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39)
학기말 평가 (3)
“간만에 보니 반갑네.”
결국 루시의 방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소속 학생도 아니면서 오필리스관에 오래 머물러 있어봐야 벨만 곤란한 일 아니던가.
그래서, 얼른 용건만 전해두고, 대답은 다음에 들으려고 했으나… 메이드들은 한사코 차 한 잔 마시고 가라면서 내 등을 떠민 것이다.
“방금은… 내가 말이 좀 이상하게 나왔는데… 전후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렇다.”
결국 메이드가 내와준 차를 마시면서, 내가 루시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경위에 대해 한참을 설명해야만 했다.
사실 뭐 그리 복잡한 이야기도 아니다. 요약하자면 순식간에 끝난다.
“어쨌든, 내 입장에선 목숨을 건 여정이기도 해. 물론 로스테일러 공작령까지 가야하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을테니 맨입으로 도와달란 말은 안 해.”
오필리스관 아니랄까봐, 루시의 방은 으리으리하게 컸다. 이래봬도 학교 전체 수석이 머무는 방이다.
아무리 루시가 자기 처우에 무신경한 성격이라 할지라도, 학사 입장에서는 최대한 신경써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맨입이 아니면…?”
개인실 한 켠에 있는 테이블. 내가 앉은 쪽의 맞은 편 자리.
루시는 호화롭게 장식된 목재 의자에 늘어지듯 걸터앉아서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뭘 원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당장 루시가 뭘 원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피력할 수 있을만한 부분은 있다.
“설명했듯이, 아버지가 날 불러들인 명목은 로스테일러 가문의 일원으로 복귀시키고, 내가 잃었던 모든 권위와 권력을 회복시켜주기 위함이야. 실제로 그게 목적인지, 아니면 다른 속내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는게 문제고.”
루시가 찻잔 둘레를 슥슥 훑다가, 내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별로 내 이야기에 관심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귀를 쫑긋대며 잘 경청하고 있다.
“만약 네가 동행해서 아버지가 내게 손을 대기 부담스러워지는 상황으로 흘러간다면… 결국 나는 명목대로 로스테일러 가문의 위광을 다시 손에 넣을 수 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당장에 내게 손을 댈 견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계획을 나중으로 미루더라도 일단은 자기 손바닥 안에 넣어놓으려 하겠지. 굳이 내 의심의 골을 더 깊게 만들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만약 상황을 그렇게 이끌어갈 수 있다면, 그저 명목상이지만 나는 로스테일러 가문의 장남 자리를 다시 이어받게 된다. 후계자 자리까지 돌아올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대륙 최대 공작가의 장남 자리라면 제 아무리 이름뿐인 위치라 할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굉장히 넓다.
“나한테 투자해라.”
“투자?”
“만약 내가 로스테일러 가문의 장남 자리로 돌아간다면, 그 위치에서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다 해줄게. 물론… 명목뿐인 장남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는 않겠지.”
어차피 실질적인 권위를 지닌 후계자 자리는 타냐에게로 넘어가 있는 상태이고, 무엇보다 크레핀 로스테일러가 작정하고 날 찍어누르려 든다면 귀족의 권력만 가지고는 뭘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애초에 내 목적은 로스테일러 가문의 장남 자리 따위가 아니다.
“여기서부터는… 루시, 너를 진심으로 믿으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야.”
“나를?”
“어쨌든 부대껴온 시간이 있잖아.”
루시가 헛숨을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나는 크레핀 로스테일러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생각이다.”
패륜이자 반역이다.
누군가의 귀에 들어간다면, 당장 교수대에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발언이기도 하다.
루시가 슬쩍 미간을 좁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음 가주 자리에 오를 사람이 나일지 타냐일지 알 순 없지만, 적어도 아버지를 그 자리에 둘 마음이 없다.”
“그 이유는… 복수야?”
짧고 굵은 루시의 질문.
내가 크레핀을 끌어내리려 하는 것이, 나를 가문에서 내쫓고, 심지어 죽이려고 하기까지 했던 아버지를 향한 복수냐고.
내가 품은 것이 복수의 칼날이라면, 루시는 도울 마음이 있는 것일까.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한 끝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살아남으려는 거야.”
“…”
“내가 겪는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거의 대부분 아버지가 원인이야.”
악신 메뷸러를 완벽하게 다루기 위해 온갖 반인륜적인 실험을 반복하고, 급기야 이 학교를 통째로 제물로 바치려 들었던 행보.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주제에, 자애롭고 도덕적인 군주의 가면을 쓰고 제국을 희롱하려 든 그의 민낯을 나는 알고 있다.
