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38)
학기말 평가 (2)
학생 광장 앞에 있는 커다란 게시판. 학기말 시험에 대한 공고 사항이 길게 적혀 있었다.
학기말 시험은 과목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필기시험과 실기 시험으로 나누어진다.
특정 과목은 필기시험이나 실기 시험만 존재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뭐, 어쨌든 두루 높은 성적을 받으려거든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꽤 중요하다.
허나, 종종 가다 보면 실기만으로도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하는 학생들이 출몰하긴 한다. 언제나 이례적인 케이스란 존재하는 법이다.
필기 성적과는 달리 실기 성적에는 점수의 상한선이 없기 때문인데, 이는 특출난 재능을 가진 학생들을 더 우대하는 학풍과도 연관이 있다.
유독 태생적으로 타고난 감응력이나 재능에 영향을 많이 받는 분야가 특히 더 그렇다.
전투부로 치자면 마법 무기 사용술/전투 감각/실전 생존술 같은 것들이고, 마법부는 원소학/정령학/마물학 분야의 수업들이, 연금부는 약초학/사역학/배합술 분야가 그렇다.
중상위권까지는 필기 성적과 실기 성적의 조화가 중요하지만, 정작 각 학년 최상위권 학생들은 압도적인 실기 성적으로 찍어누른 케이스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현 3학년 부동의 수석 예니카 페일로버다.
정령학 분야에서 받은 실기 점수가 다른 모든 과목의 필기/실기를 합친 성적을 압도적으로 찍어 눌러 버린다.
본인은 성실한 탓에 다른 과목의 학습도 꾸준히 하곤 있지만, 솔직히 정령술 분야에서 그 정도의 성적을 냈으면 다른 과목은 중위권 이하의 수준이어도 수석 언저리에서 놀 수 있다.
의외로 2학년 수석인 루시 메이릴은 필기 성적도 우수한 수준이다.
책 한 권 주르륵 읽으면 순식간에 암기해 버리는 것을 보면, 나태할 뿐이지 멍청하지는 않다. 오히려 특출난 수준이다.
실기 분야는 말할 것도 없다. 원소학 수업에서 받은 실기 성적 하나만으로 일반 학생들은 어떻게 비벼 보지도 못한다.
1학년 수석인 웨이드 캘러모어 또한 실기 성적 덕을 많이 봤고, 현재 타냐가 이끌고 있는 학생회의 선임 행동 위원이자 4학년 수석인 다이크 엘펠란은, 아예 실전적 전투 검술 분야의 대가로 통한다.
“흐음….”
시험 일정을 확인하면서, 나는 육포 한 조각을 입에 질겅이고 있었다.
그동안 수업 시간에 쌓아왔던 가점들과, 여러 실습 수업들에서 받은 성적들, 그리고 교수들 사이에서의 평판을 두루 감안해 보았다.
“에드, 마법부 원소학 시험은 어제 막 일정이 확정되었대. 마력 감응력 자체를 시험하는 분위기로 간다던데… 또, 교수진과의 모의 결투도 있대.”
“학생 말고… 교수진이랑…?”
“뭐어, 듣기로는 그렇다던데…”
원소학 교수들 라인업을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쉬운 상대는 없다.
선임 원소학 교수 에스킨, 베테랑 교수 돌로나, 최근에 복직한 칼레이드, 아직 조교수 신분인 클레어까지….
누가 튀어나올진 모르겠으나, 그나마 비벼 볼 만한 상대는 교수직에 앉은 지 채 1년도 안 된 클레어 정도밖에 없다.
사실… 애초에 교수들을 이기라고 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긴 하다.
각 학문 분야에서 몇십 년을 연구한 교수진들은, 굳이 전투 분야에 특화되어 있지 않더라도 학생 수준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
다만, 이기라고 만들어 놓은 시험은 아니다. 있는 힘껏 덤벼 보라는 의미가 더 크다.
