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36)
금화 세 닢 (4)
“너답지 않게 고전적이고 뻔한 수법을 쓰던데. 학용품을 싹 다 매점매석할 생각이냐?”
“네에, 뭐. 눈치 좀 빠르다 싶은 사람들은 냄새를 다 맡았겠죠.”
장소는 한밤의 교수동이다.
주로 대낮에 수업이 진행되고, 늦은 저녁에는 연구 활동이 한창인 곳이지만 심야 시간이 되면 적막만이 감도는 장소다.
건물들의 높이도 생활동에 비해 확실히 높다.
생활동이 그 이름처럼 좀 더 생활 내음이 물씬 풍긴다면, 교수동은 확실히 정돈되어 있는 느낌이다.
벽돌이 예쁘게 깔린 도로나 화단, 말끔하게 올라간 건물들, 학생들을 환대하는 듯한 가로수까지.
매일같이 보는 풍경이라 익숙해져 버렸지만, 사실 이 세계에서 이 정도 규모의 교육 시설은 정말 흔치 않은 것이다.
로르텔은 밤 산책을 나가자며, 그렇게 나를 한밤의 교수동으로 이끌었다.
밤 산책치고는 좀 멀리 나온 감이 있긴 한데, 할 말이 많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두면 될까.
“그런데 에드 선배님이 상회 내부 사정을 궁금해할 거란 생각은 못 해 봤네요. 혹시 제 걱정이라도 하신 거예요?”
“뭐, 그런 셈이지. 네가 걱정이 좀 되더라.”
“그럴 때는 빈말로라도 네 걱정이 된――”
앞서나가던 로르텔이 말을 멈추고 휙 뒤를 돌아보았다. 내 대답이 예상과는 달랐나 보다.
내 표정을 슬쩍 살피더니, 사뭇 시선을 회피하면서 당황한 듯이 이야기했다.
“내, 내가 잘못 들었나?”
“네가 아무리 생각이 깊어도, 헛발질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잖아.”
“원래 모든 선택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랍니다. 단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네가 걱정된다고 말해 주실 줄은 몰라서 잠시 당황스러웠네요.”
로르텔은 멋쩍은 얼굴로 시선을 흘리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괜스레 얼굴에 부채질을 하더니, 다시 걸음을 앞서 나간다.
“공격 실력과 수비 실력은 완전히 별개라더니, 역시 이쪽은 좀 더 단련해야 될 것 같네….”
그런 소리를 중얼대며 한참 동안 한밤의 거리를 걸었다.
“약점 교환.”
결국 목적지는 학생 광장의 중앙에 있는 나무 벤치였다.
대낮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해서, 분수대와 딱 붙어 있는 이 중앙쪽 벤치는 앉아 본 적이 없다. 항상 사람이 가득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심야 시간에 오자, 마치 대낮의 그 시장통 같던 분위기가 무색할 정도로 적막하다.
학사에 내려앉은 어둠은 높게 뻗은 여러 건물들을 으스스하게 만든다.
네일관, 글록트관, 오벨관, 델렌관. 학생 광장에 딱 붙어 있는 이 호화로운 건물들부터, 저 멀리 언덕 위의 학생 도서관이나 트릭스관 같은 시설에, 연금부 수업이 주로 이루어지는 페슨관, 전투부들이 훈련하는 마렐관처럼 마법부 학생은 좀처럼 가 볼 일 없는 건물들까지.
하나같이 밤의 어둠에 침묵한 모습은 매일같이 보는 풍경임에도 묘한 위화감을 자아낸다.
학창 시절에도 한밤에 학교를 가 본 적이 있다.
일상적인 풍경조차도 시간대를 밤으로 바꾸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귀족 명문가의 자제들끼리 혼례를 올리면 서로 간에 약점을 교환하는 의식이 있대요. 서로가 서로의 역린을 잘 알고 있으니 그만큼 사이가 돈독해진다나…. 말만 들으면 그럴싸하고 낭만적이지만,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음험한 관례죠.”
“그런 관례가 있다고…?”
“요즘에야 많이 사장되었다곤 하지만, 고루하거나 역사가 긴 가문에서는 좀 남아 있다고 듣긴 했어요. 의외로 로스테일러 가문에는 그런 건 없었나 보네요?”
“글쎄다. 내가 아직 결혼할 나이는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요… 어쨌든.”
로르텔은 벤치에 앉아서 제 로브의 모자를 내려썼다. 늘 그렇듯, 푸르스름한 장미 모양 머리핀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이 난다.
“우리 약점이나 교환할래요?”
“…갑자기?”
