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11)
이보세요, 예니카 씨 (3)
황도에서 말을 타고 삼 일 밤낮을 달려야 나오는 동부 스파르데 지방은 목축지가 두루 발달한 지역이다.
클로엘 제국을 도는 축산물의 4할이 바로 이 스파르데 지방에서 생산되며, 그 유명한 ‘목축의 땅 퓰란’도 바로 스파르데 지방의 남부에 위치한 산맥 지대를 이르는 말이었다.
퓰란의 산골짜기를 타고 깊숙이 들어가다 능선 부근을 훑어보면, 인구가 삼백이 채 안 되는 작은 마을 토렌이 나온다.
한없이 규모가 작은 마을이지만, 이 마을에서 생산하는 축산품의 양은 마을 크기에 비하면 정말 대단한 수준이다. 작은 도시 하나는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마을 인구의 절반이 목축업에 종사하고, 나머지 절반은 축산품의 가공업에 종사하는… 산골짜기의 작은 목축 마을.
그 외곽에 있는 적당한 규모의 목장. 4대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페일로버 목장. 그 목장의 외동딸이야말로, 이 토렌 마을의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옹알이를 뗐을 때부터 이미 정령을 보기 시작한 소녀 예니카 페일로버는, 그 누가 보아도 훗날 이 마을을 빛낼 천재 중의 천재다.
산골짜기에 처박힌 목축 마을. 거주민들도 하나둘씩 고령화되어 가고, 도시를 동경해 마을을 나간 젊은이들도 연락이 뜸해지던 시기.
좋게 말하면 평화롭고 정적인 마을이고, 굳이 나쁘게 말하자면 변화 없고 단조로운 마을이다.
그런 닫힌 세상에서 비범한 능력을 타고난 예니카가 어떤 유년기를 보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마을 사람들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은 필연이었다. 애정을 듬뿍 받았으니 당연히 모난 곳 하나 없이 예쁜 성격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다.
자그마한 유체 정령과 함께 계란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낑낑 안아 들고, 마을 광장을 거닐며 오늘 갓 나온 식품들을 이웃집에 나누어 주러 다니는 모습.
활기찬 얼굴로 담장 사이를 뛰어다니면 마을 사람들이 살갑게 인사를 건네주던 때의 기억이 예니카에게는 아직도 선명하다.
하늘에는 게으름 피우며 흘러가는 구름이 몇 덩어리. 푸르른 초목으로 뒤덮인 산맥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마찬가지.
마을에 드나드는 외부인이라 봐야 이따금씩 가격 협상을 하러 오는 행상인이나, 물류 일을 하는 인부들, 혹은 우체부뿐이다.
십몇 년이 넘는 세월을 그런 마을에서만 자라다 보면 항상 보던 얼굴만 보고 살 수밖에 없다.
옆집의 두린 씨, 건너편의 레테 씨, 광장 옆에 사는 아룬 씨, 촌장 알커스 씨.
그래 봐야 유년 시절밖에 안 보낸 예니카였으므로 모두 연장자들뿐이다.
고여가는 산골짜기 마을답게 출산율은 처참한 수준이다. 예니카는 거의 일평생을 그 마을의 귀염둥이 막내로 살았다.
그렇기에, 자기를 향한 깍듯한 존대는 경험해 본 기억이 없다.
고향을 떠나 실베니아에 진학한 지 어언 3년 차. 슬슬 익숙해질 시기도 한참 지났건만, 아직 어른이 덜 된 예니카에게는 아직도 낯선 것이 많이 남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 깍듯한 존대였다.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에게 받는 대접에 익숙해지는 데만도 거의 반년은 걸렸었다.
“이보세요, 예니카 씨.”
문득 예니카는 제 이름을 부르는 학사 직원의 말에 얼른 정신을 차렸다. 장소는 트릭스관의 행정 업무 상담실이었다.
“오늘도 찾아오셨네요.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는데… 상담하거나 신청하실 게 있으면 그냥 말씀해 주세요. 확인하고 저희 행정 처리 쪽 일이 맞다면 금방 처리해 드릴 수 있어요.”
“아, 그으… 저어….”
꼬박꼬박 존대를 해 주는 학사 직원 앞에서 예니카는 잠시 우물쭈물했다. 당장 옷소매 안에 있는 서류를 제출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휙휙 고개를 가로저었다.