나는 이리저리 견적을 내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에드,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해…?”
“예니카, 아쉽게 된 일이지만… 당분간 너랑 나는 적이다.”
그 말을 들은 예니카가 딸꾹질을 했다.
너랑 나는 적이다. 그 의미를 제대로 곱씹기도 전에, 예니카는 일단 표정을 싹 굳힌 것이다.
“응…? 왜? 왜? 왜? 왜 우리가 적이야?”
“아니, 그렇게 심각하게 달려들 건 아니고… 나도 이번에는 학년 수석을 노려볼 생각이다.”
일단 학년 수석 자리에 앉으면 딸려오는 혜택이 엄청나다.
그중에서도 가장 군침이 도는 혜택은 학비 전액 면제다.
글록트 장학 재단의 장학금과, 로르텔과의 거래를 통해 손에 들어온 현금으로 어떻게든 아득바득 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이젠 정말 이 엄청난 학비가 부담스럽다. 학사 장학생으로 충당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이 악물고 수석 자리에 앉아 학비 혜택을 받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이전에는 내가 능력적으로 뒤처져서 수석 자리는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나는 반지의 도움 없이도 고위 정령을 다룰 수 있고, 원소 마법은 중위 마법까지도 구사할 줄 안다. 실전 전투 능력은 물론이고, 필기시험은 애초부터 내 주특기였다.
“수석 자리…? 아… 성적 경쟁 얘기 하는 거였구나…!”
경쟁이 치열한 타 학년 수석 경쟁에 비해, 3학년 수석 경쟁은 생각보다 구도가 복잡하지 않다.
부동의 1위 예니카 페일로버 아래로는 다 평등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 또한 정령술 분야에서는 예니카를 이길 순 없다.
자기 신변의 안위를 포기한다면, 최고위 정령까지도 불러내 버릴 수 있는 괴물이다. 물론 시험에서 그렇게까지 하진 않겠지만.
그러나, 나는 원소학 분야나 마물학 분야에서도 꽤 나쁘지 않은 성적을 낸다.
그 외 마법 역사학, 마공학 같은 암기 비중이 높은 분야는 내가 예니카보다 압도적으로 성적이 높다.
지금에 와서는 나 또한 고위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정령술 분야에서 오는 성적 격차는 많이 줄어들었겠지.
그렇다면, 다른 분야의 성적으로 이 차이를 메꿔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으음… 확실히, 평소에는 위기감을 느껴 본 적이 없는데…… 에드라면, 방심했다가는 정말 수석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겠는걸….”
예니카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이내 흐뭇하게 웃고 가슴을 쫙 폈다.
“나도 호락호락하게 수석 자리를 뺏겨 주진 않을 거야…! 고향 퓰란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수석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랑스럽고 기뻐해 주거든…! 실망시킬 수는 없지…!”
선의의 경쟁. 말은 참 예쁘지만, 현실은 잔혹한 법이다.
애초에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성적 산출 방식상, 학년이 높아질수록 수석의 이름이 바뀌는 일은 잘 없다.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학생들은 성취조차도 압도적으로 빠른 법이다.
―카앙!
그 순간, 학생 광장의 연단 위에서 시선을 집중시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푸르스름한 머리를 한 학생회 서기가 쇠로 된 연단 손잡이를 지팡이로 때린 것이다. 순간적으로 학생들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서기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했다.
“혹시 에드 로스테일러, 3학년의 에드 로스테일러 학생 이 자리에 있습니까?”
나를 콕 집어서 찾는 모습이다. 나는 의아한 얼굴을 하며 손을 바짝 들었다.
“학생회장님의 호출입니다. 오벨관으로 바로 방문해 주세요.”
* * *
“이상이에요.”
상전 취급을 받는 것 같다.
오벨관에 진입해서 학생회장실까지 안내받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타냐는 미리 학생회원들에게 나를 정중히 모셔 오라고 일러 두었던 모양이다.
