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61)
에드 로스테일러 쟁탈전 (1)
온 몸이 먼지투성이가 되었을지언정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헐렁한 셔츠와 스커트는 여기저기 찢어져서 넝마가 되었고, 세상을 뒤엎을 듯 뿜어져나오던 마력의 양도 꽤나 많이 줄었다.
그럼에도, 루시 메이릴은 쓰러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 콰아아아악!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가 없는 최고위 원소 마법 발현.
하늘에서부터 수십 번의 번개가 내려치고, 마법진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불이 솟아오르며, 수백개 단위의 얼음창이 하늘을 수놓는 와중에도 메뷸러는 끝까지 제압 당하지 않았다.
주변을 신경써가며 싸우지 않았더라면 아예 지도를 다시 그렸어야 할 수준의 화력이었다. 그 정도로 루시 메이릴의 마법은 상식을 초월해 있었다.
밤 하늘을 부유하는 루시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메뷸러의 눈동자는 그녀를 향했다. 수도 없이 합을 주고 받으면서, 누구 마력이 먼저 바닥나는지 승부를 볼 셈이었다.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강대함이란 어디까지 가는가. 기껏해봤자 백년 조금 못 사는 인간 주제에 이리도 강력한 힘을 타고난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다만, 여기서 그 끝을 볼 필요는 없었다.
메뷸러는 강림한 의미를 잃어버렸다.
제물의 힘을 빌어 세상에 강림할 예정이었으나, 그 매개가 되어줄 크레핀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메뷸러의 마력을 끝도 없이 주입 받았음에도, 결국 에드 로스테일러의 손에 의해 끝을 맞이했던 것이다.
“…?”
문득 하늘에 도래한 거대한 법진. 그것은 크레핀이 구현한 제물 법진도, 루시가 구현한 원소 법진도 아니었다.
메뷸러가 발현해낸 그 법진은, 인세의 굴레 밖으로 벗어나… 원래 메뷸러가 존재했던 차원으로 넘어가는 이동 법진이었다.
메뷸러는 퇴각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단 한 명의 마법사 때문에.
“어딜…!”
루시는 퇴각하려는 메뷸러를 앞에 두고 다시금 손에 마력을 끌어모았다. 저 정도 수준의 법진은 루시가 정신을 집중하면 그대로 부숴버릴 수 있다.
그러나, 문득 뻐근거리는 어깨가 욱씬하고 울리자… 루시는 미간을 좁혔다.
멍한 눈으로 로스테일러 저택 부지를 내려다 본다. 보아하니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끝을 맞이 했고, 저택 내부의 난리도 전부 수습되어 가는 것 같다.
사용인들과 촉수들은 모두 힘을 잃고 쓰러져있었다. 그렘린들도 일제히 퇴각하고, 성당기사단과 황실호위대가 일제히 저택 부지 안으로 진입 중이다.
상황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메뷸러는 크레핀이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루시를 뚫어내지 못했다.
일개 인간이 악신의 길을 막아섰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 가.”
법진 너머로 사라지는 메뷸러의 모든 눈동자들이 루시를 똑바로 쳐다본다. 일시적 퇴각일 뿐이라고 선언하는 듯 하지만, 결국 패퇴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마.”
별빛을 받아 빛나는 루시의 백발이 밤하늘 사이로 휘날린다. 평소처럼 머리끈으로 내려 묶지도 못해, 산발처럼 날리고 있는 모습이 인상깊다.
멍한 얼굴로 메뷸러를 올려다 보는 모습엔 승리의 환희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흐지부지 끝난 싸움에 불완전연소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밤 하늘을 수놓던 메뷸러의 모습도 사라져 가자, 루시는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내려온다…!”
“그 미친 괴물을… 혼자서 상대했어…!”
“최… 최고위 마법을 몇 개나 사용했는지…. 세지도 못할 정도였는데… 저렇게 멀쩡하다고…?”
