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24)
합동 전투 실습 2 (10)
차기 성녀, 아델 세리스.
성황도의 고위 사제들 사이에선 그 이름이 돌았다.
전대 엘니르 성녀의 사후 한참을 비어 있던 차기 성녀의 자리를 채울 인재. 벌써부터 명성이 드높아 누구도 함부로 그 이름을 낮춰 부르지 않았다.
성도의 정점에서 주신 텔로스의 가호를 받는 성녀의 자격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화지처럼 순수하고 아리따우면서도 고귀한 기품이 흐르는 것은 기본이요, 막대한 신력을 타고나 성법의 가호를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했다.
아델은… 과장 보태서 주신 텔로스 님의 환생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로 그 신력이 막대했다.
신력을 비틀어 제 마력처럼 구사하는 그 신묘한 성법술은, 가히 성위 마법의 영역을 넘보는 수준이라는 소문마저 돌았다.
시간선을 끌어당겨 미래를 엿보는 그 예지력은 누가 뭐라 해도 섭리를 비트는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연노란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언제나 은은하게 웃으며 류트를 뜯는 모습에서는 기품이 흐른다. 빈민가 바닥을 구르던 때 탄 블라우스와 허름한 스커트를 입고 있더라도, 아델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성한 기운이 있다.
허나 그런 그녀라도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업 도시 올덱의 천한 고아원 출신이라는 점, 미래를 예지할 정도로 막대한 신력을 지녔지만 자기 스스로 제어할 수가 없다는 점.
그런 점들이 때로는 그녀의 발목을 잡곤 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단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녀만큼 공석이 된 성녀의 자리를 이어받기에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끝끝내 성녀로서의 세례를 받고, 성법의 가호까지 부여받은 아델은 차기 성녀의 자리에 오르기 직전까지 갔다.
성황과 대주교의 동의를 받고, 주교들의 지지까지 받아 이제 마지막 성흔(聖痕) 세례만을 남겨 둔 상태.
성황도 앞의 광장에서 정오의 빛을 받으며, 단검으로 제 손가락을 찔러 그 피를 성수에 떨어트리는 의식.
이미 성녀가 되기 위한 준비는 모두 마친 채로, 대중에 앞에서 그 얼굴을 드러내 만천하에 공표하는 의식이었다.
― ‘…….’
성흔 세례를 하루 앞두고, 성황도의 첨탑 꼭대기에 홀로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던 아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올덱의 고아원에서부터 성황도의 꼭대기까지. 단 몇 달 만에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신분 상승이었다. 그 속도가 영 적응이 되진 않지만, 아델은 그럭저럭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살 눈치는 있었다.
그러나, 성녀의 세례를 받고, 평소보다도 그 세가 드높아진 신력이 몸을 도는 것을 느끼자… 이따금씩 새로운 미래가 보이곤 한다.
아련하게 잡히지 않았던 미래의 잔가지 하나가 겨우 제 손안에 들어온 느낌이 들어, 아델은 이내 눈을 부릅뜬 채 정신을 집중했다.
밤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것은, 그 언젠가부터 전혀 보이질 않던… 아델 자신의 미래였다.
―쾅!
―쿠당탕!
이튿날 아침, 대주교 집무실의 문이 거세게 열렸다.
달려들어 온 사제가 다급한 목소리로 대주교에게 보고 사항을 전달했다.
당시 이미 대주교 직위였던 베르디오는 그 말을 듣고 당황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 ‘――――! ―――!’
이미 모든 계획이 잡혀 있었다. 오늘의 성흔 세례를 치르고 나면, 대중에게 새로운 성녀의 탄생을 공표하고, 성황도의 성직자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차기 성녀의 존재가 드디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차기 성녀로 내정되어 있던 아델 세리스는… 하루 전날 성녀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한참의 소동이 있었고. 갈등 또한 여러 번 일었지만, 끝끝내 아델은 성황도의 성녀 자리에 오르지 않는다.
그 막대한 신력만큼은 교도로서 인정받아, 성황도 첨탑 꼭대기의 성화 관리인이라는 직책을 받게 되지만… 해야 할 일 자체는 그리 많지 않은 한직이었다.