오벨관의 1층을 지키는 학생들부터, 지나가다 마주치는 학생들까지 꾸벅꾸벅 인사를 해 대는 통에 내가 더 불편할 지경이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동급생들은 나를 벌레 보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봤는데, 새삼 인식이 바뀐 게 실감이 되어서 감개무량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께서는 에드 오라버니를 용서하셨으니, 이제 슬슬 가문으로 돌아와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는 건데….”
으리으리한 학생회장실에 앉아 있던 타냐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들은 별로 유쾌하진 않았다.
“경사스러운 일이구나.”
“표정만 봐도 그렇게 생각 안 하시는 거 잘 알겠네요….”
파문된 몰락 귀족한테 복권(復權)의 기회가 왔다.
그야말로 덩실덩실 춤을 춰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건만, 나나 타냐나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이미 나를 한번 죽이려 들었던 사실이 있다.
용의주도하게 꼬리를 감춰 물적인 증거를 남겨 두진 않았지만, 나와 타냐만큼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오라버니한테 알려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되도록 빨리 호출하긴 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일단 이렇게 됐으니 답변을 보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턱을 한번 쓸어내리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크레핀 로스테일러가 나를 암살하려던 계획은 미수로 그쳤다.
그렇다면, 왜 다시 암살을 시도하지 않고 이번엔 나를 회유하려 드는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인과율을 조율하는 악신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아직 온전히 회복되질 않았을 가능성이다.
저번에 나를 암살하려 했을 때 사용했던 인과 조율의 마법은, 그 효과가 확실한 만큼 사용하는 것도 까다롭고 힘이 든다.
그러나, 다음 암살 기회를 잡기 전까지는 나를 실베니아에 내버려 두는 것도 찝찝할 것이다.
그러니 일단 저택으로 불러들일 생각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아무 생각 없이 이 제안에 응하는 것은 그냥 자살행위다. 상대의 입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똑똑히 이야기했다.
“그럼 이번 방학 때 같이 저택으로 돌아가자.”
“…….”
타냐가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이 편지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면 좋겠지만….”
“나도 생각이 있다, 타냐. 일단은… 돌아가서 아버지의 의중을 한번 헤아려 보자.”
* * *
오벨관 앞으로 다시 나오자, 예니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썩 평화롭다.
그 옆에 앉아서 어깨를 툭툭 건드려 깨우자, 화들짝 일어나서는 배시시 웃는다.
하여튼 묘하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기운이 있는 소녀다.
시험 기간이라 시간도 촉박할 테고, 당장 수석 자리를 가져가겠다고 선언한 와중인데도 마냥 그 당사자를 기다려 주고 있다.
착한 성품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이쯤 되면 오히려 걱정될 지경이다.
“나는 오필리스관 쪽에 들를 일이 있어서, 가 봐야겠다.”
“오필리스관? 거기는 왜? 애초에 에드는 들어가지도 못하잖아.”
“뭐… 벨 씨한테 부탁 좀 하려고. 어떻게 뒷문으로든 해서 잠시간은 들어가 있을 수 있겠지. 그래도 두 사람을 들여 달라는 건 벨 씨한테도 부담이 될 테니, 예니카 너는 캠프로 돌아가 있어.”
“응, 뭐어… 밥이라두 해 두지 뭐. 저녁쯤에는 돌아올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예니카에게 인사를 해 둔 뒤 오필리스관 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할 일이 많이 늘었다.
일단 시험 준비는 예정대로 쭉 진행해야 한다.
이번 학기 수석이 못되더라도, 더 정진해서 다음 학기 수석을 노려볼 수도 있겠지만… 한 학기 등록금인 플렌 금화 20닢을 지불하려면 너무 속이 쓰리다. 이번 학기 안에 승부를 보고 싶었다.
그러니, 시험을 철저히 준비하면서도, 시험 끝나고 저택에 귀가했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 둬야 할 것들부터 체크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메이드장님 계십니까?”
