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55)
크레핀 토벌전 (6)
선대 가주 브람스 로스테일러는 황실의 2인자 찬탈 과정에서 독살당했다.
숙부 바인 로스테일러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투에 버림 말로 쓰여 아인족에게 죽임당했고, 정부인 마리 로스테일러는 경쟁 가문에게 암살당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자들이 권력의 손아귀 위에서 놀아나다 세상을 떴다. 크레핀이 앉아 있는 가주의 옥좌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분노하거나, 혹은 미쳐서 날뛰는 일도 없이… 조용하게 옥좌에 앉아 세상을 관조했다.
확실하게 황실의 2인자 자리에 올랐고, 가문을 이용하려 드는 불한당들을 단죄했으며, 암투를 걸어오는 경쟁 가문들을 멸문시켰다.
점차 사람을 죽이는 데에 거리낌 없어졌고, 누군가를 이용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본 모습을 숨기고 자애로운 공작인 양 영지를 거닐지만, 그가 걸어온 길엔 언제나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태어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악인이 되었고, 그 사실을 정당화하지도 누군가에게 이해받으려 하지도 않았다.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을 때, 선조인 브람스 로스테일러가 그에게 속삭이던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이 권모술수와 암투가 난무하는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둘 중 하나뿐이다.
영웅이거나, 악인이거나.
영웅이 될 수 없다면 철저하게 악인이 되어라.
합리화하지도, 가책을 느끼지도 말고, 그저 고고히 악인으로서 군림해라.
로스테일러 저택의 별관 옥상.
영지를 내려다보며 난간에 앉아 있는 크레핀의 어깨에, 무겁디무거운 수백 개의 짐이 올라서 있다.
무엇하나 가볍지 않다.
희생의 법진이 완성된다면 모여든 귀빈 중 절반 이상은 죽어 나갈 것이다. 그렇게 메뷸러는 고귀한 자의 영혼을 배불리 먹고, 남은 평생 그 권능을 다룰 수 있는 힘을 크레핀에게 하사할 것이다.
“…….”
그에게는 많은 변명거리가 남아 있었다.
악인으로서의 자신을 정당화하고, 비틀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댈 많은 수단이 있다.
이를테면, 크레핀을 향한 기대와 신뢰다.
진흙탕 속을 구르기로 결심한 그를 끝까지 신뢰해 준 아르웬과 가신들의 믿음. 결국엔 크레핀의 길이 옳을 것이라며 보내 주는… 그 조건 없는 무한한 신뢰.
그 무게가 그를 더 이상 뒷걸음질 치기 힘들게 만들어, 더욱더 그를 어둠의 길로 깊이 밀어 넣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현재 에드의 방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1막 보스 예니카의 사정이다.
혹은, 잃은 것에 대한 회한일 수 있다.
권력 찬탈 과정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멘토 브람스나, 암투 속에서 죽어야만 했던 그의 정부 마리. 잃어야만 했던 인물들이 그의 가슴에 걸쭉하게 남아, 타협하지 말고 철저한 악인이 되라고 자신의 귀에 속삭이고 있다면… 꽤나 그럴싸하다.
――그것은 마치, 잃은 딸에 대한 회한으로 끝끝내 죽음을 맞이한 2막 보스 글래스트의 사정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허무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권력의 끝에서 많은 자들을 죽이고 올라섰지만, 결국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커다란 저택과 넓은 영지뿐이다.
가족들은 모두 죽거나 흩어지고, 그나마 끝까지 자신을 따라 주던 아르웬은 제 손으로 반 불구를 만들었다.
결국 그의 생애에 남은 건 강대한 힘과 권력밖에 없으니, 악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 길의 끝까지 달려 나갈 수밖에 없게 된 사정이라면… 썩 나쁘지 않다.
――그것은… 일평생을 강자로 살다, 글록트를 잃은 뒤 삶의 이유 또한 사라져 버린 3막 보스, 루시의 사정이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아도 썩 나쁘진 않겠구나.
크레핀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 어떤 쪽으로도 타협하지 않는다.
반파된 난간이 마치 왕의 옥좌 같다.
그 위에 고고히 앉아, 그는 고개를 숙이고 때를 기다린다.
악인으로서 태어났으며, 죽는 그 순간까지 악인으로서 죽는다.
끝까지 더럽혀지지 않는 순수악으로서 세상을 논한다.
그것이, 그가 살아남기 위해 평생토록 취한 태도였다.
그 순수성이 온전히 자리 잡아 있는 한, 그 어떤 풍파도 그를 흔들어 놓을 수 없다.