결국 소녀는 성황도의 꼭대기에 앉아, 류트를 뜯으며 노래나 하는 한적한 시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성녀의 자리는 또 한참을 공석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차기 성녀가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천천히 잦아들어… 단순한 소문으로만 치부되었고.
그저 성황도 첨탑의 꼭대기에 넉살 좋게 풍류를 읊는 낭만가가 존재한다는… 기운 빠지는 소문만이 하급 사제들 사이에서 돌 뿐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5년.
성도의 모든 신도들에게 추앙받는, 성녀 클라리스가 추대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신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막대한 신력. 아무렇지도 않게 성법의 가호를 받아들이는 성법술 적응력. 그리고 타고난 성품에 신비롭고 성스러워 보이는 외모까지.
첨탑 꼭대기에 앉아, 성황도 앞 광장에서 성흔 세례를 받는 클라리스의 모습을 보며… 아델은 류트를 자기 옆에 내려놓았다.
드높은 정오의 하늘. 성녀의 탄생을 축복하며 환호성을 지르는 어마어마한 수의 신도들.
저 하늘 위의 신이 인간 세상을 내려다본다면 이런 광경으로 보일까.
그런 덧없는 상상을 하며, 아델은 클라리스를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 * *
“이런 과시욕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에드 선배님.”
툭 던진 듯한 말이었다.
장소는 맥세스 대교 초입에는 마차 보관소였다. 맥세스 대교를 통해 오가는 대부분의 마차는 이곳에 들르므로, 사실상 상인들 사이에서는 만남의 장처럼 여겨지는 곳이었다.
당연하게도 엘테 상회의 권역 안이므로, 로르텔이 보관소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들은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팍 숙여 댄 것이다.
“무슨… 하루아침에… 누가 보면 최면술이라도 걸린 줄 알겠어요.”
“말하자면… 좀 길다.”
로르텔과 나는 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그 뒤에는 보관소 입구 쪽을 가로막고 있는 유리창이 있었고, 건너편에는 유리창에 착 붙은 채 습기 가득한 눈동자로 안을 쳐다보고 있는 성녀 클라리스가 있다.
그 뒤로 난처한 듯 우물쭈물 하고 있는 호위기사 둘, 그리고 그 뒤로 대체 그 고귀하고 기품 넘치던 성녀님이 왜 저런 꼴사나운 모습으로 유리창에 들러붙어 있는지 구경하는 행인들이 가득하다.
로르텔과 함께 네일관을 나온 뒤로도 클라리스는 시도 때도 없이 내게 들러붙어 있어서, 가는 곳마다 주변 시선을 한 몸에 몰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좀 떨어지려고 하거나 거리를 벌리려 하면 울먹거리면서 팔을 잡아끄는 통에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마차 보관소까지 들어가면 정보 수집은커녕 눈치만 신나게 보다 나올 수밖에 없으므로, 일단 성녀는 마차에 두고 내리기로 했건만… 유리창 밖에서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글썽이고 있으니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었다.
로르텔은 한숨을 푹 쉬고는 카운터로 가서 조용히 주인장을 불렀다.
허리를 낫처럼 구부리고 인사한 주인장이 행여나 로르텔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눈치를 보며 대답했고, 로르텔이 뭐라고 이야기하자 식은땀을 흘리며 카운터 뒤편으로 뛰어들어 갔다.
로르텔은 그대로 다시 돌아와서 내 팔을 잡아끌더니, 보관소 구석의 대기용 의자에 앉히고는 자기도 나란히 앉았다.
“일단 급하다고 하시니 동행하기는 했는데요. 제가 합동 전투 실습의 마지막 대련까지 포기해 가면서 여기로 달려올 만큼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으니, 이제 설명을 좀 해 보라는 투다.
