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69)
아니 이보세요, 예니카 씨 (2)
안으로 들어오고 난 지도 꽤 긴 시간이 지났고, 이 세계에서도 수많은 사람들과 교감하거나 관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술술 잘 풀려서 각별한 사이가 된 사람도 있고, 꼬이고 꼬여서 미묘해진 관계가 된 사람도 많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원래 다 그렇다. 모든 사람들 하고 잘 지낼 수는 없는 법이다.
바쁘게 살았다.
지금이야 좀 휴식을 취하고 있다곤 하지만, 처음 아켄섬에 와서 구르고 구르면서 제대로 숙면을 취해 본 날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렇게 살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목숨의 위협이 학기마다 몇 번씩이고 찾아왔다.
식량이 떨어지거나, 추위 혹은 더위에 시달리고, 병에 걸리기도 하는 둥…. 생존에 대한 위협은 물론이고 시나리오상 적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까지 동반되니… 정말 매 순간순간이 위협의 연속이었다.
현실은 영화와는 다르다.
수학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이성과 투닥거리고, 관계의 줄타기를 즐기면서 콩닥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가고 계절은 바뀐다.
푼수 같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럴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동안, 오두막의 유지 보수가 저절로 된다거나, 뿌려 놓은 사냥 덫이 알아서 회수된다거나, 잡아 놓은 사냥감들이 부식되지 않고 기다려 주거나 하는 일은 없다.
총알이 튀는 전쟁터에서조차 사랑의 말을 주고받는 연인들을 보았다.
영화 속에서야 가혹한 운명에 저항하는 두 연인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의 전장에서 사랑이 가지는 의미는 약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현실의 비극은 언제나 복선 없이 갑자기 일어나는 법이다.
어느 날 갑자기 들것에 실려 온 연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총알에 관통당한 미관과, 추하게 부릅뜨고 있는 동공의 형상을 보게 되면… 그토록 애틋하던 사랑의 감정은 저주로 돌변하여 몸과 마음을 좀먹어 들어간다.
온 세상의 주인공이 자기인 것 같이 굴었지만, 스포트라이트가 자기 자신에게 비춰지는 일은 없다.
연인의 죽음조차도 여타 다른 병사들의 죽음과 똑같이, 스쳐 지나가는 배경의 한 장면으로 활용될 뿐이다.
수도 없이 그런 광경을 보다 보면, 누가 되었든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목 바로 밑에 칼날이 들어와 있는 상황. 죽음을 앞두고서 발버둥 쳐야만 하는 때가 된다면, 오롯이 생존에만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번 로스테일러 저택으로의 여정만 하더라도 몇 번이나 죽을 뻔했던가.
숱한 죽음의 위협 속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롯이 살아남는 것 자체에만 집중을 했기 때문이다.
그 생존에의 열망 때문에, 전우들은 언제나 나를 ‘바퀴벌레’라고 불렀다.
사막 한복판에 알몸으로 던져 놓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제명을 다 하고 죽을 인간이라고.
나는 언제나 자기 암시를 건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필요한 일을 먼저 처리하자. 나는 언제 어디서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어야만 하는 기계 장치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전쟁터든, 사랑과 낭만이 가득한 아카데미든.
당장 내 목 밑에 칼이 들어와 있는 상황이라면,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것은 바로 살아남는 것 그 자체다.
전장에서 빠져나와 조금 독기가 풀어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고, 흔들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차가운 이성은 언제나 일의 경중과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판단해 냈다.
― ‘심장이 얼어 있는 사람.’
그때가 되어서야, 기억 속 저편에 묻힌 옛이야기가 떠올랐다.
― ‘가혹한 현실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지만, 세상엔 차가운 눈비만 내리는 건 아니야. 의외로 맑고 화창한 날도, 따뜻하고 푸근한 날도 많은 법이란다.’
― ‘다만, 눈비에 젖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데 익숙해져 버리면, 내일도 비가 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심리지.’
― ‘언젠가 네 심장에 낀 그 살얼음을, 눈 녹듯이 녹여내 줄 수 있는 사람을 꼭 만났으면 좋겠다.’
전장에서의 기억인가, 은퇴 후의 기억인가.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묘하게 아련한 목소리였다.
― ‘그때까지는 추워도 옷깃 여미고 잘 버티는 거야. 너는 강하니까 충분히 할 수 있어.’
