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42)
학기말 평가 (6)
“네가 바로 그 학생 조교 아니스 헤일란이구나. 어지간한 조교수보다 훨씬 더 빠릿빠릿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아니스는 묵직하게 퍼지는 술 냄새에 코를 틀어막았다.
습관적으로 나간 행동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선임 교수를 앞에 두고서 무례한 짓이었다. 아니스 본인도 아차 싶었으나, 칼레이드 교수는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술에 쩔어서 골골대는 모습으로 연구실에 들어온 칼레이드는 시체 상태인 클레어 조교수를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았다.
이제는 저렇게 시체 같은 모습이 평소의 클레어 조교수다. 피곤하지 않은 상태의 클레어를 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몰아치는 업무량과 더불어서 개인 연구까지 진행했으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다.
“아, 안녕하세요. 칼레이드 교수님.”
“그런 벌레 씹은 표정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제, 제가 그런 표정을 지었나요?”
칼레이드 교수는 더벅머리를 북북 긁으며 연구실을 휙 훑어봤다.
학기말 시험이 마무리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이번 주말이 지나면 이제 방학 시즌인 것이다.
“뭐… 연구실도 이제 한가해질 시기가 되었군. 학생 조교도 너 하나만 출근했나. 하긴, 슬슬 방학을 준비해야 할 시기지.”
칼레이드 교수는 주머니에서 구깃구깃 해진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서 조교용 중앙 테이블에 휙 던져두었다.
“이, 이건 뭔가요?”
“오늘 아침에 학사 중앙 본부 쪽에서 내려온 서신이다. 이번 학기말 시험 성적 산출이 끝났다던데.”
“이게 그 성적 자료예요?”
“그래. 그중에서도 학년별 상위 20명 명단이 나왔더군.”
기본적으로 학생들의 성적은 공표하지 않는 게 방침이지만, 동기부여 차원에서 학년별 최고 득점자 20인은 매 학기 학생회관 외벽에 게시하고 있다.
그 자료에 대한 정리 작업을 맡기러 온 것이다. 보통은 선임 교수가 직접 정리하는 것이지만, 칼레이드는 그렇게 빠릿빠릿한 인간이 아니었다.
“적당히 명부 확인해서, 이쁘게 정리한 다음에 학생회관 쪽에 게시해 놔라.”
“네, 알았어요.”
어차피 아니스는 일손이 비어 있는 상태였다.
학기가 마무리되어 가자 클레어 조교수의 연구실에 할당되는 업무량도 크게 줄어든 것이다.
모처럼 찾아온 휴식기다. 클레어 조교수는 책상에 엎드려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이렇다 할 업무 지시를 내릴 사람도 없다. 그렇다 보니 보관 기한이 지난 자료들을 정리하는 등, 잡일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흐음….”
아니스는 칼레이드 교수가 던져두었던 봉투를 집어 들고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스는 꼼꼼한 성격 덕에 필기 성적에서만큼은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지만, 실기 성적은 아직 좀 아쉬운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고득점을 받아 장학금을 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항상 약간 모자란 성적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일말의 희망을 걸어 볼까 싶었으나….
“아 맞다. 네 이름은 없더라, 아니스.”
두근두근 대며 서류를 열어 보려는 아니스에게 사형 선고가 먼저 때려 박혔다.
아니스가 도끼눈을 뜬 채 칼레이드를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대면서 연초를 말았다.
“뭐, 어쩌라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봐야 네 가슴만 아프지.”
“이익… 으….”
아니스는 고개를 휙 떨구고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뭐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됐으면 가장 궁금한 부분은 에드 로스테일러의 성적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최근 실기 시험에서 활약하면서 급부상했다. 단순히 성실한 노력파라는 평판에서 끝나지 않고, 정말 실질적으로 여러 성취를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부동의 1위였던 예니카 페일로버를 꺾고, 새로운 3학년 수석으로 부상할 만한 유일한 학생으로 꼽히고 있다.
