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18)
합동 전투 실습 2 (4)
전사의 삶에 있어 후회란 수치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 그 어떤 적 앞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정정당당히 맞설 것.
강한 신체와 날이 잘 선 도끼. 그것만 있다면 어떤 맹수 앞에서도 포효를 내지르며 돌격할 수 있는 남자.
4학년의 전투부 차석, 코르덱이었다.
깔끔하게 싹 밀린 스킨 헤드에 각진 얼굴. 집채만 한 덩치와 더불어서 우락부락한 인상까지.
저게 학생인지, 전쟁터에서 날뛰던 백전노장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험상궂은 모습이다.
코르덱은 결투대 위로 올라와서 상의를 벗어 던졌다.
“크하하, 네가… 그 오합지졸만 모였다던 3학년에서 그나마 이름 좀 날린다는 마법사냐? 에드… 그래, 에드라고 했었지.”
우락부락한 근육이 그 단련의 세월을 증명해 준다.
바로잡은 도끼는 날이 서 있지 않지만, 둔기로서는 충분히 유용한 수준이다.
제아무리 실전 전투를 지향하는 훈련이라 할지라도 상대를 다치게 하면 안 되는 것인데, 코르덱의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은 사실 그런 걸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에게 합동 전투 실습수업에서의 결투 신청이 단 하나도 없었던 이유가 그렇다. 그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폭력배에 가깝다.
그 맞은편에는 가만히 서 있는 금발의 마법사, 에드 로스테일러가 있었다.
손목을 잡고 이리저리 꺾으면서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이었다.
코르덱은 결투대에 올라서서 주변을 한번 스윽 훑어보았다. 결투 참관인 몇 명과 코르덱의 정신 나간 전투를 구경하려 몰려든 인파도 꽤 있었다.
코르덱은 결투를 좋아한다. 한없이 만족스러운 환경이다.
“그래, 운이 나빴군. 이 코르덱과의 대진이 잡히다니. 차라리 적당히 강한 놈 아무나 하나 잡아서 결투를 신청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인데.”
“…….”
“그래, 네놈에 대한 소문도 잘 들었다. 꽤나 강자라고 하지만, 그래 봐야 3학년 마법부의 어중이 떠중이지. 마음 단단히 먹어야 될 거다.”
코르덱은 쉽게 상대를 얕잡아 보지 않는다. 말만 이렇게 할 뿐이다.
그러나, 결투의 환희가 찾아오면 몸속에서 올라오는 흥분을 막을 수는 없다. 야생동물을 사냥할 때처럼 상대를 짓이기고 찢어발길 수는 없겠지만, 전력을 다해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크흐, 크흐흐흐흐흐흐….”
싸움의 때가 다가오자 코르덱은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손도끼가 양손에 각각 두 자루. 손잡이를 쥔 손에 떨림이 전해져 온다. 이것은 피를 튀는 결투를 앞둘 때 비로소 올라오는 흥분이다.
3―4학년 간 합동 전투 실습은 저학년일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아직 실베니아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학생들 간의 수준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쓸 수 있는 무기나 마법을 제한했다.
날이 선 무기는 당연히 안 되고, 장병기류도 대부분 제한되며, 마법은 중위 마법 이상부터는 사용할 수 없는 룰이 있었다.
그러나 고학년 간의 대련은 완전히 다르다. 고학년이 되도록 제대로 된 강점 하나 없이 살아왔다면, 그건 그 학생의 나태함이 불러온 결과일 뿐이다.
모든 제한 없이 온전히 힘 대 힘으로 맞붙는 전투 실습. 룰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건 저학년 때뿐이다.
“크, 크크크크크…! 몸이… 달아오른다…! 크하하하하!”
왜 모든 학생들이 그를 기피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진심을 다해 결투를 즐겼다.
“자, 양 측 준비됐으면… 시작하세요!”
담당 교수가 이야기 하자, 코르덱이 포효를 내질렀다.
“크하하하하하―! 자 그럼 결전에 앞서 확실히 해 두도록 하지…! 알고 있겠지만 내 이름은 코르덱 베일데르크다! 난 단순 모의 결투라고 해서 절대 손대중을 하지 않는다…! 혹시 공포감이 몸을 타고 기어오른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쾅!
입이 길다.
