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64)
에드 로스테일러 쟁탈전 (4)
이 모든 일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자.
전쟁터를 노닐다 보면 지휘관들이 늘 하던 말이다.
각자의 이유로 최전선에 와 방아쇠를 당기고 있노라면, 누구나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고향의 풍경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때때로 혹독한 현실을 버티는 힘이 되어준다. 고향이 되었든, 가족의 품이 되었든. 이 지옥 같은 삶을 끝내고 내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드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몽롱한 무의식의 세계를 부유하다 보니 그런 힘든 시기가 기억 한 편에 스며들어왔다.
애석하게도 이 세계에는, 고향이라 부를만한 곳이 없지만 말이다.
*
“에드 선배님이 많이 다치셨어요. 셀라하 황녀님.”
셀라하가 나타나면서 얼어붙은 분위기는 여전히 녹을 생각이 없다.
에드 로스테일러 주변에 모여든 인물들과 셀라하 사이에 도는 묘한 한기. 셀라하를 뒤따라왔던 수많은 귀족들도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숨을 머금고 있었다.
“물론, 저 또한 로스테일러 가문의 이런 학살극에 휘말렸고, 여기저기 다친 데가 상당히 많아요. 성황도에서는 이 일을 가벼이 여기지 않을 거에요.”
성녀 클라리스는 어떻게든 셀라하를 상대로 에드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최대한의 명분을 동원했다.
“에드 선배님은 텔로스 교단의 세례를 받은 신자이지만, 성녀인 저를 해하는 데에 일조했다는 혐의가 있어요. 성황도로 데려가서 성법 재판을 치러야 할 어린양인 셈이죠.”
“…”
“교단의 성법은 성녀인 저일지라도 함부로 어길 수 없는 지엄한 법도에요. 에드 선배님의 신병은 저희 성황도 쪽에서 인도 받아야만 해요.”
“지엄한 교단의 성법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저희 황실의 법도 또한 쉽게 이 일을 넘길 수가 없는 상황이지요.”
셀라하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이야기했다.
교단의 성법과 황실의 법도. 그 둘 사이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가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교권과 황권이 치열하게 대립한 세월은 수백년에 이른다. 때로는 성법이, 때로는 황실의 법도가 우위를 차지했다.
최근에는 클로엘 황제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게 되면서 황실의 법도가 좀 더 무게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둘이 부딪히기 시작한다면, 아무래도 성황도의 사제들이 좀 더 사릴 수밖에 없었다.
“저희 제국의 고위 귀족이 열 이 넘게 죽었습니다. 크게 다친 자들도 많고요. 어찌 저희 클로엘 황실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을까요?”
본디 셀라하 황녀는 성황도 쪽과는 대립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황 자체가 완전히 이레적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물은 향후 대격변이 일어날 황실 권력 구도의 열쇠와도 같은 인물이다.
굳이 셀라하가 아니더라도,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에드와 타냐의 신병을 확보하고자 할 것이다.
셀라하는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두 사람의 신병에 접근할 수 있는 입장을 가진 인물이다.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드 쪽을 막아서고 인물들이 하나 같이 거물이다.
“…”
직접 맞딱트리고나니, 셀라하는 문득 마른 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실베니아 학사에서 같이 부대끼고 지낸 친구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필사의 각오로 에드를 지키고 있는 결사대의 모습이다.
크레핀 토벌전에서 활약한 예니카와 루시 또한 싸늘한 시선으로 셀라하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 둘이 로스테일러 저택의 재앙에 맞선 이유는, 희생자를 줄이려는 영웅심리보다는 에드 로스테일러를 지키기 위한 일념이었던 것이다.
느티나무 앞에서 멍하니 선 채 백발의 머리칼을 흩날리고 있는 루시 메이릴을 올려다 본다.
셀라하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그녀는 영웅이라기보단 제멋대로 날뛰는 재해에 가깝다.
정치논리나 이해 타산에 의해 움직이는 자가 아니다. 돈, 권력, 명예. 일반적인 사람들이 높게 치는 가치들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며, 그 외의 것들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속세 밖의 존재다.
마음만 먹으면 황실조차도 적으로 돌려버릴 생각인가. 그런 느낌마저 밀려올라와, 셀라하는 직감하고 만다.