학사 직원은 한숨을 푹 쉬더니,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렇게 고민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 어쩔 줄 모르겠으면 주변 사람들과 상담을 좀 해 보세요, 예니카 씨. 예니카 씨가 곤란하다, 상담이 필요하다, 뭐 이런 말을 하면 발 벗고 나서 줄 사람들은 학사 내에 무척 많잖아요.”
“아, 하하… 남한테 상담하기는 또 어려운 문제라서어….”
예니카는 그렇게 말을 얼버무린 뒤 행정 업무 상담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리고 제출하려다 말았던 서류를 다시 펼쳐보고는 한숨을 흘린다.
“항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면서 살기도 바쁜데… 왜 안 좋은 생각은 꼭 틈이 생길 때마다 비집고 들어오는 걸까.”
예니카는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고서는, 다시금 자기 생각을 정리했다.
요즘 들어 정말 분에 넘치도록 쾌적하고 행복한 학사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수업은 그럭저럭 전부 감당할 만한 수준이고, 친구들과는 매번 화기애애하며, 예니카를 동경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고, 기숙사 시설도 그럭저럭 쓸 만한 데다가, 짝사랑하는 소년이랑 하루 종일 같이 다니기까지 한다. 오늘 아침에도 실랑이를 좀 벌이긴 했지만, 말 그대로 해프닝 정도일 뿐이다.
여러모로 정말 입꼬리가 내려갈 일이 없는 하루 일과다.
이렇게 행복한 학사 생활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여기서 더 불만을 표했다가는 배부른 사람이 욕심을 부린다고 질타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예니카의 선하고 진심 어린 성격에서 오는 문제점은 해결된 적이 없다.
그 고질적인 문제는 이따금씩 가슴 속에서 묘한 통증을 유발한다.
예니카는 자기가 작성해 두었던 서류를 꺼내어서 한번 스윽 읽어 보고,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걸 어쩔까 고민하다가 근처 쓰레기통에 휙 던져 버린다.
거의 꽉찬 쓰레기통의 꼭대기를 예니카가 밀어 넣은 서류 하나가 미끄러지듯 들어와 안착한다. 그제야 그 내용이 조금 눈에 들어온다.
― 기숙사 퇴사 신청서: 덱스관 ―
이윽고 한 번 더 고민하고 생각이 또 바뀌었는지, 예니카는 얼른 쓰레기통으로 돌아와 서류를 휙 빼내었다. 또 고개를 이리저리 휘돌리며 고민에 빠지지만… 결론이 나는 일은 없다.
기대하고, 선망하고, 배려하고, 존경하고, 존중하는 그 눈빛들이 얼마나 큰 무게추가 되어 본인의 어깨를 짓누르는지… 예니카 본인조차도 잘 모른다.
그런 것들이 부담스러워 도망을 간다는 발상 자체가 힘들다. 당연한 일이다. 도망이라는 것은 고되고 힘들거나, 밉고 싫은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행위다.
덱스관 친구들이나 직원들, 룸메이트들이 예니카에게 보내 주는 기대감과 시선들을 어찌 짐짝처럼 여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니카는 알고 있다.
개인실을 쓰는 오필리스관에서 다인실을 쓰는 덱스관으로 옮겨 간 지 거의 1년 좀 못 됐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예니카가 제대로 마음을 놓고 편히 쉴 수 있었던 공간이라고 해 봐야… 결국 에드의 캠프밖에 없었던 것이다.
* * * [ 감개무량하지 않아…? 작년 이맘때쯤에는 내가 바로 옆에서 지그시 쳐다보고 있어도 몰랐던 네가, 이제는 이렇게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나를 불러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거 말이야. 막상 계약 관계가 되고 나니 참 각별하지? ]
“…….”
[ 물론 꼭 계약 관계여야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에드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연하게 굴고 있지만, 고위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지 아니…? 이 학원의 강자들… 직스? 웨이드? 클레비어스? 전부 내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만 있다면 별것도 아니야~ 온전한 힘을 다 발휘할 수가 없어서 문제지. ]“그렇다면….”
[ 물론 네가 그 정도 경지에 오르려면 정말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야. 예니카 같은 특이 케이스랑 비교하면 안 돼. 그래도 훈련 자체를 계속하면 감응력도 좋아져서 날 더 잘 다룰 수 있게 되겠지만… 음, 너무 먼 미래인가? 그래도 뭐 어때 하루 이틀 보고 말 사이도 아닌데. ]북쪽 숲의 캠프를 나와서 학사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나오는 자그마한 호수.
