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71)
아니 이보세요, 예니카 씨 (4)
“루시 메이릴.”
보다못한 페니아 황녀가 루시를 개인실로 불러들인 것은 개학이 일주일 정도 남았을 때였다
“이제 슬슬… 귀교 하셔야죠…”
황도 클로에론의 중심부에 드높이 솟아오른 클로엘 황궁.
중앙 첨탑을 중심으로 총 11개의 궁전과 21개의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있으면 거대한 마을 하나가 수도 안에 따로 자리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중에서도 첨탑을 기준으로 북동쪽에 있는 장미궁은 주로 황족들이 머무는 곳으로 사용되는 시설이었다.
장미궁의 가장 바깥쪽에 깔끔하게 자리한 대리석 건물, 오로지 페니아 황녀만을 위해 세워진 그 건물의 접견실에는… 루시 메이릴이 나른한 듯이 앉아있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널브러져 있는 듯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는 경악을 할 것이다.
이 곳은 황실에서도 가장 몸가짐을 정갈히 해야하는 장미궁, 그 중에서도 페니아 황녀의 개인 접견실이다.
어지간한 황성의 고위 재상들도 이곳에서는 시선을 내리깔고 다니는 법인데, 루시 메이릴은 졸린 듯한 눈으로 소파 위에 나자빠져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보는 이들 모두가 경악했지만, 루시 메이릴이 황성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니 다들 적응이 끝났다.
원래 이런 인간이다.
본인이 주변 눈치를 보기보다는, 주변이 자기에게 맞추도록 만드는 인간인 것이다.
그럴만한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었다.
“…”
루시는 멍한 눈으로 맞은 편에 앉은 페니아 황녀를 바라보았다.
페니아 황녀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은 황실의 명운을 건 협상 테이블 위에 올라 앉은 기분이다.
그나마 루시 메이릴과 같은 실베니아에 재학하면서, 어느 정도 구면인 사이 아니던가.
황실 차원에서는 그런 페니아 황녀가 루시를 좀 설득해서 되돌려 보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황실 회의에서 그 난리를 피운지도 벌써 며칠이나 지났잖아요.”
“…그런가. …시간이 빠르네…”
로스테일러 가문의 처우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황실 회의.
로스테일러 가문의 인재들을 모두 쳐내고, 그 대표자인 타냐와 에드를 황실로 불러들여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셀라하의 의견.
로스테일러 가문의 인재들을 일단은 대기 발령 상태로 놔두고, 대리자인 타냐와 루시가 있으니 에드 로스테일러도 일단 내버려 두자는 것이 페니아의 의견.
로스테일러 가문의 공작 작위를 박탈하고, 실질적인 능력이 있는 자들만 등용해서 남겨놓은 뒤 에드 로스테일러는 사태가 마무리 될 때까지 일단 구속시키자는 것이 페르시카의 의견이었다.
로스테일러에 적대적인 셀라하, 우호적인 페니아, 비교적 중립적인 페르시카의 의견이 대립되는 상황. 루시가 회의장 중앙에 난입한 것이 그 순간이었다.
고위 빛 마법과 원소 마법으로 입구를 전부 봉쇄해버린 채, 황제의 앞에 있는 회의용 탁자에 걸터앉아 사람들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 보던 모습. 거대한 마력을 위협적으로 발하던 그녀는 페니아 황녀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직접 메뷸러를 내쫓아 버리고, 고위 귀족들 수십의 목숨을 살려낸 영웅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살벌한 광경.
그녀는 에드 로스테일러를 구속하는 쪽으로 회의의 흐름이 진행되 는게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루시는 극형에 처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죄를 범했지만 어떻게든 넘어갔다.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쌓은 공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 엄청난 공을 전부 상쇄하기도 참 쉽지 않을 것인데, 확실히 한다면 하는 소녀였다.
“사실 나는… 졸업 안 해도 상관 없는데…”
루시 메이릴이 꾸역꾸역 실베니아에 다니고 있는 이유는 단지 글록트 엘더베인의 유언 때문이다.
언젠가 다가올 실베니아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함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글록트는 겸사겸사 학교 생활을 구가하면서 루시가 좀 더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2년이나 다녔잖아요. 다닌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졸업은 해야하지 않겠어요?”
“흠…”
“슬슬 그 오두막 캠프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황실 환경이 편하기야 하지만, 어쨌든 루시 당신은 거기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잖아요.”