저 사내에게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큰 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허나, 이대로 놔두면 후일 더 큰 화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쥐뿔도 없어 보이는 상태이건만, 벌써 이만한 거물들이 에드를 따른다.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손에 쥐거나, 세력을 형성 하기 시작한다면 황실 권력을 위협하게 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이 저 사내를 그토록 의식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대체 저 사내의 어느 부분을 본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거물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큰 화근이 될 싹은 아직 미약할 때 짓밟아 버려야 한다. 허나, 셀라하에게는 지금 당장 그 방법론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클라리스 성녀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동원할 생각까지도 하고 있는 듯하고, 절대적인 무력으로는 황실군 핵심 인력들을 동원하지 않는 한 비벼볼 수조차 없다.
여기서 에드 로스테일러를 확보하지 못하면 언제쯤 다시 그를 제압할 명분을 얻어낼 수 있을지 알 수조차 없다.
셀라하의 직감이 외친다. 이건 마지막 기회다.
권위로 찍어누를 수 없다면, 타협을 하든, 속이든 해서 일단 그를 황실로 데려가야만 한다.
다음에 에드 로스테일러를 만났을 때는, 그가 어떤 위치에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노고는 치하 받아 마땅한 일이지.”
셀라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는 이야기 했다.
“일단 황실로 데려가서 그를 치료하고, 아바마마께 그의 노고를 보고해서 마땅한 보상을 받게 만들어 줘야지.”
셀라하가 그리 말하자, 일동 사이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셀라하가 꼬리를 내렸다. 그 사실이 믿기질 않아, 귀족들 사이에서는 웅성거림이 오갔다.
차마 셀라하를 상대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불만의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예상치 못한 반응에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타냐 로스테일러 또한 마찬가지지. 내가 그 둘의 신병을 이렇게까지 확보하려 하는 건, 내가 그 둘의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하고, 황성 내에서 가장 잘 대변해줄 수 있기 때문이고.”
셀라하의 그 반응을 보고 로르텔은 로브 아래에서 지그시 웃었다.
셀라하는 그렇게 말하며, 황실 쪽이 아닌 엘테 상회 쪽으로 에드 로스테일러의 신병을 넘기려 하고 있다.
협상에 성공해봤자 어차피 에드 로스테일러는 로르텔의 관리 하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엘테 상회의 지원을 받으며 몸을 회복하고, 의식을 되찾아 셀라하의 뒤를 칠 새로운 타개책을 고뇌해볼 수 있을 터.
외통수다.
셀라하는 여기까지 말려들어온 이상, 어떤 선택지를 고르든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을 고르든 낭떠러지로 통하는 길밖에 남겨놓질 않는다.
올덱의 상인들이 로르텔을 절대로 적으로 돌리지 않는 이유다.
당연히 일동은 셀라하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신분과 권위에 그토록 얽매이던 셀라하가 저렇게 협조적인 태도로 나오는 것은 수상하다.
하지만, 셀라하의 호언장담은 악마의 유혹과도 같다.
셀라하가 정말로 에드 쪽에 붙어준다면, 이후 황실에서 이뤄질 진상 파악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페니아 황녀 또한 에드의 편을 들어줄 것이니… 그 둘의 지원이라면 형벌이 아니라 복권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단 에드의 신병을 황성에 넘겨줘버리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한 번 에드의 목숨을 인질로 잡히고 나면 일행들은 모두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쉽게 셀라하에게 에드의 신병을 넘겨 주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황성에 쫓겨다니는 몸이 될 수도 없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진상 조사와 사정 청취는 꼭 황실에서 하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요.”
그 때, 먼지투성이 몸을 일으키고 타냐가 이야기 했다.
“저는 이 저택부지에 남을게요.”
그 말에, 셀라하는 물론이고 일동의 시선이 타냐에게 몰려들었다.
“아직 살아있는 사용인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저택 부지의 복구 작업도 들어가야 하잖아요.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을테니까. 아버님의 시체도 수습해야할테고. 황실에 있는 가문 사람들도 모두 복귀 해야할테고요.”
“그럼…”
“제가 잔류한 가문 세력을 책임 질게요.”
어린 타냐의 눈에는 생기가 남아있다.
