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74)
엘테 상회 탈환전 (3)
마차가 커서 그런지 흔들림이 거의 없다.
내부도 푹신한 솜이 가득 들어있는 소파가 있고, 정중앙에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원목 테이블까지 붙어있었다.
천장에서부터 아리땁게 늘어져있는 레이스 장식과 벽면에 웅장하게 장식된 금색 문양들까지…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토록 한 번을 타보기도 힘든 이런 마차에, 페니아 황녀와 루시 메이릴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루시는 테이블에 얼굴을 얹고 팔을 쫙 벌려서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른하게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고, 페니아 황녀는 그런 루시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재학하면서 루시 메이릴에 대한 소문, 그리고 그녀의 평가는 익히 들었다.
유년 시절은 라멜른 산맥지대에서 재야에 묻힌 천재로 살았다. 아켄섬에 와서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실력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한 인재다.
이번 방학에 황실에서 신나게 깽판을 쳐주는 바람에 황실 인사들은 고역을 치렀다.
악신 메뷸러를 혼자서 박살내버린 영웅만 아니었어도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뤄낸 업적과, 본인이 가진 실력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함부로 대할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악동이었다.
“…배고프네.”
황실에서의 끔찍했던 나날을 생각해보니 페니아 황녀는 절로 한숨이 나오려했다.
루시는 그런 페니아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멍한 눈으로 배고프다 읊조릴 뿐이다.
“그렇게까지 난리를 피울 이유는 없었잔아요, 루시 메이릴. 그냥 점잖게 말로 했어도,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네가 말해도 안 듣는데, 내 말이라고 해서 들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일국의 황녀에게 말을 놓아버리는 루시의 패기로움은, 주변 신하들이 마른 침을 삼키게 만든다.
그러나 루시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난 말로 해결하는 거 잘 못해.”
그거야 말로 참으로 공포스러운 발언이다.
페니아 황녀는 한숨을 푹 쉬며 더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저 반대 쪽 창문을 바라보며 페니아 황녀의 귀굣길을 호위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볼 뿐이다.
“…”
아켄섬에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거리 감각이 별로 없는 페니아 황녀에게는 이 귀굣길이 마치 기약없는 기다림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루시가 황실에서 난리를 피워버린 바람에, 루시가 대놓고 옹호하는 에드 로스테일러한테까지 황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 느낌이다.
안 그래도 로스테일러 가문의 살아남은 후계자라는 포지션이 특이한데, 구국의 영웅조차도 기를 쓰고 그를 옹호하려 드니… 그 정체나 뒷배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셀라하나 페르시카의 시선도 썩 묘해지는 게 느껴져, 페니아 황녀는 더더욱 고민이 됐다.
“흐음…”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기묘한 위화감이 생겼다. 평소와 같은 귀굣길인데 뭐 이상할 게 따로 있을 리가 없다.
병사들의 얼굴도 익숙하다. 깔끔하게 도열한 채 마차의 양 옆을 지키며 전진하는 호위대의 모습은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그대로다.
그러나… 규모가 좀 크다.
“이번 귀굣길에는 생각보다 호위대가 많이 붙었네… 그럴만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로스테일러 가문의 일은 큰 재앙이긴 했으나, 이미 어느 정도는 결론이 난 이야기다. 뒤처리만 좀 남아있을 뿐.
의전은 중요하지만 황실 호위 인력을 낭비하는 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니다. 다음부터는 좀 더 단출하게 호위대를 꾸려도 괜찮다고 지시해둘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페니아 황녀는 마차 안에서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가끔씩 루시가 잠꼬대를 하는 소리만 내부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정신이 들자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팔목 부근의 압박감이었다.
로르텔은 몽롱해진 의식 속에서 겨우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로르텔의 지시를 무시하고,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던 듄의 모습이다.
그 뒤로 기억이 없다.
습격을 당한 것인지, 마법에 의해 의식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피곤해서 곯아떨어진 것인지.
판단할 근거조차도 없다. 그만큼 깔끔하고 확실하게 처리 당한 것이다.
허나, 이윽고 뒷머리에서부터 강한 통증이 올라오자 깨달았다.
듄이 로르텔의 말을 무시한 채 눈만 부릅뜨고 있었던 것은, 그가 시선을 끄는 사이에 로르텔을 습격할 내통자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소는 바뀌지 않았다. 로르텔의 개인 집무실이다.
상대적으로 로르텔이 안심하고 있는 곳이니만큼, 습격하기엔 최적의 장소다.
로르텔은 시야가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상황을 판단했다.
몸이 자유롭지 않다. 양손은 의자 뒤로 넘겨서 묶여있는 상태다.