루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페니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에드 로스테일러의 얼굴을 못본지도 꽤 됐다.
사실 홧김에 저지른 일들이 워낙 많아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찌됐든 아켄섬으로 언젠가는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번에 개학하면서 저도 아켄섬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이왕 갈 거 같이 가요. 시설이 좋은 황실 마차를 타고 가면 더 편하게 귀교할 수 있을 거에요.”
페니아의 그 말에 루시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황실에 올 때는 셀라하의 마차를 타고 왔지만, 다시 아켄섬으로 돌아갈 때는 불편한 사설 마차를 타고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왕 장거리 이동을 할 거면 편한 황실 마차를 타고 가는 게 더 좋다.
“그럼… 그럴까…”
루시는 가볍게 휙 던지듯 이야기했다.
페니아 황녀는 그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사용인을 바라본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용인은 그대로 종종 걸음으로 나가서,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용인 무리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 대마법사님이 귀교하신다고 한다!
― 드디어! 드디어 돌아가시는 구나!
― 만세! 만세!
― 우리도 드디어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야!
― 페니아 황녀님! 페니아 황녀님께서 한 건 하셨어!
틈만나면 셀라하의 영역에서 난동을 부려대는 루시 탓에, 한껏 고생을 한 사용인들이 만세를 불렀다.
그 소리가 페니아 황녀의 접견실까지 가감 없이 들어왔지만, 루시는 신경쓰는 기색조차 없이 나른하게 소파에 눌러붙어 있을 뿐이었다.
페니아는 속으로 한 숨을 푹 쉬고, 드디어 한 건 해결했다는 느낌에 안도했다.
어쨌든, 황실에 최대한 빨리 도착해서… 흔들거리던 페니아의 세력을 어느 정도 수습하긴 했다.
대부분은 셀라하 황녀 쪽으로 넘어갔지만, 재단장이나 중간관리직들, 특히 자기 위치가 아슬아슬한 로스테일러 가문의 사람들은 죄다 페니아 황녀 쪽으로 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셀라하 황녀의 세력에 정면으로 맞서기는 힘들겠지만… 당장에 페니아 황녀의 세력이 위험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다만…”
문득 고민이 되는 것은, 계속해서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게 과연 맞는 선택일까 하는 것이다.
애초에 페니아 황녀가 실베니아에 재학한 이유는, 황권에 아무런 뜻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셀라하 황녀와 정면으로 대치하기 시작한다면, 황권을 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목표가 되고 만다.
그렇게 된다면, 황실에서 자리를 비우고 아켄섬에서 지내는 것은 크나큰 약점으로 작용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니아 황녀는 일단 아켄섬으로 향하기로 했다.
일단 루시를 아켄섬에 데려다 놔야했고, 에드 로스테일러를 만나 상태를 확인하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이 실베니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학기가 될 수도 있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페니아 황녀는 괜시리 묘한 기분이 되었다.
― 드디어! 드디어 돌아가시는 구나!
― 만세! 만세!
― 우리도 드디어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야!
창밖에서부터 만세를 부르는 사용인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에드 로스테일러.”
장미궁에 위치한 개인 집무실 중에는 당연히 페르시카 황녀의 것도 있다.
제 2황녀 페르시카의 집무실에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책이 잔뜩 쌓여있다. 바닥이나 벽이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책더미 사이에 파묻히듯 앉아있던 소녀는 자기 턱을 쓸며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린돈 황태자가 즉위를 포기한 이후로 황실 구도 경쟁에는 이렇다할 변수가 없었다.
그러나, 페니아 황녀와 셀라하 황녀가 에드 로스테일러의 신병에 대한 안건으로 치고박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페르시카만 모르는 어떤 열쇠를 그가 쥐고 있는 것만 같다.
이건 좋은 현상은 아니다. 나머지 두 황권 주자가 그토록 그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있을 터인데, 자기만 동떨어져서 그 이유를 가늠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번 사태 해결에 일등공신이었던 루시 메이릴마저 그를 대놓고 옹호하고 있으니,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은 사내다. 쉬이 여겨서는 안될 것만 같은 변수다.
좀 더 그 사내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혼자서만 뒤처지는 것은 페르시카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
다만, 직접 그를 만나기에는 영 까다롭다. 그는 대륙 남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아켄섬에서 거주하고 있는 모양이니,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 멀다.