손에 쥔 것이 이젠 아무것도 없는 데에도, 허망함도 허탈함도 느껴지질 않는다. 오히려 강인한 의지가 남아있었다.
“감옥에 가두든, 상을 주시든, 제가 해야할 일을 마무리 짓고나서 하고 싶어요.”
타냐는 품 속에서 허름한 천 가지를 휙 꺼내들었다. 아르웬이 두르고 있던, 찢어진 망토였다.
이미 먼지가 잔뜩 묻고, 여기저기 헤져서 허름해져버린 망토지만… 로스테일러 가문의 용맹함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이 보란 듯이 그려져 있었다.
타냐는 망토를 휙 둘러쓰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뒤로 올려 묶고서는 이야기 했다.
“좋든 싫든, 로스테일러 가문의 정통한 후계자는 저였어요. 그러니까… 지금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는 저에요.”
부서지고 불타버린 로스테일러 저택 부지 앞에서, 타냐는 그게 뭐 어땠냐는 듯이 당당히 이야기 한다.
“가문에 대한 일의 의사결정은 제가 할게요. 오라버니의 신병에 대한 일도 제가 결정해요. 제가 가주니까.”
그 말에 일동은 모두 얼음처럼 굳고 말았다. 루시 정도만 졸린 듯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미 다 망해가는 가문의 가주를 자처하는 것은, 내가 불타죽겠소 하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로스테일러 가문은 황실에 대한 반역을 꾀했으며, 고위 귀족을 학살했고, 악신을 소환하는 흉계까지도 꾸몄던 가문이다.
허나, 아직 정확한 진상 조사까지 끝난 상황은 아니니…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가문의 법도대로 의사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에드 오라버니가 퓰란을 향하든, 올덱을 향하든, 성황도로 향하든… 그것도 아니면 황실로 향하든… 그건 본인이 결정할 일이에요.”
“하지만 지금 에드 선배님은 의식이 없잖아요.”
“아니. 방금 정신 차렸어. 그래서 나도 깬 거고.”
루시가 클라리스의 말을 부정했다. 그 말과 동시에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 타악.
단검이 느티나무에 꽂히는 소리.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느라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황이지만, 에드는 단검에 무게를 기댄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셀라하와 대치하고 있던 에드의 일행들은 모두 화들짝 놀라서 그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에드!”
재빨리 예니카가 달려나가서 에드의 몸을 부축했다. 어깨를 잡는 것만으로도 그 열이 느껴져서 예니카는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생각 이상으로 에드의 몸상태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에드, 빨리 어디든 가서 치료를 해야…”
“쿨럭, 쿨럭..!”
흐트러져 내려온 앞머리 사이로 에드의 눈동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그의 시선에 일행들의 얼굴이 모두 들어왔다.
“커, 후우, 커, 컥….”
“에드 오라버니. 지금…”
“어렴풋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들었다…”
몽롱해져가는 정신을 부여잡고, 에드는 몸의 무게 중심을 다잡았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에드는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저는… 후욱… 후우…”
일행들 사이로 긴장감이 돌았다.
아직 실베니아의 방학은 많이 남았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예정대로 퓰란으로 귀향해야 하고, 로르텔 케헬른은 사업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올덱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클라리스 또한 성황도로 돌아가야 하는 신분이며, 루시는 아무래도 좋은 듯한 얼굴이다.
셀라하 황녀 또한 이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황성으로 에드를 데리고 가려고 한다.
누구를 따라가느냐를 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미 로르텔이 전부 술수를 써놨기에, 어느 선택지를 고르든 결국 에드에게 유리하도록 상황이 조성될 터다.
그렇기에 오히려 정답이랄 것이 없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저… 생각에 떠오른 대로 말할 뿐이다.
“후욱, 후욱, 후우….”
그래서, 결국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
불타는 저택 부지에서, 로스테일러 가문과 길게 이어져왔던 지긋지긋한 숙명을 어느정도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해야만 할 일이 잔뜩 남았다. 은 아직도 그 여정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도 에드 로스테일러는… 일단 좀 쉬고 싶었다.
*저택부지에 황실 중앙군이 들이닥쳤다.
