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53)
크레핀 토벌전 (4)
―콰광, 쾅! 카앙!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건물에서 폭발이 몇 번 일어난 수준이 아니다. 아예 이 지하 연구 시설의 지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지하에 위치한 시설이니만큼 그 진동이 그대로 느껴져 온다. 홀의 외벽을 두르고 있는 벽돌 사이 사이에서 흙먼지가 떨어져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투둑, 툭.
모래 몇 알인가가 떨어져 내려와 창백한 아르웬의 볼에 튕겨 나간다.
“시작되었구나.”
의미심장한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인 아르웬의 몸도 이리저리 떨리기 시작했다.
―쾅! 콰가강! 파바바박!
―휘리릭! 휘릭!
“꺄아아악! 저게 뭐야!”
예니카가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지반을 타고 무엇인가가 뚫고 올라왔다.
기분 나쁜 살점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촉수다. 크기도 작지 않은데 그 수도 만만치 않다.
보기만 해도 메스꺼운 점액질을 흘리며, 여기저기서 솟아오른 촉수가 지상을 향해 뻗어 나간다.
지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더 볼 것도 없이, 악신 메뷸러의 강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미친….”
절로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크레핀의 약점을 채기 위해 로스테일러 저택까지 왔지만, 아예 메뷸러랑 맞서 싸워야 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악신의 강림을 목격당한 순간 크레핀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크레핀의 주도로 로스테일러 저택 지하에서 악신 메뷸러의 강림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가장 단적인 증거.
잔뜩 쌓인 서류들도 필요가 없다. 그저 땅을 가득 메운 메뷸러의 그 흉측한 촉수들이 적나라한 증거가 되어 줄 것이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수많은 귀빈과 명망 있는 학자를 제물로 삼아, 재앙의 힘을 자기 손아귀에 집어 넣으려 했던 미친 작자인 것은 맞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 나간 작자라고 해도 신중할 때는 신중했다. 아무리 철벽같은 루시가 길을 막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함부로 악신의 힘을 끌어낼 인간은 아니다.
필시, 다른 변수가 있었을 것이다.
정사대로라면 아직은 크레핀이 악신의 강림을 시도할 시기가 아니다. 내가 알기론 다음 학기는 되어야 크레핀이 본격적으로 메뷸러를 불러낼 준비를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라 함은….
“페니아 황녀…?”
“…에드!”
갑자기 머리가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진동에 못 이겨 이리저리 몸을 못 가누는 예니카가 걱정스러운 듯 나를 불렀다.
“에드! 곧 있으면 무너질 것 같아! 빨리 지상으로 나가야 해!”
“…….”
내가 아르웬 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아르웬은 시선을 내리깐 채 미소 지어 보였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어서 탈출하렴.”
“…뭐라고요?”
“아버님은 절대로 날 죽게 내버려 두지 않거든.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며, 조금씩 무너져 가기 시작하는 천장 아래에서 아르웬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창백한 표정과 맞물리니 마치 유령 같은 느낌이 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한다.
예니카는 그런 모습을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도 잠시간 망설이다가, 이내 이를 악물고 예니카의 손을 잡아끈 채 뛰었다.
방금 지나왔던 감옥들을 지나서 달려 나가니, 온갖 연구 자료들이 가득한 연구실이 다시 튀어나왔다. 여기도 기분 나쁘게 생긴 살점 촉수들이 지상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나는 연구실 사이를 달려 나가면서도, 손에 잡히는 자료를 집어서 닥치는 대로 휙휙 넘겨서 읽어 보았다.
연구 자체는 거의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는 모양새였다.
크레핀이 아켄섬에 찾아와 악신의 강림을 시도하는 것은, 주인공 세대가 2학년 겨울 방학을 맞이할 즈음이다.
즉, 지금부터 적게 잡아도 반년은 남아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연구 자료들을 훑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연구가 완전히 막바지에 접어든 상태다.
지금 당장 악신의 강림을 시도해도 문제없을 정도로 그 마법식과 마력 흐름에 대한 연구가 끝난 상태인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에 합당한 제물들뿐.