코 끝에 감도는 향취는 밤나비꽃 향초의 냄새다. 마력 흐름을 꼬아버려서 일시적으로 마법사를 제압할 수 있는 수단으로 유명한 물건이다.
다만, 손톱 하나 만한 크기에 금화 열댓개는 될 정도로 고가품인데다가, 구하기도 쉽지 않고, 장기간 향초의 냄새를 맡게 만들어야 효과가 들어 까다롭기까지 하다.
이런 걸 구해서 피워올릴 정도면, 꽤나 오래 전부터 계획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안 어울리는 짓을 하는구나, 듄.”
로르텔은 낮은 목소리로 테이블 건너 편을 보았다.
접견용 의자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내. 사이즈가 넉넉한 베레모와, 호리호리한 인상, 비단 붉은 양털 조끼에 새하얀 셔츠, 가죽 바지에 이르기까지… 관상만 보아도 상인 그 자체였다.
“내가 올덱 일에 집중하는 사이에 재밌는 무대를 꾸며놨네.”
“포박한 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무대 매너가 좋은 편은 아니라서.”
“하여튼, 회주 대리는 참 바쁜 자리야. 상회 관리에, 재고 확인에, 인사 관리, 장부 관리, 영업에 이권 분쟁, 거기다가 하극상까지.”
누가 보아도 일촉 즉발의 상황이건만, 로르텔은 여유로운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너까지 듄 쪽에 붙은 거니, 리엔나?”
듄의 뒤에는 쭈뼛거리는 소녀가 하나 서있었다.
로르텔의 담당 비서, 리엔나 클렘슨의 모습까지 보였다. 서류를 잔뜩 안고 듄의 뒤에 숨듯이 서있는 모습은… 언제나 소심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합리적인 판단은 아닌데.”
“글쎄요. 그건 봐야 알겠지요.”
적당히 양발을 벌린 채, 양 팔꿈치를 무릎에 올리고는 바닥을 보고 있는 듄.
평소처럼 얍실한 모습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에 로르텔 또한 미간을 찌푸렸다.
경박해보이는 모습을 보일 줄 아는 것도 상인으로서의 자질이다. 적어도 듄은 그런 재주는 타고난 자다.
허나, 평소에 어떤 모습인지는… 상회 직원이 아니고서야 잘 알 수 없다.
“풍경도 아름답고, 낭만도 넘치는 이 실베니아에 오래 있으셨더니… 독기가 많이 빠지신 모양입니다.”
듄은 상황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로르텔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써주었다. 애초에 그런 인간이었다.
“아니면 올덱 쪽 상황이 너무 급하셨던 것인지… 저를 너무 쉽게 믿으셨습니다.”
“믿는다고? 내가, 너를?”
로르텔은 어이 없다는 얼굴로 이야기 했다.
“나는 아무도 안 믿어. 너라고 해서 다를까.”
“…”
“너랑은 꽤 오래 동업했지만… 네 속내가 검은 걸 내가 모르고 있었을까봐? 왜, 장부에서 몇 푼 씩 빼돌려서 술 좀 사고 사치품 좀 샀더니… 이제 내가 봉으로 보였어?”
– 쿠궁, 쿵.
로르텔이 말하는 사이에 상회 여기 저기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개학이 며칠 안 남긴 했지만 아직은 방학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은 비수기인 것이다.
그럼에도 분주해 보이는 상회 분위기를 보고, 로르텔은 뭐가 그리 바쁜 것인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네 횡령 증거들이 이 상회 안에 남아 있을 것 같아? 상식적으로 외부로 빼돌려 놓는 게 당연하지.”
“…”
“말했잖아, 나는 아무도 안 믿어.”
가만히 듣고 있던 듄은, 나무 바닥을 가죽 신발로 한 번 스윽 훑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뭐, 상회 내부를 최대한 뒤져보라고 지시하긴 했지만… 저도 그 증거를 발견할 거란 생각은 안했습니다.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고요.”
“뭐?”
“구구절절 이야기 해서 뭣하겠습니까. 다만, 회주 대리 자리에서는 이만 내려오는 게 좋으실 겁니다.”
로르텔은 의아한 감정을 애써 감췄다. 여기서 얕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다만, 듄도 자기 속내는 최대한 감추고 있다.
대체 왜 갑자기 로르텔을 배신한 건지, 뭘 믿고 이런 짓을 하는 건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로르텔을 궁지에 몰아넣을 것인지.
아주 사소한 단서조차도 드러내지 않는다. 듄은 로르텔이라는 자가 얼마나 영악한 여우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미약한 증거만 잡아채더라도 순식간에 전체적인 그림을 전부 유추해내버릴 것이다.
