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59)
크레핀 토벌전 (10)
크레핀의 왼팔에 박혀들어간 단검이 쩌적소리를 내며 그의 살점을 갈랐다.
그의 팔목을 꿰뚫고 들어간 단검의 끄트머리가 그의 눈가 언저리에서 멈춰 떨리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몸의 무게를 실어서 계속 단검을 밀어넣으려 했지만, 크레핀은 가까스로 버틴 채 촉수를 휘둘렀다.
― 퍼억!
순간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지만, 충격에 의해 밀려나간 나는 그대로 돌바닥을 굴렀다.
한 손에 단검이 꽂힌 크레핀이 쿨럭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왼손을 털어내자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지만, 고통은 남아있었는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원래 죽기 직전까지는, 자기가 죽을 거란 상상은 못하는 법이지.”
쿨럭대며 몸을 일으킨 크레핀은 다시 롱소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기괴하게 뒤틀린 왼손에 다시금 메뷸러의 마력을 끌어모았다.
― 화아아악!
수십개의 촉수가 다시금 쏟아져 올라온다. 기괴한 살점 덩어리가 군데 군데 붙은 촉수들은 보기만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 아우우!
― 파삭! 카아아악!
그러나, 메릴다의 울음 소리와 함께 퍼져나간 마력에 절반 이상이 도륙난 채 사라져버렸다.
메릴다가 구사하는 바람 칼날은 일반적인 원소 마법과는 그 규모 자체가 다르다. 전방위 적으로 뻗어나간 마력의 칼날이 주변을 초토화 시켜버리고, 크레핀 본인의 몸까지도 그 마력의 여파에 휘말렸다.
― 푸슉! 푸슈슉!
그의 살점이 몇 가닥 떨어져 나가며 계속해서 상처가 생겨나갔지만, 메뷸러의 마력은 어떻게든 그 충격을 최소화하고 상처도 아물게 했다.
그러나 그 힘이 무한할 수는 없다. 아직 크레핀은 메뷸러의 마력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메뷸러의 마력을 다루려거든 그 자신의 마력을 어느 정도 매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들이는 마력에 비해 그 결과물은 압도적이지만, 완전히 그의 마력을 대체하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완전히 메뷸러의 힘을 받아들인 크레핀은 까다롭다. 그렇기에 빠르게 승부를 내야할 필요가 있었다.
크레핀이 다시금 자세를 잡으려는 순간, 그의 왼팔에 꽂혀있던 단검이 폭발했다. 정령식에 의한 폭발을 의식하지 못해서 순간적으로 몸이 비틀거렸고, 그 순간이 내가 파고들 타이밍이 되어주었다.
― 화악!
바닥을 박차자 순간적으로 몸에 부유감이 느껴졌다.
메릴다의 바람 마법이 내 몸의 움직임 자체를 가볍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더 신속해진 움직임으로 거리를 좁히며, 마력을 끌어내 단검을 되돌려 받았다.
크레핀 또한 두 번 당하지는 않는다. 달려드는 메릴다의 발을 피하며, 몸을 부유시켜 저택 부지의 상공으로 올라선다.
그의 전투 방식이 조금 더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난간을 넘어가, 아예 달을 배경으로 허공에 둥둥 떠있는 그는… 근접전으로는 상대할 수가 없다.
― 화아아악!
다시금 그의 손에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알고 있는 공격 패턴이다.
‘악의의 눈’ 소환. 크레핀의 행동 패턴 중, 거의 막바지에나 나오는 공격 수단이다. 벌써부터 사용했다는 것은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물론, 가만히 놔둘 이유는 없었다. 그대로 마력 화살 대여섯 발을 발사하면서 레이시아를 불러냈다.
― 파아아악!
허공을 향하던 마력화살이 터져나가며, 저택 부지의 상공에 물이 폭포수처럼 퍼져나왔다. 그 잠깐의 틈, ‘수원 발현’으로 피어난 폭포수의 사이에서 레이시아가 튀어나와 크레핀의 어깻죽지를 물었다.