“이번 일에 대해 제 사정을 설명하려거든, 결국 제 심적인 역린을 보여 드릴 수밖에 없거든요.”
로르텔의 속이야 당연히 깊고 검겠지만, 그것을 굳이 파내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뭐, 못 보여 드릴 것도 없지만 그래도 손해 보는 기분이잖아요.”
“…….”
“아시잖아요. 전 손해 보고는 못 사는 거.”
로르텔이 빙긋빙긋 웃으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사실 약점 교환이라 하더라도 좀 곤란하다. 귀족가의 자제들이 가진 약점들이야 정말 음습하거나 더러워서, 아예 남에게 알리기 곤란할 정도로 치명적인 경우가 많겠으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정도로 치명적인 약점이랄 것은 없다.
뭣도 아닌 결점을 내밀었는데, 로르텔 쪽에서는 깊고 어두운 약점을 내밀면 오히려 수지타산이 안 맞지 않나. 나야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로르텔 쪽에는 큰 실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뭐, 너무 깊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죠. 사실 저도 들은 바가 있어서 이렇게 묘한 짓을 하는 거거든요.”
“…의도가 뭔데.”
“저도 귀가 달려 있답니다~ 단지, 평범한 사람들 귀보다는 조금 더 넓고 멀리 들을 수 있을 뿐이죠~”
‘조금’ 더 넓다고 하기엔 그 귀는 생활동 전체의 소리를 전부 듣는다.
요컨대, 요즘 들어 내가 우울해 보인다거나, 기운이 많이 빠져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한사코 괜찮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로르텔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또 별개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안 그래도 어두운 밤이지만, 눈을 감으니 본격적으로 눈앞에는 완전히 어둠만이 자리한다.
망막 너머의 어둠에서 은근하게 비치는 건, 지나간 과거의 일들이다.
합동 전투 실습, 학생회장 선거, 신입생 반 배정 시험, 글래스트 토벌, 글라스칸 토벌, 오필리스관 퇴출.
거기서 쭉쭉 넘어서 더 과거로. 북쪽 숲에 자리 잡고, 이를 악물고 살아가기 전부터, 에드 로스테일러이기 이전의 나 자신이 거쳐 온 길들을 쭉쭉 지나간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주변 사람이 많이 죽었지.”
로르텔은 굳이 자세하게 캐묻진 않았다.
“환경이 그랬거든. 난 머나먼 이국의 전쟁터에서 몇 년 정도 구르다 왔었어. 그러다 몸을 좀 다쳤고. 그 덕에 말년을 좀 한가하게 보냈지.”
“어머, 의외네요.”
“믿든 말든 네 자유긴 해.”
로르텔은 고개를 지그시 가로저었다. 믿겠다는 이야기다.
로스테일러 저택의 장남에게 전쟁 경험이 있다는 소식은, 그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을 텐데.
“그냥, 전쟁터에서 구르다 보면 주변 사람이 종종 죽어. 처음에는 심정적으로 고생을 많이 하지. 정을 붙이고, 많이 교류한 사람일수록 더 그래.”
“그렇겠죠. 극한에 가까운 환경일수록 사람들은 더 뭉치는 법이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살리려고 들지. 가다가 탈진해서 쓰러질 걸 알면서도 중상자를 들쳐 업고 전장 한가운데를 달려 보는 것도, 숨을 잃어 가는 동료를 끌어안고 눈물 질질 짜면서 최후를 지켜보는 것도…. 사실 그 바닥에 있었던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하는 경험이야. 일종의 통과 의례지.”
다시 눈을 뜨면 내 신발이 보였다.
팔을 무릎에 받친 채, 허리를 수그리고 있자 신발 사이로 병정 개미 떼가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다가 그게 다 부질없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오는 거야. 자기 맘만 아프고, 어차피 사람은 충원되고. 정을 주는 거 자체가 큰 리스크를 동반하는 행위가 되는 거지. 네가 좋아하는 단어잖아. 리스크 관리.”
“좋아하진 않아요. 누가 그런 걸 좋아서 하겠어요.”
“뭐, 어쨌든 내재적으로는 결론이 딱 나더라고. 너무 옛날에 내린 결론이라 요즘엔 잊고 있었네.”
휙, 하고 고개를 들어 보니 늘 보는 별하늘이다. 숲에서 나무 사이로 올려다봤을 때와는 묘하게 다른 감상이 들었다.
“살리려고 했으니까, 죽으면 상심하는거야.”
“…….”
“애초에 살리려 하질 않으면, 상심할 일도 없다.”
로르텔은 침묵했다.
