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34)
금화 세 닢 (2)
새벽 공기가 그리 차갑지 않다.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몸 여기저기에 습기가 서려있다. 아무래도 식은 땀인 듯 했다.
무슨 꿈을 꾼 건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썩 좋은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대로 오두막 문을 열고 캠프 쪽으로 나오니, 아직 은근한 어둠이 남아있는 새벽 특유의 분위기가 익숙하다.
하루 일과의 시작은 언제나 비슷했다. 은은한 안개가 깔린 숲 사이에서 기지개를 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최근들어 루시가 캠프에 잘 찾아오질 않는다. 별 일이다 싶다. 다른 용무가 바쁠만한 사람도 아니다.
근처 어딘가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 모습도, 좀 안보이기 시작하니까 허전해진다. 기회되면 벨 씨에게 좀 물어볼까 싶기도 하다.
“좀 일찍 일어났나.”
학기 말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아침 시간을 틈타 마법 사학 서적을 좀 훑어봐야 했고, 모닥불을 다시 살려서 간단한 식사 준비도 좀 해둘 생각이다.
원래 아침부터 불을 이용한 식사를 준비하는 경우는 잘 없다. 매일 아침 교수동까지 가볍게 구보하는 것이 당연한 일과처럼 되었다. 운동 전에 든든하게 먹어봤자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근래 들어서는 당연스럽게 불을 피우게 되었다. 입이 하나 늘었기 때문이다.
아직 예니카는 숙면을 취하는 중이다. 예니카가 일어나기 전까지 간단한 아침이라도 준비해 둘 요량으로, 몸의 마력을 가볍게 이끌어냈다.
손 끝에 모인 마력이 모닥불 방향을 향하더니, 이내 발화 마법이 발현된다. 커다란 철제 냄비를 가져다가 모닥불 위 거치대에 잘 고정시키고, 강가에서 떠온 물을 끓였다.
“…”
그리고 챙겨둔 마법사학 서적을 꺼내든 뒤 근처 나무 등걸에 앉았다.
새벽녘 숲의 공기는 아직도 습기가 서려있다.
고요한 분위기 사이로 이따금씩 새가 짹짹대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풀숲 사이로 다람쥐 같은 것이 휙휙 나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 숲의 공기에 취해 마법사학 책을 넘겼다.
“……”
인기척이 느껴진다.
나는 굳이 고개를 들진 않았다.
그 방향은 내가 앉은 자리 옆에 있는 나무 등걸이다.
그곳엔 익숙한 모습을 한 소녀가 가만히 앉아있다. 드리워진 앞머리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진 않지만, 어쨌든 입가는 흐뭇하게 웃고 있다.
언뜻 보기에 흡족하고 만족스럽게 웃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은 누가봐도 자연스럽지 않다. 연노란색 머리칼에 예쁘게 수놓인 꽃들이 한가득 자리해 있고, 몸에서 흘러나온 핏줄기는 나무 등걸을 타고 흙바닥까지 흘러내려가고 있다. 피에 절은 류트는 나무 등걸 한 켠에 다소곳이 기대어져있다.
살리려고 한껏 노력하고 뛰어다녀 보았지만, 끝끝내 세상을 떠난 음유시인이다.
나는 책 페이지를 가만히 넘기고 있었다.
그런 묘한 풍경에 반응하지도 않고, 구태여 고개를 휘저어 그런 환각을 없애려고 하지도 않았다.
눈에는 독기가 올라오지만, 책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에는 변함이 없다.
일시적인 감정변화에 이성을 잃어 페이스를 망친다면, 그보다 멍청한 짓은 없다.
나는 도망치지도 않고, 호들갑 떠는 일도 없이… 그저 가만히 불가에 앉아 책을 넘겼다.
*
“나 이제 하위 정령 정도는 다룰 수 있을 것 같아.”
예니카가 반지를 써서 최고위 정령을 소환해낸지도 어느덧 일주일 넘게 지났다.
그간 나와 벨 씨의 도움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가던 예니카다. 마음의 빚이 꽤 쌓였는지, 매번 미안해하는 기색이었다.
하위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건 기초적인 생활은 예니카가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꽤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래? 한 번 해보긴 했고?”
“혹시 마력 꼬일까봐 불안해서 안하긴 했는데… 일단 에드가 옆에 있으니까 한 번 해보려고. 이제 슬슬 나도 수업에 들어가야 하잖아. 시험도 곧이고.”
예니카 정도 성적에 몇 주 정도 앓아 누워있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겠으나, 그래도 시험날 정도는 얼굴을 비추러 나가야만 했다.