잘 훈련된 중앙군은 재빠르게 현장을 장악하고, 능숙하게 인력이 나뉘어 현장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셀라하 황녀는 그 광경을 보면서 얼굴을 한 번 쓱 쓸었다. 그리고 다 죽어가는 얼굴로 일동을 내려다보던 사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에드 로스테일러.”
으리으리한 황실 마차 앞에서 데스트의 시중을 받으며, 셀라하 황녀는 무너진 로스테일러 저택을 올려다 보았다.
“대체 그에게 어떤 가치가 있다는거지…?”
셀라하 황녀의 눈에는 그 정도의 역량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에드 로스테일러를 중심으로 모여든 인재는 하나 같이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자들이다.
이제와서 드는 직감은, 차후 황권 경쟁에 있어서 그의 존재가 생각보다도 더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고보면, 페니아가 보이질 않는구나.”
천막에서 차가운 눈을 한 채 밖으로 나간 페니아는 끝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황실군이 보고하기를, 그 직후 곧바로 황성을 향해 말을 타고 달려나가셨다고 전해들었습니다.”
“뭐? 황실로 돌아갔다고?”
“무언가를… 결심하신 듯 합니다만… 셀라하 황녀님보다 먼저 황성에 도착하려고 빠르게 움직이신 듯 합니다.”
셀라하는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앙다물었다. 무기력하던 페니아 마저도 뭔가 의지가 생겨난 듯 하다.
뭘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지만, 어쨌든 발품이 들어가는 일이다.
페르시카만 신경 쓰기도 바쁜데, 페니아마저 황권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면 더 일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하여튼, 에드 로스테일러는 여러모로 지뢰 같은 자다. 함부로 건들이거나 해체하려 들었다가는 후환이 너무 크다.
셀라하는 마른 침을 꾹 삼켰다.
그래도 방치할 수는 없다. 기억 한 켠에 남겨놓을 필요는 있어 보인다.
마차 옆에 앉아 있으니, 수많은 귀족들이 조사를 끝마치고 제 영지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화려한 마차들의 행렬이 각자의 영지를 향해 박차를 가한다. 그 중에서는 예니카 페일로버가 타고 있는 마차나, 로르텔이 타고 있는 상단의 마차도 보인다. 으리으리하게 커다란 성황도의 마차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황실 입장에서는 이 저택 사건에 대해 제대로 증언해줄 사건 당사자가 필요했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가장 적임이었으나, 결국 거센 견제들 때문에 셀라하는 에드를 확보할 수가 없었다.
대신, 다른 사건 당사자가 대타로 증언하기 위해 황성을 향하도록 타협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상대는 인질로 잡을 수도, 셀라하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자였다. 에드의 일행 중에서도 가장 통제할 수 없는 자를 던져준 것이다.
데스트의 안내를 받으며 마차에 오른 셀라하는, 건너편 좌석에 심드렁하게 드러누워서 다리를 휘젓고 있는 소녀를 본다. 예절이라는 것이 아예 보이질 않는다.
흐트러진 백발을 배배 꼬면서 머리에 쓴 마녀모자를 갈무리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 깊다.
소녀는 눈앞의 황녀가 어쨌냐는 듯이, 마차에 드러누워서 쌔근거리는 숨을 내쉬었다.
루시 메이릴.
에드 로스테일러의 대타로 황실의 현황 조사에 참석해줄 그 마법사는… 셀라하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시한 폭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법사가 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것 같지도 않으니, 셀라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사를 마친 후 되돌려 보내는 수 밖에 없다.
완전히 실패한 타협이었던 셈이다.
*완공된 로르텔의 별장은 생각보다 크기가 대단하진 않았다.
그 재력이라면 아켄섬에서 제일 커다란 저택을 지을 수도 있을 것이건만, 의외로 단촐한 규모에 벨 마이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에드의 캠프 전경을 보고 나니 납득이 가긴 했다. 로르텔의 거처만 지나치게 크면 위화감이 생겨버린다.
로르텔은 에드와 궁상맞게 부대끼며 살고 싶었던 것이지, 으리으리한 재력으로 그를 압도하려는 게 아니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생각보다 조그마한 별장 규모도 이해가 갔다.
“방학 끝나고 돌아오신다면, 바로 거주하실 수 있겠군요.”
초승달이 아스라이 빛나는 북쪽 숲.
