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49)
금의환향 (7)
이후 사교회 일정이 진행되는 동안은 계속해서 소문만 무성했다.
성녀 클라리스는 일정 중 시간이 날 때마다 사적으로 에드 로스테일러를 만나러 다녔고, 고위 귀족들에겐 마치 로스테일러 가문과 성녀 사이에 모종의 접점이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사실 대륙 최고의 권세가 정도 되면, 성황도 측과 어느 정도 교류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다.
물론, 주교 정도 급이 아니라 아예 교단의 성녀와 엮여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만.
“한 곡 추시겠습니까.”
“어머, 에드 선배님. 제 영광이죠.”
화룡점정은 밤에 열린 만찬회였다.
2층에 준비된 홀에서 진행된 만찬회는 어림짐작으로만 판단해 보아도 1일차 만찬회에 비해서 두 배는 규모가 커졌다.
2일차에 도착한 귀빈들과 더불어서, 더 철저하고 호화롭게 준비된 여러 음식과 음악들. 그리고 홀 외벽에 걸린 온갖 공예품들. 중간중간에 준비된 무대에서는 온갖 이야기꾼과 재주꾼들이 나와서 파티의 흥을 돋우고 있었다.
나는 성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인지라, 차라리 당당하게 성녀에게 다가가 춤을 신청했다.
어쨌든 로스테일러 가문의 일원으로서 당당히 인정받으면 좋은 점이 많다. 권위와 권세는 물론이고, 크레핀 로스테일러가 나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게 된다.
성녀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은 당장 내 안전에도 직결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 ‘저기 봐, 이번에 가문에 복권한 그 망나니다.’
― ‘나는 어제 파티에도 참석해서 미리 봤어.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던데.’
― ‘아무리 그래도, 그 막 나가던 본성이 어디 갔겠어.’
워낙 악명이 드높았던지라, 귀빈들 사이에서는 썩 좋은 소리가 오가진 않았다.
그 수군거림이 클라리스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내 품속에서 이리저리 리듬에 맞춰 몸을 이끌던 클라리스의 표정은 썩 좋진 않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듯한 포즈로 클라리스에게 속삭였다.
“그리 마음 상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 표정이 그리 안 좋았나요?”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긴 했습니다.”
“그냥… 제가 괜한 짓을 했나 싶어서요.”
나는 음악에 맞춰서 클라리스의 발을 따라갔다. 클라리스도 춤이 썩 익숙하지는 않은지 버벅대는 느낌이었으나, 나는 그럭저럭 몸을 잘 틀어 가며 클라리스의 움직임에 맞춰 줄 수 있었다.
확실히, 이렇게 갑자기 클라리스 같이 드높은 신분과 엮이고 나니 필요 이상으로 시선이 쏠리는 느낌이 든다.
천천히 귀족 사회에 다시금 섞여 들어갔을 수도 있는데… 갑자기 클라리스의 위광을 받게 되어 오히려 더 사람들의 모진 눈빛을 받아 내게 된 느낌이다.
클라리스는 그런 부분이 썩 신경 쓰이는지, 춤을 추면서도 표정이 영 좋지가 않았다.
“괜찮습니다. 성녀님. 어찌 됐든 제게 큰 도움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좋겠지만요. 혹여나 또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 주세요. 사교회 일정 동안은 마지막 날까지 쭉 이 저택에 머무를 생각이니까. 만나야 하는 사람도 많고요.”
클라리스는 크레핀 로스테일러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귀빈 중의 귀빈이다. 그녀의 권위가 있다면, 중요한 시점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음악이 끝나고, 춤을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다. 클라리스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옷소매를 당겼다.
“모처럼 이렇게 춤출 기회가 왔는데, 걱정이나 하다가 시간을 보냈네요. 에휴….”
그리 말하고, 클라리스는 잡은 손을 풀어 주었다. 가냘픈 손가락이 창백해 보인다.
“아직 사교회 일정은 많이 남았으니까, 또 이야기 나눠요. 선배님.”
“영광입니다. 클라리스 성녀님.”
나는 클라리스를 자리로 보내 준 뒤 인파의 중심에서 빠져나왔다.