―공교롭게도,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열리는 이 사교회만큼 품질 좋은 제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은 없다.
크레핀의 연구 속도가 정사에 비해서 말도 안 되게 빨라진 것은 확실했다. 연구 완료가 거의 반년은 앞당겨졌으니, 예상보다 빨리 악신의 강림을 시도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그 원인을 따져 보자면 수많은 사건들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일일이 따질 것 없이 그냥 핵심만 말하자면, 페니아 황녀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인이라고 생각해 볼 만한 게 그것뿐이다.
정사에서는 페니아 황녀가 학생회장이 되어서 학사 세력과 황실 세력을 이용해 크레핀을 꾸준히 의심하고 견제했다.
허나, 지금의 학생회장은 로스테일러 가문에 제법 우호적인 타냐 로스테일러다.
타냐는 크레핀의 행적에 의심을 품고 있긴 했지만, 자기 가문의 가주인 그와 적극적으로 대립하려 들진 않았다.
페니아 황녀의 공격적인 견제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움직임이다.
을 플레이할 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페니아의 그런 행보는 단순히 정치적으로 크레핀을 압박하는 걸 넘어서, 그가 연구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 공작으로 작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페니아의 방해가 없으니 크레핀의 연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결국 예상보다 빨리 마무리되어, 굳이 제물을 확보하겠답시고 번거롭게 실베니아 아카데미를 습격할 필요도 없어졌다. 시기적절하게 열리는 사교회의 참석인들을 이용하면 그만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니, 그가 로스테일러 가문의 복권을 명분으로 나를 이 저택으로 불러낸 이유까지도 명확해졌다.
메뷸러의 강림을 시도하는 김에 나까지 제물로 삼아, 한 번에 처리해 버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역량과 평판도 모두 돌아오고 있다고 하니, 로스테일러 가문으로 복권까지 시켜 명예를 회복시켜 주면 제물로서는 딱인 것이다.
―쾅!
연구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박차고 열었다. 그대로 벽돌로 이루어진 복도를 쭉 타고 달려 나갔다.
예니카는 숨을 헐떡이면서 이를 악물고 따라왔다. 너무 힘들어 보이길래, 나는 아예 예니카를 들쳐 업고 뛰었다, 마음 같아선 정령을 소환해서 타고 날아가고 싶었지만, 복도의 공간이 너무 협소해 그럴 수는 없었다.
“우, 우아앗?! 에드?!”
몸을 휙 들린 예니카가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붉혔지만, 그런 풋풋한 반응을 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후두둑, 쾅! 콰광!
복도 바닥에서도 축수가 튀어나와 지상을 향해 쭉쭉 뻗어 나갔다. 촉수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오르막 계단을 따라 뛰었다.
“에, 에드… 나 안 무거워…?! 안 힘들어?!”
“안 무거워!”
“다행이다악!”
대충 휙 대답해 주고 그대로 속도를 올렸다. 마구 흔들리는 지반 사이로 벽돌이 떨어져 내렸다. 잘못해서 머리에 직격하면 그대로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올라 오자 드디어 지상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나는 더 잴 것도 없이 문을 박차고 나왔다.
―쾅!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
지상의 상태가 평범하리란 생각은 안 했다. 그래도 생각 이상으로 마경이 된 꼴에… 예니카도 나도 헛숨을 삼키고 말았다.
커다란 외벽으로 둘러싸인 로스테일러 저택 부지는 총 다섯 개의 건물이 둥그렇게 배치되어 있다.
제일 호화로운 중앙 저택의 3층이, 우리가 나온 출구가 있는 곳이다. 취사장 옆 비밀 공간에 몰래 만들어진 곳인 만큼 구석지고 어두운 공간이어야 하건만, 의외로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그건 바로… 중앙 저택의 외벽이 절반 이상 날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로스테일러 저택 부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용인 숙소, 첨탑, 중앙 저택, 별관에 이르기까지 멀쩡한 건물이 하나 없다.
그러나, 지금은 건물 상태에 집중할 때가 아니다.
―휘이이익.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휘날렸다.