4막 최종 보스.
가주 크레핀 로스테일러가 고고히 세상을 관조하고 있었다.
* * *
단검이 촉수를 갈라 냈다.
정령식이 발현되어 불꽃까지 피어올라, 완전히 촉수를 두 동강 내 버렸다. 에드가 검을 갈무리하며 다시 뒤로 도약하는 순간, 머그의 불꽃이 복도를 통째로 불태워 버린다.
지배당한 사용인들이 쓸려나가 길이 뚫렸나 싶더니, 이내 그렘린들이 창문을 깨면서 난입한다.
―캬아아아악!
흉악한 소리를 내는 악마들이 날붙이를 들고 에드의 몸을 향해 뛰어들었지만, 바람이 피어오르더니 그렘린들을 죄다 벽에 메다꽂아 버렸다.
그의 등 뒤에서 휙 하고 피어오르듯 현현된 백발의 소녀가 한 번 더 손을 휘두른다. 그렘린들은 그대로 바람의 압력에 짓눌리고, 이어지는 머그의 불꽃에 모두 불타 버린다.
그렇게 에드는 1층의 복도를 가로질러서 뛰어갔다.
복도를 뛰는 것은 예니카와 클라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중앙 저택의 복도를 가로질러서 에드의 방에 도착한 둘은, 잠긴 문을 그냥 부숴 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재빨리 에드의 지팡이를 챙겨서 나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방이 넓어서 어디부터 찾아야 할지 헷갈렸다.
에드의 지팡이는 부피가 꽤 큰 편이다. 침대 밑이나 장식장 뒤편을 뒤져 보다가, 이윽고 커다란 업무용 책상 아래에서 에드의 지팡이를 발견했다.
그대로 예니카는 지팡이를 챙겨 들어서 클라리스에게 건네주었다.
예니카는 중앙 저택에 남아 귀빈들을 호위해야만 했다. 귀빈들을 모두 내보낸 뒤, 직접 에드에게 가려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성녀 클라리스는 거의 모든 종류의 공격으로부터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성법의 가호가 있다. 어지간해서는 안전하니, 지팡이를 전달해 줄 만한 사람으로서는 적임이었다.
클라리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지팡이를 꽉 안아 든 채 얼른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예니카가 클라리스를 불러 세웠다.
클라리스가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려서 예니카를 보자, 예니카는 에드의 개인용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편지들을 살폈다.
양이 엄청난 탓에 모든 내용을 다 읽어 볼 수는 없었다. 허나, 그 편지 사이에 떨궈진 깃털 하나가 예니카의 눈에 밟혔다.
그 깃털을 집어 들고는, 끝을 잡고 이리저리 휙휙 돌려 보더니… 이내 클라리스에게 깃털을 넘겨주었다.
클라리스가 의아해하자, 함께 전해 주라고 예니카가 덧붙였다.
중앙복도 1층에서는 셀라하가 데스트와 같이 중앙 저택을 나서고 있었다.
중앙 저택 앞의 정원은 이미 온갖 괴물들이 전부 난도질 되어 있었다. 에드가 별관으로 향하면서 날뛴 흔적이었다.
셀라하 황녀는 미간을 좁히고선 주변을 살폈다. 난장판이 된 로스테일러 저택 부지엔 여전히 괴물들이 가득하다.
데스트가 더 이상 나가면 위험할 수 있다고 셀라하 황녀를 만류했다. 셀라하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젓고서 정원을 따라 걸어 나갔다.
한편, 귀빈 무리를 끌고 있는 시니르 블룸리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예니카가 끌고 가세한 정령들의 무리 덕에 남아 있는 귀빈들의 목숨을 지킬 수는 있었다. 거기다가 중앙 저택의 복도를 예니카가 뚫어 준 덕택에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루트까지도 확보가 되었다.
시니르는 귀빈 무리를 이끈 채 얼른 복도 쪽으로 나왔다. 조심스럽고 침착하게, 숨을 죽이고서 복도를 가로질러서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아직도 창문 밖 상공에는 그렘린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정령들이 가득했다. 귀빈들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뛰어나가고 싶은 욕구를 꾹 참았다.
모두가 각자의 행선지를 향하고 있다.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달려 나가는 와중에도, 시간은 착착 흘러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궁지에 몰린 자는 아마도… 타냐 로스테일러였다.
―쾅! 쾅!
“…….”
사용인들이 식량 저장고의 문을 박차고 있었다. 타냐는 자기 어깨를 끌어안고 덜덜 떨었다.