타 학년들은 별로 관심이 없겠지만, 나름 3학년 사이에서는 꽤 관심사를 이끌고 있으므로… 아니스도 꽤나 호기심이 동했다.
학생 조교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이런 정보들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우….”
자기 성적도 아닌데, 아니스는 다시금 괜스레 긴장되기 시작했다.
애초에 아니스는 예니카와 에드 둘 모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둘 중 하나는 수석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가슴 한편에 또아리를 튼다.
그럼에도, 아니스의 마음속 저울은 에드 쪽으로 약간 더 기울어 가고 있었다.
예니카는 착하고 성실한데다 깊은 교감을 나누었던 절친 중의 절친이다. 정말 소중한 인연이지만, 아니스는 뼈가 깎여 나가도록 노력해 대는 에드의 모습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아니스 또한 자각하고 있다. 이건 일종의 자기동일시다.
배경도, 재능도 없이 아득바득 이를 갈아 가며 살아남아 온 그 사내의 길은 절대 평탄하지 않았을 터다. 그 삶에 자신의 삶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아니스는 그렇게 버텨 온 삶이 가지는 가치를 잘 안다. 그러니, 그 노력엔 보답이 있어야만 한다.
예니카라고 해서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힘들지 않았던 것도, 인생 대충 살았던 것도 아니다.
그래도, 에드와는 그 노력의 결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어디….”
아니스는 심호흡을 마치고, 칼레이드 교수가 건네준 서류 봉투를 휙 열어 보았다.
안에서 나온 서류 뭉치들. 그 맨 앞 페이지, 맨 윗줄을 보자 순간적으로 아니스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러나, 잠시 동안 그 자세한 내용을 검토해 보자… 아니스의 시선이 조금씩 싸늘하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 * * [ 이 날개 좀 보십시오, 에드 도련님! 쫙 펼치면 이렇게… 에드 도련님 상반신도 다 가릴 수 있습니다! 크하하, 크하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악억! ]
머그는 우렁차게 웃다가 숨이 틀어막혔는지 기침을 해 댔다.
머그가 중위 정령으로 위상변이한 것도 저번 주의 일이다. 즉, 일주일 내내 저러고 있었다.
[ 너무 그렇게 난동 부리면 에드 도련님 마력에 부하가 올 수도 있을 텐데. ] [ 그, 그렇습니까…! 일단 불을 쏘는 건 자제하겠습니다. 제가 너무 신이 나서 그만! 고견 감사드립니다, 레이시아 님…! ] [ 뭘 아직도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고 있는 거니, 이제 같은 중위 정령인데. ] [ 네, 넵? ]해질녘의 학사 벤치 한편.
학사 일과를 전부 마치고 캠프로 돌아가기 전, 나는 벤치에 앉아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한 학기의 모든 수업을 마무리하는 종업식 날이었다. 이제 남아 있는 수업이 없으니, 방학 전까지는 교수동에 올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 중에 교수동에서 할 일은 전부 마무리 짓고 싶었다.
내가 거주하는 북쪽 숲 캠프는 아무래도 교수동과는 거리가 좀 되는지라, 몇 가지 처리해야 할 사소한 일들 때문에 계속 이 먼 교수동에 들락거리고 싶지는 않았다.
[ 제, 제가 어찌…! 그, 렇지요. 이제 저도 중위 정령이니 레이시아 님과 대등한 관계…! ] [ 그렇지. ] [ 그래도, 지금 당장은 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서… 그냥… 천천히 놓아도 되겠습니까…? ] [ ……. ]머그는 벤치 등받이에 앉아 날개를 퍼덕대고 있었고, 레이시아는 대리석 바닥에 엎드리고 앉아 제 발바닥을 핥고 있었다. 둘이서 존대말 가지고 투닥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벨 마이아와 묘한 신경전을 치르고 있는 내 모습이 생각나서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 별거 아닌 거 가지고 되게 호들갑 떤다, 얘. 그리고 에드 마력이 어디 예전 같은 줄 아니. 중위 정령 둘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까 너무 궁상 떨지 좀 마. ]그 와중에 메릴다는 벤치 반대편 구석에서 두꺼운 책을 휙휙 넘겨 읽으며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묘하게 얄밉다.