나는 그대로 구부정하게 앉아서 한숨을 흘렸다. 어디서부터 설명할지도 애매했고, 무엇보다 슬쩍 고개를 들어 보면 유리창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클라리스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이유의 중요도를 따져 봐야지 제가 얼마를 청구할지 계산이 설 것 같거든요. 저야 에드 선배님께 언제나 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편이지만… 제 몸값은 그리 싸지 않다는 건 선배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래… 잘 안다.”
로르텔은 빙그레 웃고 있었지만, 묘하게 화가 돋은 느낌이 섞여 있었다. 십자 핏줄이 비죽 튀어 오른 듯한 얼굴은 의식적으로 유리창 쪽을 쳐다보지 않고 있다.
“선배님 매력이야 제가 잘 알죠. 다만, 어제까지만 해도 고고한 자태로 교수동을 노니던 성녀님이 하루아침에 한낮 해바라기마냥 변해 버린 모습도 썩 납득이 되진 않네요~”
“그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사실은 나도 납득이 안 되니까.”
시간은 돌고 또 돌지만,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도 난해한 것이다.
“확실한 건… 시간적 여유가 많지는 않다는 거다.”
“네?”
“조만간 알게 되긴 할 텐데, 미리 언질해 둘 건 다 해 두마.”
이미 클라리스의 손길에 이끌려 맥세스 대교까지 갔다가, 입구 광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학생회관으로 돌아가서 로르텔을 만나서, 로르텔을 끌고 마차 보관소까지 온 참이다.
동선만으로도 시간 낭비가 많았다. 허락된 시간이라 봐야 합동 전투 실습이 끝나기 전까지의 잠깐일 뿐이었으니, 곧 있으면 이 평화로운 때도 끝나게 된다.
로르텔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던 참에, 카운터의 주인이 헐레벌떡 뛰어나와서 로르텔을 찾았다.
마차 보관소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던 목격 정보를 순식간에 취합해 온 것이다.
이 근처의 마부들과 골목 구석구석을 다니는 소매상들은 대부분이 이 보관소를 거쳐서 지나가므로 금방 소식을 알 수 있었다.
로르텔이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인장에게 다가갔다.
주인장은 뭐라 뭐라 격하게 설명하면서, 여러 가지 메모를 로르텔에게 건네주었다. 로르텔이 가볍게 감사 인사를 하자, 주인장은 한사코 손을 내저으면서 오히려 로르텔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다시 돌아온 로르텔이 가만히 앉아 있는 내게 이야기했다.
“전체적인 목격 정보는 순식간에 취합됐네요. 뭐, 이 입구 보관소가 일종의 학교 대문 같은 역할도 하니까요. 뒤쪽 쉼터에서 금방 수집해 온 정보들이겠죠.”
“일단 여기 앉아라, 로르텔.”
“…시간 없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맞아, 그래서 그런 거야.”
“…네?”
로르텔은 손에 쥔 정보를 가지고 내게 협상을 걸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보아하니 나도 꽤나 급해 보였기에, 이래저래 높은 값을 부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듯하다. 정확한 판단이다.
그러나, 나는 당장에 뭘 요구하기보다는 로르텔을 옆자리에 앉혔다.
“네가 마지막 대련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지. 근데 네일관에서 빠져나와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꽤 시간이 흘렀으니, 조만간 합동 전투 실습도 끝이 나겠네.”
“음… 네, 그렇겠죠?”
“그럼 얼마 안 가서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알다니… 뭘요…?”
나는 그대로 자기 양손을 깍지를 낀 채 앉아서 재빠르게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로르텔. 너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언제나 이성적으로 사태를 파악해서 행동하는 능력이 출중하지.”
“…왜 그런 새삼스러운 말을 하세요?”
“그냥… 이럴 때일수록 그런 네 기질이 빛을 발하잖아. 그러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절대로 당황하지 말고, 똑바로 내 말을 믿어 줬으면 좋겠다.”
로르텔은 내 옆에 앉아서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장에 손에 쥔 정보를 달라고 호들갑을 떨 것이라 생각했는데, 별다른 반응 없이 자기 손을 꽉 쥐고 있는 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진 모양이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일단 밖으로 나가서….”
“아니, 일단은 건물 안에 있는 게 더 낫다.”
네?
