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58)
크레핀 토벌전 (9)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이제 와선 새삼스러운 이야기다.
에드 로스테일러로서, 이 우중충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지만… 아직은 이 세계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그 전 세계의 시간이 몇십 배는 더 길다.
그러니, 나는 아직도 이 세계에선 이방인일 뿐이다.
사실 현대전에서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간단한 일이다. 가늠쇠와 가늠자를 맞추고, 호흡을 멈춘 다음, 방아쇠를 당기면 끝날 일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목숨이 끝이 난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단순하고도 깔끔하다.
처음에는 그렇게 누군가의 목숨을 뺏었다는 자각이 없다. 아무렇지 않게 행한 일에 손이 떨리긴 하지만, 실감이 되지 않아 얼떨떨한 기분에 빠질 뿐이다.
진짜 무서운 것은,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다.
조준기 너머로 보이던 그 표정과, 생동감 있는 몸짓, 그리고 한 발 때려 박히자마자 픽 하고 사라져버리는 생명의 흔적. 남아있는 것은 고깃덩어리뿐.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악몽처럼 피어오르는 죄책감이 정신을 좀먹어 들어간다.
전장에서는 누구나 겪는 일이다.
사선을 넘나드는 전장에선 제 목숨을 부지하느라 느끼지 못하지만, 이내 은퇴해서 평화로운 세상으로 넘어오면… 그 기억은 귀신처럼 부활해 정신을 잡아먹으려 든다.
전장에서 몇 년을 살아 본 자는 누구든 겪는 홍역 같은 질환이고, 시간이 지나면 다 극복하게 되어있다.
나도 한번 심한 홍역을 치른 적이 있지만, 이내 극복하고, 몸도 추스르고, 친구들 만나 농담도 좀 하고, 영화도 좀 보고 게임도 좀 하면서, 사고관도 나름 밝아져온 것이다.
이제 와서 그런 기억에 고통스러워하는 촌스러운 짓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떠오를 때가 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나면 밀려오는 죄책감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드는 재앙이다.
특히 전시상황에선 더욱 더 그렇다. 어쩔 수 없이 상대를 죽여야 했다는 정신적 도피를 하는 게 보통이다. 내가 살기 위해선 상대를 죽여야만 했으니까.
그런 거야 그럴 수 있다.
정신적 도피는 누구나 하는 것이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장교들도 모두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기에, 조금씩 합리화해가는 병사들의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그 전의를 가늠할 수 있다.
문제는, 다른 방향으로 엇나가버린 놈들이다. 어쩌면 내가 가장 경계하고 멀리하던 부류들이다.
──방심하면, 나도 그렇게 되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었다고 도피하는 것이야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원래 이런 놈이었다’고 합리화하는 놈들이… 진짜로 위험한 놈들이다.
나는 원래 살인을 즐긴다.
누군가를 죽이고 빼앗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인간이다.
그러니 죄책감 같은 것은 없다. 이해받을 마음도 없다.
그렇게 말하며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다 보면, 이윽고 자기 자신이 거대한 ‘순수악’이라도 된 듯 착각하게 된다.
그렇게 정신을 좀먹어 들어가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를 얻어, 몇 년간 전장을 나뒹굴다 보면 괴물이 되어 은퇴하게 된다.
잘 풀리면 방위 산업이나 경호 관련 업계에 취직해 그럭저럭 또라이 취급 받는 수준에서 사회 생활을 영위해 나가지만, 안 좋은 방향으로 나간 놈들은 총기를 밀수하거나 갱단에서 나뒹굴다 턱에 총알이 박힌 채 세상을 뜨곤 한다.
그 말로를 보고 있노라면, 나 또한 그런 광인의 직전까지 간 경험이 새록새록 되살아나서… 새삼 등허리에 소름이 돋고 만다.
그렇기에, 나는 끝까지 내 죄책감과 맞서 싸웠다.
그렇게 살다보니 나는 함부로 누군가를 책임지려 하지도 않고, 위기에 빠진 누군가를 이유 없이 구하려 들지도 않는 인간이 되었다.
실패했을 때의 상심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 그런 가당찮은 이유다. 그래도 나름대로 타당한 방향이라 생각하고 있다.
엇나간 놈들은 그저 살인을 즐기다 미쳐버린 살인광이 아니다. 숱한 죄책감 하나 감당하지 못해 도망치다가… 그렇게 미쳐버린 겁쟁이 놈들일 뿐이다.