“크으아아악!”
크레핀이 비명을 지르며 레이시아를 내치려 했다.
상처는 계속해서 아물지만 몸의 고통은 그대로다. 사람의 정신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므로, 끊임없이 공격하다 보면 나가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크레핀은 어깻죽지를 레이시아에게 물린 채 그대로 추락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공격패턴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일까.
그대로 저택 부지 아래로 추락하는 그를 향해, 나 역시 그 방향 그대로 뛰어나갔다.
“쫓아간다! 확실하게 마무리 해야 돼!”
[ 잘못하면 네가 추락사 해! ]“알아서 잘 맞춰줘! 마력 많이 남았잖아!”
[ 제발 좀! ]내가 그대로 난간을 밟고 창공에 몸을 날리자, 메릴다의 바람이 몸에 감돌았다.
메릴다의 정령식 – 상승 기류를 몸에 받으며 잠시간 부유하다가, 이내 다시금 중력의 힘을 받아 추락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와 퍼덕거리는 옷깃 소리만이 귓가에 가득했다.
시야 끝, 저 아래에는 레이시아를 어떻게든 뿌리치고서 추락하는 크레핀이 보였다.
― 콰앙!
아직 마력의 운용이 익숙하지 않은 지, 어떻게든 메뷸러의 힘을 다시 이끌어내보려고 하는 그는… 그렇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중앙 정원에 내다 꽂혔다.
― 화아악!
나 역시 그대로 메릴다의 바람 마법을 받아, 중력의 힘을 최소화 시키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 콰앙! 카악!
초토화된 중앙정원의 화단, 그의 위에 착지하며 무게를 싫어 다시 단검을 박아넣었다. 이번에는 롱소드를 쥐고 있는 오른손 팔뚝 이었다.
“크아아아악!”
아직 메뷸러의 힘이 완전히 스며들지 않은 쪽이었기 때문에, 크레핀은 더욱 더 큰 격통을 느낀 듯 했다.
비명을 지르면서 고통을 호소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단검을 박아둔 채 뒤로 크게 도약했다.
누워있는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소름끼치도록 별이 가득 박힌 밤하늘 뿐만은 아닐 것이다.
덩달아 옥상에서 뛰어내린 거대한 늑대 형상의 정령이, 육중한 발을 휘두르며 그를 덮쳤다.
― 콰아아아아앙!
컨테이너 하나가 통째로 떨어져서 깔아뭉갠 것이나 다름 없는 충격이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즉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메뷸러의 마력을 발현한 크레핀은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당연히 여기서 끝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추가적인 공격을 준비하였으나….
―쿠구궁, 쿵!
육중한 충격을 버티지 못한 지반이 무너져 내렸다.
안 그래도 수많은 촉수들이 솟아오르면서 구멍을 뚫어 불안정한 지반이다. 지하에는 거대한 연구실까지 있으니, 당장에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메릴다의 공격이 결정타가 되었는지, 그대로 중앙정원의 바닥은 통째로 무너져내려 지하의 연구 시설로 빨려들어갔다.
―콰가가강! 칵!
재빠르게 달려든 레이시아가 내 몸을 보호했지만,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그렇게 크레핀과 나는 지하 연구 시설의 커다란 홀까지 추락했다.
―파방! 캉!
― 화아아악!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다시금 지하 시설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르웬이 대검에 꿰여있었던 바로 그 거대한 홀이었다.
다만,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서, 밤하늘이 잘 보일 지경이다. 마치 콜로세움처럼 움푹 패여들어간 검투 경기장의 형상이다.
그곳 중앙에서, 기괴한 살점을 질척거리며 몸을 일으킨 크레핀의 모습이 보인다. 역시나 살아있었다.