달이 밝게 빛나는 밤, 그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촉수가 쑥쑥 솟아올라 있다. 건물보다도 드높게 솟은 촉수들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주변의 모든 것들을 부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밝은 달을 배경으로 거대한 살점 하나가 공중을 부유하고 있었다.
어찌나 거대한지 건물들의 잔해들마저도 블록 장난감처럼 보인다.
그것에, 눈알이 달려 있다.
인간에게는 두 개의 눈이 달려 있지만, 증오와 분노를 관장하는 악신에게는 그보다 더 많이 필요한 것일까.
수십 수백 개의 눈알이 사방에 달려, 온 세상을 관조하듯 꾸물거린다. 보고만 있어도 닭살이 돋을 정도로 불쾌한 광경이었다.
그 뒤 창공에는 하늘이라도 뒤덮을 기세로 수십 겹의 마법진이 겹쳐져 있다. 처음 봐서는 그 마법진의 정체를 가늠할 수 없겠지만, 나는 이미 몇 번이고 그 마법진을 본 적이 있다.
제4막 최종전.
크레핀 토벌전에서 아켄섬의 하늘을 뒤덮던, 바로 그 마법진이다.
“에, 에드….”
“잘 들어, 예니카.”
나는 예니카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고, 두 눈을 똑바로 맞춘 채 이야기 했다.
“저 마법진은 악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구현된 거야. 메뷸러의 마력을 빌려서 발현된 것이겠지. 악신 메뷸러는 절대로 대가 없이 인간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아.”
“그, 그럼….”
“그래. 저 법진이 발현되는 순간 범위 안에 있으면… 아마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예니카의 눈이 가볍게 떨렸다. 온갖 생사의 위기를 물리치고 버텨 온 나지만, 예니카에게 있어서는 죽음이란 여전히 아득히 멀리 있는 듯한 개념이다.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목격한 건 너랑 나뿐이야. 그러니까, 우리 둘 중 하나는 살아야 돼.”
“미리 범위 밖으로 도망쳐 있으라고 말하면 화낼 거야.”
그러나, 예니카는 내가 다음에 할 말조차도 예측해서 미리 쳐 내 버렸다.
“잘 들어, 에드. 나는 에드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
그리고는 내 옷깃을 확 잡아당긴 채, 똑바로 들으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늘상 순둥순둥하던 그 예니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둘 중 하나가 살아남아야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둘 다 살아남아야 해. 어차피 에드가 죽으면….”
그렇게까지 말하고, 예니카는 히끅하고 딸국질을 해 댔다. 내 표정을 보고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새삼 자각이 된 것이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탓에 본인도 흥분한 것일까. 말을 가리지 못하고 튀어 나간 대로 해 댄 뒤에서야 본인의 실책을 깨닫는다.
“마, 말이 그렇다는 거긴 한데에….”
“고마운 이야기지만, 일단은 그런 걸로 실랑이할 시간이 없는 것 같다.”
창공에 떠오른 메뷸러의 형상. 그 악신은 언제고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미 악신의 촉수가 건물을 부숴 가며, 사람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악신과의 계약이 끝나면, 크레핀은 세상의 섭리조차 무시하는 그 권능을 다룰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에선 게임 오버 판정을 받아, 그대로 크레핀이 클로엘 황실을 치기 위해 진격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끝이 나게 된다.
이미 귀빈의 목숨을 담보 잡고, 금기에까지 손을 댄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상황이다.
순식간에 제국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행보이니, 그 힘을 이용해 무언가를 더 해 나가려거든 결국 권력까지 그 손에 쥐는 수밖에 없다. 선을 넘어서 나아가려거든, 결국 끝까지 나아가야만 하니까.
“이미 악신은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어. 아마 귀빈들이 모여 있을 연회장도 난리가 아닐 거야.”
도망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면, 나라고 해서 예니카를 더 설득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태 파악을 재빨리 끝내고 일의 우선순위를 배분할 뿐이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인명 피해가 없는지, 있으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 해…. 그리고 구할 수 있을 법한 사람은 싹 다 구해. 예니카 너는 다루는 정령도 많으니까 한 번에 큰 범위를 다 커버할 수 있겠지.”
