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47)
금의환향 (5)
4막 7장. 그레골 성당 침투전의 최종 보스. 서리의 황녀 셀라하.
크레핀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로스테일러 가문이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시발점이 되는 시나리오.
슬슬 로스테일러 가문의 종막이 다가올 때가 되었음을 상징하고 있는 인물이다.
“페니아에 대해서 굳이 구구절절 이야기하진 않으마. 내 소중한 혈육이기도 하니, 구태여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진 않구나. 다만 가까이서 지내봤다면 공자도 잘 알겠지. 그 애는 황제가 되기에는… 생각이 지나치게 많거든.”
내 방에 셀라하가 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착실히 4막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3막의 최종전인 루시 토벌전이 생략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와닿은 시점이다.
지금까지 충분하리만치 이야기가 비틀려 왔지만, 이젠 정말 엇비슷하게라도 추측하는 것조차 힘든 시점까지 오고 만 것이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 것일까?
머릿속에서 , 3막 최종장의 모습이 다시금 아른거렸다.
오른산 꼭대기에서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루시의 모습이다. 그녀는 3막의 끝에 와서야 과거를 옥죄던 짐을 모두 털어 냈던 것이다.
늘 그래 왔듯, 비틀림은 새로운 비틀림을 낳는다.
테일리의 성장세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지만, 3막 보스전을 아예 생략해 버린 지금 시점에서… 4막과 5막을 정상적으로 치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4막의 최종 보스는 악신의 힘을 다루는 크레핀 로스테일러고, 5막의 최종 보스는 신을 먹는 성창룡 벨브로크다. 지금의 테일리가 그 둘을 제압할 수 있는가 하면… 이젠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아득하게 멀어 보이던 시나리오의 끝이었지만, 이미 이야기는 반환점을 돌아 성큼성큼 끝이 다가오고 있다. 절반 이상을 달려온 지금 시점에서 가만히 손을 놓고 있다간 정말 큰 재앙이 도래할 수도 있다.
그 사실이, 다시금 가슴 속에 새로운 압박감을 심어 넣는다.
“내 쪽으로 붙거라. 이건 내가 공자에게 보내는 제안이긴 하다만, 공자 입장에서는 큰 기회일 테지.”
셀라하가 가는 손가락을 몇 번 훑더니, 내게 손을 휙 내밀었다.
황족은 거의 악수를 하지 않는다. 끽해야 1년에 대여섯 번이 될까 말까다.
황족과 동등한 위치에서 눈을 맞추고 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가 이 제국에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악수를 허하는 것은 셀라하 입장에서는 최대한의 경의를 표시한 것이다.
“감히 천한 손으로 어찌 1황녀님의 손을 맞잡겠습니까. 비록 제가 로스테일러 공작가의 일원이긴 하나, 존귀하신 그 몸에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하하,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구나. 그렇다면 구두로 해도 상관이 없으니….”
셀라하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미동조차도 하지 않는 내 모습을 보더니, 살짝 미간을 떨었다.
“…거절한 것이구나.”
“그 존귀함을 존중하였을 뿐입니다.”
“페니아는 황권에 뜻을 두지 않고 있다. 허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야욕으로 똘똘 뭉쳐 있는 편이지.”
침몰하는 배에서 내리라고 하였나.
허나, 나는 침몰할 배가 페니아가 아닌 셀라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공자의 아버지인 크레핀 경도 내 편을 들 것이니, 그 슬하에 있는 공자 또한 현명히 선택해야 할 터.”
서리의 황녀 셀라하는 크레핀의 계획에 협력하여 악신의 힘을 손에 넣지만, 끝끝내 그 힘을 온전히 다루지 못한 채 메뷸러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고 만다.
4막의 등장인물 중에서도 그 말로가 끔찍한 편이다.
“셀라하 황녀님의 말대로, 페니아 황녀님은 당장은 황권에 뜻이 없지요. 말 그대로 지금 당장일 뿐이지만.”
“그 아이가 황제의 자리에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느냐?”
