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70)
아니 이보세요, 예니카 씨 (3)
새벽 공기를 맡지 않으면 하루를 제대로 시작한 것 같지도 않다.
벌써 십수년 째 같은 패턴으로 생활하고 있는 벨 마이아에게는, 아직 해가 덜 뜬 이른 새벽의 공기가 익숙했다.
오필리스관의 장미 정원 사이로 참새들의 지저귐이 차분하게 스며든다.
아침이 오려거든 아직도 한참이 남은 시간이지만, 벨 마이아는 이미 복잡한 메이드의 복식을 모두 갖춰 입은 채 오필리스관 1층의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미 부지런한 선임 메이드들이 새벽을 틈타 복도의 창문을 모두 열어두었다. 맑은 아침 공기로 한 번 복도를 환기 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따금씩 아침 청소를 하고 있는 메이드들의 인사를 받아주고, 밤새 숙직을 했던 당직 메이드의 퇴근 기록부에 사인을 해준 다음, 오필리스관 식당으로 납품되는 여러 식자재들을 검수하러 간다.
검수 자체는 선임 메이드들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지만, 관리직인 벨 마이아는 현장을 돌면서 일이 잘 처리되고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식자재를 까다롭게 검수하는 오필리스관의 방침 상, 매일 엘테 상회에서 들어오는 식료품들 중 대략 15프로 정도는 현장에서 반려 당한다.
유통 과정에서 숨이 많이 죽어버린 채소들이나, 신선하지 않은 축산품들은 제 값을 내주지 않는 것이다.
납품하는 상회 입장에서는 너무 불합리 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애초에 오필리스관에서 거는 발주들은 모두 최고급 식자재들이며, 그 규모도 대단하기에 불만을 표하진 않았다.
오필리스관 같은 대형 거래처에서 생기는 이윤은 워낙 막대하기에, 검수 과정에서 그 정도 폐기되는 것 쯤이야 새 발의 피일 뿐이다.
다만, 검수에 통과하지 못한 식자재들이라고 해서 상회에서 다시 회수해가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올덱으로 다시 들고 돌아가봐야 신선도는 많이 훼손되어 있는데다가, 왔다갔다 물류비만 더 든다. 손은 많이 가는 주제에 이문은 많이 남지 않으므로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업무를 보는 게 기회비용상 더 옳은 판단이다.
즉, 검수에 통과하지 못한 식자재들은 현장에서 그 즉시 폐기되는 것이다. 보통은 물류 인부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현장의 메이드들이 좀 챙겨간다.
벨 마이아 또한, 이 폐기품 중에서 유제품이나 향신료 같은… 물류 유통을 통해 구하지 않으면 마련하기 힘든 식자재들을 좀 챙겨다가 에드의 캠프에 나눠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폐기될 상품이니 딱히 죄를 범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 검수표입니다, 메이드 장님. 그런데… 그게…”
어차피 검수표에는 최종적으로 메이드 장의 결재가 필요하다.
선임 메이드가 메이드 장에게 서류를 들고 직접 찾아오느냐, 아니면 벨 마이아가 직접 현장으로 가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검수표를 받아든 벨은 여러 식자재들의 단가가 적혀있는 표를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식자재 가격이 많이 올랐군요. 방학 전에 비해서… 확실히 부담스러울 정도인데요.”
“작물들의 생산량이나 유통량을 체크해보았는데, 별 다른 이슈도 없었거든요…”
송구스러운 듯한 자세로 선임 메이드가 고개를 떨궜다.
벨은 턱을 괴고선 잠시 단가표의 항목을 일일이 대조해보았다. 확실히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상승세였다.
“그건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엘테 상회 쪽에서 실무 담당으로 현장에 나온 소년이 있었다. 이름은 듄이었다.
베레모를 쓰고, 얍실하고 약삭 빠른 인상의 소년이었다.
“올덱에서 아켄섬 쪽으로 유통하는 물류의 물가가 전체적으로 상승했습죠. 사실 식자재만 그런 건 아니고, 학용품이나 마법용품, 특히 마공학용품들의 물가는 수직 상승했고요. 그에 따라 다른 물류 항목들도 영향을 받아 덩달아 오른 겁니다. 저희도 이 정도는 받아야 이문이 남으니,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지요.”