그 날 일을 마치고 캠프를 점검하러 온 벨 마이아는 새삼 허한 기분이 들었다.
오필리스관의 메이드 장으로 일하며 얻는 가장 큰 보람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돕고, 그들의 생활을 유지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학생들이 아켄섬을 떠나는 이 방학 기간은 허한 기분이 든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텅빈 오필리스관과 학사를 노닐다 보면 묘한 기분에 휩싸이곤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학기 중이 되면 또 너무 바쁘니… 중간이라는 게 없다. 일 중독인 그녀에게는 썩 나쁜 환경은 아니지만.
벨 마이아는 로르텔의 자그마한 별장에서 문단속을 끝마친 뒤,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한 번 했다.
언제나 냉철하고 무뚝뚝한 그녀가 기지개를 하는 모습이, 마치 로봇이 스트레칭을 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보는 이가 없으니 긴장도 좀 풀어진 것일까.
분명 벨 마이아도 이 늦여름의 자유로운 방학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일 테다.
풀벌레 그림자가 초승달을 스윽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서야 여름 밤의 풀벌레 소리를 의식하자 골골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달빛을 받아 스르륵 몸을 흔드는 나뭇잎들. 그들끼리 스치는 소리가 캠프 건물 사이로 아련하게 자리 잡았다.
이다지도 평화로우니,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오필리스관으로 돌아가려 몸을 돌린 순간, 풀숲 사이에서 소년이 나타났다.
“…!”
어지간해선 무뚝뚝한 표정을 견지하는 벨 마이아도 이번엔 좀 놀랐다.
본가에 돌아간 것으로 알고 있는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렇게 풀숲을 헤치고 비틀거리며 캠프로 걸어들어왔다.
척 봐도 얼굴이 붉고 다리를 저는 것이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벨 마이아가 당황한 틈을 타 그대로 모닥불 터 근처의 나무등걸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후두둑 떨구었다.
그의 짐이 바닥을 몇 번 튕기고 굴렀다.
“에, 에드 도련님? 방학 끝날 때 쯤에 귀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다른 일행 분들은… 어떻게…?”
벨 마이아가 당황해서 묻자, 에드 로스테일러는 일단 몽롱한 정신을 잡고 얼굴을 휙 쓸었다.
“캠프에 있었구나, 벨.”
“…예? 아, 예….”
“불 좀 피워주라. 나 지금 마력 쓰기가 좀 힘들다.”
죽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벨은 일단 가볍게 마력을 끌어서 모닥불을 피워올렸다.
오랜만에 돌아온 주인을 환대하듯이, 그렇게 캠프의 불이 은은하게 주변을 밝혔다.
에드는 그 앞에 앉아서 얼굴을 휙 쓸고, 무릎에 팔뚝을 얹은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따스한 열기가 얼굴을 간질였다.
밤의 익숙한 벌레 소리와 함께 풀내음이 코 끝을 자극했다. 에드는 어깨의 힘이 풀어지고, 뻣뻣하던 근육들에도 천천히 편안해지는 듯한 느낌이 감돌았다.
벨 마이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잠시간 말도 붙이지 못한 채 뒤에 서있었다.
달빛에 늘어져가던 캠프의 그늘도, 모닥불이라는 새로운 광원이 생기자 여러 갈래로 갈라져 캠프를 덮었다.
타닥대며 일렁이는 불꽃의 열기가 몸을 주무르는 듯 했다.
“…여정이 힘들었습니까?”
그 뒤에서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잠시 에드를 기다려줬던 벨은, 이윽고 천천히 물었다.
에드는 그 질문을 듣고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쟁터를 노닐던 자는 결국 돌아갈 곳을 찾아 헤매곤 했다. 자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일까.
처음 이 세상에 떨어져서 고생하고, 구르고, 이를 악물며 노력했던 흔적들이 이 캠프에 온전하게 남아있다.
처음으로 만들었던 목제 쉼터, 처음으로 만들었던 낚싯대, 처음으로 만들었던 모닥불 터에 오두막, 창, 사냥 도구, 걸쇠, 야생동물 가죽, 마법 수련용 서적, 목공 작업대, 망치, 어망….
돌고 돌아서 결국 다시 찾아올만한 곳은 이 캠프였을까.