* * *
“에드는 언제나 이런저런 고민이 잔뜩 쌓여 있지만, 이번에는 뭔가 결이 다른 느낌이 들어.”
모닥불 너머의 예니카 페일로버는 무겁고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애석하게도 내가 이렇게 난처해하는 이유는 그렇게 무겁고 진지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메릴다의 변덕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짜고짜 예니카와 입을 맞추라고 등을 떠미는 메릴다의 변덕에 어울려 주자면 충분히 어울려 줄 수도 있다.
입 맞추는 것 가지고 부끄러워하고, 몸을 배배 꼴 시기는 진즉에 지났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예니카의 아래턱을 잡고 휙 입술을 들이밀어 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허나, 당하는 예니카의 입장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장에 입을 맞추고 나면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 할 테지만.
메릴다의 얕은 변덕 때문에 등을 떠밀려 제 입술을 가져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일단 나라면 절대로 유쾌한 기분이 들 것 같지는 않다.
메릴다가 알고 있는 최고위 정령의 유해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과 입을 맞추는 행동은… 어떻게 보자면 무책임한 행동이다.
아예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예니카 페일로버는 내가 이 세계에 넘어와서 가장 긴 시간 동안 부대끼며 살았던 동료다. 함부로 대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사람 대 사람으로서 입을 맞추면 될 뿐이지 않은가. 메릴다의 변덕이 어쨌건 간에 그건 별개로 쳐 두고.
글쎄다. 다시 생각해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간에, 진실을 알게 된 예니카는 어찌 됐든 내가 메릴다의 변덕에 의해 입을 맞췄다고 여길 것은 뻔했다.
그럼 마지막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이 모든 사실을 예니카에게 전부 다 털어놓고, 부탁이니 나랑 입을 맞춰 줄 수 있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연애에 대해서 전문가는 아니지만, 마지막 수는 최악의 수라는 것만큼은 잘 알겠다.
“미안하지만 말 못 하겠다, 예니카. 이건 일단 나 혼자서 천천히 고민해 볼 문제인 것 같다.”
일단 그렇게 이야기한 뒤, 예니카와의 대화를 얼버무리고자 했다.
그러나, 예니카에게는 그것이 다른 의미로 전달된 것인지, 갑자기 볼을 부풀리면서 눈을 뚱하게 뜨는 것이다.
“…진짜로?”
심술이 난 것일까.
내면의 깊숙한 부분까지 전부 공유할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결정적인 부분에서 숨기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썩 즐겁게 받아들여지진 않는 것인지… 예니카는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으으윽!”
한동안 예니카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묘한 소리를 냈다.
내 입장에서는 딱히 뭐라 할 말이 없다. 난처한 듯이 예니카를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에드, 이번엔 내가 이상한 질문 좀 해도 돼?”
“…얼마든지 해라.”
“난 지금 에드를 더 추궁해서 어떻게든 고민을 털어놓게 만드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렇구나 하고 못 본 체해 주는 게 더 좋을까 고민 중이야.”
“…그걸 나한테 상담한다고?”
예니카는 툴툴거리면서도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뭔가 말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하늘을 쳐다보면서 신중히 생각에 빠졌다.
태양이 어느샌가 저물어 가고 있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드디어 저녁이 왔구나, 하는 느낌이다.
휴식기에 접어든 뒤로는 하루가 눈에 띄게 길어졌다. 몇 등분으로 쪼개서 어떻게든 아껴가며 썼던 하루하루를 이렇게 낭비하고 있으니 사치스러운 기분이다.
“에드가 귀찮아할까 봐.”
문득, 고르고 고른 말을 한 문장으로 압축해 내는 데에 성공한 것인지… 예니카가 다시 말을 텄다.
“뭐?”
“내가 에드한테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뭐 대체 어떤 사고방식을 통해서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인지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사실 예니카 페일로버라는 인간은 내게 있어선 언제나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된 적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귀찮거나 부담이 된다거나, 그럴 걱정은 예니카가 할 것이 아니라… 예니카를 대하는 주변 인물들이 해야 할 고민 아니던가.
의외의 인물에게서 그런 고민이 튀어나오자,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예니카를 쳐다봤다.
“시, 심경이 복잡해 보이네… 에드.”
“내가 뭐라 말하든 너는 예의상 해주는 위로라고 받아들이겠지. 그렇게 여겨지지 않으려면 어떤 식으로 말해야 될까 고민 중이었어.”