“그렇게 생각해야 자기 정신을 똑바로 유지할 수 있었지. 그때가 되니 지휘관들이 왜 하나같이 냉혈한인지 이해가 되더군. 말단인 나조차도 이해했으니, 다들 이해하고 있었던 거겠지.”
다시금 눈을 지그시 감으면, 글록트관의 외벽에 기대어 피를 흘리던 소녀의 시체가 기억이 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움직여 모든 시련과 과제들을 다 해결해 냈지만, 끝끝내 한 끗 차이로 살리지 못한 단 한 사람. 그 엇비슷한 기억은 머나먼 과거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쌓여 있었다.
허리를 수그린 채로 주먹을 보고, 괜스레 쥐었다 폈다 해 보았다.
“나도 감이 많이 죽었어.”
애초에 살리려고 했으니까 상심하는 것이다.
내재적으로 내려놓은 그 결론을 잊고 살았던 것은, 낭만 가득한 이 학교 탓일지도 모른다.
교정을 거닐다 보면 꿈과 희망만이 가득한 학생들의 장밋빛 아우라 때문에 머리가 꽃밭이 되고 마는 것이다.
허나, 내게 있어서 현실은 언제나 하나의 시련이었다. 삶이라는 것은 ‘살아간다’기보다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 날이 선 감각을 유지하며 세상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이게 내 역린이야.”
일단 여기서 결론을 냈다.
약점 교환이 명분이라면, 이 정도면 협상거리로서는 충분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도 드러낸 적이 없는 부분이니, 나로서는 꽤나 과감하게 내던진 것이다.
로르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벤치에 다소곳이 앉은 채로 밤하늘만 올려다보다, 이윽고 적갈색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이야기했다.
“사람이 죽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른 법이겠죠. 함부로 선배님의 판단에 왈가왈부하진 않을게요.”
다만, 덧붙일 말이 남아 있는 것인지 나를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언제나처럼 시원스러운 미소는 아니었고, 묘하게 아련해 보인다. 눈부신 달빛 탓에 그리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제 주변 사람도 많이 죽긴 했죠. 대부분은 제가 원인이긴 했지만.”
로르텔은 딱딱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코앞에 보이는 오벨관의 꼭대기를 보았다. 학생회 건물로 쓰이는 곳이었다.
“부모는 무능력자였죠. 하루종일 구걸해 온 돈으로 빈민가 구석에서 썩은 빵이나 먹고 살았고요. 그래도 사람은 착했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엘테 상회의 사주를 받고 저를 고아원에 팔아 버리기 전까지는요.”
“…뭐라 반응하기 힘드네.”
“이제 와서 감정 상하진 않아요. 원래 궁지에 몰린 사람일수록 금화 몇 푼에 쉽게 타락하거든요. 입막음 때문에 금방 죽임당할 거란 사실도 모른 채, 순진하게 엘테 상회의 속삭임에 넘어간 거죠. 가엾은 사람들.”
“…….”
“뭐, 그렇게 저는 엘테 상회의 앞잡이가 된 거죠. 지금이야 회주 대리지만.”
이젠 얼굴조차도 잘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로르텔의 가슴 한편에 그 옛날 친부모는… 마음씨만큼은 착한 사람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다.
설령, 자기를 팔아 치워 버린 자들이라 할지언정, 그 추잡한 타락을 긍정해 주는 것이다.
로르텔 또한 궁지에 몰려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자들의 심리를 십분 이해하고 있는 거겠지.
“제 부모가 저를 팔아 치우면서 받은 돈이 얼마인 줄 알아요? 플렌 금화로 딱 세 닢이더라고요. 서른 닢도, 삼백 닢도 아니고, 딱 세 닢이요.”
플렌 금화 세 닢.
적은 돈은 결코 아니다. 빈민의 소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잘 아끼고 아끼면 몇 달 정도는 무난하게 생활할 수 있을만 한 돈이다.
그러나, 하나뿐인 제 혈육을 팔아 치울 만한 금액이냐 하면 한사코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그때 깨달았죠. 궁지에 몰린 사람을 더 나락으로 처박는 건, 눈이 부실 정도로 가득 쌓인 억만금이 아니라 당장 급한 몇 푼이구나.”
로르텔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잠시 숨을 돌렸다.
사실 숨을 돌릴 만큼 길게 이야기 하지도 않았다.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한 어조였고, 잠든 교수동의 분위기도 나긋할 뿐이다.
“그 뒤로는 뭐… 아무도 안 믿고 살았죠.”
엘테 상회에서 로르텔이 두각을 나타내기까지의 몇 년.