불가에 앉아 있던 예니카는 정신을 집중하더니, 이내 손 끝에서부터 조금씩 마력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내 작게 속삭이는 말은, 하위 정령을 소환하기 위한 주문이다. 꽤 귀에 익었다.
사실 예니카는 하위 정령 정도는 주문 영창 없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기량을 가진 소녀다. 애초에 수백마리씩 되는 하위 정령을 일일이 주문을 외워가며 소환 해댔을 리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심신미약 상태이고, 마력 발현도 오랜만에 하기 때문에 신중히 임하는 기색이다.
아무리 몸 상태가 안 좋아도 그렇지, 하위정령 정도는 무난하게 소환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곧 죽을 각오를 해내면 최고위정령까지도 다룰 수 있는 정령사 아니던가.
“어, 흑…”
그러나 예니카는 몸을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나무 등걸에서 몸을 일으켜 예니카를 받쳐주었다.
내가 예니카의 몸을 받쳐주는 사이, 손끝으로부터 발현된 마력에서 커다란 불이 일렁였다. 이윽고 그 불꽃 속에서 피어오른 것은 하위 불 정령, 머그였다.
[ 으아아! 드디어 저를 불러내주셨군요! 예니카 아가씨! ]“콜록… 콜록…!”
예니카는 재채기를 해대며 내 쪽으로 몸을 묻어왔다. 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을 보니, 다시 열이 올라오기 시작한 모양이다.
내가 근처에 떠두었던 물을 가져와서 입에 흘려넣어주자, 예니카는 어렵사리 삼켰다.
“이, 이상하다… 이렇게까지… 마력이…”
[ 예, 예니카 아가씨… 설마 저 때문에…? ]그대로 머그는 근처에 있는 바위에 앉아 송구스러운 듯이 몸을 꼬고 있었다.
“괜찮아? 내 말은 들려?”
“으, 응… 예상했던 거보다 마력 부담이 더 커서…. 당황했어…”
[ 저, 저 말입니까…? 한낯 하위 정령에 불과한 저 불초 머그 따위… 아무리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상태라지만, 예니카 아가씨가 부담을 느낄 리가 없는데… ]그 말을 듣고 머그 쪽을 보니, 과연 몸을 감도는 그 불꽃 주위를 감도는 마력의 양이 심상치가 않다.
“머그.”
[ 예, 옙! 에드 도련님! ]내가 나지막이 그 이름을 부르자, 죄인이라도 된 표정으로 머그가 휙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꼿꼿이 선 자세로 대답하는 것이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모습이다.
“아무래도 너, 조만간 위상변이가 일어날 것 같다.”
내 몸의 마력을 예니카에게 조금씩 흘려넣어 주면서, 머그로 인한 마력 부담을 조금씩 덜어주었다.
숨을 몰아쉬던 예니카의 표정이 조금씩 차분해지고, 호흡도 일정해져갔다.
[ 네, 넵?! ]“요전부터 느낀 건데, 널 다룰 때 드는 마력 양이 심상치가 않아. 원래부터 하위 정령 치고는 마력 소모가 꽤 크긴 했는데, 요즘에는 거의 중위 정령에 준하는 마력을 잡아먹고 있다고.”
[ 무, 무슨 말씀을… 그렇다면… ]“그나마 내가 다루는 정령 중에서는 네가 가장 마력 효율이 좋잖아. 그래서 매번 널 전투에 활용했더니, 그만큼 친화도도 많이 오른 모양이고… 또, 너 자체의 마력 감응도 꽤 높아진 느낌이다. 예니카 입장에서야 알 길이 없었겠지만.”
매번 전투 때마다 머그를 활용한 정령식을 발현해대고, 자잘한 물리 공격도 머그에게 맡기는 일을 반복했더니… 기어이 머그는 중위 정령 직전까지 그 역량을 드높인 것이다.
애초에 머그는 하위 정령 치고는 꽤나 역량이 있는 편이었으니, 지금에 와서야 중위 정령으로 변이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그, 그럴수가… ]“…머그?”
[ 말단 하위정령으로 고통 받아왔던 기나긴 세월… 그 보답을… 드디어… 드디어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제가 중위 정령이 된단 말입니까… ]“…”
[ 하위 정령 중에 그나마 능력이 좋단 이유로 여기저기 차출당하고, 틈만 나면 하위 정령들 지휘 업무 맡기고, 저도 똑같은 하위 정령일 뿐인데 괜시리 대표 격으로 책임 소재 뒤집어 쓰고 질책 받고…. 그런 시절도… 드디어 끝이 난단 말입니까… ]머그의 억하심정이야 이제와서 말해봤자 새삼스러울 지경이다.