밤하늘에서 천천힌 내려와 중앙정원 쪽에 착지하자, 병사들은 일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혼자서 악신을 상대하고 홀로 고고히 지상에 내려온 소녀의 모습이 마치 신의 사자 같다.
중앙 정원에 진입한 병사들은 모두 말문이 막혀버린 채, 그렇게 천천히 착지한 루시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손 한 번 휘젓는 것만으로도 저택 부지 일대를 초토화 시킬 수도 있는 인간이다.
그 사실을 방금 전투를 통해 명백하게 확인했다. 범인들은 차마 뭐라 말을 걸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루시는 그런 시선들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넝마가 되어가던 옷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대부분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병사들만 가득했지만, 눈을 지그시 감고 마력을 느껴보면 저 멀리 어디서부턴가 익숙한 풀내음이 피어오른다.
그대로 옷을 갈무리 한 채 통통 튀는 듯한 걸음으로 병사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어딜 가든 저절로 인파가 갈라져 길이 만들어졌다.
그대로 중앙 정원의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 뉘여져 있는 금발의 소년을 한 명 발견한다.
온 몸이 피로 뒤덮여서, 의식을 잃은 채 느티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소년은… 이미 많은 일을 겪은 듯 하다.
그 주변에는 응급처치를 하고 있는 병사 두 명과, 그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정령사가 한 명, 성녀가 한 명 있다. 그 둘을 보고 잠시 도끼 눈을 떴던 루시지만,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콧바람을 한 번 휙 내쉬고는 소년 쪽으로 통통 걸었다.
“아, 앗…!”
응급처치를 하던 병사 하나가 뒤를 돌아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그 옆의 정령사나 성녀도 마찬가지다.
루시에게 뭐라 말을 걸어오려 했지만, 루시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한 귀로 흘려버리고, 병사를 옆으로 밀어세운 다음에 소년의 명치 언저리에 손가락을 올렸다.
자상에 찰과상, 화상, 타박상, 열상, 골절까지. 숱한 시련을 견뎌온 그지만 이 정도 수준의 상처를 입어본 적은 처음인 것이다.
거기다가 마력까지 지나치게 당겨써서 내부의 마력 흐름이 완전히 꼬여있고, 반동으로 인해 열은 치솟고 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오는 광경이지만, 당장 루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제 마력을 주입해 꼬인 마력을 풀어주는 것 뿐이다.
그렇게 한참동안 마력 흐름을 조율한 뒤, 루시는 느티나무에 등을 기대고 에드의 옆에 앉았다.
둘 모두 만신창이다. 그나마 루시는 제 몸을 충분히 가눌 수 있었지만, 지칠대로 지쳤다.
루시는 에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한계까지 마력을 끌어쓰느라 노곤하게 밀려오는 피로감 탓에… 조금씩 눈이 감겨오기 시작했다.
“중앙저택 쪽에… 내 모자 좀… 챙겨줘…”
그리 말하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쌔근쌔근 대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켜보뎐 병사들과 두 소녀는 모두 어이가 없어서 말문을 잃고 말았다.
확실한 건, 지금 시점에서는 루시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강림한 악신을 홀로 막아서서 돌려보내버린, 이번 대 학살극의 영웅이었다.
*
“뭐라고요?”
페니아 황녀는 귀를 의심했다.
“린돈 오라버니가 황태자 자리를 포기하게 만든 것이 페르시카라고 말했지 않았니. 어떤 방식으로 린돈 오라버니를 압박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까지 했으니 분명 황권에 욕심을 가지고 있겠지.”
로스테일러 사교회에서 난리를 치른 지도 어느덧 한 시간이 넘게 지나 있었다.
황실에서 별동대가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곧 있으면 이 사건도 황실 관할로 넘어가 수습되기 시작할 터다.