뚫어질 듯이 나를 쳐다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무거웠다. 그중에서는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도 몇 있었는데, 나는 의례적인 대답을 하며 그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두 번째 밤이 끝나고 셋째 날이 밝아 오면, 이 로스테일러 가문의 기나긴 사교회 일정도 어느덧 반환점을 돌게 된다.
벌써 절반이 넘게 사교회의 일정이 지나가고 있지만, 성과라 할 것은 별로 없다.
첫날에는 몸을 좀 사렸다. 도착하자마자 섣부르게 움직였다간 의심을 살 수 있으니.
허나 둘째 날부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계획이다. 시간은 무한하지가 않다.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로스테일러 저택으로 돌아온 이유는,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악행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찾기 위해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불로불사의 마법에 손을 대기 위해 온갖 잔혹한 실험을 자행해 왔다는 것이다.
사용인들의 목숨을 담보로 악신의 힘을 시험하기도 하고, 황실을 속여 금지된 약품을 들이기도 하였으며, 어린아이들까지도 죽여 대는… 그야말로 불사에 미친 광인이다.
성위 마법에도 관심을 가지는 이유 또한, 그 시간의 힘이 불로불사의 힘과 연관이 없진 않기 때문이겠지.
목적을 위해서 연구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연구하려는 광인이다. 자애로운 공작의 모습은 껍질에 불과하다.
어쨌든, 그 정도 규모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면… 숨겨 놓은 연구시설이나 비밀 창고 같은 것이 분명 존재할 터다. 관리하기 쉽고 자주 드나들 수 있는, 자기 저택 안에 마련해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바빠 보이는구나. 에드 로스테일러.”
내가 빠른 걸음으로 인파를 헤치고, 파티장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어렵사리 파티의 중심이 되었는데, 왜 조금이라도 귀빈들이랑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않는 것일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득한 와중에, 셀라하 황녀가 말을 걸어온 것이다. 화이트 와인이 담긴 작은 잔을 한 손에 들고선, 한쪽 외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다시금 연회장의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귀족들은 체면이 있어 각자 다른 쪽에 관심을 돌리고 있는 척하지만… 은근한 곁눈질로 다들 내 쪽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셀라하 황녀님.”
“왜 내게 말을 거느냐는 듯한 눈빛이군. 아주 신선한 반응이야.”
성녀 클라리스와 독대 후, 만찬회에서 만나 춤까지 추고, 그다음엔 셀라하 황녀와 독대.
황권과 교권의 정점에 가까운 자 둘과 나란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뭇 귀족들의 관심을 몰아 받기에 충분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썩 표정 관리가 잘 되진 않는 상황이었다.
“그거 알고 있느냐? 일반 평민들은 나와 말 한마디 섞는 것만으로도 죽을 때까지 영광으로 여기며 살곤 하지. 그리 생각해 보면 썩 좋은 반응은 아니구나.”
“저 또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셀라하 황녀님.”
“할 일이 가득한데, 귀찮은 여자가 하나 엮였다는 듯한 표정이로군.”
쓸데없이 예리한 여자다.
나는 곁눈질로 테라스 쪽을 보았다.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나는 이 이후로 파티장을 은근슬쩍 빠져나가 밖에서 기다리는 예니카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그 뒤, 몸이 안 좋아졌다는 핑계로 방으로 돌아가면서 은근슬쩍 크레핀의 서재에 침입할 계획까지 수립되어 있었다. 이미 예니카와는 이야기가 끝난 상태다.
“이리 즐거운 연회를 두고 밖에 나가려 하는 건, 썩 현명한 판단은 아닌 듯한데.”
“고견 감사드립니다. 다만,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밤에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나올 생각이었습니다.”
“그런가. 클라리스 성녀님과 춤을 출 때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해 보이던데.”
그 말에 내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셀라하 황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후후, 농담이니 웃거라.”
“제가 유머 감각은 영 모자란 사람인지라.”
“나쁘게 말하자면 고루하고, 좋게 말하자면 진지한 것이겠지. 그래… 보아하니 여복이 좀 좋은 듯하구나.”
셀라하 황녀는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구석에 있는 악단을 살폈다. 슬슬 다음 곡을 연주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아리따운 바이올린의 선율이 시작되며, 그 뒤를 따라 여러 악기들의 선율이 조화롭게 소리를 드높여 갔다.