“로르텔 회주 대리님의 승인을 받은 사안인가요?”
“그야 물론이지요~.”
벨 마이아는 그 얍삽해보이는 소년을 보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쨌든 정무적인 판단은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류를 보고 하는 것이다.
엘테 상회 쪽에서 제시한 단가표는 일관적인 상승세가 전체 항목에 일괄적으로 적용되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벨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검수표에 사인을 해주었다.
*― 타악, 타악, 타악, 타악!
벨 마이아가 에드의 캠프에 도착했을 때에는, 주기적으로 나무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강가 쪽에서 들려오는 것을 보면 에드가 장작을 패고 있는 소리가 분명했다.
아직 몸 상태는 제대로 호전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을 시작한 것이다.
벨은 잡다한 식자재가 들어차있는 나무 바구니를 고쳐 쥐고서는 캠프 안 쪽으로 들어갔다.
아직 열기가 남아있는 모닥불에 잔불이 돌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익숙한 형태의 짐가방이 떨어져 있었다.
퓰란 지방의 자작 나무를 이용해 만든 목재 짐가방은 예니카 페일로버의 것이다. 그 옆에 지팡이가 떨어져 있는 것까지 보자면, 어젯밤 예니카 페일로버가 돌아온 듯 하다.
슬슬 여름 방학도 막바지고, 다음 학기의 시작을 준비해야할 시기니 귀교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흠.”
벨은 짧게 숨을 고르고, 예니카 쪽 오두막을 보았다.
에드를 만류하기 전에 일단 예니카에게 얼굴 도장이라도 찍어둘까 싶다. 그대로 식자재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에드의 작업대에 올려놓고, 예니카의 오두막 쪽으로 가서 노크를 두어번 했다.
― 똑, 똑.
― 끼이익.
문을 두드리자, 그 힘만으로 자연스럽게 열려버렸다.
벨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 내부를 살피자, 침대에 파묻혀서 베개를 투구 삼아 머리를 덮은 채 시체처럼 파묻혀있는 예니카가 보였다.
“예니카 아가씨…?”
“아, 벨…! 벨이구나…! 에, 에드가 들어온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아, 죄송합니다…”
“아, 아니… 벨이 죄송할 일이 아니긴 한데…”
벨은 당황스러웠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늘 그렇듯, 침착하고 정숙하게 대응을 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귀교하셨군요. 어디 아프십니까? 안색이 좀… 안 좋으십니다…”
“아, 으응… 자, 잠을 좀 설쳤어.”
“오랜만에 잠자리가 바뀌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많이 피곤해보이시는군요.”
“응, 아, 아니… 뭐어… 잡생각이 자꾸 많이 들어서.”
“잡생각 말입니까…?”
“응, 그, 그냥 진짜 잡생각! 별로 대단하지도 않고 막 궁금해 할 필요도 없는 말 그대로 잡생각!”
예니카는 그렇게 베개를 꽉 잡아 들고 상반신을 일으킨 채 앉았다.
“오, 오랜만에 벨 얼굴 보니까 정말 실베니아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확 드네! 자, 잘 지냈지?!”
“정말 어디 편찮으신 거 아닙니까? 아프시면 제가 따로 약을 챙겨드릴 수는 있습니다.”
“아, 아니 진짜로 안 아파! 밤새 열이 좀 올라오긴 했는데, 아파서 올라오는 열이 아니라 그냥 그… 다른 이유가 있어서 올라오는 열이야!”
“아니, 열이 올라오는데 아픈 게 아니라니요. 그런 건 섣불리 판단하시면 안됩니다. 예니카 아가씨.”
“아, 아니 나는 알 수 있거든! 아파서 올라오는 열이 아니야! 내 몸이잖아! 내가 잘 알아!”
아프지도 않으면서 사람 몸에 왜 열이 올라온단 말인가.
벨은 그게 납득이 되질 않아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눈치가 빠른 벨은 예니카의 행동거지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금방 간파해냈다.