라고, 로르텔이 대답하기도 전….
우레와 같은 포효소리가 바깥에서부터 들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세상이 무너질 듯한 진동이 아켄섬을 강타한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보관소 안에 있던 사람들이 진동에 못 이겨 쓰러지고, 하늘을 가리는 날개가 아켄섬에 드리운다.
―카강! 캉! 카가가가가각!
유리창이 깨져 나가고, 테이블 위의 서류들이 로비에 휘날렸다. 손님들이 앉아 있던 주점의 테이블도, 책이 잔뜩 꽂혀 있는 책장도 무너져 내렸다.
나는 클라리스의 이야기를 대략적이나마 전해 들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합동 전투 실습이 끝날 때 성창룡 벨브로크가 아켄섬에 강림하고, 발길질 한 번으로 생활동 절반을 초토화시키고, 비늘을 쏴 대며 학살을 자행한다던 그 증언.
―쿠궁! 쿠구구구궁!
로르텔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휙 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순간, 나는 그대로 로르텔의 팔을 잡아당겨서 재빠르게 끌어안았다.
“무, 뭇…!”
그대로 로르텔과 나란히 바닥을 굴렀다.
“무… 슨…! 갑자기!”
―파바바바바박!
로르텔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보관소 건물의 외벽을 뚫고 수백 개의 비늘 조각이 날아들었다.
나는 로르텔의 몸을 완전히 감싸고 그대로 깔아뭉개서, 석재 테이블 아래쪽으로 굴러들어 온 상태였다.
―화아아아아악!!
―콰가가가가각!!
내 몸을 중심으로 피어오르는 ‘풍랑의 가호’. 강대한 바람이 내게 달려드는 비늘을 막아 내지만… 온전히 모든 비늘을 막아 내지는 못했다. 풍랑의 가호는 상시 발동 스킬이지만, 당연히 메릴다를 온전히 현현시켰을 때에 비하면 그 위력이 미약하다.
“크, 으큭!”
벨브로크의 광역 공격이 어느 정도 위력으로 학사를 뒤덮을지 내 입장에서는 섣불리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 상태로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벨브로크의 비늘은 시간차를 두고 계속 날아들어 내 몸을 꿰뚫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급소는 거의 빗나갔다. 어깻죽지와 허벅지 부근에서 뜨거운 열감이 올라오곤 있었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윽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 인파를 둘러보면… 절반은 즉사, 절반은 큰 상처를 입고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온갖 신음성이 보관소 로비에 가득해 있었다.
그대로 나는 천천히 내 품 아래의 로르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뚝뚝 떨어진 핏방울들이 로르텔의 뺨을 타고 내려가고 흘렀다. 다행히 로르텔의 피는 아니었다.
“커흑… 후우… 젠장… 그래도… 급소는 다 피했네….”
뚝뚝 흐르는 피를 맞으며 로르텔은 동공을 떨었다. 비틀거리면서 로르텔을 내려다보는 내 모습은 몰골이 말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상처로 넘어간 것이 기적이었다.
대리석으로 깔끔하게 마감된 보관소 외벽은 꽤 튼튼해서 비늘 공격의 절반 가량은 막아 내 주었고, 우리가 아래로 굴러들어 간 석재 테이블도 고급품이라 그런지 조금은 버텨 주었다.
그 덕에… 벨브로크의 첫 번째 공격을 깔끔하게 회피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깔끔하지는 않았다.
“에, 드… 선배님….”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며 위를 올려다보는 로르텔. 순간적으로 과호흡이 찾아왔는지, 위아래로 요동치는 가슴께를 따라서 로르텔의 숨도 들썩인다.
나는 그대로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킨 뒤 로르텔의 손을 잡아서 휙 일으켜 세웠다.
자기 몸을 불쑥 일으키는 힘에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선 로르텔은…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보고 다시금 눈을 떨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성창룡의 포효가 또다시 하늘을 갈랐다. 나 또한 급변해 가는 상황에 숨이 가빠져 오지만, 억지로라도 이성을 부여잡은 채 로르텔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서….”
