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6)
합동 전투 실습 (3)
– ‘페니아. 너는 신이 주신 축복을 타고 태어났구나.’
페니아 황녀가 타고난 통찰안에 대해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인 클로엘 황제였다.
황족의 삶이란 끊임없는 암투와 모략의 연속이다. 대중의 앞에 드러난 영광스럽고 드높은 황족의 삶만 봐서는 그 끈적한 어둠을 절대로 가늠할 수 없다.
그렇기에, 페니아 황녀의 인간을 가늠하는 통찰안을 ‘신이 주신 축복’이라 평한 클로엘 황제의 말은 틀린 셈이다.
그녀의 능력은 신이 주신 선물 따위가 아니다. 그 어두침침한 심연의 사이에서, 스스로 제 몸을 지키기 위해 후천적으로 습득한 감각인 것이다.
그렇기에 페니아 황녀는 스스로의 능력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의 숙모를 독살하려 했단 재상의 두 눈빛이, 제 아들을 황족으로 만들고 싶은 공작부인의 욕망어린 손짓이, 침실에 있던 금시곗줄을 훔친 사용인의 떨리는 동공이, 기사단의 무구 유지비를 횡령했던 단장의 그 불안한 발걸음 소리가, 자신의 권력을 질투하는 혈육의 그 시기어린 시선이, 메이드로 변장해 정보를 수집하던 공국 첩자의 그 떨리는 목소리가.
고귀한 자애의 황녀를 우러러 보는 그 황실의 모든 시선의 밑바닥에는 어두컴컴한 심연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 면면들의 추잡한 속내를 모두 꿰뚫어보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양 고귀한 황녀의 삶을 영위해왔기 때문에.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기에, 결투 준비를 끝마치고 정중히 인사하는 사내를 똑바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황녀의 육감은 이미 이능(異能)의 영역이다. 인간을 통찰하는 능력에 대해서 페니아 황녀 이상의 직감을 지니려거든, 말 그대로 독심술이라도 쓰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아하하, 저게 뭐야! 에드 로스테일러 아니야?! 그렇게 보석 주렁주렁 달린 옷만 입고 다니더만, 꼴이 참 초췌해졌네!”
“검소한 모습이 참 잘 어울리네!”
“마법적 재능이라곤 전혀 없으면서 젠체만 하던데, 이제 밑천 다 드러나겠구만!”
속닥대는 소리가 결투장 위까지 들려왔다. 맘 같아선 있는 힘껏 야유를 외치고 싶어들 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일국의 황녀가 바로 서있는 자리이다 보니 비교적 얌전하게 굴고 있었다.
“네, 저도 잘 부탁해요.”
황녀는 가볍게 손을 들어서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컨디션은 최고조였다. 몸 상태를 항상 잘 관리하는 것도 훌륭한 마법사의 중요한 덕목이다.
황녀는 눈가를 좁혀가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 ‘네 노력은 반드시 보답 받을 거야! 기 죽지마! 야! 허리 펴! 쪽팔릴 거 없잖아!’
– ‘당당히 걸어! 충분히 잘했어! 상대가 좀 안 좋았을 뿐이잖아! 이깟일 가지고 좌절하지 마!’
일국의 황녀를 무시해 지나쳐가면서까지, 낙제 위기의 소년에게 절박하게 외쳐댔던 이야기다.
처음에는 무시당했다는 사실보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절박함에 놀랐다.
“아까 테일리 상대로 소리 치는 거 들었냐? 쟤도 참 독해 진짜.”
“어휴. 자기가 괴롭혀 놓고 자기가 더 호들갑이네. 쪽도 못 써본 애를 그렇게 놀리고 싶었을까.”
“아니면 이제와서라도 좀 착해보이고 싶었나보지. 왜… 내가 괴롭히던 애를 응원한다? 뭐 그런 식으로.”
“와, 의도 한 번 참 음습하다.”
“애초에 저런 인간이었다니까?”
좌중의 수군거림은 이미 속삭임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참관인 석에서 멀리 위치해있는 황녀의 귓가에까지 그 수군거림이 들어오는데, 에드 로스테일러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에드 로스테일러의 눈빛은 평온하다.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명경지수처럼, 그 동공엔 일말의 떨림도 없다.
그 눈빛 속에서 상대의 감정을 읽어내는 일은 페니아 황녀에겐 식은 죽 먹기와도 같다.
무관심함, 무신경함, 아무래도 좋음.
익숙한 느낌. 애초에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사내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를 조롱하는 좌중의 수군거림 따위는 그의 마음에 할퀸 자국 하나 내지 못하는 것이다.