그렇기에, 엇나간 자식들에게 늘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 들었던 그 느낌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느냐고.
* * *
푸슉!
피가 새는 듯한 소리가 났다. 크레핀의 왼손에 각인되어 있던 악신의 인장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새어나오는 피가 인장의 틈새를 메우고, 불길한 마력의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이내 그 마력은 크레핀의 한 손을 전부 휘감더니, 그 방대한 기운에 의해 왼 팔뚝 전체가 기분 나쁜 살점 덩어리로 변모해버렸다.
카륵, 푸슉!
그리고 왼손에서 돋아난 촉수 몇 가닥이 그의 주변을 휘감는다. 아직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는 크레핀이지만, 왼손만을 보고 있으면 그냥 괴물이나 다름없다.
오른손에는 가문의 인장이 박힌 롱소드를 들고 있었다. 기분 나쁜 형태로 변모한 왼손과는 달리 아직은 멀쩡한 상태였다.
“힘이 느껴지는구나.”
크레핀은 점잖은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런 힘을 원했지, 늘. 불사의 마법도 이제 머지않았구나.”
그리 말하고는, 기괴해진 왼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풍랑의 가호가 사라져 버렸다.
마력조차도 느낄 수 없었다. 인지조차도 하기 힘든 빠른 순간에 내 주변의 압력을 끌어모아 압축시켜버린 것이다.
일부러 풍랑의 가호의 재발동 시간을 기다렸다가 올라온 고생이 허사가 되었다. 다만, 절대로 방심해선 안 된다는 점만큼은 명확해졌다.
마력에 반응해서 움직이는 것으론 크레핀의 공격을 피할 순 없다.
그것은 에서도 마찬가지였으나, 인게임에서 설명을 듣는 것과 실제로 맞딱트려서 대처하는 것 사이에는 꽤나 큰 간극이 있었다.
정말로 움직이는 모습만을 보고 상대가 어떤 수를 쓸지 예상해서 회피해야만 했다. 그것은 마치 총구의 방향을 보고 총알을 피한다는 발상과 비슷해서, 말로는 가능해 보이지만 직접 해내기에는 무리나 다름없는 짓이다.
그러나, 무리라고 해서 시도하지 않을 순 없다. 이미 이 지옥의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크레핀을 잡든가, 아니면 내가 죽든가. 둘 중 하나의 상황까지 왔으니, 섣부르게 행동하지도, 지나치게 신중하게 행동하지도 않는다.
카아아아아악!
고위 바람 정령 메릴다의 포효 소리가 로스테일러 저택 부지에 울려 퍼졌다.
앞발을 휘둘러 크레핀의 몸을 후려치려 했지만, 크레핀이 왼손을 기괴하게 뒤틀자 알 수 없는 물리력에 의해 메릴다의 앞발이 막혔다.
그대로 원소 마법 ‘바람 칼날’을 발현해서 크레핀 쪽으로 날려보았으나, 역시 크레핀에게 접근하기 직전에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무력화당해 버린다.
루시가 말하길 일반적인 마력 체계에서 벗어난 종류의 마력을 쓴다고 했다. 그것이 메뷸러의 힘이라고 했었다.
해독 불가능한 종류의 마력이라면, 나도 하나 사용할 줄 안다.
검붉은 기운의 마력이 피어올라,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손 끝에 모인 성위 마력의 힘이 크레핀을 똑바로 향했다.
크레핀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좁아졌다. 내가 성위 마법을 쓸 줄 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는다는 듯이 일순간 동공을 넓히지만, 놀라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강제 결집’
모든 상성 관계를 뛰어넘는 성위 마법의 힘은, 메뷸러의 마력과 비슷하게 대처 자체가 불가능한 힘이다.
오로지 크레핀만이 상성을 뒤집어 엎는 힘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했다.
순간적으로 내 앞으로 크레핀의 몸이 휙 당겨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면전에 내 단검이 들이닥친 상황, 그러나 촉수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내 팔을 낚아챘다.
―까드득
나는 이를 악물고 손을 잡아당겼다.
그의 왼팔로부터 뻗어져 나온 촉수는 대여섯 개 정도 된다. 모두가 나름대로 꿈틀거리면서 주변을 전부 부수려들었다.
