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50)
크레핀 토벌전 (1)
순수악.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 크레핀 로스테일러. 그를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누가 되었든 그 단어를 꼽았다.
을 구매하면, 패키지 뒷면의 가장 위편에 큼지막하게 새겨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으리으리한 가주의 옥좌에 손을 모으고 앉아서, 어둠 속에서 눈을 치켜 뜬 모습.
실베니아의 낙제 검성에는 수많은 악역이 나오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임팩트 있었던 인물을 꼽으라면 누가 되었든 그를 꼽는다.
그간의 최종 보스들은 모두 나름의 사연이 있거나, 외압에 어쩔 수 없이 휘둘렸거나, 근본은 선한 인간인 경우가 많았다.
1막 보스 ‘정령사 예니카 페일로버’는 어둠의 정령 벨로스페르의 힘에 못 이겨 학사를 파괴했고, 2막 보스 ‘탐구자 글래스트’는 학자로서 학사의 보물인 현자의 봉서를 지킨다는 대의명분이라도 있었으며, 3막 보스 ‘깨어난 자 루시’는 아예 보스전에 들어선 계기부터가 오해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보다 더 깊은 내막을 알고 있기도 하고, 3막 보스전은 아예 진행조차 되지 못했으니 지금에 와서는 많이 느낌이 달라졌다.
어쨌든, 실베니아의 낙제 검성을 플레이할 때만큼은 4막 보스 ‘가주 크레핀 로스테일러’야말로 순수한 악의를 가지고 플레이어를 막아서는 첫 최종 보스였던 것이다.
그가 행동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뿐이다.
가문의 위광을 드높이고,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한다. 자애로운 공작인 양 가면을 쓰고 살지만, 필요하다면 사람의 목숨을 종잇장처럼 여기는 인간이다.
악신 메뷸러를 강림시키기 위해 실베니아 아카데미를 습격하고, 수많은 학생들을 그 제물로 삼으려 했다.
악신은 강인하고 순수하며, 영향력 있고 강한 힘을 가진 영혼을 좋아한다.
온갖 귀빈들이 가득한 실베니아 아카데미야말로, 그런 악신의 강림을 위한 장소로는 최적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테일리 일행에 의해 쓰러지게 되지만, 끝끝내 목숨을 잃는 그 순간까지 절대로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부활한 악신 메뷸러는 결국 성장할 만큼 성장한 테일리와 그 동료들에 의해 다시 봉인당한다. 크레핀 본인 또한 테일리와의 전투에 패배해 퇴각하다가, 수호자 오벨 포시어스를 만나 죽임 당하게 된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악인으로서 죽는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로서 살았던 그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갈 뿐… 그는 끝까지 비릿하게 웃으면서 한탄한다. 한 끗 차이로 실패해서 아쉽게 됐다면서.
타협하지 않는다. 동정받으려고 하지도, 이해받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한 치의 의심조차도 가지지 않았다. 더 높은 위치에 서기 위해선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야만 한다. 필요하다면 속이고, 뺏고, 죽여야 한다.
그렇기에 누구에게도 설득 당하지 않는다. 인간의 선한 본성이라는 것도 믿지 않는다.
무엇이 크레핀을 그렇게까지 하게 만드는가.
그런 것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는 그 자체로 완성된 악역이었으며, 훌륭하게 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플레이하고 나서 든 생각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다른 보스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속사정과 대의명분이 있었지만, 크레핀은 전혀 그런 것 없이… 철저하게 ‘토벌의 목표물’로서 사라져 주었다.
그것이 오히려 뒷맛 없고 깔끔해서, ‘정말로 기나긴 싸움이 끝나고 결말을 맞이했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4막의 이야기는 깔끔하게 닫히고, 대현자 실베니아와 성창룡 벨브로크의 이야기를 다루는 최종막으로 넘어간다.
기억에 남는 그의 최후는… 트릭스관의 옥상 난간에 피칠갑이 된 채 기대어, 스러져가는 악신 메뷸러의 형체를 올려다보는 모습이었다.
* * *
황실 대도서관의 문이 열렸다.
차마 그 높이를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로 높은 층고의 홀. 그 안에 2층 높이가 넘어가는 거대한 책장들이 도열해 있었다.
황실의 학자들이나 정책 입안자들이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해 오가는 일이 많은 이곳은, 자연스럽게 관료들 사이에서 의견을 나누거나 자유로운 사교 활동을 하는 곳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그런 스스럼 없는 행동을 하기 힘들어졌다.