“지금 같은 태평성대의 시절에는 페니아 황녀님과 같은 덕군(德君)이 필요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미래를 아는데 당신은 그 말로가 끔찍합니다, 그러니 당신 편을 들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결국 다른 핑계를 둘러대며 빠져나올 수밖에 없는데, 내가 가져온 편지도 있겠다… 페니아만큼 적절한 핑곗거리가 또 없다.
“저는 페니아 황녀님이 그 자리에 어울리는 황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황제의 자리에 뜻이 없다고 하셔도, 저는 묵묵히 페니아 황녀님을 믿고 기다릴 뿐입니다.”
“하… 실베니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자가 그렇게까지 그 아이를 지지하다니 놀랍군.”
노발대발 화를 내면 일단 다 받아 줄 생각이었으나, 의외로 셀라하는 그 푸르스름한 눈동자를 내게 똑바로 향한 채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군침이 흐르는구나.”
“예?”
“굳이 말하자면, 나는 약탈을 즐기는 편이지.”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예니카다. 어깨를 휙 떨며 셀라하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데, 마치 겁에 질린 설치류 동물 같아서 내가 다 애틋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예니카를 보고 고개를 휙휙 가로저었다. 일단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였다.
“말씀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대개 지조라는 것은 부러졌을 때 제일 아름다운 법이지. 페니아를 향한 공자의 소신이 어디까지 갈지 한번 지켜보고 싶구나.”
셀라하는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다.
내가 페니아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이유는, 정말로 페니아를 진심을 다해 응원하고 그녀의 뒤를 따르겠다는 이유보다는… 그저 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다. 일단 셀라하 쪽으로는 붙을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
“뭐, 시간은 많다. 이 사교회도 닷새 동안이나 이어질 것이니… 그간 나와 페니아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지 충분히 느껴 보거라.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말해도 좋다.”
“고견 감사드립니다.”
“끝까지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보기가 좋구나. 그 지조와 절개까지 꺾는다면 얼마나 보기 좋을까. 뭐… 괜찮지….”
셀라하는 차가운 손으로 내 볼을 한번 쓸더니 묘하게 아련한 듯한 웃음을 보였다. 그 미소조차도 한없이 차갑다.
“화단 속에 핀 꽃은 너무 쉬워. 사람 마음은 워낙 간사해서, 화단 속의 장미보다 절벽 위에 핀 억새풀에 더 시선이 가는 법이지.”
“과분한 평가입니다.”
“그래, 또 보자꾸나.”
셀라하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 머리칼을 몇 번 휙휙 쓸어내리고는 웃음을 지으며 방을 떠났다.
방문 앞에는 이미 그녀의 집사장 데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 * *
“생각해 보니까 기분 나빠….!”
예니카가 스커트를 꾹꾹 누르면서 씩씩 화를 내고 있었다.
면전에서는 그렇게 화를 못 냈지만, 상황 다 끝나고 나서 ‘아, 그때 이렇게 말할걸.’ 하고 후회하는 것… 사실 소심이들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막상 코앞에서는 연인 관계니, 아기를 배니 뭐니 하는 말에 홍당무처럼 볼만 붉히고 있었으면서… 지나간 일을 회상하다 보면 감정이 뒤바뀌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기분 나쁘네? 생각해 보니 무시당했네? 어? 기분 나쁘네?
그런 그라데이션 분노가 올라오는 것도 이해는 한다만… 아쉽게도 제1황녀를 상대로 노발대발 화를 내 봐야 제 살 깎아 먹기밖에 안된다.
“나 이래 봬두 학년 수석 오래 했고, 그렇게 약하지두 않고, 평민이긴 하지만 어디 가서 무시당할 만한 사람 아니라구 화낼 걸 그랬나…? 아니, 그래두 황녀님인데 화를 낼 수는 없고… 조금, 그 은은하게…? 어른스럽게…? 저도 그리 쉬운 사람은 아니랍니다~, 이렇게 능청스럽게 해 볼 걸 그랬나? 로르텔처럼…?”
“예니카….”
“근데 나 그런 거 잘 못하는데… 그래도, 화나는 데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으으… 으으…!”