나는 힘을 꽉 주고 몸을 틀어서 바닥에 꽂힌 대검 쪽으로 굴렀다. 그 과정에서 촉수를 대검의 날에 가져다 대서 베어버리고, 남아있는 잔해와 진액을 털어냈다.
촉수의 반사신경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근접전에서의 승리를 보장할 수가 없다.
정말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덮친 성위 마법이었는데 이 정도 대처를 해낸 것은 경이로울 수준이다.
나는 다시금 몸을 가다듬고, 크레핀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절반 정도 각성한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전투 패턴은 늘 이런 식이었다. 근접전은 왼손에서 뻗어나온 촉수로, 원거리전은 악신의 마력을 이용한 마법으로 대응한다.
그 중간쯤 걸치는 거리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마법을 쓰는 순간 근접전으로 파고들어 대응하는 것이 일반적인 공략법이었다.
그 거리 감각이 살아있다면, 크레핀의 대응을 읽어낼 수 있다. 촉수를 사용해 싸울 때는 한 없이 근접전이 강력하더라도, 마력을 발현하는 그 순간에는 그 정도 반사신경이 나올 수 없다. 그 틈을 노리면 된다.
“후우….”
크레핀이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이내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조금씩 그의 몸이 허공에 부유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메뷸러와 루시의 전투가 한창인 저택의 상공. 발현되었다가 사라지는 온갖 법진들을 배경으로 그의 몸이 조금씩 조금씩 더 부유한다.
마치 유령처럼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그의 옷깃이, 옥상에 불어닥치는 바람에 흩날린다.
“내 아들 에드 로스테일러는 늘 겁쟁이였지.”
크레핀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크레핀의 어두운 속내를 전부 간파하고 있었지만, 끝끝내 그에게 반기를 들지 못했다는 사실도.
“야망 따위도 없었고, 그저 희희낙락 가족과 가신들이랑 부대껴 살 생각만 했다. 귀족가 장남으로서는 어떨까 싶지만, 어쨌든 내 아들로서는 훌륭한 기질이었지. 쓸데없는 야망은 도움이 되질 않거든.”
그 순간, 크레핀의 거리가 확 좁아지면서 롱소드를 내밀었다. 단순한 찌르기일지라도, 메뷸러의 마력을 타고 이리저리 부유하는 몸놀림에 의해 위협적인 기습이 된다.
콰악!
내가 뒤로 크게 도약하면서 회피하자 갈 곳 잃은 롱소드는 바닥을 찍었다.
“실베니아로 도망친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지만, 설마 황녀까지 이용해서 파문당할 계획을 세웠을 줄이야. 그 정도로 치밀한 놈일 거란 생각은 못했다. 그래서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의문이었다. 그렇게 살아남을 놈이 아니었거든.”
“애초에 카덱과 녹스를 보내서 날 죽이려고 한 게 그쪽 아닙니까?”
“아니,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크레핀은 내가 에드 로스테일러와는 별개의 인물인 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단정하는 것도 이상했다.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크레핀은 단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내가 널 파문시켰다고 통보하는 편지를 보낸 게, 벌써 1년 하고도 절반이 더 지났구나.”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파문 통보 편지.
내가 이 세계에 넘어와서 처음으로 확인한 문서이자, 오필리스관에서 쫓겨나서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던 유일한 매개체가 되어주었던 물건이다.
나에게는 모든 이야기의 시발점이 되는 한 통의 편지였으며, 이 지긋지긋한 생존기의 시작을 알리는 통보문이였다.
“그 뒤, 오필리스관을 쫓겨나기 전에 내 아들이 보냈던 답장을… 너는 모르겠지.”
“뭐라고요?”
이제 와서는 완전히 금시초문인 이야기다.
그 편지에 답장을 했다면, 내가 아니라… 내가 빙의하기 전인 에드 로스테일러임이 분명했다.
그 뒤로 이어지는 크레핀읜 말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더 이상 살아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을 마감하는 심경을 구구절절 써서 내게 보내더구나. 굳이 타냐에게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그 말에, 나는 일단 헛숨을 삼켰다.
가문의 위광을 모두 버리고 도망 나왔지만, 더 이상 자기 자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단 사실을 자각하고 만 에드 로스테일러.
한없는 공허함에 빠져 창밖의 학사를 가만히 쳐다보던 그.
고요한 방 안. 이제 곧 쫓겨나야만 하는 신세. 무일푼으로 잔인한 세상에서 홀로 고독히 버텨야만 하는 삶. 그에게 남은 미래는 어둠뿐이다.
