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72)
엘테 상회 탈환전 (1)
?아마 1년도 더 된 기억이다.
기분 나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그 때 들었던 말은 아직까지도 로르텔의 뇌리에 아른거릴 때가 많다.
– ‘배신으로 인해 얻은 권력은 결국 배신으로 추락하는 법이라고 했나. 그토록 기를 쓰고 경계했지만, 나라고 해서 별 다를 건 없군.’
포박된 채 황실로 향하는 호송 마차에 앉아 있던 황금왕 엘테는, 나무 창살 너머로 로르텔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비릿한 미소가 섞여있는 그의 모습엔 한기마저 서려 있었다.
– ‘내 모습을 봐, 내가 우습나?’
언제나 호화롭던 로브는 흙먼지가 잔뜩 묻은 채 여기저기 찢겨나가 있었고, 중후하던 턱수염과 콧수염은 피에 절어있었다.
더러운 마차 바닥에 주저 앉아서 추레하게 비를 맞고 있는 그의 모습은… 한 때 대륙을 호령하던 거상의 말로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추했다.
곧 호송 마차가 출발하는 순간, 엘테 케헬른은 로르텔을 똑바로 쳐다보고 이야기했다.
– ‘웃지 않는 게 좋을거다. 똑바로 봐라.’
저주와 폭언을 일삼을 것이라고 예상했었으나… 의외로 그는 담담하게 로르텔을 바라본 채 이야기 했다.
양팔을 슬쩍 들어보이자, 헤지고 찢겨지고 더럽혀져서 더 이상 거상의 옷이라고 부를 수 없는 넝마 덩어리가 드러났다.
양팔을 쫙 펼칠 수도 없는 좁디 좁은 호송용 마차 뒷칸에서,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로르텔에게 이야기 한 것이다.
– ‘네 미래야.’
멀어져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자니, 로르텔은 묘하게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배신으로 흥한 자는 결국 배신으로 끝을 맞이하리라.
성전의 문구에서부터 상인들 사이의 격언에 이르기까지. 어딜 가든 비슷한 문구를 찾아볼 수 있는 말이었다.
배신이란 무기는 한 번 손에 쥐면 죽을 때까지 그 자에게 들러붙어 저주를 남기는 마검이다.
배신자라는 낙인이 한 번 찍히고 나면 그 누구도 그 자를 믿지 않는다.
필요에 의해서, 이해타산에 의해서 관계를 이어나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배신의 역사를 가진 자와는 일생일대의 사업을 함께하지도, 이해관계를 넘어선 신뢰관계를 구축하려 들지도 않는다.
배신으로 권력을 손에 쥐었다면, 그 권력을 찬탈 당하는 그 날까지 고독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방심하고, 마음이 유해지는 순간, 먼 옛날 자신의 손에 쥐여있던 배신의 칼날은 타인의 손으로 넘어가 내 가슴팍을 꿰뚫을 것이다.
이미 그 금지된 무기를 손에 쥐고 말았다면, 이제 도망칠 방법은 없다.
특히, 신뢰와 신용이 곧 천금의 가치가 되는 상업의 세계에서라면 더 말할 것 없다.
예정된 파국을 향해 치달으면서 하루라도 더 버텨보겠다고 발버둥치다가… 때가 되면 겸허히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게 최후를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그 누구도 로르텔 케헬른을 믿어주는 자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상인의 세계에선, 배신으로 옥좌에 오른 자의 최후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로르텔 케헬른은 떠나가는 호송 마차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매사 능구렁이처럼 웃고 있던 그녀 치고는, 꽤나 진지한 얼굴이었다.
*
“분위기가 왜 이래요?”
똑같은 질문을 한 번 더 입 밖에 냈지만, 이번에는 그 대상이 달랐다.
깔끔하고 아리따운 로르텔의 개인 별장. 옷을 갈아입고, 벽난로 옆의 흔들 의자에 앉은 로르텔은 그 옆에 지그시 서있던 벨을 보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에드 선배님이랑 예니카 선배님이 갓 하룻밤을 치른 신혼부부처럼 서로 조심조심하고 조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거에요?”
“…”
“그리고 왜 벨 씨는 이런 제 질문에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계시는 거에요?”