셀라하 황녀는 음악에 취한 듯 은근하게 다가와서,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런 장대한 파티를 뒷전으로 해 두고 나간다라, 안 봐도 뻔하구나. 전의 그 평민 여자와 한바탕 하러 나가는 것이겠지?”
예니카와 한바탕 하러 갈 예정이란 점은 정확하게 잘 맞췄다. 물론 셀라하가 상상한 것과는 많이 다른 형태가 되겠지만.
어쨌든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크레핀은 오전이든 오후든… 시간이 날 때마다 서재에 들르는 습관이 있다. 지금처럼 파티를 주최하느라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시간대가 아니면, 안전하게 그의 서재를 조사해 볼 시간이 나질 않는다.
“누누이 말했지. 급이 맞는 자와 어울리는 습관을 들이는 게 네 출세에도 좋다고.”
“고견 감사드립니다. 잘 감안해서 신중히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디 그게 빈말인지 아닌지 한번 시험해 봐도 좋겠느냐?”
“예?”
셀라하는 와인 잔을 연회용 테이블 위에 대충 툭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 무게 중심을 잃은 와인 잔이 흔들거리다가, 이내 테이블 위로 쏟아지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주변 사람들이 놀라고, 아주 잠깐 연회장 내의 시선이 쏠렸다.
쏟아진 와인이 비싼 테이블보를 적시고,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빠르게 다가와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류 사용인들이니만큼 일 처리가 재빠르다. 허나, 이미 한번 쏠린 이목까지 정리할 수는 없다.
그 틈을 타 셀라하 황녀는 당당히 이야기한 것이다.
“나랑도 한 곡 추겠느냐?”
좌중에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보아하니 춤 실력이 좋더구나.”
그 사이에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클라리스의 모습 또한 보였다.
춤 신청은 남자 참석인이 여자 참석인에게, 이왕이면 신분이 상대적으로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먼저 청하는 것이 예의다.
신분도 더 드높고, 여성인 셀라하가 당당하게 춤 신청을 하는 모습도 썩 평범하진 않은데다가, 그 대상이 방금 성녀 클라리스와 한 곡 추고 나왔던 바로 나다.
성녀랑 엮이는 것만으로도 이목이 쏠리는데, 셀라하와 한 곡 더 추고 나면 정말 파티의 중심이 내 쪽으로 넘어올 것이다.
무엇보다, 상대는 서리의 황녀 셀라하다.
온갖 고위 귀족들도 말 한마디 나눠 보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클로엘 황실의 제1황녀 아니던가.
거기서 거절이란 선택지를 고르는 인간은 없을 터이지만.
“제가 어찌 감히 1황녀님의 손을 이끌겠습니까. 지금은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폐만 끼칠 듯합니다.”
그리 이야기하고, 나는 셀라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채 파티장을 나왔다.
* * *
다들 티를 내려 하진 않았지만, 파티장 사이에서는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잠시 파티장을 나간 직후, 셀라하는 그렇게 홀로 문 옆에 서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1황녀의 춤 신청을 거절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그럴싸한 이유를 붙여다가 거절하긴 했지만… 거절은 거절이다.
― ‘방금… 봤습니까?’
― ‘셀라하 황녀님의 춤 신청을 거절한 겁니까?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지요?’
― ‘분명 클라리스 성녀님과 춤을 추지 않았습니까? 그사이에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 것일까요?’
― ‘셀라하 황녀님이랑 담화를 나눌 기회인데, 저였으면 팔이 잘리더라도 춤을 추러 나갔을 텐데요.’
수군거리는 귀족들 사이에서 셀라하는 코웃음을 흘렸다.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성녀 클라리스와의 연줄이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셀라하 입장에서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상대인 만큼, 에드를 좀 더 적극적으로 포섭할 계획이었다.
페니아 황녀의 최측근으로 추정되고, 클라리스 성녀와 각별한 관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이는 소년.
셀라하 황녀치고는 이보다도 더 자애로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먼저 치고 나갔으나, 에드 로스테일러는 아무렇지도 않게 접근을 쳐 내고 자리를 떠 버린 것이다.
제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고, 좋은 인맥을 두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클로엘 제국의 1황녀 앞에서 너무 막 나가는 태도였다. 바쁜 입장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이래서는 정말 선을 넘은 것이다.
그렇다고 촌스럽게 직접적으로 화를 낼 수는 없다.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고귀한 기품만큼은 지켜 내야 하는 게 황족의 사명이다.
