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67)
늑대의 우울 (3)
목축의 땅이라는 이름이 헛지어진 것은 아니다.
사람 수보다 소와 돼지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이 퓰란에서도, 가장 깊숙한 산골에 위치한 토렌 마을에서는 요 몇 년 사이에 경사가 많다.
안 그래도 고령화 되어가는 마을인지라 젊은 층의 유입도 없다.
가득한 일감은 그대로인데 이런 곳까지 일을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지라 언제나 보던 사람만 또 보고 사는 마을 아니던가.
그렇기에 어느 집에서 좋은 일이 있으면 마을 전체가 떠들썩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어느 한 가정의 경사는 마을 전체의 경사다. 한나절만 있으면 마을 전체에 소문이 나서 너도 나도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네오는 일이 딱히 이상하지 않다.
가장 최근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은 예니카 페일로버의 귀가다.
방학 때마다 꼬박꼬박 귀향해서 얼굴 도장을 찍는 예니카지만, 유독 이번 귀가는 더 시끌벅적 했다.
사건은 예니카 페일로버가 귀가하자마자 일어났다.
페일로버 목장에 돌아와 마을 아낙네 같은 복장으로 갈아입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모습부터, 평소처럼 목장 일을 돕고, 부모님과 함께 양젖, 치즈와 호밀빵을 곁들여서 식사를 하는 일련의 흐름까지 모두 자연스러웠다.
다만, 평소와는 다른 기색이 엿보였다.
페일로버 목장의 주인인 오르테 페일로버와 그의 부인인 세일라 페일로버는 금지옥엽 같이 키워낸 외동딸 예니카 페일로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녀가 거짓말을 정말 끔찍할정도로 못한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다. 십 몇 년의 세월동안 예니카의 성장 과정을 모두 지켜본 두 사람은 표정만 봐도 예니카의 심리를 다 꿰뚫어 볼 수 있다.
― ‘근래들어 걱정이 많아 보이는구나, 예니카. 혹시 수석 자리에서 내려와서 그런 거니? 차석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거란다.’
― ‘으, 응?! 아, 아니야! 물론 아쉽게 된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그렇게 우울해하거나 하진 않아! 아빠도 참!’
식사 자리에 앉아 오르테의 말을 한사코 부정하던 예니카는 혹시라도 괜한 걱정을 끼칠까봐 적극 부정하며 손을 흔들어대는 것이다.
이건 진실을 말할 때의 반응이다. 그래도 성적 탓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진 않으니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유독 기운이 없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치 누군가를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거나 한숨을 푹푹 쉬는 모습을 부부는 몇 번이고 확인했다.
― ‘아니면 뭐… 신경 쓰이는 남자애라도 생겼니?’
― ‘응?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빠도 참 대체 왜 그런 이상하고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신경 쓰이는 남자애라니, 그렇게 말하면 꼭 내가 이상한 생각이라도 품은 것 같잖아! 정말, 맨날 아빠는 그렇다니까!
그..그런 이상한 이야기 할 시간 있으면 나 여물 갈아주러 갈 거야! 아니, 어차피 당연히 해야할 일이긴 하지만… 아무튼, 아무 맥락도 없이 그런 말 좀 하지 마! 까, 깜짝 놀라잖아!’
예, 그렇습니다.
라는 말을 굳이 길게 풀어서 설명하는 예니카의 반응을 보면서, 주책맞은 페일로버 부부는 화색을 내비쳤다.
과연, 그런가. 확실히 예니카 페일로버도 그럴 나이가 되었다.
안 그래도 이성적인 부분에 대해선 열려있는 페일로버 부부다.
여기는 젊은이라곤 구석구석까지 뒤져봐야 몇 나올까말까한 시골 촌구석이다. 이런 곳에서 목장 일이나 하며 자라다가, 예니카 역시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촌구석 아낙네로 자라날까봐 항상 신경 쓰였던 것이다.
가뜩이나 목장에 일손도 모자란데, 남자까지 하나 낚아오는 것일까 싶어서 부부는 흥분된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었다.
애초에 페일로버 부부는 남자를 보는 눈이 매우 낮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예니카라고 하지만, 뭐 으리으리한 신분의 귀족가 자제라든가, 준수한 외모의 실력 있는 마법사라든가, 인망 있고 평판 좋은 인맥꾼 같은 사람들을 낚아오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다만, 목장 일에 능숙하고 손재주가 좋았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 정도만 있을 뿐이다. 그냥 이 촌구석에서 십수년을 더 살다 노처녀가 되어, 나이에 쫓겨 이상한 인간이랑 결혼하지만 않으면 감개무량한 것이다.