현재는 성당 기사단원들과 황실 근위대 몇 명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화재를 수습하고, 생존 인원을 확인하고 보호했다. 부상자들도 응급 처치를 한 뒤, 제대로 된 의료 지원을 받기 전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2황녀 페르시카는 도서관에 박혀서 항상 책만 읽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신하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권력보다는 지성을 추구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페르시카에게 잡아먹힐 거란다. 너도, 나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황권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런 건 중요치 않아, 페니아. 마음만 먹으면 황권에 도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게 문제지.”
장소는 저택 부지 바로 앞에 성당 기사단들이 세운 막사다. 황족들을 위해 잠시간 휴식할만한 공간을 마련해둔 것이다.
셀라하 황녀는 사건이 마무리되어가는 틈을 타 페니아 황녀에게 이야기를 나누자며 그녀를 불렀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입지를 좀 더 다져보려고 했건만…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셀라하 언니께서는 처음부터 이 저택에 계셨던거죠?”
“그렇단다. 다만, 너는 어쩌다가 하룻밤만에 이 로스테일러 영지까지 뛰어온 거니?”
“그건…”
페니아는 말을 얼버무렸다. 셀라하는 그 반응을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다가도, 이내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신경쓰인 거니? 편지의 인장을 보아하니 그를 꽤 신뢰하고 있는 것 같던데.”
“…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어서요.”
“어쨌든 아바마마께서도 좋아하진 않겠구나. 별다른 보고도 없이 이런 먼 땅까지 말을 타고 달려오다니.”
“제가 책임질 일이에요.”
“그렇게 말하니 다행이구나.”
셀라하는 찻잔 끝을 몇 번 훑다가, 손잡이만 휙 밀어서 컵을 돌린 채로 말을 이어갔다.
“페니아. 어쨌든 우리가 지금 굉장히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단 걸 알아야만 해.”
“그렇죠… 당장에 사상자도 많고…”
“긴 세월 동안 황실 권력의 중심에서 목소리를 드높이던 로스테일러 가문이 바닥으로 쳐박혔다 이 말이야. 아마 이번 사건은 사서에 기록되어서 대대손손 이어져내려가겠지. 로스테일러 저택의 대학살극으로 말이야. 우리는 그런 역사의 한 순간에 와있는 거란다. 그걸 자각해야 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요, 셀라하 언니?”
“우리는 우리가 해야할 일을 똑바로 해내야한다는 이야기야.”
셀라하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지는 것을 보고, 페니아 황녀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하는 말은 듣고 보자는 투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런 대참사를 수습할만한 사람이라곤 황실의 적통 권력을 이어 받을 우리가 아니겠니?”
“… 확실히 지금 저택에 모여있는 성당 기사단, 황실 근위대, 여러 귀족가들에게 골고루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황실 권력에 가장 가까운 저희들이겠지요.”
“그래. 일을 수습할 때는 그걸 도맡아서 책임질 사람이 필요해. 원래라면 내가 하려했지만, 현장에 페니아 너까지 와있을 줄은 몰랐는걸.”
셀라하 황녀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페니아에게 이야기했다.
“뭐, 혼자가 아니라 둘이면 어떠니. 둘이서 책임지고 상황을 잘 수습해서, 페르시카의 영향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단다. 그 애가 다른 마음을 먹기 전에 말이야.”
“아니, 저는 황권에는…”
“네가 관심이 없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 특히 페르시카는 널 적극적으로 견제하겠지.”
페니아는 셀라하의 말에 머뭇대는 태도만을 보였다. 페르시카가 야욕을 가진 인물이란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과연 페니아의 뒤통수를 칠 정도의 인간인지 까지는 잘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사실 황권 경쟁 이전에 당연히 해야할 일이지. 군주되는 자로서 말이야.”
“그건… 맞아요.”
“그래, 그러니까… 저택 부지를 잘 통제하고, 포상할 사람은 포상하고, 단죄할 사람은 단죄해야 해.”