기괴한 살점은 왼팔을 통째로 잡아먹고, 이제는 상반신 절반까지 퍼져나가고 있었다. 가면 갈수록 더 적극적으로 메뷸러의 마력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한계 이상으로 메뷸러의 마력을 다루려 든다면 이성을 잃게된다. 저택 여기 저기를 배회하고 있는 사용인들처럼.
크레핀은 메뷸러의 마력에 대한 연구를 오랜 기간 거쳐왔기에, 그 이해도 남다르다. 그렇기에 남들보다도 더 깊은 수준의 마력을 다룰 순 있지만, 한계를 넘어가면 미쳐버리는 것은 그도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그는 기어이 의식을 잡고 있었다.
몸의 반절 이상이 살점에 먹혀버린 그의 모습은 익숙하다. 각성 크레핀은… 4막에서 메뷸러를 베기 전에 마지막으로 상대해야하는 준 최종보스다.
사실상 메뷸러 토벌은 레이드에 가깝고, 공략 패턴을 숙지해서 적절한 부위에 ‘신살검(神殺劍)’을 꽂아넣으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까다로운 각성 크레핀이야말로 실질적인 보스에 가까웠다.
그는 온갖 종류의 즉사 패턴을 난사해대고, 주기적으로 촉수를 소환해 후열을 공격해대는데다가, 제 스스로 체력을 회복하고, 죽었다 싶으면 몇 번이고 부활해대는… 정말 징그러운 보스다.
비쥬얼도 끔찍하게 생긴데다가 보스전 자체도 살점덩어리로 가득한 건물에서 치러진다. 때문에 많은 플레이어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보스다. 난이도면 난이도, 분위기면 분위기. 어느 방면에서든 끔찍한 적이다.
입김을 뿜어내며 몸을 일으킨 그는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다.
기괴하게 움직이는 살점이 꿈틀대며 메뷸러의 마력을 끌어냈다.
“황성을 토벌하러 가기 전까지는 이렇게 힘을 끌어내고 싶진 않았지만.”
그는 다시금 상공에 펼쳐져 있는 ‘악의의 눈’에 마력을 끌어모았다.
악의의 눈에 마력이 모여서 완성 되는 순간, 회피하기 까다로운 광선 수백개가 일대를 뒤덮는다.
에서는 맞는 즉시 즉사였다. 실제로는 어떨까.
확실한 건, 직접 맞아서 확인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내가 손에서 마력을 끌어모으는 순간, 무너진 파편을 헤치고 육중한 늑대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만한 충격 속에서도 생채기 조금 났을 뿐이다. 고위 정령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쉽게 상처입힐 수 없다.
일대를 메릴다의 바람이 뒤덮고, 나는 그 속에서 놈의 마력을 흩어버리기 위해 돌격했다. 그러나 완전히 각성한 크레핀의 힘은 막대하다.
그가 마력을 끌어모으며 이제는 손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흉측해진 왼팔을 들어올렸다.
“일단 멈춰! 메릴다!”
내가 외치자, 메릴다는 반문하거나 의심하는 일 없이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 육중한 늑대의 몸집이 멈추며 흙먼지가 날렸다.
‘공허의 칼날’.
마력을 끌어 모은 뒤 잠시간 발산해, 주변에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의 심장을 터뜨려버리는 즉사기였다.
그가 마력을 끌어모으는 타이밍에 맞춰 모든 움직임을 멈춰야만 피해갈 수 있다. 문제는 그렘린과 촉수들이다.
에서는 끊임 없이 밀려드는 자잘한 적들을 막아내면서, 동시에 크레핀의 공격 패턴까지도 파악해서 회피해야만 했다.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달려드는 그렘린 무리와, 땅에서부터 솟아올라 공격하는 촉수들. 그 사이에서 나는 이를 악문 채 움직임을 멈췄다.
― 화아아아아악!
― 파삭! 파사삭!
― 키에에에에엑!
그러자 잠시 후, 주변 일대의 모든 그렘린들이 피를 토하며 추락했다. 공허의 칼날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마법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다시 재빨리 몸을 움직여 크레핀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악의의 눈’에는 충분한 마력이 주입된 상태였다.