아마, 나를 죽이려 들었던 것도 그 과정에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일테지.
“내 아버지인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그리 깨끗한 인간이 아니야. 그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증거만 찾아낸다면, 그를 끌어내리고 로스테일러 가문의 권력 구도를 재편하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
“…”
“나는 권력욕 같은 건 없는 편이지만, 그 재편 과정에서 단순한 장남 자리보다는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갈 거라는 확신이 든다. 단순히 무력이 드높은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권위를 가지게 될 수도 있지.”
혈통과 가문의 위광이 가지는 힘이란, 단순히 강한 무력과는 그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
결국 이야기는 돌고돌아 처음으로.
“나한테 투자해라.”
루시를 똑바로 보고 이야기 했다.
잘못하면 교수대에 올라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 소리들.
루시 입장에서야 강대한 힘이 있으니 목이 잘리는 일은 피할 수 있겠지만, 나는 완전히 입장이 다르다.
이런 소리를 공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의미를 가지는지, 루시도 모르진 않는 듯 했다.
“나는… 투자 같은 건 안해. 그런 거 너무 복잡해.”
이윽고 조막만한 입술이 열리고, 늘 그렇듯 멍한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권력 같은 것도 그다지 관심 없어.”
“그래 보이긴 해.”
밑져야 본전이랍시고 질러본 말들이다. 루시가 그런 세속적인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긴 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뭐에 관심이 있는 걸까.”
다만, 이어지는 말은 예상 못했다.
루시는 마녀 모자를 집어들고는 뒤집어 쓰더니, 그대로 통통 튀듯 가벼운 걸음걸이로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어젖혔다.
평소와 달리 자유롭게 풀어헤쳐진 백발의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있잖아. 나, 그 할아범이랑 했던 약속을 지킨 거 맞을까?”
루시는 학사를 몇 번이고 위기에서 구해내었다.
매번 자기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려고 했었지.
그러나, 대마법사 글록트가 예견했던, 루시가 아니면 막아낼 수 없는 학사의 위기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대주교 베르디오가 날뛰고, 텔로스의 사도들이 섬을 뒤덮는다. 그것은 오로지 루시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시련이었고, 오롯이 루시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의 개입이 있었고, 문제의 해결은 대부분 내 손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루시는 3막의 마지막 보스로서 날뛰는 일도 없이, 모든 것이 평화롭게 해결된 것이다.
그럼 애초에, 이 시련이 대마법사 글록트가 예견했던 그것이 맞기나 한 것일까. 이리 손쉽게 해결될 일이었다면, 어째서 글록트는 루시의 손을 잡고 그리 간절하게 부탁했던 것인가.
그 일말의 의심은 루시의 가슴에 남아 사라지지 않을 터.
불완전연소.
이 모든 게 끝이리라 생각하지 못한 루시의 가슴 속 한 켠엔, 아직도 글록트로부터 전해 받은 짐이 한 쪽 어깨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다.
어쩌면 그 짐을 털어낼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오롯이 루시의 입장일 뿐이지만.
“애초에 그 약속을 지키고 나면, 나는 뭘 생각하면서 살아야 될까?”
“어려운 질문을 하는구나.”
“사실 대답을 바라진 않았어.”
– 드르륵
루시는 다시 창문을 닫아버리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성큼 성큼 걸어오더니, 자기가 앉아 있던 의자도 지나치고, 테이블 위로 몸을 옮겼다.
나를 똑바로 마주본 채로 테이블에 걸터앉자, 그제서야 눈높이가 좀 맞는다.
“말했듯이 권력 같은 건 관심 없어. 만약 내가 널 돕는다면… 그건 그냥 돕고싶기 때문에 돕는 거겠지. 다른 이유는 없을 거야.”
루시는 시선을 내리깐 채, 천천히 이야기한다.
“그래도… 맨입으로는 안 돼.”
“뭘 원하는데.”
“별로 대단한 건 아닐 수도 있고, 사실은 무척 대단한 걸 수도 있어.”
루시는 조막만한 손을 꽉 쥐더니, 새끼손가락을 펴서 내밀었다.
내가 의아한 듯 쳐다보자, 루시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이야기했다.
“내게 제일 무서운 건… 그 할아범이랑 약속을 다 지키고… 모든 짐을 다 털어놓고 나면 찾아올 공허야.”
넓디 넓은 라멜른 산맥지대.
그 꼭대기의 침엽수 위에 똑바로 서서, 글록트가 없는 세상의 넓이를 가늠하던 소녀다.
이젠 남아 있는 가족도, 인연도, 이뤄야할 목표도… 아무것도 없다.
“그 공허함에 잡아먹히지 않게 날 도와줘.”