원래라면 황녀의 권위를 이용해 그를 불러들이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그를 황실로 출두시키냐 마냐가 정치적 쟁점이 되어버렸다. 독단으로 그리 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직접 아켄섬으로 가는 수밖에 없는데, 느닷없이 페르시카 황녀가 아켄섬으로 간다는 것은 너무 정치적으로 속이 뻔히 보이는 행위다.
셀라하와 페니아가 날을 곤두세우고 페르시카를 지켜볼 것이고, 당사자인 에드 로스테일러도 일단 경계할 가능성이 컸다.
페니아 황녀야 원래 실베니아 재학생이니 아켄섬으로 돌아가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만, 페르시카는 아예 외부인 입장인 것이다.
“지금 당장은… 억지로 자리를 만들 이유는 없겠지.”
페르시카는 온갖 역사 서적을 책더미 옆으로 휙 밀어버리면서, 고뇌에 빠졌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전 후계자이자, 한 때는 망나니로 유명했지만 근래들어 평가가 반등하기 시작하는 사내.
허나 직접 만나본 경험은 없기에, 페르시카에게 에드 로스테일러의 존재란 베일 속에 가려진 정체불명의 뒷배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의 존재를 의식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번 황권 경쟁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만 같으니까.
그렇게 에드 로스테일러는 서서히, 세 황녀 사이의 핵심 쟁점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로 부상하고 있었다.
*
“캠프를 확장하신다고요?”
“일단 좀 그럴싸하게 만들고 싶은 뜻이 있거든. 대부분은 직접 할 건데, 아무래도 일손이 필요한 부분도 분명 있긴 있을 것 같다.”
“흐음…”
이튿날, 돌아온 로르텔은 생각보다 인상이 변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지만.
여우 같은 눈매나 호리호리한 인상은 여전하고, 한쪽으로 길게 묶어내린 적갈색 머리칼은 이전보다 살짝 길어진 느낌이다.
의식적으로 머리를 기르고 있는 것인지, 뒤쪽으로 흘러내려오는 머리도 더 풍성해져서… 깔끔했던 예전 인상보다는 더 푸근해져 가는 느낌이었다.
인상조차도 무기로 삼는 상인이니만큼, 이 또한 어떤 의도가 있는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공짜로 해달라는 말은 안한다. 이번에 학생 수석 자리 먹으면서 학비가 많이 남게 되었거든. 그 돈으로 캠프에 투자할 생각이야.”
막 돌아온 로르텔에게 이런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않을까 싶었지만, 오히려 로르텔은 이런 돈 얘기를 더 좋아하는 느낌이다. 천성이 그런 소녀인 것이다.
“뭐어, 어차피 물자 조달 정도는 남는 마차 자리에 쓰면 되거든요. 거기다 대단한 건물 짓는 것도 아니고, 이런 자그마한 오두막 공사는 금방 끝나니까 그리 큰 돈이 들지도 않아요.”
상회 직원들이 가져다 놓은 로르텔의 개인 짐들이 모닥불 근처에 가득했다.
갑부가 사는 별장이라고 하기에는 로르텔이 지은 목재 집은 그다지 크진 않다. 혼자만 큰 집을 지어봐야 붕 뜨는 느낌이 들고 만다는 것을 로르텔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캠프의 규모에 맞게 깔끔하게 바로 선 로르텔의 별장은, 바로 어제 벨 마이아가 전부 치워놓은 상태다.
내부도 슬쩍 보여주긴 했는데, 내 오두막보다 좀 더 커다란 규모의 방에 이런저런 깔끔한 가구들이 들어차 있었다.
대단히 호화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있을 것은 다 있다는 느낌이었다.
“2층 규모로 확장하실 거라면… 2층에는 역시 개인 공방을 넣으실 생각이신 걸까요?”
“확실히 예리하구나.”
“짓는 김에 겸사 겸사 제 방도 같이 넣을까요?”
“…”
내가 굳이 대답을 하지 않자, 로르텔은 요염하게 웃었다.
“농담이 안 통하신다니깐요. 어쨌든, 그런 자잘한 비용은 됐어요. 상회에 달아두시면 될 거에요.”
“아니, 돈은 받아가라.”
“네?”