하늘에 떠있는 살점 덩어리. 조그마한 눈동자 너덧개를 달고 있는 그 기괴한 살점 조각으로부터 마력의 기운이 담긴 광선이 쏟아져 나오려 했다.
몇 번이고 상대해봤지만, 역시나 더럽게 까다롭다. 나는 이를 악문 채 자세를 숙이고, 일단 어떻게든 막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몸의 마력을 끌어올려서 방어 법진을 구현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온전히 광선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최소한 치명상만큼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몸의 급소를 감추려는 순간….
“꺄아아아아악!”
하늘에서 소녀가 뛰어내려왔다.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에 그 쪽으로 시야가 쏠렸다.
뻥 뚫린 중앙 정원 쪽 하늘.
중앙 정원을 가로질러서 뛰어오던 성녀 클라리스는, 무너진 지반 아래 쪽을 보더니 자기 몸을 날린 것이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성복을 흩날리며 성녀가 내려온다. 눈동자는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입술은 꽉 앙다물고 있다.
달빛을 받으며 지하로 내려오는 모습이 느릿하게 재생되는 것 같다.
마치 천사가 지상에 도래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 악물고 용기를 내 뛰어내린 인간일 뿐이다.
품속에는 가죽 천으로 감싸진 지팡이를 꽉 안고 있다. 위태위태해 보이는 모습은, 누군가가 받아주지 않으면 안되면 크게 다칠 것이 분명해보였다.
성녀 클라리스 같이 유약한 소녀가 이 정도 높이에서 추락한다면 어디 한 군데 부러지는 선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몸이 반사적으로 튀어나가, 얼른 성녀 클라리스를 받아내는 자세를 취했다. 방어 법진은 그대로 흩어져버렸다.
― 화아악!
내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치 태클을 걸 듯이 성녀 쪽으로 미끌어지자 그 품속에 쏙 들어와 안착했다.
클라리스의 신성한 성복이 그 여파로 흩날리고, 다시금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크… 윽.. 쿨럭, 쿨럭! 성녀님… 이건 대체…!”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클라리스는 내 어깨를 감고 머리를 꽉 끌어안더니, 그대로 몸을 휙 비틀어서 자기 등을 메뷸러 쪽으로 향했다.
― 화아아아아악!
그 순간, ‘악의의 눈’에서 수많은 광선들이 쏟아져 나왔다. 세상을 다 집어삼킬 듯이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그 힘은 하나 하나가 막아내기 버거울 정도로 막대하다.
그러나, 성녀 클라리스가 두르고 있는 ‘성법의 가호’ 앞에서는 모두 공평하다. 그녀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주신 텔로스의 축복을 받은 자들 뿐이다.
클라리스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나를 꽉 끌어안고선 성법의 발현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고 난 뒤에야, 클라리스의 성법술로 아무런 생채기 없이 무사했음을 자각했다.
“성녀님, 대체 왜 이렇게 갑자기…”
“에드 선배님이 받아줄 거라 믿고 있었거든요. 위험했느니 뭐니 따지는 건 나중에 해도 괜찮죠?!”
그렇게 말하며, 나를 꽉 끌어안는 클라리스. 우리의 품 사이에는 내가 예니카에게 부탁해두었던 지팡이가 들어있었다.
이거 하나 전달해주겠답시고 목숨을 걸고 그 높이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당연히 내가 받아줄 거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위험한 수준을 넘어서 무모한 수준이다. 그러나 클라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뺨을 어루만지며 이야기 했다.
“에드 선배님 다친 곳은…”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 화아아악!
이내, 크레핀을 중심으로 다시금 충격파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적의를 가지고 공격을 하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단, 메뷸러로부터 추가적인 마력을 주입 받으며 생겨난 부산물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클라리스의 가호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클라리스 본인은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덩달아 떨어져나간 내가 뒤에서 받쳐주었지만, 그럼에도 충격이 있었는지 이를 악물었다.