허나 아직까지는 추측에 불가한 가능성이기에, 일단 운을 떼보기만 했다.
“에드 도련님께서 이른 아침부터 장작을 패고 계시는 것 같더군요. 아직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일을 하시면 악영향이 갈 수도 있습니다.”
“그, 그래…?”
“예. 그래서 간병하는 입장에서는 좀 만류하고 싶은데… 같이 이야기 좀 해보러 가시겠습니까?”
예니카 입장에서야 한 캠프에서 부대껴 사는 사이이고, 에드를 싫다 할 사람도 아니기에… 딱히 고개를 가로저을 필요가 없는 제안이다.
“아, 아니… 나는 좀…”
그러나 예니카는 베개를 꽉 껴안으면서 숨을 확 몰아삼키는 것이다. 여기서 벨 마이아는 확신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인가 있었다.
제대로 챙겨오지도 못한 채 밖을 구르고 있는 예니카의 짐가방이나, 척 봐도 묘해보이는 예니카의 태도를 보면 확실했다.
오랜만에 다시 재회한 예니카와 에드가 간만에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 채 무슨 대화가 오갔을지는… 완전히 상상의 영역이다.
그것은 사생활이고, 보호받아 마땅한 비밀이겠으나… 벨 마이아도 사람이다…!
제 아무리 프로페셔널한 메이드라 할지라도, 호기심을 완전히 절제해버릴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여기는 오필리스관이 아니라 에드의 캠프이며, 메이드 장이라는 무거운 직위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 환경이다…!
언제나 프로처럼 행동하자는 벨 마이아의 무거운 원칙에도 미묘하게 금이 가고 만다.
사실 벨은 그럴 자격이 있다. 그녀의 헌신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 호기심은 그리 큰 죄가 아니라 할 수는 있겠다.
허나, 예니카를 상대로 구구절절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베테랑인 그녀는 순식간에 휙 치고 들어가는 것으로 예니카의 자백을 이끌어내기로 했다.
“…혹시, 어젯밤에 에드 도련님과 동침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 라는 것을 벨도 잘 알고 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거기까진 안 갔어!!!”
세상에서 사상 깜짝놀란 얼굴로, 예니카가 소스라친 채 언성을 높였다.
“…. ‘거기까진’…?”
“허읍.”
결국 예니카는 벨 마이아의 손바닥 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뒤늦게 입술을 확 막은 채 동공을 넓혀보지만, 이미 포위망은 완전히 구축되어 있었다.
“그럼… 어디까지…?”
외통수였다.
*[ 마법 능력 상세 ]
등급 : 능숙한 마법학도 전문 분야 : 원소 공통 마법 :
빠른 캐스팅 Lv 13
마나 감지 Lv 14 불 원소 마법 :
발화 Lv 18
일점폭발 Lv 4 바람 원소 마법 :
바람 칼날 Lv 16 정령계 마법 :
정령 감응 Lv 18
정령 이해 Lv 18
정령 현현 Lv 13
감각 공유 Lv 13 감응 단계 : 8 정령식 효율 : 완벽함 고유 부여 스킬 : 화복의 가호 (일시적 화염 면역 폭증) 폭성 (하위 폭발 마법)
불 마법 능력 증대 감응 단계 : 5 정령식 효율 : 매우 좋음 고유 부여 스킬 : 수사의 가호 ( 일시적 물리 공격 면역 ) 수원 발현 (하위 물 마법)
물 마법 능력 증대 감응 단계 : 6 정령식 효율 : 보통 고유 부여 스킬 : 풍랑의 가호 (주기적으로 피해 무력화) 상승 기류 (중위 바람 마법)
바람 마법 능력 증대
“후우, 후우…”
몸이 멀쩡할 때는 두 시간 내내 장작만 패도 그럭저럭 버틸만 했는데, 지금 상태에서는 삼십분 남짓 일 하는 것만으로도 기진맥진이다.
아직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도, 지금부터 재활을 시작해야 학기 시작 때 커리큘럼을 소화할 수 있다.
나는 땀을 휙 닦아내면서, 마법 능력을 쭉 검토했다.