그런 예니카가 실베니아 소속의 남학생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끼고 있다니!
사윗감! 사윗감이다!
이 다 쓰러져 가는 마을에서 꿈도 꾸지 못했던 그 달콤한 세글자 울림. 사윗감!
마치 금은보화를 발견한 해적처럼, 세일라 페일로버는 눈에 불을 켜고 예니카의 등을 감싸안았다.
제 딸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예니카 페일로버는 뭇 사내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는 여자다. 외모야 앙증맞은 귀염상에 아리따운 수준이고, 능력적으로는 어디가서 꿀릴 일이 없는 데다가,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순박하고 착한 시골처녀는 천연기념물 그 자체다.
상대 남자가 누구인들 절대 마다할 이유가 없으므로, 페일로버 부부의 머리 속에서는 이미 상견례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상대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는 뒷전이었다. 정말 지나치게 막나가는 인간이 아닌 이상에야 다 받아들여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애초에 실베니아 재학생이라고 한다면 최소한의 보장은 되어있는 느낌이기도 하고.
― ‘예니카! 예니카! 네가 드디어 한 건 하는구나!’
― ‘여보, 너무 호들갑 떨지 마요…! 근데 그건 그렇고, 어떤 애니? 혹시 시부모가 너무 호탕하면 좀 싫어하는 스타일일까? 좀 품격 있는 느낌을 더 좋아할 것 같니…?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를 다시 수선해둬야 하나?’
― ‘활은 좀 쏘는 편이냐? 사윗감이랑 반주 한 잔 걸치고 과녁 좀 쏘는 게 내 로망이었는데…. 아니, 술은 아직 이르겠구나. 호리호리한 느낌이 나는 것보단 좀 남자다웠으면 좋겠는데… 어떠냐…?’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켜도 이 정도로 얼큰하지는 않다. 사람이 푼수 같은 것에도 정도가 있다.
그렇게 예니카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 ‘아, 아니라니까!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 ‘예니카!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아도 우린 다 안단다! 그래서, 이름은 어떻게 되니…?’
― ‘안 알려줘! 왜 알려줘야 해 그런 걸!’
‘그런 사람 없다’가 아니라 ‘안 알려 준다’라는 대답이 튀어나온 시점에서, 예니카는 사실을 인정해버린 셈이 되었다. 어찌됐든 거짓말 하나는 정말 끔찍하게 못하는 인간이었다.
― ‘아니 좀 알려줄 수도 있잖니! 예니카! 이 아비가 페일로버 목장을 책임지면서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었는지 알지?! 나도, 인생의 낙이란 게 있었으면 좋겠다!’
― ‘아, 아빠… 왜 그렇게 또… 호들갑을…’
― ‘소 똥 치우고, 젖이나 짜면서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무릇 이 세상에 기개어린 주먹을 쥐고, 튼튼한 두 발을 꼿꼿이 세운 채 서있노라면… 사윗감 하나는 가지고 싶은 것이 남자의 마음, 남자의 일생이다…! 그러니까 그 이름만이라도 들어보자! 원래 남자는 남자가 봐야지 잘 아는 법이야!’
― ‘됐어! 됐다고! 제발! 목소리 좀 줄여! 옆집 사람들 다 듣겠어!’
예니카가 호들갑을 떨며 책상을 탁탁 치자 오르테 페일로버는 근육이 가득한 팔을 축 늘어뜨린 채 한숨을 쉬었다.
― ‘그래… 정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 ‘여보, 우리도 마음 단단히 먹고 있잖아요. 언제까지고 예니카가 착하고 예쁜 심성만 가지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필연적으로 언젠가 사춘기가 찾아올테니, 마음 단단히 먹자고 예니카를 낳은 그 날 결심했잖아요. 너무 상심하지 마요. 이제 약속된 그 때가 온 것일 뿐이에요.’
