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52)
크레핀 토벌전 (3)
로스테일러 가문에 꽃 한 송이가 피었다.
공작 영애 아르웬 로스테일러의 유년기를 지켜보던 유력 귀족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로스테일러 가문을 대륙 최고의 권세가 반열에 올려놓은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업적은 놀라웠지만, 그런 그조차도 정점에 오른 자들이 으레 부딪히는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드높은 권세가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좋으나, 그 위광이 언제까지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좋은 후계자를 얻을 수 있느냐로 귀결된다.
아르웬은 아리따웠고, 현명했으며, 정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로스테일러의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려 했고, 아버지 크레핀의 뜻에 충실히 따랐다.
그 누가 보아도 로스테일러 가문의 다음 세대를 이어받을 역량이 충분했다. 아르웬이 세상에 나오고 난 뒤로는 후계 고민도 일단락되는 듯했다.
이렇게 그림으로 그린 듯 훌륭한 후계자가 있다는 것에 뭇 권력가들의 부러움을 샀고, 그렇게 로스테일러 가문의 미래는 쭉 뻗은 탄탄대로와 같이 여겨졌다.
3살 터울의 동생 에드 로스테일러와, 5살 터울의 막냇동생 타냐 로스테일러에게도 아르웬 로스테일러는 언제나 빛이 나는 선구자였다.
그녀는 첫 세례식이 있기도 전에 온갖 검술, 마법, 연금술 지식뿐만이 아니라 사회학, 제왕학, 영지 경영학, 정치학 지식을 잔뜩 익혔다.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날에는 축하 선물로 원소의 힘을 다루는 마법 대검 ‘여명의 날’을 선물 받았고, 성인식을 치르던 날에는 초대 검성 루덴이 쓰던 8자루의 검 중 하나인 ‘단죄’를 클로엘 황제로부터 하사받았다.
세상이 모두 그녀를 축복하고 있었다.
크레핀 로스테일러가, 악신의 힘에 손을 뻗기 전까지는.
― ‘누님.’
바로 엊그제처럼 느껴지지만, 이젠 꽤나 시간이 지나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만 같다.
장소는 아르웬 로스테일러의 방에 딸려 있는 커다란 테라스다. 낮에는 활기찬 영지의 풍경을, 밤에는 아리따운 밤하늘을 구경할 수 있는 명당이다.
달빛이 은은하게 테라스의 테이블을 비추고 있었다.
아르웬이 자리 잡고 앉은 의자 옆의 화사한 테이블. 퓰란 지방의 유명한 시인이 쓴 시집 한 권, 간단한 다과, 말 몇 개가 누워 있는 체스판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그 옆에서 다소곳이 앉아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아르웬에게, 그녀의 소중한 남동생 에드 로스테일러가 다가와 이야기했다.
― ‘제가 이 책을 어디서 찾았는지 아세요.’
에드 로스테일러는 책 한 권을 툭 던져서 올려놓고, 테이블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서 덩달아 하늘을 쳐다봤다.
아르웬은 곁눈질로 테이블 위를 보았다.
신화시대의 악신, 증오와 분노를 담당하는 ‘메뷸러’에 대해 다룬 역사서였다. 황실에서는 금서로 지정되어 있는 책이다.
심지어 책에는 악신의 강림과 힘에 대한 여러 연구 흔적이 가득하다. 잔뜩 밑줄이 쳐 있고, 중년 남성의 글씨체로 여러 가설이 잔뜩 제시되어 있었다.
― ‘아버님의 서재에서 찾았니.’
― ‘아니요. 누님의 비밀 서가에서 찾았습니다. 역시 원래는 아버님의 서재에 있었던 책이군요.’
그대로 아르웬은 에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잠시 눈가를 떨었다.
에드의 뒤편에는 그의 옷깃을 잡고 숨듯이 서 있는 타냐가 있었다. 아직 어른들의 정치 세계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탓에, 공작저의 귀염둥이 막내로 사랑만 받고 있는 아이였다.
삼 남매 중 유일한 남자이자, 비교적 머리가 굳은 에드는 생각 이상으로 빨리 철이 들었다. 그러나, 귀염둥이 막내는 아직 좀 더 꿈속에 살아야 할 나이였다.
― ‘타냐는… 왜….’
― ‘…….’
아직 타냐는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굳진 않았지만, 그래도 타냐 또한 이 일의 당사자다.