여러 시련들을 거치면서 하위 마법들은 거의 달인에 가까운 경지에 왔다.
바람 칼날, 발화에 대해서 만큼은 나보다 위력을 더 낼 수 있는 마법사가 손에 꼽을 것이다.
마력 효율도 완전히 발전해서, 거의 숨 쉬듯 이끌어 낼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
이제 중위 마법의 개수를 늘려나가고, 가능하면 고위 마법도 구사하고 싶다.
중위 마법이야 학사 수업을 척척 밟으면 몇 개 정도는 익힐 수 있을테지만, 고위 마법의 경우에는 완전히 이야기가 달랐다.
보통은 졸업 이전까지 고위 마법을 하나도 구사하지 못하는 게 보통이다.
실제 마법사가 되어서도 오랜 세월을 훈련해야만 고위 마법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
학생 수준에서 고위 마법을 구사하는 인간은… 정말 학년에 한 두명이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인 것이다.
현재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학사에 고위 원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학생은 두 손으로 꼽을 수 있다.
루시 메이릴, 직스 에펠슈타인, 트레이시아나 블룸리버, 아탈란테, 그리고 4학년의 몇 몇 우등생들 뿐이다.
학생 수준의 마법사에게 고위 마법을 바라는 것은 너무 양심 없는 짓이기에, 애초에 학사 커리큘럼에도 고위 마법 과정은 들어가 있지 않다. 일부 천재들에게만 허락된 영역인 것이다.
즉, 학사 수업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 ‘뭐, 어쨌든 학사 생활 하면서 힘들거나, 클레어 조교수가 개같이 굴면 나한테 꼰지르러 와라. 내가 누구 갈구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하니까.’
― ‘그 땐 고위 마법을 다루는 법도 좀 알려주지.’
문득 떠오른 것은, 학기말 시험에 맞붙었던 칼레이드 교수였다.
학생에게 고위 마법을 가르쳐줄만한 교수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고위 마법 자체가 워낙 복잡하고 까다로운 탓에 익히기도 힘들뿐더러, 그걸 가르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침 나는 클레어 조교수의 연구실 소속이니, 클레어 조교수의 지도교수인 칼레이드 교수에게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 터다.
다만, 칼레이드 교수는 이미 소문이 무성하다.
연초와 술에 찌들어서 제정신일 때가 거의 없는 막장 중의 막장 인간. 경력이 없었으면 먹고 살 방법도 없었을 망나니 중의 망나니. 인생을 아무렇게나 막 사는 인간의 대표 주자.
그런 안 좋은 소문이 무성한 지도 교수인 만큼, 그 누구도 칼레이드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흐음…”
애초에 칼레이드 교수에 대해서는 설정집에서 몇 번이고 본 기억이 있다.
수호자 오벨 포시어스를 따라 아켄섬으로 와 교편을 잡은 세 교수. 탐구자 글래스트, 무법자 칼레이드, 절단자 젤란.
설정으로만 봤을 땐 무척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현실은 또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내 입장에서는 다소 판단하기 애매한 부분이 많다.
좀 더 신중히 생각해봐야 할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 짝, 짝, 짝.
상의를 벗어 던지고, 차가운 강물에 얼굴을 적시고 있던 차.
내 캠프 쪽 수풀을 헤치고 나온 벨이… 박수를 치면서 나타났다.
쿨하고 표정 변화도 거의 없는 원숙한 메이드가, 다소곳이 박수를 치며 나오는 모습은 뭔가 묘한 광경이었다.
“왔냐, 벨.”
― 짝, 짝, 짝, 짝, 짝.
“…”
“여기에 계셨군요, 에드 도련님.”
“박수는 왜 치냐…?”
“그냥… 감동을 좀 했습니다.”
무언가 많은 사실을 알아버린 것처럼, 벨은 복잡미묘하고도 후련한 표정을 했다.
“평생 지지부진할 것 같은 관계도, 시간이 흐르면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군요… 메이드로서 오래 일했고,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던 많은 순간이 있었습니다만… 그 숱한 경험 속에 또 다른 한 페이지가 추가된 느낌입니다…”
“너 치고는 엄청 장황하게 말하는데… 뭐, 됐다…”
별로 오래 일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이미 꽤 지친 상태였다. 강물을 다시 머리 위에 끼얹고, 숨을 푹 쉬며 평평한 바위에 와 앉았다.