그러니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아야 한다. 이상한 점을 눈치 채기 전에, 포박해서 가둬놓아야만 한다.
듄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미 이 상황만으로도 최소한의 정보는 유추해낼 수 있었다.
‘놈의 뒤에 뭔가가 있다.’
로르텔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사람을 믿지 않는 로르텔이 사람을 다루는 방법은 ‘상호 이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누가 뭐라해도 엘테 상회 최대의 실권자인 로르텔을 따르는 것이, 그 자에게 이득이 되기에 비로소 로르텔에게 가담하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득될 것이 있는 관계에서라야 비로소 신뢰라는 것이 설 수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듄도 깊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하등 로르텔을 배신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전조도 없이 로르텔의 뒤를 치게 된 것에는… 외적인 배경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일 터다.
뿐만 아니라, 다짜고짜 로르텔을 잡아서 포박해버리는 파격적인 행보.
이것은… 시간이 듄의 편이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로르텔을 잡아서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놓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로르텔은 회주 대리 자리에서 쫓겨나게 될 거라는 모종의 확신.
외부적인 조치가 취해져서, 그게 작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 그 전까지 모든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 로르텔을 포박해놓은 것이다.
로르텔은 순식간에 여기까지 유추해내버린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그 잠깐의 순간에 일어난 사고 흐름이었다.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포박을 풀어헤치고 탈출하는 것이다. 로르텔이 상회에서 자리를 비운 사이, 듄을 중심을 아켄섬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판단해낼 필요가 있다.
“자충수를 두는 구나, 듄. 당장 내가 자리를 비우게 되었는데 아무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아?”
“학사 쪽 출석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상회 내부 인력도 그렇고요. 전부 수를 써두었으니 허튼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일이 복잡해지는 건 피차 간에 좋지 않습니다.”
“글쎄, 내 입장에선 일이 복잡해지는 게 더 좋은 것 같은데.”
“뭐, 입장 차이를 고려해보면 그렇긴 하군요.”
듄은 그대로 스윽 고개를 든 채 이야기했다. 평소처럼 경박해 보이는 모습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일 자체를 만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두었지만요. 로르텔 회주 대리의 주변에 있는 모든 자들은 저에게 가담했거나, 아니면 회주 대리가 없어져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수를 써두었습니다.”
“꽤나 오래 준비한 계획인가 보네.”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로르텔은 팔에 힘을 줘서 슬쩍 꺾어보았지만, 단단히 동여맨 밧줄은 끊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은근한 곁눈질로 밧줄을 끊을만한 것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믿지 않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목숨 걸고 구하러 올 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희도 로르텔 회주 대리에게 더 이상 해코지를 하고 싶진 않군요. 조용히 앉아 계시다가, 조용히 은퇴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젠틀한 척 하기는. 똑같이 비열한 배신자인 주제에.”
“회주 대리께 직접 그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묘하군요.”
이미 엘테의 뒤를 쳐서 회주 대리의 자리에 앉은 로르텔이다.
배신자의 낙인이 찍힌 그녀가, 듄을 욕한다고 해서 거기에 정당성이 부여될 리도 만무하다.
자신은 이미 배신의 굴레에 떨어져 버린 사람이다.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기에, 로르텔은 헛웃음을 흘렸다.
“평정심을 잃지 않으시는군요.”
“네가 그걸 바라고 있잖아. 그래서 더 침착해지네. 원래 상인이란 족속들은 배배 꼬여 있어서, 상대의 의도대로 되어주는 법이 없는 거잖니.”
“글쎄요. 제 눈에는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르텔은 이런 극한 상황까지 와서도 절대로 이성을 잃지 않는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자가 바로 로르텔 케헬른이다.
가장 가까이서 로르텔을 보좌해온 듄이기에 그 사실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로르텔은 올덱의 늙은 여우들 보다도 훨씬 더 감각에 날이 서있는, 능구렁이 그 자체다.
그녀를 속여넘기려면 며칠, 몇 달 준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족히 몇 년은 배신의 칼날을 갈아야만 생채기라도 겨우 입힐까 말까한 수준이다.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그녀의 강철과도 같은 이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고, 그 어떤 위기에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멘탈은 그녀를 거상의 자리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이다. 그 부분부터 어떻게 해결하지 않으면… 로르텔과의 대결 구도에서 절대로 우위를 잡을 수 없다.
그렇기에, 듄은 그 누구보다도 냉철하게 로르텔이라는 인물을 분석한다.