‘굴러들어 온 기회를 제 발로 차 버리는구나.’
셀라하는 다시 새로운 와인 잔을 받아들고, 고풍스럽게 웃었다. 주변 귀족들도 셀라하의 눈치를 보느라 뭐라 말을 걸지는 못했다.
그 와중에 클라리스 성녀는 그 광경을 보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은은하게 올라오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클라리스와는 춤을 추고, 고귀한 황녀의 춤은 거절했다는 그 사실에 클라리스는 사뭇 가슴이 가빠진 것이다. 참으로 묘한 상황이었다.
‘뭐, 제 명을 줄이는 일이지.’
셀라하 황녀는 그대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다시 인파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성녀 클라리스와 가까운 관계라는 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긴 하나, 그 정도 가지고 황녀의 위광에 도전하려 한 것은 멍청한 일이다.
당장에 여기 모인 귀족들은 모두 셀라하의 눈치를 보고 있다. 그의 아비 크레핀 로스테일러마저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여론을 휘둘러서 에드 로스테일러를 묻어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건방짐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줄까 싶지만, 지금 당장은 다른 인맥들을 훑는 것이 먼저다.
군단장 매그너스와 투자가 롤란드.
성녀 클라리스와는 얼굴을 터놓는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겠지만, 그 둘은 확실히 제 사람으로 만들 요량이었다.
이번 사교회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 * * [ 4층 복도 끝에 있습니다. 사용인들이 잘 오가지는 않던데, 아마 가주가 직접 그쪽에 접근하지 말라고 명한 듯합니다…! 예니카 아가씨도 근처에서 대기 중이십니다!]
어깨에 앉은 머그가 날개를 퍼덕대면서 물어온 정보를 전해 주었다.
밤의 로스테일러 저택. 여전히 많은 사용인들이 오가고 있지만, 높은 층으로 올라갈수록 눈에 띄게 유동 인구가 줄어든다.
대부분의 주요 시설들은 낮은 층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총 6층까지 있는 로스테일러 저택은,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가문 내부자들만 이용하는 사적인 시설들이 나온다.
3층까지는 손님들도 오갈 수 있는 시설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3층까지는 외부인이 배회해도 그리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 않지만, 4층부터는 외부인이 진입하려 하면 사용인들이 제지하기 시작한다.
물론, 로스테일러 가문의 내부자인 나는 자유롭게 진입할 수 있다.
“에드 도련님. 몸이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
“혼자서 가눌 수 있으니 들어가 봐.”
“예, 알겠습니다.”
길 가다가 만나는 사용인들을 자연스럽게 무르고, 나는 4층 구석에 있는 크레핀의 개인 서재 앞까지 도달했다. 당당히 걸어 들어올 수 있으니 이렇게 편하다.
서재에 바로 진입하지는 않고, 그대로 뒤로 돌아서 복도의 창문에 걸린 잠금쇠를 모두 해제했다.
―드르륵.
그러자, 복도 창문이 열리더니… 꽤 커다란 독수리 모양 정령을 타고 있는 소녀 하나가 복도 안으로 몸을 밀어 넣고 들어왔다.
더 볼 것도 없이 이젠 가족처럼 친숙한 소녀다.
예니카는 깔끔한 감청색 스커트와, 새하얀 블라우스를 걸치고 있었다. 보아하니 예니카도 파티에 있다가 온 모양이었다.
“어떻게 잘 빠져나왔네?”
“에드랑은 다르게, 나 같은 사람은 없어져두 아무도 신경 안 쓰더라구. 미리 와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는데, 딱히 오간 사람은 없었어.”
“루시는?”
“지붕에서 자고 있어.”
이런 으리으리한 건물의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것인가. 사실 뭐 새삼스러운 일이다.
저택 내부의 마력을 전체적으로 탐지하고, 특이한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포착해 내려거든 차라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게 편할 것이다.
유사시 곧바로 난입할 준비를 끝마쳐 두고 있었겠지. 일견 나태하고 답 없어 보이지만, 중요한 부분에선 철저한 녀석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재의 손잡이를 돌려서 밀었다. 끼이익 대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렸다.
자주 쓰는 시설인 만큼 문이 잠겨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4층 구석부터가 관계자가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이긴 하다.