새벽은 이미 지났고, 아침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시간대다. 이제 오전인 것이다.
“아침 식자재 검수에서 폐기된 음식들을 좀 가져왔습니다. 작업대 위에 올려두었으니 시간 나면 정리해서 드십시오.”
“항상 고맙다. 신세진 게 많은데 딱히 갚을 방법이 없네. 오필리스관 일 하다가 곤란한 거 생기거나 하면 나한테도 알려줘. 가능한 선에서는 도울테니까.”
“괜찮습니다. 오필리스관 쪽 일은 대부분 의례적으로 처리하면 되는 것들이 많으니까요. 몸도 많이 좋아지시고, 생활도 건실해지신 것 같아서 여러모로 안심이 되는군요.”
“신경 써줘서 고맙다, 다만… 네 몸 간수도 좀 해야되는 거 아니냐? 요즘들어 살 좀 빠졌지?”
벨은 다소곳이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선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소 체중이 줄긴 했습니다만…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게 자기 자신의 몸관리입니다. 외관 단정하고, 언제나 조숙하고, 또 건강해야만 제대로 된 시중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니 내가 할 말은 없다만… 너무 완벽주의로 살아도 피곤해.”
“글쎄요. 몸 간수라면 에드 도련님 몸이 더 문제이지요… 아직 일 하시면 안되는 상태 아니십니까?”
나는 여기 저기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체크하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몸을 움직여보았지만, 역시 예전 만큼 쉽게 움직이지는 않는다. 언제까지고 벨에게 기대어 생활할 수는 없으니 빨리 기운을 차려야 하건만…
“기본적인 캠프 관리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예전에 비해서는 마력 부하에 버틸만 했다. 일상 생활 정도는 영위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은 올라왔다.
“학기 시작하면 너도 이제 바쁠텐데, 내 앞가림은 내가 해야지.”
“마력 복구가 아직 안 끝나신 거 아닙니까? 마법학 공부에 지장은 없으시겠습니까?”
“힘내서 해봐야지. 마법 말고도 다른 쪽 영역도 슬슬 신경써야 하고.”
“다른 쪽 말입니까?”
나는 캠프의 전경을 머리에 한 번 그리고 나서 말했다.
“오두막을 좀 더 확장 시키려고. 그게 다음 학기 목표 중 하나야.”
마법학 분야에서는 고위 마법 습득.
생존 분야에서는 오두막 대거 확장.
그렇게 일단 방침을 정했다.
그 외에도 특수 활 제작, 새로운 하위 정령 계약, 전설급 마공학 용품 추가 제작, 성위 마법 수련 등 할 일은 잔뜩이지만… 가장 큰 방침은 확실하게 해두어야만 했다.
특히, 마공학 수련을 할 때마다 일일이 영혼 도서관을 찾아가야하는 게 너무 불편하다.
가는 것 자체도 고생이지만, 눈비가 내리거나 다른 일정이 섞였을 때가 문제다.
언제나 자잘이 짬을 내서 마공학 수련을 하려거든, 아예 캠프에 개인 공방을 마련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새 오두막을 세우기에는 난방 효율도 떨어지고, 관리에 손만 더 들어간다.
그렇기에 차라리 지금 오두막을 2층으로 올리는 공사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방 개수도 좀 더 늘리고, 2층을 크게 한 번 빼서 공방 겸 서재로 활용해볼까 싶다.”
“…그럼 자재랑 인력이 많이 필요하시겠군요.”
“예니카랑 협업해서 정령들 도움도 좀 받아보고, 건설 인력이나 자재는 엘테 상회 쪽과도 협의를 좀 해봐야지. 금전적인 문제이니만큼 신중히 판단해야겠고.”
“금전적 부담은 감당 가능하십니까?”
“학년 수석이 되면서 학비 부담이 싹 다 사라졌거든. 그 여유자금을 캠프에 투자할 생각이다.”