사실 그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은 고위 불 정령 타칸일테지만.
[ 에드 도련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에드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단시간 안에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지는 못했을 겁니다… 예니카 아가씨의 은총도 정말 감사드릴 일입니다만, 그 수많은 하위 정령 사이에서는 직접적인 전투 경험을 쌓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일단 지금 기뻐할 때는 아닌 것 같다.”
내가 고개를 휙 저어서 예니카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머그는 그제서야 호들갑을 떨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 그, 그렇지요…! 제가 일단 현현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예니카 아가씨에게 큰 부담이 갈테니.. 일단 이 불초 머그 얼른 들어가보겠습니다…! ]“다음에 정령 감응 훈련할 때, 네 위상 변이도 같이 한 번 검토해보자.”
[ 넵…! 크핫… 크하핫…! 크카칵…! 으아아아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환호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머그는 그렇게 불꽃을 피어올리다 사라졌다.
누가보면 불타죽는 것처럼 보일테다.
“…”
예니카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여전히 뜨겁다.
역시 머그는 거의 중위 정령에 준하는 마력을 잡아먹고 있었다. 평소 예니카라면 설령 중위 정령이라 할지라도 아무렇지 않게 현현해보일 수 있겠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역시 하위 정령이 한계였나 보다.
그나저나, 머그가 중위 정령으로 변이하고나면, 하위 정령의 자리가 비게 된다.
위력적인 정령을 하나 더 손에 넣는 건 분명 긍정적인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하위 정령이 없어선 곤란하다.
고위, 중위, 하위 정령. 언뜻 보면 위로 갈수록 무조건 좋아보이긴 하지만, 사실 세 정령의 역할자체가 꽤 다르다.
실베니아의 낙제 검성에서는 정령을 다루는 인물들은 모두 같은 패턴으로 정령을 사용했다.
하위 정령은 기본기, 중위 정령은 주력기, 고위 정령은 필살기다. 각자 마력 효율도 다르고, 맡을 수 있는 역할도 다르기 때문에 각 위상 별로 정령을 하나씩 다룰 줄 알 필요가 있다.
즉, 새로운 하위 정령을 들일 필요성이 생긴 셈이다. 굳이 따지자면 땅 정령이나 빛, 어둠 정령이 비어있으니, 그 쪽 계열 정령들이 편하긴 할 것 같다.
뭐, 그런 것들은 천천히 생각할 일이고, 일단은 예니카부터 챙겨야 할 상황이었다.
나는 예니카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한동안 물을 흘려보내주었다.
*
“로스테일러 가문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발신인은 가주 크레핀 로스테일러입니다.”
로르텔은 마른 침을 삼켰다.
로르텔의 개인 비서가 들고온 서신은 고급 종이에 예쁘장한 인장이 박혀있었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상징이 수놓아져 있는 편지지 뒤편에는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자필 사인도 박혀 있었다.
집무용 책상에 앉아서 편지를 받아든 로르텔은, 비서에게 나가보라고 지시한 뒤 혼자서 편지를 펼쳤다.
– ‘친애하는 엘테 상회의 회주대리, 로르텔 케헬른 양에게.’
대륙 제일의 권력가를 책임지고 있는 공작이 경의를 표해주는 것. 상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다.
혹시나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을까 싶어서 편지를 쭉 읽어보았으나, 의외로 에드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적혀있질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도 예상했던 내용 그대로였다.
– ‘현자의 봉서 매입 건에 대하여, 이제 슬슬 그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현자의 봉서’.
지금은 엘테 상회의 소유로, 로르텔이 관리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로스테일러 가문에 매각하도록 약정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봉서 매입 협상에 대해서는 완전히 타냐 로스테일러에게로 그 협상 권한을 일임해 둔 상태였지만, 타냐는 학생 회장 선거를 기점으로 이런 저런일에 잔뜩 휘말려서 봉서를 신경쓸 수가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현자의 봉서를 로스테일러 가문 쪽으로 넘기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은 눈치다.
어차피 직접적인 매각 협상은 타냐와 할 것이고, 타냐는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굉장히 우호적이니…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타냐와 자신의 관계는 또 어떤가.
타냐와 로르텔은 빈말로도 좋은 사이라고 할 수가 없다.