에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력이 피어오른 주먹을 꽉 쥐었다. 집중해서 대응하지 않으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마법… ‘일점 폭발’을 그의 명치에 갈겨 넣은 것이다.
컥 소리를 내며 연기 속에서 휘청거리자, 그 코앞에 자기 몸집만 한 암사자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크아아악!”
맹수를 상대해 본 경험은 많은 코르덱이지만, 코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놈을 상대해 본 적은 없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어깨를 물어뜯으려고 하는 암사자의 아가리를 잡아 벌린 채 이를 악무는 그 순간이었다.
―쾅!
정령식: 폭성.
불 박쥐 한 마리가 그의 품 안에서 날아오른다. 레이시아와 육탄전을 하고 있을 때에 이미 그의 빈틈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피어오른 연기가 흩어지고 나자, 완전히 제압당한 코르덱이 바닥에 나자빠져 있었다. 간헐적으로 컥컥대며 마른기침을 내뱉을 뿐이었다.
불 박쥐와 암사자는 그렇게 미끄러지듯 에드 쪽으로 돌아와 앉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대략 5초 정도 걸렸다. 승부에서 이기는 것보다 다치지 않게 손대중을 하는 데 더 힘을 들인 느낌이었다.
코르덱의 전투를 보러 왔던 좌중에는, 공허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 * *
글록트관의 1층에 마련된 로비. 여기서부터는 결투 대기 인원들 때문에 꽤나 인파가 있었다.
북적북적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서 겨우 건물을 빠져나왔다. 안 그래도 학생회관의 세 건물 중에서는 그나마 규모가 조그마한 편인데, 3―4학년 결투 인원들이 다 같이 몰려들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서 학생회관의 세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네일관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주인공 세대인 2학년들이 1학년들과 결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일단 네일관에 가서 테일리의 결투에 참관해 볼 생각이다. 어차피 다른 학생의 결투를 구경하는 것은 얼마든지 허용되어 있으며, 테일리의 결투는 인기가 많아서 많은 학생들이 보러 몰려들 테니 딱히 내게 시선이 쏠릴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각오를 하고 있다. 이야기는 꼬여 갈 대로 꼬여 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수만도 없다. 흐름이 궤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면, 다시 뒤바뀐 궤도의 흐름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뭐가 어떻게 꼬여 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살아남기 위해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하게 판단해야만 한다.
다행스러운 점은, 당장 눈에 띄는 큰 변동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합동 전투 실습은 내가 알고 있는 흐름대로 흘러가고 있다. 이 정도까지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으면 되레 의심이 들 지경이다.
네일관을 향하는 길을 따라 걸으면서 몇 번이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다시금 되새겨 보아도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은… 아델의 반응이다.
― ‘알아요.’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고 말았던, 너 죽는다는 경고 메시지.
다짜고짜 던진 말이라 그걸 진지하게 받을 거라는 생각도 못했건만, 아델은 오히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답을 내놓고 떠나 버린 것이다.
성황과 대주교는 실베니아에 오자마자 아델부터 찾는다. 아마 아델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
죽을 걸 알고 있는데, 성황과 대주교를 만나러 간다는 것인가.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데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이유라 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안 그래도 3막에 등장하는 아델과 클라리스의 서사는 다소 뜬금없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합동 전투 실습의 마지막 장면, 아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확실히 충격적인 연출이었으나, 이에 이어지는 서사 흐름은 어딘가 퍼즐 조각이 빠져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델과 클라리스에 대한 서사는, 이후로 이어지는 루시 토벌전을 위한 전개적 장치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의 다른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면, 이런 중요 인물들의 서사를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넘길 리가 없었다. 유저들 사이에서도 분명 더 숨겨 놓은 요소가 있을 거라 예상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아델의 죽음에 대한 전말을 플레이어는 알 수가 없었으며, 3막 이후로 갑작스럽게 성녀 클라리스의 사고관이나 행동거지가 눈에 띄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분명 플레이어가 합동 전투 실습을 진행하는 그 시간, 성녀와 클라리스 사이에는 어떠한 사건이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전 아켄섬을 다 뒤지고 다녀도 그것에 대한 단서가 없자… 결국 유저들의 예상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델과 클라리스가 겪었던 이야기는 분명 후일 스핀오프로 새롭게 다루어질 것이다….’라는 예측이었다. 그 서사를 비워 놓은 것은 이어지는 추가 시나리오 요소로 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대다수의 유저는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다. 그 이유를 대자면, 플레이어가 합동 전투 실습을 치르는 동안 그래 봐야 몇 시간 흘렀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 몇 시간의 이야기만을 가지고 새로운 스핀오프를 내기에는 분량이 너무 부족하며,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해금할 수 있는 요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식의 의견이 대다수였다.