그 중앙의 잔디섬 위에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는 ‘메릴다의 수호목’은… 자연 발생하는 마력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자리이자, 예니카의 주요 정령술 수련 장소 중 하나였다.
불완전한 메릴다를 불러낼 만한 장소로 이만한 곳이 또 없었다.
얇은 어깨끈이 달린 순백색 원피스를 걸치고 있는 백발 소녀의 형상. 그 모습은 언뜻 보기엔 인간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내가 마력을 과투자해 가면서 까지 메릴다를 불러낸 이유는 어제 예니카와 나누었던 이야기 때문이다.
고위 정령과의 이해도를 높여 놓으면 높여 놓을수록 향후 내 전투 능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확언했었다. 나 또한 그 의견에 동감했었고.
결국 이해도란 스탯은 얼마나 자주 부대끼고, 전투에 활용하고, 현현시켜 보고,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보냐가 핵심인데… 이렇게 인간 형태로 현현시키는 것만으로도 마력을 거의 다 잡아먹어 버리니 내 입장에서는 다소 곤란했다.
그래도 불러냈더니 제 혼자 알아서 주절주절 떠들어 주는 건 그나마 편했다.
예니카가 평하길 세상에 둘도 없을 수다쟁이다. 나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예니카의 그 평가가 정확했음을 실감했다.
[ 그래서, 예니카랑은 어떤데? 좌충우돌 우당탕탕 상호존중 존댓말 놀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야? ]“너도 다 보고 있었으면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의도가 뭐냐.”
[ 학사까지 따라다닐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아~ 수업 중에 뭔가 또 해프닝이 있나 궁금하잖아~ ]메릴다는 수호목의 굵은 뿌리 근처에 걸터앉아서 휙휙 다리를 젓고서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거기다 대고 굳이 거짓말할 이유도 없으므로… 나는 오전에 예니카와 벌이고 왔던 실랑이를 그대로 이야기해 주기로 했다.
늘 그렇듯, 아침에 일찍 교수동에서 만난 예니카에게 인사를 건네자, 예니카는 또 떡갈나무 지팡이를 안으며 화들짝 놀라고는 뒷걸음질을 쳐 댄 것이다.
누가 봐도 어제의 여파가 남아 있었던 게 분명하다. 하여튼 괜한 일을 해서는 서로 간에 묘하게 불편한 분위기만 조성된 느낌이다.
[ 흐음~ 그래서…? ]그대로 예니카는 뭐라 말을 꺼낼지 몰라서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피하다가, 반갑다고 인사를 한 뒤 휙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다.
그 와중에 여전히 존댓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 안하고 있었는데, 이쯤되고 나니까 걔 내면적으로 뭔가 몰려있거나… 아니면 ‘내재된 스트레스 같은 게 묘한 방향으로 표출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
[ 어머, 예니카가 걱정돼? ]“당연히 걱정되지.”
[ 호오~ ]뭐가 그렇게 신난 건지, 메릴다는 다리를 휙휙 휘저어 대며 고개를 까닥까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띄우고서는 또 내게 물어 댄다.
[ 확실히 가만 놔두기엔 좀 위태위태한 느낌이 있었지? 뭐라도 해 줘야지. ]“그래서 묻는 건데, 이 나무에서 쓸 만한 가지 두어개만 좀 꺾어 가도 되냐…?”
[ 나무? 갑자기? ]나와 메릴다가 나란히 기대어 앉아 있는 이 수호목은 천 살이 넘게 살아 있는 고목이다. 이토록 오래된 고목일수록 마력을 부드럽게 흡수하고 또 발산하는 성질이 있다.
이 메릴다의 수호목은 마공학 용품 공정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좋은 재료인 것이다. 거기에 벼락 마법까지 부여하면, ‘벼락 맞은 천년 나무 지팡이’의 온전한 재료로 사용할 수 있다.
예니카가 들고 다니는 오래된 떡갈나무 지팡이에 비하면 그 성능도 편리함도 몇 수는 앞설 것이다.