첫인상부터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타냐와 로르텔은 계속해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타냐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로르텔 본인은 이런 구도를 스스로 만들어낸 감이 있다.
실베니아를 한 입에 삼키려거든, 아직은 물밑의 잠룡으로 남아있을 필요가 있다. 이미 로르텔이 생활동의 실질적인 패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냐와의 대립각은 계속해서 유지해두고 싶었다.
압도적 강자는 언제나 견제 받는 법이다.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정세를 유지하고 있어야만, 교장 오벨 포시어스가 섣불리 어느 한 쪽 편을 들기 어려울 것이다.
“좀 더 투닥거리고 있는 편이 좋겠지… 적어도, 이번 현자의 봉서 매입 협상까지는…”
빙그레 웃음지으며, 로르텔이 고개를 푹 내리깔았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 구절까지 순식간에 읽어내렸다.
– ‘덧붙여서 말하길, 저번에 황실 쪽에 넣었던 건축 제안서는 반려되었다.’
“…?”
– ‘아켄섬의 북쪽숲은 후일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확장을 위해 활용될 수도 있기에, 황실차원에서는 가만히 내버려두길 원한다. 클로엘 폐하께서도 그리 긍정적인 답변을 주시진 않았다. 애시당초 아켄섬 남부의 생활동이 상업구역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굳이 북쪽숲으로 상회 건물을 확장하려는 의도를 알 수가 없다.’
– ‘애시당초, 남쪽에 있는 맥세스 대교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상단 기지를 구축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 의도를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 허가는 어렵다.’
로르텔은 북쪽 숲 인근에 아켄섬 내부로 들어오는 물품들의 재고를 관리하기 위한 상단 기지를 구축할 생각이었다.
아예 에드의 캠프 주변을 중심으로 엘테 상회의 권역을 만들어버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근래들어 엘테 상회의 실베니아 지부를 좀 더 확장해야할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던 참이다.
생활동과는 별개로, 커다란 상단 기지를 구축해놓으면 이제 슬슬 실베니아와 엘테 상회는 한 몸처럼 융화해가는 것이다. 어느 정도 선을 넘으면, 학사 쪽에서는 엘테 상회를 떼어 놓으려 해도 떼어놓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갈 것이다.
졸업 전까지, 이 아카데미를 통째로 잡아먹는다.
그 계획의 실질적인 첫 걸음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 쿵
로르텔은 책상 위에 고개를 묻었다.
– 끼익
문을 열고 엘테 상회의 직원이 들어오자, 안색이 새파래진 로르텔을 보고 기겁을 했다.
“회주 대리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뇨. 그냥… 사업 확장 계획에 차질이 좀 생겨서… 이러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겠네요.”
“저, 보고 사항이…”
“거기 내려놓으시고, 어.. 오필리스관 쪽에 연락 좀 넣어주시겠어요? 이왕이면 메이드 장에게.”
상회 직원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로르텔은 본론을 시원스럽게 이야기 했다.
“오필리스관에서 나가려고요. 퇴사 사유를 물어보면… 음… 뭐라고 해야할까… 좀 더 자유분방한 환경에서 살고 싶어졌다고 전해주세요.”
“…”
“아, 맞다. 그리고 또 제안서도 하나 넣어주세요.”
*
“좀 더 자유 분방한 환경에서 살고싶어졌다는데요.”
요컨대 캠프로 가겠다는 거 아닌가.
오필리스관의 메이드 장, 벨 마이아는 또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했다.
안 그래도 요 며칠 좀 바쁘게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메이드 장 업무를 처리하면서, 틈나는 대로 캠프에 찾아가 예니카의 병 간호를 도와주었다.
슬슬 예니카의 병세도 좀 나아지는 듯 해서 여유가 생기나 했으나, 이번에는 로르텔 쪽이 말썽이란 말인가.
“로르텔 아가씨는… 생활 습관도 그렇게 빠릿한 편이 아니라서, 항상 시중을 드는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할텐데… 굳이 오필리스관을 나가셔서 고생을 할 필요가 있으실까 싶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선임 메이드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벨 마이아는 오후 일과에 들어가기 앞서서, 오필리스관 메이드들의 청소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다.
오필리스관 메이드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입주 학생들이 교수동에 가서 수업을 받는 동안 내부 시설과 개인실을 완벽하고 깔끔하게 청소해놓는 것이다.
오후가 되면 슬슬 수업이 일찍 마무리 되는 학생들이 돌아올테니, 얼른 청소를 끝내야만 했다.
