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35)
금화 세 닢 (3)
루시 토벌전.
3막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최대 규모의 시나리오로, 홀로 텔로스 교단의 사도들을 다 때려잡고, 그 뿌리까지 뽑아 버리려 드는 대마법사 루시 메이릴을 저지하는 이벤트다.
텔로스 교단의 어둠에 대해서는 아직 알 방도가 없는 테일리 일행이다.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고 그저 사도들을 다 때려 부수려 드는 루시의 행보가 그냥 미친 것처럼 보였을 터다.
허나, 그런 루시를 충동질한 사람은 아델을 잃고 타락한 불신의 성녀 클라리스다.
텔로스 교단에 뿌리박힌 어둠에 대해 루시에게 전해 주자, 루시는 깊이 생각 않고 텔로스 교단을 때려 부수러 간 것이다.
아델의 신력이 약해져 가면서 루시 또한 끝없이 되감기던 시간의 기억을 어렴풋이 되찾을 수 있었다. 클라리스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실베니아 아카데미는 글록트가 남긴 유산이자 보물이다.
더군다나 루시는 글록트와 약속한 사이다. 언젠가 이 학교가 감당하기 힘든 위기가 찾아오면 반드시 지켜 주기로.
루시는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교단의 사도들을 때려 부수러 갔고….
그 사정을 제대로 알 방도가 없는 제삼자들이 루시의 행보를 막아서는 것… 그게 이 3장의 마지막 전투 내용이다.
루시를 쓰러트리고 나서, 뒤늦게 텔로스 교단의 어둠을 알아차린 테일리가 대주교 베르디오와 남은 사도들을 쓰러트리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클라리스가 가진 유물에서 획득할 수 있는 새로운 검성식이 바로 ‘신살검(神殺劍)’이다.
4막 보스, 악신 메뷸러를 죽일 때 쓰는 기술이기도 하다.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문제가 있다.
이 모든 시나리오의 전제가 전부 붕괴된 상태라는 것이다.
성녀 클라리스는 타락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성황 엘데인을 한 번 더 믿어 보고, 그의 행보를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베르디오는 이미 파문당해서 성도로 연행된 상태다. 그는 더 이상 성직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
즉, 루시 토벌전은… 아예 일어날 이유조차 없어져 버렸다.
“…….”
오두막 지붕 위에서 굴뚝 보강 작업을 하던 차였다.
자그마한 손 도끼의 손잡이 밑면으로 지지대의 홈을 내려쳤다. 목재 지지대의 부품들이 깔끔하게 결합되어 가고 있었다.
“가만히 놔둘 일은 아닌 거 같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생각을 쭉 정리해 보았다.
루시 토벌전은 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이벤트로 취급받았다.
일단 시나리오상의 비중이나 스케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스킬 숙련도와 레벨 경험치, 그리고 갖가지 고유 스킬들은 필시 4막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테일리의 성장이 크게 늦춰진다는 것은 큰 불안 요소다.
이미 어긋난 정사에 언제까지고 매달려 있을 순 없지만, 테일리의 성장은 최소한의 보험 역할 같은 것이다. 제아무리 어긋난 역사라 할지라도 시련이 들이닥쳤을 때 해결할 실마리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말로, 루시 토벌전은 완전히 없는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인가.
루시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부채 의식. 생전 글록트와 나누었던 마지막 약속은 이것으로 완전히 해소되어, 이제 자유로이 살아갈 날만 남은 것인가.
그런 것들에 대해 확인해 보고 싶어서 루시를 직접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벌써 며칠째 루시는 캠프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평소에는 거의 배경처럼 들러붙어서 항상 낮잠을 자고 있던 그 소녀가, 근래 들어 캠프에 발을 들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쨌든 잠은 오필리스관에서 자고 있을 테니, 다음에 벨 씨를 만날 때 불러 볼까 하던 차였다.
“에드 선생님 맞으십니까~”
오두막 아래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굴뚝과 지붕을 보강하느라 오두막 위에 올라와 있는 입장이다. 대충 외곽으로 미끄러져 내려와서 아래를 확인해 보니, 초면의 남자와 여자가 한 명씩 와 있었다.
지붕 외곽에 걸터앉은 채로, 둘을 쳐다보았다.
“어라, 지붕 위에 계셨었군요.”
남자 쪽은 음흉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웃는 상이지만, 약삭빨라 보이는 모습이다.