금화에 영혼을 판 악마와도 같은 로르텔에게 남아있는, 사람의 마음을 찾아낸다. 파고들 여지란 그런 곳 밖에 없다.
“로르텔 회주 대리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듄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그렇지도 않던데요.”
“…뭐?”
“리엔나.”
듄이 리엔나 비서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자, 리엔나는 품에 안고 있는 서류 뭉치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양식을 보아하니 계약서 합의안이다. 그 항목은 많지 않았지만, 형태 만큼은 그럴싸하게 만들어져있다.
그대로 로르텔의 집무용 테이블에 합의서를 올려놓은 리엔나는.. 다시금 멀찍이 떨어져서 듄으 뒤로 돌아가서 섰다.
“이건…?”
“에드 로스테일러.”
그 이름이 듄의 입 위에 올라오자, 로르텔은 살짝 동공을 떨었다.
“그는 저희한테 가담하지 않을거라 생각했습니까?”
“뭐…?”
듄은 협상과 타협의 재능을 타고난 인간이다.
온갖 이해관계 사이에서, 상대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해 서로 간에 윈윈 구도를 만든다.
그런 일을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해온 인간이기에, 잘 알고 있다.
협상과 타협은 상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물은 쉽게 회유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심지가 곧고, 자기 생각이 확고하며, 이해 타산에서 어느 정도 초월해 있는 데다가… 물리적인 강함까지 갖추고 있는 자다.
로르텔과는 꽤 교감을 나눈 사이이기에, 그에게 배신을 종용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결국 협상과 타협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걸려 있다.
로르텔 케헬른은 리엔나 비서가 건넨 서류를 슬쩍 들어보았다. 미세하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 엘테 상회 실무 담당 듄 그렉스와 에드 로스테일러 사이의 내부 정보 거래 및 협력 관계 구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1. 현 엘테 상회의 회주 대리 로르텔 케헬른의 내부 비리 고발에 대해, 내부 고발자 듄 그렉스 측에서 보내는 일체의 정보 공유 요청에 에드 로스테일러는 모두 협조한다.
2. 현 엘테 상회의 전권 대리인 듄 그렉스는, 에드 로스테일러가 실베니아를 졸업할 때까지 들어갈 모든 학비, 생활비, 기타 제반 비용을 전액 지원 보장한다.
3. 또한, 에드 로스테일러의 ‘조기 졸업’ 요건을 충족시키고, 그의 조기 졸업을 위한 모든 필요 자금 및 준비 사항에 대해 적극 지원한다.
4. 현 엘테 상회의 전권 대리인 듄 그렉스는 졸업 이후 에드 로스테일러의 정착 자금 및, 필요한 제반 시설을 적극 지원한다.
5. 에드 로스테일러는 공식적으로 엘테 상회 소속의 직원 신분이 되어, 졸업 이후에도 이 신분을 최소 5년 이상 유지한다.
6. 에드 로스테일러는 엘테 상회 쪽의 우호 세력 및 유력자들과의 만찬, 회동, 회담 자리에 언제나 참석해야만 하며, 그들과 우호 관계를 이어나가야만 한다.
보란 듯이 듄과 에드의 유착 관계를 묘사하는 듯한 서류다.
로르텔은 일순 동공이 떨렸으나, 금방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항목들을 얼른 분석해냈다.
듄 그렉스는 사람을 분석하는 능력이 있는 자다.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물을 철저히 분석하고, 정보를 수집해서, 그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출해낸 것이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제 1 관심사는 졸업, 그리고 성장이다.
마치 졸업에 큰 의미라도 부여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모든 일들을 졸업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실베니아 졸업이 그의 인생에 커다란 방점이 되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그에게 ‘조기 졸업 자격’을 제안 하는 것은… 에드 입장에서는 도저히 거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에 필요한 자금 및 졸업 이후에 정착 자금까지 전부 지원해준다. 사실 금전적인 문제야 크게 중요하진 않다. 로르텔이라 할지라도 그 정도 지원은 해 줄 의향이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엘테 상회의 전권 대리인이 조기 졸업 같은 걸 보장해준단 말인가.
학생이 졸업할지 어떨지 판단하는 것은 실베니아 학사다. 엘테 상회의 전권 대리인이 아니다.
‘실베니아 학사 쪽이 내통자인가…?’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교장 오벨 포시어스는 이런 식의 협상이 먹혀들 상대가 아니다.
애초에 엘테 상회와 실베니아 학사는 그렇게 사이가 좋지도 않은 편이며, 설령 어떻게든 협상 자리를 마련해보았다 하더라도… 겨우 학사 하나 편으로 돌렸다고 로르텔을 적으로 돌리는 건 너무 위험한 판단이다.