저택 부지의 중앙에 솟아있는 첨탑.
그 첨탑의 중간층에 있는 저장고에서, 타냐는 문을 가구들로 틀어막은 채 버티고 있었다.
―파아아악!
―파드득!
그렘린의 단검에 나무문이 확 하고 꿰뚫리더니, 그 구멍 사이로 소름 돋는 눈알이 보였다.
“으, 으윽….”
타냐는 얼른 문을 더 보강하고, 저장고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 * *
―콰광! 쾅!
길을 뚫는 것은 일사천리였다.
머그와 레이시아의 힘을 활용해 소모품인 마공학 용품들을 최대한 아꼈다.
마력도 좀 아낄 필요가 있었으므로, 메릴다의 힘은 부분적으로만 현현해서 사용했다.
거기다 기초 원소 마법을 덧대 쓰는 것만으로도 길은 쭉쭉 뚫려서, 어느덧 나는 저택 별관의 2층을 향해 뛰어올라 가고 있었다.
별관 2층에는 좀 더 흉측한 괴물이 가득했다. 매끈하던 촉수조차 온갖 기괴한 살점이 들러붙어서 더 강한 힘으로 압박해 왔고, 피부가 붉어진 그렘린들은 광폭화 마법이 걸린 채 날붙이를 던져 댔다.
―카아아아악! 캬아아악!
기괴한 소리를 내는 사용인들의 모습은 이젠 인간의 형체가 거의 남아 있질 않다. 살점 덩어리에 팔다리가 달려 있는 느낌이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매스꺼워지는 광경이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마법을 발현해 가며 모두 제압했다.
[ 에드 도련님! 일단 계단 쪽 공간을 확보했으니 쭉쭉 올라갑시다! 이 불초 머그가 후방을 확인하겠습니다! ]“복도 쪽 정리 안 하고 가면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어!”
[ 그러면 차라리… 일단 옥상까지 올라간 다음에 옥상 입구를 부숴 버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 타당하네!”
머그의 말을 받아치면서, 나는 재빨리 계단을 따라 뛰어올라 갔다.
[ 오옷! 제 직언이 통했군요! 이렇게 늠름한 중위 정령까지 되었는데, 책사로서의 역할까지 해내다니… 장하다 나 자신…! ]사실 조금만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방책이지만, 굳이 그걸 지적하고 들어가서 신난 머그의 기를 죽이진 않았다.
[ 에드 도련님. 위쪽에 그렘린 무리가 더 옵니다. ]침착한 레이시아가 위쪽 상황을 보고해 왔다. 나는 마력을 더 끌어모아서 바람 칼날을 날려댔다.
―파삭! 카사사삭!
하릴없이 쓸려 나가는 그렘린 무리를 보면서, 내 기초 마법의 화력도 꽤 많이 수준이 올라왔음을 실감했다.
제아무리 머릿수로 승부를 보는 그렘린이라 할지라도 일격에 한 무리를 쓸어버릴 정도의 화력을 내는 건 쉽지 않다.
쏟아져 내리는 그렘린의 시체를 밟고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이미 몸은 적들의 피로 뒤덮여 있었다.
계단 여기저기에 기괴하게 부풀어 오는 살점들을 피해 걸으며, 저택의 계단을 쭉 오르다 보니 드디어 뻥 뚫린 홀이 나왔다.
계단은 여기서 일단 한번 끝난다. 저택 별관의 3층은 하나의 커다란 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옥상으로 가려거든 그 홀을 가로질러 지나서 나오는 마지막 계단을 뛰어올라 가야 한다.
별관의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홀. 가문의 이름을 그대로 따 ‘로스테일러 홀’이라고 명명된 그 공간은… 이미 외벽이 거의 다 날아가고 없었다.
시원하게 통풍이 잘된다. 별 하늘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한창 메뷸러와 호각으로 치고 박고 싸우고 있는 루시의 모습이 저 멀리 보이고, 그렘린을 상대하고 있는 정령 군단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광경도 인상 깊다.
그대로 로스테일러 홀을 가로 질러서 지나가려는 순간이었다.
―크극, 크그그극.
홀의 중앙에서, 기묘하게 몸을 비틀며 일어서는 형체가 보였다. 이미 몸의 절반 이상이 기괴한 살점으로 뒤덮여서 이성이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나는 그 얼굴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 좋은 인연은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구면이었다.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명을 받아, 나를 죽이러 아켄섬까지 왔던 두 기사 중 하나.
독수리 기사 카덱이, 나를 향해 흰자만 남은 눈을 부라렸다.