“그럼… 에드는?”
“나는 크레핀 로스테일러를 잡으러 간다.”
그 말에 예니카는 다시금 눈가를 떨었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 나는, 모든 유종의 미를 거두러 간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날아와, 지난 몇 년간 투닥거렸던 로스테일러 가문과의 그 지리멸렬한 인연의 끝을… 모두 마무리하러 간다.
“그럼 저… 하늘에 떠 있는 기분 나쁜 악신은 어떻게 해야 해…?”
“그건….”
―쿠구궁, 쾅!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우리가 서 있는 옆 취사실 쪽으로 누군가가 날아와 꽂혔다.
―카가가각!
―후두둑.
건물 잔해 몇 개가 무너져 내려와 그 위를 덮치지만, 손짓 한 번에 폭발음과 함께 튕겨져 나갔다.
―콰강, 칵!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 벽에 내다 꽂힌 사람의 형상이 천천히 눈에 들어온다.
“콜록, 콜록….”
왜소한 몸집. 마녀 모자가 날아갈까 봐 고쳐 잡고서는 재채기를 해 대는 모습.
루시 메이릴은 그대로 내다 꽂힌 채 가만히 앉아, 멍한 눈으로 하늘의 메뷸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루시!”
나는 그대로 얼른 몸을 돌려서 루시 쪽으로 달려 나갔다. 루시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내가 몸을 구부리자, 루시는 얼른 내 팔뚝을 양손으로 휙 잡아끌더니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워낙에 가벼워서, 그 일련의 동작이 순식간에 끝나 버린다.
“저거 확실히 만만치 않네.”
엄청나게 높은 상공에서 건물 잔해까지 그대로 내다 꽂혔지만, 흙먼지가 몸에 좀 묻었을 뿐 생채기 하나 없다.
다만, 자존심이라도 구겼는지 꽤 열이 받은 표정이다.
“야, 괜찮은 거 맞아?”
“마력 운용 방식이 너무 특이해서, 방어 마법이 아예 안 통해. 중력계 마법을 쓰는 것 같다가도, 단순히 물리력만 구현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일반적인 마법 형태가 아냐.”
루시치고는 주절주절 말이 많다. 그만큼 상대가 이례적이라는 이야기다.
“일반적인 형태의 마력 운용으로는 아예 받아칠 수가 없는 마법을 쓰네.”
이미 어지간한 형태의 마력은 모두 다룰 줄 아는 루시다.
그런 루시조차도 생소한 상대. 그만큼 악신 메뷸러는 인간의 이해 범주를 뛰어넘은 적이다.
나는 조용히 이를 악물고 고민하다가, 이내 품속에 손을 넣으며 이야기했다.
“루시. 이 이상 위험해진다면….”
“내가 이겨.”
그러나 루시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정해 버린다.
“마법 전투가 아니라 단순한 마력 소모전에 가까워질 테니,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대로 루시는 마녀 모자를 휙 벗어서 대충 취사장 바닥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사이즈에 맞지 않는 외투도 벗어서 모자 근처에 던져 놓고, 흙먼지가 가득 묻은 셔츠의 팔을 걷어붙였다.
그리고 졸린 듯한 눈을 거둔다. 부릅뜬 두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자, 이윽고 주변에 루시의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화아아아악!
샘솟아 오르는 마력의 기운. 사실 주변을 가득 채운 수준이 아니다.
이 일대가 아예 루시의 마력으로 뒤덮여 가고 있다. 흘러나오는 수준의 마력만으로도 대기가 떨리기 시작한다.
작은 재앙이 움직인다. 마음만 먹으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다.
“…….”
그대로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쫙 펼친 손끝에, 메뷸러가 한 손에 잡힐 듯 하늘을 부유하고 있다.
하나를 구현하는 데에도 일반적인 마법사가 하루 종일 걸리는 고위 법진. 그 법진 수십 개가 메뷸러를 중심으로 다닥다닥 구현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모든 법진보다도 훨씬 더 거대한 법진이 메뷸러의 위를 뒤덮는다.