“예니카, 애초에 너 그 정도 가지고 화내고 그런 성격도 아니잖아.”
“그렇지만, 자꾸 에드한테 찝적대잖아~!”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내뱉고 나니, 자기도 흠칫 몸을 떨고서는 갑자기 내 눈치를 본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예니카가 앉아 있는 의자 쪽으로 테이블을 밀어 주었다. 드르륵, 하고 테이블이 밀려가니 메이드가 타 온 차 한 잔이 똑바로 보였다.
예니카는 심호흡을 하고 호로록 차를 마시더니… 자기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그래도, 셀라하 황녀님이 참 미인이다, 그치.”
“하루 종일 들러붙어 있는 시종이 몇 명인데, 그 정도 관리는 해 주겠지.”
“에드를 포섭하고 싶어서 오기가 생기신 것 같아… 어떡해…? 그렇게 계속 거절하면 해코지하는 거 아니야?”
예니카가 그리 말하며 내 눈치를 은근하게 보았다. 묘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이참에 확실하게 이야기해 두기로 했다.
“말해 두는데, 나는 셀라하 황녀님 쪽으로는 절대로 안 붙는다.”
“그, 그 정도야…? 에드가 페니아 황녀님을 그렇게 지지하는지는 몰랐네. 학생회장 선거 때도 그렇구….”
“그것도 그렇고, 뭐… 이유는 복잡해.”
나는 그리 이야기해 두고, 아까 말하려다 말았던 것들을 이어 나가기로 했다.
“그래서? 저택 쭉 훑어보니까 성과는 좀 있었어?”
“응. 저택이 엄청 커서 번거롭긴 했지만… 머그가 정보를 좀 물어 왔어.”
“머그가?”
“크레핀 공작의 개인 서재 아래쪽에서 이상할 정도로 많은 마력 반응이 느껴진다더라. 그런데… 저택 구조상 서재 아래쪽은 취사장이란 말야. 사용인들이 일하는 취사장에 그런 막대한 마력이 느껴질 일은 없거든.”
“…확실히, 수상하네.”
크레핀의 악행을 고발할 만한 물적인 증거를 수집하는 게 핵심적인 목적이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찾아내는 게 쉽지는 않을 테지만, 실마리는 좀 생긴 기분이다.
“직접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런데… 그 서재는 크레핀 공작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곳이고, 또 비어 있을 땐 항상 꽁꽁 잠겨 있는 것 같아. 쉽게 조사해 보기는 힘들 것 같아.”
“그래. 일단 시간은 닷새나 있으니까 천천히 기회를 엿보자. 나도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사교회 일정에 최대한 성실하게 참석할 테니까.”
닷새 동안 할 일이 산더미다.
사교회 일정에 성실히 참가해 날 의심할 여지를 주지 않아야 하고, 이제 와서 날 복권시키려 하는 크레핀의 의중이 뭔지 알아내야 하며, 크레핀의 서재 아래쪽에 있는 마력원의 정체도 조사해 보고, 밤이 되면 책상에서 발견한 편지들도 최대한 빨리 읽어 두어야 한다.
아직 아르웬과 에드 사이에 오갔던 편지는 채 절반도 읽지 못했다. 대부분이 의례적으로 안부를 묻는 것들이라 좀 분류할 필요가 있었다. 애초에 편지 내용을 파악하는 데 들일 시간이 충분하지도 않았다.
오늘처럼 매번 밤을 새고 있으면 사용인들도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더 시간을 쪼개서 쓸 필요가 있다. 절대 의심받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이미 크레핀은 나를 경계하고 있을 테니, 사소한 기행도 곧바로 그에게 보고가 들어갈 것이다.
“방문은 항상 열어 둘 테니까, 일 생기면 언제든지 내 방으로 와서 이야기해 줘도 돼. 낮이든 밤이든 아무 때나 상관없으니까, 여기 위치 잘 기억해 둬.”
“여, 여기…? 에드 방에…? 언제든지?”
예니카는 또 괜스레 얼굴을 붉히고선 내 방 전경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선 얼른 끄덕거렸다.