로르텔의 질문은 예리하다. 벨은 식은 땀을 한 줄기 흘리면서 뇌를 풀가동시켰다.
오필리스관에서 일을 하면서 온갖 위기란 위기는 다 겪어봤지만, 이토록 외통수에 몰린 적은 처음이다.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할 방법을 찾아내보려고 온갖 기지를 다 내봤지만, 당연히 해결 방안이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결국 벨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 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가감없이 전달하는 것 뿐이다.
“예니카 아가씨와 에드 도련님이 입을 맞추셨습니다.”
한 줄 요약 성공.
한 문장을 내뱉었을 뿐인데, 벨은 숨이 콱 틀어막힐 뻔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눈을 치켜뜬 채 로르텔의 표정을 보자, 의외로 편안했다.
“…”
아니, 굳어 있는 것이었다.
“당황하셨습니까?”
“…조금요?”
“당황하실만 합니다.”
“아니요. 사실 다시 생각해보니까 당황할 일까지는 아니잖아요. 애초에 입은 제가 먼저 맞췄고요.”
“….예? 두 분이서 입 맞춘 적 있으십니까?”
벨이 놀라며 묻자, 로르텔은 헛숨을 휙 삼켰다.
“…실언을 했네요.”
“…괜찮습니다. 저는 입이 무겁습니다.”
“아뇨, 애초에 감출 일도 아니에요. 이왕이면 만천하에 드러내고 다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스커트 형태의 파자마를 입고 한 쪽으로 머리를 땋아내린 로르텔은 평소와는 영 인상이 다르다. 냉철한 상인이라기 보단 일개 소녀 같은 모습이다.
언제나 품위를 유지해야하는 오필리스관이나, 상인으로서의 냉철함을 유지해야하는 엘테 상회 쪽과는 달리… 로르텔의 개인 별장에서는 얼마든지 편한 상태로 있어도 괜찮은 것이다.
이게 생각보다 좋고 편해서, 로르텔은 귀교 하기 전부터 은근히 들떠있었다. 그토록 많은 부를 쌓았지만, 어깨에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게 생각보다 많지가 않다.
“만천하에 드러내고 다니신다고요?”
“네, 그렇죠… 에드 선배와 가장 먼저 입을 맞춘 사람이 나다… 그렇게 떠들고 다니면서 기정사실화 시키는 것이 아마도…”
“…”
“…”
“…”
“…역시 그건 좀 아니네요. 저도 수치심이라는 게 있어요.”
능글맞고 여우 같은 모습을 잔뜩 보여주고 다니지만, 어찌됐든 로르텔도 그 나잇대의 소녀인다.
내가 누구랑 키스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닐 철면피는 못 된다. 어쨌든 연애 방면에서는 예니카보다 그리 낫다고 할 수준도 아니다. 오히려 허당에 가깝다.
“에휴….”
틈만 나면 에드와 마주치는 우당탕탕 좌충우돌 캠프 생활을 꿈꾸고 왔으나, 오자마자 핑크빛 분위기가 피어오르는 예니카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예니카와의 충돌은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긴 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골치 아픈 상황이다.
로르텔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꾸욱 누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올덱에서 밀린 일 처리하고, 고름들 좀 짜내고 왔더니 또 아켄섬은 아켄섬대로 내 예상이랑 완전히 달리 움직이고 있네요. 하루도 안심할 날이 없어요.”
“그… 로르텔 아가씨.”
“…왜요?”
“달리 어떤 수라도 쓰실 예정이신지…”
벨 치고는 꽤나 사적인 질문을 물어온다. 본디 실력이 출중한 메이드일수록 고용인과의 선을 잘 긋고, 그 이상으로 넘어오는 일이 없는 법이건만… 그만큼 벨은 뭔가가 절박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사실 벨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에드 로스테일러 주변의 개판난 이성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교통정리를 포기한 상태인 것이다.
그와중에 예니카와의 진전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책을 부리긴 했으나, 어쨌든 그 사실이 에드의 주변을 정리해주진 않는다.
오히려 혼란을 가속시켰으면 가속시켰지, 해결책이 되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벨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뭔가 꾸미고 계신가요.
“글쎄요… 한 가지 확실한 건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는 거네요.”