그녀는 그 몇 년 사이에 장부를 읽는 방법을 독학했고, 매일 환전율을 암기했으며, 시세 변화 대응, 인사 관리, 위기 관리, 업무 관리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상회를 이끌기 위한 모든 필요 능력을 전부 흡수해 낸 것이다.
경이롭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 흡수력이었을 테지.
전투, 마법, 연금, 학술 등 여러 분야가 있지만, 결국 그녀의 진가는 금화를 다루는 데에서 온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경의를 담아 부르기를, 황금의 딸이다.
“그렇게 몇 년을 살다 보니,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이고, 제의나 협상안에 반응하는 하나의 기계 장치처럼 보일 때가 많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그런 장치요.”
“…….”
“어쩌면, 에드 선배님이 말씀하셨던 지휘관이랑 일맥상통할지도 몰라요. 남을 쉽게 믿으면, 쉽게 배신당하는 거죠. 그래서 애초에 믿으려 하질 않으니, 결국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는 거고요. 결국 세상에 믿을 사람이라곤 나 하나만 남게 되니… 봐요.”
그제서야, 로르텔은 고개를 들어 밤의 학사를 다시금 바라본다.
왜 로르텔이 이 한밤중에 나를 교수동으로 데려왔는지, 이제야 그 윤곽이 보이는 듯했다.
“밤의 학사는 이렇게 으스스하고 적막하죠? 평소에는 그렇게 붐비는 곳이 이렇게 아무도 없으니까, 꼭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잖아요.”
“…그렇네.”
“저한테는 낮에도 이렇게 느껴져요.”
군중 속의 고독.
그것은 정신을 서서히 좀먹어 가는 질병이다.
“뭐, 지금은 동행인이 있지만요.”
그 언젠가, 고지에 오르다가 문득 내려다보았던 참혹한 전장의 모습.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내 뒷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아마 상업 도시 올덱을 내려다보던 어린 로르텔의 뒷모습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
“말했잖아요.”
로르텔은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은은하게 빛나는 달빛을 받았다.
“우리는 동족이라고.”
* * *
“상회 내에 쥐새끼가 한 마리 숨어들었다는 보고를 받았거든요. 그걸 잡아내는 과정이에요.”
로르텔은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가만히 자기 계획을 털어놓았다.
“며칠 전부터 창고 내 매물 개수가 안 맞고, 장부가 부자연스럽게 조작된 듯한 기분이 많이 들어서 알아봤더니… 누군가가 꾸준히 저희 지부 쪽 자금을 빼돌리고 있더라고요. 조금씩 규모가 커지니 이제 장부의 균열이 슬슬 나타나고 있는 거죠.”
“그 듄이라는 놈 아니야? 증류주도 횡령한 자금으로 사 온 거라며.”
“듄은 배포가 그리 크지 못해요. 자그마한 사치를 하는 선에서, 항상 똑같은 수법으로 자기 사익을 챙기죠. 듄보다도 훨씬 더 악질인 인간이 있는 것 같아요.”
로르텔은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다가, 문득 자세를 고치면서 내 쪽에 더 달라붙었다.
내가 스윽 쳐다보자, ‘생각보다 안정감이 있네요….’ 라는 둥 둘러대면서 상반신을 딱 붙였다.
“장부에 그 낌새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건, 슬슬 그 수작질도 한계가 찾아왔다는 거예요. 조만간 크게 한탕 하고 도망가려고 하겠죠.”
“그럼 이번에 서적류를 매점매석한 건….”
“큰 한탕거리를 던져 준 거죠. 서적류 시세가 조금 더 올라가면… 저희 상회가 매물을 풀기 전에 먼저 매물을 풀어서 현금을 당긴 다음 도망치려 하겠죠. 이제 적극적으로 서적류를 매수하러 다니는 ‘개인’들을 수소문하다 보면 그 쥐새끼의 정체를 캐낼 수 있을 거예요.”
결국, 함께해 왔던 상회 직원의 목을 직접 쳐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로르텔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말했듯이, 제 역린은… 아무도 믿질 않는다는 거예요. 설령 그 고독이 저를 좀먹어 가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함부로 사람을 믿질 않아요. 아무리 있어 보이게 포장하더라도, 그 이유는 결국 뻔하죠.”
“…….”
“배신당하는 게 무서우니까.”
결국 로르텔의 기저 심리에 깔린 것은 두려움이다.
으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로르텔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금화 세 닢에 팔려 나갔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맘에 드는 사람 하나 스카웃하겠다고 일급으로 금화 세 닢을 부를 수도 있는 사람이 됐어요.”
“…아무리 그래도 일급으로 세 닢은 좀 너무 나간 거 아니냐.”