힘들고 고된 시절을 함께 보냈던 이 캠프에는 생각 이상으로 더 정이 들어…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서라도 돌아오고 싶었던 것이다.
에드는 자기와 함께 돌아가자는 일행들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고, 결국 홀로 캠프로 돌아왔다.
귀향 계획도 내팽개치려 하는 예니카와, 사업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따라오려는 로르텔, 성황도의 일정을 통째로 조율해버리려 하는 클라리스의 만류까지도 모두 마다했다. 심지어 타냐는 자기가 저택에 남아 일을 마무리 짓고 있을테니 몸부터 회복하라고 격려마저 해주었다.
중천에 뜬 초승달을 휙 올려다보고는… 벨 마이아의 질문을 곱씹는다.
여정이 힘들었는가?
방학에 치른 이 여정은 당연히 힘들었다.
로스테일러 저택까지 돌아가서, 목숨을 걸고 싸웠고, 로스테일러 가문과의 악연을 어떻게든 마무리 지었으며, 만신창이가 되었다. 짧게 요약된 여정이었지만 어찌나 고되고 힘들었는지, 싫은 소리는 일절 안하는 에드 조차도 곡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처리해야할 일도 아직 잔뜩 남아있었다.
어떻게든 로스테일러와의 악연을 끝마쳤지만, 황실 권력 구도에 괜한 영향력을 행사해버린 것 같고, 로스테일러 가문의 잔류 세력을 어떻게 해야할지도 고민해야 했다. 아직 성창룡 벨브로크를 잡을만한 뚜렷한 방법도 떠오르지 않으며, 당장 다음 학기 학사 일정도 잔뜩 남아있다.
물론 거쳐온 길을 훑어보면 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 숲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부대끼고 살아가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에드는 매 순간 순간을 노력하며 살았다.
그렇기에,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오고 싶었던 장소는… 이 캠프파이어 앞이었다.
“당연히 힘들었지. 몇 번이나 죽을 뻔 했고.”
이윽고 에드는 대답했다.
“그래서.. 빨리 여기로 돌아오고 싶었다.”
“…”
벨은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에드의 뒷모습을 쓱 훑었다. 당장에 병간호가 필요해보이는 모습이지만,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하는 듯했다.
그래도 방치해 두기에는 걱정이 되는 상태인지라 잠시 속으로 고민하고 있던 차에…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드디어 말을 놓으셨군요.”
“그래, 네가 이겼다.”
“이해해주시니 다행입니다. 다만, 무슨 심경에 변화가 있으셨기에..”
“야, 벨.”
에드는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이 벨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 방학의 여정을 통해, 결국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간의 일생을 쭉 맛보고 온 기분이다.
1막 1장. 가장 먼저 퇴장하는 삼류 악역의 삶이다.
모든 여정의 시작이 되었을 순간… 에드 로스테일러가 생을 마무리하려는 현장을 발견하고 그를 막아내었을 선임 메이드의 모습이 아련하게 생각나, 나지막이 읊조리 듯 이야기 했다.
“너, 내 생각보다 더 좋은 녀석이구나.”
“…”
“여러모로 고맙게 됐다.”
느닷없는 그의 말에 벨은 잠시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지그시 고개를 숙이고 이야기했다.
“과찬이십니다.”
벨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를 모닥불 앞에 내버려 둔 채 조용한 걸음으로 캠프를 나왔다.
문득 뒤돌아본 그는, 어둑한 숲 사이에서 은은한 모닥불을 앞에 두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다.
당장 내일부터는 그의 몸상태를 확실히 체크해야겠지만, 오늘 하룻밤만은 홀로 캠프의 향취를 더 느끼게 두어야 할 것 같다.
오필리스관의 메이드 장은 언제나 일처리가 능숙한 법이다. 제 고용주의 속뜻까지도 읽어 원하는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필요한 덕목일 터다.
그렇게 에드 로스테일러는 한 동안 모닥불을 보며 캠프 한 켠에 앉아 있었다.
해결해야할 일이 많이 남았지만, 잠시간 모든 걸 잊고 쉴 시간도 필요했다.
조용한 여름의 밤이 깊어간다. 아스라한 초승달의 달빛이 숲 사이로 스며들었다.
기나긴 여름 방학도 슬슬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