“…”
어렵다!
벨 마이아라고 해서 딱히 누구 하나를 응원하고 싶진 않다.
사실 에드 주변에 있는 여자들은 하나 같이 나름의 사연이 있거나, 복잡한 인생사를 거쳐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니카와 진전이 있을 때 박수를 치긴 했으나, 그것도 그냥 에드의 인간관계에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뻤을 뿐이다.
오필리스관을 관리하는 메이드장으로서 가장 가까이에서 뭇 소녀들을 지켜보았으니, 사실 에드 본인보다도 벨이 훨씬 더 그녀들을 잘 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벨은 중간에 끼어있는 인물에 지나지 않긴 하지만… 눈썰미 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로르텔 아가씨께서는 워낙 바쁘신 몸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사용인 된 도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로르텔의 말에 맞장구 치는 것 뿐이다.
안타까운 입장이지만, 벨이 주도적으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방학 때 올덱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올덱 쪽 일이 많이 급하신 모양입니다.”
“급하다기보단…”
로르텔은 뭐라 말을 더 하려다가 일단 입을 다물었다. 벨 입장에서는 그리 당황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제 아무리 마음 편한 상대라 할지라도 말을 골라야만 하는 입장이다. 오필리스관에서 일하다보면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고 산다.
로르텔 또한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로르텔은 더 특별한 입장이었다.
“올덱의 늙은 여우들은… 호시탐탐 뒤를 칠 궁리밖에 안하고 살거든요.”
이미 그녀는 전임 메이드 장 엘리스에게 한 번 뒤를 맞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전임 회주 엘테 케헬른의 뒤를 친 입장이고, 올덱의 수많은 상인들 또한 그런 로르텔의 뒤를 치려고 수작질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로르텔은 한층 더 조심스럽게 처신한다.
완전히 신뢰할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의 이해타산이 맞는 선에서 제휴 관계를 이어갈 뿐이다.
슬픈 일이지만, 로르텔의 인간관계란 평생토록 그런 식이었다.
“주기적으로 올덱으로 돌아가서 수작질하는 내부자들을 다 쳐내지 않으면, 어느 순간 배에 칼이 꽂힐지 몰라요. 권력의 무게가 무거우면, 그 자리를 탐하는 사람도 많아지거든요.”
“그럼 이번 귀가 시즌 때도 큰 홍역을 치르셨나보군요.”
“장부 조작이나 횡령 같은 건 귀여운 수준이에요. 상단 본부의 늙은 여우들은 저를 구세대 기득권자 엘테 케헬른이 남겨놓은 적폐 정도로 몰아가더라고요. 하긴, 제가 그 사람의 양녀였으니까… 그런 식으로 몰아갈 명분이야 충분하죠.”
벨은 그 말을 듣고 뭐라 대꾸해야할지 신중해져야만 했다.
아무래도 로르텔 입장에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 처신에 능한 벨도 꽤 난처한 것이다.
“어머, 난처하게 만들 마음은 없었는데. 미안하게 됐네요, 이런 우중충한 이야기나 하고.”
“아닙니다. 오필리스관에서 일하다 보면 복잡한 속사정을 가지신 분을 많이 봽니다. 너무 거북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여튼 벨 씨는 사람 마음을 누그러지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어요. 괜히 필요 없는 얘기까지 술술 꺼내게 만들고…”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로르텔이 안락 의자에 다시 몸을 묻자, 벨은 테이블 위에 남아있는 식사의 흔적들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어쨌든, 로르텔 아가씨는 제 자리와 안위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시는 것 뿐이지 않습니까. 당연한 일이고, 그런 것에 딱히 감정이 상하시거나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벨은 언제나 정론만을 말한다. 원론적이긴 하지만 결국엔 맞는 말이라는 뜻이다.
별 대단한 진실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그 건실함에는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묘한 힘이 서려있다.
“다들 먹고 살려고 분주한 세상이지 않습니까. 거기에 섞여살다 보면 좋은 일이 올 때도, 나쁜 일이 올 때도 있는 것이고요.”
“벨 씨 다운 말이네요.”
로르텔은 지그시 눈을 감고 한숨을 푹 흘렸다.
