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5)
합동 전투 실습 (2)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라는 단어를 처음 생각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발상이 참으로 기가 막히다.
나비의 날갯짓에서 파생되는 자그마한 바람이 대양을 건너 머나먼 대륙에선 건물을 집어삼키는 허리케인이 된다… 뭐 대충 이런 뜻이었던 거 같은데…
듣기로는 카오스 이론이 뭐 어쨌니 저쨌니 하면서, 세상만사에는 워낙 변수가 많아 미래를 통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이야기를 할 때 주로 인용되는 말이었다.
초기의 변수 값에서 생겨난 아주 약간의 변화가 엔트로피에 지수함수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 솰라솰라…..
괜시리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내가 생각해봤을 때에는 별 거 아닌 일도 그 눈덩이가 구르고 구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하는 큰 결과를 가져온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세상 만사를 니 맘대로 통제하려고 하지 마라, 대충 그런 성현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셈이다.
설마 그 말의 무게를, 이번 합동 전투 실습에서 실감하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역시 옛말에 틀린 말이라곤 하나도 없나보다.
*
학생회관 3개의 건물 중 하나인 네일관은 전통적으로 합동 전투 수업의 장소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잘 구현된 콜로세움형 결투장과 참관인석은 모든 좌석과 바닥이 번들번들하게 잘 닦여있었다. 귀족적인 학교답게 치고 박고 싸우는 전투 연습장마저도 품위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는 그 참관인석 중 하나에 앉아 중앙의 모의 전투 실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올해 신입생들은 말 그대로 별들의 전쟁이다. 학년에 한두명 있을까 말까 한 원석들이 꽉꽉 차 있으니, 2학년생들의 관심도 집중될 수 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깐깐한 글래스트 교수의 인정을 받은 3인방. 초목의 창 직스, 황금의 딸 로르텔, 나태한 루시.
마법부 소속의 신입생 3명에 대해서만큼은 세간의 관심이 완전히 쏠려 있었다.
-콰앙!
“감사합니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마력 운용이 확실히 노련해서 인상 깊었습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중앙 결투대에서는 그 중 하나, 북방 유목민족의 후예인 직스가 바람 마법으로 선배를 무대 바깥에 내다 꽂아버린 와중이었다.
목덜미까지 내려온 긴 곱슬 머리가 그 여파로 펄럭이고 있었다.
“다음에도 한 수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이다. 하여튼 쟤도 제정신은 아니다.
직스의 상대로 올라왔던 마법부 2학년… 이름이 뭐였지… 미카엘이었나… 아무튼 걔는 정신도 못차리고 사용인들에게 부축받으며 나갔다.
1, 2 학년 간의 학생 전투 실습에서 기초 마법 외의 사용은 허가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직스의 마법 실력은 기초 마법 선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이상급 되는 수준의 마법까지 동원한다면 훨씬 더 강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 확실했다.
2학년생들 사이로 수군거림이 오갔다.
– ‘또 1학년이 이겼어.’
– ‘이러다 진짜 2학년 싹 다 전패하는 거 아니야?’
– ‘이번 신입생들 좀 이상해. 뭐 어쩌다 저런 괴물들이 한 자리에 모인 거야?’
연례 행사와도 같은 합동 전투 실습. 그 결과는 참으로 처참했다. 선배라는 말이 무색하게 2학년들은 1학년들에게 무참히 썰려나갔다. 중간부터는 급기야 2학년생들이 1학년생들의 실력을 뽐내기 위한 샌드백처럼 느껴졌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 다음 호명하는 학생들은 실습 준비를 마쳐서 대기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루시 메이릴, 테일리 맥로어. ]그리고, 최대의 관심사인 결투 대진이 튀어나오자, 좌중에 다시 한 번 수군거림이 돌았다. 올 것이 왔다.
나도 자세를 고쳐잡고 무대에 정신을 집중했다.
세간의 관심은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갈 희대의 천재 루시 메이릴에게 쏠려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분위기 반전을 통해 주인공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한 시나리오적 기법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집중해야 할 대상은 검성의 운명을 타고난 이 세계의 주인공 테일리 맥로어다. 살면서 단 한번도 검을 잡아본 적 없지만, 처음 휘둘러 본 그 검술로 번개같이 빠른 루시의 마법을 베어내는 모습.