거기다가 이 협상안의 항목들은… 지나치게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물 개인에게 집착하고 있다.
듄 그렉스와 에드 로스테일러는 접점이라고 할만한 게 전혀 없는 사이다.
굳이 에드를 졸업 이후 5년이나 엘테 상회에 묶어 놓을 이유도, 우호 세력으로 만들어 놓을 이유도 없다. 듄의 제 1목표는 돈이지 권력이 아니다.
‘수상해…’
거기까지 읽고 나서, 로르텔은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억지만 가득한 협상안이네. 이런 거에 사인을 할 사람이 세상에 있을 것 같아?”
“이미 체결된 협상안입니다.”
“….뭐?”
듄은 더 말하지 않고, 로르텔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로르텔 케헬른이 당황하는 듯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학교가 다 부숴져가는 상황에서도 평정을 지켜낸 자다.
이 정도 변수에 마음이 흔들릴 자가 아니건만, 로르텔의 시야는 크게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협상안을 다음 장으로 넘기자, 큼지막하게 에드의 사인이 되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호흡하는 걸 잊었다.
이따금씩 꿈에 나오는 엘테 케헬른의 말이 등줄기를 타고 아스라하게 퍼져나간다.
배신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면, 결국 배신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되리라.
모든 것을 잃고 바닥으로 쳐박힐 때, 네게 손 내밀어 줄 자가 있을거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말들이 귓가에 맴돌아, 차갑게 식은 가슴에 비수를 박아 넣었다.
“꽤나 그럴싸하네.”
위조된 문서다.
어렵사리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그는 지금 이 엘테 상회의 건물에 와 있습니다.”
듄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런 듄의 반응에 로르텔은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여기서 어떻게 더 화두를 이어가야할지, 잠깐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생각의 흐름이 끊기고 만다.
평정심을 잃은 로르텔은 쉽게 보기 힘들다. 상업 전선에서의 그녀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여우 그 자체다.
그러나, 눈의 초점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져가는 느낌에… 로르텔은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만 했다.
– 끼익
그 때, 문을 열고 들어온 자가 에드 로스테일러였다.
훤칠한 외모의 금발 귀족은… 집무실로 조용히 걸어들어와, 리엔나 비서에게 서류 몇 개를 건네 받았다.
엘테 상회 직원 매뉴얼과 여러 근로 계약서들이었다.
“에…드 선배님…?”
표정에 미동은 없다.
로르텔을 바라보는 에드 로스테일러는… 늘 그랬듯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그는 자그마한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연갈색 망토의 겉면에는, 엘테 상회의 직원을 상징하는 자그마한 저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미 그는 엘테 상회의 직원 신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상황을 관망하는 것.
소름끼칠 정도로 냉철한 로르텔의 그 이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듄의 뒤에 서서 서류를 받아든 에드 로스테일러의 모습이… 로르텔의 시야에 한 가득 들어온다.
그는 로르텔을 심드렁한 얼굴로 바라보며 이야기 한다.
“그렇게 됐다.”
기괴한 각도로 얼굴을 틀어대며 로르텔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던 엘테 케헬른이 나오는 악몽.
잊을만 하면 떠오르던 꿈이 로르텔의 뇌리에 각인되어 간다.
끝끝내 바닥에 처박히게 되면, 결국에 네 손을 잡아주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 저주와도 같은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 ‘일단 넌 기숙사로 돌아가서, 내가 말한 대로 해라.’
갑작스럽게 찾아온 엘테 상회의 비서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에드 로스테일러는 아일라를 기숙사로 돌려보냈다.
“갑작스러워서 뭐가 뭔지 모르겠네…”
우등생 기숙사 로레일관.
나름대로 깔끔하게 청소된 복도를 가로지르는 아일라의 손에는, 간단한 필기 도구와 종이가 들려 있었다.
수업 필기는 많이 했어도 편지를 써보는 것은 오랜만이라, 아일라는 다소 묘한 느낌이 들었다.
“흐음…”
엘테 상회와 에드 로스테일러 사이에 오갔던 대화는 영 심상치 않았지만, 아일라 입장에서는 이해 못할 내용이 훨씬 더 많았다.
– ‘…’
– ‘에드 선배님, 뭘 그렇게 고민 하세요?’
다만, 엘테 상회와의 이야기가 끝난 뒤, 카페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턱을 쓸며 생각에 빠진 에드 로스테일러의 모습은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 ‘상황 파악 중이다.’
에드의 그런 진중한 모습을 보는 건 또 처음이라, 아일라는 다소 당황스러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