“돈과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나요. 정신을 차려보면 내 삶과 생활을 모두 침식해서, 결국 돈과 권력 없이는 일상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게 만들거든요.”
“저는 둘 모두 가져본 적이 없어서 공감할 수는 없는 입장이군요…”
“확실한 건 돈이든 권력이든, 있다가 없어질 바에는 처음부터 없는 게 나아요.”
로르텔이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무엇인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가.
그 의도가 조금은 읽히기 시작해서, 벨은 굳이 대꾸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이미 주변에는 돈과 권력에 꼬인 파리들밖에 없는데, 그 상태에서 돈도 권력도 모두 잃는다면… 남은 인생에는 끝없는 고독 밖에 안 남게 되거든요.”
“로르텔 아가씨는…”
“네, 저라고 뭐 다르겠어요. 저도 그게 두려운 거겠죠. 마법실력이고, 타고난 화술이고, 과거의 업적이고 다 부질 없는 것들이에요.”
로르텔은 글자도 겨우 읽던 유년시절 때부터 이미 상인들의 늪에서 살았던 자다.
“돈과 권력을 잃으면 제게 뭐가 남겠어요. 저도, 제 주변도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버리는 거에요.”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머, 부정해주신 건 고마워요. 다만, 저도 최소한의 자기객관화는 할 줄 알아요.”
안락의자에 파묻힌 로르텔은 평소보다도 더 기가 풀려있는 느낌이었다.
올덱에 다녀올 때마다 더욱 더 현실이 피부에 와닿는다.
결국 로르텔의 모든 권위는 돈과 권력에서 나온다.
어린 나이에 이루어낸 수많은 업적과, 그 손에 남은 이윤들이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로르텔의 눈치를 보게 만들고,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상회 직원들도, 거래처의 운영진도, 경쟁 상회의 회주도, 올덱 뒷골목의 지배자도, 범선을 책임지는 함장까지도… 로르텔이 구축해온 모든 인간관계의 핵심은 바로 그 돈과 권력에 있었다.
벨의 눈에 비친 로르텔은… 한 없이 고독해 보인다.
차가운 현실의 풍파 따위는 몰라도 될 나이다. 좀 더 실베니아 같은 낭만 넘치는 곳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도 잡아보고, 꿈도 꿔봐도 될 나이다.
아무것도 없는 길바닥에서 자기 힘만으로 딛고 일어나야 했기에, 너무 일찍 어른이 됐다.
썩 즐거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거에요. 부의 축적이니, 능력의 증명이니 하는 뭐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에요.”
“…”
“나한텐 이거밖에 없으니까.”
가벼운 몸으로 세상을 노니는 음유시인에게는 목에 건 류트가 최고의 보물이다.
길거리에서 동냥을 하는 거지는 동전을 받을 때 쓰는 빈 깡통이 최고의 보물이다.
로르텔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규모가 조금 더 방대할 뿐이다.
나한테 남은 게 이거밖에 없으니, 행여나 누가 채갈까봐 품에 꼭 안고 놔주지 않는… 어린 아이의 앙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음흉하고 잔악한 여우 소리를 듣는 자신의 흉한 내면을 아이가 떼쓰는 것에 빗대는 건 너무 경우에 맞지 않는 비유일까.
자조적인 미소를 흘리며, 로르텔은 벽난로의 불을 쬐고 있었다.
“에드 도련님이 있잖습니까.”
“…”
“적어도 에드 도련님만큼은 로르텔 아가씨라는 사람 그 자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벨은 예리하다. 언제나 맹점을 찌르고 들어온다.
“그래서 에드 도련님께 그토록 집착하셨던 거 아니십니까?”
늘상 캠프의 모닥불 가에 앉아, 단검으로 활을 다듬고 있던 소년.
왠지 모르게 현실에서 초탈해 있는 것 같은 남자다.
세 닢 금화든, 억만금이든 모두 심드렁한 눈으로 쳐다보며, 로르텔에게 안부 인사나 툭 던질 것 같다.
로르텔의 세계관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사람이다.
차가운 올덱의 길바닥을 벗어나 실베니아가 있는 아켄섬으로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대해봤지만, 그 중 가장 이례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가 없이 주고 받을 수 있는 신뢰란 무엇인가. 돈을 주고 사려면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가.