캠프에서 저 에드 로스테일러를 맞딱트렸을 때의 느낌과도 별 다를 게 없었다. 애초에 살다보면 그런 사람도 많이 만날 수 있다.
매사에 무관심하고, 아무래도 좋고, 남들이 뭐라 하든 무신경한 기질을 타고난 인간들이 있다.
어쨌든 자기 인생의 중심은 자신이다. 일단 굳은 신념 하나가 마음속에 박혀 있으면, 타인의 의사에 흔들리지 않는 뚝심이라는 게 바로 서는 것이다.
그런 기질을 타고나는 자는, 당장 멀리 볼 것도 없이 1학년생들 사이에서도 충분하리만치 많았다.
루시 메이릴이 그랬고, 황금의 딸 로르텔이 그랬으며, 초목의 창 직스가 그랬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땐 모종의 안도감마저도 들었다. 그제서야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간의 윤곽이 잡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간 또한 황녀의 통찰안 위에선 평등한 존재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황녀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그의 언동이,
자기 손으로 낙제시켜버리려 했던 1학년생을 진심을 다해 격려하는 그 모습이, 다시 황녀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그 내면의 윤곽이 보이고, 정체가 손에 잡힐 것 같으면 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버리는 그 언동은 황녀를 또 다시 괴롭게 한다.
분전했던 테일리를 조롱하기 위한 외침이었다고?
테일리를 응원하면서 자기 과거사를 세탁하려는 위선적인 행동이었다고?
전후사정을 모르면 그 좌중의 추측에 힘을 실어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페니아 황녀에게는 보였다. 입학 시험 이후로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저 사내의 진정한 절박함. 그 편린을 분명히 보았다.
차라리 캠프에서 마주쳤을 때, 황녀를 향해 지금처럼 호소했다면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발 저를 퇴학시키지 말아주세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습니다. 한 번만 선처해주십시오.
그렇게 무릎을 꿇고, 양 손을 부비면서 온 힘을 다해 호소했다면 이런 불편한 감정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고고하고 드높은 황녀 앞에서 그 고개를 숙인 채 절박한 호소를 하는 사람들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으니까.
그러나, 자기 퇴학이 어떻든 무신경하게 대처해놓고, 자기를 조롱하고 야유하는 수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저런 무관심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주제에.
자기 손으로 퇴학 시켜버리려 했던 그 1학년생이 좌절했을땐, 가슴에서 우러나온 절박함을 보여주는 그 부자연스러움은 또 뭔가.
“에드 로스테일러. 당신은 저를 어지럽게 해요.”
황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렇게까지 에너지를 쓸 일인가?
가늠이 될 듯 될 듯 되지 않는 그의 내면에 휘둘리는 것도 이제는 질렸다.
상대는 그냥… 파문당한 일개 학생일 뿐이다.
황실의 전복을 꿈꾸는 타락한 군벌도 아니고, 공금을 횡령하는 부패한 재상도, 황실의 재물에 손을 대는 괘씸한 사용인인 것도 아니다.
설령 황녀의 통찰안조차도 가늠하지 못한 내면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뭐 어쨌다는 건가.
그래, 마침 시원하게 털어내버릴 기회도 왔다. 이번 결투 한 번으로 그냥 털어내버리자. 그렇게 황녀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뭐가 어찌됐든 저 알 수 없는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사내와는 시원하게 한 번 치고 박고 싸울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이번 결투로, 확실하게 끝맺음을 내고 싶네요.”
알 수 없는 게 참 많은 세상이다. 그래도 시원하게 웃든, 시원하게 울든, 뭐가 됐든 홀가분하게 털어내어버릴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됐다. 그 내막이 어떻든 간에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에드 로스테일러 하나 가늠하지 못한다고 천지가 개벽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에드 로스테일러의 마나양은 충분히 가늠이 되고 있었다.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손 위에서 흐르는 마력을 통제하는 그 모습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애시당초 1학년과 2학년의 대련이다. 전력이 비대칭이니 핸디캡삼아 둘 다 기초 수준의 마법만을 쓸 수 있도록 제약을 걸어놓은 것이다.
몸을 풀면서 마력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는 에드 로스테일러의 모습을 보면, 기초 원소 마법 만큼은 수도 없이 반복 숙달 해왔다는 사실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중급 원소 마법을 어디까지 구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나, 적어도 기초 원소 마법 만큼은 충분히 숙련되어 있을 것이다.
페니아 황녀의 마법적 능력은 확실히, 루시나 로르텔처럼 압도적인 재능을 지녔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성품이 근면하기에, 마법 단련에 소홀하지도 않았다.
