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10)
이보세요, 예니카 씨 (2)
“후우….”
오필리스관의 직원실 테라스.
기본적으로 근무 시간 내내 수시로 들이닥치는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메이드 특성상, 짬이 날 때마다 휴식하는 일이 중요하다.
오필리스관의 저녁 식사 업무를 마치고, 뒷정리만을 인계해 둔 채로 잠시 테라스에 기대어 바람을 쐬던 벨 마이아였다.
당장 생각나는 저녁 일정들도 빠듯하다. 학생들이 취침에 들기 전까지 침구류가 잘 교체되었는지 확인하러 다닐 예정이고, 마무리 청소는 깔끔하게 되었는지 점검도 해야 했다.
그리고 내일 있을 학사 점검에도 대비해야 했다.
평소부터 워낙에 깔끔하게 잘 관리하고 있기에 급하게 대처할 일은 없지만, 그래도 부교장 레이첼이 직접 행차해서 점검하는 날이니만큼… 학생 대표들에게 몸가짐을 당부해 둘 필요가 있었다.
“새벽에는… 숙직을 서는 날인가….”
오필리스관의 최고 관리인 신분이 되었지만 그녀는 숙직 근무 또한 빠지지 않는다. 애초에 딱히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다.
오히려 자기가 들어가면 일반 메이드들의 당직 일자가 줄어들어 쉴 시간이 늘어나므로, 전체적인 업무 효율 증대에 나름 기여할 수도 있다.
“그 전에… 일단 루시 아가씨를 데려와야겠구나….”
근신 풀린 뒤로 계속 밖으로 나다니고만 있는 루시를 데려와 오필리스관에서 재워야 했다.
내일 오전에 있을 학사 차원의 점검에 대비하려면 일단 학년 수석 대표인 루시부터 단장을 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잡아 오기만 하면 순종적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소녀이니만큼 큰 문제 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북쪽 숲에 있는 에드의 캠프까지 직접 데리러 가야 했다.
저녁 일과 업무도 꽤 쌓여 있기에 그냥 휘하의 메이드들을 보낼까 싶다가도… 이내 벨은 시간을 쪼개서라도 직접 가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에드의 사망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벨도 분명 깜짝 놀랐지만, 이내 생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깊게 안심했었다. 깽판을 치는 루시를 뒷수습하느라 자세한 사정까지 알아볼 여유는 없었지만 말이다.
나름 업무도 정상화되었으니, 루시를 데리러 가는 김에 에드가 멀쩡한지 안부나 물으러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흠….”
그러나, 에드 로스테일러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역시 그의 복잡한 인간관계다.
어느 정도는 얼추 정리됐을까 싶다가도, 그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썩 긍정적이진 않다.
잠시 카츄샤를 벗어 놓고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별하늘을 올려다본다.
늦봄의 선선한 밤바람을 가만히 맞고 있자, 문득 사계절 중 야생 생활을 하기에 이만큼 쾌적한 시기가 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
언제나 궁지에 몰려, 제 목숨 하나 부지하고 삶을 영위하느라 다른 인간관계에는 전혀 신경을 쓸 여유가 없던 그런 남자 아니던가.
허나, 이 선선한 밤바람을 맞고 있자니 새로운 생각이 피어오른다.
최근 그의 캠프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역시 이래저래 뭔가 많아졌다는 느낌이다.
모닥불에 목재 쉼터 하나만 놔둔 채 이 악물고 야생과 사투하던 과거의 모습에 비하면… 그럴싸한 오두막과 간이 목재 창고, 꽤 규모가 커진 캠프파이어용 터, 여러 공구들과 더불어 갖가지 자재들까지 잔뜩 쌓아 놓고 있는 모습. 강가에는 낚시 도구와 그물 양식장, 숲 이곳저곳에는 나름 체계화된 사냥 덫들, 생활에 도움이 되는 여러 마공학 용품들까지.
확보하는 식자재들도 종류가 많아져서 제법 요리해 먹고 있는 듯하고, 옷 관리도 이래저래 오필리스관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
요컨대 에드 로스테일러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악다구니로 노력한 끝에…. ‘그럭저럭 살 만해진’ 것이다. 아직 비교적 열악한 환경이긴 하지만, 아득바득 이를 악물며 살아갈 정도까진 아닐 정도로 환경을 개선해 냈다. 온전히 노력의 결과였다.