벨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평평한 바위에 앉아 그런 벨의 얼굴을 의아하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의외로 기숙사에는 안 들어가시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쪽 생활이 좀 더 편하실텐데.”
“이젠 여기가 내 집이야.”
가장 힘든 시기 동안 구르고 구르며, 궁상 맞게 버티고 또 버텨낸 끝에 구축해낸 캠프다.
가장 지치고, 힘들고, 휴식이 필요할 때에도 결국 나는 이 캠프로 돌아온 것이다.
“어쨌든 이젠 너무 기본적인 것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다. 청소를 하든, 땔감을 만들든, 기본적인 건 스스로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 됐어.”
“그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만, 어차피 저도 캠프에 주기적으로 오긴 해야하는 상황입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그래? 왜?”
말해놓고 깨달았지만, 우문이었다.
벨은 자기 허리춤에 달려있는 고풍스러운 열쇠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안 그래도 오늘 별장 쪽 대청소를 한 번 더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
벨의 표정이 묘하게 복잡해보인다.
“내일 중으로 로르텔 아가씨께서 귀교하십니다.”
*예니카는 점심 때가 넘어서까지 오두막에 박혀서 나오질 않았다.
가끔 애꿎은 오두막 벽을 두들기는 소리나, 침대 베개를 휙휙 휘두르는 소리 따위가 들려오긴 했는데… 나는 애써 모른 체 했다.
일단은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냅다 얼굴부터 들이밀면 역효과만 날 것이 분명했다.
[ 이토록 흡족한 기분이 드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야 ]굉장히 영양분이 좋은 약이라도 잔뜩 들이킨 것처럼, 얼굴색이 확 좋아진 메릴다가 옷깃을 나풀대고 있었다.
“…일단 넌 약속이나 지켜라.”
[ 물론이지. 우훗, 우후훗. ]점심 좀 지나서 다시 모닥불에 불을 피웠다. 쓸 데 없이 야생동물이 접근하는 것을 막고, 식수를 미리 좀 끓여놓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점심식사도 같이 준비할까 싶었는데, 로르텔의 별장을 청소하던 벨이 나와서 한사코 나를 말리고 자기가 식자재를 직접 썰어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다시 캠프 한 켠에 앉아서 메릴다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뿐이었다.
[ 정령의 유해는 아무 때나 접근할 수 없는 것이거든. 시기가 되면 내가 알려주도록 할게. ]“… 말만 그렇게 하고 넘어간다고?”
[ 나를 믿지 못하는 거야? 그건 좀 실망인걸. ]장난스럽게 까르륵 거리는 메릴다는 음흉한 눈을 뜨고서는 눈을 지그시 감고 바람을 맞았다.
[ 아직은 때가 아니거든. 더 바람이 강하게 불 때야. ]“…”
[ 아마 네 선택에 후회하진 않을 거야. 내가 장담해. ]메릴다는 그렇게 말하고, 지그시 입을 다문 채 캠프 사이로 스며드는 산들바람을 맞았다.
늦여름은 캠프 밖에 나와 있기도 좋은 시기다. 무더위도 한 풀 꺾이기 때문이다.
여름 특유의 드높고 밝은 하늘과, 생명력이 가득 느껴지는 숲의 정경 사이에 있노라면… 그 찌는 듯한 더위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소소하게 부는 바람 사이에서 조금씩 가을의 향취가 느껴진다.
에드 로스테일러로서 실베니아에서 보내는 3학년 2학기. 이번 학기는 좀 쉴 수 있을까.
쉴 새도 없이 뛰어 왔으니 한 학기 정도는 쉬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아직 해야할 일이 잔뜩 남았지만, 아주 잠깐의 휴식기 정도는 가져도 될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 역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이번 학기는 푹 쉴 수 있기를.
그렇게 방학이 끝나간다.
가문 일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타냐도, 황권 경쟁을 치르느라 신경이 잔뜩 곤두서있을 페니아 황녀도, 나를 대변해서 황실에 갔던 루시도 모두 아켄섬으로 슬슬 돌아올 생각을 해야만 한다.