셀라하는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는지 술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괴물을 막아낸 자그마한 마법사와, 귀빈들을 지켜낸 정령사는 황실 차원에서 포상을 내리는 것이 옳아. 내가 아바마마께 직접 건의해서, 작위까지는 못 가더라도 최소한 커다란 영예와 금전을 하사할 수는 있을 것 같구나.”
“저도 동의해요. 그 둘의 노고는 치하받아 마땅해요. 실제로 많은 목숨을 살렸잖아요.”
“그래, 그만한 힘을 가졌는데 평민의 신분으로 빛을 못보고 사는 건 불쌍한 일이지. 변경의 자그마한 남작 지위라도 줄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셀라하는 고개를 잠시 까딱대고는 짧게 고민했다.
“글쎄, 그 정령사는 그렇다치더라도… 그 마법사는 금은보화나 작위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진 않던데.”
“원래 속을 가늠하기가 힘든 사람이에요.”
“그래. 유독 천재들이 더 그런 법이지. 어쨌든 둘을 포상하고, 따로 단죄해야할 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야지.”
이야기가 쭉쭉 진행되고 있었다. 슬슬 페니아는 직감했다. 이 다음 나올 이야기가 셀라하의 본론이다.
“계획에 가담한 로스테일러 가문의 후손들은 전부 교수대에 매달아야지.”
“…”
“표정이 안 좋구나, 페니아.”
페니아는 마음의 준비를 이미 끝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크게 당황하지도 않았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계획에 가담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를 막아서고, 최후엔 그를 마무리 한 자에요.”
조용한 목소리에 의지가 깃들어있다. 그 모습이 셀라하에게는 꽤 인상 깊게 느껴졌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네가 본 것은 그저 모든 일이 끝난 뒤에 보인 마지막 모습일 뿐이잖니?”
“그 전부터 저는 가늠하고 있었어요. 에드 로스테일러는 애당초 로스테일러 가문의 어둠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실베니아에 입학한 것도 그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이었고요.”
“네 추측이 모든 진실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 좋지 않단다, 페니아.”
페니아가 미간을 좁히자, 셀라하는 더 여유롭게 웃었다.
“내가 에드 로스테일러라면, 저런 거대한 악신조차도 홀로 막아서는 마법사나, 갖가지 괴물을 홀로 맞서는 정령사 같은 것을 보고 있으면 크레핀을 배신할 생각을 먼저 했을 것 같구나. 이런 무모한 계획이 성립될 수 없으니, 차라리 중간에 그를 배신하고 처음부터 숭고한 인물인 양 행동하겠지.”
“크레핀의 계획이 실패할 것 같으니, 손바닥을 뒤집었단 말씀이세요?”
“그래. 크레핀의 목숨을 제 손으로 거두기만 하면, 가문의 위광에도 주눅들지 않고 불의에 맞서 싸운 영웅처럼 보일 수 있겠지.”
페니아의 표정이 가면 갈수록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라하의 여유로운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페니아가 이야기했다.
“그게 아니라는 거, 셀라하 언니도 아시잖아요.”
핵심을 꿰뚫는 말이었다.
“예니카 페일로버나 루시 메이릴은 철저히 에드 로스테일러 쪽 인물이에요. 그 둘이 크레핀에게 맞서 싸운 것을 보면 모르겠어요?”
셀라하에게 따져드는 페니아는 명백하게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저런, 가엾은 둘은 잔악한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놀아났구나. 처음에는 그저 메뷸러의 제물로 삼기위해 저택에 데려왔을 뿐인데, 생각보다 강해서 크레핀을 제압해버릴 것 같으니… 마치 처음부터 숭고했던 것처럼 연기를…”
– 짜악!
셀라하는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다. 고개가 돌아가버렸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셀라하 본인도 동공이 휘둥그레져서, 페니아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천막 내부를 확인한 병사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랐다. 페니아가 셀라하의 따귀를 후려친 것이다.
셀라하는 병사와 눈을 마주치고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사는 식은 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천막 밖으로 나갔지만, 긴장감은 여전했다.