이미 아켄섬을 구석까지 다 뒤져 보았지만, 그래도 잘 찾아보면 새로운 히든 요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이 지경이 되는 순간까지도 그 속사정이 풀리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스핀오프 설이 맞았던 것인가.
문득 고개를 올려다보니 제법 네일관이 가까워졌다.
“…….”
단 몇 시간이다.
몇 달도, 며칠도 아니고, 단 몇 시간 아니던가.
사람의 가치관이나 행동양식, 사고방식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단 몇시간의 일만을 가지고 성녀 클라리스의 선량한 사고방식이나 그 행동 양식이 모조리 뒤바뀌어 버리지 않았나.
그저 교단을 향한 복수심을 불태우는, 불신의 성녀로 화해 버린 모습이… 당시의 플레이어들에겐 너무나도 극단적으로 보였다.
차근차근 성도의 어둠을 알아 가는 시나리오 전개를 보여 줘도 괜찮았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갑작스럽게 클라리스의 변화를 연출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사라지지 않았다.
“저, 저건 뭐야….!”
“뭐야…? 내가 지금 환각을 보고 있는건가…?”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럽다.
나는 사색에 잠겨 걷고 있었기에, 조금 반응이 늦었다. 주변을 보니 학생들이 하나같이 서쪽 하늘을 쳐다보며 놀라고 있었다.
뭐길래 이렇게 소란인가 싶어, 나도 함께 학생들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쿠구궁, 쿠궁….
때아닌 지진이… 지축을 울리고 있었다.
* * *
성녀 클라리스는 트릭스관의 귀빈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성황과 대주교가 도착하면 우선 이곳에서 앉아 대담을 나눈 후, 함께 교장 오벨과의 오찬을 즐길 예정이다.
그 뒤로 학생 기숙사를 한번 둘러보고, 일정 맞는 학생들과 신앙에 대한 대담을 진행한 뒤, 학생 광장에서 대표 학생을 성황이 직접 세례해 주는 세례식을 진행한다. 학생회장 타냐 로스테일러가 세례를 받을 예정이다.
그 뒤로 텔로스 신앙의 역사와 그 가치에 대해 연설을 진행한 뒤 다시 마차를 타고 성도로 떠나는 일정인 것이다.
말만 들어 봐도 피곤한 일정이지만, 일생을 성녀로 살아온 클라리스에겐 오히려 익숙하고 편안한 계획이었다.
다만, 성황과 대주교가 조금 늦는다. 그 으리으리한 마차가 맥세스 대교를 넘는 걸 본 지는 꽤 됐는데, 곧바로 트릭스관으로 직행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성황님의 도착에 대해서 따로 들은 바는 없나요?”
“예, 성녀님. 잠시 트릭스관으로 오는 길에 들를 곳이 있다 하여….”
타지인이 아켄섬에 왔는데, 일단 그 학사 행정의 중심지인 트릭스관이 아니라 다른 곳을 먼저 들른단 말인가.
거기가 어디인가 싶어서 물어봤으나, 성당 기사에게서는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다.
성녀를 만나고 교장과 오찬을 하는 것보다 우선이 되는 일정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게 뭐였든 간에 좀 미루면 될 일 아닌가 싶지만, 성황이 하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싶어 클라리스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위험한 일이 아니라면 됐다. 어차피 성황이 이끄는 호위대가 위험에 빠질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호위 인력도 엘리트를 넘어서 아예 괴물들이다. 특히 성황도의 직속 비밀 병대, ‘텔로스의 사도’ 일곱 명 중 다섯 명이나 이번 원정에 따라 붙었다.
텔로스의 사도는 하나하나가 대륙 전체에서 꼽아도 드물 정도로 막대한 강자들이다. 오로지 성황의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자들. 갖가지 고위 마법을 다루며, 신력을 이용한 날개를 펼쳐 제공권까지 장악해내는 무적의 병대다.
온갖 천재들이 가득한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인재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제압할 수는 없다. 몇몇 이례적인 강자를 제외하고선 말이다.
