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16)
합동 전투 실습 2 (2)
“안녕하십니까, 클라리스 성녀님. 금일 몸단장을 도와 드릴 메이드장 벨 마이아입니다.”
벨 마이아가 직접 실무 전선에 나서는 일은 극히 드물다.
선임 메이드 시절부터 그 실무 능력은 입증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지만, 메이드장 직위에 오른 뒤로는 관리 업무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법 비싼 몸이 된 벨 마이아가 직접 시중을 들 정도로 귀한 신분인 자는 많지 않다. 제아무리 귀빈으로 가득 찬 오필리스관이라 할지라도, 메이드장의 몸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설령 성녀라 할지라도 그 실력이 검증된 선임 메이드의 시중을 받을 뿐이다. 메이드장이 직접 출타하지는 않는다.
허나, 오늘은 굉장히 이례적인 날이었으므로 벨이 직접 나서야만 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머리 손질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오필리스관 최상층의 개인실을 쓰고 있는 성녀 클라리스는 가짜다.
혹시 모를 음모에 대비도 해야 하고, 좀 더 자유로이 학교를 다니고 싶어하는 성녀 본인의 뜻도 받아들인 결과, 온갖 마법을 잔뜩 두른 대역을 세워 놓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성황이 방문하는 날이다.
성황 엘데인과 그 최측근인 대주교 베르디오.
성녀 클라리스가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텔로스 교단의 꼭대기였다.
그 둘이 방문하는 날까지 대역을 내보낼 수는 없었다. 둘을 맞이할 때만큼은 성녀 클라리스 본인이 직접 나가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엘데인과 베르디오가 대역에 대한 사실을 모르고 있진 않겠지만, 그렇게 고귀한 두 사람이 오는 데 대역을 내보내는 것은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어도 예의가 아니었다.
그러니, 변방 소국의 약소 귀족 카일리 에크네는 잠시 세상에서 사라질 시기다.
대역은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내보내고, 성녀 클라리스가 되어야 할 때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빙긋 눈웃음을 지으며 몸단장을 위해 화려한 화장대 앞에 앉은 소녀.
그녀가 대역을 두고 두 번째 신분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교장 오벨과 3대 학장,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녀의 생활 환경을 관리하는 벨 마이아 정도다.
오늘은 대역이 아닌 진짜 성녀가 오는 날이니, 평소처럼 선임 메이드에게 일을 맡겼다가는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눈치챌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성녀의 신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벨 마이아가 직접 몸단장을 도와주러 나온 것이다.
그러나, 벨은 그게 헛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철부지 같고, 뭐든지 신기해하고, 사소한 것에도 눈에 불을 켜며 흥미를 보이던 밤색 머리의 귀여운 소녀 카일리 에크네는 간데없고….
거울 앞에는 차가운 백발을 늘어뜨린 붉은 눈동자의 성녀가 앉아 있다.
지그시 흘리는 미소나, 기품 어린 손짓 같은 것에서 대역을 하던 소녀와는 차원이 다른 고귀함이 느껴진다, 과연 이게 동일 인물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극명한 온도 차이를 느끼고 나서야 새삼 깨달았다.
성녀 클라리스는 평생을 교단의 아래에서 신자들의 경의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소녀다.
다소 어깨의 짐을 덜어 놓아서 철부지 같아 보이던 카일리의 모습도, 다시금 성녀의 옥좌에 앉으면 그에 걸맞은 기품으로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벨은 틈만 나면 박수를 치고 눈을 빛내던 카일리의 모습을 떠올리고 나니, 정말 신기할 정도로 클라리스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벨 씨.”
“예. 성녀님.”
말끔하고 윤기가 흐르는 백색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면서, 벨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오늘은 분명, 합동 전투 실습이 있던 날이었죠.”
“예. 공교롭게도 성황 방문일과 겹쳐서 성녀님께선 참가하기 힘들게 되셨군요.”