돈을 주고 사지 않았기에 얻을 수 있는 상호 신뢰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세상에는 에드 도련님 같은 분도 꽤 계십니다.”
“…”
인간이란 생물은 참으로 슬프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더 갈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기에, 로르텔에게 있어서 에드와 교감을 나누는 일은 값비싼 유리 세공품을 손에 들고 걷는 것처럼 초조한 일이다.
한 끗 빗나가 사이가 엇갈리게 되면, 에드와 로르텔의 관계는 이해타산의 논리로 규정되어 버리는… 그런 거래 관계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이해 관계에서 초탈한 채 퍼주기만 한다면, 결국 돈으로 유지되는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릴 것이다.
그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온갖 상업전선에서 처세술을 단련해온 로르텔에게도 숨이 막히고 긴장되는 일이다.
이쪽으로 가든, 저쪽으로 가든, 조금만 삐끗해도 에드와의 상호 신뢰는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두렵다.
두려움.
그렇다. 그 감정의 이름은 두려움이다.
마치 주먹으로 모래를 한 웅큼 꽉 움켜쥐고 있는 느낌이다. 조금만 방심해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 버려, 흙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뒤늦게 주먹을 펴봐야 그곳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사실, 요즘들어 평생토록 못 느껴봤던 오만가지 감정을 다 느끼고 있어요.”
“저런. 마음 고생이 심하셨군요.”
“아뇨, 고생스럽진 않아요. 오히려 즐겁다는 게 알맞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네요.”
상실감, 질투심, 독점욕, 연심, 두려움, 희열, 두근거림, 긴장, 불안감, 성취감, 안도감.
질척한 상업의 세계에서 살아오느라 차가운 기계장치처럼 굳어버린 심장에 윤활유를 들이붓는 느낌이다.
누구를 만나든 벽을 세우고, 선을 그은 채, 그 밖에서 상대의 동태를 살피는 상인의 삶을 평생토록 영위해왔다.
그런 로르텔에게 이런 오만가지 생각과 감정은 오히려 각별하다. 마치 오랜 시간 장님으로 살았던 자가 수십년 만에 총천연색의 세상을 다시 보았을 때 같은 느낌이다.
협상 테이블 너머의 거래처 대표가 아닌, 모닥불 너머에서 활을 다듬고 있는 소년을 생각한다.
계약서 상의 독소 조항을 찾거나, 우리 측에 이윤이 얼마나 떨어질지 생각하는 게 아니라… 소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소년의 고민은 무엇인지, 오늘은 어떤 식사를 했는지, 내일 어떤 약속을 잡을지 따위를 생각한다.
타닥대는 벽난로 소리가 마치 캠프의 모닥불 소리처럼 귀를 간질여, 로르텔의 몸에 온기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눈을 감고 평온히 쉬고 있는 로르텔을 보며, 벨은 더 말을 걸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에드와 밀고 당기는 모든 순간 순간이 로르텔에게는 보물같은 시간이라 한다면, 그 또한 가치있는 것이리라.
애초에 그 가치 판단은 벨이 하는 것이 아니다. 메이드의 직무는 가사와 생활 보조일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벨은 분주히 퇴근 준비를 했다.
*
“그나저나, 엘테 상회 쪽에서 식료품 공급을 받았는데… 단가가 많이 세졌더군요. 다음부터는 납품 단가에 맞춰서 발주량을 좀 줄이거나, 학사 본부에 예산 증액을 신청해야할 것 같습니다.”
“어머, 그건 뭐… 그렇게 됐어요. 모종의 사정으로 아켄섬 주변 물가가 대세 상승 하고 있거든요.”
“그렇군요… 오늘 새벽에 단가표를 확인해 봤다가 정말 많이 놀랐습니다. 조속히 오필리스관 쪽에서도 대처를 마련해 볼테니 당분간 유통량 자체는 유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식사의 질이 나빠지는 건 오필리스관 운영 방침 상 용납될 수 없는 사안이라서…”
일 얘기는 최대한 간략하게.
애초에 개인 별장에 있는 로르텔은 휴식을 취하는 입장이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물류 유통 이야기를 나누려 들 정도로 눈치 없는 벨이 아니다.