클로엘 제국의 제2황녀, 페르시카가 항상 이 도서관에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도서관 구석에 있는 으리으리한 책상에, 온갖 종류의 책들을 잔뜩 쌓아 놓고 그 속에 파묻혀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밥 먹는 시간과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선 하루종일 도서관에 눌러앉아 있는 통에 사서들과 관료들은 머리가 아팠다.
사서들은 하루종일 도서관 안에 황녀를 끼고 일을 해야 했고, 관료들은 자료나 책을 찾으러 올 때마다 그녀의 눈치를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황실 도서관은 거대 책장들이 도열해 있는 메인 홀을 제외하더라도, 총 4층 규모의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기에… 상시 그녀의 눈치를 볼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같은 공간 안에 2황녀가 항상 자리를 잡고 있고, 언제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책을 찾으러 돌아다니느라 마주칠지 모른다는 사실은… 신하로서는 큰 압박이다.
“책이라면 방에서 읽어도 상관없잖아요, 페르시카 언니.”
“나는 한 권 한 권 읽는 속도가 빨라서 일일이 방까지 책을 옮겨 달라 명하기 귀찮아.”
도서관 구석에 꽤나 큼직하게 자리한 페르시카의 자리.
호화롭고 거대한 책상을 가져다 두었지만, 그마저도 책에 파묻혀서 형체가 거의 보이질 않는다.
안부를 묻고자 찾아온 페니아 황녀는 일단 한숨부터 푹 쉬고 말았다.
“거기다가, 책장 사이를 노니며 다음 책을 고르는 재미가 있거든. 황실 교사들이 추천해 주는 권장 도서만 받아 읽는 건 재미가 없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저도 할 말이 없지만요….”
오늘은 2황녀 페르시카뿐만이 아니라, 3황녀 페니아마저도 도서관에 행차한 와중이다.
사서들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날이 서 있는 느낌이었다. 비교적 한직에 불과했던 도서관 사서직에 배정되었는데, 이렇게까지 고생할 거란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뜬금없이 실베니아에 입학한지도 벌써 1년 반이 넘었네. 이제 방학 때마다 안부 인사하러 오는 네가 별로 낯설지 않을 지경이야.”
“아직도 제가 실베니아에 입학한 것을 뜬금없다 생각하고 계세요?”
“응. 말해 뒀지만, 나는 네가 야망 없는 인간이란 생각은 안 했거든.”
셀라하가 얼음장같이 차갑고, 페니아가 다소 인간적인 느낌이 난다면, 페르시카는 그 중간의 어딘가다.
다만, 자애로운 느낌은 전혀 없다. 굳이 말하자면 털털하단 느낌에 가까웠다. 일단은 황녀이기 때문에 나름 예를 갖춘 복장을 하고 있지만, 쌓여 있는 책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고서들을 탐닉하는 모습은 위엄이 전혀 없다.
황족의 머리칼은 대체로 백금색을 띠고 있다. 페니아가 가장 순수한 백금색에 가깝다면, 셀라하는 거기서 푸르스름한 빛깔이 느껴지고, 페르시카는 반대로 붉은 기가 감돌고 있었다.
물론, 눈빛은 클로엘 황족의 모두가 그렇듯 은은한 푸른빛이 감돈다.
“글쎄요….”
“확실히, 지금은 입학하기 전에 비해 뭔가 총기가 빠진 느낌이긴 하네.”
페르시카는 책 속에 파묻혀서 자기 얼굴보다 커다란 고서의 책장을 휙휙 넘기고 있었다.
“그러는 페르시카 언니야말로, 이런 시기에 항상 도서관에만 박혀 있으신데… 황권에는 뜻이 없으신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나는 그냥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때라니… 언제요…?”
페르시카는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굳이 말해 줄 이유를 모르겠다는 투다.
그저 책에 시선을 박은 채로, 페르시카는 나긋하게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난 알아. 입학하기 전 너는, 크레핀 로스테일러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그를 노려보았지.”
“…….”
“지금이야 사교회 주관한다고 본가에 내려가 있지만, 그는 정책 입안에 참고하려고 자주 도서관에 드나들었거든. 뭐, 적어도 내 눈에는 백성을 위하고 황실에 충성하는 참된 신하로밖에 안 보였지만….”
페르시카는 문득 책을 탁 덮었다. 그리고 옆에 쌓인 책의 산으로 휙 던져 놓더니, 다음 책을 들어서 촤라라락 넘기며 전체적인 책의 내용을 훑었다.