“…….”
클라리스는 잠시간 눈을 내리깔면서 실망의 기색을 내비쳤다.
근래 들어 필수 이수 학습에 임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어서 선배들과 교류할 시간이 없었다.
사실 학년 간의 교류에 그다지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2학년의 아델 세리스를 꼭 만나고 싶었다.
이번 합동 전투 실습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건만, 시기가 영 맞지 않아 클라리스는 실습 수업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성녀 된 신분으로 성황의 방문 현장에 나가지 않을 수도 없으니, 불가항력이었다.
사실 합동 전투 실습 같은 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다.
지금 시기에 그토록 고귀하고 바쁜 성황과 대주교가 직접 방문한다는 것은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클라리스는 이걸 사실상 특별 점검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매사 성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았던 두 사람인 만큼,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는지, 환경은 괜찮은지, 혹 위험한 일은 없었는지 모두 점검해 볼 심산이 분명했다.
솔직히 툭 까놓고 말해서 자신이 없다.
학교의 환경은 어떠한가. 클라리스가 입학하기 전후로 몇 번씩이나 난리를 치렀다고 했다.
작년에는 학생 하나가 학생회관을 점거하고 최고위 어둠 정령을 소환하려고 하질 않나, 교수 하나가 학사의 중요한 보물을 들고 도주하려다가 잡히기도 하고.
클라리스가 입학한 뒤로는 전체 수석이 기숙사를 쳐들어와서 부수고, 몰락 귀족 하나가 살인 사건에 휘말리기까지 하는 둥… 정말 어수선했다.
그래도 클라리스 본인이 휘말리지는 않았으므로 대단히 위험하다 할 것까지는 없었으나, 구설수가 많아서 좋을 건 없었다.
거기다가 클라리스는 성황도에서 나오면서 대주교 베르디오와 약속한 바가 있었다.
카일리 에크네로서 학교에 다니면서, 혹시 본인의 신분이 누군가에게 들키거나, 대중에 드러나는 순간이 온다면 학사 생활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베니아에 입학한 것도 반쯤은 억지를 쓴 결과이니, 그 정도 조건은 받아들여야만 했다.
“…….”
지난 몇 개월간의 학사 생활은 클라리스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꿈만 같던 자유의 시간이었다.
때때로 힘들고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 성황도의 탑 꼭대기에서 기도만 드리던 삶을 살던 때와는 명백하게 달랐다.
클라리스는 아직 성황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성황 방문 시기를 깔끔하게 넘겨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니 괜한 객기를 부리기보다는 지금은 조용히 엎드려 있을 때다. 합동 전투 실습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참는다. 아델을 만날 기회는 언젠가 또 찾아올 것이다.
“마음을 편하게 먹으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클라리스 성녀님.”
“어머, 긴장한 티가 많이 나나요?”
기다란 속눈썹 끝이 떨리는 걸 본 벨이 나지막이 진정시켜 주었다.
“오랜만에 성황님과 대주교님을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반가워서요. 좋은 인상 보여 드리고 싶고, 잘 지내고 있다고 딱 증명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네요. 그래서 안 하던 긴장도 하게 되나 봐요.”
“학사 생활이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네. 저는 졸업하는 날까지 이 실베니아에 몸을 담고 싶어요. 그런 생각이 드니까… 오히려 긴장이 되네요.”
벨 입장에서는 딱히 긴장을 풀어 줄 방법은 없었다. 이 이상 왈가왈부해 봤자 오지랖에 불과하니, 클라리스가 알아서 마음을 잘 추스르길 기원할 뿐이다.
빗으로 그 예쁜 머릿결을 쓸어내리면서, 벨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한없이 긴장될 때, 그 긴장을 푸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 다른 법이다.
클라리스도 그런 벨의 기색을 눈치채고는 그 손길에 조용히 몸을 맡겼다.