그 와중에도 로르텔은 전달받은 메모들을 한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얼마냐…?”
로르텔은 큰 자상을 입은 내 어깻죽지를 보더니, 이윽고 재빨리 상처 부위에서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꽉 움켜쥐었다. 내가 크윽 하고 고통의 신음성을 내자, 다시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얼른 수습했다.
그 누구라도 패닉해서 몸을 덜덜 떨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허나 로르텔은 그 와중에도, 정신을 꽉 부여잡고 이야기한다.
“제 목숨값에 비하면… 거스름돈이 꽤 많이 남는 편이겠죠.”
미묘하게 목소리는 떨리지만, 이 정도의 이성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의 정신력이 아니다.
“잔돈은 됐다.”
“그래요. 제법 남는 장사네요. 자초지종을 설명할 시간은 있어요?”
“아쉽게도 없다. 보다시피.”
깨진 유리창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아켄섬을 뒤덮는 성창룡 벨브로크의 것이다.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지르며 학사를 내려다보는 그 모습에는, 공포감을 넘어 경외심만이 느껴진다.
로르텔은 피로 얼룩진 메모를 휙 펼쳐서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목격 정보는 13건. 대부분은 마법 용품 상인들한테서 온 것 같아요. 보아하니 성황과 대주교는 은신용 법진을 쓰고 외진 거리를 통해 별동대를 이끌면서 이동한 것 같아요. 그 외 대부분의 수행원들은 트릭스관으로 바로 향했다고 하고요. 급하게 취합한 정보라 많이 모자라겠지만, 일단 가리키는 곳은 대부분 한 곳이거든요.”
“어디냐…?”
“교수동 안쪽에 있는 학사 성당이요. 학생들과 교직원들 중에서 텔로스 교단 신자들을 위해 마련된 곳 있잖아요.”
“거기 가는데… 굳이 동선을 숨길 필요가 있나…?”
“필요가 있으니까 그렇게 했겠지요.”
학사 내부에 마련된 텔로스 교단의 성당은 교수동 구석에 마련되어 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편인데, 학생과 교수진 중에서도 텔로스 교도가 꽤 많기 때문이다.
성황과 대주교가 학사에 온 김에 학사 내부에 마련된 성당을 찾아가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별동대만을 데리고 남몰래 들어가려 한 것. 특히, 이 아켄섬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모든 일정을 제쳐 두고 성당부터 찾아간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로르텔은 내 상처를 꽉 움켜쥐면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눌러 참은 채 똑바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일단 나가요.”
* * *
클라리스는 반쯤 찌부러져서 열리지 않는 보관소의 문을 억지로 당기고 있었다.
주변을 보자 하면… 이미 피 칠갑이 되어 있는 자들이 가득했다. 성법의 가호 덕분에 클라리스 본인은 무사했지만, 클라리스를 지키려 했던 두 기사의 목숨까지 보호하지는 못했다.
“으윽… 크윽…!”
반쯤 울먹이는 듯한 얼굴로 보관소의 문을 당겨 보지만, 얼마 되지도 않은 클라리스의 근력으로는 영 버거웠다. 결국 성법술을 동원해서라도 부숴 보려고 하던 순간…
―쾅!
내부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한 마력에, 문이 그대로 박살 나서 튕겨져 나갔다.
그 안에서 걸어 나온 것은 에드를 부축하고 있는 로르텔이었다.
“에드… 선배님…! 안 돼… 안 돼…!”
클라리스는 또 헛숨을 집어삼켰다. 수십 번을 지켜보았던 에드의 죽음이 그녀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아,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또다시 소름이 돋고 마는 것이다.
에드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서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클라리스는 그런 에드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달려들어서 휙휙 얼굴을 쓸어내리고만 있었다.
“에드 선배님… 에드 선배님….”
로르텔은 안중에도 없이, 에드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으면서 다친 곳을 훑는 클라리스. 그녀는 당장에라도 울 듯이 눈을 비벼 댔다.