갈색 베레모를 쓰고, 손에는 커다란 나무 상자를 하나 안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 쪽은 꽤나 수수한 인상이었다.
꽤나 긴 흑발을 단정하게 쭉 늘어뜨리고 있다. 이렇다 할 장신구나 액세서리도 없이 깔끔한 모습이다.
“안녕하십니까, 에드 선생님. 저는 듄이라고 합니다. 이 쪽은 리엔나라고 하고요.”
“아, 안녕하세요. 바, 바, 반가워요.”
나는 지붕에서 휙 뛰어내려서 흙바닥 위에 겨우 착지했다. 균형을 잡고 바로 서서 옷을 털고 있자, 듄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했다.
“저는 로르텔 회주 대리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 앞잡이입니다. 공식 직함은 엘테 상회 실베니아 지부 영업 담당직이지만, 뭐… 명함만 번지르르한 느낌이지요.”
“로르텔이 보내서 왔냐?”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리엔나 비서입니다. 로르텔 회주 대리의 직속 비서이긴 하지만, 회주 대리는 대부분의 일을 직접 처리하시니 사실상 홍차를 타거나 청소나 하는 사람이지요.”
“그런 식으로 소개하면 제 첫인상이 박살 나잖아요, 듄.”
“웃자고 하는 소리입니다~ 웃자고요, 우리.”
전혀 재밌지 않다. 나도 리엔나도 웃지 않았다.
그저 혼자 깔깔대는 듄은, 자기 품에 안은 나무 상자를 휙 들어 보이며 이야기했다.
“회주 대리께서 이쪽에 별장을 건축하실 예정이라, 큼지막한 기본 측량 정도만 해 가려고 들렀습니다. 보고서에 올리려고요.”
“그거… 진담이었냐…?”
“한다면 하는 분이지요. 에드 선생님과 관련된 일이면 유독 득달같이 달려드시니, 저희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지 않겠어요? 피고용인 신분이잖습니까.”
그리 나이 들어 보이진 않아서 냅다 말을 놓았는데, 저쪽은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이다.
능청스러움이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상인들 특유의 능글맞은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꽤나 질척한 처세술이다.
“에드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로군요. 뭐, 사실상 만나려면 언제든지 만날 수야 있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로르텔 회주 대리한테 눈치가 보이니 원.”
“자꾸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붙이는 게 더 어색한데. 어차피 동년배로 보이는 데 꼭 그렇게 불편한 호칭으로 불러야 되나?”
“제가 이 나이에 돈 좀 만지고 있는 이유가 다 눈칫밥 덕입니다.”
듄은 상자를 내려놓은 뒤, 측량 도구를 이것저것 꺼내서 리엔나에게 휙휙 던져 댔다. 리엔나는 듄이 던져 대는 측량 도구들을 정신없이 받아 들었다.
“어쨌든 에드 선생님은 제 고용인이 각별하게 생각하고 계신 분이니, 잘 보여 둬서 나쁠 건 없겠지요. 입 밖으로 이 말을 꺼낸 시점에서 제가 너무 속물적으로 보일 수는 있겠습니다마는.”
“…….”
“뭐, 사람이 좀 속물적일 수 있지요. 에드 선생님도 알 거 다 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인간관계란 것이 이해관계랑 완전히 동떨어져 있을 수 있겠어요. 자, 이거까지만 받아 들고 저 반대쪽으로 가시죠.”
커다란 줄자의 한쪽을 받아 든 리엔나가 허겁지겁 뒷걸음질을 치며 공터의 반대편까지 나아갔다.
가다가 괜스레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는 둥 영 소란스럽지만, 듄은 깔깔대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뭐, 상회 직원이 에드 선생님과 이렇게 직접적으로 만나는 건 로르텔 회주 대리께서도 싫어하십니다. 오늘이야 뭐 어쩔 수 없지만요. 마침 일손이 비는 게 저밖에 없었거든요.”
“싫어할 이유가 있나? 직원 좀 만난다고 해서 뭐 얼마나 대단한 얘기 나눈다고.”
“에드 선생님을 만날 때 로르텔 회주 대리가 얼마나 실없어 보이는지, 스스로도 잘 아시는 거겠지요.”
듄은 줄자를 꽉 잡아당기고, 눈금을 확인하더니 서류에 몇 가지 숫자를 써내려 갔다. 그리고 가로로 쭉 돌아보자고 리엔나에게 소리쳤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상회에서 일할 때랑은 완전히 딴판이란 말입니다. 혈관에 피 대신 쇳물이 흐르나 싶을 정도로 냉혈한이지요.”