조용한 방 안에서 혼자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가 결국 선택한 길은… 이만 생애의 여정을 끝내는 것이다.
방법이야 조용하고 한적한 방 안에서는 얼마든지 있다. 긴 노끈과, 발로 차서 넘어뜨리기 좋은 의자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분명 내 기억으론, 에드 로스테일러가 잠깐이나마 엔딩 크레딧에 얼굴을 비춘다. 썩 좋은 말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내 기억과 이 현실의 차이.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날 분명 삶을 마감하려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실패했다.
그는 죽음마저도 그의 계획대로 맞이하지 못했다. 어째서?
그 원인이라 할 만한 것은── ‘조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굉장히 놀랐습니다.’
벨 마이아.
오필리스관을 쫓겨나던 날, 망나니나 다름없던 평판을 가지고 있던 나를 기묘할 정도로 잘 챙겨준다 싶었다.
그냥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로서 본분을 다하는, 편견 없는 인간이라 생각했으나….
‘그래도 이런 형태로 생활하고 계셨을 줄은… 오필리스관에서 나가실 때는 정말 세상 다 잃은 표정을 하셔서 그대로 학교를 나갈 줄 알았습니다만.’
‘어쨌든, 잘 살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그녀의 대사 한 줄 한 줄에 담긴 의미가 완전히 새롭게 느껴진다.
그 이후로도, 많이 건실해지고 진취적으로 변한 내 모습을 보고 안심이라는 듯이 얘기하는 모습.
어딘지 모르게 사무적인 화제를 유지하면서, 굳이 내 심경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 모습.
틈이 나면 캠프에 와서 나를 체크하고, 도와줄 것이 있으면 도와주던 모습.
그렇게 기묘하리만치 내게 잘 대해주던 모습에서 깨닫고 만다. 에드 로스테일러를 전담하던 메이드 벨 마이아는,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던 순간을 목격하고, 막아낸 것이다.
그제야 벨 마이아의 부자연스러웠던 행동 흐름까지 모두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면서, 내가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이유까지도 눈에 들어오는 기분이다.
살아남을 의지를 모두 잃은 에드 로스테일러는, 더 이상 어둠뿐인 삶을 감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가 버린 삶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푸욱.
생각의 흐름이 폭주하는 틈을 노린 것일까.
크레핀의 칼날이 내 어깻죽지를 찔렀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인식하기조차 힘든 속도였다.
격통이 밀려 올라오면서 눈앞에 비릿하게 웃고 있는 크레핀의 모습이 보인다.
이미 한계에 달한 몸이 비명을 지르고, 조금씩 의식이 멀어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 * *
거대한 바람이 저택 별관을 두르고 있었다.
저택 부지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그 광경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옥상 너머에서, 불길한 기운과 싸우고 있는 사내 하나.
거대한 늑대가 구현해 포효하며 날뛰고, 온갖 고위 마법들이 오가는 저택의 밤하늘은 밝다.
그곳에서 눈을 감고 있노라면, 새하얀 공간에서 거울을 보고 마주앉아 있는 기분이다.
전신을 한 번에 비춰주는 큼지막한 거울을 앞에 두고, 목재 의자를 가져와 앉는다.
그럼 거울 안에는 진중한 표정으로 양손을 모은 채 앉아 있는 금발의 사내 하나가 나를 똑바로 쳐다볼 것이다.
거울은 세상 모든 것을 공평히 비추는 법이지만, 때때로 그 내면의 무언가가 엿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거울상 속 금발의 사내는 어딘가 낯선 시선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겠지.
에드 로스테일러가 나를 노려본다.
덮쳐드는 거대한 불의에 제대로 맞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삶을 회고하는 눈빛이다.
그에게는 당장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오필리스관에서 쫓겨나면 당장에 거처부터 구해야 했고, 학사에 학적은 남아있었지만 학비를 지원받을 곳이 없었으며, 먹을 것은 물론이요 입을 옷도 몇 벌이 전부인 데다가, 학사 평판은 개판이 나있어 어디에 도움을 요청할 데도 없다.
도망치고 도망친 끝에 도착한 곳에도, 그가 편안히 쉴 자리는 없었으니… 그는 차라리 삶을 내려놓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발버둥쳐서 가문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났는데, 그 끝에 도래한 것이 이런 허무라니. 삶이란 이다지도 부질없는 것이다.