몸의 여유와 시간의 여유는… 곧 마음의 여유로 이어진다. 그에게도 생존 이외의 것을 생각할 여유가 생겨난다는 이야기다.
“글쎄요….”
그러나, 벨은 다시금 의문을 표한다. 애초에 철벽같은 남자 아니던가. 어떻게든 그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볼 만한 사람이 있을까 하면, 딱히 떠오르질 않는다. 그게 가능하려거든 단순한 내적 친밀감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이다.
뭔가 다른 방향의 변칙적인 공격. 낯설고 새로운 시점에서의 관계성 형성이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지만… 그 정도로 고차원의 공격을 감행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도 않았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가 해낸다면, 그건 의도했다기보다는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으로 우연히 먹혀들어 간 것이겠지. 즉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야기다.
“아쉬운 일이네….”
늦봄의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벨 마이아는 나갈 채비를 했다.
어쨌든 그 남자가 조금이라도 철벽을 내릴 기질이 있다고 한다면, 공략하기에는 지금이 바로 적기 아니던가. 누가 됐든지 간에 좀 결론을 내줬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핏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곧 합동 전투 실습일까…. 올해는 다치는 사람이 안 나왔으면 좋겠네….”
에드 주변의 인간관계가 좀 정리되길 바라면서… 벨은 루시를 데리러 갈 준비를 했다.
* * *
“복수 현현은 감응력 자체도 중요하지만, 감응도와는 별개인 ‘정령 이해도’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 즉, 많이 다루어 보고, 또 현현 시켜 볼수록 그 정령의 현현에 들어가는 마력 효율도 좋아지는 거야.”
낮이 길다.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저녁 먹고 모닥불 정리까지 끝내 놓은 상태에서 정령 감응 훈련에 들어갔음에도 하늘에는 미세하게 푸르스름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태양은 진즉 서쪽 하늘로 자취를 감췄지만, 아직 달이 제 권역을 차지할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기온도 조금씩 올라가고, 숲 사이로 은은하게 퍼지는 풀벌레 소리도 점점 기세를 늘려가고 있다.
그렇다고 또 덥지는 않다. 나무 사이로 풀 내음을 머금고 파고드는 선선한 바람이 퍽 기분이 좋았다.
바야흐로 늦봄이다. 야외에서 캠프 생활하기에 이보다 좋은 시기는 없는 것이다.
“정령 이해도가 낮으면 정령 현현 효율 자체도 떨어져서, 여러 정령들을 한 번에 불러냈을 때 각 정령들의 효율과 전투력이 떨어지곤 해.”
“예니카도 그래?”
“으음….”
모닥불 맞은편, 블라우스 자락을 몇 번 꼬면서 고민을 하던 예니카는 이윽고 대답했다.
“사실 나는… 여러 정령들을 완전한 효율로 복수 현현하는 게 자연스럽게 되는 스타일이라서….”
“대단하네.”
“이런 건 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심하니까. 에드도 분명 몇 번 해 보다 보면 가능해질 거야. 에드 스타일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이해도 단련이 훨씬 효율적일 것 같기도 하구.”
“그래?”
예니카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양손을 들어서 각각 검지를 폈다.
“정령사라는 게… 문외한이 보면 그냥 정령 다루는 사람이라는 걸로 퉁칠 수밖에 없지만, 사실 잘 생각해 보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거든. 주로 전투 방면으로 말야.”
“두 종류?”
“응. 직접적으로 정령 자체에 완전히 전투를 일임하는 스타일이 있구, 아니면 정령의 여러 고유 능력이나 정령식, 그리고 부분 현현으로 전투의 보조를 받는 스타일이 있어.”
“예니카가 전자라면 내가 후자인 느낌이 강하네.”
예니카는 각 검지를 각각 까딱여 가며 두 종류의 정령사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물론 무조건적인 건 아니야. 단순히 비중과 성향의 문제지. 나라구 해서 정령식이나 고유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건 아니고, 에드도 레이시아 같은 물 정령은 직접 전투 요원으로 활용하잖아?”
“그렇긴 하지.”