“고용주랍시고 존중한다더니, 말은 꽤 가차 없이 하네.”
“어라, 이거 칭찬이라고 한 말인데… 저희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은근히 칭찬으로 통합니다.”
“…….”
라플라스 베이커리에서 로르텔의 냉혈한 기질을 엿본 적은 있다.
사실 그 일이 아니더라도 딱히 로르텔의 평소 모습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다.
“평소엔 그렇게 냉철하게 행동하면서, 에드 선생님 앞에서는 꽃집 처녀마냥 누그러지고 앉아 있으니… 상회 직원들 보기에 자랑스러울 만한 모습은 아니겠지요. 제 입장에서야 배꼽 잡을 일입니다만.”
듄은 줄자 끝을 들고 가로로 측량하기 위해 쭉 공터 외곽을 따라 돌았다.
거리가 멀어지면서 듄의 언성도 높아졌다.
“뭐어…! 어제도 간만에 캠프에 들르셨다던데, 뭐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나누셨습니까?”
“별건 없었지. 안부나 좀 묻고… 또, 엘테 상회에서 뭔가 일을 꾸민다며? 학용품을 미리 사 두라는 이야기나 좀 하다 갔지.”
“역시 상회 쪽 내부 사정은 잘 알고 계시는군요. 최종책임자랑 친한 사이시니 그럴 만도 하지만.”
듄은 그렇게 말하고는 넉살 좋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뭐, 어쨌든 상회 일 관련해서 로르텔 회주 대리께 직접 부탁하기 힘든 일이나, 따로 말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저 듄을 찾아 주십시오. 제 입장에서도 에드 선생님한테 점수를 좀 따 두는 게 여러모로 편할 것 같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글쎄… 사실상 최종 결정권자인 로르텔을 놔두고 네게 부탁할 만한 일이 있을까 싶긴 하다.”
“너무 그렇게 빡빡하게 구실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일이라는 게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잖습니까. 잘 보이겠답시고 선물도 하나 마련해 왔습니다.”
듄이 고개를 슥 돌렸다. 그 방향을 바라보자, 모닥불 가에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선물 뭉치가 하나 보였다.
측량을 하고 있는 듄을 내버려 두고 가서 포장을 펼쳐 보자, 제법 고급져 보이는 술병이 들어 있었다.
“드렉스 백작령에서 일 년에 500병밖에 생산하지 않는 클렌트루 증류주입니다. 올덱 쪽 암시장에서도 플렌 금화 1닢은 줘야지 구할 수 있는 물건이지요. 동대륙의 증류 방식을 들여와서 새롭게 내놓은 술이라는데, 도수가 꽤 강하니 술이 약하신 분이 입에 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
“알코올에 면역이 없으면 한 방에 훅 갑니다. 리엔나는 한입 들이켰다가 그대로 훅 가서 그날 오후에 휴가를 냈었지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남 치부를 이야기하지 좀 말아요, 듄! 당신이 먹여 놓고는!”
저 멀리서 뽈뽈대며 화내는 리엔나를 내버려 두고, 듄은 깔깔대며 웃었다.
“이름난 애주가들도 아까워하며 마시는 술입니다.”
“날 필요 이상으로 고평가하는군.”
“저런, 고평가라뇨.”
줄자를 꽉 잡아당기고 있던 듄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한 손으로 서류를 휙휙 넘기면서 이야기했다.
“선생님이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것이겠지요.”
* * *
듄을 떠나보내고, 예니카의 상태를 점검해 둔 뒤 생활동으로 나왔다.
예니카는 꽤 많이 호전되어서 조만간 혼자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두막에 홀로 앉아서 이런저런 하위 정령을 불러내는 연습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이제 조만간이다.
나는 로르텔의 말대로 미리 서적류와 학용품을 구비해 두기 위해 잡화점으로 향했다.
생활동 메인 광장에서도 가장 중심에 위치한 클레이븐 잡화점은 라플라스 베이커리만큼이나 유명한 점포 중 하나이며, 생활동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을 지니고 있는 상업 시설이기도 하다.
생활동 광장의 분수가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최고의 입지 조건인데다가, 건물 층수는 무려 5층까지 있다.
생활동 내에서 5층이 넘어가는 건물은 단 세 개뿐이다.