[ 지금부터 대련을 시작해주세요. ]조교수의 그 지시와 함께, 페니아 황녀는 자세를 잡았다.
첫 일격. 그것으로 상대의 그릇을 가늠한다. 페니아 황녀의 특기인 물 원소 마법은 변칙적인 공격에 특화되어 있다.
갑작스럽게 변하는 그 공격의 동선에 일일이 반응하기는 쉽지 않다.
“갑니다.”
페니아 황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기초 원소 마법인 ‘수구(水球, water ball)’가 구현됐다.
이리저리 자유롭게 형태를 바꾸는 그 마력으로 구현된 물의 덩어리는, 순식간에 적의 사각을 기습해 큰 압력을 가하는 까다로운 기술이었다.
페니아 황녀는 한 번에 이 수구를 다섯 개까지 구현해 내서 사방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상대가 구사하는 기술들을 가늠해보기 위해 하나의 수구만을 구현해냈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구사하는 원소 마법은 바람과 불이다. 어떤 방식으로 받아칠 것인가.
그렇게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 전략을 바꾸고, 조금씩 출력을 올려가며 전력을 다해 싸운다.
그렇게 수를 주고받으면서, 모든 것을 홀가분하게 털어낼 수 있는 그런 극적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저 알 수 없는 남자를 마음 속에서 털어내버리자. 저 남자 말고도 신경쓸 것이 세상엔 너무나도 많다.
그 일념으로 날린 수구가, 궤도를 바꿔가면서 에드 로스테일러를 덮쳤다.
페니아 황녀는 캐치해냈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눈동자는 확실하게 수구의 궤도를 따라가고 있었다. 바람인가, 불인가? 무엇으로 방어할 것인가? 그리고 그 방어가 구현되고 나면, 무엇으로 후속타를 날려야…
-콰앙!!
그러나, 페니아가 날려보낸 수구는 에드 로스테일러의 복부를 강타했다.
그대로 에드 로스테일러의 몸은 잠시간 공중을 부유하더니 바닥을 굴렀다. 한바탕 먼지가 피어오르더니, 완전히 나자빠진 에드 로스테일러가 바닥에 널부러지듯이 앉아 있었다.
“…졌습니다.”
“뭐라고요?”
페니아 황녀의 동공이 한차례 크게 떨렸다.
“크하하하하!”
“와 뭐야, 저게! 테일리보다 더 허무하잖아!”
“쿨한 척은 잔뜩 하더니 한 방에 나가 떨어지네!”
“페니아 황녀님! 멋있었어요! 정말 통쾌했어요!”
환호성을 참고 참았던 좌중의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공공의 적과도 같은 에드 로스테일러가 호쾌하게 나가 떨어지는 모습에 세상 기뻐하는 목소리들이었다.
그러나, 결투대 맞은 편에 서있던 페니아 황녀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황녀의 수구가 날아드는 그 직전의 순간까지, 에드 로스테일러의 눈동자는 똑바로 그 궤도를 향해있었다.
못 막은 게 아니다.
안 막은 것이다.
“당신 지금 대체 뭘…”
“수고하셨습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옷을 털고 일어선 에드 로스테일러가 황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제서야 에드 로스테일러는 황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이 때가 되어서야 페니아 황녀는 깨달았다.
저 남자는 이 결투대에 올라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황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애시당초 이 결투 따위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페니아 황녀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원하게 치고 박고 싸운 뒤 훌훌 털어버리려 했던 그 불편한 감정이, 되려 황녀의 속을 집어 삼키려 하고 있었다.
*
지금 결투 같은 거 할 때냐???
나는 바쁜 걸음으로 재빨리 결투대를 걸어내려왔다. 오늘도 나를 환대해주는 영광스러운 조롱들이 나에게 날아들었다. 꼴사납게 마법 한 방에 나가 떨어진 것이 퍽 시원했나 보다.
“테일리 이 자식은 어디로 갔지?”
모든 일에는 우선 순위가 있는 법이고, 모두 다른 중요도가 책정 되는 법이다.
페니아 황녀와 접점이 생길 때에는 최대한 신중하게, 시나리오에 영향이 가지 않게끔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겠지. 페니아 황녀는 이 시나리오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니까.
그러나, 그런 페니아 황녀보다 중요한 것이 이 세계의 주인공인 테일리다.
테일리가 이 시련에 완전히 굴복해버리고 마음이 무너져버리면, 꿀이란 꿀은 있는대로 다 빨고 홀랑 졸업해버리는 내 원대한 계획에 치명적힌 결함이 생기고 만다.
그러니까, 뭐라도 해야한다. 제 아무리 페니아 황녀가 중요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테일리의 행보보다 중요성이 앞설 수는 없다.