그 순간, 홀 사방에서 거대한 촉수들이 바닥을 부수고 솟아올랐다.
* * *
― ‘잘 어울리는구나, 타냐.’
― ‘이 깃털은 뭐예요, 아르웬 언니?’
― ‘펠벨로 지방의 야생조 깃털이란다.’
이제는 빛바랜 기억이다.
따사로운 한때, 테라스에 앉아 아르웬의 품에 안겨 있던 타냐는… 그녀가 머리에 예쁘게 꽂아준 깃털 장식을 매만지며 배시시 웃었다.
― ‘정말 예뻐요….’
― ‘그렇게 머리에 장식하기도 하고, 아니면 옷깃에 매달기도 해. 남자들은 턱시도 앞주머니에 꽂기도 한단다.’
― ‘그러고보니 언니도 블라우스 춤에 장식해 두셨네요. 너무 잘 어울려요.’
― ‘응.’
아르웬은 타냐의 얼굴을 스윽 쓸어내리며, 문득 슬픈 표정을 지었다.
― ‘펠벨로 지방의 야생조는 색깔이 워낙 다채롭거든. 새 한 마리의 깃털을 따면 다른 새의 깃털 색과 겹치는 일이 거의 없단다. 그래서 똑같은 색의 깃털을 가족들이 나눠 가지고, 각자 장식하는 풍습이 있다고 하는구나.’
― ‘와아… 그래요…?’
― ‘에드와 아버님한테도 하나씩 보냈는데… 몸에 장식해 줄지는… 잘 모르겠구나.’
에드의 이름이 나오자, 타냐의 표정도 한층 어두워졌다.
에드와 아르웬이 테라스에서 갈라선지 만 일주일 째였다.
그 뒤로 에드는 그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은 채, 홀로 방에 박혀서 깊은 고민에 빠진 듯 했다.
어리고 사정도 모르는 타냐는 그런 에드가 너무 무서워서 아르웬에게만 붙어 있었다.
― ‘언니랑 오라버니가 빨리 화해했으면 좋겠어요….’
― ‘타냐. 어쩌면 나와 에드는 앞으로 평생토록 다시 화해할 수 없을지도 몰라.’
타냐가 그 말을 듣고 울상이 되었다.
아르웬은 직감하고 있었다. 크레핀을 긍정한 시점에서, 에드와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크레핀의 후계자로 일생을 살아오며, 아르웬은 그 누구보다도 크레핀 로스테일러라는 인간을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아르웬은 크레핀을 뼛속까지 동정하고 있었다.
아마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아르웬 자신조차 극한까지 이용해 먹을 것이다.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동원하는 남자다.
설령 크레핀이 아르웬을 그저 버림 말 정도로만 여긴다 하더라도, 아르웬은 그의 딸이자 가족으로서 그를 긍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르웬은 그런 인간이다.
크레핀의 생애에는 피비린내가 자욱하다.
스스로 그 옥좌에 버티기 위해, 악인으로서의 자신을 바로 세워 온 삶이다.
단 한 명의 이해자도 없이, 죽는 그날까지 고독하게 악인으로서 살아갈 자다.
그런 독종과도 같은 남자를 긍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가족뿐이다.
피로 묻은 그의 길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면, 기꺼이 그를 위해 어둠 끝까지 갈 준비는 되어 있다.
그러나, 아르웬 자신의 결심을 동생들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었다.
갈라서서 나아가는 에드 또한, 아르웬이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이다. 그에게까지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크레핀은 독종 중의 독종이다.
아르웬이 죽거나,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어진다면… 그 마수는 에드와 타냐에게로 뻗어 나갈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를 악물고 버텨 낸다.
자기 선택을 관철하면서도, 다른 길을 걷는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단 아르웬 자신부터가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 ‘타냐… 내 말 잘 들으렴.’
아르웬은 타냐를 꽉 끌어안고 이야기했다.
― ‘아버님은 언제나 고고해 보이시지만, 오히려 고독하고 불쌍한 사람이야. 아마 세상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테지.’
― ‘언니….’
― ‘그리고, 에드랑 타냐… 너희도 정말 사랑해 마지않는 내 동생들이야. 나는 욕심쟁이라서… 모두 다 보듬고 싶구나….’
꽉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오는 것을, 타냐는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화악!
문득, 정신을 차린 타냐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저장고 선반에 몸을 기댄 채 쉬고 있었다.
―쾅, 쾅!