맥세스 대교 출입 관리소, 엘테 상회 실베니아 지부, 그리고 클레이븐 잡화점.
그만큼이나 생활동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상점인 것이다. 당연히 물류는 엘테 상회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므로, 엘테 상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흐음….”
서적류는 좀 더 안쪽에 있는 서점에서 일괄 구입하면 되고, 일단 잡화점에서 필요한 일상 물품들 따위를 좀 구입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잡화점이지 간단한 식재료에 크게는 가구까지도 취급한다.
상업 도시 올덱에 가면 이 정도 규모의 잡화점이야 널렸겠지만, 외진 아켄섬에서는 이 정도만으로도 거의 백화점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 것이다.
입지 조건도 좋은 만큼 항상 학생들과 교직원들, 생활동에 거주하는 주민들로 붐비고 있다.
그래도 입구만 조금 붐빌 뿐이지 일단 내부로 들어가면 꽤 여유롭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서, 잡화점의 내부에 들어섰다.
깔끔하다고 부를 수는 없다. 건물의 연식도 꽤 되어 이리저리 허름한 부분이 보이고,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는 목재 진열장들도 제법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도 아켄섬 같은 구석진 곳에서 이 정도 유지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나는 로프와 마공학 수업에 쓸 수정구슬 몇 개, 그리고 간단한 잉크나 법진용 양피지 따위를 챙겼다.
어지간한 건 다 수제로 만들 수 있는 손재주가 있으니, 대부분은 학용품이나 소모품들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여기저기 오가며, 잡화점 내부를 돌고 있을 때였다.
“…….”
“…….”
간단한 식재료가 늘어서 있는 진열장 앞에서, 생뚱맞게 얼굴에 책을 덮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뭐 하냐….”
“…….”
혹시, 여기선 아는 척을 안 하는 게 센스 있는 행동이었나.
누가 봐도 아는 척 당하기 싫어서 얼굴을 가린 듯한 모습이었다. 한 박자 늦게 깨달은 나 자신이 살짝 원망스러웠으나, 이미 아는 척해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아니스….”
“어머, 에드. 반갑네. 뭣 좀 사러 왔나 보네.”
휙, 하고 고개를 뺀 아니스가 갑자기 자기 어깨를 감싸 안으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한쪽 팔로는 간단한 종이봉투를 안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어 자세라니… 아무것도 할 마음이 없는데 난데없이 적대시당한 기분이라 이쪽도 썩 묘한 기분이다.
“나도 뭣 좀 사러 왔는데, 이런 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최근에 연구실에 잘 안 나오던데, 많이 바쁘지?
예니카 소식은 나도 들었어. 듣자 하니 많이 아프다며. 뭐, 갑자기 캠프 가서 산다고 할 때 나도 좀 당황하긴 했는데, 그럭저럭 잘 적응하는 듯싶더니 갑자기 아파선 에드 너만 고생이네. 나도 그런 사정 잘 알고 있으니까 클레어 조교수님한테 네 사정 잘 설명해 드리긴 했어.
바쁜 일부터 잘 마무리하고 와. 어차피 클레비어스나 오닉스 선배가 일을 좀 잘하는 편이라 당장 일 처리는 문제없기도 하고, 너도 장학금 좀 타야지 학사 생활이 좀 수월해질 거 아니야.
”
당황하면 말이 많아지는 것은 예니카나 아니스나 매한가지다.
그나마 예니카는 더듬더듬거리는 통에 누가 봐도 당황했다는 것이 딱 느껴진다면, 아니스는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고 사무적으로 받아치는 느낌이다.
그래 봤자 말수 많아지는 건 똑같긴 하다. 친구 사이 아니랄까 봐 이런 부분은 또 닮아 있다.
어쨌든 아니스는 같은 클레어 조교수의 연구실에 소속된 입장이기도 하고, 몇 없는 동급생 지인이기도 하다.
반갑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성의 있게 인사를 건넬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고맙다. 너도 뭐 좀 사러 왔냐?”
그렇게 말하며, 종이봉투 안으로 시선을 휙 던지자 호들갑을 떨며 봉투를 꽉 끌어안았다.
웨이브 치는 회갈색 머리칼이 커튼처럼 드리워지며 봉투의 내용물을 가린다.
“…….”
소스라치게 놀란 듯한 반응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거, 미안하다.”
