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79)
에드 토벌전 (2)
― ‘오늘 생활동 쪽에 볼일 있어서 나갔다 와야 되거든. 그러니까 내일 오전까지는 나 찾지마.’
자유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는 잃어봐야 안다. 클레비어스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딱히 본가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학교에 남은 것이 문제일까.
클레비어스는 방학 기간 내내 엘비라한테 끌려다니며 학생들 간의 사교회에 참석하거나, 기본 예절 교육을 수강하는 등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던 것이다.
태생적으로 음침한 클레비어스가 좀 밖으로 나다닌다 해서 뭐 얼마나 사람들의 환심을 사겠냐만은, 엘비라는 이런 건 경험을 차곡차곡 쌓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끝까지 클레비어스의 멱살을 쥐어댄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클레비어스는 엘비라에게 저항하지 못한 채 방학 내내 어울려 주었는데, 개학이 다가워지고 나니 엘비라도 나름대로 바빠졌는지 클레비어스에게 신경을 쓰는 시간이 줄었다.
“이게… 자유…?”
그 지옥 같던 엘비라의 강행군도 멈추고, 홀로 오필리스관의 개인실에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익숙한 방구석의 어둠이 클레비어스를 맞이한다.
멍하니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던 클레비어스는 감동의 물결이 밀려올라왔다. 코 끝이 찡해서 훌쩍거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누워있는 게 얼마만인가. 언제나 득달같이 달려들던 엘비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가슴 한 켠이 후련해진다.
“….”
그렇게 클레비어스는 한동안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시각은 야심한 새벽이다.
원래 클레비어스는 야행성이었다. 익숙한 밤의 어둠에 파묻혀서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기로 했다.
감도는 정적.
언제나 쫑알쫑알 시끄럽게 굴던 엘비라가 없으니, 늘 그랬던 것처럼 조용한 방으로 돌아왔건만..
그곳에 남아 있는 건 안식이라기보단 공허였다.
“나도 드디어 미쳤구나.”
굳이 사람과 친해질 필요는 업다. 어울리지도 않게 외향적인 활동을 일삼아봤자 남는 건 상처 뿐이다.
클레비어스에게 있어서 대부분의 인간관계란 상처로 끝이 났기 때문에, 엘비라와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하고 만다. 지금은 아직 파국을 맞이하지 않았을 뿐이다.
클레비어스와 교감을 나누었던 자는 대부분 그 말로가 좋지 않거나, 아니면 클레비어스를 경멸하게 되었다.
클레비어스 스스로도 자각을 하고는 있다. 자기는 누군가가 호감을 가질만한 인간상이 절대로 아니다.
그렇기에 클레비어스는…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 게 일상이었던 것이다.
굳이 인간 관계를 넓혀가는 기행 따위는 하지 않는다.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삶의 방식이란 게 있다.
“…”
그렇게 스스로의 껍질을 더 단단하게 하며, 음침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엘비라 한 명 없다고 이렇게까지 평화롭다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그러고보면, 늘상 바쁘게 뛰어다니던 엘비라가 왠 일로 자리를 비웠는가.
사실 썩 후련하지 않다.
매번 조잘조잘 대며 클레비어스에게 일거수일투족을 다 이야기하는 엘비라 아니던가.
오늘 간식은 뭘 먹었다는 둥, 생활동에 새로운 가게가 들어왔다는 둥, 클레비어스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수다스럽게 늘어놓는 엘비라의 모습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러나 갑자기 입을 다물고 사라져버리는 엘비라의 기행에, 클레비어스는 딱히 좋은 예감이 들지는 않았다.
이런 한밤 중에 생활동에 가서 뭘 한단 말인가. 늦은 시간에 생활동에 가봐야 모든 시설들은 다 문을 닫았을 터.
뿐만 아니라, 사라지기 직전에 연금술 시약이나 마공학용품을 잔뜩 챙기는 엘비라는… 누가봐도 전투를 준비하는 듯 했다.
“…또 무슨 쓸데 없는 짓을 벌려놓았길래…”
그리 중얼거리며 클레비어스는 방 창문을 열어보았다. 오필리스관 고층에서 맥세스 대교 방향을 바라보면 생활동의 모습도 언뜻 보이지만, 극히 일부일 뿐이다.
“됐다. 내가 신경써서 뭐하냐.”