“뭐 어쨌든 테일리 이 자식부터 찾아내는 게 먼저겠지.”
나는 조롱의 외침들을 뒤로한 채 성큼 성큼 걸어서 네일관의 출구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어쨌든 아직 실습은 안 끝났지만 잔뜩 모인 인파들 사이로 잘 섞여서 빠져나가면 될 것이다.
어떻게든 테일리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 수단을 찾아낼 수만 있으면, 성적에 영향 가는 거 정도는 그냥 노력으로 커버해주마.
그 일념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건만, 내 뒤에 따라 붙은 자가 또 하나 있었다.
“에드 로스테일러!”
놀랍게도 그 페니아 황녀가 결투대에서 뛰쳐내려 헐레벌떡 뛰어내려온 것이다. 별로 체력이 좋은 편도 아닐텐데, 숨까지 헐떡이면서 벽을 짚고 나를 불러세웠다.
“예? 페니아 황녀님, 호위도 대동하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나오시면…”
세상에서 제일 어리둥절한 얼굴로 페니아 황녀를 돌아보았다.
“그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 좀 짓지 마요!”
뭔가 악에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는 페니아 황녀의 모습은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다. 애초에 얘 이런 캐릭터가 아니지 않나?
아니, 저렇게까지 감정이 격해질 일이 뭐 있나?
“매번 그런 식으로… 아닌 듯 맞는 듯, 애매모호하게… 그걸 가늠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답답한지 알아요?”
“그..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결투라면, 한 수 잘 배웠습니…”
“한 수 잘 배우기는 무슨…!”
주먹을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대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니 저건 진짜 진지하게 빡쳤는데..??
“페니아 황녀님. 잠시… 고정하십시오.”
“처음부터 이길 생각도 없었던 주제에, 빨리 결투대에서 내려갈 생각밖에 안하고 있었던 주제에…!”
“페니아 황녀님.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내가 이렇게 겉으로 기색이 드러날 정도로 당황하는 사람이 아닌데, 황녀의 이런 반응은 솔직히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페니아 황녀는 권위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행위를 질색하는 자이며, 그러면서도 언제 어디서나 품위를 중시하는 모습을 잊지 않는 고고한 군주다.
손아랫사람에게 품위 없이 윽박을 지르며, 손을 부들부들 떨고 목소리를 드높이는 행동은 좋지 않다. 그녀 자신의 신념에도 어긋나며, 누군가 보거나 들었다간 필시 좋은 소문이 오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진정시키려고 했다.
“안 그래도 수업 진행 따라가기도 힘든데, 그 여우 같은 상인은 속내를 숨기고 장삿속으로 학교를 잡아먹으려고나 하고…! 글래스트 교수의 심술은 나아질 일이 없고…! 그 와중에 사용인들은 황실의 법도 같은 것이나 들먹이고…! 안 그래도 신경 쓸 거 많은데! 힘든데..!”
아니 뭐 이렇게 울분이 많았다고…?
근데 왜 나한테 난리야? 그거 결투 좀 대충한 게 그리 큰 죄인가? 쌓인 억하심정이 많은 거야 이해하지만, 나한테 폭발할 일은 아니지 않나?
“황녀님, 진정하십시오.”
일단 모독적이라고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 황녀의 옥체에 몸을 댔다. 그래봤자 양 어깨에 손을 얹고 눈을 똑바로 맞춘 것일 뿐이지만.
“심호흡 하십시오.”
갑작스럽게 커다란 사내의 손이 어깨를 감싸자 그제서야 황녀가 숨을 집어 삼켰다. 평소에 황녀의 옥체에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으니,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이런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조금은 놀랐을 것이다.
원래 평소에는 접할 일 없는 상황에 인간은 급격하게 위화감을 느끼고, 평정을 되찾는다.
“너무 그렇게 흥분하실 것 없습니다. 들이쉬고, 내쉬십시오.”
페니아 황녀는 그 말에 따라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아..앗…!”
본인이 얼마나 품위 없는 짓을 했는지 깨닫고 자기 얼굴을 감쌌다.
이른바 현자타임이다. 원래 쪽팔림이라는 것은 시간차를 두고 엄습하는 법이다.
“아… 아까 전 그건… 잊어주세요…”
“아..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한동안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귀까지 빨개진 것이 몹시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았다.
…됐냐?
나 이제 가도 되냐?
“그래요. 전 나쁜 버릇이 있어요. 시원하게 추궁하고, 물어볼 건 물어보면 되는 일인데, 자꾸 그 속내를 가늠하려 들고 꿍꿍이를 유추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아마 황실에 오래 살았던 탓이겠죠.”