나는 몇 번 고민을 하다가, 이윽고 로르텔에게 금화가 담긴 가죽 지갑을 건넸다.
“어머, 이렇게 시원하게 지불하실 줄은 몰랐는데. 아낄 수 있는 건 다 아끼자는 주의 아니었나요?”
“너한테는 빚만 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니, 나로서도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할 생각이거든.”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올거라곤 생각 못했는지, 로르텔은 잠시 허를 찔린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물론, 이윽고 순식간에 표정을 수습하고서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처럼 느껴지거든. 그런 걸 경계하지 않으면 사람이 안하무인하게 되는 건 순식간이야.”
“어머, 맞는 말씀이지만… 글쎄요.”
이어서 로르텔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 돈 안 받을 건데요.”
“…?”
“너무 비즈니스적인 관계로 선 긋는 것 같잖아요? 원래 가까운 사람끼리는 몇 푼 빌리고 받은 것 가지고 일일이 차용증을 쓰지는 않는 법이에요.”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고…?”
금화 한 푼 까지도 깔끔하게 계산해서 지옥 끝까지 쫓아가 받아낸다는 악마 아니던가.
실제로, 생활동에 뿌려진 로르텔의 채권은 회수율이 9할을 넘긴다고 들었다. 그야말로 피치 못할 사정이나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은 전부 받아낸다는 이야기다.
“받아.”
“괜찮아요, 그런 푼돈.”
“받으라고.”
“안 받을 건데요.”
그렇게 잠시간 서로 신경전이 오갔다. 뭔가 입장이 뒤바뀐 기분이 든다.
항상 돈을 달라고 하는 입장이 되어야 하는 건 로르텔 아니던가.
실베니아 학사 측과의 납품 협상 자리에서, 거마비 한 푼까지도 전부 받아내서 돌아왔다는 일화조차 들려오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일관적으로 돈을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이 너무 기묘했다.
“에드 선배님… 세상은 돈이 다가 아니랍니다…”
“네가 할 말이냐.”
“돈 보다도 아름다운 것이 마음이지요. 어찌 사람의 호의를 돈으로 평가하려 하시는 거에요. 세상 모든 것에 값어치를 매기는 습관은 좋지 않아요.”
안타깝게도 세상 모든 것에 값어치를 매기는 것은 로르텔의 주특기였다.
“굳이 말하자면, 저는 에드 선배님에게 마음의 빚으로 남겨두고 싶거든요.”
“그건 또 무슨 의미냐.”
“제가 이렇게 막 호의적으로 대해 드리고, 지갑도 시원하게 열면서 돈은 안 받으면… 에드 선배님 마음 속에는 빚으로 남잖아요?”
모닥불 너머의 로르텔은 방학 동안 올덱에서 또 얼마나 복잡한 술수와 암약을 반복하고 온 것일까.
한층 더 여우 같아진 모습에, 나는 쓰읍 거리며 혀를 찰 뻔했다.
“그게 저한테는 더 가치가 있는 고로, 더 가치있는 쪽에 투자하는 것이 상도에 사는 사람들의 습성이지요.”
“…올덱에서 무슨 일 있었냐?”
“…”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핵심부터 찔러들어갔다.
과연, 제 아무리 화술에 능한 로르텔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정곡을 푹 찌르고 들어올 거란 예상은 못했는지… 잠시간 말문이 막힌 모양새였다.
모닥불 너머에 앉아 있던 로르텔은 잠시간 표정을 굳히더니, 이윽고 다시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그런 식의 기습은 좋지 않아요, 선배님.”
“그냥 묻는 거야.”
“글쎄요. 무슨 일이 있었다면 있었고, 없었다면 없었죠. 저한테는 일상적인 일이거든요.”
로르텔은 로브 모자를 스윽 내려 썼다. 그제서야 로르텔의 머리칼이 온전하게 한 눈에 들어온다.
뒷목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려가는 머리칼은 한층 더 풍성해져… 훨씬 로르텔을 어른스러워 보이게 만들었다.
“자리를 비운 동안 측근이라는 자들이 뒷 주머니를 좀 찼더라고요.”
“배신 당했다는 거야?”
“사실 배신이라는 극적인 표현을 쓰기도 좀 그렇죠. 원래 이 바닥은 한 눈 팔면 제 몫 챙기고 도망가려는 사람들이 한가득 이거든요. 제 측근이라 생각했던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죠.”