그 사실을 그대로 요약해 메릴다에게 전달하자, [ 흐음~ 그렇구나… 근데, 엄밀히 말하자면 굳이 내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어. ]
“이 나무는 네 나무 아니었냐…? 이름부터가 메릴다의 수호목인데…?”
[ 글쎄, 그건 좀 애매한 문제야. 옛날에 만났던 친구가 그냥 내 이름을 이 나무에 붙여 주었을 뿐이거든. 나는 이 숲의 주인을 자칭하고 있지만, 좀 오래됐을 뿐인 나뭇가지 하나 꺾어 내는 것까지 관리질하진 않아. 네 좋을 대로 해. ]“옛 친구라… 하긴, 너도 오래 살았을 테니 여러 인연이 있었겠지.”
메릴다는 흰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폴짝폴짝 뛰어 나무 근처를 돌더니, 이내 내 옆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자기 양어깨를 훌훌 털어 내면서 제 딴에는 요염한 자세를 취해 대는 것이다.
[ 애초에 내가 이렇게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잖아. 이게 그리 쉬운 건 아니라고 말했지?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라 생각해? ]“어떻게 가능하다니… 관련 마법을 익힌 거 아니냐?”
[ 흠… 좀 달라. 고위 정령쯤 되면 말야, 이런저런 형태로 변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친숙하고 편하냐, 혹은 잘 따라 할 수 있느냐야. 완전히 세상에 없는 실체로는 변신하기 영 힘들어. 대부분의 정령들이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이유도 그렇지. 자연에서 가장 쉽게 만나 볼 수 있잖아. ]그리고 빙긋빙긋 웃으면서 원피스 자락을 정강이 언저리까지 들어 올리고 슬쩍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제국의 예법이었다. 이렇게만 보고 있으면 정말 사람이랑 다를 게 없다.
[ 그러니, 이런 인간 모습 또한 기준점으로 모방해 낼 사람이 필요하단 말씀. 기본적으로 에드 너랑 계약을 했으니, 너의 내면 심리를 받아들여서 가장 네 이상형에 가까운 소녀가 되었다 이 말이야. ]“…뭐?”
[ 어때? 사람의 내면 심리는 속여 넘길 수가 없어서, 이렇게 하고 있으면 괜스레 심장이 뛰지 않아? 네 이상형의 소녀가 바로 눈앞에 서 있잖아. ]나는 턱을 괸 채 이리저리 호들갑을 떨어 대는 메릴다를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취향이 이랬다고…? 확실히… 의외네….”
[ 당연히 의외일 수밖에. 거짓말이니까. ]“…….”
장난하냐.
그런 의미를 담아서 도끼눈을 뜨고 째려보자, 메릴다가 ‘캬하학’ 하는 발랄한 웃음소리와 함께 옷자락을 잡고 이리저리 몸을 돌려 댔다. 마치 새 옷을 사서 신나있는 소녀 같은 모습이다.
[ 내면 심리 같은 걸 읽어서 모방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사실을 말해 보자면, 만나 본 사람 중에서 가장 각별했고 특이했던 사람의 모습을 모방한 거야. 이렇게… 별로 화려한 복식도 차려입지 않고, 항상 털털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지. 이 나무에 내 이름을 더해 붙여 준 것도 바로 그 애였고 말야.]다시금 메릴다의 인간 모습을 보았다. 완전히 현현되어 모든 걸 다 부술 기세로 날뛰던 거대 늑대와는 그 괴리가 너무 커서, 솔직히 잘 적응이 되질 않았다.
“누군데?”
내가 그리 묻자, 메릴다는 바로 대답하진 않았다. 빙그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 나는 긴 세월을 살았지.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흥망성쇠조차도 귀엽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야. 지금이야 이 아켄섬과 실베니아 아카데미가 떼어 낼 수 없는 한 몸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내가 살았던 아득한 옛날 여기는 아카데미조차 없는 그냥 무인도일 뿐이었어. ]메릴다는 뒤로 꼬리처럼 올려묶은 머리칼을 휙 풀어 버렸다. 생각보다 더 풍성했던 머리칼이 풀어 헤쳐지자 인상이 확 달라진 느낌이 난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헛숨을 삼키고 말았다. 묘하게 익숙한 얼굴이다 했더니, 마법학 역사서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그 비슷한 모습을 보았다.