악신의 힘은 피는 대가를 수반한다. 그것은 제 혈육의 피, 몸, 정신 따위를 대가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 제물이 고귀하고 강인하며, 명망 있을수록 악신은 탐욕의 침을 흘린다.
그렇기에, 아르웬 로스테일러는 가장 먼저 그 표적이 될 것이다.
― ‘왜, 아버님한테 따지러 가지 않는지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 ‘에드. 사랑하는 내 동생.’
아르웬은 아련하면서도 복잡한 눈빛으로 에드를 바라보았다.
― ‘모두가 정답을 좇아 살지는 않는단다. 그리고 오답처럼 보이는 길에도 나름대로의 뜻이 있거나, 아니면 더 큰 목표를 위한 과정이 될 때도 있어.’
― ‘아버님은 지금 틀린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걸 긍정하겠다는 겁니까?’
― ‘언제나 오답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정답일 때가 많았지. 한 집단을 이끌고, 가문을 이끌고, 군주의 길을 걷는다는 건 그런 반발로부터 싸워 나가는 거야.’
아르웬은 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득이 되지 않으리란 걸 이미 직감한 모습이었다.
― ‘그리고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건 그 모든 시선과 역경을 걷어 내고서라도 믿음을 잃지 않는 거지.’
― ‘누님.’
― ‘이 또한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한 과정이라고 한다면, 나는 절대로 신뢰를 잃지 않을 거야. 아버님은 때로는 방황하시거나 길을 잘못 들기도 하시지만, 결국엔 언제나 발전하는 방향으로 살아오셨거든.’
그 말에 에드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크레핀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는 것.
로스테일러 가문의 영애로서 평생을 살아온 아르웬에게 있어서, 크레핀이란 그런 존재였다.
그렇기에 가장 유력한 후계자이자, 로스테일러의 이름을 이어받을 적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혈육까지 팔아 얻은 힘과 권력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 ‘에드… 네게 굳이 내 의견을 강요하진 않을게. 다만… 아버님과 대립각을 세우진 마.’
이곳 로스테일러 저택은 모든 것이 크레핀의 손아귀 안에서 돌아가는 곳이다. 그에게 반발하는 순간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언제나 에드를 품어 주었던 요람과도 같은 대저택이지만, 이제는 커다란 관으로밖에 느껴지질 않는다.
아르웬으로 악신을 강림시키지 못한다면 그다음은 에드, 그다음은 타냐에게까지 손을 뻗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호화로운 저택과 드높은 위세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런 삶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차라리 빈민가를 노닐며 구걸하는 거지가 낫다. 그들은…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고, 꿈이라도 꿀 수 있다.
허리를 굽히고 푹 고개를 숙인 에드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 ‘오… 오라버니…?’
그저, 왜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심각한지 모르는 타냐는 쭈뼛거리며 에드와 아르웬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른 채 눈치만 보는 모습이 썩 안쓰럽다.
―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 누님.’
― ‘뭐든지 물어보렴.’
― ‘어디까지 희생하실 생각이십니까. 설령 팔 한쪽을 내놓으라 해도, 웃으며 팔을 자르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아르웬 로스테일러는 아련한 얼굴을 했다.
아르웬을 그 누구보다도 존경하던 에드다. 그러나, 별빛을 받아 아리땁게 드러나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누님.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이어지는 말에, 에드는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 ‘가족이니까.’
― ‘…….’
― ‘날 애지중지 키워 주셨고, 이 거대한 가문의 위광을 물려주셨고, 딸로서 사랑해 주셨지.’
개인적으로 편지도 주고받으며, 가족으로서 서로를 소중히 하던 에드와 아르웬이다.
그러나, 에드는 모든 것이 완벽한 아르웬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반발감을 느꼈다.
엇나간 길로 나아가는 것 같다면, 그것이 친구든 가족이든 여의치 않고 다리를 걸어야 한다.
믿고, 신뢰하고, 바른 방향을 찾아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버티고 있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게 믿고 기다리는 사람을 가족애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아리따운 모습으로 그려내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일인가.
에드의 가슴 한편에 피어오른 그 감정의 그늘이, 남매 사이의 간극을 넓혀 간다.
팔을 모아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에드의 주변에 묘한 귀기가 서린다. 가장 먼저 눈치채고 반응한 것은 타냐였다.