― ‘그렇구나… 그렇겠지… 다들 겪는 과정이겠지. 이제 예니카도 내 옷이랑 자기 옷을 섞어서 세탁하면 땀 냄새 난다고 화를 내고, 눈 마주치면 눈살을 팍 찌푸리거나,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용돈이나 제깍제깍 내놓으라면서 테이블을 두들겨 대게 되는 걸까…. 마음의 준비는 이미 끝나있었지만… 너무나도, 너무나도 슬픈 일이구나… 나도 이제 방 한켠에 박혀서 쉰내 나는 늙은이가 되어가는 거구나… 그래, 이게 인생의 황혼기라는 것이겠지… 씁쓸하고 고독하구나…’
― ‘왜 이렇게 비약해서 생각하는 거야…! 나 안 그래, 안 그런다고…!’
울상이 된 오르테의 얼굴을 보자, 예니카는 순간적으로 허읍 거리며 머뭇거리게 되었다. 하여튼 이름만큼은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이 좁은 시골 사회에서 그 이름을 입밖에 내놓는 순간, 마을 전체로 그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은 한 순간일 것이다. 누구보다 이 토렌 마을에서 오래 살아왔던 예니카이기에 잘 안다.
그러나, 주눅이 든 부부의 표정이 계속해서 압박으로 다가오자… 이내 조금씩 식은땀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으으..그…”
결국 심성이 착한 예니카는 머뭇거리면서 말을 내뱉었다.
“화, 활은…. 잘 쏴…”
화색이 되는 오르테의 표정을 보자 예니카는 머리에 피가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 ‘오, 예니카! 소식 들었다! 학창 생활을 잔뜩 구가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다 기쁘더구나!’
― ‘언제 한 번 마을에 데리고 와! 20년 넘게 담근 라즈베리 주를 딸테니까!’
― ‘그럼 나는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야지!’
― ‘돼지 한 마리 가지고 되겠어?! 소를 잡아야지! 목초지 전체를 다 뒤져서 가장 질 좋은 놈으로다가 잡을테니까, 오게 될 일 있으면 꼭 말해라!’
이름은 말하진 않았지만, 어찌됐든 실언한 것은 맞았다.
주책 맞은 페일로버 부부가 이런 중대사항을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마을 회관에서 반주 한 잔 걸치고 세상 기분 좋아진 오르테가 예니카와의 담화를 이야기하자, 삽시간에 소문은 퍼져나간 상태였다.
이튿날 저녁쯤 되니 이미 마을은 경사가 난 상태라서, 과일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마을 광장을 돌아다니던 예니카는 얼굴에 열이 후끈후끈 올라오고 있었다.
― ‘오오, 그 애 오면 우리 헬켄 잡화점에도 꼭 들러라! 챙겨 줄 건 별로 없지만… 뭐, 수선이라도 맡길 거 있으면 공짜로 해줄테니까!’
― ‘실베니아 출신이면 꽤 부잣집이거나, 귀족 아니냐? 다 그런 건 아닐테지만, 그런 애들 많잖아! 예니카, 네가 정말 출세했구나! 우리 마을의 자랑이야!’
― ‘예니카! 예니카! 예니카! 예니카! 예니카!’
― ‘이야, 좋을 때다! 나도 딱 25년 쯤 전에는 도시 사내들 좀 후려치고 다녔는데… 그립다 그리워~’
하루 종일 축하 받으며 돌아다닌 예니카는, 그 다음 날 아침 식사 자리에서 페일로버 부부에게 선언했다.
― ‘나, 내일 실베니아로 돌아갈래.’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한 번 귀향하면 최소 보름은 머물다 가던 예니카였으나, 단 3일 만에 귀교를 선언한 것이다.
― ‘무, 무슨 일이야 예니카. 좀 더 있다 가야지.’
― ‘나…’
얼굴이 홍당무가 된 예니카는 눈물을 머금고 이야기 했다.
― ‘나 여기 더 이상 못 살겠어….’
시골 마을의 푼수 같은 목장 부부에게, 섬세한 소녀의 마음이란 너무나도 다루기 어려운 것이었다.
…눈물 나는 일이었다.
*[ 옛날 생각이 좀 났거든 ]
북쪽 숲의 중앙에는 꽤나 큼지막한 호수가 하나 있다.
참으로 신기한 호수다. 고여 있는 물의 규모는 호수 치고는 대단치 않은 수준이지만, 그 물이 탁해지거나 썩질 않았다.
고인물은 필시 조금씩 탁해지기 마련인데, 마치 누군가가 계속해서 정화하는 것처럼… 중앙 호수의 물은 언제나 깨끗하고 신비로워 보였다.