로르텔은 한 손을 들고선 엄지와 검지를 슥슥 비벼대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디든 간에 자리 좀 오래 비우면 늘 터지는 일이에요. 횡령, 정보 유출, 물품 훼손, 이중 첩자… 오랜만에 올덱에 돌아갔더니 꽤나 상회가 개판이 되어있어서… 여러모로 수습하고 왔을 뿐이에요.”
“그래서 기분이 상했었던 거냐? 네 직원들이 네 뒤를 쳐서?”
“설마요. 제가 이런 걸로 일일이 기분 상할 사람으로 보이세요?”
확실히, 로르텔의 미소에는 숨겨진 우울함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허나, 저것은 멀쩡한 게 아니라 해탈한 거다.
배신 당하고 협잡질 당하는 것이 익숙하고, 또 그게 당연한 거라 생각한 것 뿐이다.
“다들 조금이라도 더 먹고 살려고 애쓰는 것일 뿐이죠. 저도 자리 잡기 전엔 자주 그랬고요.”
“…”
“단지, 오랜만에 올덱에 돌아가 그런 풍경을 보고 나니… 내가 사람이 많이 유해졌구나 하는 느낌이 들긴 하더라고요. 적어도 이 아켄섬은… 뭐라고 해야할까, 특유의 낭만이 있잖아요.”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모여들어 학업의 때를 구가하는 학생들의 풍경은… 확실히 사람을 유해지게 만들고, 독기가 사라지게 만든다.
그 사이에서도 독기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제가 말했잖아요, 에드 선배님. 저희는 동족이라고. 오랜만에 돌아와 얼굴을 보고나니, 그 사실이 다시금 되새김질이 되어서… 잠시 감상적으로 변해버렸나봐요.”
“감상적으로 변했다고? 뭘 어떤 식으로?”
“글쎄요. 단지…”
거기서 로르텔은 말꼬리를 조금 흐렸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것일까.
아니, 그거랑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로르텔이 묘하게 망설이는 이유는, 가감 없이 약점을 내비친다는 행위에 거부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노출된 약점은 이용당하는 게 상식인 세계에서 살아왔으니까.
허나, 그런 거부감도 잠시뿐이었던 것일까.
내 얼굴을 보고서는, 자기 무릎을 감싸안고 자조하듯이 이야기했다.
“조건 없이 호의를 주고 받는다는 것에, 묘한 열망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 누구의 돈이든 금화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냉혈인간.
소녀에게는 다소 가혹한 평가이지만, 로르텔을 바라보는 생활동 사람들의 시선은 늘 그랬다.
허나, 내 돈은 한 푼이라도 덜 받으려고 한사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 갭의 이유를 찾아보자면, 결국 고독한 로르텔의 일생과도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뭐, 처음 하는 얘기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쑥스러워 할 것까지도 없지요.”
“너 그렇게 굴다가 호구 잡힌다.”
“누구요? 저를요? 선배가요?”
로르텔은 고개를 휙 들고 자기를 가리키더니, 이내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어찌나 시원스럽게 웃어보이던지, 이전까지의 모습과는 아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하하, 아핫. 걱정마세요, 선배님. 저도 지켜야할 선은 지키니까. 그런 걱정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사실 나도 그럴 맘은 없다. 호의는 호의로 받을 생각이야.”
적어도 내 입장에서 로르텔에게 심어줄 수 있는 확신은 많지 않았다. 그저, 할 일은 할 뿐이다.
“어쨌든, 일단 돈은 내야겠다. 이건 네 입장 이전에 내 입장의 문제야.”
“선배님도 이런 부분에서는 고집이 강하시네요. 뭐어, 몇 푼 정도 받을 수는 있겠죠.”
로르텔은 빙그레 웃으면서 가감없이 이야기했다.
“그래도 호구 좀 잡히면 어때요.”
“뭐?”
“똑같이 호구 잡히더라도, 알고 잡히냐 모르고 잡히냐는 그 차이가 생각보다 크답니다.”
로르텔은 뭔가 후련하게 털어내버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나는 뭐라 적극적으로 대답하기도 힘들었다.
“알고도 잡혀 드릴테니까, 당분간은 가감 없이 말씀하시라는 의미에요.”
“…”
“고백하자면, 제 주변에 선배님 같은 분은 유일하거든요. 적어도 이렇게 진심으로 박장대소 해본 것은 오랜만이에요.”