“아, 알았어….”
묘하게 더듬는 모습이 썩 불안했다.
* * *
로스테일러 사교회 1일 차 밤.
사교회 일정은 첫날이 가장 단출하다.
조금씩 일정이 진행될수록 찾아오는 귀빈의 숫자도 늘어나고, 회장도 더 거대한 곳으로 옮겨 가기 때문이다.
닷새간의 긴 일정을 앞두고 조금씩 흥을 돋워 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첫날 사교회 참석자들도 대부분 흥이 올라 있다기보다는 앞으로 있을 행사를 기대하며 간단하게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다.
저택 1층 로비에 깔끔하게 차려진 만찬과, 조용한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 그리고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와인 잔을 부딪치는 귀족들.
여기저기서 잡담을 나누는 소리와, 하하호호 웃는 소리, 가볍게 춤을 요청하는 목소리 따위가 들려왔다.
이미 로비에 모여 있는 사람들만으로도 제 영지에선 이름 좀 날리는 귀족들이 가득했지만, 그들조차도 함부로 자리의 중심이 되려 하진 않았다.
아직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이름난 사람들이 꽤 와 있기 때문이다.
특히 통통한 체형에 멋들어지게 옷을 차려입은 자훌 변경백 주변에 변방 귀족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는 제국 남단의 커다란 곡창 지대를 혼자서 관리할 정도로 클로엘 황제의 총애를 받는 자였다.
한참 동안 자훌 변경백을 중심으로 여러 담화가 오갔고, 이내 분위기도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무렵이었다.
인파 사이를 가르고 서리의 황녀, 셀라하가 입장했다. 좌중 사이에 차가운 정적이 감돌았다.
순백색 드레스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셀라하는 어찌나 아름다운지, 젊은 귀족부터 나이 지긋한 부호까지 모두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단아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기품을 흘리며, 인파를 뚫고 중심으로 걸어 나온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먼저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어중간한 약소 귀족 따위가 말을 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상대는 황족이다.
그렇다고 이토록 고귀한 손님을 외롭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좌중에서 그나마 급이 맞는 자가 총대를 메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누가 서리의 황녀 셀라하를 상대한단 말인가. 아직 첫날이라 귀빈들이 채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그나마 그 상대가 될 만한 자를 추려 보아도 썩 만족스럽지가 않다.
“안녕하세요, 셀라하 황녀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때, 로비의 한 구석에서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타냐가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깔끔한 프릴 드레스를 예쁘게 갖춰 입은 타냐는, 양 스커트 자락을 슬쩍 올리며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현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 후계자, 타냐 로스테일러라고 합니다.”
“오, 반갑구나. 내 안 그래도 오후에 공자를 만나고 오는 길인데, 공녀까지 보게 되니… 확실히 듬직해. 로스테일러 가문의 위광도 최소 몇십 년은 거뜬하겠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아직 첫날이라 회장의 규모가 단출한 점을 사과드려요.”
“뭐,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주최하는 사교회에 대해서 내가 모르진 않지. 가면 갈수록 방대해진다는 소문도 잘 들었고, 애초에 내가 너무 일찍 온 것이니 너무 괘념치 않아도 좋아.”
셀라하는 빙긋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엔 이것만으로도 휘황찬란한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만한 귀빈들을 모아 놓고 선보인 만찬치고는 확실히 규모가 작다.
이 또한 나중의 행사를 위해 템포를 조절하는 것일 테니, 셀라하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 ‘저, 저 소년인가― 이번에 복권한다는 옛 후계자.’
― ‘확실히… 인상이 좀 드센 편이군. 근데 옛날에 비해서 체격이 좀 커진 듯한데.’
― ‘훨씬 총명해진 것 같아. 정말 완전히 다른 사람 같군그래.’
그때, 좌중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입장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제일 고귀한 소녀인 셀라하를 놔두고, 호들갑을 떨어 대며 입장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저 크레핀의 옆자리에 서서 그와 담화를 나누며, 조용히 만찬 자리에 참석했다.