당연히 적중하리라 생각했던 마법이 막히고, 그 방심의 틈을타 테일리는 급박하게 거리를 좁힌다. 그 때문에 화들짝 놀란 루시가 중급 전격 마법인 낙뢰를 때려박아 버리지.
반사적으로 툭 던진 마법에 테일리는 완전히 제압당해버리지만, 어쨌든 중급 마법을 사용해버린 루시는 실격패를 당하고, 테일리는 처음으로 루시 메이릴을 상대로 승리한 자가 되는 영예를 안게 된다.
[ 다시 한 번 알립니다. 루시 메이릴 학생은 실습 준비를 마쳐서 결투장 위로 올라와주세요. ]크… 명장면이었지.
일평생 재능 없단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던 테일리. 실베니아까지 와서도 낙제생 취급을 받았던 세월이었다. 에드 로스테일러 같은 놈에게 구박이나 당하고, 전투부 수업에서도 항상 낙제점을 맞는 그런 시련 뿐인 삶 아니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련을 멈추지 않았던 테일리의 세월. 그 모든 것들이 보답 받는 순간이었다. 연출도 어찌나 극적이었는지, 소꿉친구 아일라가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클로즈업 되는데 가슴이 참 찡했다.
[ 다시 한 번 알립니다. 루시 메이릴 학생. 루시 메이릴 학생. 실습 준비를 마쳐서 결투장 위로 올라와 주세요. ]……?
[ 루시 메이릴 학생, 루시 메이릴 학생. 결투장 위로 올라와주세요. 루시 메이릴 학생. ]뭐냐?
얘 어디갔냐???
*
테일리 맥로어의 입장을 본 순간 느낀 묘한 고양감은 말로 설명하기 참 힘들었다.
화면 너머의 세상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로서 몇 번의 세월을 살았고, 비참하고 허무한 배드엔딩부터 긴 긴 여운을 남긴 트루 엔딩까지 그 여정을 몇 번이고 끝마친 사람이니까.
그와 동시에 테일리 맥로어의 앞에 놓인 시련들도 함께 생각나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검성의 운명을 타고 났지만, 그의 삶은 결코 승승장구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가 걸어갈 수 있는 수많은 루트 중에 고되고 힘들지 않은 길은 단 하나도 없었거든.
그러니, 응원이나 해주기로 했다.
나야 뭐 내 인생이나 잘 챙기면서 살기로 마음 먹었고, 이 실베니아에 일어날 모든 시련들에 끼어들어 총대를 매줄 녀석이니 응원해줘야지.
“있는 힘껏, 열심히 하겠습니다!”
무대 위에서 힘찬 인사를 건넨 테일리를 향해 격려의 박수가 날아들었다.
그래, ‘격려’의 박수다. 지금부터 루시 메이릴에게 쥐어터질 소년의 운명이 참관인들한테는 명백히 그려졌기 때문이다.
몰라도 뭘 모르는구나. 쟤는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학생들 중에서 제일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난 자다.
다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앞으로 반전될 여론이 오히려 기대가 되었다.
근데 그건 그거고,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냐면…
“우엑, 으아악.”
루시 메이릴의 양 볼을 꼬집고 있었다.
장소는 네일관 중앙 무대 뒤편에 마련된 예비용 연단이었다. 척봐도 합동 실습 수업 듣다가 졸려서 낮잠 잘 곳을 찾다보니 흘러들어온 것이다.
네일관 밖으로 나가기에는 영 신통치 않았을테니, 이 안에서 낮잠을 잘만한 곳이야 뻔한 것이다.
예비용 연단 아래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는 루시를 발견한 것은 바로 방금이었다.
“아악, 우에엑.”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네 차례라고.”
그렇게 한참을 깨우자, 루시 메이릴이 연단 아래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내 나무쉼터에서 자다 일어났을 때처럼 멍한 표정. 헝클어진 머리, 양 사이드를 내려 묶었던 머리 한쪽은 풀려 있었다. 볼에는 여지없이 머리카락이 눌어붙어 있고, 잠시간 멍하니 입 벌린 채로 있다가 내뱉는 말도 똑같았다.
“…. 배고프네.”
그리고 머리를 한 번 털어대고 기지개를 한 번 더 하더니, 나를 알아보았는지 인사를 건넨다.
“안녕.”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물어보는 것이다.
“혹시 육포 있어?”
꿀밤 마렵네 진짜.