“중위 정령 둘이야 감당할 수 있는데, 너는 좀 버겁다. 생각해 보니 항상 루시 쪽이 아니라 내 쪽에 붙어 있네.”
내가 그리 말하자, 인간 형태를 한 메릴다는 눈을 새침하게 감고 고개를 붕붕 휘저었다.
[ 걔는 마력량이 여유롭긴 한데 교수동에 거의 나다니질 않잖아. 나는 도서관에 자주 자주 좀 들르고 싶은데, 걔 따라 다니면 맨날 이 불편한 몸뚱어리로 따박따박 걸어서 책 빌리러 다녀와야 되는걸. 반납도 마찬가지고. ]“저번 주에 열권 넘게 빌린 걸 벌써 다 읽었다고?”
[ 미술사학은 자료 그림이 많아서 두껍기만 하지 별로 실속이 없단 말야. ]그렇게 말하고는 휙휙 책장을 넘겨 대며 콧노래를 부른다. 뭐라 더 말할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 하늘이 빨갛게 물든 걸 보니 슬슬 해가 지려나 봅니다, 에드 도련님. 밀린 일들 처리해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이시아가 점잖게 물었다.
“그래. 먹은 거 다 정리하고 얼른 일 처리해야지. 트릭스관 쪽에 가서 다음 학기 학사 장학생 신청해 둬야 하고, 플러뱅 교수가 남은 교재들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했으니 연구실에도 들려야겠다.”
[ 많이 바쁘시군요. ]“돌아가서 할 일도 많다. 일단… 시험 잘 마무리했으니 본가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지. 마차도 수배해 둬야 하고, 동행할 사람도 잘 확인해 둬야지.”
이번 방학은 내 인생에 있어서 큰 분수령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든다.
준비는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좋다.
[ 예니카 아가씨랑은 언제 합류하실 생각이십니까? 같이 귀가하시는 거 아니십니까? ]“일 처리 다 하고 학생회관에서 보기로 했어.”
나는 먹은 것들을 죄다 치우면서 덧붙였다.
“이번 학기 성적이 나왔다더라.”
한숨이 푹 흘러나오자, 나는 그제야 자각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굴긴 했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금년도 상반기 학생 성적 결산 ( 상위 20인 )
..― 1학년 석차 ― 1. 웨이드 캘러모어 (수석)
2. 요제프 화이트펠츠 (차석)
3. 데니스 베니암즈 4. 클로드 벨라서스 5. 타냐 로스테일러
..― 2학년 석차 ― 1. 루시 메이릴 (수석)
2. 로르텔 케헬른 (차석)
3. 클레비어스 노튼데일 4. 직스 에펠슈타인 5. 테일리 맥로어
..― 3학년 석차 ― 1. 에드 로스테일러 (수석)
2. 예니카 페일로버 (차석)
3. 드레이크 레이거스 4. 아탈란테 5. 세리 케맬런
..― 4학년 석차 ― 1. 다이크 엘펠란 (수석)
2. 트레이시아나 블룸리버 (차석)
3. 도로시 화이트펠츠 4. 그룩스 5. 페트리시아나 블룸리버
..노을이 저물어 가는 학생회관.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웅장하게 서 있는 네일관. 그 주변에 학생들이 가득 차 있다.
학사 측에서 내걸어 놓은 상위 20인의 명단이 한눈에 들어왔다.
온갖 서류들과 책을 잔뜩 감싸 안고 학생회관의 초입에 들어섰을 때, 이미 학생들의 시선은 내게 쏠려 있었다.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이미 어느 정도 직감했다.