그러나 일순간 좌중의 시선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깔끔하게 올백으로 올려세운 금발 머리를 보니 평소와는 인상이 완전히 다르다.
잘 차려입은 갈색 연회용 재킷엔 여기저기에 금줄이 달려 있다. 딱 핏이 맞아떨어져서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잘 보면 어깨도 꽤나 큼직하고 키도 생각보다 훤칠해진 것이 전형적인 미남상이었다.
‘호오, 차려 입혀 놓으니 확실히 인상이 확 달라지는군.’
셀라하는 씩 웃고서는 타냐와 함께 잔을 부딪쳤다.
“좋은 오라비를 두었구나.”
“네, 자랑스러워하고 있답니다.”
셀라하는 그것을 빈말로 여겼지만, 타냐 딴에는 꽤나 진심이었다.
“그래, 이 자리가 그에게 있어선 큰 기회이겠지. 부디 많은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구나.”
잔을 조신하게 입에 가져다 대며, 셀라하는 빙그레 웃었다.
어쨌든 첫날에는 이렇다 할 귀빈도 많지 않다. 셀라하의 눈에 밟히는 사람이라 봐야 시니르 블룸리버 정도다.
시니르 또한 로스테일러 가문과 그리 큰 접점은 없어서, 오히려 셀라하 쪽으로 시선이 쏠려 있는 느낌이다.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관심사라 해 봐야 딱 그 정도인 것이다. 셀라하는 잔을 홀짝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첫날의 연회라 해 봐야 규모도 단출하고, 눈에 띌 정도로 큰 행사도 없다. 아직 전초전일 뿐이다.
오늘 밤이 지나고, 제대로 거물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면, 셀라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것이다.
어떻게 보면 순수하게 연회를 즐길 만한 날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음식의 맛이 더 좋게 느껴져, 셀라하는 한동안 연회의 분위기에 취해 시간을 보냈다.
* * *
사교회 2일 차 아침.
조찬을 마치고 슬슬 아침 해가 안개를 걷어 내는 시간이었다.
그 전날 밤에 있었던 연회는 꽤 일찍 마무리됐다. 서로 간에 분위기를 좀 파악하고, 얼굴을 터 둘 뿐인 시간이었다.
방문객들은 오전 중에는 각자 배정받은 방에서 쉬고, 오후에는 정원이나 저택 옥상, 근처 언덕 등에서 다과를 좀 즐기다가, 저녁 식사 이후엔 본격적으로 다음 연회에 참석하게 되는 것이다.
로스테일러 영지의 자연환경은 아리땁고도 온화하여, 주변을 거닐기만 해도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다.
그러니, 다소 일정을 널널하게 잡아 놓아도 방문객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사용인들은 바쁘고 정신 없겠지만, 매년 하는 연례 행사가 되다 보니 꽤나 능숙하게 대처하는 느낌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바쁜 것은 역시 가주 크레핀 로스테일러였다.
매번 이름난 귀빈이 저택에 들어올 때마다 직접 나가서 환대해 주어야 했다.
어지간한 약소 귀족들은 크레핀의 얼굴조차도 볼 수 없겠지만, 그래서는 안 될 귀한 몸의 귀빈들도 분명 있었다.
서리의 황녀 셀라하가 그랬으며, 자훌 변경백이 그랬고, 시니르 블룸리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일 차 오전에 도착하는 귀빈은 그중에서도 그 고귀함이 완전히 궤를 달리하여, 크레핀은 물론이고 에드와 타냐까지 끌려 나가서 도열해 있어야만 했다.
대륙 최고의 권세가,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가 그 직계 존속까지 전부 끌고 나와서 환대해야만 할 대상이라고 하니… 현실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철제 창살로 이루어진 저택의 정문이 열리고, 그 으리으리하게 거대한 마차를 보고 나면 실감이 나고 만다.
에드는 그 마차를 이미 본 적이 있다.
―끼리리리릭, 끼익.
마차가 멈춰 서고,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흡사 군 장성이라도 행차하는 듯한 모습이다.