그렇게 치장을 하며, 클라리스는 별다른 이변이라 할 건 없길 기원했다.
내외적인 사건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변수도 없을 게 뻔했다. 애초에 카일리로서 살아갈 때의 모습과 성녀 클라리스로서의 모습은 그 괴리가 엄청나다. 그 누구도 쉬이 눈치채긴 힘들겠지만….
“…….”
문득, 클라리스의 뇌리에 한 인물이 떠오르고 말았다.
어쩌면 이 학사 안에 있는 유일한 변수. 성녀 클라리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학생.
숲의 오두막에서 홀로 생존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는 두 학년 위의 선배, 에드였다.
사실 그리 큰 변수까지는 아니다. 그는 척 보기에도 입이 무거웠다.
누구보다 먼저 성녀의 정체를 눈치챘지만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은 듯하다. 성녀의 정체 같은 소문이 돈다면, 삽시간에 학사 전체로 퍼져 나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라리스는 괜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은사 같은 사람인 대주교 베르디오는 독심술의 대가다. 대체 무슨 수를 쓰는지 알 수가 없지만, 속으로만 했던 생각이나 상상들을 속속들이 꿰뚫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클라리스에게는 통하지 않았기에… 성법술의 일종이라고 추측해 볼 뿐이다. 모든 성법술은 성녀에게는 그 위력이 발휘되지 않기 때문이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에드가 대주교 베르디오를 마주치는 일이라도 생겼다간 큰일이다. 성녀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들킬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걸 이제야 떠올리다니…!’
물론 숲에서 생존 생활을 영위하는 에드와 성황도의 대주교인 베르디오가 직접 마주칠 만한 일이 그리 쉽게 생길 리는 없다. 매우 작은 가능성인 셈이다. 그래서 더 신경 쓰지 못한 점도 있다.
허나 신경 쓰고 나니 괜스레 불길해진다. 방문한 김에 학생들과 대담도 주고받고, 세례식도 하고, 연설도 할 텐데…. 그 과정에서 정말 에드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마저 생겨난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니 클라리스는 손끝이 슬쩍 떨렸다. 무슨 수라도 미리 써 둬야 할까. 하다못해 미리 언질이라도 해 둘 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질 듯하다.
에드에게 지금 상황을 알려 두고, 성당 행사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 움직여 달라고 부탁할 수만 있으면 당장에는 안심인 것이다.
그 전까지는 도저히 안심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괜스레 긴장되어서 눈꺼풀이 덜덜 떨렸다. 그 작은 틈 때문에 모든 것이 탄로 나면 이 즐거운 학사 생활도 끝을 맞이해야 한다.
“…….”
그 모습을 본 벨 마이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생각보다 많이 긴장한 것처럼 보인다. 성녀쯤 되면 성황이나 대주교 정도는 일상처럼 만나고 다녔을 거라 상상했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벨의 그런 생각은 틀렸다. 클라리스가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좀 더 깊었다.
“그럼…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되는 차라도 한 잔 끓여다 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다만… 부탁이 좀 있어요. 외출 준비를 좀 해 주세요.”
클라리스는 후욱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상기된 얼굴로 벨에게 말했다.
“에드. 에드 로스테일러. 그를 만나면, 좀 진정이 될 거 같아요….”
“…예?”
여기서 그 이름이?
벨은 순간적으로 헛숨을 삼켰다.
삽시간에 벨의 머릿속으로 인간관계도가 탁 펼쳐진다.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만한 자리가 많지 않다. 더 복잡해져서 좋을 게 없어 보인다.
“그를… 지금 당장 만나고 싶어요…. 최대한 빨리요….”
“하지만 그… 시간적인 여유가….”
“성황님의 방문은 오후잖아요? 아직 오전도 한참 남았으니 시간적인 여유는 있는 편인 거예요….”
벨은 왜인지 모르겠으나 에드와 성녀를 만나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벨이 막아설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 그렇습니까….”