듣는 사람도 없건만, 클레비어스는 그리 중얼거리고는 다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지금은 오랜만에 손에 들어온 자유를 만끽해야할 시기다.
클레비어스는 옆으로 돌아누운 채 몸에 감도는 편안함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여전히 방의 정적은 그의 뒷목을 아슬하게 간지럽힌다.
열려진 창문으로 여름 밤의 바람이 들어온다. 커튼을 한 번 휘날리게 만들더니, 클레비어스의 뒷머리에 부딪힌 뒤 흩어진다.
클레비어스는 그대로 누워서, 한참 동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
*
“가감 없이 말해라, 로르텔. 상회 운영하면서 뒤가 구린 일을 하거나, 꼬투리가 잡혀서 끌어내려질만한 일 한 거 없냐? 숨기는 거 없이 다 말해줘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뒤가 구린 일은 너무 많이해서 뭘 하나를 꼽아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면서도 발걸음 속도는 늦추지 않았다.
재빠르게 계단을 타고 올라오며 4층에 도달하자, 직스가 밀고 들어왔던 천장 구멍이 보였다.
터프하다고 해야할지, 무식하다고 해야할지. 보란 듯이 천장에 뻥 뚫린 구멍에서 달빛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직스가 매어두었다던 밧줄도 눈에 들어왔다. 높이가 꽤 되는데,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로르텔이 밧줄을 타고 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내가 눈빛을 쏘자, 별 말 하지도 않았는데 로르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해볼게요.”
“나 잡고 올라와.”
내 몸도 반지의 반동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많이 회복되긴 했어도 아직 미열이나 만성피로가 남아있고, 체력이나 근력처럼 육체적인 능력부터, 마력 감응에 이르는 마법적인 능력까지 제약이 많다.
그래도 밧줄을 타고 오르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싶어서 얼른 벽에 발을 붙이고 밧줄을 끌어당겼다.
로르텔도 적갈색 머리칼을 뒤쪽으로 올려묶더니, 양팔을 걷어 붙이고는 밧줄을 꽉 잡았다.
내가 한 쪽 팔을 내밀자, 로르텔은 자기 오른 팔을 걸어서 나와 무게를 공유했다. 이로써 어느 정도는 수월하게 벽을 타고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낑낑대며 복도의 벽을 타고 올랐다. 이대로 옥상에 올라가면, 지붕 작업을 위해 외벽에 설치된 사다리가 있을 것이다. 그 사다리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캠프 쪽으로 도주하면 된다.
“으, 흐읍!”
미약한 근력 탓일까. 로르텔의 가냘픈 손목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있는 힘껏 로르텔을 끌어올리며 옥상 근처까지 도달하자, 문득 옥상에서 손이 쑤욱 뻗어져 내려왔다.
― 탁
로르텔의 손만큼이나 가냘픈 손이 내 손목에 휘감기고, 그대로 끼잉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를 끌어올려주었다.
대단한 힘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수월하게 옥상에 올라올 수는 있었다.
넘어지다시피 옥상에 안착한 나는, 그대로 팔을 휙 끌어올려 로르텔이 올라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야밤에 운동하는 취미라도 있어?”
“와주셨군요.”
“직스랑 같이 왔지. 설마 이런 난리를 피워놨을 줄은 몰랐지만…”
로르텔과 나란히 옥상에 드러누운 채 상대를 보았다.
4학년 마법부 수석이자, 마녀의 귀감으로 이름난 트레이시아나 블룸리버.
어깨 언저리까지 내려와 슬쩍 말려들어간 단발 머리칼이 예전에 봤을 때와 똑같다.
그 푸르스름한 머리칼이 달빛을 반사해, 은근하게 눈동자를 자극해온다.
“트레이시아나 선배님?”
로르텔 입장에서는 의외의 인물이었을 터다.
4학년 마법부 수석인 트레이시아나는 어린 나이에 온갖 종류의 고위 마법을 구사하는 학년 강자다.
뿐만 아니라 직접 전투 경험이나, 실전 경험도 꽤 쌓여있어 학생들 중에서는 제법 베테랑으로 통한다.
“선배님이 왜 여기에?”
“후배님이 위험하단 말에 한달음에 달려왔지… 라고 하면 가식적인 대답일테고.”
심드렁하지만 그렇다고 심술궂지는 않다.
