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48)
금의환향 (6)
‘대의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고, 발전에는 대가가 수반되는 법이죠’
윤기가 넘쳐 흐르던 금발은 어느샌가 푸석푸석해지고, 영롱하던 눈동자도 어느덧 혼탁해져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아랑곳 않고 웃으며, 테라스에 다소곳이 앉아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 보곤 했다.
저택의 높은 곳에 위치한 아르웬의 방에서 바라본 로스테일러 영지의 풍경은 아름답다. 낙원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싶을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다.
‘앞만 보세요, 아버님. 굳이 신경쓰지 않으셔도 저는 제 역할을 할테니.’
눈부신 광휘가 테라스에 앉아있는 아르웬의 뒷모습을 뒤덮을 때 즈음-그제서야, 크레핀은 눈을 떴다.
“…”
상반신을 일으켜 주변을 보면,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가장 호화롭고도 커다란 방. 가주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침실이다.
성녀 클라리스를 맞이한 후, 오전 일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잠시 눈을 붙이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봐야 삼십 분 남짓밖에 눈을 붙이지 못했지만, 크레핀은 스스럼없이 몸을 일으켰다.
약간 노곤한 느낌은 일상처럼 짊어지고 산다. 이 정도 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기분은 썩 좋지 않다.
잊을만 하면 무의식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 꿈. 그 광경을 되새길 때면, 기분 나쁜 헛구역질이 목을 타고 올라오려 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인 그의 눈에 독기가 서린다.
감정의 변동을 굳이 표정으로 내비치는 일은 없는 사람이지만, 개인 침실에 홀로 앉아 있을 때마저 그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을 이유는 없다.
노곤한 기분에 아직 좀 더 휴식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다. 허나 2일차로 접어든 사교회도 본격적으로 그 규모를 늘려갈 시기다. 크레핀도 이리저리 신경 쓸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은 시기인 것이다.
언제나 눈엣가시 같던 대연금술사 발베른이 도착하기까지 이틀. 그 전까지는 이 장대한 사교회를 잘 유지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도 잠깐의 휴식 정도는 그리 대단한 사치도 아닐 터.
크레핀은 그렇게 잠시간 침대에 앉아, 독기 어린 눈으로 시트를 내려다 보았다.
*
온갖 유력자들이 다 모여든다는 로스테일러 사교회에서도 성녀 클라리스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언제나 성황도에서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 성녀다. 대면할 수 있는 기회는 제 아무리 고위귀족이라 할지라도 흔치 않다.
정치적 영향력이 강대한 인물은 아니지만, 종교적 상징으로서는 대륙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 그나마도 대륙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인지라, 텔로스 교단 내부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성황 엘데인이 아니면 그 누구도 그녀를 제어할 수가 없다.
사교회에 몰려든 온갖 귀빈 중에서도 가히 세 손가락 안에 무난히 들어갈 정도의 인물이니 만큼, 그녀에게 온갖 관심사가 쏠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로스테일러 저택에 도착한 그녀가 어떤 일과를 보낼지에도 관심의 눈길이 쏟아졌다.
가주의 방 만큼이나 으리으리한 방을 배정받은 그녀는, 저녁 만찬회에 참석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을 터.
참석객들이 모두 여유로운 오후 시간. 성녀 클라리스는 그 시간을 이용해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단순히 여가 시간을 때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성녀 클라리스가 누구를 가까이하고,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가진 이야기를 주고 받는지에 따라, 권력 구도가 재편될 수도 있는 사안이다. 그녀의 지지는 정치적으로 너무나도 큰 의미를 가진다.
그렇기에, 야망가 기질이 강한 셀라하는 이미 연줄을 대 두었다.
“향설란의 꽃말은 순결, 순진함, 영원한 우정입니다. 성녀님과 이토록 어울리는 꽃은 없지요. 또, 두 분의 원만한 관계 발전을 기원한다는 뜻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역시 선물 고르는 센스가 좋구나, 데스트.”
“과찬이십니다.”