실베니아의 성적 산출 구조상, 어지간해선 수석의 이름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3학년 수석의 이름으로 내가 올라와 있는 걸 확인한 순간,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 ‘지, 진짜로 에드 로스테일러가 3학년 수석을 먹었어…!’
― ‘솔직히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쟤 엄청 열심히 했잖아….’
― ‘어디 수석 자리가 독하게 산다고 아무한테나 주는 줄 아니?’
― ‘―――’
― ‘―――’
지그시 눈을 감고 마음의 평온을 찾자, 웅성거리던 주변의 소리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기억이 되감긴다. 말도 안 되는 환경에 처해, 이 악물고 버텨 왔던 지난 세월들이 검은 눈꺼풀 위로 덧씌워진다.
가는 곳마다 누구든 나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던 세월. 몸뚱어리는 비루하고, 재능이랄 것도 미천하여 의지와 노력만으로 버텨 내야만 했던 시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모든 시련을 버텨 내고 이겨 내어, 결국 학년 수석 자리에까지 올라왔다.
1년 하고도 7개월이 더 걸렸다. 그 기간 동안 제대로 숙면을 취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누군가는 짧은 시간에 말도 안 되는 성과를 이룩했다고 말할 테고, 누군가는 그 긴 시간 버텨 낸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른다.
길든 짧든, 그건 중요치 않다. 어쨌든 나는 버텨 냈고, 성과를 냈으며, 이제 당당히 3학년 최고의 성적을 내었다.
묘하게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묵묵히 받아들이리라 결심했건만, 막상 노고의 성과가 눈앞에 들이밀어지니 감동의 물결이 밀려오는 듯했다.
어쩌겠는가. 나도 사람이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겨우 눈을 뜨고, 품에 가득 안은 짐을 고쳐 쥔 다음 다시금 벽에 붙은 문서를 확인했다. 몇 번을 확인해도 3학년의 꼭대기에 자리한 이름은 에드 로스테일러였다.
“후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 이렇게 깊고도 거대한 충족감을 맞이했던 적이 있었나. 끽해 봐야 처음 오두막을 완공했을 때였을까.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공지의 세부적인 내용을 읽어 보았다.
상위권 학생들의 구체적인 성적이 각 이름 밑에 적혀 있었다. 나와 예니카의 성적 차이는 꽤나 많이 벌어져 있었다. 의외였다.
내 성적은 오류 없이 잘 산출되었다. 그리고, 예니카의 성적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나는 미간을 좁히고 눈살을 찌푸렸다.
“에드…! 에드가 수석이네…!”
그때, 뒤편에서 학생들을 헤치고 예니카가 나왔다.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우리 쪽으로 몰려들었다. 요즘 들어 묘하게 시선이 몰리는 기분이다.
“으아아~ 내가 결국 차석이구나~. 결국 에드가 이겼네…!”
발을 동동 구르면서 다가온 예니카의 표정이 어딘가 개운해 보인다.
“예니카.”
“어, 응?”
“할 말이 있어. 일단 듣는 귀가 없는 곳으로 가자.”
나는 그대로 예니카의 팔을 잡아채서 학생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에드? 응? 에드?”
그대로 한참을 인파에서 떨어져 나오고 나서야 예니카의 팔을 놓아주었다.
예니카도 뭔가 긴장한 기색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만 있었다.
“에, 에드 왜 그래?”
“필기시험 일부러 틀렸어?”
돌려 말할 이유가 없다. 나는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세부 성적 항목을 뜯어 읽어 본 나는 큰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예니카의 주특기인 정령학, 마물 생태학 과목 성적에서 기묘하리만치 필기 점수가 낮다.
실질적인 감응 능력을 보는 실기 성적은 어떻게 하기 힘들지만, 필기시험은 본인이 점수를 ‘조절’할 수가 있다. 특히 아는 것이 많은 주특기 과목일수록 더 쉽다.
“나한테… 수석을 양보한 거지?”
그렇게 묻자, 예니카가 한번 히끅대며 어깨를 떨었다. 하여튼 거짓말을 절대 못 하는 소녀다.