트레이시아나는 자기 상체만한 지팡이를 휙 가다듬고는 이야기했다.
“에드 로스테일러한테는 페트린이 신세를 진 게 있으니까. 그거 퉁 치려고 왔지.”
“…에드 선배님? 트레이시아나 선배님하고도 면식이 있으셨어요?”
“얼마 전에 부딪혀서 좀 면식이 생겼다. 로스테일러 가문하고 블룸리버 가문이 손을 잡았다는 소식도 있고.”
트레이시아나 블룸리버는 학생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강자다.
가장 평균 마법 수준이 높은 4학년 중에서도 그 수석 자리를 차지했을 정도의 인간이다.
말썽꾸러기 동생 때문에 속 썩는 일은 많지만, 어쨌든 실력만큼은 확실한 인간인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직스한테 다 들었어.”
트레이시아나는 앞머리를 위로 올리고 있는 머리핀을 몇 번 매만지더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여기서 대기할 거야. 아마 아일라도 곧 올라올테니 걔 챙기고, 또 테일리가 오면…”
트레이시아나는 뭐라 말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떻게든 해 줘야지.”
“이 밤 늦은 시간까지 와줘서 감사하게 됐습니다.”
“뭐, 어차피 어머님께서 로스테일러 가문에 되도록 협조적으로 행동하라고 지시하셨거든. 그러니까 적당히 마음의 빚을 쟁여둔다고 생각할게.”
트레이시아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휙 하고 우리가 올라온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4층 복도에 안착한 그녀는 로브 자락을 탁탁 털고서는 우리를 올려다 보았다.
“졸업 준비한다고 칙칙하게 미래 걱정만 하는 동기생들만 보다가, 이렇게 후배님들 보니까 신선해서 기분이 좋네. 슬슬 가. 시간 별로 없잖아.”
그렇게 말하고, 로브의 모자를 휙 올려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지팡이를 사선으로 세워든다. 소매와 아랫깃이 여유롭게 남아도는 마법사 로브, 그 모자 아래에서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안광이 인상 깊다.
구멍에서부터 밀려내려오는 달빛 한가운데에, 트레이시아나는 조용히 자리를 잡고 서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로르텔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금 당장은 로르텔을 최대한 멀리 떨어트려놓는 게 핵심이다. 듄이 뭘 계획했든, 로르텔을 그 손에 넘겨주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 되뇌이며, 외벽에 붙은 비상용 사다리를 향해 다시 달려나갔다.
*
“엘비라, 네가 왜…”
“사정이 있어서. 네가 이 앞으로 전진하게 놔둘 수는 없겠네.”
테일리와 엘비라는 친한 학우 사이다.
엘비라의 억지에 어울려서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려 본 적도 많다. 어쨌든 이런 저런 시간을 꽤 공유 했으므로, 서로 막역한 사이가 된지는 오래다.
그런 엘비라가 뜬금없이 나타나 테일리의 앞길을 막다니. 테일리 입장에서는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미안하게 된 일이지만, 나는 완전히 에드 로스테일러 쪽에 붙었어. 테일리.”
“뭐?”
테일리의 동공이 확 떨렸다.
나가떨어진 인부들이 가득한 상회 앞마당.
여기저기 잔뜩 삐쳐있는 머리칼을 갈무리한 뒤, 엘비라는 자기 연금술 가방의 입구를 확 열었다.
―카강! 캉! 캉!
그대로 입구를 뒤집어버리자 온갖 시약병과 마공학용품이 우수수 쏟아져나왔다.
저번 방학 때 루시랑 싸우느라 모든 마공학용품을 다 잃은 엘비라다.
허나, 단 한 학기 만에 말도 안되는 양의 마공학용품을 다시 만들어냈다. 시약들까지도 이렇게 잔뜩 있는 걸 생각해보면… 정말 개인 연구에 얼마나 몰두했는지 실감이 날 정도다.
그대로 엘비라는 빈 가방을 근처에 집어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충격 강화 파동구 하나를 꺼내들더니, 재빠르게 발동시키자… 엘비라를 중심으로 강력한 충격파가 발산되었다.
― 화아아악!
― 카강!카가가각!
엘비라의 주변에 떨어져있던 온갖 용품들이 충격파에 날려간다.
이윽고 상회 앞마당은 엘비라가 만들어낸 용품들이 넓게 퍼져있게 되었다.