오필리스관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말단 메이드에게 그렇게 물은 뒤, 정원 근처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렸다.
보초를 서고 있던 메이드는 내가 벨 마이아와 제법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지, 금방 메이드장을 부르러 갔다.
일단, 로스테일러 저택에 돌아간다는 건 정말 위험한 선택이다.
거기는 완전히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권역이다. 모든 것이 크레핀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이니,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비명횡사하게 될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가진 모든 것들을 동원해 그를 토벌해 버리고 싶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아슬아슬하게 타이밍이 안 맞는다.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그를 섣불리 토벌했다간, 오히려 내 쪽이 반역분자가 되고 만다. 아직은 그의 황실 내 입지가 굳건하므로, 그 위치가 흔들거리기 전까지는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최대의 변수는 그를 궁지에 몰아넣어야 할 페니아 황녀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애초에 학생회장에 되지도 않았다. 그래도 아직 크레핀을 적대하고 있는 입장이긴 하니, 뭐라도 행동을 보여 줄까 싶었지만… 기묘할 정도로 페니아 황녀는 침묵하고 있다.
예상 이상으로 페니아 황녀는 조용한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간 많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크레핀을 직접 끌어내릴 수밖에 없다.
인간을 제물로 삼고, 악신과 계약하여 금단의 연구를 진행 중인 그의 실체를 직접 만천하에 떠벌려야만, 그를 토벌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 물적인 증거를 확보하려면, 아무래도 직접 로스테일러 저택에 진입해서 조사하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
비밀 연구실의 위치가 됐든, 사용인들의 증언이 됐든, 뭐든 수집해서 크레핀의 위신을 깎아내려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어쩐 일이십니까? 에드 도련님?”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벨 씨.”
“아뇨, 오늘 점검해야 할 것들은 얼추 다 마무리된 상황인지라. 다만, 좀처럼 이 근처에는 안 오시는 분께서 나타나시니 신기한 기분이군요.”
퇴사당한 뒤로는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오필리스관 근처로는 잘 오지 않는다. 캠프에 쌓인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그… 잠시 오필리스관에 들어가도 괜찮나요?”
“오필리스관 내부에 말입니까…? 원칙적으로는 안 되는데, 뭐 에드 도련님이야 신뢰할 만한 분이니 큰 상관은 없지요. 한 분 정도는 제 재량으로 들일 수는 있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의례적이나마 용건을 좀 밝혀 주셨으면 하는데…”
숨길 이유도 딱히 없다.
내가 용건을 말하자, 처음에는 그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벨은 잠시간 턱을 훑으며 고민을 하더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이윽고 주변에 있던 말단 메이드에게 뭐라고 말을 전하니, 그 메이드는 화들짝 놀라서 오필리스관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것이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데 호들갑을 떠는 것 같은 기분이다.
“비인가 방문이시니 저희는 뒷문 쪽을 통해서 들어가는 게 낫겠습니다. 정문은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저야 불만을 말할 입장은 아니죠.”
“쭉 제 옆에 붙어 있으시길 바랍니다. 거긴 메이드용 통로라서 에드 도련님 혼자 다니시면 다소 시선이 쏠릴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그대로 벨 마이아를 따라서 오필리스관 후문으로 나아갔다.
커다란 오필리스관 건물을 한참 동안 돌아서 뒷문 쪽에 도달하자, 문의 생김새가 생각보다 낯이 익다.
잘 생각해 보니, 로르텔이 오필리스관을 점거해서 난리를 피웠을 때 이 문을 통해 도망친 기억이 난다. 메이드용 통로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단정하게 메이드복을 차려입은 여자들이 이리저리 드나드는 통로. 남자라곤 나 혼자뿐이다.
“그러고 보니 곧 시험이시군요. 준비는 잘 되어 가십니까?”
“아, 네. 이번엔 좀 욕심이 생겨서 평소보다 더 노력을 들일 거 같은데요.”
