바람처럼 찾아오는 법이었다.
– 파아아아아악!
바람이 불었다. 늦봄의 잔잔한 바람이 아니라, 거대한 격풍이었다.
– 꺄아아아악!
– 뭐, 뭐야… 갑자기…!
휘몰아치는 바람에 연단 근처를 장식한 현수막들이 나부끼고, 학생들은 모두 서로 간의 몸을 부여잡았다.
이따금씩 넘어지는 학생들도 있고, 휘날리는 머리칼을 어떻게든 잡아 넘기며 시야를 확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휘몰아치던 바람이 잦아들자, 모여든 인파들은 전부 숨을 집어 삼켰다. 상황을 통제할 안전 요원들조차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 뭐, 뭐야 저게…!
– 으… 으악…!!
– 도, 도망쳐야 되는 거 아니야…?
커다란 연단보다도 크기가 큰… 집채만한 늑대가 오벨관 앞에 우뚝 서있었다.
마치 공간을 도약하기라도 한 듯이 갑작스럽게 나타났지만, 그것은 예니카의 감응력을 빌려 현현된 존재일 뿐이다.
– 아우우!
늑대의 울음소리가 학생광장이 있는 곳까지 장대하게 울려퍼졌다. 그 등에는 모두가 익숙한 얼굴, 예니카 페일로버와 함께… 로브를 둘러쓴 소년 하나가 올라타 있었다.
– 저, 저건…!
– 고위 바람 정령! 고위 바람 정령이야…!!
– 반 배정 시험 때 현현한 모습을 본 적 있어…!
몇몇 학생들은 그 늑대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오른산 꼭대기에서 에드가 소환해냈던 형상을 목도했던 신입생들이었다. 애초에 알아봐주길 바래서 꺼낸 것이다.
이 바람 정령과 함께 나타났단 것이, 이 소년의 정체를 누군가가 사칭하거나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다. 고위 바람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이 학사 안에서도 결코 많지 않기 때문이다.
타냐 또한 그 정령이 현현한 모습을 본 적 있다. 갈음의 제단에서, 제 오라버니 에드 로스테일러가 다루던 정령의 모습이다.
로브를 뒤집어 쓴 소년이 연단으로 올라선다. 주저 앉은 타냐가 올려다 본 모습에는 그 로브 모자 아래편에 가려진 금발 소년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뭐라 말을 해보려 했지만 타냐는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어떻게든 말을 꺼내보려 해도 북받쳐 오르는 감정 때문인지 모든 말들이 가슴 언저리에서 막혀버린다.
“아… 읏….”
갑작스럽고 비현실적인 광경에, 지금 자신이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인가 싶었으나…
“나 때문에 고생이 너무 많았구나, 타냐. 정말… 미안하게 됐다.”
그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에 흘러들어오자 확신하고 말았다.
“설명해야할 일들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일단은 상황부터 해결하고 보자.”
에드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는 타냐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일평생을 증오하며 살아왔던 남자가 아니던가. 그 언제부터인가 로스테일러의 이름을 더럽히기만 하며, 반드시 단죄해야할 대상으로만 여겨왔던 남자인데.
다시금 그 얼굴을 보고,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이 느껴지자 눈물이 솟으려고 했다.
에드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로브의 모자를 내려썼다. 그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모여든 인파는 모두 까무러치게 놀라는 소리를 내었다.
– 저, 저건… 저 사람은…
– 에드 로스테일러다…! 분명… 맞아…
– 나도 원소학 수업 같이 들어서 알고 있어… 진짜로… 죽었다고 소식지에 적혀있던 에드 로스테일러 잖아…!
– 사칭…? 사칭 아니야…?!
– 바보야…! 저 고위 정령을 봐…! 저런 걸 다룰 줄 아는 사람이 그리 흔해?!
혼돈에 빠진 인파 앞에 서서, 에드는 연단을 바로 잡았다.
에드가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몇 번 내자 순식간에 정적이 돌아온다. 모두 그의 입에 귀를 기울이며, 순식간에 좌중의 분위기가 압도당한다.
가장 먼저 내뱉을 대사는 무엇일까.
일단 본인이 살아있는 것에 대한 해명이 먼저일까. 허나 그것은 간단히 설명할 수도, 어떻게 둘러댈 수도 없다. 그건 천천히 해나갈 일이다.
애초에 이곳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 선언을 하는 자리다. 그러니, 지금은 그 자리에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을까.
무엇보다 지금 당장 수습해야할 것은… 박살이 나버린 타냐에 대한 민심이다.
가장 직설적이고 확실하게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자는… 에드 로스테일러 본인 뿐이다.
“안녕하십니까, 에드 로스테일러입니다.”
그의 영향력은 학생들 전체를 보자면 미미할지 모르나… 각 학부 수석들에게는 두루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학부 수석들을 잘 포섭하는 것이 이 학생회장 선거전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저는, 타냐 로스테일러에게 살해당하지도 않았으며, 애초에 저는 타냐를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2학년 전체 수석 루시 메이릴과 3학년 전체 수석 예니카 페일로버는 그가 설득한다면 오롯이 그의 의견에 따를 것이다.
뿐만 아니라 2학년 전투부 수석 클레비어스도 내심 그를 인정하고 있으며, 마법부 차석 직스는 물론이오, 연금부 수석 엘비라 또한 그의 능력만큼은 인정하고 있는 입장이다.
1학년 마법부 수석 요제프나 웨이드 또한… 그 실력만큼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니, 에드 로스테일러의 지지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는… 더 설명해봐야 입이 아플 뿐이다.
페니아 황녀의 지지만으로도 후보 입지를 꽤 견고히 다질 수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그의 지지까지 덧붙여지면… 무게추는 확 넘어가는 것이다.
다만, 타냐에게는 그런 정치적 이해득실 이전에…
“부디, 타냐의 뜻이 잘 전해질 수 있도록, 가족된 입장에서 항상 응원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연단에 주저앉아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대며… 그런 에드의 뒷모습을 보고서는.. 그저, 숨이 벅차오르고 만다.
피어오르는 것은 그 먼 옛날, 함께 공작령의 동산을 오르던 기억이다.
오르막길에 지쳐 숨을 헐떡이던 타냐의 팔을 잡아끌던 그 뒷모습이 다시금 겹쳐보여서일까.
머나먼 그 과거와는 이미 동떨어진 시간을 살고 있건만… 그 때의 기억들은 끊임없이 타냐에게 속삭여 왔다. 힘겨웠노라면, 반드시 보답 받을 때가 온다.
밤이 길기에 아침이 그다지도 밝은 것이니, 제 삶의 어둠에도 끝을 고할 때가 반드시 오리라.
매일 밤 타냐는, 스스로에게 그리 속삭이며 살아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