“옛날부터 페니아 너는, 기묘할 정도로 사람 내면을 잘 통찰해 내곤 했지. 그런 네가 그렇게까지 경계하니까 나도 사뭇 호기심이 들더라고.”
“이제 그를 견제하는 건 관두기로 했어요. 그에게 참견할 이렇다 할 명분도 없고요.”
“글쎄. 들어 봐. 그가 황실 도서관에서 어떤 책들을 읽었는 줄 알아?”
페르시카는 책 몇 권을 페니아의 옆에 휙휙 던져두었다.
페니아는 그 책들을 한 권씩 훑어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옛 악신의 설화나 신화시대의 금지된 마법들. 심지어는 황실도서관의 서고 관리 현황을 감찰한다는 명분으로 금서에까지 손을 댔더라고.”
“…뭐라고요?”
“뭐, 금서라고 해봐야 원시 형태의 잔혹한 마법들을 다루는 방법론에 대한 것들이지. 혹시 뭔가 탈선하려는 건가 싶더라고.”
페니아는 책을 하나씩 하나씩 넘겨보면서 그 제목들을 훑었다. 하나 같이 악신의 강림에 대한 설화나, 그 피해에 대한 것들이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나쁜 마음 품고 있는 것 같아?”
“…”
확실한 물증이라 보긴 어렵다. 그가 도서관에서 이런 책을 좀 보았다고 한들, 그의 위광을 깎아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단순히 학술적 호기심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페니아의 마음 한 켠에 찝찝함이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은, 방학 전 페니아에게 편지를 받아간 에드 로스테일러의 모습이다.
이번에 로스테일러 가문에 복권하게 되었다면서, 황녀의 권위를 좀 빌리려 했던 그다.
이젠 별 다른 의지도 뜻도 없는 페니아였기에, 별 생각 없이 이름을 빌려주었다. 애초에 에드 로스테일러 정도면 믿을만한 인물이고, 페니아 황녀의 이름에 쉬이 먹칠을 할 인간도 아니었다.
그래서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섣부르게 개입해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드높은 자리일수록 실패에 뒤따른 책임의 크기도 커진다. 몇 번의 실패로 위축되어버린 그녀는, 더 이상 스스로 움직여서 적극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었다.
“표정이 안 좋네, 페니아.”
페르시카가 정곡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냥, 그의 아들이 방학 전에 절 찾아왔거든요.”
“에드 로스테일러. 파문 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를 아세요?”
“이름만 알지. 유력 권세가의 가족 관계도는 어느 정도 외고 있거든. 네가 주도해서 파문시켰단 소문도 들었고.”
페르시카는 한 번 본 것은 어지간해선 잊지 않는 암기력의 소유자다. 타고난 머리가 좋으니까 이렇게 많은 지식을 머리 속에 우겨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냥… 이번 기회에 복권한다길래, 가서 무시 당하지 말라고 제 이름을 좀 빌려줬어요.”
“어머, 그를 꽤나 믿나보네. 넌 함부로 이름을 빌려주진 않잖아.”
“믿는다기보단… 그냥… 딱히 그래도 상관 없을 사람이거든요. 다만…”
페니아는 책들의 표지를 훑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어요.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그의 평판은 아직도 밑바닥일텐데, 어떻게 이리 쉽게 복권할 수 있었던 것일까. 가주 크레핀이 자애롭다곤 하지만, 가문의 위광을 위협하는 자에겐 자비가 없거든요…”
에드 로스테일러에겐 뭐든 알아서 잘 할 것이라는 특유의 믿음직한 분위기가 흐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야 드는 일말의 불안감. 이 한 박자 늦은 불안감을 캐치해낸 페르시카가, 교묘하게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뭐, 전혀 복권시켜 줄 이유가 없는 인물이지. 오히려 그 됨됨이가 완전히 고쳐지지 않았으면 다시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할테니, 위험을 부담하는 행위일 뿐이야.”
페르시카는 책장을 휙휙 넘기며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그는 에드 로스테일러를 복권 시켰구나. 내가 크레핀이라면, 다른 마음을 먹은 게 아닌 이상 그런 짓을 하진 않을텐데. ”
페니아 황녀는 미간을 떨었다. 더 이상 그의 일에는 손대지도, 관여하지도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로스테일러 가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도 관심을 끈 채, 그저 실베니아를 졸업하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마음 먹지 않았나.