“그렇게 막 칼로 자르듯 구분하는 개념은 아니긴 하지만… 에드는 주로 본래 전투 방식에 보조를 받는 느낌이 강하니까, 정령 감응력뿐만 아니라 정령 이해도 신경 써 주는 게 좋아. 직접적인 정령식과 고유 능력에 영향을 미치니까.”
예니카는 거기까지 이야기한 뒤 손끝에 마력을 모았다.
잠시간 바람의 기운이 그곳에 뭉치더니, 참새 모양을 한 하위 바람 정령 카리스가 현현되어 손끝에 앉았다. 몇 번인가 숲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던 정령이다.
“참고로 정령 이해도가 최고치에 달하면, 현현 자체에 드는 마력은 거의 없는 수준이 돼. 나랑 계약한 하위 정령은 모두 이해도가 최대치라서, 일단 나는 하위 정령은 모두 제약 없이 현현 가능한 상태인 셈이야.”
카리스가 파닥파닥 날개를 휘적이며 하늘에 떠오르자, 그 뒤로 온갖 정령들이 잔뜩 현현해 대기 시작했다. 참새, 다람쥐, 토끼, 뱀, 개, 사슴… 갖가지 형태의 정령들이 제 형체를 가지고 현현되었지만, 예니카의 마력에 무리가 가는 느낌은 전혀 없다.
“흐음… 이해도 자체가 다양한 곳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구체적인 부분까지는 미처 몰랐네.”
나는 미간에 정신을 집중하고 하위 불 정령 머그를 현현시켜 보았다.
허공에서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더니, 이내 날개를 펼치고 박쥐 한 마리가 피어났다.
[ 오옷―! ]그대로 날개를 파닥대며 내 어깨에 내려와 앉았다.
[ 이해도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에드 도련님…! 제가 누구입니까, 지난겨울부터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끝끝내 도련님의 수족으로서 제 역할을 다한 오른팔 머그 아닙니까! ]“하위 정령은 비교적 이해도 상승이 빠르고 쉬운 편이야. 에드는 머그랑 보낸 시간이 많으니까, 하위 정령 정도는 꽤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됐지?”
나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어깨에 앉은 박쥐를 스윽 쳐다보았다. 시선이 쏠린 것이 퍽 기쁜지, 휙 휙 날개를 이리저리 접어 가며 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관이다.
“그러고 보면 머그는 계약한 지 오래됐는데, 정말 에드랑 궁합이 잘 맞네. 이렇다 할 마력 유실도 없이 매 전투마다 합을 잘 맞추는 걸 보면 정말 계약을 잘 한 편이야. 보통 경험 없을 때 처음 계약한 정령은 제대로 못 다루는 경우가 많거든.”
“확실히 그렇다는 얘기는 꽤 들어 본 것 같아.”
“응. 에드가 처음치고는 무척 능숙한 것도 있구, 머그가 저렇게 보여도 굉장히 능률적인 정령인 부분도 있겠지.”
[ 이 불초 머그 그저 영광입니다! 이리 칭찬을 받으면 그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닷…! ]늘 그렇듯 호들갑을 떨어대는 머그를 보고 예니카는 멋쩍은 듯 하하하 웃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짚어 볼 것은… 정령 위상 변이에 관한 거네.”
“위상이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거 말이지? 하위 정령이 중위 정령으로, 중위 정령이 고위 정령으로.”
“엇, 에드도 잘 알구 있네. 하긴 정령술 단련한 지 꽤 됐으니까.”
그 말에 머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정령들에게 있어서 위상 변이는 꿈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머그가 중위 정령이 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네. 나두 이렇게 많은 정령을 다루지만, 나랑 계약한 시기에 위상이 변이될 정도로 역량이 늘어난 정령은 거의 못 봤거든.”
“머그 정도면 어떤 수준이야?”
“글쎄… 하위 정령치고는 꽤 다재다능하긴 하지만… 중위 정령에 비할 바인지는 잘 모르겠어.”
[ 크읏…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불초 머그 더 정진하겠습니다…! 물론… 상처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 그래….’ 하고 예니카가 멋쩍은 듯 웃어 주었다.