“으음… 어흠, 커흠…!”
클라리스는 오랜만에 성황을 만났을 때를 대비해 목을 가다듬었다. 시간도 난 김에 아, 아 거리면서 적당한 어조의 높이를 찾았다.
그러면서 조신하게 인사를 건네는 연습을 해 보고, 빙긋 웃으며 품위 있게 성황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도 취해 본다. 귀족 같은 허례허식은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단아한 품행은 그녀의 성스러운 외관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그렇게 잠시간 홀로 회의실에 앉아 있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렇게 홀로 회의실에 앉아 있으니 성황도에서 지내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리 먼 과거도 아니건만, 실베니아에서 지낸 몇 개월이 워낙에 파란만장했기 때문일까…. 아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기도하고, 세례하고, 말씀을 전하고, 고해를 성사받고, 사람들의 경의를 받으며 조신하게 살아오던 삶.
금욕 어린 클라리스의 무채색 삶에 그나마 색을 입혀 주었던 아델의 연주 소리가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직도 못 만났네….’
아델 입장에서도 성녀 클라리스가 입학했다고 하면 어떻게든 만나 보려 할 법한데, 영 반응이 없다. 아무래도 그 관계를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클라리스 본인뿐이었나 싶어서… 사뭇 서글퍼졌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창가에 앉아 류트를 연주해 주던 성화 관리인.
성녀의 방보다 더 높은 곳, 첨탑의 꼭대기에서 언제나 세상을 내려다보았을 그 소녀의 얼굴이 이미 기억 저편에 아련했다.
언제나 신비함에 휩싸여 있던 소녀다.
태어난 고향도 모르고, 어떻게 교단에 귀의하게 되었는지도 불명이다. 상업 도시 올덱의 고아원 출신이라는 것은 서류에서 본 적이 있다. 가끔 베르디오 대주교와 이야기를 나누던 것을 보면 한낱 신도에 불과한 신분은 아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델이 직접 속사정을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다.
허나 ‘성화 관리인’이라는 직책은 아무에게나 맡겨지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안다.
성황도의 중심첨탑 꼭대기에서 언제나 밝게 타오르는 그 성화는, 텔로스를 향한 열망과 그 순수한 신앙을 나타내는 불꽃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꺼지는 일 없이 밝게 타오르고 있어야 했다.
첨탑의 꼭대기. 어쩌면 성황도에서 가장 주신 텔로스와 가까이 있는 그 자리.
다른 모든 일과에서 예외된 채 오로지 홀로 성황도의 꼭대기를 지키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평범하기만 한 소녀는 아니다.
만나게 된다면, 꼭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쿠궁, 쿠웅….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홀로 남은 회의실 안이 조금씩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클라리스는 지진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선다. 확실히 지축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창문을 내다본 순간, 클라리스는 그대로 헛숨을 삼키고 말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창밖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거대한 날개가 펼쳐지자 광풍이 아카데미에 들이닥쳤다.
펼쳐진 날개는 하늘을 가려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내려다보는 시선의 꼭대기는 오른산의 정상보다도 드높다.
방향은 서쪽 해안 지대.
바닷속에서 그 몸을 일으키며 들이닥친 물보라가 보인다. 몇몇 물줄기는 창공에서 아직도 낙하 중이다. 그 몸집의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양 앞발을 아켄섬 위에 올려놓는다.
왼쪽 발은 북쪽 숲에, 반대쪽 발은 멕세스 대교 옆의 해안 지대에 안착한다. 그에 따라 지축이 한 번 더 울린다.
구름 사이로 그 거대한 머리가 보인다. 쭉 나온 입과 거대한 비늘. 신화 속에서도 모두 멸종했다고 알려진 창룡.
깨어난 드래곤의 형체가… 아켄섬을 굽어 내려다본다.
인간의 무력으로는 어떻게 막아 볼 수조차 없는, 거대한 재앙 그 자체였다.
* * *
인과관계.
결과가 있다면, 그 원인도 분명 있어야 한다.
시나리오가 비틀렸다면, 그 원인 또한 명확하게 존재할 것이다.
이미 비틀리기 시작한 시나리오다.
어느 정도의 비틀림은 얼마든지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원인만 찾아낼 수 있다면, 충분히 대처해 낼 수도 있었다.