갖가지 시약병과 마공학용품이 어딜 가든 가득하다.
테일리 입장에서는 사용법도, 효능도 모르는 물건들이 사방에 가득한 모습이다.
잘못 움직여서 시약병을 깨거나, 마공학용품이 작동하면 어떤 방식으로 전투에 영향을 미칠지 알 수가 없다.
모든 장치와 시약의 효과를 전부 숙지하고 있는 건 엘비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이 전장은 완전히 엘비라의 영역인 것이다.
“너, 에드 로스테일러가 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고도 하는 말이야?”
“아일라를 납치해서 성위 마법 연구의 재료로 쓰려 했던 거? 뭐, 다소 난폭하긴 하지만 어쩌겠어. 학문이란 게 때로는 희생이라는 걸 필요로 하기도 하는 법이잖아.”
“너어…”
테일리는 믿을 수가 없다는 눈으로 엘비라를 쳐다봤다.
적어도 엘비라는 선은 지키는 학술가다. 그런 말도안되는 사고방식을 지닐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곤… 생각 못 했어.”
“긴 말 하지 말자. 여기서 널 막고 상황을 끝내야겠어.”
“엘비라!”
테일리가 이를 갈며 엘비라를 쳐다보았다. 순간적으로 그 동공이 확 넓어지더니, 엘비라를 보는 눈빛이 살벌해진다.
엘비라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에드보다는 테일리의 곁에서 여정을 함께한 엘비라다. 그녀는 테일리의 검술 실력이 말도 안되는 속도로 성장하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실감하고 있다.
직접 맞붙어서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건 솔직히 장담할 수가 없다.
엘비라는 전투에 능한 타입은 아니다. 실베니아의 연금부는 전투를 목적으로 학문을 배우지 않는다. 그저 전투도 어느 정도는 가능할 뿐이다.
― 화악!
단 한 번의 도약으로 테일리가 코앞까지 다가온다. 엘비라는 확실히 실감했다.
테일리는 다소 거친 수단을 동반해서라도 자신을 제압할 생각이다. 당연히 죽일 생각까지는 없겠지만, 방심하면 크게 다칠 수 있다.
엘비라는 발을 툭 움직이는 것으로, 옆에 있던 마공학용품 ‘태풍 발산기’를 작동시켰다.
― 콰아아아아아아악!
순간적으로 바람이 일어나더니, 주변에 흙먼지를 일으켜서 시야를 가렸다.
테일리는 크게 대검을 한 번 휘둘러서 검풍으로 먼지를 걷어내버렸으나, 이미 엘비라는 그 자리에 없었다.
멀찍이 거리를 벌린 엘비라는 바닥에서 ‘붉은 종이풀 시약’을 꺼내들어서, 바닥에 붓고 있는 와중이었다.
쫄쫄쫄 하고 바닥에 스며든 시약을 확인한 뒤, 엘비라는 빈 병을 근처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져버렸다.
“왜? 내가 에드 로스테일러 쪽에 붙은 게 그렇게 신기해?”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 엘비라.”
“나도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어.”
엘비라는 서슬퍼런 눈으로 테일리를 쳐다보았다.
“그걸 설명할 의무는 없지만.”
테일리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야속한 일이다. 더 이상 손속을 둘 이유도 없어진 셈이다.
그대로 대검을 들고 달려든 테일리는 엘비라의 코앞까지 다시 거리를 좁히려 한다. 그러나, 몇 걸음 앞에서 발이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으윽?!”
그대로 대검의 무게 때문에 균형을 잃은 테일리가 휘청거리자, 그 틈을 타 기초 원소 마법 ‘수구(水球)’가 때려박힌다.
커다란 압력으로 뭉쳐진 물이 테일리의 몸을 때리고, 그 충격에 테일리는 이를 꽉 악물었다.
“크, 각!”
엘비라의 원소 마법은 그리 수준이 높지 않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충격이 없는 건 아니다.
테일리는 이를 악물고 격통을 버텨낸 뒤, 똑바로 섰다.
그러나 여전히 다리가 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방금 엘비라가 뿌린 시약의 여파가 남아있는 듯 했다.
‘붉은 종이풀 시약’
일대의 대지에 닿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힘을 부여하는 연금술 시약이다. 주로 쥐덫이나 함정 따위에 사용되는 시약이었다.