“페니아, 너 미친 거니?”
“셀라하 언니의 의도가 보여요. 그렇게까지 에드 로스테일러의 행동을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이유도요.”
또 다시 잠시간 침묵.
그렇게 셀라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는 이야기했다.
“대중들을 설득할 때에는 언제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화형대에서 불타 사라질 희생양이 필요한 법이지.”
“그게 에드 로스테일러가 적임이라고요?”
“말했잖니. 일처리는 뒷말 없고 깔끔할수록 좋다고. 화형대에서 불타는 에드 로스테일러의 모습이야말로, 모든 일이 잘 수습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으로는 확실하지.”
“…”
자애의 황녀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
황권 주자 그 누구와도 대립각을 세운 적 없이, 그저 3황녀의 자리에서 제 역할에만 충실해왔던 그녀다.
그런 그녀가, 눈을 치켜뜨고 셀라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가증스러워요.”
“정치라는 게 그런 법이지. 아직 어른이 덜 됐구나.”
“그를 지지하는 다른 인물들이 가만히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예니카 페일로버나 루시 메이릴도 철저히 그의 편을 들텐데요.”
“일단 황실로 데려가기만 하면 일사천리란다. 이런 타지에서라면 모르지만, 황실 내에서는 나를 지지하는 세력이 훨씬 많거든. 거기서는 황실의 권위도 더 강하게 빌릴 수 있고, 강대한 군세와 황실에 충성을 맹세한 여러 신하들을 동원할 수도 있지.
거기다 페니아 네 입김까지 더해지면, 이보다 깔끔하게 일이 처리될 수는 없을 거야. 둘의 증언을 묻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 그 둘은 그저 속아넘어간 피해자가 되는거야.
”
페니아가 눈가를 떨면서 셀라하를 쳐다보았다.
“잘 생각하렴, 페니아. 페르시카가 작정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황권에 관심이 있든 없든 너도 무사하지는 못 할거야. 드높은 자리에서 살아남으려거든 줄을 잘 타야만 한단다.”
“…”
“지금부터 이어지는 몇 시간은 황금이나 다름 없단다. 의식을 잃은 그를 어떻게든 황실로 데려갈 수만 있다면,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어. 어떻게 대처해볼 틈도 없이 말이야.”
셀라하의 말은 끊임 없이 이어져갔지만, 페니아는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그럴 수 있는 명분도 충분하지. 일의 수습을 책임지고 있잖니. 물론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많은 신뢰를 줬던 네 입장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셀라하는 확실하게 이야기했다.
“버림패로 써야할 패를 계속 손에 들고 있으면, 언젠가는 발목을 잡는 법이란다. 대국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렴.”
페니아는 조용히 테이블에 손을 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턱을 당긴 채 조용히 눈을 올려뜨고 셀라하를 바라보는 모습엔 차가운 감정만이 깃들어있다.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손대지 마세요.”
“그렇게 나올 것 같긴 했다만…. 이렇게까지 얘기해도 그런 태도라니…”
셀라하는 답답하다는 투로 이야기하지만, 페니아에게는 그저 황권에 눈이 멀어버린 괴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가증스럽진 않았다. 페니아가 실베니아에 있는 동안 페르시카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그녀를 견제하려 드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잘 들어. 지금 의식을 잃은 그를 누가 수습하는지는 정말 중요한 문제야. 그는 누가 뭐라해도… 이번 참극의 수습에서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인물이 될 거야. 그가 만약 정치적인 감각이 있다면 아예 더 귀찮은 인물이 될 가능성도 있단다.”
“…”
“영웅이 되든, 역적이 되든, 그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정치적으로 무척이나 큰 의미를 가질거야. 몰락한 로스테일러의 후손이자 모든 일의 마지막을 함께한 인간, 굳이 황권 경쟁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겠지.”