셀라하의 칭찬을 가볍게 받아넘긴 데스트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셀라하는 아름답게 장식된 꽃다발을 받아들고 그 향기를 한 번 맡아보았다. 셀라하는 향긋한 꽃내음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굳이 그걸 티 낼 필요는 없었다.
“새뮤얼 대주교에게 미리 언질을 해두었으니, 어렵지 않게 클라리스 성녀와는 대담을 나눌 수 있겠지. 처음부터 너무 과하게 다가갈 필요는 없고, 그저 좋은 인상만 남겨두도록 하자꾸나.”
아직 모든 귀빈이 다 로스테일러 저택에 모이지 않았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귀족들이라 할지라도, 성녀 클라리스와 급이 맞을만한 인물은 결국 서리의 황녀 셀라하 뿐인 것이다.
성황도 입장에서도 이번 기회에 셀라하와 안면을 터두고 싶을 터. 제 아무리 저쪽이 성황도 최고의 권위를 가진 자라 할지라도, 이 쪽은 유력한 차기 황권 주자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하는 입장이니만큼, 셀라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기로 했다.
시종들을 잔뜩 대동한 채 복도를 걷고 있노라면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각각의 귀족들도 본인의 영지에 돌아가면 모두 자리의 중심이 될만한 신분이건만, 셀라하 앞에서는 지나쳐 가는 배경에 불과하다.
권위에서 나오는 기품 탓에 말을 붙이는 것조차 힘들다. 그나마 급이 좀 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만 안부를 묻거나, 날씨가 좋다며 한 마디 던져볼 뿐이었다.
셀라하는 품위있게 웃으며 그런 시선들을 모두 받아낸 뒤, 이윽고 성녀 클라리스가 머물고 있을 방을 향해 계속 걸어나갔다.
그 방향을 보고서 뭇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뭐라해도 클라리스 성녀와 가장 먼저 일정을 보낼만한 사람은, 이 로스테일러 저택의 방문객 중에 유일한 황족인 셀라하밖에 없는 것이다.
“성녀님은 지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퇴짜를 맞은 것이 5분 뒤였다.
“…뭐라?”
쭈뼛거리며 시선을 내리깔고 이야기 하는 새뮤얼 대주교는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 노발대발 화를 내서야 촌스러울 뿐이다. 다만, 지긋한 시선으로 새뮤얼을 바라보며, 이야기가 다르지 않냐고 무언의 추궁을 했다.
성녀의 방을 지키는 성당 기사 둘이 늠름하게 문을 가로막고 있고, 그 앞에 새뮤얼 대주교가 안경을 난처한 듯 안경을 까닥대고 있었다.
“셀라하 황녀님이 계신다는 언질을 몇 번이고 은근하게 드려보았습니다만, 모든 간언을 무르시고 다른 분을 만나러 곧바로 떠나셨습니다.”
“떠나셨다니… 성녀님의 거처로 그 사람을 부르는 게 아니라, 성녀님께서 직접 만나러 행차하셨다 이 말인가?”
이례적인 일이다.
이 로스테일러 저택에 성녀를 더러 오라가라 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리가 없다. 그나마 가능성이라도 생각해보자면, 사교회를 주도하는 가주 크레핀 정도일까.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크레핀 경이 성녀님을 불렀느냐?”
새뮤얼 대주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튀어나온 이름에, 셀라하는 미간을 좁히며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칼도른산 철제 대검이네요. 이런 걸 방 중앙에 세워두니까 굉장히 살풍경한 느낌이 드는걸요…”
장소는 저택 고층에 있는 아르웬 로스테일러의 방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지 한참이 지난 사람의 방을 아직까지 그대로 남겨놓고 있는 것이 참으로 특이하다.
하긴, 한참 전에 파문당했을 내 방도 그대로 남아있는 걸 보면… 이 으리으리한 저택에 남아도는 공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풍경이 좋고, 널찍하게 잘 빠진 방을 그대로 남겨놓는 것은 아깝지 않은가.
아무래도 크레핀의 특별한 명이 있었기에, 그대로 방을 내버려두고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해볼 따름이다.