예니카의 폭주가 앞당겨졌던 이유는 루시와 메릴다가 너무 일찍 계약했기 때문이고.
황금왕 엘테가 좀 더 일찍 아켄섬에 도착했던 이유는 로르텔의 배신이 엘리스에게 간파당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듯, 이야기의 분기점엔 언제나 원인이 있었다.
그렇기에, 비틀릴 대로 비틀려 가는 이 이야기의 흐름에도 분명 새로운 국면이 찾아올 것이고, 나 또한 그것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건만.
이변이라는 것은 언제나 예상 이상의 것이 도래하기 때문에 이변이라고 했나.
하늘을 가르는 날개의 주인은… 창세의 성창룡 벨브로크다.
태초의 검성 루덴에 의해 날개가 잘린 채로 심해 깊은 곳에 봉인되었다는 신화 속 괴물.
5막 최종장이자, 모든 시나리오의 대미를 장식하는 최종 보스.
나는 4막 종료 시점에서 졸업하므로, 신경 쓸 필요조차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그 거대한 창룡. 그 괴물의 포효가… 대기를 가른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귀를 긁는 듯한 포효가 하늘을 가르며…. 아직 준비되지 않은 실베니아의 창공에 그 공포를 새긴다.
인간의 힘으론 상대할 수 없다. 저건 루시나 오벨을 데려와도 그저 막아 내고 대치하는 게 고작이다.
저 괴물을 토벌하려면, 엔드 스펙까지 힘을 키우고, 용의 심장을 가를 수 있는 최후의 검성식까지 다 익힌 최종전 테일리를 데려와서, 그 심장 앞에 데려다 놔야 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방법 안에서는 그렇다.
물론, 그게 지금 시점에서 가능할 리가 없다.
그렇다. 말했듯 결과가 있다면 원인이 있어야 한다.
시나리오의 순서가 뒤바뀌는 일은 있었다. 그러나, 5막에서나 나타나야 할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시련이, 어째서 지금 도래했는가는… 도저히 그 원인이 추측이 가질 않는다.
비틀릴 대로 비틀릴지언정, 이렇게까지 급박한 변화가 올 이유가…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러나 정사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았다면, 그 원인은 나밖에 없지 않나. 이 세계의 이레귤러라 할 만한 사람은 나뿐인데.
허나 너무나도 압도적인 비틀림 앞에, 나는 그 원인을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지나온 과거의 흐름을 전부 되새겨 보아도, 이런 거대한 비틀림을 만들어 낸 원인을 색출해 낼 수 없다.
“꺄아아아아악!”
“뭐야! 저건…!! 크아아아아! 도망쳐!! 일단 도망쳐!”
“어디로 도망치라는 거야…! 이 섬 밖으로 나가려면… 나가려면… 다들 맥세스 대교로 도망쳐야 해…!”
―콰장창, 쾅!!
이어지는 마력이 담긴 포효에, 주변 건물들의 유리창이 죄다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카강, 카가가강!
―쿠궁, 쿠우웅.
―파삭, 파삭.
건물의 유리가 깨져 나가고, 유리가 바닥에 흩어져 있다. 가죽 구두로 유리 파편을 밟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녀가 복도를 따라 걸어 나간다.
어깨에는 류트를 매고 있고, 한 손에는 합동 전투 실습의 대진표가 들려 있었다. 아델 또한 누구에게도 도전을 신청하지 않았으므로, 자동으로 배정된 대진 상대였다. 당일이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 ‘네일관 3대련실, 오후 1시. 아델 세리스 vs 클라리스’
그 아래에는 급하게 덧대써진 글씨로 수정된 문구가 있었다.
― ‘3대련실의 오후 1시 전투 실습은 성녀님의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 때문에 취소되었습니다. 다음 대진 상대 배정까지 대기해 주세요.’
“아쉽게 됐네. 만날 법도 했는데. 굳이… 만나진 않았겠지만.”
하늘을 가르는 용의 포효가 퍼져 나가고, 땅과 건물들이 흔들리는 와중에… 예쁜 생화를 머리에 잔뜩 꽂은 채 걷는 소녀.
소녀는 그런 종말 같은 풍경에도 아랑곳 않고, 털레털레 건물 사이를 유영하듯 걸어 나갔다.
“바람은 또 불겠지. 늘 그랬으니까.”
하늘을 채운 용의 형상을 올려다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저 되뇔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