단지, 벨답지 않게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할 뿐이었다.
* * *
성도의 주민들은 바퀴 달린 궁전이라고 표현했다. 성황의 마차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언제나 으리으리한 호위 인력을 대동하며 움직이는 성황의 마차는 방이 다섯 개나 있었다. 어지간한 주택이 한 채 움직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도의 마법사들이 밤을 새서 경량화 마법을 부여하지 않았다면 말 수십 마리를 대동해도 끌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찌나 장대한지, 엘테 상회의 물류 이송로를 책임지고 있는 멕세스 대교를 건널 때조차 다리의 너비를 계산해 봐야 했을 지경이다. 앞뒤로 말을 타고 호위하는 병력들까지 합치면 정말 군대가 움직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 으리으리한 성황의 마차 안, 가장 꼭대기의 좌석에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두 남자가 있었다.
한 명은 으리으리한 크기의 성복을 두르고, 날카롭고 총명한 눈을 빛내고 있는 늙은 성황 엘데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몸에 딱 맞는 성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서류를 잔뜩 들고 있는 대주교 베르디오였다.
두 사람 모두 평생을 텔로스 교단에 귀의해 살아온 독실한 신자였으며, 성황도의 모든 성직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큰 어르신과도 같은 존재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인력과 자원이 소모되기에, 함부로 장거리를 이동하는 일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성황도에서 보내는 사람들이다.
“생각보다 훨씬 더 거리가 멀군요. 베르체 백작의 영지에 일정이 없었더라면, 이 먼 곳까지 성녀님의 상황을 보러 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었겠지요.”
“그렇네. 동선이 맞으니 참으로 다행이로군.”
대주교 베르디오의 말에 성황은 가볍게 대답했다.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평원의 풍경과 저 시야 끝 바다 위로 쭉 뻗은 대교의 모습을 보았다. 분주히 나아가면 한두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어쨌든 베르체 백작과의 협업 건은 잘 마무리되었으니 다행입니다. 이번 원정으로 그의 권위를 충분히 세워 주었으니, 다음 성황도의 재건축 일자까지 자금을 당겨 올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가….”
엉덩이가 무거운 성황이 굳이 다른 지방 영주의 땅까지 행차한 이유는… 결국 장사질을 위해서다.
평생을 텔로스 교단의 숭고한 뜻에 귀의하며 살아온 성황이다. 언제나 저 하늘 위 신의 뜻을 가늠하며 살아왔지만, 그런 그조차도 결국엔 땅을 기는 인간이다.
이 지상에서 살아가려거든 결국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성황도의 유지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창밖으로 보이는 평원의 풍경을 보며 성황 엘데인은 사색에 잠겼다.
문득 라멜른 산맥의 고고한 수도원에서 홀로 신앙을 갈고 닦던 시절이 생각났다. 언제나 배를 굶주렸지만, 신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이서 귀 기울였던 시절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신앙을 담보로 장사질을 하고 있다.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타해 누군가의 권위를 세워 주면, 그들은 절대로 공짜로 입을 씻지 않는다.
제아무리 숭고한 신앙인이라도 입에 풀칠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고, 결국에는 돈과 권력의 논리에 묶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성도에 고고히 군림하는 성황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타협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한때는 제국의 황족들하고만 악수를 하던 성황이었지만, 세대가 내려올수록 성황도의 규모는 커지고 그 타협의 범위는 넓어져… 어느샌가 중심 권세가들을 물론이고, 급기야는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면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의 영지까지도 출타하는 몸이 되었다.
베르체 변경백은 어지간한 황족들보다도 더 많은 기부금을 내는 사내였으니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독실한 신자이기도 하니, 도덕적으로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씁쓸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다.
“성황님. 전해 들은 말로는 오늘이 바로 그 합동 전투 실습일이라고 하더군요.”
“알고 있네, 베르디오. 방금 보고 서류에서 확인했네.”