“그렇군요. 에드 도련님 성취 속도야 워낙 유명하니, 좋은 결과 얻으실 겁니다. 최근에는 원소학 교수진에 변동이 많다던데, 그게 변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쭉쭉 이어 나간다.
그녀는 평소에 워낙 과묵해서 먼저 화두를 던지는 일이 없다, 아는 사람이 보면 별난 일이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 보니 그 의도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까부터 메이드들의 시선이 수도 없이 박힌다. 내가 봐도 이런 공간에선 내 존재 자체가 부자연스럽다.
벨은 그래서 의식적으로 내게 계속 말을 거는 것이다.
이 오필리스관을 책임지고 있는 메이드장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걷고 있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노라면, 다소 수상해 보여도 뭐라 의심을 품을 순 없다.
“이쪽으로 나가면 메인 홀입니다. 일반 학생들도 다니는 길이지요.”
“신세 졌습니다.”
“별거 아닙니다.”
학생들이 다니는 메인 홀로 나왔음에도, 여전히 여기저기에 있는 메이드들이 벨 마이아의 눈치를 보는 낌새가 느껴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시설을 책임지는 최고 관리자인 것이다.
평소에는 스스로를 낮추고 드러내질 않으니 새삼 실감하기가 힘들다.
내가 터벅터벅 걸어서 계단을 올라가고, 벨 마이아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3층에 도달해서 코너를 꺾자, 길게 이어진 복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 에드 도련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이번 시험 일정이 시작되면, 혹시 캠프 일을 잠시 멈추실 예정입니까?”
“뭐, 최소한 기본적인 일은 하겠죠.”
“그렇군요.”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다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별로 캐묻진 않았다.
그리고 다시 복도를 나아가려는데, 벨이 또 나를 불러세웠다.
“그러면… 학사 일정에 지장은 없으신지?”
“평소에도 잘 소화하고 있어서 별문제는 없죠.”
“그렇군요… 하긴… 그렇지만….”
그렇게 벨 마이아는 내가 복도를 가로지르려 할 때마다, 계속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화두로 이야기를 질질 끄는 것이다.
마치 내가 복도를 가로지르지 못하게 시간을 끄는 것 같이 느껴진다.
“제가 여기에 오래 머물러 있어봤자 벨 씨 일하는 데 방해만 될 테니, 얼른 용무 보고 나가겠습니다.”
“아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에드 도련님. 이건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또 뭔가요?”
“흐음…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가 굉장히 힘들군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대체 뭐가 그렇게 중요한 화두라고 이렇게 고민하고 빙빙 돌리는 건가.
그래도 벨이 하는 이야기니 다 이유가 있겠다 싶어서 기다리고 있자니, 저 멀리 방에서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중간쯤에 위치한 객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말단 메이드가 나왔다. 방금 벨이 올려 보냈던 메이드였다.
뭔가 묘하게 상쾌한 표정으로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털레털레 걸어서 복도 반대쪽으로 사라졌다.
“아닙니다. 다음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용무 보시죠.”
그리고는 시원스럽게 벨이 나를 보내 주는 것이다.
내가 도끼 눈을 뜨고 쳐다보자, 벨은 능청스럽게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단아하고 품행 바른 메이드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일단은 생각해 둔 일부터 처리하자 싶어,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슬쩍 보이는 타냐의 방을 지나서, 다음 방 쪽으로 넘어갔다.
어쨌든, 로스테일러 저택에 가려거든 여러 가지 보험을 잔뜩 들어 둬야 한다. 거긴 정말로 생사가 위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크레핀을 향한 답장에 그리 적어 보내기로 했다.
파문당한 내게 이렇게 새로운 기회를 주다니 정말 감사하다. 그 은혜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른다.
파문당한 뒤로, 내 죄를 반성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그 증거로 마법 실력도 많이 늘었고, 몸도 좋아졌다. 그리고 로스테일러의 일원에 어울릴 정도로 넓은 인맥을 두루 쌓았다.