“위상 변이라는 게 감응력과 이해도의 영향을 받는다는 설이 있긴 하지만, 직접적인 건 정령 그 자체의 능력 성장이 가장 중요할 테니까…. 좀 천천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지.”
“그래… 어쨌든 명확해진 부분이 많네. 고마워, 예니카.”
“아, 아니…. 나도 배운 내용을 읊어 대는 것뿐인걸….”
예니카는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턱을 당기고 뽈뽈대고 있을 뿐이었다.
기술 숙련도: 25 위력 증폭도: 5 주입 성공률: 95 ― 불 계열 정령식 숙련도: 7 ― 물 계열 정령식 숙련도: 3 ― 바람 계열 정령식 숙련도: 5 계약 정령: 하위 불 정령 머그 정령 감응도: 31 정령 이해도: 34 고유 스킬: 화복의 가호, 폭성 계약 정령: 중위 물 정령 레이시아 정령 감응도: 12 정령 이해도: 10 고유 스킬: 수사의 가호, 수원 발현 계약 정령: 고위 바람 정령 메릴다 정령 감응도: 5 정령 이해도: 3 고유 스킬: 풍랑의 가호, 상승기류
주로 정령식과 관련되어 있는 스탯인 만큼, 정령 이해도에 대한 정보는 제작계 스킬 항목의 정령식 주입 파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정령식을 단련하면서 몇 번이나 짚어 보았던 부분이지만, 이렇게까지 직접적인 전투 활용에 영향이 미칠 정도일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정령 이해도는 그 정령과 오랜 시간 함께하거나, 많이 전투에 활용해 보고, 또 평소에 자주 부대낄수록 잘 오른다고 알고 있어. 아까 말했듯, 정령의 위상이 낮을수록 좀 더 잘 오르는 느낌이구.”
“확실히, 머그는 오랜 시간 합을 맞췄으니 꽤 이해도가 단련되어 있네. 근데 레이시아야 계약한 지 얼마 안 됐다 쳐도, 메릴다에 대한 이해도는 처참한 수준이구나.”
“으음… 좀 가감 없이 말하자면, 에드는 아직 메릴다를 다룰 수준의 정령사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지….”
내가 메릴다랑 계약한 것은 거의 반쯤은 꼼수에 가까운 수단을 활용한 것이다.
고위 정령은 그 예니카조차도 현현시키는 데 꽤 집중을 해야 할 정도로 그 위상이 드높은 것이다.
“애초에 에드는 1년 만에 이 정도까지 감응도를 올린 것만으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이야…. 처음 정령 감응에 눈을 뜬 정령사가 중위 정령을 다루는 데는 보통 3년에서 많게는 5년도 걸린다구.”
물론 나야 숱한 플레이 경험으로 효율적인 성장 곡선을 그리고, 적절히 스탯을 배분해서 단련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다.
거기다가 이런저런 마공학 용품의 도움까지 받았으니 꽤 유리한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은 맞다.
“그래서 고위 정령에 대한 감응이나 이해도는 최대한 많이 올려놓으면 좋아. 보통 사람들은 계약 자체가 안 되니까 접근조차도 못 하잖아. 에드만의 우위인 셈이지.”
“그래… 많이 활용해 보고, 또 부대껴 보면 된다 이거지…? 근데, 메릴다 얘는 틈만 나면 어디론가 사라져서 안 나타나잖아.”
“아하하… 메릴다가 좀 방랑벽이 심하긴 하지….”
지금도 예니카 덕분에 캠프엔 온갖 정령들이 가득하지만, 정작 메릴다는 보이질 않았다. 싸돌아다니는 게 취미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막상 중요할 때는 재깍재깍 나타나 주니 상관은 없긴 하다만….
“어쨌든, 메릴다에 대한 이해도를 착실히 올려놓을 수만 있으면, 훗날 정말 엄청나게 큰 전력이 될 거야. 고위 정령의 위력은 에드도 잘 알구 있잖아.”
그 위력만큼은 확실히… 나도 실감하고 있었다.
* * *
―타닥, 타닥.
기본적인 정령술 훈련을 끝내고 나니 이미 심야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예니카가 거주하고 있는 기숙사의 통금 시간도 조만간이었다.