일단 사과가 튀어 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아니스는 봉투를 꽉 끌어안은 채로 사과의 메시지를 듣더니, 이내 당혹스러운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몸이, 반사적으로. 내가 왜 이런담. 너한테 잘 보여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어후. 우후후….”
“…괜찮냐?”
“괜찮고 말고. 봐도 돼. 뭐 대단한 거 들어 있지도 않아.”
그리고는 손을 덜덜 떨면서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봐도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여유롭다는 자세를 최대한 취해 보지만, 괜스레 새빨개지는 얼굴 탓에 이쪽도 곤혹스러워진다.
그렇게까지 해서 꼭 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지도 않다. 근데 저쪽에서 저렇게까지 굳은 결심을 가지고 보여 주니 안 궁금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나는 결국 종이봉투 안을 스윽 하고 쳐다봤다.
“미역… 을 왜 이렇게 많이… 샀냐…?”
“싸고… 양 많으니까….”
“과일 껍질은… 왜 들어 있냐… 이것도 파는 거냐…?”
“옆 건물 청과점에서 얻어 왔어…. 생채로 먹거나, 수박 껍질 같은 건… 무쳐 먹으면… 먹을 만해서….”
“이 바게트는… 왜 껍질만 있는… 아, 아니다….”
나는 더 캐묻지 않고 조용히 말문을 틀어막았다.
아니스 헤일란이라고 한다면, 모든 교수가 침을 줄줄 흘리며 제 연구실에 들이고 싶어 하는 수석 조교로 유명하다.
거기다가 기품 어린 행동이나 외관 탓에, 귀족보다도 더 귀족 같은 평민으로 유명한 인간 아니던가.
허나 종이봉투의 내용물만 보면 어찌나 궁상맞은지, 한편에는 직접 캐 온 나물로 보이는 풀까지 들어차 있었다. 더 캐묻는 건 잔인한 처사인 듯해서 그만뒀다.
아니스의 집안은 입학하자마자 몰락했다. 학비야 학사 조교로 활동하면서 충당한다 할지라도, 평소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미스터리 했는데… 나름대로 생존 투쟁을 이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나 참담한지 캠프 생활을 하는 나보다도 식생활이 처참한 수준이다.
실베니아 아카데미는 꽤나 귀족적인 학풍을 지닌 곳이다. 이런 곳에서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생활비를 최소화해서 살아남으려거든 이런 궁상맞은 짓들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만, 이런 꼴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꽤나 창피한 일이겠지.
“거… 안 보여 줘도… 별 상관 없었는데… 아니, 이제 와서 이런 말 해 봐야 의미도 없나….”
“내가 왜? 가난이 잘못이니? 이런 궁상맞은 모습 좀 보여 주는 게 어때서? 막말로 내가 너한테 호감을 사야 할 필요가 있니? 뭐 남녀 관계라도 돼? 그냥 허심탄회하게 드러내면 될 일이지 딱히 부끄러워할 일이 있나? 응?”
“…….”
거기까지 말하고, 서로 간에 불편한 침묵만 오갔다.
아니스는 잠시간 당당한 얼굴로 있다가, 이내 귀 끝에서부터 서서히 붉어져 오기 시작했다.
끝끝내 자기 얼굴을 더듬으며 주저앉아 자폭하고 만다.
“죽고 싶다….”
뭐라 따로 위로할 말은 없었다.
* * *
“안 그래도 인력 부족해서 학사 운영이 거의 개판 일보 직전이었거든. 다음 주부터 드디어 제대로 인력 충원이 된다나 봐.”
“그래?”
“응. 이번에 비는 인력들이 꽤 고급 인력들이었잖아. 그래서 새로 인재들 충당해 오는 데 시간이 걸렸대. 특히 글래스트 교수님 같은 분은 경력도 길고 맡은 바 역할도 많아서, 대체할 인재가 거의 없다시피 했거든.”
장소는 생활동 중앙광장의 분수대 옆 벤치였다.
아니스와 나는 나란히 앉아서 간단한 과자를 사다 먹었다.
클라라랑 같이 쓰는 라플라스 베이커리 연간 회원권이 있다면서, 아니스가 얼른 과자를 사 온 것이다.
클라라랑 같이 쓴다는 건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되는 정보인데… 괜스레 코끝이 찡해져 왔다.
“글래스트 교수님의 후임자이신 칼레이드 교수님이 다음 주부터 업무에 들어가신다던데, 글래스트 교수님을 대체하시는 거니 당연히 클레어 조교수님의 지도교수 역할도 하시더라고.”