“그, 그런가…?”
“뭐, 그래 봐야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너한테 달려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 역시 해가 저물어 가는 하늘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해 주었다.
“너는 내게 부담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예니카.”
딱히 부풀리지도, 그렇다고 너무 덤덤하지도 않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 세상사 대부분의 문제에 대한 정답인 법이다.
“그냥 그렇다는 거야.”
예니카는 그 말을 듣고 잠시간 멍하니 불을 쳐다보더니, 이내 지그시 웃었다.
피어오른 것은 충족감일까. 혹은 안도의 감정일까.
사실 어느 것 하나라고 딱 집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 사람의 마음이란 일렁이는 저 모닥불처럼 이리 흔들렸다, 저리 흔들렸다 하는 것이다.
감정이란 것도 워낙에 복합적인 것인지라, 예니카의 푸근해 보이는 미소에 담긴 심리도 무엇 하나라고 확정해서 말할 수는 없을 터다.
다만 다행인 점은, 걱정스러워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구나….”
이어지는 말에, 나는 내가 내 무덤을 팠음을 자각했다.
“그럼 에드를 추궁할래!”
“…뭐?”
“고민이 뭐야! 뭔데! 빨리 말해!”
잘못된 선택지를 택한 것인가.
예니카는 화색이 된 얼굴로 팔을 붕붕 저으며 이야기하는 것이다.
“에드의 고민은 내 고민이기도 하니까, 빨리 말해!”
그리고 예니카는 지팡이와 짐을 내려놓더니, 캠프 구석에 있던 간이 목재 의자 하나를 낑낑거리며 가져와서는 내 앞에 마주 보고 앉은 것이다.
불을 가까이서 등지고 있어서 뒤가 꽤나 후끈할 텐데, 아랑곳하지 않고 예니카는 나와 눈을 맞춘 채 앉아 있었다.
“…….”
“말해 줄 때까지 안 움직일 거야.”
“그러다 등에 땀띠 난다. 안 답답하냐….”
“에드 혼자 골머리 싸매며 고민하고 있는 거 보고 있는 게 더 답답해!”
여기까지 오자, 예니카도 이를 악물었는지 바닥을 꾹꾹 밟으면서 더 고집을 부렸다.
이 지경까지 오면 아무 얘기도 안 해 줄 수도, 그냥 얼버무릴 수도 없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야기를 꺼내질 말았어야 했다.
나는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내 입을 열기로 했다.
“뭐, 어떤 고민이든지 같이 고민하면 금방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에드, 너무 속으로만 끙끙 앓지 말고 털어놓….”
“너 나랑 입 한번 맞출 수 있냐.”
예니카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 * *
“메, 메릴다도 참… 왜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사람의 피부색은 살색이 아니라 붉은색이었나.
방금 전까지 모닥불을 등지고 내 바로 앞에 딱 붙어서 고집을 부리던 예니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리를 벌리더니 저 멀리 평평한 바위에 가서 몸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얼굴은 홍당무가 되다 못해 아예 피부 톤 자체가 바뀌어서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만 있는 것이다.
“화, 확실히 에드가 고민할 만도 하네…. 다, 당사자가 앞에 있으니까…. 아니, 근데 그러면 잠깐 메릴다가 어디까지 이야기한 거야…? 어…?”
나한테 말을 건네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횡설수설하고 있는 모습에, 나 역시 함부로 끼어들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고민하고 있었던 점들은 가감 없이 전달했다.
이대로 메릴다한테 등을 떠밀려서 예니카와 입을 맞춘다고 한들, 그것은 예니카에 대한 기만밖에 되질 않는다.
대가를 원해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 정도로 못돼 먹은 인간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확실히 해 둬야 할 것은 있다.
“자의식과잉 같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꾹 참고 이야기해 보자면….”
내가 천천히 입을 트자, 예니카가 내 쪽을 슬쩍 돌아다 봤다. 다소곳이 점잖게 앉은 자세가 마치 중요한 자리에라도 나와 있는 것 같은 몸가짐이다.
“그… 네가 나한테… 무슨… 심정을 품고 있는지도… 대충은 안다…. 사실 모르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지.”
“스, 스톱! 머, 멈춰 봐 일단!”
예니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시선을 휙휙 피했다.
마치 포식자 앞에 놓인 초식 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애꿎은 흙바닥을 꾹꾹 밟아대는 모습이 불쌍할 지경이다.