“으, 흐윽…”
“성녀님.”
“괜찮아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킨 클라리스가 크레핀을 똑바로 보았다. 기괴한 생김새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눈에 서린 의지가 사라지진 않았다.
살점에 먹힌 왼팔은 갈수록 비대해지고, 몸의 피부는 정상적인 부분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갈수록 기묘하게 변해가는 외관은 괴물에 가까워진다.
크레핀은 그대로 한참 동안 몸을 꺾으며 마력을 받아들이고선, 문득 시선을 내 쪽을 돌렸다.
“아직도, 살아있군.”
그렇게 말하며 롱소드를 들고 도약해왔다.
하늘에서는 그렘린 무리가 쏟아져 내려오고, 솟아오른 촉수들은 여전히 내 사지를 찢어버리겠다는 일념만으로 달려든다.
메릴다의 포효로 거의 대부분의 잡다한 적들은 쓸려나가지만, 크레핀은 이를 악물고 그 마력의 여파를 버텨냈다.
― 카앙!
나는 롱소드를 피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대로 성녀의 어깨를 끌어 안고 옆으로 몸을 한 바퀴 구르며, 근처의 촉수 하나를 바람 칼날로 잘라내버렸다.
“꺄아앗!”
클라리스가 비명을 지르며 내 몸에 꽉 붙었다.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들은 대대로 텔로스 교단의 세례를 받는다.
메뷸러의 힘을 이용한 공격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가 저렇게 직접 물리력을 행사해오는 방식의 공격을 한다면 성녀라 하더라도 안전하지는 않다.
성녀가 두른 성법의 가호는, 같은 신자들끼리는 효력을 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레이시아!”
내가 그렇게 외치자, 뭐라 더 지시하기도 전에 물로 이루어진 암사자가 나타나 성녀의 옷깃을 낚아챘다.
“꺄아앗!”
그대로 클라리스를 납치하듯이 태우고, 레이시아는 멀찍이 떨어진 안전지대 쪽으로 대피했다.
― 휘이이이익!
내 쪽으로 시선을 향한 크레핀이 다시금 기괴하게 몸을 비틀고 있었다.
“후우… 후…”
나는 주저앉은 채로 크게 심호흡을 하고, 지팡이를 묶고 있던 가죽끈들을 전부 제거해서 꺼내들었다. 온갖 정령식이 잔뜩 각인된 ‘벼락맞은 천년 나무 지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 그래도 제법 익숙해진 정령술을, 더 극한까지 끌어올려주고, 감응력의 한계치도 극에 달하게 만들어주는 마공학용품이다.
이 자체만으로도 전투 능률은 말도 안되게 늘어나지만, 완전히 각성한 크레핀을 상대로는 역부족일 수도 있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확실하게 그를 제압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추가적인 수단을 동원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눈물 나는 장면이로구나. 그깟 지팡이가 뭐라고,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크레핀은 피를 뚝뚝 흘리면서 비릿하게 웃었다.
“필시 성녀와 감정적인 교류가 있었던 모양이지. 이성 간의 사랑이 되었든, 아니면 단순한 우정이 되었든, 그런 따뜻함이 피어오르는 관계에 충족감을 느낀 적도 있었을테고.”
그는 비틀려가는 몸을 갈무리하면서,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쉽게도 나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지만 말이다.”
“…”
“그래, 나는 ‘순수악’이다.”
크레핀은 검을 집어 올렸다.
“더 강한 힘, 더 강한 권력, 더 높은 위치에 닿기 위해서라면 가족이든, 가신이든 모두 이용하고 버린다.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죽이고, 남의 뒤통수를 치려면 얼마든지 치지. 합리화하지도, 이해받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끌끌하고 비릿하게 웃는 웃음에는 소름마저 돋는다.
“그게 나란 인간이다. 이제 알겠나?”