“그럼 또 클레어 조교수님은 막내로 돌아가는 거구나. 원래 막내이기도 했지만.”
“응. 그렇지, 뭐. 그리고 듣기로는, 칼레이드 교수님은 성격이 개차반이라던데…. 클레어 조교수님은 아마 더 고생할 거야…. 뭐 어쩌겠어….”
글래스트 교수의 학사 동기인 칼레이드 교수.
이렇다 할 비중은 없어 자세한 내면은 모르지만, 틈만 나면 윽박지르고 화를 내서 사람 기를 죽이는 괴짜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도 일 처리는 확실하고 책임감은 있어서 중간 관리직으로서는 최고의 인물이다. 물론 이런 인물은 아랫사람이 고생하는 법이다.
클레어 조교수에게 잠시간 묵념을 보냈다.
“그나저나, 에드 너는 별일이네. 어지간한 물건은 다 수제로 만들어서 쓰는 주제에 제법 많이 샀잖아…?”
“흠… 별다른 건 아니고, 조만간 학용품 가격이 오를 거란 소문을 들었거든. 소모품들은 다 미리 사 뒀어.”
소문의 직접적인 출처를 밝히진 않았다. 로르텔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런가…? 확실히, 요즘 잡화점 물건 시세들도 심상치 않게 요동치긴 하더라. 매일 체크하는데, 한 달 전 기준으로 거의 10프로는 뛴 거 같아. 좀 인위적인 개입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뭐, 심증이니까.”
“물건 시세를 매일 체크하는구나….”
“…….”
매일같이 사과의 가격을 암기해서 동화 1닢이라도 더 싸게 사려고 아득바득 노력하는 아니스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져서 눈물이 핑 돌 뻔했다.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아니스는 완전히 붉어진 얼굴로 어깨를 떨어 댔다.
“에, 에드… 있잖아. 굳이 내가 이렇게 산다는 걸 남한테 말할 이유는 없지, 그치?”
“그래… 나도 눈치라는 게 있다… 걱정 마라.”
“이렇게 배려받는 기분도 썩 묘하네.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죄지은 것 아니긴 하지만, 또 필요한 일이긴 하다.
말했듯, 실베니아의 학사는 묘하게 귀족적인 학풍이 돈다. 학생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라, 혼자 궁상맞게 살아 봐야 붕 뜨기 마련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 아니던가. 아무 신경도 안 쓰고 캠프 생활을 하면서 악으로 버텨 내긴 했다만, 그 반대급부로 혼자 학사에서 붕 떠서 동급생 친구가 거의 없지 않나.
인맥 또한 자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굳이 그렇게 눈에 띄는 짓을 할 이유가 없다.
“묘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제법 닮은 것 같다. 아니스.”
“…….”
“…내가 이상한 소리 했냐?”
“아니.”
아니스는 어깨를 움찔 떨더니, 고개를 휙 내리깔았다.
풍성한 머리칼 탓에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나도 너 처음 만났을 때 그런 생각 했어.”
멍하니 잡화점 건물을 올려다보는 아니스는, 괜스레 아련해 보였다.
드높은 잡화점 건물은 물론이고, 교수동으로 들어간다면 저보다 훨씬 웅장한 건물들이 가득하다.
마치 마천루 사이를 거니는 유기견이라도 된 것처럼, 이방인들이 사는 동네에서 혼자 아득바득 버텨 나가는 기분일 터.
매일 같이 책을 잔뜩 들고 교수동 건물 사이를 거니는 학사 조교의 모습은, 마치 갈 곳 잃은 강아지 그 자체다.
“나한테는 이 학교가 숲이고 정글이야.”
당장 어디 몸이라도 아프면 학사 장학생 일을 못 하게 되고, 그럼 학비고 기숙사비고 전부 끊긴다.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삶에 익숙해져서,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간 적도 꽤 많았을 것이다.
“네가 부럽네, 에드.”
“내가?”
“손재주가 좋고, 능력도 좋아서 혼자 캠프에서 잘 먹고 잘 살잖아.”
“나도 다 맨땅에 헤딩해 가면서 익힌 거야. 아직도 힘든 일 많고.”
“그런가. 하긴, 네 노력을 너무 무시한 것 같은 발언이었네. 미안해.”
아니스는 자리에서 옷을 털고 일어난 다음, 남은 과자를 갈무리했다.