철제 냄비에 갖가지 재료를 썰어 놓고 고기 수프를 끓인 뒤, 예니카와 나란히 앉아서 그릇에 나눠 담고 야식을 해결하던 차였다.
“안녕하십니까.”
벨 마이아는 항상 전조도 없이 등장한다.
메이드들 특유의 항상 조용하고 조신한 기질. 덕분에 워낙에 조용해서, 숲에서 마주치면 내심 놀랄 수밖에 없다. 선임 메이드 시절에야 갖가지 약초나 식물들을 채취하러 오곤 했지만, 메이드장 직위에 오른 뒤에서야 정말 북쪽 숲에 들를 일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메이드장 직위에 오른 뒤에도 루시에 대한 관리만큼은 항상 직접 하는지… 가끔은 이 북쪽 숲에 루시를 찾으러 오곤 한다.
이렇게 갑작스레 캠프에 나타난 것도 마찬가지다.
“…루시 찾으러 오셨어요?”
“…예. 내일 학사 차원에서 오필리스관 점검이 있을 예정입니다. 부교장 레이첼 님이 직접 행차하신다고 하니, 학년 수석이신 루시 아가씨도 꼭 자리에 있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을 하고 있자니, 이미 루시는 해먹에서 끌려 나와 벨의 품에 잡혀 들어가 있었다.
…저항의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이미 해탈한 표정이었다. 대체 루시에게 있어서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란 무엇일까…?
조신한 모습으로 품에 루시를 꽉 잡은 채, 벨은 목 언저리로 단아한 머리칼을 늘어뜨리며 인사를 건넸다.
“사망 소식 들었을 때는 참 많이 놀랐는데, 이리 건강히 살아 계신 모습을 보니 여러모로 안심이 되는군요. 드디어 마음을 놓게 된 느낌입니다.”
“괜히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벨 씨. 이쪽도 나름 사정이 있었던지라.”
“제게 죄송하실 것까지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그거 아십니까? 학사 차원에서 또 공문이 나왔는데, 학생 보조하는 말단 메이드들 기강이 많이 해이해진 것 같습니다. 메이드 된 입장에서 언제나 낮은 위치를 자처하는 것이 미덕인데 말입니다. 통탄할 노릇입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제가 말을 놓진 않겠지만….”
“…어쨌든 학사 차원에서도 민감해 하고 있는 문제이니, 이런 시기를 틈타서 메이드들과 학생 사이의 상하 고용 관계를 다시 정립하고, 업무 내용도 철저히 점검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말을 높이고 낮추는 문제 말입니다.”
“과연… 그렇군요…. 그래도 전 계속 존대할 거지만….”
잠시 침묵.
항상 지그시 눈을 감고 있거나, 조신하게 무표정한 모습을 일관하고 있는 벨이기에 저런 식으로 도끼눈을 뜨고 누군가를 쳐다보는 모습은 신선하다.
대체 이 무의미한 신경전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그건 그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여기까지 오고 나니 피차간에 알 수 없는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번져 버린 느낌이다.
대체 누구를 위한 싸움이냐…. 알 수 없지만 또 기묘하게 지고 싶지도 않다.
“예니카 아가씨도 덱스관으로 넘어간 뒤로 쭉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응…! 오필리스관에 있을 때에 비하면 불편한 점도 많지만, 또 친구들이랑 부대껴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아…!”
빙긋빙긋 웃으며 벨에게 화색을 내비치는 예니카.
예니카가 오필리스관에 있을 때 가장 각별하게 알고 지내던 메이드가 바로 벨 아니던가. 당시에는 메이드장이 아니라 선임 메이드 직위였지만, 간만에 봐도 서로 반가운 것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어쨌든 점검 준비도 하고, 루시 아가씨도 다시 단장시켜야 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두 분도 부디 건강 잘 챙기시고, 학업 생활하시는 데 큰 문제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벨은 그렇게 루시를 안은 채로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풀숲 사이를 헤치며 캠프를 떠났다.
메이드장 직위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온갖 서류 업무에 의전 업무가 잔뜩 쌓여 있을 텐데, 직접 루시까지 관리하고, 심지어 빨래나 청소 같은 말단 업무까지 직접 손을 뻗친다고 하니… 학사 차원에서야 이런 금덩어리 같은 인력이 또 없을 것이다.