셀라하의 이야기 자체는 맞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페니아는 셀라하를 좋은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군단장 매그너스와 투자가 롤란드도 이 로스테일러 저택으로 오고 있어. 북방 대군단과 엘테 상회가 이런 군침 흐르는 상황을 앞에 두고 팔짱만 끼고 있을 것 같니?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해.”
어떤 방식으로든 황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다. 대륙 최고의 권세가가 무너지면서, 황실 권력 구도는 재편될 것이며, 그 혼란한 때에 어느 위치를 차지하느냐는 정말 중요한 문제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포지션을 잡는데 유의미하게 작용될 수 있는 영향력을 쥐고 있다.
“황실 권력 구도는, 황녀인 우리가 책임져야지. 안 그러니, 페니아? 아니면 북방 대군단 세력이나 엘테 상회 쪽에 그 주도권을 넘겨줄 생각이니?”
“아쉽게도 황실 권력 구도 같은 것엔 관심이 없어서요~.”
그 때, 천막의 입구 쪽을 걷어내고, 내부로 들어온 소녀 하나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페니아와 셀라하의 시선이 쏠렸다. 어느 누가 감히 두 황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말을 얹으며 막사 내부로 들어오는가.
감히 평민된 신분에 그런 짓을 행할 수 있는 자는 이 제국에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들어온 자의 얼굴을 본 두 황녀는 그대로 얼굴이 굳어버렸다.
“어머나, 불청객이라서 죄송하네요. 다만 저는 황실 권력 재편 같은 것보단 금화 몇 푼이라도 더 지갑에 넣을 수 있느냐가 훨씬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엘테 상회의 회주 대리이자, 제국 최대의 자산가 중 하나로 통하는 로르텔 케헬른.
적갈색 머리를 늘어뜨리고, 꽤나 아리따운 드레스를 갖춰 입은 채 여우처럼 웃으며 천막 안으로 걸어들어온 것이다.
“너는…”
로르텔을 알아보는 셀라하에게 고개를 끄덕 숙이며 인사하고는, 협상 테이블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내부에서 오가던 이야기를 어느정도 들었던 것인가, 자리 잡은 로르텔이 처음으로 꺼낸 말은… 페니아 입장에선 꽤나 오한이 올라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화형대에 누구를 매달자는 이야기까지는 들었는데…”
*저택의 중앙 정원 쪽은 현장을 통제하고 있는 병사들 무리로 가득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던 분위기도, 어느 정도 상황 통제가 이루어지자 제법 진정이 되었다.
황실 근위대의 조사관 몇몇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기본적인 증언을 수집하고 있었고, 성당 기사단은 성녀의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성녀 클라리스는 에드 로스테일러가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느티나무 근처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기에, 성당 기사단원들도 대부분 그 근처에 주둔해 있었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클라리스는, 루시와 에드가 기대서 자고 있는 느티나무 쪽을 보고는 생각에 깊게 잠겼다.
“흐음…”
클라리스는 기본적으로 정치 감각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 성황도 꼭대기에서 고고하고 신성한 존재로 받들여지며 살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 법이다. 이런 대형 사고가 일어난 직후에는 온갖 세력들이 준동하며 제 밥 그릇을 찾아 상황을 분석하곤 했다.
그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 바로 지금 의식을 잃은 채 치료 중인 에드 로스테일러일 것이다.
온갖 암투가 오가는 와중에, 누구보다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만 할 그가 정작 의식이 없는 상태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에드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치적 희생양으로 소모되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출세를 위한 체스말이 되어버릴 가능성도 컸다.
차라리 그렇게 될 바에, 성황도에 일단 데려가서 치료를 한 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적 여유를 마련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운 좋게도 지금은 방학 시즌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
다만, 그를 성황도로 데려갈 수 있을지 어떨지는… 현장의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만 한다.
의식을 잃은 그를 어디로 데려갈지… 이 저택에 모여든 온갖 세력들이 눈을 부릅뜬 채, 조심스럽게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