“어쨌든 나도 가격이 더 오르기 전에 얼른 필요한 학용품들을 미리 사 놔야겠네. 출혈이 다소 있겠지만, 나중에 사는 것보단 훨씬 낫겠지. 좋은 정보 고마워.”
“그래.”
“나는 이만 가 볼게. 그나저나, 좀 묘하긴 하네. 이 정도 규모로 시세를 움직일 수 있으면 그 배후는 아마 엘테 상회일 텐데, 왜 굳이 번거롭게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수석 조교 아니랄까 봐, 일단 코앞에 나타난 현상에 대해서는 뭐가 됐든 분석해 대는 것이다.
“이런 짓을 하면 학사나 학생회에서 가만히 있진 않을 텐데. 그냥 가만히 있어도 생활동 내 물류 점유율을 다 차지하고 꾸준히 이윤을 남길 수 있을 텐데 말야. 굳이 대립각을 세우는 이유를 모르겠네.”
거기까지 이야기하다가, 아니스는 휙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다 뜻이 있겠지. 회주 대리인 로르텔 케헬른은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일 테니까. 그래도 그 의도가 궁금하긴 하네.”
아니스는 그리 뒷말을 남기며,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로르텔의 의도가 궁금하다라… 나도 호기심이 동하긴 한다.
그 의도를 알아내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뭐,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방법은 정해져 있다.
* * *
“클렌트루 증류주는 선물용으로는 별로 좋지 않을 텐데.”
그것은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다.
굳이 찾아갈 필요도 없었다.
하루 일과를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짐을 잔뜩 든 채 달을 보며 캠프로 돌아오니… 나뭇등걸에 앉아 술병을 굴리고 있는 로르텔이 있었다.
방학 직전 시기가 되니 상회 일은 생각보다 여유로워진 모양이다.
“듄도 참… 이왕 물류비를 횡령해서 술을 들여왔으면, 포도주를 들일 것이지…. 비싸다고 해서 다 맛 좋은 술은 아닌데.”
“내가 받은 술인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글쎄요. 어떻게 보자면 제가 드리는 선물이기도 하거든요.”
나는 근처 작업대에 짐들을 내려놓고 옆에 걸터앉았다.
“굳이 말하자면 제 술이거든요. 듄은 멋대로 물류비를 횡령해서 사적으로 이렇게 다른 물품을 들여오곤 한답니다. 가엽게도 제가 모르고 있는 줄 알죠.”
“…왜 모르는 척해 주는데?”
“그래야 기어 오를 때 허를 찌를 수 있으니까.”
로르텔을 냉혈한이라 평하는 듄의 말이 이해가 갔다.
혹여나 듄이 다른 마음을 먹었을 때, 듄의 목을 조를 수 있는 쇠사슬로 남겨 둔 것이다.
그 죄를 공론화 하는 것은, 로르텔이 그럴 생각이 들었을 때다.
“술은 좀 하시는 편이세요?”
“아니, 안마시는데.”
“어머, 안타깝네요.”
달빛을 받으며, 나뭇등걸에 앉아 입꼬리를 올리는 로르텔은… 손에 든 증류주를 조용히 바위 위에 내려놓았다.
“제 나쁜 버릇이에요. 누가 됐든, 신뢰를 주려거든 족쇄로 묶어 놓아야 하죠. 이 술이 그렇듯.”
“꼭 그게 나쁜 버릇이라 볼 수는 없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쁘네요.”
빙긋 웃는 로르텔은 묘하게 고독해 보인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건만….
“이렇게 목숨 줄을 쥐고 휘두르지 않는 사람은 에드 선배님밖에 없는 거 알아요?”
“…….”
“특별 대우라고 하기에는 낯 뜨거운 표현이죠. 사실 제가 에드 선배님을 휘두르려거든, 에드 선배님이 먼저 저를 휘두르려 드실 테니까. 서로 간에 그 정도는 아니까, 우리는 이렇게 대등하게 있을 수 있는 걸지도 몰라요.”
내려놓은 술 너머로 달빛이 비친다. 투과한 달빛은 아스라이 흐려져, 돌 한구석을 물들인다.
“썩, 나쁘지는 않네요.”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나란히 달을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제서야 로르텔은 감상적인 말들을 내려놓고, 먼저 본론을 찌르고 들어왔다.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어 보이는데요. 제가 눈치가 참 빠르죠?”
여우 같은 미소가 언제나처럼 요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