“성녀님…”
클라리스는 방을 배정받자마자 온갖 귀빈들의 요청을 싹 다 물리친 채 내 방에 들이닥쳤다.
정 만나려면 그냥 나를 방으로 부르면 될 것을, 괜시리 서프라이즈랍시고 직접 나타나서 내 손을 맞잡고 손등을 꾹꾹 눌러대는데, 주변의 시선이 무거워서 죽을 뻔 했다.
오늘은 저택 구조를 둘러볼 계획이었다고 말하자, 클라리스는 아예 나를 따라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결과, 성녀 클라리스에게 로스테일러 저택을 소개해준다는 명목으로 오후 내내 같이 다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온갖 귀빈들이 눈알이 빠져라 쳐다보는 시선은 감내해야만 했다. 아마 저녁 만찬회가 되기 전에 저택 전체에 소문이 다 나겠지.
“성녀님은 일거수일투족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그 사실을 의식하고 행동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성황도의 인파에 파묻혀있을 시기엔 그랬죠.”
클라리스는 아르웬의 방을 둘러보던 발짓을 멈추고, 휙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은… 실베니아의 물을 너무 많이 먹었나봐요.”
그렇게 말하고 베시시 웃는 모습. 고귀하디 고귀한 신의 사자와는 거리가 영 멀다.
“그리고… 흥이 좀 오르는걸요. 좀이 쑤셔서 방에 못 있겠지 뭐에요. 겨우 몇 시간 가지고 이렇게 들뜨다니… 참 묘한 일이에요. 부활절 기간에는 내리 12시간을 기도하기도 하는데 말이에요.”
“뭣 때문에 그렇게 흥이 오르신겁니까?”
“에드 선배님의 본가잖아요.”
빙긋빙긋 웃으며, 내 양손을 잡아 올린다.
“실베니아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고… 또, 에드 선배님이 이런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생각하니 각별한 느낌이 들어서요.”
“사실 어디가서 자랑할만한 유년기를 보내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을 더 만들면 만들었지요.”
“그 또한 제가 몰랐던 모습들이죠. 원래 사람은 알면 알수록 깊다고 하잖아요. 에드 선배님도 제가 성황도에서 기도회를 주관하는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실 걸요?”
그리 말하고, 성호를 긋더니 양손을 맞대고 장난스럽게 한쪽 눈만 감아보인다. 새침데기 같은 모습에 성스러운 신의 대리인은 간데 없다.
오히려 실베니아에서의 두 번째 신분, 카일리 에크네가 생각나는 언동이다.
대중의 앞에서는 성스럽고도 단아한 모습이지만, 단 둘이 남았을 때는 귀신같이 그 나잇대 소녀같아 지는 것이, 산전수전 다 겪은 나도 흐름을 따라가기가 영 버겁다.
“솔직히 걱정도 좀 했었어요.”
아르웬이 썼을 침대에 걸터 앉은 클라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드 선배님이 복권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뛸 듯이 기뻤지만, 썩 좋은 대우를 받진 못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뭐, 애초에 전 그리 평가가 좋은 사람도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지요.”
“그래서… 에드 선배님을 향해 해코지하거나, 불쾌한 언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혼쭐을 내주려고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고, 클라리스는 높은 천장을 바라보고서 발꿈치를 툭툭 땅에 부딪혀댔다.
“여기가, 에드 선배님께서 이야기 하셨던… 아르웬 로스테일러가 지냈던 방이군요.”
“예.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걸 보니 참 신기합니다.”
“좋으신 분이었단 소문이 자자해요.”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내가 들어오기 전 에드 로스테일러에게는, 각별하고도 우러러 보이는 사람이었을 터.
책상 밑에 있는 편지를 벌써 반절 가까이 읽었다. 주고 받는 대화에서 그녀를 향한 경의가 여실히 느껴졌다.
다만, 그 편지를 싹 다 모아서 책상 밑에 보관해두었던 그의 저의는 무엇일까.