그렇게 말하며, 크레핀은 마력을 끌어모았다.
한층 더 강해진 메뷸러의 마력이 ‘악의의 눈’으로 모여든다.
눈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제일 좋지만, 메뷸러의 신체는 테일리 맥로어가 구사하는 검성식 중에서 ‘신살검’이 아니면 거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 정말 막대한 마력을 미친 놈처럼 때려박아서 피해를 줄 순 있겠지만, 사실상 구멍난 항아리에 물을 붓는 짓이나 다름 없다.
메뷸러의 신체 중 일부를 구현해내는 마법이니 만큼, 저 눈도 신살검이 아니면 효율적으로 피해를 줄 수가 없는 것이다.
“후읍.”
나는 무릎을 꿇고 주저 앉아서 지팡이를 꽉 쥔 채로 허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체력적으로 꽤나 한계에 부딪혀 있었다. 메릴다의 정령식을 몇 번이나 온전하게 구사해냈고, 중위 정령도 긴 시간 동안 다루었다.
그럼에도 나는, 마력을 끌어내고 또 끌어낸다.
지팡이가 있다면, 지금 이상으로 더 효율적으로 마력을 끌어낼 수 있다.
이 알 수 없는 세계에 날아와서 버텨낸 긴 시간 동안, 정령술 분야는 정말 미친 듯이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이제 아무런 마도구의 도움 없이 고위 정령까지도 다룰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이제 와서 지쳐서 마력을 더 끌어내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다만, 저 말도 안되는 놈을 상대로는 더더욱 힘을 끌어내야만 한다.
나는 품 속에서 아끼고 아껴두었던 최후의 수단을 꺼내들었다.
지팡이를 꽉 쥐고 있는 오른손의 힘을 풀지 않은 채, 왼손에는 ‘글래스트의 황금 불사조 반지’를 꽉 쥔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또 깊게 내쉬었다.
반지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면 한 번에 끝내야만 한다.
미래의 마력까지 끌어다 쓰는 반지의 힘은, 일단 한 번 쓰고나면 당분간은 마력을 다룰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어중간한 수준의 공격으로 끝낼 생각을 해선 안된다.
더 강하게. 더 확실하게.
이 지팡이로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감응력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반지로 가불해온 마력까지 동원해서, 내 역량 이상의 수를 내밀어야만 한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이를 꽉 악물었다.
깨문 입술에 실핏줄이 터져나가는 듯한 감각이 밀려 올라온다.
정신을 집중하고 또 집중하고 나서야, 비로소 몸을 타고 흐르는 마력의 양이 온전히 느껴진다.
눈을 지그시 감고 마력의 감각에 집중하고 나서야, 오롯이 내 감정에 마주할 수 있었다.
순수악을 자처하는 가주가 부유하는 몸을 이끌고 밤하늘 위로 군림한다. 지하 연구실을 가득 채우는 메뷸러의 마력이 호흡조차 가빠지게 만든다.
크레핀과 계속해서 공격을 주고 받으면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악인의 숙명을 타고난 자. 세상을 불태우고 더 큰 힘을 추구하며, 악을 행함에 희열을 느끼는 괴물.
그 말을 듣고, 내가 계속 이를 악물고 있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이 또한 나의 역린 중 하나였던 것이다.
“지랄하지 마라.”
나지막이 흘러나온 말이었다.
“세상에 순수악 같은 게 어디있냐?”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크레핀의 표정이 뒤틀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너 같은 새끼는 질리도록 보고 살았다. 이 도망자 새끼야.”
몸을 타고 흐르는 마력은 막대하다. 평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막대한 양이 지하 연구실의 홀을 채워나갔다.
“고고한 철학자인척 하지 마라. 그냥 무서워서 도망친 겁쟁이 새끼인 걸 내가 모를까봐?”
영문조차 알 수 없이 튀어나온 욕지거리.