모든 기본적인 업무를 마치고, 벨도 오필리스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문을 열고 밖을 나설 때.
작별 인사를 나누기 직전에, 스리슬쩍 일 얘기를 섞어넣는 것으로 깔끔하게 볼 일을 마칠 생각이었다.
“흐음… 식료품 납품 단가가 오를 거라는 예상은 했는데… 그렇게 부담스러울 정도였나요?”
“단가표 서류에 로르텔 아가씨의 결재가 되어있어서 인지하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저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으니까요. 제가 없는 동안 실베니아 지부의 실무 영역은 저희 상회 쪽 행동 요원인 듄이 도맡아서 하고 있어요. 결재도 아마 듄 선에서 전결(專決)된 거겠죠.”
로르텔은 나풀거리는 잠옷의 옷깃을 휙 잡아 끈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야기했다.
“다만, 물가의 상승세 자체는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내일 한 번 제가 직접 확인해보긴 해야겠어요. 상회 지부의 서류실에 자료가 남아있으려나.”
“어제 오늘 중에 전결된 사항일테니 아마 남아있을 겁니다.”
“알았어요. 유통량 자체는 유지해볼게요. 오필리스관은 우량 거래처니까 그 정도 편의는 봐드려야죠. 보아하니 유통량이 워낙 커서 적자가 날 것 같지도 않고.”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벨은 로르텔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일 얘기는 여기서 마무리 지으면 될 듯 했다.
“아 맞다, 벨 씨. 다음에 올 때는 와인도 몇 개 챙겨다 주세요. 제가 오필리스관에 있을 때 개인적으로 방에 보관하던 종류로요.”
“가져오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만… 보관하실 수 있으십니까?”
“별장 지하에 자그마한 와인 저장고를 만들어달라고 개인적으로 지시는 해뒀었는데요. 아직 확인은 못해봤지만…”
“아직 제가 지하 열쇠를 못 받아 왔습니다. 지하 쪽은 최근에 작업이 마무리 되어서, 아직 제대로 청소도 못해뒀거든요.”
“그런가요. 그건 좀 아쉽게 됐네요. 다음에 열쇠 받아서 뒷정리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로르텔의 인사를 받으며 문을 닫고 별장을 나왔다. 꽤나 깔끔하고 멋지게 지어진 로르텔의 별장은 늦은 밤에 보아도 그럴싸한 태가 났다.
반대쪽을 보니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는 에드의 캠프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미 한 밤 중이건만 아직도 모닥불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보니 모닥불 주변엔 금발의 소년이 앉아 있었다. 아직도 취침하지 않고, 불을 가만히 바라본 채 숲의 풀내음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 가득한 숲 한가운데에서, 그렇게 소년은 홀로 앉아있었다.
“안 주무십니까?”
벨은 짐들을 잘 챙겨들고, 캠프를 가로질러 지나가면서 에드를 스윽 바라보았다.
에드는 단검으로 활을 다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장비 다듬는 건 그렇게 노고가 들어가지도 않아. 재활 운동으로 딱이야.”
“별 말은… 안했습니다.”
“…”
벨은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에드는 말린다고 해서 말려질 사람이 아니다.
다만, 벨의 고민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있었다.
에드와의 관계성에 깊은 의미를 두고, 그 교감 자체만으로도 안식을 느끼는 로르텔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복잡해지고 만 것이다.
로르텔이든, 예니카든, 루시든 모두 나름대로 에드에게 기대고 있는 부분이 있다.
허나, 에드의 몸도 마음도 모두 하나 뿐이다. 왜 인간은 셋으로 갈라질 수가 없는 것일까. 신도 참으로 야속하지.
복잡미묘한 기분이 되어, 벨은 에드의 맞은 편에 잠시 앉았다.
“…왜 그렇게 고된 표정을 짓고 있는거냐? 거… 시간 좀 남으면 활도 좀 다듬을 수도 있지… 너무 무리하지는 않을테니까 걱정은…”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벨은 다소곳이 앉아서 괴로운듯한 얼굴로 한참동안 에드를 바라보았다.
“혹시… 분신술 같은 거 쓰실 줄 아십니까?”
“… 너 뭐 잘못 먹었냐.”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캠프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