그 나잇대에 비해 좋은 대접을 받고, 벌이도 제법 좋은 데는 다 이유가 있을 법. 언젠가 메이드장 직위에서 은퇴하고 나면 뭐 하고 살지 궁금한 사람이었다.
문득 예니카는 뭐라도 생각난 듯이 자기 손바닥을 때리더니, 이윽고 혼자서 몸을 배배 꼬기 시작한다.
“있잖아, 에드.”
그러다가 새삼스럽게 나를 불렀다.
커다란 나뭇등걸에 나란히 앉아 있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예니카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제 캠프에 단둘이 남은 셈이다.
“그… 이상한 부탁 하나 해도 돼?”
“이상한 부탁…?”
“그…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장난치는 느낌…? 놀이 같은… 뭐어 그런 느낌으로… 왜… 아무튼 좀… 이상한 부탁이긴 한데….”
예니카는 땋아 내린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스튜를 담은 그릇을 불가에 내려놓고서는 이야기했다.
“우, 우리 존댓말 한번 써 볼까…?”
“존댓말…? 굳이? 왜?”
“그, 그냥 굳이 해 보는 거지. 관계의 재정립… 이라는 그런 거창한 말은 또 좀 그렇고…! 그냥 거리감이라는 걸 벌려 보기도 하고, 또다시 줄여 보기도 하는… 아무튼 그런 게 유행이래…! 역할 놀이 같은 거야…!”
“…별게 다 유행하네. 그리고 애초에 우린 친하잖아. 뭐 하러 굳이….”
예니카는 내 팔뚝을 휙 하고 잡아서 시선을 끌더니 고개를 붕붕 저으며, 한 번만 해 보자고 애원하는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워낙 예니카에게 받은 게 많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면 또 거부하기도 좀 그렇다. 애초에 예니카가 이유도 없이 남한테 이렇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긴 하지….”
“그렇지? 그냥 해 보는 거니까…! 장난 삼아서 잠깐 해보는 건데 굳이 그리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구…!”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지만, 예니카가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툴툴대며 싫은 소리만 하는 것도 좀 실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예니카는 괜스레 몸을 다시 꼬고서는… 갑자기 정좌해서 앉았다. 괜히 무릎만 아프게 왜 그러나 싶어서 편하게 있으라고 하자 한다는 말이
“그러니까… 단순히 존댓말만 한다기보다는… 음… 정말 만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하는 거야…. 학교에서 만난 동년배라는 느낌보다는 뭐랄까…. 그냥… 어색하진 않은데… 서로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는…?”
“…혹시 평소에 내가 널 존중하지 않고 예의도 안 지킨다고 생각했다면 미안하다…. 나는 친하다 생각해서 그랬는데, 만약 내가 그런 부분에 눈치가 없다 생각하면….”
“아니아니아니, 그런 의미 아니야…! 나 그렇게 돌려 말하는 성격 아닌 거 알잖아…! 오해하지 마, 정말 그런 거 아니야…!”
예니카가 화들짝 놀라서 호들갑을 떨며 만류했다.
“그, 그냥… 한 번쯤은 이렇게 해 보고 싶었어.”
“…….”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예니카는 그대로 얼굴을 푹 숙였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정좌한 그대로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정적만을 유지하는 것이다.
별 대단한 것도 아니고 좀 어울려 주면 될 뿐인 일 아닌가.
나는 그렇게 ‘말 몇 번 주고받다 적당히 인사하고 돌려보내면 되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덱스관의 통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슬슬 보내야만 한다.
뭐 대단한 일 한다고 예니카는 몇 번인가 심호흡을 하더니, 갑자기 팔을 무릎 위에 모으고선 조신한 모습으로 목을 가다듬는다.
얼굴에는 이미 열기가 확확 올라와 있다. 본인이 하자고 했던 주제에 몹시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다. 이윽고 말을 꺼낼 때조차도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여서, 평소처럼 발랄한 모습과는 그 간극이 너무 극단적으로 느껴진다.
이어지는 말의 파괴력을 나는 과소평가 하고 말았다.
“아, 안녕하세요… 에드 씨.”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인 채,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기색을 날려 보고자 주변에 곁눈질을 해 대며 말을 거는 모습이 문제인 것일까.