[ 어때? ]수호목에 마력을 주입해 그 원천으로 만들고. 이 학교를 세우고. 메릴다에게 이 숲을 지켜달라고 부탁해 두었을 정도로 오래된 인물.
과연, 이게 이렇게 엮여 있었던 것인가.
내가 몰랐던 것이니만큼, 시나리오에서도 조명받지 못했던 관계도였다.
눈앞의 소녀는 메릴다가 불완전하게 현현한 모습이다. 누구를 닮았는고 하니,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먼 옛날 그 누구보다도 강대하며 노련했던 마법사이자 학술가.
대현자 실베니아의 모습이었다.
* * *
“성황님이… 방문하신다고요…?”
장소는 학생회관과 붙어 있는 오벨관, 그곳의 학생회의실이었다.
타냐 로스테일러가 학생회장 직위에 앉아 제대로 일 처리를 시작한 지는 대략 닷새 정도 지났다.
아직 적응기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타이밍이지만, 이런 요직일수록 넉살 좋게 적응하고 있을 시간적 여유를 주는 법이 없다.
학생회 서기로부터 전달받은 보고 서류 중 가장 큼지막하고 중요하게 체크된 부분.
텔로스 교단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남자. 성도 카르페아를 통치하는 성황 엘데인.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대주교 베르디오.
일반 주교급의 성직자가 온다 해도 준비해야 할 의전이 잔뜩인데, 성도의 거물급 인사 두 명이 한 번에 방문한다는 소식은 듣기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방문 목적은….”
타냐는 서류를 쭉쭉 훑어 내려갔다. 속독엔 나름 자신이 있었다.
방문 목적이라고 해도 별건 없었다. 주신 텔로스 님의 은혜를 널리 알리고, 새로이 세례를 받을 신도를 맞이하고, 또 연단에서 설교나 좀 하다가 갈 예정이었다.
그래봤자 표면적 이유일 뿐이겠지만 말이다.
한없이 고귀한 텔로스 교단의 성황이 직접 이 제국의 외진 아켄섬까지 방문할 이유… 결국엔 교단에서 금이야 옥이야 아끼는 성녀 클라리스일 것이 뻔했다.
성녀 클라리스는 텔로스 교단의 심장이라고 해도 될 소녀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신의 사랑을 받는 종복마저도 피해 갈 수는 없었으니, 결국 이 배움의 땅 실베니아로 오게 된 것이 이번 학기 초였다.
아마 성황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성녀 클라리스가 제대로 대우를 받고 있는지, 시설은 괜찮은지, 위험은 없겠는지.
혹시라도 결격 사유가 있다면 다시 클라리스를 데려가 버릴 가능성까지 감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요즘 들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실베니아라면 결격 사유가 몇 개 정도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흠… 오늘 일 마무리 짓고 나서 오필리스관에 계시는 성녀님을 한번 만나 볼 일정을 잡아 봐야겠어요. 서기 일레느 양, 괜찮겠어요?”
“넵. 호위 인력 쪽에 문의 넣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학생회 서기는 다른 서류들을 더 꺼내 들었다. 아직도 뭐가 잔뜩 남아 있는 것이다.
“아, 맞다. 성도 측에서 따로 면담하고 싶은 학생에 대해서 문의하던데요. 학사 쪽으로 이관할까요? 아니면 체크해 보시겠어요?”
“면담… 이요…? 누구를요? 성황씩이나 되는 사람이 성녀님 말고도 따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네. 현 2학년 소속이네요. 마법부의 아델 세리스라고 하는데….”
“아델… 아델… 이름은 들어 본 선배님이네요.”
“네… 워낙 바람 같은 분이라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특이한 분이라 들었어요.”
타냐는 턱을 쓸고 나서 잠시간 고민했다.
“뭐, 그쪽에서 요청했으면 또 안 된다고 할 이유는 없죠.”
이 타이밍에 아켄섬으로 성황도의 사람들이 온다는 것.
썩…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 * *
―타닥, 타닥. 화르륵.
그래서 결국 예니카를 다시 만난 건 밤이 늦은 시간이 되어서다.
거, 존댓말 한번 주고받은 거 가지고 피차간에 과부하가 걸려서, 만 하루에 가까운 시간을 감정 수습하는 데 소모한 것이다.
야밤의 캠프.
나는 모닥불 가에 앉아 기초 마법식을 암기하면서 동시에 과도로 사과를 깎고 있었다.