“구체적으로… 어떻게…?”
“내 삶의 이유가 되어줘.”
그 말 자체도 그다지 구체적이진 않다.
어떤 뜻이 내포되어 있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다분하다.
그래도 말의 무게 자체는 무겁고 진중했으므로, 나는 섣불리 손가락을 걸 수가 없다.
문득 표정을 보니, 루시는 울고 있지도 웃고 있지도 않다.
늘 그렇듯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서는, 새끼 손가락을 가볍게 내밀고 있을 뿐이다.
만약 손가락을 걸지 않는다면, 그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오를까.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상상일 뿐이었다.
이미 손가락은 걸려 있었다.
이게 루시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생각보다 클 수도, 생각보다 별 거 아닐 수도 있다.
다만, 루시는 제 표정을 감추고 싶은 것인지… 마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천천히 내 품안으로 기어들어오는 것이다.
그대로 꽉 안겨서 잠시간 아무 말도 주고 받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시간을 보냈다.
*클레어 조교수의 얼굴에 핏기가 전혀 없었다.
필기 시험이 끝나는 날이었다. 듣기로는 혼자서 필기 시험 업무를 싹 다 주관했다고 한다.
거진 3일만에 일을 다 마무리 지었다는데, 그게 물리적으로 소화 가능한 업무량이라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
필기 시험을 끝마치고, 클레어 조교수의 연구실로 돌아왔더니 왠 시체가 책상에 드러누워 있었다.
클레어 조교수야 시험 기간엔 항상 시체 같은 얼굴을 하고 다니니 그러려니 했지만, 이번 시체는 건장한 남성이다.
클레어 조교수의 연구실 소속, 학사 장학생이자 학생 조교인 클레비어스 노튼데일이다.
언제나 우울한 얼굴을 하고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 기운이 쏙 빠지게 만드는 그런 인간이지만, 적어도 학생 조교로서는 빠릿빠릿한 편이다.
“으윽… 왜… 왜 기초 검술 교본에 나온 내용까지 싹 다 틀린 거야… 한심한 새끼… 모자란 새끼…”
보아하니 필기 시험에서 실수를 잔뜩한 모양이었다.
자잘한 실수들이야 실기 시험에서 매꾸면 그만이고, 클레비어스는 그 정도 실력은 있겠지만… 언젠가 이야기했듯 클레비어스는 기묘할정도로 자존감이 떨어지는 인간이다.
“내일 곧바로 실기시험이야, 클레비어스. 언제까지 그렇게 기죽어 있을 건데? 진짜로 수석 자리 내주고 싶어서 그래?!”
클레비어스의 옆에 앉아서 그 등을 후려치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오렌지색 머리칼에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데… 이제는 꽤 낯이 익은 사이가 되었다.
현 2학년 연금부에서 부동의 수석을 차지하고 있는 엘비라 에니스턴이다.
“어라, 에드 선배님 오셨네.”
“네가 여기엔 왠 일이냐, 엘비라.”
“제가 개발한 원소 저항 시약의 제조 이론을 검토 받고 싶어서요. 시약 제조 자체는 연금부 교수님들의 전문 분야지만, 원소 저항력에 대한 분야는 아무래도 마법부의 원소학 교수님들께 묻는 게 더 정확할 거 같거든요.”
엘비라는 연구실 중앙 테이블 위에 온갖 서류들과 플라스크를 잔뜩 올려놓은 상태였다.
“다만, 타이밍을 잘못 잡은 것 같긴 해요. 클레어 조교수님은 지금 눈 뜬 상태로 주무시고 계시거든요.”
나는 간단한 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클레어 조교수 쪽을 보았다.
하얗게 불탄 상태로 들숨 날숨만 겨우 내쉬고 있는 클레어 조교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람이라기보단 귀신들린 인형 같다.
“나는 죽어 마땅해…! 수백번은 반복 했던 검격 자세 하나 제대로 암기 못하는데 굳이 살아 뭣하냐고…! 그리고 무구 별 상성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외웠는데, 정작 시험에 나오니까 머리가 새하얘지는 건 뭐냐고…! 난 뭐지…? 나는 대체 왜 살지…?”
절규를 내지르던 클레비어스가 문득 나와 눈이 마주친다.
“뭐, 뭐야 에드 로스테일러! 불만 있어?! 너도 날 비웃는 거야?! 하… X팔….”
“…”
“요즘 좀 평판 좋아졌다고 세상 사람들이 다 아랫 것으로 보이지…?! 뭐야 그 시선은! 너도 날 한심한 놈으로 보고 있는거야…! 그래… 그렇겠지…! 너라고 해서 다를 것 같아…? 너나 나나 한심한 인간이긴 매한가지야…! 그렇게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지 마아악!”