나는 이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서재의 중앙에 위치한 집무용 책상에는… 크레핀 로스테일러가 앉아 있었다.
“…허으읍…!”
예니카는 재빨리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숨을 몰아 삼켰다. 나는 최대한 당황하지 않고, 가만히 문고리를 잡은 채 서 있었다.
“왔구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파티를 주최하고 있었을 크레핀이다.
그렇게 으리으리한 파티를 주최하면서 호스트가 자리에서 빠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더군다나 다른 중요한 일도 아니고, 서재에 와서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는 더더욱.
이는 필시, 내가 여기에 찾아올 것이란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단 이야기다.
“다른 이들 시선 없이,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지. 그래, 우리 이야기 좀 나누어 볼까.”
크레핀은 책을 덮고, 업무용 책상 위에 올려놓은 후 점잖게 이야기했다.
“그 숱한 시련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 금의환향한… 네 이야기가 많이 궁금하구나.”
“아버지.”
그 뒤에 이어져 들어온 대사는, 예니카는 물론이고 나도 일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있구나.”
그는… 애초에 나를 에드 로스테일러라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가문의 숙명에서 도망치는 방법이야 많지. 어떤 방법을 쓰든, 내 아들 에드 로스테일러가 꼴사납게 도망쳤단 사실은 변하지 않아. 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가 없구나.”
서재 한편을 가득 메운 창문. 그 뒤로 달밤을 밝히는 보름달이 고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너는, 누구지?”
나는 허벅지 춤에 감춰진 단검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며, 경계 자세를 취했다.
* * *
사랑해 마지않는 내 남동생,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세례식도 끝이 나고, 공식적으로 후계자 자리에 오르게 된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
이렇게 훌륭한 동생을 둘이나 두고 있는데, 내가 장녀로서 후계자 자리를 잘 유지해 나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
어쨌든 타냐는 아직 철이 들려면 멀었으니, 에드 네 역할이 더 중요하겠지. 타냐가 문자를 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법 수련에 들어가다니, 시간이 참 빠르다. 그치.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게 된 지도 벌써 3년이 넘었구나. 장난스럽게 방문에 남겨 둔 쪽지를 주고받던 게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다면, 아예 처음부터 사용인들에게 편지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할 걸 그랬어.
그럼 너는 낭만이 없다고 또 툴툴대겠지. 하여튼 희한하다니까.
첨탑 생활은 답답한 부분도 많지만, 어쨌든 나는 나대로 잘 살고 있어. 요즘에 다시 기가 허해지고, 잔병치레가 많아지긴 했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야.
오히려 검술 수련이랑 마법 수련은 좀 진전이 있는 편이야. 내 상반신만 한 대검을 다루겠다고 했을 때 다들 걱정하던 시선 기억나? 이젠 경량화 마법에도 익숙해져서 수족처럼 대검을 다룰 수 있게 됐어.
저번 회동 때는 예식용 대검을 들고 제식 자세를 보여 드리기도 했지. 어르신들께서 다들 좋아하시더라. 에드 네 얼굴도 다들 보고 싶어 하셔.
…아버님과 에드 너 사이의 관계도 좀 진전이 있었으면 좋겠다. 솔직히 사이에 껴서 힘들어.
에드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아버님이 나름대로 장대한 꿈과 큰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그런 아버님을 믿고 따라가는 건, 우리가 가족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야.
그러니까, 그런 심한 말은 하지 마.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닌 이상, 다시는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겠다느니.
가족 사이에 그런 심한 말이 오가는 건 너무 슬픈 일이야.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사과드려.
아버님께서 네 실베니아 입학 절차를 알아보고 있는 것도 그렇게 긍정적인 일은 아니야.
문젯거리를 저 남단의 아켄섬으로 치워 버리는 것밖에 안 되잖아. 다른 건 몰라도, 나는 가족이 찢어지는 건 원치 않아.
저번에 했던 말 기억나? 에드 너는 분명, 나이가 차자마자 곧바로 실베니아에 입학할 거라고 그랬지.
마법 공부는 로스테일러 저택에서도 할 수 있어. 부디, 신중하게 생각해 줘.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가족이라는 연으로 묶여 있으니까, 부디 그 무게를 너무 가벼이 생각하지 말아 줘.
또 편지 할게.
네 하나뿐인 누나, 아르웬 로스테일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