로르텔은 눈을 지그시 감고 숲의 바람을 맞았다.
뭔가 편안해 보여서, 방해하기도 좀 그랬다.
“아켄섬에 돌아오니 기분이 좋네요. 올덱보다는 훨씬 공기도 좋고 편안한 곳이에요.”
그렇게 한동안 로르텔은 아켄섬의 자유로운 공기를 한껏 만끽했다.
“그나저나, 오두막 공사 들어가시면 당장 주무실 곳이 없네요.”
오필리스관의 일을 대략 끝마치고 온 벨 마이아는, 로르텔의 짐을 챙겨서 별장 안에 차곡차곡 정리해주었다.
로르텔은 사용인을 부리는 것이 익숙한 모습이다. 모닥불 근처에 가만히 앉아서 불을 쬐고 있을 뿐이었다.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가을 바람이 로르텔의 불그스름한 머리칼을 흩날리고 있었다.
“그것도 그렇네. 한 번 해결 방안을 찾아봐야지.”
“왜 굳이 멀리서 찾으려 하세요? 바로 옆에 제 별장이 있는데.”
“농담할 일이 아니다. 정말 이러다 길바닥에서 자게 생겼어.”
“어머….”
로르텔은 자기 턱을 받치더니 이내 요염하게 웃었다.
“농담 아닌데.”
“…”
로르텔의 별장은 막대한 규모는 아닐지언정, 로르텔 혼자 쓰기엔 꽤 여유롭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닥치는 대로 동거하겠답시고 밀고 들어가도 될 리가 없다.
“이래도 당황을 안하시네. 흠…”
“너 아까부터 그렇게 훅훅 멘트를 던져대는 이유가 뭐냐?”
“선배님이 당황하시는 모습을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렇게 훅훅 치고 들어가다 보면 말문 한 번은 막히실 법도 하잖아요?”
“애초에 내가 진짜로 들어가서 살겠다고 하면 어쩔 생각인데?”
“그럴 맘도 없으시잖아요?”
“있다고 하면?”
로르텔은 까르르 웃으면서 옷 매무새를 탈탈 털었다.
그러나, 내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이내 흠칫 몸을 떨었다.
“…읏…”
“…”
“지, 진짜로…?”
시도 때도 없이 공격해대는 주제에, 수비벽은 얇은 인간이 꼭 있다. 당기는 건 잘하면서 밀쳐내는 건 미숙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어쨌든 그럴 맘은 추호도 없지만, 혹시라도 내가 로르텔의 별장에 들어가 며칠을 지낼 것을 상상하면 또 묘하게 현실감이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내가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다시 숙이자, 로르텔은 괜시리 제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평정을 되찾았다. 상황 판단이 끝난 것이다.
로르텔은 어이없다는 듯이 덩달아서 한숨을 내쉬고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뭐라고 더 말을 하려는 순간…
― 털썩
로르텔과 내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상황.
그 옆에 다른 소녀가 와서 자리를 트고 앉았다.
하루 왠종일 동굴 같은 오두막에 박혀서 애꿎은 벽을 치거나, 베개를 때리던 소녀였다.
드디어 부활했는지, 겨우 몸을 가누고 와서는 모닥불 옆에 주저앉은 것이다.
“…”
대형사고를 친 지 만 하루가 넘게 지났는데도, 아직 덜 진정되었는지 볼에는 홍조가 가득하다.
그래도 오두막 안에서 나와 로르텔의 대화 소리를 들은 것인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와서 어떻게든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앉아 있는 것이다.
로르텔과 단 둘이 놔둘 수는 없다는 것일까. 그런 명확한 의지의 표명마저 느껴지는 출타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하루종일 침대에서 구르느라 더벅머리가 되어버린 예니카의 몸상태도 걱정스러웠으나… 당장 폭발할 것 같은 폭탄처럼 볼을 붉히고 있는 예니카의 정신 건강이 훨씬 더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먼저 뭐라고 말을 걸지도 못한 채… 잠시 간의 어색한 침묵만이 유지되고 있었다.
“….”
쭈뼛거리며 홍조를 유지하는 예니카와, 말을 고르고 있는 나.
모닥불 건너편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로르텔이.. 그제서야 반응했다.
“뭐야.”
혼잣말인지,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