― ‘오… 오라버니….’
― ‘알겠습니다, 아르웬 누님.’
에드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테라스 출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슬픈 듯한 표정으로 제 무릎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르웬과, 아무것도 모른 채 겁먹은 타냐가 보인다.
문득 에드는 입을 열어서 타냐에게 이야기했다.
― ‘타냐.’
타냐가 어깨를 떨며 에드 쪽을 보았다. 평소보다도 어둡고 무섭다. 방 안의 어둠 속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고, 이를 꽉 문 채 감정을 죽인 에드가 타냐를 부른다.
― ‘그쪽에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라.’
테라스에서 달빛을 맞으며 다소곳이 앉아 있는 아르웬과, 방 안의 어둠에서 조용히 노려보는 에드.
그 사이에 선 타냐는 벌벌 떨다가… 이윽고 아르웬에게 가서 안겼다.
― ‘이… 이따가, 갈게요….’
― ‘…….’
― ‘오, 오라버니… 무서워요. 저는, 언니랑 있을래요.’
에드는 고개를 숙인다. 알겠다 말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서 아르웬의 방을 나갔다.
저벅저벅 복도를 걸어 나가며, 이를 악문다. 눈에는 차츰 독기가 서리고, 꽉 다문 입술이 말려들어 간다.
창백한 얼굴을 하며 복도를 나아가는 표정은, 이미 옛 에드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린 타냐는, 그저 아르웬에게 안긴 채 벌벌 떨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나이였다.
― ‘오라버니가 무서워요, 언니… 왜 그러시는 거예요…? 방금 저랑 놀 때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 ‘…많은 것이 변해 갈 거야, 타냐.’
아르웬은 타냐의 얼굴을 쓸어 주며, 슬픈 듯이 이야기했다.
― ‘마음을 굳게 먹으렴.’
* * *
―쿠궁, 쿵!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득한 연회장. 그 문을 박차고 한 무리의 병사들이 들어왔다.
호화롭고 기품 있는 연회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철컥대는 병장기 소리들이 홀을 가득 채웠다.
그 앞에 서 있는 것은,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측근이자 가장 충성스러운 가신인 ‘불곰 기사’ 녹스였다.
거대한 체구를 이끌고 나타난 녹스는 도열해 있는 크레핀의 사병들을 헤치고 나와서 귀빈들에게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현재, 저택 내부에 모종의 이변이 있는 듯합니다. 귀빈분들은 섣불리 움직이시면 위험하실 듯하니, 저희가 여기에 모여서 호위하겠습니다. 일단 홀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금 전의 커다란 폭발 이후에도 수차례의 흔들림이 이어지고 있었다. 귀빈들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지만, 모여든 사병이 귀빈들을 진정시켰다.
“…….”
클라리스 또한 불안한 얼굴로 홀 중심에 앉아 있었다. 계속해서 폭발음이 들려오는 것이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혹시라도 건물이 무너져 내릴까 무서워서, 차라리 건물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싶었으나 사병들은 한사코 귀빈들의 이탈을 저지했다.
“저희 성당 기사단분들을 불러 주세요. 제 개인 호위병대가 있어요. 아마 저택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연락이 닿질 않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연락해 본 건 맞아요…? 이런 상황에 가만히 있을 분들이 아닌데….”
클라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린 채 녹스를 올려다보았다. 태산처럼 고고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그 누가 와도 비켜 주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굳이 클라리스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귀빈들이 제 위치를 들먹이며 당장 길을 비키라 했지만, 사병들은 오히려 창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지, 지금 미친 겐가?!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무기를 들이밀어?!”
“이 일이 공론화되면 어떻게 될지 알아?! 다들 뭐야?! 안 비켜?!”
그럼에도 녹스의 태세는 굳건했다.
“말씀드렸듯이, 모두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단 한 분도, 이 홀을 나가실 수 없습니다.”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귀빈들 사이에서, 클라리스는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모든 귀족들을 다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어지간한 사람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이 자리에 있어야만 할 몇몇 얼굴들이 보이질 않는다.
에드와 크레핀이야 원래 알고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테라스 옆에 서 있던 셀라하 황녀마저 그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클라리스는 고개를 훑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작정하고 사병들을 뚫고 나가려면 나갈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분쟁으로 이어질지는 섣불리 판단하기가 힘들다. 다른 귀빈들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저택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 * *
―콰앙! 쾅! 콰강!