“…티 많이 났어…?”
“왜 그랬어.”
“아니… 나는 저번에 받은 징계 때문에 수석 해 봤자 장학금 특혜도 못 받거든. 오필리스관으로 들어갈 수도 없구….”
예니카는 계속해서 자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부끄러운 듯이 이야기했다.
“오필리스관에서 쫓겨난 신분인 건 에드도 마찬가지만, 하다못해 장학금 혜택은 받을 수 있잖아….”
“고향 사람들 응원해 주는 걸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한다고 하지 않았냐….”
“뭐어, 차석도 분명 대단한 거니까. 그리고… 내심 그 기대감이 무겁기도 했구… 캠프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난 수석 자리에서 내려와도 될 것 같더라구.”
그렇게 말하며 말꼬리를 흐리는 예니카. 이윽고 베시시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에드는 수석 하기에 성적이 꿀리는 편도 아니니까. 일단은 에드가 3학년 수석을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었어.”
그 말에 잠시 숨을 들이켰다.
이 수석 자리가 내 온전한 노력의 성과라고 생각했다. 숨이 가빠질 정도로 큰 희열감이 밀려올라 왔던 이유 또한 그렇다.
허나 사실은 전부 예니카에게 양보받았던 것이다.
성적을 보자하면, 예니카가 제대로 필기를 쳤다고 할지라도 비벼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내 성적은 예상보다 더 높게 나왔다. 실제론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는 것이다.
사실 그래 봐야 지나간 일이긴하다.
내가 수석 자리를 그토록 애타게 바랐던 것은, 내 노력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였지만, 결국 수석 자리에 딸려 오는 특혜들이 핵심이었다.
그것들이 온전히 손에 들어왔다. 고맙게도 예니카의 배려로. 사실 그러면 된 것이다.
“그래, 고맙다.”
나지막이 그리 이야기했다.
표정도, 어조도 평소 그대로다. 이렇다 할 변화 없이, 늘 그렇듯 진심을 다해 예니카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럴 때일수록 더 어른스러워질 필요가 있다.
“네 덕이야, 예니카. 별 다른 특혜가 없었다 할지라도 수석 자리를 내려놓는 게 쉬운 결단은 아니었을 텐데… 주변 시선도 있을 테고….”
“아니, 아니야…! 고생은 항상 에드가 제일 많이 하잖아…!”
“어쨌든 고맙다.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그렇게 말하고 나니, 예니카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뭔가 묘한 기색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대고만 있었다.
“에, 에드…?”
한참을 고민하던 예니카가, 뭐라 질문이라도 던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사사삭.
“둘이 여기 있었네.”
도도하면서도 나긋한 목소리. 클레어 조교수의 연구실에서 질릴 만치 많이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풍성한 회색 머리칼을 슥슥 쓸어내리며, 벤치 뒤쪽에서 아니스가 나왔다. 방금 전부터 우리를 찾고 있었던 듯한 기색이었다.
“아, 아니스…? 여, 여긴 어쩐 일이야…?”
“우리 오늘 라플라스 베이커리 가기로 했잖아. 종업식 기념으로 클라라랑 셋이서 말야. 예니카는 맨날 깜빡깜빡한다니까.”
“오늘? 그, 그랬었나?”
아니스는 성큼 성큼 걸어서 다가오더니 나를 휙 지나쳐서는 예니카의 팔을 꽉 잡아 쥐었다. 다만, 그와중에 인사를 건네는 건 잊지 않았다.
“안녕, 에드.”
“연구실 일 다 마쳤냐…?”
“응, 그래. 미안한데 예니카 좀 빌려갈게. 선약이 있었는데 잊어버렸나 봐.”
고개를 갸웃거리는 예니카를 아니스가 잡아끌었다.
예니카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약속 안 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중얼거리지만, 아니스는 잘 기억해 보라면서 그렇게 반쯤 납치하듯이 그녀를 끌어내 버렸다.