아직까지는 핵심적인 내용에 다다르지 못한 듯 해, 빨리 시간을 내서 진상을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방구석에 쳐박혀 편지만 읽고 있어선 의심을 산다. 최소한의 활동은 하면서, 크레핀의 의심을 털어낼 필요가 있다.
뭐, 그 과정에서 클라리스가 엮인 건 희소식인 셈이다. 적어도 소문만큼은 확실히 퍼졌을테니까.
“…그렇군요. 착잡하시겠어요, 에드 선배님. 제가 분위기 파악을 못했네요.”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다 지난 일입니다.”
그렇게 말해두고, 나는 아르웬 로스테일러의 방을 몇 번 돌아보았다. 정보가 될만한 것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호화로운 가구들 사이로 빗이나 머리핀, 화장 거울 따위의 소녀스러운 물건들이 눈에 밟힌다.
벽 한 켠에는 테라스로 이어지는 큰 유리문이 있고, 그 너머를 보면 로스테일러 영지의 한 구석이 아리땁게 시야에 들어온다.
절로 감탄이 나온다. 이 저택에서 가장 풍경이 좋은 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클라리스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서 테라스 쪽으로 나왔다. 풍경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놀라며,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좋은 곳이네요. 이런 곳에서 자라면 분명, 마음씨 또한 아리땁고 멋진 사람이 될 거에요.”
“…”
“아르웬 공녀 또한, 분명 그런 분이셨겠죠.”
클라리스는 나지막이 이야기하고, 문득 다시 내 양손을 잡아들었다.
“성녀님?”
“에드 선배님. 복권한 뒤로 정신이 없으시죠? 선배님 성격에 굳이 말로 하진 않으시지만, 묘하게 깔아보는 듯한 시선도 많이 느끼셨을테고요. 파문으로 인한 불명예가 워낙에 컸을테니까. 아직도 선배님을 망나니 보듯 하는 사람도 있겠죠.”
“어쩌겠습니까. 감당 해야할 일입니다.”
“혼자서 감당하려 하지 마요.”
클라리스는 잡은 양손을 그대로 제 가슴께에 올리고서는, 속삭이듯이 얘기했다.
“우리가 같이 감당하면 되잖아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사뭇 당황한 듯 보이자, 클라리스도 평정이 약간 흔들리는지… 묘하게 허둥대는 느낌으로 말을 이었다.
“으음, 그러니까… 제 권위를 이용하시란 말이에요. 오늘 밤 만찬회에서 제 옆을 계속해서 지키시면 함부로 에드 선배님을 깔아보거나, 경계하는 사람은 없을테고…”
“그렇게 당당하게 자기를 이용하란 말씀을 하시면, 흔쾌히 수락하는 사람이 이상한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좋은 게 좋은 거란 거죠. 이왕이면 에드 선배님이 득볼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면 좋잖아요? 그 와중에 겸사 겸사 저도… 음…”
클라리스는 뭐라 말을 더 이으려다 말고, 한숨을 푹 쉬었다.
“에휴… 쓸 데 없이 이런 저런 당위성을 가져다 붙이려 하니까 말만 꼬이네요. 그래요, 구구절절 이유를 붙이진 않을게요.”
“…”
“오늘 밤 파트너가 필요해요. 만찬회에서 한 곡 추실래요?”
그렇게 휙 말을 던진 클라리스는 눈을 맞추고 있다가… 문득 시선을 내리깔아버린다.
“왜냐면 그렇게 관계성을 과시해두는 게 에드 선배님의 위상에도 좋을테고, 또 뭐… 제 입장에서도 좋은 점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좋은 점이 더 많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당위성 가져다 붙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는지…?”
“이런 부분에서까지 예리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에드 선배님.”
그리고 손을 탁 놓더니, 내 양 어깨를 잡고선 까치발을 들어올리는 것이다. 그리고선 귓가에서 속삭이듯이 이야기 한다.
“어쨌든, 오늘 밤 만찬회에선 누가 오든 간에 춤 신청을 전부 거절할 거에요.”