저택 지하의 비밀 연구실.
아마도 크레핀 로스테일러가 악신 메뷸러의 강림에 대해 연구한 장소일 것이다. 그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온갖 곳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의 악행에 대한 증거로 쓸 만한 물건 역시 충분하다 못해 넘쳐서, 그야말로 아무 연구일지나 들고 뛰쳐나가면 될 지경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신속하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광! 캉! 카앙!
계속해서 들리는 폭발음.
아무래도, 루시가 지키고 있는 입구를 크레핀이 뚫어 내는 소리일 것이다. 동원 가능한 모든 마법과 마공학 용품, 무기, 인력을 전부 동원해도 입구를 뚫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루시 메이릴이 작정하고 지키려 든다면, 그 입구는 절대로 뚫리지 않는다.
다만, 루시의 입장에서는 반격하기 애매할 것이다.
크레핀 로스테일러를 나락으로 보낼 수 있는 가장 단적인 증거가 손에 들어왔다는 보장이 없다면, 루시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는 힘들다. 단순히 길을 막은 것과, 아예 제압하겠다는 마음으로 덤벼드는 것은 그 죄질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 내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실베니아 학사 생활은 어땠니? 나름 있을 만했고?”
“지금… 그런 걸 물어볼 때가 아닐 텐데요.”
“하하… 그냥, 긴장을 풀기 위한 사담이란다…. 그래, 많이 놀랐겠지.”
한쪽 눈을 뜬 아르웬의 몰골은 끔찍한 상태다.
크레핀의 연구를 위해 어디까지 가담했는지, 도저히 가늠해 볼 수가 없다. 그 정도로 아르웬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웬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이어 가고 있다.
이 정도로 파국에 치닫는 동안, 아르웬도 아무 생각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단 한 순간에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테지.
긴 세월에 거쳐 아주 조금씩 조금씩 진행되어 온 연구의 결과일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침착할 수 있는 이유 또한, 조금씩 제 몸의 변화를 받아들여 왔기 때문일 테고.
그것은,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보고 있기는 영 힘든 광경이다.
고개를 들어 아르웬의 몸을 관통한 대검을 바라보았다. 첫 세례식 때 선물받은 대검 ‘여명의 날’이다.
온갖 종류의 마법을 각인할 수 있는 마법 대검. 원소 마법이 가장 잘 융화되지만, 이 경우에는 생명을 유지하는 온갖 치유 마법들이 각인되어 있는 듯하다.
대검에 꿰뚫린 채 서 있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인가.
대검에 각인된 마법이라면 유지 보수를 위한 인력도 필요 없고, 마력의 공급도 편할 테니까.
그 무엇보다 소름이 돋는 점은, 아르웬 스스로가 선택한 결말이라는 점이다.
“네가 테라스에서 떠난 그날 이후로,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갔지.”
“…….”
“네 길이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길의 끝은 이래.”
아르웬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정말 놀랍게도 그녀는, 이 선택을 후회하고 있지 않다.
“썩 보기 좋은 모습도 아니고, 너라면 오히려 가슴 아파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만나 보고 싶었어. 에드.”
그 말에, 모든 퍼즐이 맞춰져 나간다.
실베니아의 낙제 검성, 제1장 1막.
테일리에게 억지로 시비를 걸다가 두들겨 맞고 파문당해 사라지는 삼류 악역. 에드 로스테일러.
그가 로스테일러 저택에서부터 걸어왔을 길의 흐름이, 마음속에 각인 되어 천천히 뻗어져 나간다.
금발의 사내가 길을 걷는다. 그에게 주어진 가문의 위광과, 무거운 숙명, 희생될지도 모르는 미래.
크레핀이란 적을 상대하기엔 너무 강대하다. 그렇다고 도망칠 곳도 없다.
그는 매일 밤 자기 방 책상에 앉아, 죽어가는 듯한 얼굴로 고뇌하고, 삶을 회고했을 것이다.
아버지를 설득하려고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결국 그렇게 조금씩 엇나가 망나니가 되어가는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아르웬은 엇나간 크레핀을 긍정했다.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에드는 엇나간 크레핀을 부정했다.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갈림길 사이에서 영문도 모른 채 방랑하던 타냐도, 끝끝내 아르웬의 뒤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에드가 엇나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타냐는 그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드 로스테일러는 혼자 걸었다.