과묵하게만 대처해왔던 내가 갑작스럽게 윽박을 지르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 것일까. 크레핀의 표정이 더욱 더 일그러졌다.
전쟁터에서 처음 사람을 쏴 본 인간이, 미치광이 광인이 되어가기 까지.
자신은 원래 살인을 즐겼다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것처럼.
순수악으로 자신을 포장해, 자기가 저지른 악행의 뒷면을 보려하지 않는 것 뿐이다. 자기는 애초에 그런 광인이니까.
크레핀 로스테일러.
처음에는 그도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더러운 권력 싸움의 늪에서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악인이 되었겠지.
희생 당한 선대 가주, 지키지 못했던 아내, 결국 제 손으로 삶을 파멸로 내몬 딸에, 버려진 가신들,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죽인 자들에 이르기까지.
피로 얼룩진 삶이지만, 그 죽음의 무게를 감당하고 싶진 않았을테다.
“네가 뭘 알지?”
“너보다는 잘 알지.”
방대한 마력은 아예 하늘까지 샘솟을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이렇게 많은 마력을 가담하고 나면 앞으로 얼마나 나자빠져 있어야 할지 가늠조차 안된다.
어차피, 지금 당장 크레핀의 목을 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야하는 시점이다.
그렇기에, 나는 마력을 끌어내고 또 끌어내었다.
전쟁터를 노닐어 본 자는 죽음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안다.
가장 처음 전장에서 내 대신에 총알을 맞은 선임부터, 글록트관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던 음유시인까지.
숱한 죽음을 감내하고 살았으며, 단 한 번도 거기서 눈을 돌리려 해본 적이 없다. 시체들은 사이좋게 줄지어서 내 어깨 위에 올라 타있다.
어쩔 수 없이 죽었든, 필요에 의해 죽었든, 내 실책에 의해 죽었든, 자의로 죽었든. 죽은 자는 그 자체로 무게추로 남아 끊임 없이 정신을 짓누르는 법이다.
그 무게를 망각 너머로 흘려보내라는 유혹의 속삭임이 몇 백 번이고 날 찾아왔다. 못 본 체 하고 고개를 돌려서, 아예 없었던 일 취급을 하는 게 너에게도 좋다고 누군가가 속삭이는 듯 하다.
나는 단 한 번도 그 유혹에 넘어가본 적 없다.
그 모든 이름을 아직도 전부 기억한다.
그게 너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다.
“나는 너 같은 새끼들을… 제일 혐오해…”
손에 때 한 톨 묻지 않은 자는 없다. 악행 한 번 저지르는 일 없이 평생을 살아가는 자가 어디에 있나.
중요한 것은 그 악행을 대하는 자세일 뿐이다.
― 콰아아아아아앙!
이윽고 완전히 발현된 소환식이 주변을 집어삼키며 빛을 냈다.
피어오른 법진으로부터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지팡이의 힘과 반지의 힘을 모두 극한까지 활용해, 내 역량 이상의 정령을 세상에 현현시켜보인다.
불꽃이 마치 태산과도 같이 샘솟았다.
중앙저택 부지에 불꽃의 벽이 도래했다.
각 원소별로 단 한 개체만 존재한다는 ‘최고위 정령’.
제 아무리 극단적인 수를 모두 동원하더라도 온전히 소환해낼 수는 없었지만… 그 일부라면 가능하다.
신화 시대에 커다란 산맥을 통째로 태워버렸다는, 역사서 속의 최고위 불 정령. ‘테오르피스’.
이글거리는 불꽃 속에서, 법진을 헤치고 그 머리가 튀어나왔다. 쩍 벌린 아가리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는, 세상 모든 것을 공평하게 태워버릴 힘이 있다.
‘벼락맞은 천년 나무 지팡이’에는 계약하지 않은 정령일지라도 친화도와 관계 없이 모든 정령식을 구현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
최고위 정령식 ― ‘화룡의 가호’.
일대의 ‘마력’을 모두 태워 없애버리는, 겁화의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