이제는 식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영양소를 따져 가면서 여러 음식을 두루 섭취할 수 있게 되었다.
식후에는 매번 과일을 섭취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 정말 생활이 많이 안정되었다는 실감이 팍 난다.
적당히 다리를 까딱대면서 과도로 사과를 툭툭 두 번 두들기고 있을 때가… 풀숲을 헤치고 예니카가 나타난 때였다.
나는 잠깐 사과를 깎던 손길을 멈추고 예니카 쪽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먼저 인사할까 하다가… 일단 잠시 가만히 있어 보았다.
“아… 안녕…”
“…….”
“…하세요? 아니, 안녕? 하지…? 하세요…?”
얘는 아직도 고장 나 있었다. 대체 뭐 얼마나 부끄러웠던 거냐.
근데 나라고 해서 딱히 뭐라 말문을 트기 애매해서… 그냥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당황스러웠던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수 초 정도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예니카가 수줍은 모습으로 쫄래쫄래 걸어와서 불가 바위에 조심스레 앉았다.
나는 반쯤 껍질이 깎여 나간 사과를 스윽 들어 보이며 물었다.
“사과… 먹을래…? 아니, 먹을래요?”
“네, 네에….”
“…….”
과도는 그대로 나아가던 방향을 유지한다. 잠시 서걱서걱 사과 껍질이 깎여 나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접시 좀….”
“여, 여기 있어… 자….”
존대를 하든, 아니면 시원하게 하지 말든 둘 중 하나만 하면 안 될까…? 그래야지 이 숨 막힐듯한 분위기가 어떻게든 수습이 될 것 같은데.
예니카는 아직도 호흡이 가빠지는지 고개를 휙휙 돌린 채 한 번씩 심호흡을 한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접시를 받아 든 예니카는 사과를 하나 집어 든 채 토끼처럼 사각사각 갉아먹기 시작했다.
나도 큼직한 조각 하나를 들어서 입에 문 채, 나머지 사과 한 개도 깎기 시작했다.
그대로 또 잠시간 정적.
“…….”
“…….”
그러다가 갑자기 예니카는 자기 무릎에 휙 하고 얼굴을 묻는 것이다. 하여튼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예상이 안 간다.
“뭐, 뭐냐… 예니카…. 어디 아프냐…?”
“아, 아니. 그, 그냥 얼굴 보고 하기 좀 그런 말이라서 그런데… 일단 그러니까 에드, 아니 에드 씨. 제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 굉장히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그런 질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일단 끝까지 듣고 나서 대답해주면 좋겠어… 아니, 좋겠어요….”
“…….”
자기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속사포로 이야기를 쏴 대는 예니카를…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최대한 별거 아니라는 듯이 사과를 깎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예니카는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진 이후로 혼자 뛰쳐나가서는, 모종의 고민을 잔뜩 하고 온 것 같다. 그리고는 내게 뭔가를 물어보겠다고 하는 걸 보면… 자기 나름대로 긴 고심 끝에 결정해 온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왔다면, 최대한 차분한 자세로 잘 들어 주는 것이 예의다.
어떤 이야기가 나오든 어이없다는 얼굴 절대 하지 말고, 당황스러워하지 말고, 설령 정말 당혹스럽다 하더라도 절대로 티를 내지 않도록 하자. 그 정도는 가능하다. 비록 몸뚱어리는 이렇지만 나는 어른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이어지는 예니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아무렇지 않게, 최대한 깔끔하고 담백하게 받아 주자는 결심을 되새겼다.
“혹시… 내가 덱스관에서 나와서… 에드랑 같이 캠프에 살면 어떨 거 같아…?”
―푸슉!!!
궤도에서 엇나간 과도가 엄지손가락을 깔끔하게 베어 냈다.
“…….”
핏줄기가 손가락을 타고 떨어지지만, 나도 예니카도 차마 상처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어두운 북쪽 숲의 캠프.
빛이 나는 별하늘이 언제나처럼 여전하다.
허나, 묘한 이변은 예고도 없이 찾아와 있었다.
그저, 나는 사과와 과도를 든 채 예니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예니카는 어떻게든 내 시선에서 숨어 보겠다는 듯이 귀까지 빨개진 얼굴을 제 무릎에 더더 깊숙이 파묻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타닥대는 모닥불 소리만이 야속하게 정적을 깨부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