날 용서해 주신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나의 성장을 꼭 보여 주고 싶다.
내 실력을 그 앞에서 증명하고, 나와 각별한 사이가 된 동료를 아버지께도 꼭 소개시켜 드리고 싶다.
그렇게 핑계 삼아, 나는 돌발 상황이 일어났을 때 나와 함께 싸워 줄 사람과 동행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듬직한 사람이라고 하면, 굳이 누구인지 설명할 필요조차도 없다.
―똑똑.
문을 두드렸다. 방 명패를 보니 ‘루시 메이릴’이라고 똑똑히 적혀 있었다.
그러고 나서 잠시간 기다리고 있자니, 문이 열렸다. 생각보다 소심하게 열린 문틈 뒤로 고개를 빼꼼 내민 루시의 모습은… 내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안녕.”
말끔하게 빗어 내린 백발에 윤기가 흐른다.
청초함이 한껏 드러나는 순백색 프릴 파자마는 루시의 왜소한 체구와 한없이 잘 어울린다.
늘상 보이는 넋 나간 모습은 전혀 느껴지질 않고, 오히려 생각 이상으로 소녀다운 모습이었다.
그나마 평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은, 묘하게 부끄러운 듯이 꽉 껴안고 있는 모자다.
“저런, 평소처럼 몸치장을 한 채 방에 있으셨군요. 방해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평소처럼… 쉬고 계시는데….”
묘할 정도로 ‘평소처럼’이라는 부분을 강조하는 벨 마이아의 어조가 심상치 않다.
“쉬고 있는데 미안하다, 루시. 요즘 캠프에도 잘 안 오는 것 같던데 많이 바쁘냐…?”
“응? 아니….”
묘하게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라서, 내가 뭔가 실례한 건가 하는 기분이 들고 만다.
하긴, 방에서 쉬고 있는데 다짜고짜 찾아오는 것도 좀 실례긴 하다.
평소에 워낙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 아니던가. 틈만 나면 집어 던지고 하던 버릇이 남아 있는 통에, 실례를 해도 실례라는 자각이 없다.
그래서 평소처럼 편하게 대하려고 했건만, 루시 쪽에서 묘하게 쭈뼛거리는 통에 나까지도 영 불편한 기분이 들고 만다.
아무래도 역시 방까지 찾아드는 것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건가. 본인은 내 캠프를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이건 좀 불공평한 처사 아닌가.
그래도 이번에는 내가 부탁을 하는 입장이니, 최소한의 예의는 좀 지킬까.
“캠프에 있을 때랑은 완전히 딴판이네. 평소에 쉴 때는 그런 식으로 지내는구나. 의외다, 루시.”
“어… 음….”
“제법 잘 어울리네. 깜짝 놀랐다.”
그렇게 분위기를 좀 풀기 위한 칭찬들을 던지고, 본론으로 들어가려던 차였다.
그 커다란 마녀 모자를 얼굴에 덮고는 뒷걸음질을 치기에, 나는 멋쩍은 느낌이 들어서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그럼… 용건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뭡니까, 에드 도련님?”
벨 마이아가 적절히 끼어들어서 루시의 의사를 대변해 주었다.
나는 방문을 슬쩍 더 열어서 루시를 보고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루시. 이번 시험 끝나고 방학이 되면, 나랑 같이 우리 본가에 가자.”
“…뭐?”
“그리고 같이 우리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자.”
“…….”
“…….”
루시와 더불어서, 벨 마이아마저도 말문이 막혔는지 순간적으로 정적이 감돌았다.
루시는 푹 모자를 눌러쓰면서 숨을 집어삼키고, 벨은 자기가 잘못 들었는지 몇 번이고 귀를 점검해 대는 것이다.
…둘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나는 내가 말하는 방식이 좀 잘못됐음을 자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