– 쾅!
엘비라가 클레비어스의 머리를 휙 밀어서 책상에 내려 찍어버렸다.
책장 근처에서 서류를 찾던 아니스와, 이제 막 연구실에 출근하던 참이었던 오닉스는 둘 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나는… 그닥 당황하진 않았다.
“어머, 클레비어스. 선배님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엘비라.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너도 날 한심하게 보잖아…!”
“어휴, 한심한 클레비어스.”
“이것 봐!”
엘비라는 빙그레 웃으면서 클레비어스의 멱살을 틀어쥐고, 내게 이야기 했다.
“미안해요, 에드 선배님~. 클레비어스는 아무래도 교육이 좀 더 필요할 거 같아요. 예절도 좀 주입하고, 또 실기 시험 대비해서 멘탈도 틀어잡아야 하니 잠시 데려갈게요. 어차피 오늘은 클레어 조교수님도 쉬는 듯 하니… 괜찮겠죠?”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냐고…! 카아아아악!”
“조용히 좀 해, 클레비어스.”
책상에 머리를 박은 상태로 있던 클레비어스가 저항하려고 팔을 휘젓는 순간, 엘비라는 품속에서 시약 하나를 꺼내서 그의 머리에 들이부어 버렸다.
거의 사람이 아니라 가축 취급이었다.
“크아아아악! 뭐야 이거! 몸에… 몸에 힘이… 풀린다…”
엘비라는 그대로 영차 하는 소리를 내더니, 몸에 힘이 풀려가는 클레비어스를 억지로 이끌었다.
그 동선에 서있던 오닉스가 슬쩍 옆으로 비켜주고, 문도 열어주었다.
잘못했다고, 제발 얘 좀 말려달라고 난리를 피우며… 클레비어스는 그렇게 연구실 밖으로 끌려나갔다.
“다음에 또 봬요!”
활기찬 인사에 사뭇 소름이 돋았다.
“필기 시험은 괜찮게 치렀나보네? 표정이 좋아.”
아니스가 물었다.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나니 연구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클레어 조교수의 연구실 멤버. 아니스, 나, 클레비어스, 그리고 오닉스 선배까지.
다른 교수들의 연구실에 비하면 정말 엘리트 멤버만 모였다고 평가 받는 곳이지만, 그 중에서도 아니스가 가장 일처리가 빠릿하기로 이름나 있었다.
그 평가답게, 오늘도 여전히 서류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아니스였다.
“나는 뭐, 그럭저럭 잘 치렀다.”
필기 시험 성적은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나올 듯 했다. 애초에 입학 이후로 단 한 번도 필기 시험에서 미끄러진 적은 없다.
목재 쉼터 하나에 기대어서 야생 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암기 과목에 들이는 노력 만큼은 절대로 줄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환경이 개선된 지금에 와서야 훨씬 더 원활하게 성적을 낼 수 있는 것이 당연했다.
문제는 실기 시험이다.
이번 시험의 목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학년 수석이다.
평소보다는 그 목표가 드높으니, 실기 시험에 두는 비중 또한 많이 높아졌다.
“실기 시험 말인데… 제대로 진행 될 수 있는 거 맞냐…? 당장 내일 아니냐?”
가장 걱정되는 것이 원소학 시험이다.
모든 시험 과정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는 클레어 조교수가 지금 반 시체 상태다.
원소학 수업은 실기 시험으로 담당 교수와의 대련이 잡혀있는 것이다.
제 아무리 신입 조교수라 할지라도, 클레어 조교수가 일반 학생들을 상대로 대련에서 밀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 클레어 조교수는 누가 봐도 대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뭐어, 다른 원소학 교수님이 도와주셔야겠지… 클레어 조교수님이 미리 언질을 해두셨을지는 잘 모르겠네.”
– 쾅!
그 순간, 다시 문이 열렸다.
순둥이인 오닉스 선배가 화들짝 놀라서 문 쪽을 바라보자, 왠 중년의 사내 하나가 비틀거리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더벅머리에다가, 제대로 깎지도 않은 수염이 비죽비죽 튀어나와 있고, 몸에서는 연초 냄새와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대낮부터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마셔댔는지,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연구실을 가로질러간다. 책상에 부딪히고, 책장에 머리를 박으면서도 휙휙 발을 잘 놀려서 클레어 조교수의 코앞까지 도착했다.
“하읏..! 학! 칼레이드 교수님…! 여…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막내 교수의 실전 감각이라고 해야할까.