거대한 관처럼 보이는 이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벗어나기 위해, 홀로 방법을 찾아 헤맸다.
거지꼴이 되어 길바닥에서 굶는 한이 있더라도, 예정된 죽음으로 착착 나아갈 수는 없었다.
일단은 이 저택에서 몸이 멀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마법에 재능 따위는 없으면서도 억지로 실베니아의 마법부에 입학한다. 오필리스관에 입사해서, 로스테일러 영지로부터 멀어진다.
그리고, 이 저주받은 핏줄에 새겨진 가문의 이름도 지워 내야만 했다.
에드가 실베니아에 입학한 지 1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슬슬 에드가 없는 로스테일러 저택이 안정화되었을 때… 검성 테일리가 에드의 눈에 들어온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페니아 황녀도 그의 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다.
― ‘더 이상 너를 로스테일러 가문의 적자로 인정하지 않겠다. 영광스러운 페니아 황녀님의 면전에서 경박한 욕설을 일삼은 죄, 신성한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에 부정한 개입을 한 죄, 품위를 도외시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 죄. 모두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것들이다.’
내가 이 세계로 넘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읽었던, 가주의 그 편지.
오필리스관의 제 방에 홀로 앉아, 그 편지를 받아든 금발의 사내는 홀로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평생을 로스테일러의 위광 아래에서 살았다.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기숙사에서도 쫓겨나고, 이제 완전히 맨몸으로 이 험난한 세상 앞에 덩그러니 던져진 사내.
그가 느꼈을 것은 후련함인가, 아니면 두려움인가, 그것도 아니면 끝없는 공허함인가.
아무도 오지 않는 어두운 오필리스관의 방 안에서,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인가.
지금에 와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유추할 수 있는 점은 몇 개인가 있었다.
제아무리 도망쳐 온 학사라지만, 자신의 평가가 얼마나 개판이 나든지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점.
귀족치고는 벨 마이아가 챙겨 주었던 짐이 단출했다는 점. 즉, 평생을 호화로운 삶을 살았음에도 따로 자신의 물건을 거의 갖추질 않았다는 점.
파문당한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계획을 세운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
그렇기에, 오필리스관의 창문을 열고… 가주 크레핀의 편지를 한 손에 쥔 채 묵빛 풍경을 내려다는 그의 얼굴은… 누구보다도. 공허했을 것이다.
그것이, 에드 로스테일러의 생애다.
도망쳐 왔지만, 아켄섬에는 그의 자리가 없다.
아니, 세상 어딜 가든 그의 자리가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이 끔찍하리만치 실감이 나, 에드 로스테일러는 공허한 얼굴로 학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 * *
―콰가가각! 콱!
온갖 원소 마법과 더불어서 악신의 권능까지 사용해 보았지만, 루시 메이릴이 지키고 있는 입구는 뚫릴 마음이 없다.
루시의 표정은 미동도 없다. 잠이 오는 듯 멍한 얼굴로, 가만히 육포를 씹은 채 크레핀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 슬슬 인정할 수밖에 없군.”
크레핀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내려놓고, 천천히 악신의 각인에 힘을 모았다.
“일반적인 방법으론, 네 녀석을 뚫어 낼 수가 없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거운 기운이 밀려 올라온다.
카각 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그 각인의 크기가 커져 간다. 조금씩 그의 몸을 잡아먹는 각인이 이윽고 상반신의 절반을 뒤덮자, 지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궁! 쿠궁!
저택 여기저기에서 사용인들과 귀빈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레핀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힘을 끌어모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크레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정치적인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 그런 늙은 늑대다.
이런 귀빈들이 잔뜩 모인 자리에서 악신의 힘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냈다간, 그는 필시 정치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끝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레핀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힘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콰가각! 콱!
바닥에서부터 기분 나쁜 촉수가 뽑혀 올라왔다. 열 가닥이 넘는 촉수가 넘실거리면서 춤추기 시작했다.
그 기운이 심상치 않았기에, 루시는 육포를 퉤 뱉고, 눈가에 힘을 준 채 크레핀을 노려보았다.
루시가 크레핀에게 필요 이상의 무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은, 그의 정치적 영향력과 가문의 위광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나온다면 이야기가 또 다르다.
악신 메뷸러.
온전히 현현한다면, 제아무리 루시라 해도 꽤 진지해져야만 하는 상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