“에드, 나 숨이 안 쉬어지는데….”
“…….”
“그, 그래… 뭐…! 그렇게 됐어! 응! 내가 그렇지… 음… 설마 에드한테 아무런 마음도 없이 이렇게 잘해 주겠어?! 사실 당연한 이야기지! 이렇게 분위기 잡고 난처한 듯 나눌 이야기는 아니잖아? 우, 우리도 다 컸는걸! 왜 이렇게 어색하게 구는 걸까! 악! 아악!”
말은 그렇게 하면서 세상 누구보다도 긴장되어 보이는 예니카의 모습이 눈에 가득하다.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소녀라는 평가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예니카의 저런 면모 때문이겠지.
그러나, 예니카 페일로버가 동화 속 주인공과도 같은 소녀라면, 나는 현실의 시궁창에서 발버둥 치던 바퀴벌레다.
그 간극을 되새김질하고 나면 보이는 부분이 있다.
“미안하게 됐다. 내가 이런 놈이라서.”
“으, 응…?”
“살아남는 데에 급급해서, 그 외의 것들은 미뤄 둘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오래 살았거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봐 왔던 비극들에 대한 무게다.
사랑하던 사람이 총알에 맞은 채 들것에 실려 오는 광경을 본 자들은 하나 같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 모습에 반감을 가졌던 이유는, 당장 목숨의 위기가 목전에까지 왔는데 연애질이나 하는 모습이 한심해서가 아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자가 함부로 남과 정을 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짐을 지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목숨조차도 내가 책임질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내 죽음을 맞이하게 될 상대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실연의 아픔은 일시적이지만 언젠가 치유가 된다, 그러나 상실의 아픔은 평생을 가는 일이 훨씬 더 많다.
딛고 일어서기도 더 힘들고, 보통은 극복해 내지 못한 채 주저앉기 마련이다.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좀 더 신중히 행동했어야지.
어쭙잖게 함부로 남과 교감하지 말았어야지.
많은 시련을 헤쳐 왔다.
시나리오도 많이 꼬이고, 전개도 많이 뒤틀렸지만… 어쨌든 내 목숨을 잘 유지해서 여기까지 왔다.
황권 쟁탈전, 가문 내전, 그리고 벨브로크 토벌전까지. 남아 있는 시련이라 할 것도 슬슬 한 손으로 헬 수 있을 정도로 오래 달려왔지만, 시련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헤쳐 왔던 것보다는 남아 있는 것이 더 가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법이다.
만약 모든 시련을 다 마무리 짓고, 정말로 이 실베니아의 졸업장을 내 손에 쥘 수 있게 된다면.
쌓아 올린 갖가지 능력들과, 많은 이력들, 인맥들을 가지고 아켄섬을 나가 온전히 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의 시나리오에서 정해진 모든 재앙들을 전부 수습하고, 오롯이 나 자신으로서 이 세상에 두 발 붙이고 있을 수 있게 된다면….
그때가 된다면 나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탈피해서… 좀 더 큰 미래를 그려 볼 수 있게 될 것일까.
‘어떻게 살아남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탈피해,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고민으로 건너갈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렇게 살다 보니까 이런 인간이 됐다. 딱히 호감 가질 만한 인간상은 아니야.”
투둑, 투둑, 하고 모닥불에서 잔가지가 불타는 소리가 났다.
어느샌가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밤의 기운이 조금씩 밀려오고 있었다.
북쪽 숲의 밤이야 늘 그렇듯, 멀리서 보면 참으로 평화롭다.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이 캠프 또한, 어느샌가 숲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말 하지 마, 에드.”
문득 쳐다본 예니카의 표정은 많이 평온해져 있었다. 한편으로는 슬퍼 보이기도 했다.
붉은 기운도 많이 내려가서, 꽤나 평정을 되찾은 느낌이다.
“에드는 생각보다 그렇게 냉혈한 사람 아니야.”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니 고맙다.”
“말뿐인 말이 아니야. 아까는 에드가 그랬잖아. 뭐라 말하든 예의상 해 주는 위로라고 받아들일까 봐 걱정된다고. 지금 내가 딱 그런 기분이야.”
예니카는 다시 몸을 휙 돌아앉아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에드가 그토록 고민하고 난처해하던 이유도, 날 배려하려고 그런 거잖아. 에드 말대로 메릴다의 변덕에 이끌려서 입을 맞췄다간, 나는 되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을 거야. 다, 당장은… 기뻤겠지만….”