“테일리 너는 대단한 전투력과 잠재력을 타고 태어났지만, 그래도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어.”
엘비라는 주변을 슥 훑어보고 이야기했다. 주변에는 엘비라의 발명품들이 가득했다.
“넌 연금술 지식이 거의 없지? 어디서 어떤 변수가 튀어나올지 너는 일일이 가늠할 수 없어.”
그 모든 발명품들은 오로지 엘비라만이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긴 이미 내 구역이야.”
대검을 꽉 쥔 테일리가 이를 악물었다.
온갖 물품들 사이에서, 스커트를 탁탁 털고 있는 엘비라의 모습에 이가 갈린다.
허나 엘비라는 아랑곳 않고, 입고 있는 연금술사 복식의 스커트 자락 끄트머리에서 자그마한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엘비라의 전투 방식은 늘 이런 식이었다. 테일리도 모르진 않았다.
허나 적으로 조우했을 때의 가능성을 상정하진 못했다. 그야 당연하다.
엘비라는 쭉 동료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열쇠 챙겨올 시간 없어! 그냥 다 부수고 내려가!”
듄은 인부들을 이끌고 상회 지하 쪽으로 쭉쭉 내려갔다.
그의 상황 판단은 확실히 빠르다.
일부 상회 인부들에겐 입구를 계속 틀어막고 있도록 지시하고, 나머지 인부들에게는 상회 고층 쪽을 수색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잔여 인력들을 데리고 얼른 상회 지하로 내려가는 판단까지 일사천리였다.
지금 가장 가능성있는 해결책은… 상회 지하에 가둬둔 아일라를 자기 손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테일리 맥로어의 목표는 아일라 트리스다. 일단 그 목표를 자기 손에 직접 쥐고 있으면, 협상의 폭이 훨씬 넓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드 로스테일러의 움직임이 수상하다. 로르텔과 나란히 사라진 것을 보면, 에드의 움직임은 의심하지 않고 배길 수가 없다.
듄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듄이 판단한 에드 로스테일러는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막대한 득을 포기할 정도로 감정적인 인간은 절대 아니다.
언제나 이성적이고, 명확하게 사리를 분간해내며, 이해타산을 확실하게 계산하는 타입이다.
그렇기에 듄은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 조건이면 에드가 자신 쪽에 붙을 것이라는 걸.
허나, 에드 로스테일러의 선택은 듄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듄도 상인으로서 살아온 세월이 하루 이틀은 아니다.
그 잠깐의 틈에 에드의 심경에 변화가 있었단 말인가.
그에게 로르텔 케헬른이란 존재는, 단순히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상회 주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차마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듄은 몇 번이고 에드를 직접 만나보면서, 그의 성품과 성향을 계속해서 신중히 판단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터의 시체 속에서 고독히 시체를 뜯어먹는 독수리 같은 자다.
살아남기 위해 제 배를 채울 수 있다면, 그 어떤 시체라도 뜯을 수 있는 독종이다.
그런 전쟁 속의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그의 행동거지와 가치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 쾅!
어쨌든, 과거의 판단 미스를 지금 와서 후회해봐야 의미가 없다. 당장 해야할 일을 할 뿐이다.
난폭하게 지하로 향하는 문을 다 부수면서, 듄은 지하 저장고에 도착했다.
아일라가 갇혀 있을 안 쪽 방까지 인부를 끌고 그대로 달려가면서 포박용 밧줄을 챙겨오라고 소리쳤다.
인부들이 큰 소리 치며 대답하며 따라왔다.
어쨌든 아일라 트리스를 확보하기만 하면, 여차 상황이 잘 안풀렸을 때 그녀를 테일리에게 돌려줘버리면 된다.
그럼 상황 자체는 바로 종료시킬 수 있다. 그 선택권을 쥐는 것만으로도 듄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지금 상황에서 꽤나 확실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 화악!
그렇게 아일라가 잡혀있을 방에 도달한 듄은…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꽁꽁 묶여서 포박되어 있어야할 아일라가…. 없다.
그녀를 감시하던 인부만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을 뿐이다.
“뭐…?”
듄은 떨리는 목소리를 내며 잠시 주춤거렸다.
아일라는 전투 능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학술가에 가깝다. 마법을 쓸 줄은 알지만, 인부들을 쉽게 제압할 정도로 강대한 힘을 내지는 못한다.