그러더니 물어보지 않은 사실들을 얘기하기 시작한다.
아니, 알았다고! 나중에 성의 있는 리액션을 동반해서 잘 경청 해준다고!
일단은 좀 보내주라고! 테일리 찾아야 된다고!!!!
“나쁜 버릇이라는 건… 알고 있었건만…”
그렇다고 황녀의 면전에 대고 아 관심없어요 제발 저 좀 보내주세요 저 급해요 바빠요 하고 호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요. 황녀님, 그렇다면…”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또 뭔데?
“제 생각은 이래요. 당신은 로스테일러 가문의 어둠에 대해 뭔가 알고 있거나, 아니면 피해를 입었거나 해서 로스테일러 가문으로부터 연을 끊으려 한 거죠? 자연스럽게 파문 당할 명분이 필요해서 저 테일리라는 학생을 괴롭혀 파문 사유를 만들어 낸 거죠?”
황녀는 그제서야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법 날카로운 추론이었다. 대개는 헛다리지만, 로스테일러 가문의 어두운 부분이 존재할 거라는 추론은 맞아들었다.
언젠가 한 번 언급했던 적은 있는 거 같은데, 확실히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신화시대의 악신 메뷸러의 힘을 빌려 불사의 마법을 연구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을 실험의 명분으로 해 희생시켰지.
그런데 그건, 시나리오 후반부에서 학사 권력을 동원해 황녀가 직접 조사해나갈 이야기다. 아직 한참 머나먼 시나리오인 것이다.
“혹시 로스테일러 가문의 어두운 부분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러니, 그걸 알려줄 리가 있겠냐??
“그런 건 잘 모릅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황녀는 칼 같이 대답을 가로챘다.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맞잖아요. 그럼 방금 테일리를 향해 외친 말들은 뭐에요? 당신이 퇴학 시키려고 했던 상대를 왜 당신이 격려하고 응원해요..? 애시당초 당신은 테일리를 별로 싫어하지 않는 거 아니에요?”
“어.. 그건…”
이 자식, 질문이 예리한데?
“그건… 그냥 놀린 겁니다. 그게 아니면… 음… 그… 뭐… 왜… 다들 절 싫어하잖습니까. 그래서 뭐, 테일리를 응원하면 뭔가 달라진 모습처럼.. 보이지 않을까…? 뭐 그런…?”
“누가 봐도 거짓말이잖아요!”
“아니 거짓말 아닙니다…”
“저는… 사람을 평하는 통찰안에서 만큼은 누구보다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황녀가 다시 얼굴을 들이밀며 확실하게 이야기했다. 맞는 말이긴 하다. 자애의 황녀 페니아는 사람을 가늠하는 그 눈에서 만큼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실력자다.
“세상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저는 그 순간만큼은 확실하게 당신을 꿰뚫었어요. 테일리를 격려하는 그 순간 당신은, 진짜로 절실하고 간절했잖아요.”
아니 그야 절실하고 간절할 수밖에 없지… 걔가 좌절하면 내가 망한다니까…?
근데 그런 걸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전국의 초등학생부터 다 큰 성인까지 구분없이 두루 사용하는’절대방어의 전략’을 구사하기로 했다.
“진짠데…”
증거 있냐?
너 증거 없지???
심증 밖에 없지???
“아니, 그…”
“진짠데요… 진짜 맞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논지가 전개될 여지가 전혀 없다. 뭐 통찰안이고 자시고 간에 내가 아니라면 아닌거다. 꼬우면 물증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진짜… 진짜입니다…”
“아… 정말…!”
여기까지 도달하자, 황녀는 다시금 품위 없이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북북 쥐어뜯었다.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어디다가 분을 풀 데는 없고, 답답함은 가시질 않으니 애꿎은 길바닥만 황녀의 발에 꾹꾹 밟혔다.
“아—! 정말–!!!!”
뭔가 손에 잡힐 듯 잡힐듯, 잡히지 않는 진상을 쫓거나… 미꾸라지처럼 추궁을 빠져나가는 짓을 반복해서 당하다보면 확실히 머리에 스팀이 오를 수 밖에 없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주째 그 짓을 반복하고 있을테니까.
거기다가 그녀의 통찰안은 누가 됐든 시원스럽게 그 속내를 꿰뚫어볼 수 있게 해주니, 이런 경험이 잘 없는 페니아 황녀는 두 배 세 배는 더 답답하고 목이 막힐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안정적으로 보장된 미래의 흐름은 내 유일한 밑천이다.
너 같으면 이걸 알려주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