“말 한 필은 아직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네요. 상처는 심하지만… 교수동까지는 갈 수 있겠죠.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로르텔은 하늘을 뒤덮은 성창룡을 바라보고는 잠시간 몸을 떨었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다시금 평정을 유지해 보였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한다고는 하지만, 역시 이렇게까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말 고삐를 풀어 줘. 저걸 타고 가야겠어.”
호들갑을 떨면서 에드를 살피는 성녀를 제쳐 두고서, 로르텔은 에드의 말대로 얼른 마차에 연결된 고삐를 풀어서 말을 당겼다.
그리고 마차 화물칸에 있던 안장을 꺼내 와서 말의 등에 휙 올려놓고, 순식간에 고정용 틀과 가죽끈을 묶었다.
“아무리 안장이 있어도 그렇지… 두 명 이상은 타고 가기 힘들어요. 셋 중 하나는 남아야겠어요.”
“나랑 성녀님이 가야 해. 설명하자면… 길다만….”
그 말에 로르텔은 도끼눈을 뜨고서는 클라리스와 에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상처를 감싸 쥐고 말 안장을 움켜잡는 에드와 그런 에드에게 들러붙어서 눈물을 펑펑 쏟아 대는 클라리스.
그리고 하늘에는 당장이라도 세상을 멸망시킬 듯이 포효하는 성창룡. 하나같이 어지러운 상황들의 연속이지만, 로르텔은 한숨을 푹 쉬는 것으로 생각 정리를 끝냈다.
“빨리 타세요, 성녀님.”
“아, 아앗….”
에드가 재빨리 말 고삐를 쥐고 올라타고, 그 뒤로 로르텔이 성녀를 밀어 올려서 태웠다.
그렇게 둘을 태우고 나서 올려다보니, 마치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 두 남녀처럼 보여서… 로르텔은 속이 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에드 선배님께도 생각이 있겠죠. 상황이 이렇게까지 급박하게 흘러가고, 시간적 여유도 없는 것 같으니 저는 전적으로 에드 선배님을 믿을게요.”
로르텔은 문득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말 안장 한쪽을 꽉 움켜쥐었다.
“고맙다, 로르텔. 이 빚은 나중에 진짜 꼭 갚으마.”
“아뇨, 지금 갚으셔야겠어요.”
로르텔은 안장에 한쪽 발을 올리고 확 당기면서 몸을 앞으로 끌어 올리더니, 말 위에 탄 에드의 가슴께를 움켜쥐고서 상반신을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진하게 입을 맞추고서… 휙 다시 말 아래로 뛰어내린다.
“에엑… 에에엑…??”
그 광경을 본 클라리스는 완전히 홍당무가 된 채로 입을 꽉 틀어막고는… 당황스러운 듯 신음성을 흘리고만 있었다.
“두 번째도 저네요, 에드 선배님.”
마치 클라리스 더러 보라는 듯이, 순식간에 저지른 일이었다.
“뭐, 이쪽도 보험은 들어 놔야 되니까.”
그리고 안장을 휙 놓은 채로 클라리스를 보고 요염하게 웃는 것이다.
“성녀님. 세상사 모든 것엔 상도라는 것이 있는 법이니, 남이 점 찍어 놓은 상품에 함부로 들러붙으면… 만사가 복잡해지는 법이랍니다.”
순진한 클라리스 입장에서는 뭐라 반박도 못 하고, 그저 어버버 대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드 또한 퍽 당황스러웠는지 두 눈을 부릅뜬 채 로르텔을 바라보았으나… 로르텔은 예의 그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 엉덩이를 때렸다.
한 시가 바쁜 상황이었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말이 소리를 내며 뛰어나갔다.
그렇게 타닥대며 뛰어가는 말을 바라보고, 로르텔은 가만히 뒤를 돌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내가 헷갈린 게 아니라면… 성창룡이 날뛰는 재앙의 세기는 분명 삼백 년 전에 끝났을 텐데….”
그 거대한 모습에서 위용이 뿜어져 나온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로르텔은 어렵사리 웃어 보였다.
위기 앞에서 웃는 자가 결국에 이기는 자다. 이번에도 그 격언이 들어맞아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