그걸 알고 있는 듄이기에 최소한의 인력만을 배치했다. 보고 체계만 똑바로 되어 있으면 너무 많은 인력을 감시에 투자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깔끔하게 제압당해서 정신을 잃은 감시 인부는…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듄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식판을 발견했다. 일단 인질이라 해도 굶겨 죽일 수는 없으므로, 최소한의 식사만을 담아다가 먹이곤 했다.
― ‘잘 먹었습니다….!’
깔끔한 필체로 얻어먹은 밥에 대한 감사 인사를 담아둔 메모가 남아있다. 아일라의 필체가 확실해보였다.
쓸 데 없이 예의가 바르니 더 정신이 곤두서는 기분이다.
주변에는 ‘마력 절단기’, ‘충격 강화 파동구’, ‘전력 발산기’ 따위의 마공학용품이 수명을 다한 채 떨어져 있었다.
테일리가 난리를 피우는 사이, 몸 속에서 마공학용품을 꺼내서 인부를 제압하고 탈출한 것이다.
그 와중에 얻어먹은 밥은 생각나서 감사 인사를 남기고 갈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것일까.
과연… 피랍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야할까. 이렇게까지 됐는데도 든든한 한 끼 식사와, 차가운 물까지 싹 다 들이키고 갔다. 전문가 뺨치는 침착함이다.
꺼억―하고 속트림을 한 번 하고, 혹시라도 누가 들었을까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며 감옥을 떠나는 아일라의 모습이 생각나서… 듄은 이를 갈았다.
아일라는 에드의 손에 잡혀 왔을 때부터 쭉 묶여 있었다. 이런 탈출용 마공학용품을 확보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잡혀왔을 때부터 옷깃 속에 다 감춰놓고 잡혀온 것이다.
아일라 트리스도 애초에 에드 로스테일러와 한통속이었다는 이야기다. 마공학용품도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제공 받은 것이라 생각하면 자연스럽다.
테일리가 들이닥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렇게 딱딱 움직이는 모습도… 그렇게 생각해보면 설명이 된다.
“에드… 로스테일러…!”
듄은 이를 부득 갈면서 눈을 치켜떴다.
애초부터 에드 로스테일러는 듄의 편에 붙을 마음이 단 한 톨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계획한 것이다.
듄의 계획에 재를 뿌리고, 로르텔을 빼돌리고, 겸사겸사 이 엘테 상회를 테일리와의 전장으로 삼아버리기 위해… 그가 그려둔 그림이었던 것이다.
“고층으로 올라가! 아일라 트리스를 찾아내! 에드 로스테일러랑 회주 대리도!”
부드득하고 이를 갈며, 듄은 다시 인부들에게 명령했다.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곧 새벽이 되면 황실의 마차가 온다. 그 전까지 에드 로스테일러와 로르텔 케헬른을 확보해야 한다.
*
“비가 오려나.”
코끝을 킁킁대던 루시가 문득 그런 말을 했다.
“…비요? 이렇게 맑은데요?”
“비 냄새가 나.”
비가 오는 때는 귀신 같이 눈치 채는 루시 메이릴이다. 물론 페니아 황녀가 그런 사실을 알 리는 없으므로, 다소 뜬금 없는 소리로만 들릴 따름이다.
“…그건 그렇고, 곧 아켄섬이에요. 도착하면 어디에 내려드리면 될까요?”
“어차피 황족 숙소로 갈 거 아니야?”
“가기 전에 원하시는 곳에 먼저 들러서 내려드릴게요.”
당연히 황녀의 동선대로 움직이는 것이 상식이건만, 페니아 황녀는 배려심 좋게도 루시 메이릴에게 그리 이야기해주었다.
물론 루시는 그 행동의 의도까지 읽어낼 이유가 없으므로, 그냥 심드렁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창가로 늦은 새벽의 하늘을 올려다보던 루시는… 문득 주룩주룩 내리는 상상하고는 덧없는 한숨을 푹 쉬었다.
“북쪽숲 근방.”
페니아도 어느 정도는 예상한 대답이었다.
“캠프로 갈래.”
그렇게 황실의 마차가 나아간다.
저 멀리 시야의 구석에는, 아켄섬으로 이어지는 맥세스 대교가 조그맣게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