“예를들어… 아켄섬에 처박힌 그를 로스테일러 저택으로 억지로 끌어내기 위한 미끼라던가.”
그러나, 학생회장 선거전 때의 기억이 은근하게 가슴 사이로 올라온다.
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들었던 그 묘한 상실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죄책감과 무력감 사이의 무언가. 그리고, 그가 생존했음을 알고서 든 안도감. 그 감정의 낙차에서 페니아가 깨달은 것은,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많은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캠프에 앉아 부지깽이로 불을 휘적거리는 그의 너른 등판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는 절대로 페니아를 탓하지 않는다.
그에게 죄를 씌워 파문시켜도, 학사의 위기에 빠르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여도, 이상론에 빠져 현실의 피해를 감안하지 못했을 때도, 그를 대놓고 경계하고 있어도.
그는 거대한 흐름의 하나라고 인식할 뿐, 인간 대 인간으로서 페니아를 미워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단순히 화를 낼 줄 모르고, 그저 당하는대로 살아가는 줏대 없는 인간이 아니다.
모든 사실 관계를 명확히 알고 있고, 필요하다면 그 어떤 드높은 인간에게라도 대들거나, 아니면 술수를 써서라도 제 몫을 쟁취할 줄 아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니아를 인간 대 인간으로서 계속해서 존중해주었던 이유는 별다른 게 없다.
그녀를 이해해주고 있는 것이다.
클로엘 황실의 제 3황녀,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
유년시절 온갖 권모술수와 암투 사이에서 제 목을 부지해오고, 황권 분쟁 사이에서 꿋꿋이 제 의견을 피력해온 그녀의 생애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에, 에드는 함부로 그녀의 오판을 탓하지 않는다. 그는 페니아의 불완전함마저도 이해하고 받아들여준 것이다.
무릇 오판과 실수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군주의 이름을 달고 있다면 그 과오는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다.
잔인한 모순이다. 하지만 모든 군주가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옥좌의 무게란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군주가 내딛는 길에는 필연적으로 고독이라는 이름의 양탄자가 깔려있다.
그 고독을 이해받고자 하는 것은 욕심이자 오만이다. 이해받는 것을 포기해야, 비로소 군주가 될 수 있다.
분명, 그런 것일진데.
―’이리 쉽게 도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좀 더… 협상을 할 준비는 되어있었습니다만.’
학사를 떠나기 전, 황족 숙소에서 에드가 페니아에게 했던 말이다.
좀 더 협상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 날, 에드는 페니아와 많은 의견을 주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니아는 아무런 교류도 없이 그저 그녀의 이름을 빌려주고 에드를 떠나보내 버렸다.
에드라면 알아서 어떻게든 잘하겠지. 로스테일러 가문 사이의 문제니까, 괜히 끼어들어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봐야 좋을 게 없을 것 다. 그런 식으로 위안삼으며.
그것이 얼마나 큰 실책이었는지, 뒤늦게 깨닫는다.
“오늘 밤이 사교회 2일차니까, 앞으로 이틀 정도 남았구나.”
동공을 떨고 있는 페니아에게 페르시카가 차분하게 속삭였다.
“마차를 타고 가면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걸리지만, 그냥 말 안장에 딱 붙어서 안 쉬고 달리면 한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겠지.”
어렸을 때부터 황족의 교육을 받아온 페니아 황녀는 기마술에도 최소한의 조예가 있다.
다만, 지금부터 알현실에 가서 황제의 허락을 받고, 호위대를 꾸려서 마차를 타고 달려봐야 늦는다.
가려거든, 지금 당장 말 보관소로 뛰어내려가, 가장 체력 좋고 튼튼한 말을 타고 달려나갈 수밖에 없다.
허가 없이 갑자기 자리를 비우는 것이니 그녀의 충신이 아니면 함부로 따라와주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를 말리려 들 가능성이 컸다.
호위기사 클레르를 포함하면 끽해봐야 다섯 정도일까. 나머지는 설득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단순한 기우일 수 있다.
원래라면 이 정도로 급박하게 행동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페니아는 한 번 에드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다. 나중에야 그것이 오해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한 번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만약 이대로 에드 로스테일러가 죽임을 당하거나, 그에 준하는 피해를 입은 채 삶의 가능성을 잃게 된다면… 이는 페니아에게 다시 회복할 수 없을 큰 상처가 될 것만 같았다.
“갈 거니?”
페르시카가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페니아를 불렀다.
페니아는 그렇게 고개를 가만히 숙이고 있다가, 이내 미소지으며 그 얼굴을 가로저었다.