애당초 감정이라는 것은 전염되는 기질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거 아닌 일인 것 같아도, 정작 당사자가 저렇게까지 부끄러운 듯 몸을 꼬고 있으니 이쪽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아, 예….”
그렇게 말하고 다시 침묵.
대관절 부끄러워할 이유가 뭐냐며, 세상 사람 그 누구한테 물어봐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건만… 쉽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원인은 그리 쉽게 규명이 되질 않는다.
무엇보다, 단순히 말씨를 바꾸었을 뿐인데 팍 하고 멀어진 거리감이 새삼 그녀와 나 사이의 관계를 객관화시킨다.
친하고, 각별한 사이였기에 어느샌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한 걸음 떨어진 상태로 서로의 관계성을 재고해 보면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인간이었던 것이다.
예니카는 언제나 생기발랄하게 웃으며 친숙하게 굴고 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쉬이 가까이할 수 없는 인간이다.
용모가 아리따운 것이야 두말하면 잔소리고, 사실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고위 정령을 다루고, 학사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로 인정받으며, 졸업 이후에도 뭔가 해낼 것이 확실해 보이는 인재 중의 인재다.
새삼 그 사실을 잊고 만 것은 가족처럼 편안한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친숙함이라는 안경을 내려 쓴 채 소녀를 보고 있으면, 그 낯선 느낌에서 오는 묘한 긴장이 다시금 현재 상태를 인식시킨다.
단 한 마디씩 주고받은 말을 끝으로 우리는 거의 3분째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어… 그….”
내가 이렇게까지 협조해 주었으니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는지, 예니카는 목소리를 높여 보려 했으나….
“아, 아니에요….”
제 손끝을 휙휙 쓸어대며 다시 개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을 보이는데… 당연히 나까지 긴장이 될 수밖에 없다. 누누이 말하고 있지만, 서로 예의 좀 차리고 존댓말 좀 쓴다고 왜 이렇게까지 예니카가 긴장하고 있는 건지 대관절 알 수가 없다.
나는 괜스레 숨을 꽉 참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마치 누가 누가 오래 버티냐 숨 참기 싸움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먼저 저쪽에서 ‘파핫.’ 하고 숨을 내쉬며 여기까지만 하자고 배시시 웃고서는… 시간이 늦었다며 그릇을 치우고, 내일 일정에 대한 잡담이나 좀 주고받다가 기숙사로 돌아가는 시나리오가 휘리릭 그려졌으면 좋겠건만….
대체 언제까지 숨을 참을 것인지, 이 미칠 듯한 분위기는 계속 유지되고만 있는 것이다.
이쯤 되니 나도 깨달았다. 이미 감정의 흐름이 일선을 넘어간 상황이다. 얼굴이 아예 사과처럼 붉어진 예니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릎을 꽈악꽈악 쥐어 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명확하다.
제안한 예니카 본인도 이렇게까지 속이 타들어 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막상 실천해 보고 나니 감정의 간극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고, 어떻게 수습할지도 모르는 상황. 브레이크 위치를 못 찾는 초보 운전자 같은 모습이다.
여기서는 아무래도 내가 이를 악물고 먼저 치고 나가 주는 게 맞다는 판단이 들어, 뭐라 말을 해 보려는 순간….
“아앗, 나 좀 봐! 이제 곧 기숙사 통금 시간이네…!”
예니카가 확 하고 바닥을 차고 일어나서는, 얼른 코스모스 자수가 예쁘게 박혀 있는 숄을 챙겨 입고, 떡갈나무 지팡이를 챙겨 들었다.
“아… 저… 그….”
그리고 최악의 선택지인 도망, 즉 ‘상황의 유지’를 선택하고 만다.
“오, 오늘 고마웠어요. 내, 내일 또 봬요.”
지팡이를 양손으로 꽉 쥔 채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하고서는 얼른 풀숲 사이로 도망치는 모습.
그렇게 예니카는 순식간에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
찌르르 울려 대는 풀벌레 소리만 은은하게 깔린 캠프.
모닥불 앞에 한동안 나 홀로 앉아 있다가… 이윽고 나는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이 짓을… 계속한다고…??”
등허리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