그의 수발을 들고 있는 대주교 베르디오 또한 독실한 신자였을 터.
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도 현실을 내팽개치지 않는 그는 성황 엘데인보다도 훨씬 더 타협적이고 현실적인 신자였다.
그 중심을 잘 잡고 있기에 대주교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을 터.
신앙심이란 밀랍으로 된 날개와도 같다. 너무 높게 날면 태양 빛에 녹아 사라지고 만다.
그 지위가 높아지고 신앙의 민낯을 가까이서 바라보게 될수록, 조금씩 마음속에 품고 있던 신앙심도 마모되어 가고 마는 것이다.
매일같이 기도를 일삼으며 주신 텔로스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엘데인이지만, 때때로 베르디오를 보면 그의 이성적인 면모에 혀를 내두르고 만다.
필요하다면, 성황도조차도 팔아넘길 수 있는 사내인가.
성직자라기보다는 상인에 가까운 기질을 가진 남자다.
성직자로서는 그를 쉬이 통제할 수도, 제압할 수도 없다. 결국 그를 손에 쥐고 다루려거든, 돈과 권력의 논리에 먼저 통달해야 할 터.
기묘한 사내다. 그럼에도 엘데인은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공범자라 비난해도 그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베르디오의 수완에 성황도는 많은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 멀리 맥세스 대교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나는 도전자가 아무도 없지 뭐야….”
예니카는 학생회관의 목재 테이블에 앉아 한숨을 푹 쉬었다. 맞은편에 앉아서 음료수를 홀짝이고 있던 나는 그럴 줄 알았다고 대답했다.
어느새 시간도 꽤 지나, 합동 전투 실습 날이다.
1학년은 2학년과 3학년은 4학년과 대련을 하게 되고, 결과에 따라 성적에 반영되기까지 하는 연례 실습 행사다. 다만 매년 규칙은 담당 교수에 따라 조금씩 바뀐다.
작년에는 대진 방식으로 진행했다 하면, 올해는 원하는 상대에게 대련을 신청하는 도전 방식이다.
1학년은 현재 A반 멤버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서로 먼저 A반으로 진급하려는 경쟁이 격화되어 있는 상태라고 한다. 때문에 다들 최대한 강한 대진을 원하고 있고, 그 의견을 반영해서 올해는 도전 방식으로 대련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다만,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1/2학년은 그렇다 쳐도, 3/4 학년은 딱히 그 정도로 승부욕이 대단하진 않다는 점이며.
너무 강한 학생은 아예 도전하려는 대련 상대조차 없다는 점이다. 결국 아무에게도 도전하지 않는 잉여 학생들과 대련하게 되는데, 그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는 강자 입장에서는 모두 너무 싱거운 상대다.
그 단적인 예시가 바로 3학년 수석, 예니카 페일로버였다.
“대련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누가 상대인지도 모르는 상태야…”
“네가 개인적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사람은 없고?”
“음… 그건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건방져 보이지 않아…?”
누군가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것을 쑥스러워하고 있는 모습이다. 예니카답다면 예니카다운 일이다.
학생회관은 대진을 확인하러 온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와 예니카는 그 중심에서 벗어나서, 주변 나무 테이블에 앉아 사람이 좀 빠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나도 딱히 도전자는 없었던 것 같다. 의외로 3학년 사이에서도 꽤나 강자 반열에 든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 듯하다.
하긴 3학년에는 정말 인재가 없다. 바로 아랫세대인 주인공 세대는 상위권에 든 학생들이라면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이름값을 가지고 있지 않나. 그것에 비하면 썩 비참한 세대다.
안 그래도 작년 합동 전투 실습에서도… 예니카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주인공 세대로부터 승리를 따내지 못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뭐 분해하거나 하는 기색도 없었다. 당연하다는 느낌이었다.