로스테일러 저택의 일이 어떻게 마무리 될지는… 아켄섬에서 요양하고 있는 나는 아직 알 수 없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 힘을 잘 써주길 바랄 뿐이다.
*그 날 저녁, 캠프에는 황실 쪽에서 보낸 서신 하나가 도착했다.
당연히 페니아 황녀가 보낸 서신일 거라 생각했으나, 의외로 발신인은 셀라하 황녀였다.
― ‘영광스러운 클로엘 제국의 1황녀, 셀라하 에이니르 클로엘’
온갖 미사여구가 가득한 편지 외관은 보기만 해도 호화스럽다. 금테가 잔뜩 둘러져 있는 것은 물론이고, 클로엘 황실을 상징하는 인장도 그려져 있었다.
“…”
모닥불 가에 앉아 있던 나는 의아한 얼굴로 서신을 펼쳐보았다.
― ‘수신인 에드 로스테일러 경에게 전함.’
― ‘클로엘 황실에서는 로스테일러 가문의 생존자들과, 후계자들의 처우에 대한 방침을 결정하기 위해 황실 회의를 가졌음. 다만, 사실관계가 완전하게 파악되지 않아 당사자들이 출두할 필요성이 있는 걸로 결론이 났음.’
일단 가장 이상한 점은… 나를 부르는 호칭이 ‘에드 로스테일러 경’으로 격상되었다는 점이다.
우선 여기서부터 묘한 느낌이 났다.
― ‘에드 로스테일러 경의 대리인으로 타냐 로스테일러 경이 조사에 참여했으나, 아직 완전히 결론이 나지 않은 고로… 처우에 대한 방침도 일단은 보류되었음. 허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로스테일러의 인재들은 일단 본가로 돌려보내야할 필요성이 있음. 그 과정에서 복직하지 못하는 자들도 꽤 많을 것임.’
― ‘그렇게 결론이 났으니, 에드 로스테일러 경의 대리인 입장으로 회의에 참석했던 루시 메이릴 경은 속히 아켄섬으로 복귀하기를 원함.’
― ‘황실 회의에서 루시 경의 자그마한 소요 행위가 있었으나, 로스테일러 참사 때의 공을 봐서 무죄에 붙이기로 했음. 다만, 그 이후로도 황실에 눌러 앉아 몇 시간 동안 내 개인실을 점거 하거나, 황궁 요리사를 붙잡고 있기도 하고, 접근 금지된 첨탑 꼭대기나 황궁 지하를 쏘다니는 둥… 서신에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제 행위가 많이 발생하고 있음.’
― ‘귀교 명령에도 불복종하는 탓에 당장 손을 쓸 방법이 없는 고로, 에드 로스테일러 경이 직접 서신을 보내 그녀의 귀교를 촉구해주기를 바람.’
“…….”
“누구한테서 온 편지입니까, 에드 도련님?”
“…흐음..”
황실 중앙 회의에서 로스테일러 가문에 대한 안건을 다룬 것은 잘 알겠다.
뭐,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 지도 뻔하다.
로스테일러 가문에 대한 지지파와 반대파가 갈라져서, 그들의 권위를 유지해야할지 아니면 치워버려야할지 살벌하게 싸워댔겠지.
그 과정에서 나를 출두시켜야 하느니, 보호해야 하느니, 처형을 시켜야 한다느니 온갖 논쟁이 오갔을 터다.
다만, 루시가 그 회의장에서 가만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소요 행위’라고 표현 하고 있지만… 메뷸러를 돌려보내버린 그 큰 공덕을 퉁쳐버릴 정도로 난리를 피운 것 같다.
뿐만 아니라 황궁 내부에서도 난리를 피워댄 통에, 결국 셀라하 황녀까지 고개를 숙이고 내게 서신을 보내게 된 것이다.
요컨대, 편지 내용은 길지만… 핵심만 요약해놓고보면 다음과 같았다.
루시 메이릴.
제발 얘 좀 다시 데려가 주세요.
“대체 얘는… 황궁에서 뭔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의례적이고 정무적인 어조로 쓰여진 편지이지만, 그 너머 셀라하 황녀의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해서….
나는 문득… 아련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