“있어.”
“조금만 주라.”
“결투부터 하고 와.”
[ 루시 메이릴 학생. 빨리 올라와 주세요. ]결투 상대가 예비 연단 밑에서 튀어나오는 기괴한 광경. 참관인석에 있던 학생들이나, 수업을 진행시키던 조교수까지 어이 없어 하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네일관 밖까지 땡땡이 치러 간 건 아니니까 어떻게든 결투가 성립은 되겠군. 혹시 결투 자체가 무산되어서 테일리에 대한 평가가 일변하는 계기가 되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으으으윽!”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는 루시의 옆으로 머리끈 하나가 떨어져 내려왔다. 단정하게 내려묶은 머리 한 쪽이 풀린 것이다.
“…”
루시는 한쪽만 풀어헤쳐진 머리를 베베꼬더니, 머리끈을 집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른한 목소리로 한다는 소리도 어이가 없었다.
“나 머리 좀 묶어줘…”
“아니, 그냥 풀고 나가 빨리.”
“안돼.. 대충 하고 다니면 오필리스관 메이드들이 혼낸단 말야. 걔네들 너무 무서워…”
교장 오벨과도 맞먹으려드는 루시가 이 실베니아에서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존재가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이였다.
허구헌날 길거리에서 잠에 들고, 이런 저런 건물 옥상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루시가 그나마 깔끔한 복장과 단정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 이유도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 덕이 컸다.
온갖 고귀한 신분의 뒷바라지를 하는 집단이니 만큼 엘리트 인재들로 가득했지만, 그런 그녀들이라 할지라도 이 종잡을 수 없는 길고양이를 통제할 때에는 화를 내고 혼내는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통제라도 되니 다행이지…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루시의 손을 잡아 끌어서 대충 아무 참관인석에 앉혔다. 그리고 머리끈을 들어서 한쪽 머리칼을 쓸어내리고, 다른 쪽과 대칭이 맞도록 단정하게 내려묶어줬다.
안 그래도 나는 페니아 황녀랑 결투를 해야하는 입장인데, 남 결투에 이렇게 오지랖 부리고 있는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또한, 그 광경을 네일관의 모두가 함께 지켜보고 있는 이 상황도 참 가관이었다.
– ‘저 사람 뭐야, 그 에드 로스테일러 아니야?’
– ‘아직도 학교 다녀? 와 진짜 독하다 독해.’
– ‘쟤는 뭔데 1학년 수석이랑 저렇게 짝짜꿍하고 있어?’
– ‘친해보이는데?’
– ‘친한 거 맞아? 저건 그냥 보호자 아냐?’
2학년생 중에 최고로 망신살 뻗친 놈과 1학년생 중에 최고로 영광스러운 수석이 실랑이 하며 머릿결을 가다듬고 있는 모습이 퍽 웃겼다. 나까지 낯 뜨거워져서 얼른 머리 정리를 마무리 했다.
그리고 비몽사몽한 루시를 다시 일으킨 다음 대충 걸친 외투를 똑바로 고쳐 입혔다. 스커트 위로 삐져나온 셔츠 자락도 다시 안으로 넣어서 잘 조여주고, 흐트러진 옷깃도 다시 빳빳이 세웠다.
그 다음 흘러내린 한쪽 니삭스를 다시 올려주고 넥타이를 다시 조여주니 그럭저럭 단정해졌다. 소맷단이 남아도는 거야, 자기가 교복 사이즈에 별 관심이 없어서 대충 받아입은 거니 어쩔 수가 없다.
“됐지?”
“응, 응.”
“얼른 나가 봐.”
그렇게 루시의 등을 떠밀어서 결투장 위로 보냈다. 거하게 하품을 하며 세상 귀찮다는 듯이 테일리의 반대편에 선 루시는
[ 그럼 결투를 시작… ]– 콰앙!!!!
단 일격에, 테일리의 명치 한복판에 하급 전격 마법을 때려박았다.
대략 0.3초 정도 걸린 것 같았다.
*
테일리 맥로어의 삶은 언제나 시련의 연속이었다.
시골뜨기 출신 낙제생, 입학할 때부터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성적을 내 본적이 없는 열등생,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낙오자.
어렸을 적부터 그와 함께해온 소꿉친구 아일라를 제외하고선, 그 누구도 테일리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진단하지 않았다.