특히 아침 무렵에 오면 습기 때문에 아스라한 안개가 서려있는데, 아침 햇살 사이로 은근하게 드러나는 호수의 모습이 마치 동화 속 풍경 같아서 꽤나 절경이다.
학생들 중에는 아침 운동 코스로 쓰는 사람도 조금 있는 모양이다. 특히 직스 같은 녀석들이 단골 손님이다.
뭐, 그 때야 아침이고… 지금은 밤이 되어서 밤하늘의 별빛이 수면에 반사되어 아련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중앙의 자그마한 잔디섬에 솟아있는 ‘메릴다의 수호목’.
거기에 기대어 앉아서 숲의 전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밤하늘이 땅에도 있는 것만 같다. 명경지수 위에 비친 밤하늘이 마치 자기가 하늘인양 깔끔하게 별빛을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두 하늘 사이에 펼쳐진 침엽수림 어딘가에서부터는 여름 밤 특유의 풀벌레 소리나, 설치류 동물들이 풀숲을 오가는 소리 따위만 들려온다.
여름의 밤은 고요한 법이 없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겨울의 밤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나무만 가득해보이는 이 숲속에도 확실히 생명이라는 것들이 잔뜩 도사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옛날 생각?”
[ 그냥 한 번씩 그럴 때가 있어. ]메릴다는 수면을 툭툭 걸어다니고 있었다. 현현이 풀려 있었으므로 가능한 일이다. 마력이 바닥난 상태이므로, 지팡이의 힘이 아니었으면 내 눈에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밤 하늘의 별빛을 반사하고 있는 수면을 맨 발로 휙휙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물 위가 아니라 하늘을 밟고 있는 것만 같다.
[ 얼마 전에 로스테일러 가문을 박살내고 왔잖아. ]“박살 냈다는 표현은 좀 그러네.”
[ 뭐, 어때. 사실인데. ]스커트 자락을 양쪽을 가볍게 들어올린 메릴다가 휙 하고 몸을 한 바퀴 돌리자, 얕게 바람이 일다가 말았다.
[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있어서 로스테일러 가문은 정말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들려왔던 역사 깊은 가문이거든. ]“나라고 다르게 생각하진 않는데.”
[ 글쎄. 그 역사를 아는 것과, 그걸 실제로 지켜본 건 또 다른 이야기잖아 ]“그것도 맞는 이야기긴 하지.”
시원스럽게 인정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메릴다는 그럴 줄 알았다며 빙그레 웃었다.
[ 그런 큼직큼직한 집단이나 무리가 사라져가는 걸 볼 때마다, 또 시대가 바뀌었구나 하는 실감이 나버리거든. 이게 또 뭐라고 해야할까, 굉장히 기운 빠지는 느낌이라서. ]“흠…”
[ 잘 이해가 안 돼? ]“솔직히 말하면 그래. 잘 이해가 안된다.”
메릴다는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가끔 시대가 나를 두고 먼저 가버릴 때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 정령으로서의 내 삶도 황혼기에 접어들어서 그런 걸까. 괜한 생각이 자주 들거든.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그 표현에, 나는 잠시 대꾸하지 못하고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메릴다는 긴 세월을 살아온 고위 정령이다.
모든 정령에게 수명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알려져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사실이다.
물리적인 충격이나 마법적 힘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없을 뿐, 그 어떤 정령이라도 자기 마력 감응이 허락된 이상의 시간을 현세에서 보낼 순 없다.
그 허락된 시간을 늘리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위상을 높이는 것 뿐이다.
일주일 정도 마력을 발하다 사라지는 유체정령에서, 몇 년 정도는 제 마력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하위 정령으로.
그리고 수십년 정도는 거뜬히 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중위 정령으로, 나아가서 수백년의 세월을 살고도 소멸되지 않는 고위 정령으로.
그러나, 제 아무리 강대한 정령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현세의 순환에 동참해야만 한다.
죽음이라는 개념은 없지만, 자연으로의 환원이라는 개념은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이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 다시 유체정령으로 화해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 정도는 품어볼 수 있다.
정령의 생애란 그토록 길고도 단조롭다.
“메릴다, 너는…”
[ 오해 하지 마, 난 아직 한참 남았어. 최소 백년은 넘어. ]그렇게 말하더니, 메릴다는 늑대다운 미소를 흘렸다.