“그럴리가요. 제가 얼마나 어깨가 무거운 신분인데 그렇게 갑작스럽게 움직이겠어요.”
“그렇지. 여전히 황족의 무게를 자각하고 있구나. 안심이 되는걸.”
페르시카는 책장을 몇 번 휘릭 넘기고 콧노래를 불렀다.
“뭐, 설마 죽기야 하겠어. 죽는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도 바보는 아닐테니 다 생각이 있겠지.”
“네… 크레핀에게 뭔가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데, 이걸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둔한 남자는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 페니아의 모습에는 후련함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페르시카는 그 목소리 속의 떨림을 귀신같이 캐치해냈다.
“어쨌든 페르시카 언니가 건강하신 걸 보았으니 이만 가볼게요. 밤이 늦었으니 좀 자야겠어요.”
“그래, 들어가렴.”
페르시카는 책을 보는 척 하면서 곁눈질로 페니아 쪽을 바라보았다.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도서관 출구 쪽으로 향하는 페니아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이 보인다. 페르시카는 잔망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심지 굳은 결정을 내린 자의 뒷모습이다.
“3황녀 페니아가 하룻밤만에 움직이게 만드는 남자라. 로스테일러 저택은 난리가 나겠군. 그 얼굴이 참으로 궁금하다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겠지.”
덮은 책을 스르륵 내려놓고선, 페르시카는 거하게 기지개를 했다.
“이로써, 지금 황실에 남아 있는 황녀는 나 혼자가 되었구나.”
책을 덮고, 도서관의 유리 천장에서 은은하게 내리쬐는 달빛을 받는다.
페르시카는 책더미에서 몸을 일으켰다.
슬슬 움직일 때였다.
*
“나보다 내 아들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해 잘 아는 자는 없다.”
집무용 책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크레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다른 이들은 네가 파문 당한 뒤 철이 들었다, 건실해졌다 평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알고 있다.”
“…”
“내 아들의 마음이, 덥고 추운 야외에서 몇 개월 지냈다 해서 그리 쉽게 희석될 리가 없지. 진심으로 나를 증오했으니까.”
크레핀은 화려한 연미복을 입고, 새까만 장갑을 한 손에 낀 채였다. 장갑을 낀 왼손에는 악신의 각인이 새겨져있을 것이다.
각인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려면 일상 생활을 하는 데 쓸 데 없는 마력 소모가 너무 많다. 그렇기에, 그는 굳이 한 손에 저 장갑을 끼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네게는 그런 증오심을 참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없군. 오히려 마치 달관한 것 같구나. 마치 제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인 듯 나를 보고 있으니, 나는 느낄 수 있다.”
“…”
“너는, 에드 로스테일러가 아니다.”
― 파악!
“꺄아악!”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의 근원은, 서재의 중앙에 서있는 크레핀 로스테일러다.
각인이 새겨져 있을 왼손으로부터 파동이 뿜어져 나오자, 예니카가 소리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 파악!
튀어나온 머그가 날개를 활짝 펴서 바람을 막아주었다.
달빛을 받으며 어깨를 펴고 선 크레핀. 그는 천천히 왼손의 장갑을 벗었다. 역시나, 검붉은 기운이 서린 악신의 각인이 그 손에 자리해있다.
아직 악신의 힘을 완전히 다룰 순 없지만, 불완전하게나마 그 권능을 구현해낼 수는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아르웬을 찌른 나를 용서하기라도 했느냐?”
그 말에 숨을 헛삼키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지. 그 누구보다 아르웬을 믿고 따르던 놈이었으니.”
― 휘익!
각인이 되지 않은 손으로 한손검을 꺼내들었다. 누가봐도 싸울 심산이다.
무기를 꺼낸 것을 보자마자, 예니카가 먼저 반응했다.
― 화악!
아래층에서는 연회가 한참이다. 이런 곳에서 고위 정령을 꺼냈다가는 건물이 무너지고 인명피해가 날 것이다. 어느 정도의 힘 조절은 필요했다.
예니카는 순식간에 정신을 집중해서 거대한 중위 정령을 3기나 현현시켰다.
거대한 날개를 가진 불 박쥐, 물의 형상을 취한 독수리, 흙으로 이루어진 거인이 몸을 일으키자… 꽤나 넓은 서재임에도 공간이 전혀 나질 않았다.
“우, 움직이지 마세요…”
“정령사 예니카 페일로버. 강한 힘을 가졌지만, 상황을 너무 많이 타는군.”