거기서 바톤을 이어받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하루에 채 4시간도 자지 않으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아득바득 힘써왔다.
나무껍질을 뜯어서 끓여먹고, 낡은 옷을 기워 입고, 굼뜬 재능으로 어떻게든 마법 이론을 몸에 체화시키면서 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버티고 또 버텨서야, 비로소 단출하지만 제법 그럴싸한 터전을 만들 수 있었다.
큼지막한 오두막 하나와 목재 창고 두어 개, 불을 피우기 좋은 캠프파이어와 가끔 루시가 쉬다가는 목재 쉼터. 예니카가 지내는 오두막과 더불어서, 급기야는 로르텔까지 제 별장을 짓기 시작한 데다가, 벨까지 일 도와준답시고 드나든다.
이젠 정말 다른 누구에게도 내주기 싫은 아지트가 되어, 정말 내 집다운 집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학사 내에서의 위치도 많이 바뀌었다.
성적이 올라 학사 장학생이 되고, 최근에는 학년 수석이 되었으며, 제법 따르는 후배들도 많이 생겼다.
학사를 거닐다 보면 인사를 건네며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제법 거물들과도 잘 알고 지내 어디가서 인맥 좁다는 소리는 안 듣는다.
네가 부럽다.
갑작스럽게 올라온 목소리의 근원은, 거울 너머의 나 자신이다.
그리 이야기하고 푹 고개 숙인 사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그 앞에 마주 앉아 숙인 고개를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참을 숙이고 있을 뿐인 소년.
그는 이미 삶의 의지를 잃었다. 원하는 것은 그저 편안한 안식뿐이다.
그러니, 해줄 말이라고는 하나뿐이었다.
됐으니까, 너도 이제 좀 편히 쉬어라.
그만하면 할 만큼 했으니… 뒷일 정도는 마무리해줄 수 있다.
그런 내 생각이 닿기라도 한 것인지, 소년은 그렇게 한동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콰악!
어깻죽지를 찌르고 있는 크레핀의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시야가 되돌아오기도 전에 먼저 한 행동이었다.
피어오르는 메릴다의 바람이 주변을 감싸고, 주변을 부유하고 있는 마력을 어느 정도 걷어내면서… 나는 그대로 크레핀의 오른팔을 잡아끈 채 뒤로 매쳐버렸다.
콰앙! 콰당탕!
“커, 허억….”
깔끔하게 찔려 들어간 일격이라고 생각했는지, 전혀 반격을 예상하지 못한 크레핀이 신음성을 내뱉었다. 바닥에 내다 꽂히면서 그의 등에 큰 충격이 온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 충격으로 어깨에 검이 더 깊이 박혀 들어갔지만, 이를 악문 채 뽑아서 내던져버렸다.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격통이 샘솟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낸 뒤 넘어진 크레핀을 짓밟았다.
피가 뚝뚝 흘러내린다.
뒤집어쓴 피는 진즉 눌어붙었지만, 그 위로 내 피가 새로 덧씌워진다.
“커, 허윽….”
헛숨이 들어갔다. 호흡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를 부서질 듯이 깨물고 단검을 꺼내들었다.
예식용 단검조차도 이미 피에 절어있었다.
목숨의 위기는 몇 번이고 겪었다. 이 세계에 오기 전이고, 온 후이고 모두 마찬가지다.
실제로 죽음을 경험했었고, 크게 다친 적도, 과로로 쓰러진 적도 많다.
나를 증오하듯 밀려오는 시련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리고 그 시련들이 하나같이 내 목숨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모두 쳐냈다.
전쟁터를 노닐 때, 전우들이 나를 보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어감이 별로라서 썩 좋아하는 별명은 아니었다.
“나는 바퀴벌레야.”
뚝뚝 흘리는 피를 갈무리할 마음도 없이, 크레핀을 짓누른 채 그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뿌드득 이를 갈며 단검을 내려찍었다.
파악!
어렵사리 그가 왼팔로 막아냈지만, 부들거리는 팔에 무게를 실어서 그 기괴하게 생긴 팔을 어떻게든 꿰뚫고 내려갔다.
크레핀은 힘으로 버텨내면서,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나는 절대 안 죽는다. 절대로.”
서늘한 목소리와 더불어 비릿한 안광마저 서리는 듯하다.
그 독기 속에서, 어떻게든 이를 악물며 힘겨루기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