[ 왜애? 금방 가버릴 거 같아서 걱정 됐어? 쿠훗. ]“…안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 우와아, 이런 묘한 부분에선 또 솔직하네. 너, 은근히 정이 많은 타입이구나. ]“뭐가 어찌됐든 간에 너 덕을 좀 많이 봤잖아. 나도 그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다.”
메릴다의 수호목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만, 무슨 심경에 변화가 있었길래 그렇게 우울해하는 건지 궁금했을 뿐이다. 이젠 알겠지만.”
[ 우울? 내가? ]“척하면 척이지. 너는 지금 우울한 거야. 그걸 굳이 내가 말해줘야 아냐?”
마음이 있다는 것은 정령이나 인간이나 똑같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마음이란 놈이 작용하는 방식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아니면 정령이든 다 엇비슷하다고 본다.
메릴다가 유독 기운이 없어 보이거나, 고민이 많아 보이는 이유도 비슷하다.
“인간도 똑같아.”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이야기했다.
그것은 전장에서도, 평화로운 사회에서도 모두 똑같이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어리고, 젊고, 패기넘치는… 머그 같은 정령들은 모두 ‘미래’를 본다.
중위 정령이 되었고, 더 마력 감응을 키우고, 마력량을 늘려서, 언젠가 고위 정령이 되고… 정령들을 호령하면서 능력있는 정령사와 세상을 노니는 꿈을 꾼다.
그러나, 살만큼 살아… 슬슬 황혼기를 앞둔 정령들은 ‘과거’를 본다.
어떤 정령사들을 만났고, 어떤 인간들을 보았으며, 어떤 시대를 겪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과, 앞으로 살아갈 날. 둘 중 어느 게 더 많은지를 저울질 해보면, 자신 또한 어떤 인간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자들은 미래를 보고, 살아온 날이 더 많은 자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법이니까.
이제 막 대학을 나온 청년과, 은퇴를 앞둔 초로의 신사가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도 그와 같다.
청년은 미래를 이야기 하지만, 신사는 겪어온 과거만을 이야기 한다. 그 엇갈림을 자각하고 나면 신사는 조금씩 우울에 빠진다.
내 이야기가 끝나가는구나. 결국 시대는 날 두고 나아갔구나.
그 사실을 새삼 실감하고 나면, 저무는 노을만 바라보고 있어도 눈물이 도는 때가 분명 있다.
[ 실베니아랑 닮았더라고, 그 애는. ]갑자기 대현자 실베니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누구보다도 실베니아의 외관을 쏙 빼다 닮은 메릴다가 할 이야기인가 싶다가도…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선 입을 다물었다.
페트리시아나는 학사 소식도 모를 정도로 자기 연구에만 몰두하고 사는 아이였다.
[ 그 대현자도 아무리 열악하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든 제 마법 연구에만 몰두하던 괴짜였거든. ]“그래서 걔랑 좀 어울려 준 거야?”
[ 그냥 좀 지켜보고 싶었어. 옛날 생각이 좀 나서 말야. 그 과정에서 너한테 폐를 좀 끼친 것 같긴 하지만. ]“이 정도는 폐도 아니니까 별로 신경 쓰지 마라. 트레이시아나가 와서 다 수습하기도 했고.”
메릴다는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 옛날에 보았던 실베니아랑은 다른 부분이 더 많은 애긴 했지. 뭐, 당연하지. 그런 괴짜가 또 쉽게 나타나겠어. ]“그러냐.”
[ 응, 그래. 네 말마따나 나는 좀 우울했던 걸지도 모르겠네. ]메릴다는 스커트 자락을 휙 펼친 채로, 수면 위에 서서 드넓은 실베니아의 첨탑들을 올려다 보았다. 밤하늘의 별 사이로 쑥쑥 솟아오른 첨탑은 한 두 개가 아니다.
북쪽 숲의 호수에서도 잘 올려다 보이는 실베니아의 첨탑들은, 그 먼 옛날 이 아켄섬에 유배되었던 한 괴짜 마법사의 유지를 이어받은 건물이었다.
시작은 미약했을지언정, 지금에서야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그 무상한 세월은 굉장히 길었으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서 되짚어보면 바로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메릴다가 축적해온 그 과거의 기억들은,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까지 기억 속에 남아있을 터다.
말했듯,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은 미래보다는 과거를 보며 살아가는 법이다.
지그시 눈을 감은 메릴다가 떠올리는 기억들 또한 마찬가지다. 긴 생애 속에서도 끝까지 잊지않고 간직하고 있었을 기억들. 그것들이 각별하지 않을 리가 없다.