그 순간, 메뷸러의 모든 눈동자가 루시를 향한다. 세상을 관조하는 악신조차, 그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는 재앙의 근원이 그곳에 있다.
마지막으로 메뷸러를 중심으로 거대한 방어 법진이 수십 겹 덮여진다. 최고위 방어 마법 ‘정수의 벽’이다.
마치 메뷸러를 지키려는 듯이 구현된 방어 마법이지만, 그 반대다. 내부의 폭발로부터 주변을 지키기 위해 루시가 발현한 법진이다.
이윽고, 루시가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밤하늘에 태양이 피어올랐다.
어두침침하던 밤의 어둠이 순간적으로 걷어지고, 아주 잠깐 동안 세상은 밝은 대낮을 맞이한다.
―화아아아악!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폭발음이 아니라 화산이 분출되는 소리 같다. 이것이 인간이 일으킨 마법인지, 아니면 신이 분노해 일으킨 자연재해인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고위 폭발 마법 ‘파멸’. 58연격.
거기에 덧붙여 최고위 폭발 마법 ‘창세의 순간’.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 발현한 최고위 방어 마법까지.
고위 마법 하나를 구현하기 위해, 아카데미 원로급 교수 인력이 온 정신을 집중해야만 한다.
그런 법진을 쉰 개가 넘게, 숨 쉬듯 구현해 내는 괴물이 이곳에 있었다.
전력을 다한 루시는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은 그 무언가다. 굳이 구구절절 이야기할 것 없이, 괴물이라는 뜻이다.
“으읏.”
잠시 빈혈이 올라오는지, 루시가 비틀거리며 내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내 팔을 꼭 안으며 몸을 가누고서는, 다시 밤이 도래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메뷸러의 형상이 보인다.
그 말도 안 되는 폭발을 버티고 유유히 하늘을 떠도는 모습. 수많은 눈동자 중 몇 개는 상처를 입었지만, 여전히 그 힘을 잃지 않고 있었다.
유효타지만, 치명타는 아니다.
그리고 메뷸러는 깨닫는다. 이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가장 위험 요소가 누구인지.
순간적으로 저택의 주변에 온갖 마법진이 구현된다. 그와 동시에 솟아오르는 촉수가 몰려들어 루시의 그 가냘픈 목을 비틀기 위해 달려들었다.
루시는 손을 다시 휘젓는 것으로, 모든 마법진을 다 파괴해 버리고 촉수를 비틀어 꺾어 버렸다.
그리고 옷을 탁탁 털고는, 뻥 뚫린 외벽 쪽으로 휙 나가서 하늘을 똑바로 올려다본다.
“내 근처에 있으면 위험하겠다.”
루시는 그리 말하고 뒤돌아보았다.
창공에 떠오른 수많은 촉수들과, 끔찍한 메뷸러의 형상. 제물을 위한 법진, 별이 수놓인 밤하늘.
그 기묘한 풍경을 배경 삼아 서서 내게 말했다.
“그 남자를 잡으러 갈 거지?”
“그래.”
“나한테 저 골칫덩어리를 던져 놓고 별관 쪽으로 뛰어갔어. 아마 저 하늘에 새겨진 법진을 발현할 생각이겠지.”
휘날리는 바람이 루시의 머릿결을 흩트려 놓는다. 루시는 잔뜩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어 내면서 이야기했다.
“그 남자가 아마 저 악신을 불러낸 매개겠지. 그 남자를 잡아서 제압할 수 있다면, 저 눈알 덩어리도 많이 약해질 거야. 그럼 내가 마무리하기 편해져.”
“그때까지 버틸 수는 있겠고?”
“버텨?”
루시의 표정은 역시나 미동도 하지 않는다.
“버티는 건 내가 아니라, 저 눈알 덩어리야.”
끝까지 싸우면 내가 이긴다. 그 자신감이 묻어져 나오지만, 아쉽게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우리 쪽이다.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인명 피해가 나온다. 심지어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귀빈들뿐이다.
또한, 메뷸러의 힘을 완전히 구현하게 되면 그 피해는 로스테일러 영지에서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일 잘 마무리해. 난 그거 도와주러 온 거니까.”