“아, 맞다.”
다만, 예니카를 끌고 사라지기 전에, 석양을 뒤로한 채 고개를 돌려 내게 이야기했다.
“수석 된 거 축하해.”
“그래, 고맙다.”
그렇게 아니스는… 예니카를 데리고 휙 사라져 버렸다.
“…….”
서쪽 하늘로 태양이 저물어 간다. 아까는 초저녁이었는데, 이젠 진짜 밤이 되기 일보 직전인 듯한 기분이다.
나는 근처 벤치에 걸터앉아서, 등받이에 양 손을 얹고 하늘을 보았다.
이후 캠프로 돌아가서 할 일들을 점검해 둬야 했다.
이제 곧 여름 방학이라는 생각이 드니, 아직도 할 일이 잔뜩 남았다는 사실이 실감이 됐다.
이윽고, 영문 모를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붉은 하늘이 퍽 아름다웠다.
* * *
“왜 그랬어.”
“…으, 응?”
“예니카 너 실수한 거야.”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아니스가 팔을 꽉 잡아 쥐고 있었다. 기묘하리만치 세게 쥐고 있는 팔이 아려 왔지만, 예니카는 차마 아프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니스는 한참을 예니카를 끌고 가서는… 에드와 꽤 멀어지고 나서야 화단에 예니카를 앉혔다.
아니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잠시 말을 골랐다.
에드 로스테일러를 긴 시간 동안 본 건 아니지만, 어느 틈엔가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었다. 자기객관화는 아니스의 주특기다.
그렇기에, 이를 악물고 이어 온 그의 노력이 보답받아야만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산출된 성적을 보았을 때, 설령 예니카가 양보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수석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에서야 미지의 가능성으로 남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나자, 아니스는 괜스레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실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야. 예니카 네가 무슨 나쁜 뜻이 있어서 그랬겠니. 그냥 에드가 좋으니까, 에드가 잘됐으면 하니까 그런 거겠지.”
“그…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니까 되게 기분이… 좀….”
“그런데, 예니카. 걔가 수석 자리 하나 먹겠다고 이 악물고 바득바득 노력해 왔던 시절들 생각 안 나?”
아니스는 얼굴을 붉히는 예니카의 이마를 꾹 누르고, 거기까지만 이야기했다.
예니카는 그대로 고개를 꾹 눌린 채 아니스와 눈을 맞추고만 있었다.
이윽고 예니카는 에드의 입장을 상상해 본다.
자는 시간까지 아끼고, 짜투리 시간 조금조차도 허투루 쓰는 일 없이 노력해 온 나날들.
그렇게 바득바득 노력해 수석 자리를 쟁취했으나, 그 결과라는 것이 ‘양보’받은 것에 불과하단 걸 통보받는 순간. 그때 에드가 느낄 감정.
의도가 선하다 해서 그 결과 또한 좋으리란 법은 없다.
다만, 에드는 예니카의 그런 실투에, 어른스럽게 감사 인사로 대처해 주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가늠하고 나자, 예니카의 숨이 휙 하고 멎어 들어갔다.
“…….”
“그래, 예니카. 너도 이제 알아야지.”
해가 저무는 학사의 한편에서, 아니스는 예니카가 앉아 있는 화단 옆에 나란히 앉았다.
“서 있는 위치가 높으면, 마냥 착하다고 해서 다 좋은 게 아니야.”
여름의 밤은 좀 일찍 찾아온다.
완연한 여름이 되었으니, 그 어둠 또한 평소보다 깊다.
화단에 앉아 가만히 저물어 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예니카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니스는 쓸데없이 말을 덧붙이진 않고, 그냥 그 옆에 가만히 앉아 있어 주었다.
“…….”
“…….”
그렇게, 학기말 시험은 마무리되어 간다.
3학년 수석, 에드 로스테일러.
그 이름의 무게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탓에….
두 소녀는 그렇게 나란히 앉아, 저물어 가는 태양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