상대의 낌새를 눈치채자마자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이 어찌보면 조금 서글프다.
“그래, 클레어 조교수. 일 잘하고 있나.. 히끅.”
“아, 네에… 필기 시험 잘 마무리 되었고… 이제 실기 시험으로 대련 실습만 진행하면…”
“다름 아니라 맥도웰 학장님한테 죽어라 깨지고 오는 길이다. 어떻게 필기 시험 숙지 사항부터, 중요 감독 업무까지 전부 막내 교수 이름으로 보고가 올라올 수가 있냐고. 나는 대체 하는 게 뭐냐고…”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한단 말인가.
학생 조교들은 모두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리고만 있었다.
“확실히… 돈을 받았으면 일을 해야지… 한창 현역으로 날뛰던 때는 내 눈도 못 마주치던 맥도웰 그 놈이… 이젠 학장 됐다고 나한테 그렇게 악을 바락바락 써대니까 나도 썩 위기감이 들어…”
그럼 술이라도 마시지 말던가. 아니스는 그런 말이 목젖까지 나오려는 걸 참는 것 같았다.
“보아하니, 필기 시험 주관하느라 엄청 피곤하다지…?”
“아, 네에… 그렇긴 한 대요…”
“그럼 됐어… 실기 시험은 나한테 맡기도록…”
클레어 조교수가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쥔 다음 휙 고개를 내려주었다.
“잠이나 자라~.”
그리고 취한 듯이 피식피식 웃으며, 다시 비틀대며 돌아와서는 조교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쪽으로 가까이 왔다.
그리고는 의자 하나를 드르륵 빼더니, 내 맞은 편에 앉은 것이다.
옆자리에 있던 아니스와, 책장 옆에 있던 오닉스는 식은 땀을 삐질 흘렸다.
“아이고~ 숙취야~.”
그렇게 한참을 비틀대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고개를 훅 수그린 채 이야기했다.
“그래, 네가 에드 로스테일러구나.”
나를 어떻게 아냐고 물을 순 없었다. 어차피 클레어 조교수의 지도 교수다. 내 신상을 알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굳이 나를 이렇게 콕 집어서 이야기 하는 이유까지 알 수는 없었다.
칼레이드 교수는 비틀거리면서도… 꽤나 또렷한 발음으로 이야기했다.
“내일 실기시험이지.”
“네, 그렇습니다만…”
“그럼…우리 한 판 뜰까.”
“…예?”
*클로엘 제국이 한창 아인족과의 전쟁을 치르던 시절이 있다.
과거의 이야기, 아니 이젠 역사책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이야기다.
지금은 북방지대 끄트머리까지 밀려나 그 세력이 미약해진 아인족이지만, 당시에는 제국의 명줄을 위협할 정도로 강대했다.
결국 황도 클로에론의 목전까지 아인족의 군세가 몰아치던 상황.
절망 적인 전황에도 끝끝내 클로엘 황제의 군세 맨 앞에서 전쟁을 주도하던 영웅이 있었다.
그가 바로 황도를 지킨 수호자 오벨 포시어스다.
그리고 그를 돕던 세 명의 젊은 마법사.
절단자 젤란, 탐구자 글래스트, 무법자 칼레이드.
이제는 나이를 먹고 뒷방 늙은이로 사라진 자도 있고, 현역으로 남아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 자도 있으며, 비극적으로 제 삶을 마무리한 학술가도 있다.
모두 하나 같이 제 분야에서 힘을 쓰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시대의 뒷편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 세상을 방황하던 칼레이드가 다시 교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운명의 뜻일까.
이제 교직에 손을 뻗는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건만, 글래스트의 빈자리를 채워달라는 요청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만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와서 그 이유를 붙여보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적어도 칼레이드는 그리 생각했다.
반면, 에드 로스테일러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수 년 동안 코헬톤 무법지대를 방황하며 자취를 감췄다던 무법자 칼레이드.
그가 교수로 복직한 뒤, 처음으로 학생들 앞에 나타나서 한다는 게 실습 대련이었다.
대련장 위에 선 에드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칼레이드의 실력을 구경하겠답시고, 시험과는 관련 없는 전투부나 연금부 학생들까지 우루루 구경하러 몰려들어와 있었다.
심지어 소문을 듣고서는 타 학년 학생들까지도 와있다. 몰려든 인파 사이로 학생회장인 타냐 로스테일러까지 나타났을 때는 아예 좌중에 정적이 감돌 지경이었다.
오벨관의 전투 실습장.
교수용 흰 외투의 주머니에 손을 푹 쑤셔놓고, 짙게 자리한 다크서클을 북북 비비며 서있는 칼레이드 교수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