뭘 하든 평균 이하의 능력을 보여주는 테일리의 그릇에는 점차 가족들 마저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젠 모든 것을 내려놓을까 하는 순간이 매번 찾아왔다.
그런 테일리에게 있어서 실베니아 입학은 자기 자신을 증명할 좋은 수단이었다. 마치 신이 테일리에게 미소 짓는 것 같았다.
밤을 지새우고 지새운 끝에 아슬아슬하게 턱걸이로 합격했던 필기 시험, 심술궂은 2학년 선배 때문에 낙제 당할 뻔 했지만 황녀의 자비 덕에 통과할 수 있었던 실기 시험.
뿐만 아니라 학기가 시작한 뒤로도 끊임 없이 찾아온 시련에도,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배정 시험 때는 사고로 소환된 마물족 코볼트에게 목숨을 잃을 뻔 했고, 개학식에서는 낙제생이었던 자신을 따돌리는 학우들 때문에 식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옆에서 응원을 해준 소꿉친구 아일라와, 같은 낙제 위기 동료였던 에이든 덕분에 어떻게든 버텨왔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증명의 순간이었다.
1학년생들은 물론이고, 고학년 선배들이나 급기야는 교수들마저 혀를 내두르는 희대의 천재 루시 메이릴.
모두가 승패를 예단하고 자신을 동정하는 극악의 상황. 오로지 절망만이 가득한 이 상황에서도, 테일리는 절대로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거 며칠 더 노력한다고 해서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렇게 테일리를 조롱하는 학우들 사이에서, 테일리는 밤을 지새워 몸을 단련하고, 주먹을 휘두르며 끊임 없이 격투술을 훈련했다.
모두가 패배할 것이라 동정하는 그 순간에서까지 테일리는 승리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지금.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단 일격에 결투장 벽에 매다 꽂혀버린 상황.
“크윽… 흐윽… 으윽…”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일리는 일어섰다. 테일리의 주변에는 온갖 검이나 활, 채찍 따위의 무구들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결투장 구석에 전투부 학생들을 위해 준비된 모의 무구들. 대부분 날이 서있지 않고, 뭉툭하게 개조된 것들이었다.
테일리는 자기 손에 끼워진 너클을 바라보았다. 지난한 세월을 함께해온 무기였다. 그러나, 테일리는 조용히 그 너클을 벗었다.
번개가 치는듯한 감각이 테일리의 뇌리를 스쳤다.
널부러진 무구들 사이에서, 허름한 목검 하나가 보였다. 홀린듯한 느낌과 함께 몸이 먼저 나갔다. 바닥에 널부러진 목검을 집어든 테일리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검을 집어든 것은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상대는 모두가 경외하는 희대의 천재 마법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일리는 두다리 오롯이 붙든 채 다시 일어섰다. 자기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테일리는 그 믿음에 보답해야만 했다.
그 일념 하나로, 테일리는 이를 악물었다.
“검을 들었다….!”
순간적으로 매다 꽂혀버린 테일리를 보고 나는 숨을 집어삼켰으나, 이내 검을 들어올린 모습을 보고 다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 임마… 하면 되잖아..!
“루시 메이릴!”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목소리로 루시의 이름을 외치는 테일리.
참관인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조차도 무언가가 끌어오르는 느낌이 났다. 그래, 바로 이 장면이었다.
세상의 시련과 자신을 버린 운명 속에서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테일리가, 부활의 신호탄을 날리는 바로 그 장면이다.
끝끝내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검성의 외침이, 전교생의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바로 그 순간이다.
“흐아아아!”
처음 검을 잡아보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몸놀림.
테일리가 들고 있는 조잡한 목검에 아로새겨진 마나의 감각.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검성의 운명을 타고난 자에게만 허락된 검강, 즉 오러의 기운이었다. 그 앞에선 몇 겹으로 겹쳐진 두꺼운 마나의 벽조차도 종이처럼 쉽게 썰려나가 버린다.
좌중의 참관인들이 그 기세에 압도 당하기 시작한다.
명백히 달라진 테일리의 기척에, 모든 학생들이 숨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설마 이변이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모종의 기대감마저 느껴지고 만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몰아닥치는 이유없는 광풍에, 일순 테일리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 콰앙!!!
이어지는 전격 마법에, 또 다시 테일리는 정통으로 쳐맞고 벽에 내다 꽂혔다.