여전히 저장고 문을 그렘린이 두드리고 있었다. 타냐는 그대로 저장고 깊숙이 들어가서 창문을 열어젖혔다.
첨탑 중앙층에 있는 만큼 꽤 높이가 있었다. 뛰어내린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으며, 바람 마법을 이용해 정원 쪽에 착지한다고 해서 괴물들로부터 안전하리란 보장도 없다.
그대로 창공의 바람을 맞으며 창밖을 내다보던 타냐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문득 별관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외벽이 무너져서 그 내부가 그대로 드러난 로스테일러 홀.
그곳에 서있는 남자가 낯이 익었다. 타냐는 마른 침을 삼키고, 마력을 모은 채 창틀에 올라섰다.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 * *
―악, 카악! 카아아악!
―콰앙, 쉬이이이익!
솟아오른 촉수들의 틈에서 인간의 형상이 드러났다. 지하에서부터 촉수의 보호를 받으며 뚫고 올라온 그 소녀는… 낯이 익다.
없었어야 할 팔 한쪽이 돋아나 있다. 다리 한쪽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가냘픈 반대 손발에 비해서 꽤나 기괴하다. 살이라기보다는 살점이 기워 붙여진 형태에 가까웠다. 이 또한 메뷸러의 힘이었다.
흩날리는 금발은 타냐와 에드의 머리색과 비슷하다. 이미 지하에서 한번 보고 올라왔다.
촉수들 사이에서 꽃처럼 피어난 그 소녀는, 한 손으로 대검을 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소녀의 몸을 꿰뚫고 있던 대검 ‘여명의 날’이다.
그리고 허리춤 뒤편에는 그 절반 정도 크기의 검을 가로로 차고 있다. 초대 검성 루덴이 다루던 검 중 하나인 ‘단죄’다.
소녀는 그대로 촉수에서 뛰어내려 와 로스테일러 홀 중앙에 착지했다. 그리고… 독수리기사 카덱의 목을 그대로 가로로 베어 버렸다.
―파삭!
카덱의 목이 바닥을 몇 번 구르더니,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메뷸러의 힘은 정신적 고통을 대가로 한단다.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로스테일러 홀의 중앙,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가냘픈 소녀가 대검을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재가 되어 사라져 가는 카덱을 향해 무릎을 꿇더니, 달빛 속에서 조용히 손을 맞대고 기도를 올렸다.
“카덱, 그이는 긴 시간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신으로서 헌신했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이런 것뿐이라니, 아마 나는 내세에서 큰 벌을 받겠지.”
“아르웬 누님.”
“나는 이미 다 내려놓았단다, 에드. 너랑은 반대로 걸었어. 세상의 모든 죄를 끌어안더라도, 끝까지 고독한 아버님을 긍정하기로 마음먹었단다. 설령 그 길의 끝이 어둠으로 향하더라도 말이야.”
대검 옆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소녀는, 그 한쪽 팔다리는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기묘할 정도로 성스럽다.
“그게 내가 로스테일러의 후계자로 살면서, 아버님을 보면서, 너희랑 함께하면서 내린 결론이야. 아마 아버님은 신경도 쓰지 않으시겠지. 그냥 나는 버림 말이자, 이용하기 좋은 희생양일 뿐일 거야.”
“…….”
“그래도 나는 끝까지 아버님을 긍정하기로 했어. 그렇지 않으면… 아버님은 끝까지 고독 속에서 죽어 갈 테니까.”
아르웬이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이 앞으로는 지나갈 수가 없어. 아버님을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몸에 마력이 휘감기더니, 그녀의 몸에 힘이 들어온다. 갖가지 보조 마법을 칭칭 두른 채… 천천히 상반신을 들어 올린다.
한 손으로는 거대한 대검, ‘여명의 날’을 집어 들고, 반대쪽 손으로는 루덴의 성검 ‘단죄’를 뽑아 든다.
영광스러운 로스테일러의 후계자로 살던 때를 상징하던 두 자루의 검이다.
“돌아가렴.”
“…….”
“로스테일러 가문은 끝났어. 이제 네 삶을 살아. 나는 여기서 그 끝을 함께할 거니까.”
정사에서는 존재조차도 알 수 없었던 인물이다.
보스로도, 히든 보스로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비로소 에드 로스테일러로서, 이 빌어먹을 세상의 일원으로서, 운명을 마주한 기분이 든다.
길을 막고 서있는 소녀.
잊혀진 후계자, 아르웬 로스테일러.
그녀는 홀의 중앙에서, 영롱한 눈동자를 똑바로 뜬 채 달빛을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