이런 세대이니, 내가 어느새 3학년 강자 반열에 들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지. 지난 시간 동안 자는 시간 아껴 가면서 수련한 것이 착실히 빛을 발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에드는… 또 루시가 준 책을 읽고 있네….”
문득, 예니카가 볼을 부풀리면서 내 손에 들린 책을 보았다. 괜히 남한테 이 책의 정체를 알리기는 싫어서 표지를 덮개로 가려 놓은 상태다.
나는 여유 시간이 되면 되는 대로 꾸준히 성위 마법서를 읽고, 마력을 다시 운용해 보고, 그 흐름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반복하고 있었다.
성위 마법을 다룰 줄 안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이점이다. 어지간한 교수진들도 성위 마법에는 애를 먹는다. 이런 특권이 있다면 활용하지 않는 게 바보다.
허나, 아무리 성위 마법의 대가가 쓴 해설서라 해도 난해한 부분이 많아서, 아직은 좀 더 수련이 필요할 듯하다.
“꽤 중요한 책이라서. 당분간은 이거만 읽을 것 같다.”
어쨌든 다른 학생들이 대진 상대 다 확인하고, 학사 직원들이 정리해서 대련 시간을 일러 주기 전까지는 이곳에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 시간도 아까웠으므로 나는 책을 탐독하고 있었고, 예니카는 뭐가 그리 심술이 났는지 테이블에 얼굴을 뉜 채로 나를 응시하고만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몇 분인가 뽈뽈 대더니 한숨을 푹 쉬고선 이야기한다.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 캠프 저장고에 있는 식자재 확인하는 걸 까먹었어… 혹시 기억나, 에드?”
“음… 양 자체는 충분했던 거 같은데… 로레일관 식당에서 남은 육류를 좀 사다가 넣어 놓은 게 있는데 그냥 소금 쳐서 구워 먹을까….”
“앗, 그럼 클라라한테 허브 남은 것 좀 달라고 해야겠다. 구울 때 넣으면 향긋하고 부드러워진대.”
“오… 확실히 시도해 봄 직하네….”
우리는 그렇게 일상적이고 별거 아니면서도…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쟤네 동거하냐고 까무러칠지도 모르는 소리를 주고받았다.
예니카가 이제 캠프 바로 옆에 산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되어서, 나는 괜스레 책을 읽다가도 헛숨을 삼켰다.
이대로 학사 수업이 마무리되더라도, 우리는 짐을 챙겨서 함께 북쪽 숲으로 돌아가고, 함께 밥을 차려서 같이 먹고, 밤까지 모닥불 언저리에서 잡담 주고받으면서 각자 할 일 하다가, 잘 때 되면 각자의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일 또 보자고,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근데… 루시 말야….”
“루시?”
“응… 캠프에 자주 드나들곤 하잖아….”
예니카는 나무 테이블에 엎드려 누운 채 발을 휙휙 휘젓고 있었다. 턱을 제 손 위에 얹고는 툴툴거리면서 이야기했다.
“에드는 별로 신경 안 쓰여…?”
“신경 쓰이면 또 어쩔 거야. 걔가 드나드는 걸 무력으로 막을 수나 있냐. 자연재해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해.”
“그건… 그렇지만… 루시는 오필리스관 소속이잖아. 이렇게 또 자꾸 캠프에 드나들면 메이드들한테 혼나는 거 아니야?”
“걔가 감당할 일이지. 확실히 네 말마따나 요즘 메이드들이 벼르고 있긴 하더라.”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이야 말로 루시를 통제할 수 있는 학사 유일의 인력아니던가. 그쯤 되어야 엘리트 소리는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예니카가 툴툴거리면서 계속 허공에 발만 휘젓고 있자, 갑자기 학생회관 중앙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대로 인파가 갈라지더니, 삽시간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 ‘길을 터 주십시오!’
― ‘성녀님이 행차하십니다! 길을 터 주십시오!’