이번에는 그래도 0.5초 정도 걸렸다.
“…어라?”
*
이번엔 완벽한 넉다운이다.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뒤에 나타난 테일리의 모습은 완전히 만신창이 상태였다.
“흐아아아암…”
나른한 기지개를 켜며 루시 메이릴이 눈을 부볐다.
“수고했어…”
별 것도 아닌, 귀찮은 업무를 해치웠다는 듯이 홀가분한 얼굴로, 루시가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이 시점까지 좌중은 완벽하게 조용한 상태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지만, 그게 뭐 어떻냐는 듯이 루시는 특유의 통통 튀는 걸음으로 다시 내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내 옷깃을 잡고 다시금 치근덕대는 것이었다.
“이제 육포 주면 안돼?”
그 와중에 나는 깨닫고 말았다.
결투 중간에 루시가 구사했던 바람 마법은 일견 기초 바람 마법을 응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루시가 자체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균형을 무너뜨려 빈틈을 만들어내는 그 마법을 안다.
고위 바람 정령, 메릴다와의 계약을 하면 습득할 수 있는 상시 발동 스킬, ‘풍랑의 가호’였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기껏해봐야 며칠.
대충 나른한 표정으로 항상 낮잠이나 자면서, 겸사겸사 고위 바람 정령과 계약까지 한 것이다.
원래 메릴다와 루시는 시나리오상 완전히 별개의 존재다. 엮이는 일도 그냥 없다고 보면 된다. 애초에 루시가 북쪽 숲에 상주할만한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내 캠프에 상주하는 바람에 메릴다와 접점이 생긴 것인가. 그 탓에 메릴다의 가호까지 구사할 수 있게 되어, 쓸 데 없이 더 강해져버린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위 바람 정령과 단 며칠만에 계약을 해버릴 거라곤 아무도 상상할 수 없다.
“…”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테일리 쪽을 바라보았다. 검을 내려놓고, 주저 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눈에는 평소처럼 불타오르던 그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압도적인 재능의 격차는 폭력과도 같다. 그 거대한 벽을 일단 실감해버리면, 마음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야 이거… 진짜 큰일 난 거 같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거 그냥 놔두면 절대 안된다. 엉겨붙는 루시를 일단 밀어내고, 완전히 절망한 기색으로 무대에서 내려오는 테일리를 향해 걸어갔다.
[ 다음 전투 실습 대상자, 에드 로스테일러 학생과 존경하는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 황녀님 께서는… ]그 와중에 나를 호명하는 소리. 참관석에서 옷 매무새를 단정히 정리한 뒤 일어나는 페니아 황녀의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결투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페니아 황녀와 마주쳤다. 나를 보자마자 공격적으로 변하는 눈매는 여전했다. 나를 적대하는 모습이야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황녀 입장에서는 뭔가 마음을 단단히 먹은 거 같은데, 지금 시점에서 페니아 황녀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에드 로스테일러… 당신이 저번…”
황녀가 뭐라 말하려 하는 순간, 나는 그대로 황녀를 지나쳐갔다. 가만히 있으면 테일리가 완전히 퇴장해 버릴 것이다.
일국의 황녀를 무시하는 언행은 천인공노할 짓이지만, 적어도 배움의 미덕이 신분의 귀천보다 앞서는 이 교수동에서만큼은 극형에 처해질 일까지는 아닐 것이다. 우선은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완전히 무시당했단 사실에 놀란 황녀의 시선을 뒤로한 채, 나는 인파들 사이로 사라져가는 테일리를 향해 확실히 소리쳤다.
“야! 테일리!”
이게 의미 있는 짓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네 노력은 반드시 보답 받을거야! 기 죽지마! 야! 허리 펴! 쪽팔릴 거 없잖아!”
테일리의 마음이 꺾이고 완전히 좌절해버리면, 결과적으로 내가 개고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저거 저렇게 가만히 놔두면 안된다.
“당당히 걸어! 충분히 잘했어! 상대가 좀 안 좋았을 뿐이잖아! 이깟일 가지고 좌절하지 마!”
그래, 제발 벌써 좌절 하지 마!
나 대신 네가 개고생 해야지! 앞으로 이 아카데미에 일어날 뭣 같은 시련이 얼마나 많은데!
천천히 퇴장해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는 테일리에게 끝까지 악질러서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간절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