“일단 세게 질러 본 감이 있어요. 어차피 거절할 것 같았거든요. 뭐, 거절당하면 어때요. 거절당해 봐야, 제 사람이 한 명 줄어드는 것뿐이죠.”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로르텔은 요염하게 웃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제 사람 한 명이 줄어드는 것쯤은.”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해 주진 않는다. 다만 팔을 휘감고 짓궂은 눈으로 나를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쪽이 더 잘 알죠?”
뭐라 대답해도 센스 없는 대답이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한동안 내 팔에 치근덕대며 들러붙는 로르텔을 가만히 두었을 뿐이다.
* * *
“죄송합니다, 로르텔 아가씨.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이튿날 아침, 오필리스관의 방에서 나온 로르텔을 메이드장 벨 마이아가 찾아왔다.
“항상 메이드들의 시중을 받던 로르텔 아가씨가 오필리스관을 떠나는 것도 걱정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까지 오필리스관을 나가는 건 너무 과감한 선택인 것 같습니다.”
“…….”
“일급으로 금화 세 닢은 좀 부담스러운 것도 있고… 사실, 액수가 크면 저야 좋을 일입니다만… 저는 오필리스관에서 일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고개를 꾸벅 숙인 벨 마이아.
로르텔은 막 일어나서 몸을 간단하게 치장한 후에 나온 참이었다.
이젠 로르텔도 알고 있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실존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숲의 캠프에서 홀로 화살을 다듬고 있던 금발의 소년이다.
“물론, 항상 정당한 대우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불만일 때도 있고, 힘들고 지칠 때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저는 이 오필리스관을 계속해서 책임지고 싶습니다.”
“어머….”
로르텔은 최대한 울상이 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벨 마이아를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일급으로 세 닢은 정말 제 입장에서도 과감하게 내민 제안인데… 이렇게 거절당하게 되니 정말 마음이 아파요….”
“읏….”
“물론 벨 씨가 일에 가지는 숭고한 신념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다시 생각해 줄 수는 없나요? 저는 벨 씨만큼 일 처리가 확실하고 능력 있는 메이드를 놓치고 싶지 않은데….”
로르텔답지 않게 아련한 눈망울에, 벨은 가슴이 덜컥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벨은 고개를 가로젓고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렇네요. 벨 씨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죠. 그러면… 겸업 형태는 어떠세요?”
“네? 겸업 형태요…?”
로르텔은 벨 마이아의 양손을 마주 잡고, 습기 가득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지불하는 액수는 3분의 1 정도로 줄이고, 대신 틈이 날 때마다 제 별장이나 주변 캠프를 관리하러 와 주세요. 벨 씨는 실무적인 업무에도 관심이 많으시잖아요.”
“네… 에…?”
“요즘 짬내서 예니카 선배님을 간호하러 가신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하듯이, 주기적으로 한 번씩만 들러서 관리해 주시는 거예요. 편하게 시간 날 때마다 오셔서 일 처리만 해 주고 가시면 되는 거죠. 일주일에 지정된 횟수만큼만… 하는 식으로… 이렇게라도… 안 되나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벨은 당황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나쁜 제안은 아니다. 태생적으로 부지런한 벨은 바쁜 메이드장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예니카를 틈틈이 간병하러 갈 정도로 시간 관리가 섬세하다.
거기다가 실무적인 일을 좀 하고자 하는 욕구가 쌓여 있었고, 업무 일정도 자율적인데다가, 무엇보다 습기가 가득 찬 눈망울로 자기 양손을 잡고 이야기하는 소녀가 바로 코앞에 있다.
금화 세 닢까지도 불렀던 소녀다. 그 정도로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묘한 부채 의식이 벨의 마음에 자리를 차지해 나간다.
“그… 그 정도… 조건이라면….”
“와…! 감사해요! 벨 씨!”
로르텔이 활짝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그러면… 계약서는 벨 씨 이름으로 보낼게요!”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일 처리. 심지어 애초에 계약서가 준비되어 있다.
빙그레 웃으며 자기 방으로 다시 들어가는 로르텔을 보면서… 벨은 그제야 깨달았다.
애초에 첫 제안부터가 미끼였다.
벨에게 ‘거절’이라는 부채 의식을 채워 놓고, 그다음 계약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한 족쇄였던 것이다.
뭐… 애초에 그런 사람인 것이다.
모르진 않았다.
그저 알고도 당했다는 게 어이없을 뿐이다.
여우처럼 웃으며 방으로 돌아가는 로르텔을 보고, 벨은 허탈한 듯 헛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