마차를 몰던 시중 하나가 얼른 마부석에서 뛰어내려, 마차의 문으로 이어져 있는 계단을 올라가 정중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내부에서 성복을 차려입은 대주교, 새뮤얼이 먼저 얼굴을 내밀었다.
호리호리한 인상과 더불어서 조금 음침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썩 익숙하지는 않은지 시종의 안내를 받는 모습에서 쭈뼛거리는 기색이 느껴진다.
그는 원래 대주교였던 베르디오가 파문당하면서, 그 후임으로 올라온 신임 대주교다. 아직은 대주교 자리가 익숙치 않은 것이다.
그렇게 대주교 새뮤얼이 마차의 계단을 타고 내려오니, 그다음으로 문 안에서 진짜 귀빈이 몸을 드러냈다.
― ‘오오.’
― ‘저분이…!’
― ‘시,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야…!’
사용인들 사이에서 수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들렸으면 옆에 서 있는 크레핀에게도 들렸을 것이다. 큰 실수를 범한 것이지만, 크레핀은 현장의 분위기를 생각해 당장에 호통을 치지는 않았다.
베테랑 사용인들마저도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범할 만큼, 마차에서 내려온 인물의 위용은 놀라웠다.
체구는 왜소하나, 몸에 흐르는 신성한 기품은 가히 범접할 수가 없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드레스 느낌의 성복이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그 성복만큼이나 새하얀 머리칼이 어깨를 감싸 안고 있다. 온통 새하얀 소녀이지만, 그 존재감 넘치는 눈동자와 한쪽 머리에 낀 나비 핀만큼은 한없이 붉어서, 마치 설원에 홀로 고고히 핀 장미 같다.
성도 클로에론의 꼭대기에서 신의 뜻을 대변하는 성녀, 클라리스가 고고히 지상으로 내려온다.
“긴 여정이었을 텐데, 이렇게 방문해 주시니 한없이 영광스럽습니다. 클라리스 님.”
“오랜만이네요, 크레핀 경. 그간 더 건강해지신 것 같아 마음이 편해요.”
그렇게 클라리스는 크레핀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나와 타냐 쪽을 바라보았다.
“이쪽은 제 공식적인 후계자 타냐 로스테일러와, 이번 사교회에 복권한 아들 에드 로스테일러입니다. 성녀님께서도 실베니아에 재학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구면이실 테지요.”
“네. 타냐 양은 자랑스러운 학생회장이시고, 에드 선배님 또한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님이시지요.”
에드 선배님.
크레핀조차도 경이라고 부르며 맞대응하는 성녀 클라리스가, 에드를 존칭하는 모습.
최대한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 호칭만으로도 좌중에는 묘한 위화감이 감돌았다.
클라리스는 빙긋 웃고는 크레핀을 지나서, 타냐 쪽으로 와 악수를 나누었다.
“서, 서, 성녀님….”
“항상 학생회장으로서 힘써 주신다고 고생이 많으셔요, 타냐 양. 늘 지켜보고 있답니다.”
“가, 감사해요….”
늘 지켜보고 있다는 말은 성녀로서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진짜다.
물론…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는 타냐는 그저 우러러보는 시선으로 성녀에게 인사를 보낼 뿐이었다.
클라리스는 그렇게 눈웃음을 짓고, 그다음엔 내 쪽으로 와서 악수를 건넸다.
“이렇게 선배님의 본가에서 만나 뵙게 되니, 또 기분이 각별하네요. 마치 머나먼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것 같은 낭만이 느껴져요.”
“영광입니다.”
“영광이긴요. 제가 영광이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악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상급자의 악수를 먼저 밀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므로, 그렇게 가만히 손을 풀기를 기다리고 있었건만… 클라리스는 오히려 다른 한 손까지 덥석 올려서 내 손을 잡아 쥐더니, 별이라도 쏟아질 듯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
“…….”
그렇게 클라리스는 주변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한참 동안 내 손을 꽉 쥔 채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지면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크레핀과 타냐, 사용인의 미간이 조금씩 좁아지기 시작했다.
사교회 2일 차.
벌써부터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할 기미가 보여, 등줄기가 조금씩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