실베니아 아카데미는 학사 내부에 외부 호위 인력이 들락거리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고귀한 신분이나 유력가 자제들이 워낙 많다 보니, 일일이 전부 허가해 주었다간 학사 내부 시설이 제대로 돌아가질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사 내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개인 호위 인력을 부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규칙조차도 초월해 있는 존재가 학사 내에는 딱 두 명 있으니. 한 명은 황족 숙소에서 호위병대를 거느리고 있는 황녀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이고, 나머지 한 명은 오필리스관 꼭대기 층의 가장 거대한 방을 사용하고 있는 성녀 클라리스다.
“우와….”
예니카는 아무래도 성녀 클라리스를 처음 보는 듯했다. 하긴, 학년도 다르고… 그다지 접점도 없다.
자연스럽게 인파를 압도하는 듯한 품위. 깔끔하게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백발. 소름 끼치도록 붉은 눈동자.
언제나 대중 앞에는 성스러운 가호가 서린, 레이스가 잔뜩 달린 성복만을 입고 나타나던 소녀다. 교복을 입고 있는 그 모습이 신비할 지경이다.
그녀 또한 학사의 일원이니, 합동 전투 실습의 대진을 확인하러 온 것인가. 대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녀는 학생회관 앞 공터를 가로질러 나아갔다.
나는 가만히 구석진 나무 테이블에 앉아 그녀가 지나가는 모습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거리도 꽤 멀어서 여기서는 쥐꼬리만 하게 보인다.
기품있고 당당한 모습이 카일리로 있을 때와는 엄청난 괴리감이 느껴진다.
“…….”
나는 이 합동 전투 실습에서 일어날 일들을 모두 최대한 가까이서 지켜볼 예정이다.
어디까지 내가 알고 있는 대로 흘러갈 것인지, 어디서부터 내가 알고 있던 미래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지 확실하게 체크해 두고 싶었다. 시나리오가 비틀 나간 정도를 체크해야만, 다음에 일어날 일들에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일단 벌써부터 내 예상과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성녀 클라리스는 합동 전투 실습에 참여하지 못한다. 성황의 방문과 그 시기가 겹쳐서, 그를 맞이하러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동 전투 실습의 대진을 확인하러 왔다는 것은… 성녀 또한 실습에 참가한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성황의 방문이 미뤄졌다는 것인가? 그럴 만한 변수가 있었다면 그게 뭘까?
그런 식으로 현재 상황에 맞춰 머리를 굴려 가고 있었을 때였다.
“어… 엇….”
문득 예니카가 당황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클라리스는, 학생회관 정문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대로 이리저리 눈을 굴리더니, 내 쪽을 바라보고서는 당당히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다. 쏟아지는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성녀 클라리스는 학사 생활을 하는 동안 그 누구와도 함부로 접하지 않았다. 고귀한 신분이니만큼 온갖 위험에도 항상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당사자가 당당히 내 쪽까지 와서, 테이블 맞은편에 다소곳이 앉은 것이다.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 어린 모습은 여전하다.
“안녕하세요, 에드 선배님.”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좌중의 사이에 가라앉았다. 대체 뭔데 내가 성녀랑 아는 사이처럼 인사를 주고받는지 다들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애석하게도 어리둥절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일단 타이밍상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게 가짜가 아닌, 진짜 클라리스라는 사실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으나… 대관절 여기서 내게 인사를 건넬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원래는 서신을 보내려고 했는데, 빨리 만나고 싶어서 그냥 직접 왔어요. ”
자연스럽게 폭탄 발언을 하는데, 거기다 대고 내가 지금 무슨 소리냐고 받아칠 수는 없었다. 좌중 사이로 소리 없는 아우성만 퍼져 나갈 뿐이었다.
그 와중에 클라리스는 싱긋하고 품위 있게 웃었다.
“우리 이야기 나눌까요?”
“…….”
나는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면서, 일단 책을 덮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