그렇게 이야기하고 루시는 창공에 휙 하고 몸을 던졌다. 그 와중에 구석에서 상황을 보던 예니카를 쳐다보고선, 도끼눈을 뜬 채 한숨을 푹 쉬는 모습까지 보여 준다.
그대로 루시는 바람을 일으키고, 비행 마법을 이용해 메뷸러 쪽으로 몸을 날렸다.
* * *
―콰가가강! 쾅!
“꺄아아아악!”
“호위대를 불러! 호위대!”
“살려 줘! 크아아악!”
연회장은 이미 아수라장이 된 지 오래였다.
외벽이 무너지고 촉수들이 밀려들어 오면서, 전투 능력이 있는 자들은 맞서 싸우기 시작했지만… 고위 귀족들은 모두 울부짖으며 도망치기 바빴다.
그 와중에 무너진 외벽 너머로 보이는 악신의 모습과, 하늘을 수놓는 거대한 폭발까지. 급박히 돌아가는 상황에 모두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뿐이다.
“사병들은 뭘 하고 있는 건가…!”
불곰 기사 녹스가 끌고 온 로스테일러의 사병들은 그 와중에도 입구를 봉쇄한 채 움직이고 있지 않다.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귀족 하나가 사병의 뒤통수를 발로 차며 움직이라고 했지만, 모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놈들, 미친 게냐…!”
“다들 비키세요…!”
“…클라리스 님!”
전투가 한창인 연회장. 그 인파 사이를 뚫고 성녀 클라리스가 나왔다.
블룸리버 가문의 가주, 시니르 블룸리버를 중심으로 전투원들이 귀빈들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인력에 비해 비전투 인력이 압도적으로 많다. 언젠가는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금 당장 주둔 중인 성당 기사단 쪽으로 연락을 취해야겠어요…!”
이렇게 난리가 난 판국이다.
굳이 성녀의 지시가 없어도 영지 근처에서 주둔 중인 성당 기사단 인력은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녀와 직접적으로 연락이 닿지 않은 이 상황이 썩 좋진 않다.
사도급 인력까지 데려오진 못했지만, 훌륭한 전투 요원이 꽤 많이 있다. 저택 전체가 위험지인 지금에서야, 싸울 수 있는 인력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했다.
그러나, 녹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령 불복종인가요?”
“다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일 뿐입니다.”
“뭐라고요…?”
그렇게 대답한 녹스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 투구를 벗었다.
그 모습을 본 클라리스는 물론이고, 그 옆에서 난리를 피우던 고위 귀족, 그리고 한창 전투 중인 다른 사람들까지도 모두 표정이 굳고 말았다.
투구가 가려진 부분은… 모두 기괴한 살점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등 쪽에서는 기묘한 촉수까지 돋아난 것이, 이미 사람의 모습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우윽…!”
순간적으로 다리의 힘이 풀릴 뻔했지만, 클라리스는 휙 몸을 뒤로 당기며 이성을 되찾았다.
이미 수십 수백 번의 죽음을 반복한 경험이 있는 소녀다.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에도 재빠르게 대처할 침착함을 갖추고 있지만, 그렇다고 당장 눈앞의 기괴한 광경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 성녀님… 떨어지십시오…!”
“이 사병들… 모두 이상합니다…!”
쩌억쩌억, 살점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사병 하나가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성녀에게 그 손아귀가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화악!
날아든 얼음 창이 사병의 팔을 꿰뚫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빙결 마법들에 사병들이 하나하나씩 쓰러졌다.
촉수를 상대하던 늙은 여중년 마법사, 시니르 블룸리버가 성녀를 지키고 섰다.
“클라리스 성녀님. 뒤로 물러서십시오.”
“저는 괜찮아요. 어지간한 공격에는 모두 대응 가능한 가호가 있어요.”
클라리스가 침착하게 고개를 가로젓지만, 시니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튀어나와서 외쳤다.
“모두… 저택에서 탈출해야만 합니다! 이건 로스테일러 가문의 함정입니다!”
그 말에 연회장의 귀빈들은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