빙그레 웃으며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한 사람만 빼고요.”
한낮의 테라스. 누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슬아슬한 감각. 당장 아르웬의 방문 앞부터 성당 기사들이 지키고 있다.
오히려 이 미묘한 위기감을 즐기는 것인지, 클라리스는 큭큭대며 웃고는 뒷걸음질 쳤다.
“전 이만 가볼게요. 다른 귀빈들도 만나긴 해야하거든요. 에드 선배님을 가장 먼저 만나러 달려온 것만으로도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요.”
“썩 좋은 일은 아닐텐데요.”
“그렇게까지 썩 나쁜 일도 아니에요.”
그리 시원스럽게 이야기하고, 클라리스는 휙 몸을 돌렸다.
─문득 테라스 입구 쪽을 보니,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인 타냐가 서있다.
“…”
“…”
“아아아아아, 안녕하세요. 서서서성녀님. 이따가 저녁 만찬 때 오라버니께서 입을 연미복을… 확인해달라고 해서… 제 옷도 볼 겸 같이 가려고 왔는데…. 그…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아니, 보려한 건 아니고요.”
평소 같으면 클라리스가 더 놀라서 호들갑을 떨었을 상황이다.
그러나 클라리스는 숨을 가볍게 한 번 집어삼키더니, 어렵사리 웃어보이는 것이다.
이윽고 그 웃음기엔 편안한 마음마저 스며든다.
“어머, 계셨네요. 타냐 양.”
“그러고보니 이, 이름을 기억해주셨네요. 가, 감사해요…”
“그럼요. 저녁 만찬 때 이야기 많이 나눠요.”
이미 클라리스는 타냐에게 내적 친밀감이 잔뜩 쌓여있는 상태다.
물론 사정을 모르는 타냐는 어버버 거리며 고개를 푹 숙일 뿐이다. 그녀가 타냐의 말에 껌뻑죽는 카일리 에크네와 동일인물이란 사실을 알면 가장 먼저 자지러질 것이다.
클라리스는 그렇게 가볍게 대처한 후, 재빠르게 방을 떠났다.
“…오라버니…!”
실베니아 아카데미에서 봐왔던 것, 여기까지 오던 마차에서 봤던 것, 그리고 방금 테라스에서 봤던 것.
타냐는 하나 같이 벌벌 떨고만 있는 모습 밖에 안보였지만, 그렇게 떠는 이유는 각기 달랐다.
타냐는 테라스까지 종종걸음으로 뛰어들어와서는, 내 옷 카라의 깃 끝을 짧게 잡아 끌고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안색을 더 새파랗게 물들였다.
“타냐야…”
“어, 어쩌시려는 거에요…! 예니카 선배님에 루시 선배님에… 급기야 클라리스 성녀님까지 이러면… 저는 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되는 거에요…!”
동생된 입장에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일까. 온갖 경우의 수를 다 감안해가며 갖가지 미래를 그려본 듯 한데… 내 입장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됐다…”
타냐는 문득 현기증이 올라오는지, 머리를 짚고 뒷걸음질을 쳐댔다.
*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복도를 나서는 클라리스의 얼굴엔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혹여나 평정이 무너져내린 자기 표정을 호위 기사들이 볼까봐 고개를 휙 내리깔았다. 그게 큰 의미가 있을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어, 어쨌든… 일단 이 로스테일러 저택에서는 내가 가장 권위가 높아…!’
클라리스는 그렇게 되뇌였다. 물론 성녀의 권위에 버금갈만한 인물이 몇 있긴 하지만, 당장에 표면적인 서열로는 모두 성녀를 존대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마음만 먹으면 에드 로스테일러를 독점할 수도 있다.
듣기로는 루시 메이릴이나 예니카 페일로버도 이 로스테일러 저택에 와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 성녀의 권위를 무시하고 돌발행동을 할 수는 없다.
여기는 배움의 미덕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실베니아 아카데미가 아니다. 학년은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적어도 오늘 밤 만찬회만큼은… 날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
“마차에 안 타셔도 됩니다.”