“…….”
“마, 말이 좀 헛 나왔네…. 하, 하여튼… 에드가 생각했던 게 맞아. 확실히… 메, 메릴다! 너무 쓸데없는 짓을 했잖아! 괘, 괜시리… 이런 고민이나 하게 만들고 말야!”
다시금 예니카가 입술 끝을 떨더니 숨을 휙휙 몰아쉬기 시작했다.
“어쨌든… 방금 내가 했던 말은 없었던 거로 해 줘라, 예니카. 말했지만 이런 식으로 너랑 입을 맞춘다고 하면 너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메릴다의 변덕에 놀아나 줄 필요도 없다.”
“에, 에드… 그치만, 메릴다가 말했던 정령의 유해가… 꼭 필요한 거지?”
최고위 정령의 유해.
슬슬 성장세가 지지부진해져 가는 정령술 관련 능력치를 획기적으로 높여 줄 신비한 유물이긴 하지만… 메릴다를 들들 볶아서 알아낼 만한 방법이야 널리고 널렸다.
굳이 이 방법에 매달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너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라. 사실 네가 괜찮고 어쩌고 이전에 내가 안 괜찮다. 딱히 널 이용 수단으로 삼고 싶지는 않아.”
“에, 에드. 그 말은 기쁘긴 한데…. 사실 획기적인 방법이 떠올랐어.”
“…뭐?”
예니카는 숨을 휙 몰아쉬더니, 마치 어색한 대사를 읽는 것처럼 머뭇거리는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요컨대 에드는 나를 배려해서 그렇게 생각해 준 거잖아? 설령 내가 괜찮다고 말해 준들, 나를 이용해 먹는 듯한 찝찝한 행동은 하기 싫다는 거고…?”
그렇게 말하더니, 예니카는 바위에서 휙 내려와서는 내게 다가와 이야기했다.
“사실 생각보다 해결 방법은 쉬워.”
“불안한데….”
“해, 행동의 주체를 바꾸면 되잖아….”
“뭐?”
“에드가 아니라 내가 하는 걸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대답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깨에 손을 올리는 느낌이 나더니, 순간적으로 호흡이 막혔다.
예니카에 대해서 논해 보자면, 소심한 기질이 있어 매사에 머뭇거리는 일이 많다.
그러나 상황이 극한에 치닫거나, 재빠른 결단이 필요해질 때는 또 과감한 결단력을 보여 줄 때도 많지 않았나.
그런 기질이 이럴 때까지 작용할 줄은 몰랐는데.
한동안 숲 사이로 풀벌레 우는 소리만 퍼져 나갔다. 그 외에는 오로지 침묵뿐이다.
말을 주고받을 입이라고는 두 개밖에 없는데, 둘 모두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읍….”
일을 치르고 휙 뒷걸음질을 친 예니카는, 자기 입을 가리고는 혼자서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치켜뜨고는 내 눈치를 몇 번 스윽 보더니, 일냈다는 듯이 혼자서 어깨에 휨을 꽉 주고 있었다.
“…그… 예니….”
“으악! 피곤하네! 고향에서부터 배 타고 왔더니 너무 피곤해! 곯아떨어질 것 같아! 내, 내일 봐!”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예니카는 호들갑을 떨면서 자기 오두막으로 뛰쳐 들어가 버렸다.
당장 눈을 마주치고만 있어도 호흡이 가빠지는 탓이었다.
이윽고 쾅, 하고 오두막의 문이 닫혔다.
“아니….”
홀로 모닥불 앞에 남겨진 나는 바닥에 떨어진 부지깽이를 쳐다보았다.
“…이보세요….”
내 입장도 이야기를 할 시간을 좀 줘야 될 거 아닌가.
내 입장에서도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기에… 당장에 상황 파악을 하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묘한 어색함이 감도는 느낌이다.
문제는 예니카와 나는 바로 옆집 살이를 하는 동거인이라는 점이다.
눈만 마주쳐도 어깨를 휙 치켜올리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예니카의 모습이 선했다. 당장 내일부터 계속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하는데… 어마어마한 대형사고였다.
차라리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이제 됐냐고 물어봤으면 내가 적절한 대처라도 했을 텐데.
이렇게 도망가 버리면… 나는 어쩌란 말이냐….
당장 내일 아침부터 걱정이 되어, 나는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