선임 메이드로 꽤 긴 시간을 일했던 벨 마이아 입장에서는, 꽤나 고역과도 같은 시간이다.
직접 시찰을 다니면 대부분의 방은 잘 청소가 되어있지만, 종종 가다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일처리를 해놓은 방도 꽤 보인다.
시트에 얼룩이 그대로 묻어 있거나, 커튼을 털어보면 먼지가 나오고, 심지어는 의자 한 쪽 발이 망가졌는데 그것도 모르고 방치 해놓은 방도 있다.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은 언제나 일처리가 완벽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메이드들은 이런 실수를 범하는 일이 없지만, 가끔가다 신입으로 들어온 메이드들이 이런 실수를 범하곤마는 것이다.
한 두 명의 실수야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큰 규모의 기숙사를 매번 관리하고, 청소 상태를 점검하다보면 매번 비슷한 실수가 발각되곤 하는 것이다.
답답해서 직접 뛰는 운동 선수들이 이런 기분일까.
그거 뭐 어려운 일도 아니다. 시트 세탁할 때 제대로 점검하고, 먼지 좀 구석구석까지 잘 체크하고, 가구 관리 상태 좀 잘 확인하고. 솔직히 5분도 걸리지 않는 일이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 메이드들이다. 벨 마이아도 오랜 기간 실무를 한 사람이니 그 사정은 이해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런 기본적인 일들은 좀 제대로 체크해줬으면 하는 기분이 들고 만다.
허나, 직접 걸레를 빨고, 시트를 세탁하고, 먼지를 털고 있으면 주변 메이드들이 다 뒤집어진다.
주변 사람들이 곤혹스러워 하는 것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므로, 오랜 시간 관리직으로서만 일을 해왔으나… 이제 슬슬 몸이 근질근질 거린다.
특히, 이번에 예니카의 병수발을 들면서 뭔가 확실해진 느낌이다.
직접 깨끗한 천과 간단한 음식거리를 싸서 오두막에 찾아간 다음, 이런 저런 간단한 청소를 해주고, 병 수발을 듣고 있자니 뭔가 가슴 속에 시원한 것이 밀려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복잡한 생각 안 하고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이렇게 하루 종일 머리가 지끈대는 관리 일이나 하고 있으니 몸에서 신물이 날 지경이다.
“아, 맞다… 메이드장님.”
“네?”
“그, 로르텔 아가씨로부터 다른 메시지도 있습니다. 그…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운데…”
“조심스럽다니… 또 무슨 말을…”
함께 시찰을 돌던 선임 메이드가 품 속에서 깔끔하게 접힌 서신을 하나 꺼내서 벨 마이아에게 내밀었다.
“그… 대리인을 구해다 줄테니, 이직하실 마음 없냐고…”
“…네?”
“저도 제 귀를 의심하긴 했습니다만… 일급으로 플렌 금화 세 닢이라고 합니다.”
플렌 금화 20닢이면 꽤 커다란 마차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는 돈이다.
하루에 플렌 금화 3닢은… 황실 소속의 기사단원 중에서도 고위직은 되어야 벌 수 있는 액수다. 거의 기사단장에 준하는 대우였다.
물론, 벨 마이아는 메이드로서는 일류이며, 여러 경험도 잔뜩 쌓여있어서 체급이 꽤 커진지 오래다. 단순히 메이드로서만 우수한 게 아니라, 개인 비서로든, 아니면 사람 그 자체로서든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한 인재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 대우는 파격적이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다.
“로르텔 아가씨의 개인 메이드로 넘어오시라고 하시는데… 새로 지을 별장을 관리해달라고 하십니다.”
“…….”
“당장에 대답을 해주실 필요는 없다고 하시는데… 저어… 혹시… 관두십니까…?”
서류를 받아든 벨 마이아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이윽고 여유를 찾은 듯이 벨은 피식 하고 웃어보였다.
“…그래도 그렇지, 제가 이 오필리스관에서 몇 년을 일했는데요. 거의 철들 무렵부터 항상 여기서 메이드 일을 했지요…”
아무리 그래도 오필리스관에 재직했던 시간이 있다.
거기서 쌓아왔던 경험과 인정(人情)은 차마 금전적 가치로 환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서류 한 귀퉁이에 쓰여진 짧은 글귀가 계속 그녀의 눈가를 간질인다.
“….”
일급, 플렌 금화 3닢.
월급도 주급도 아니고…
일급이…. 플렌 금화… 3닢…!!
여유로운 얼굴로 눈을 지그시 감았지만, 이미 그녀의 동공은 한없이 떨리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