크레핀이 왼손을 꽉 움켜 쥐자, 지지직 거리는 파장이 그의 손을 중심으로 해서 퍼져나갔다.
―카가가가가가각!
순식간에 중위 정령 3기가 모두, 마력으로 된 쇠사슬에 감겨버렸다.
“크읏…!”
예니카는 정령식을 발현해서 사슬을 끊어내버리려 했지만, 그보다 새로운 쇠사슬이 감기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허공에서 솟아난 쇠사슬은 예니카의 양팔을 감고, 허리춤과 다리까지 구속해버렸다.
“으, 크핫!”
예니카는 어렵사리 사슬을 당기며 버텼다. 더 이상 버티고만 있다간 당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고위 정령의 힘을 끌어낼까 고민하던 차, 사슬이 바람 칼날에 잘려나가버렸다.
―화아아악!
내 바람 칼날은 일발적인 기초 마법에 비해서 그 위력이 월등히 강하다.
지난 세월 간 쉬는 날 없이 기초 마법들을 단련해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마법 실력이 좋군.”
“내가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가 에드 로스테일러란 사실엔 변함이 없습니다.”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군.”
“어이 없게 들릴 수 밖에 없겠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쩌겠습니까.”
― 파악!
단검을 꺼내들고 달려들자, 크레핀은 각인이 새겨진 왼손을 아래로 휙 내려치는 동작을 했다.
그러자 큰 충격이 손을 강타하는 느낌이 들더니, 내 손에서 단검이 떨어져나갔다.
― 카강! 캉!
그대로 다시 어깨를 휘두르며 손을 위로 올려치자, 몸이 중력을 거스르고 떠올라서 천장에 부닥쳤다.
“커헉!”
나는 신음성을 내며 이를 악문 채 다시 마력을 끌어모았다.
―파악!
순간적으로 크레핀의 다리춤에 칼에 베인 상처 하나가 생겨난다.
내가 떨어트린 단검의 정령식을 발현해,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이다. 그 경로에 있는 크레핀의 다리를 베어버리는 것은 덤이다.
“큿!”
깊진 않지만 정신을 흐트러트리기엔 충분하다. 천장에 나를 매다 꽂은 알 수 없는 압력도 사라졌다.
나는 그대로 단검을 받아들어서 중력의 힘을 받아 크레핀 쪽으로 단검을 내려찍었다.
―카앙!
들고 있던 롱소드로 간신히 단검을 막아내고, 다시 악신의 힘을 발현하려는 순간 나는 품 속에서 충격 강화 파동구를 꺼내들었다.
― 파아아아아악!
그대로 일시적으로 강한 충격이 주변을 감싸고, 나는 크레핀으로부터 다시 거리를 벌리는 데 성공했다.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의 목표는 크레핀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다. 말했 듯, 그의 가문적 배경과 위광을 먼저 무너트리지 않으면, 그를 제압한다고 해도 그 뒷수습을 할 수가 없다.
―화아아아악.
서재 안에 먼지가 피어오른다. 크레핀은 순식간에 바람을 일으켜서 먼지를 없애버리고, 다시 왼손을 들어올려보였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힘이지만, 4막을 진행해본 나는 대충은 알고 있다.
불완전한 상태라 악신의 힘을 온전히 구현할 순 없지만, 주변의 ‘물리력’만큼은 그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중력, 관성력, 마찰력… 적어도 물리적인 에너지의 흐름은 그의 마력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선 그의 맘대로 조종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의 에너지 흐름이 제 손 안에 들어온 듯한 정복감을 맛보게 해주겠지.
물리력 이상의 것을 조율하기 위해선 긴 집중과, 오랜 마력 축적이 필요하다. 즉석에서 전투에 활용할 수 있는 수준이라 해봐야 이 정도일 것이다.
아직 악신의 힘이 완전히 개방되지 않은 지금. 제압하려거든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지만, 일의 순서는 정해져있다.
나는 손에 마력을 끌어 모았다.
― 콰앙!
마력이 들이닥치고, 한 점에 몰아닥치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
중위 불 마법, ‘일점 폭발’.
크레핀 로스테일러도 그 마력의 속도에 재빠르게 반응해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아쉽게도 그 공격의 방향은 크레핀이 아니다.
― 콰앙!!!!
바닥이 무너져내리고, 그 굉음이 저택을 감쌌다.
평화롭고 즐거운 사교회는 아쉽게도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