황도 클로에론으로 가는 거의 모든 물자가 들렸다 가는 곳. 상업 도시 올덱.
오로지 돈의 논리로만 흘러가는 상인들의 도시에, 한 은발의 중년 남성이 마차 앞에 서있었다.
“뭐라고?”
마차에는 큼직하게 엘테 상회의 마크가 붙어있었다. 거대 상회가 잔뜩 늘어서있는 올덱의 상업 거리에서도, 그 이름값이 드높은 3대 상회 중 하나였다.
“엘테 상회 중앙 지부 소속 투자가, 롤란드 벨라트락스님 맞으시지요?”
마부는 그렇게 한 번 더 사내의 신원을 확인했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엘테 상회에만 몸을 담으며, 거의 대부분의 자금 관리를 직접 행해온 최측근.
회주가 가진 결정권한의 거의 대부분을 대리할 수 있을 정도로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었다.
“상사분께서 출장 명령서를 취소 처분 하셨습니다. 본점으로 돌아가 장부 업무에 다시 집중하시면 됩니다.”
“뭐라고? 무슨 출장 업무가 하루 만에 취소 처분 승인이 날 수가 있나? 이게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데. 뭔가 착각이 있었던 거 아닌가?”
“처분서를 확인해보시지요. 여기 있습니다.”
롤란드 입장에서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롤란드는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셀라하 황녀를 만나, 이런 저런 이권 분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었다. 엘테 상회 쪽에서는 유일하게 셀라하 측에 붙은 내통자인 셈이다.
롤란드는 마부로부터 처분서를 받아들고 내용을 쭉 확인해보았다. 내용은 마부가 했던 말 그대로였다.
이런 중요한 의사결정을 즉결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는… 아예 특정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이윽고 서류 하단에 찍힌 회주 대리의 인장을 보는 순간, 롤란드는 숨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이 분이 직접 가신다고? 안 그래도 학기 중에는 아켄섬에 계시느라 본점 업무를 거의 못보셨을 텐데…”
“바쁘신 분이지요. 저도 압니다만, 본인의 결정에 저희가 뭐라 하겠습니까.”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네. 확인해두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
“그럼 지금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뭐라고?”
마부가 고개를 휙 저어서 마차쪽을 가리켰다. 지금 마차에 타고 있단 소리였다.
롤란드는 고개를 스윽 들어서 마차 내부를 보았다.
호화로운 마차 내부에 홀로 로브를 쓰고 앉아있는 소녀가 있다.
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심기가 불편한 듯이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모습. 쭉 뻗은 다리가 간이 책상 끝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롤란드가 쉬이 말을 붙일 수조차 없는, 엘테 상회의 회주 대리.
간이 책상 위에는 거대한 책, 현자의 봉서가 펼쳐져 있지만… 소녀는 딱히 책을 읽는 것 같지도 않다.
“…굳이 이야기를 나누진 않겠네.”
롤란드는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마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롤란드 입장에서는 굳이 말을 걸어봐야 긁어 부스럼이었다.
일이 꼬여가는 것 같다. 롤란드는 그리 직감했지만, 당장에 손을 쓸 방법은 없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이지만… 로스테일러 저택의 상황은 꽤나 끔찍한 상황이었다.
고위 귀족이나, 유명 가문의 가주들. 혹은 유력가 출신의 유명인들. 황실의 제 1황녀까지.
거기에 고위 정령사, 희대의 천재 마법사까지 섞여 있고, 급기야는 텔로스 교단의 성녀까지 행차한 와중이다. 거기다가 엘테 상회의 회주 대리까지 끼얹고 나면 무슨 마경이 펼쳐질지는… 차마 상상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에드 로스테일러 입장에서는 크레핀과의 신경전, 탐색전에 불과한 사교회일지도 모르겠으나…
좋든 싫든 그의 의도와는 완전히 엇나간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 뻔했다.
이르기를 아수라장이다.
애석하게도, 모두 크레핀 로스테일러가 감당해야할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