오른산 꼭대기에서 무심하게 아켄섬 전경을 내려다 보던 시절.
틈만 나면 사고를 쳐대는 실베니아 때문에 골머리를 썩던 시절일까.
양 손을 허리에 끼고 호탕하게 웃던 실베니아의 모습은 확실히… 잊기 쉬운 광경은 아니긴 하겠지.
[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래… 그 애만한 친구가 또 없었어. ]나지막이 속삭이듯 이야기하는 메릴다는, 우울과는 거리가 먼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응, 그 땐 참 좋았지. ]표정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말이다.
*[ 최고위 바람 정령의 사체가 있어. ]
메릴다와의 친화도가 올라간 것은 굳이 스탯창을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스탯으로서의 친화도가 아닌, 그냥 정령 대 정령사로서의 교감을 나눈 느낌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여정도 함께 했고, 이야기도 자주 나누었으니 그럴만 하다.
뭐 실제로 좀 더 친화된 기분이 드니, 스탯으로서의 친화도도 분명 오를 것이다. 그에 따라 정령식이나, 스킬의 위력에도 영향이 더 미칠 것이고.
허나, 메릴다와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난 뒤 내 손에 떨어진 것은… 그보다는 한 차원 높은 정보였다.
[ 지금 최고위 바람 정령 자리는 공석이거든. 수십년이 흘렀지만, 아무도 그 경지에는 접근하지 못했어. 단지, 수명이 다해 자연으로 화한 옛 최고위 정령의 사체만 남아있을 뿐이지. ]메릴다의 수호목 쪽으로 와서, 내 옆에 무릎을 안고 앉은 메릴다가 이야기했다.
[ 사실 사체라고 하기에도 그렇지. 자그마한 비단결 같은 모양의 마력 덩어리거든. 정령한테 사체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만, 사라지면서 남긴 흔적이니까 얼추 비슷한 거지. ]메릴다는 밤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놓고선 이야기를 이어갔다.
[ 손에 넣으면 정령술 수련에 엄청나게 큰 진전이 있을걸. 실베니아가 연구를 끝마치고 땅에 묻어둔 건데, 원한다면 네게 넘겨줄게.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거야?”
[ 그냥. 너만한 친구도 찾아내기 힘들거든. 예니카도 참 좋은 친구지만, 속내를 털어놓을 만큼 그 애 속이 깊냐고 하면 또 그렇진 않으니까. ]최고위 바람 정령 ‘티르칼락스’.
산등성이만한 몸집을 자랑하는 거대한 곰 형상의 정령은… 이젠 역사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과거의 존재였다.
[ 단, 공짜는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메릴다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 전혀~. 말했듯이, 나는 좀 우울하니까. 이런 내 우울감을 좀 풀어줬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대체 뭘 더 원하는 거냐.”
메릴다는 갑자기 상반신을 휙 일으키더니, 내 넥타이를 당기고서는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 예니카가 널 좋아하는 거 알지? 이성적으로. ]확 치고 들어오는 말에, 나는 일단 헛숨을 삼켰다.
[ 뭐어, 워낙 바쁜 네 사정도 이해 못할 건 아니었지만… 이제 좀 살만해졌고, 나름 휴식기니까 여유 시간도 좀 생겼잖아?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데?”
[ 진도 좀 빼줘야지, 이제. ]그리 말하며, 메릴다는 넥타이를 당긴 손을 휙휙 돌려서 휘감으며 요염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 방학 끝나기 전까지 예니카한테 키스 정도는 갈겨 줘야겠어. ]“…”
어이가 승천하는 듯한 얼굴로 메릴다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자, 메릴다는 새하얀 머리칼을 훌훌 털면서 능청스러운 얼굴을 했다.
[ 그 상단의 불여우 기집애가 캠프에 자리 트고 앉으면 예니카가 기싸움에서 밀릴 게 뻔하단 말이지. 그 전에 속전속결로 기정 사실을 만들어 놔야 내 마음이 좀 편하겠어. ]“…”
[ 콜? ]여름 방학은 이미 막바지였다.
얼마 안 있으면 학생들도 슬슬 학사로 돌아올 터였다.
왜 인지 모르게 밀려오는 불길한 감각에, 나는 한동안 능청스러운 메릴다의 얼굴을 쳐다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