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8)
황금의 딸 (1)
“안녕 안녕!”
입 꼬리가 주욱 하고 내려갈 뻔 한 걸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잘 참아냈다. 식용 풀과 약초를 채집해서 캠프로 돌아오자 웬 불청객 하나가 캠프에 자리를 트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불가에다가 좌석으로 쓸 겸 껍질을 깎아내어서 눕혀놓은 통나무, 그곳에 앉아 양발을 휙휙 흔들며 발랄한 인사를 건네 오는 소녀는, 분명 2학년 수석이자 천재 정령사로 불리는 바로 그 예니카였다.
일전에 메릴다의 수호목 근처에서 우연히 만난 것도 있고, 그럭저럭 듣는 수업이 겹치기도 하는 탓에 자주 인사를 건네오지만, 정작 나는 제대로 인사를 받아쳐준 적이 없다.
애초에 내가 예니카를 좀 피하는 탓도 있고, 주변인물이나 그녀의 절친들이 귀신 같이 나타나 채가 버리기 때문이다.
예니카와의 접점을 최소화하고 싶은 내 입장에서야 고마운 일이지만, 친구를 잔뜩 만들고 싶어하는 예니카에게는 퍽 방해로 느껴졌나보다.
아마 예니카의 친구들은 천하의 나쁜 놈 에드 로스테일러와 친해져봐야 하등 좋을 게 없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 했을테지만, 애석하게도 예니카 또한 유아독존 같은 기질이 있는 소녀다.
언제나 발랄한 면모만을 보여주기에 생각 없이 헤실헤실 대기만 하는 것 같아도, 막상 본인이 맞다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 생각대로 밀고 나가는 면이 있는 것이다.
그 단적인 증거가 바로 지금 상황이었다.
“와아, 대단해! 여기 완전 비밀기지 같아!”
손을 들고 방방 거리면서 감탄하는 모습이 첫눈 오는 걸 보는 어린 아이 같이 천진난만하다.
“자주 자주 놀러 와도 돼?”
안돼,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니 또 상처 받을까 싶다. 하여튼 이 재기발랄한 소녀는 모종의 보호심리를 자극하는 재주가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나 동급생들이 애지중지하는 거겠지.
“뭐 좋을 게 있다고 와, 여길.”
“뭔가 모험 하는 거 같아서 두근두근 한 걸. 에드 너도 그런 생각 들지 않아?”
하루 하루가 두근두근 하긴 하지. 엊그저께 모닥불 관리를 실수해서 새벽에 불이 꺼지는 바람에 야생 멧돼지한테 야습당할 뻔 하기도 했었지..
근데 같은 두근두근이어도. 그 결이 좀 다르단다…
“너랑 좀 더 얘기도 해보고 싶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또… 상담할 것도 좀 있다?”
많디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냐…? 라고 냅다 면전에 그런 질문을 때려박기엔 너무 야박해보일 거 같다.
아무리 거리를 둬야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너무 싸가지 없이 대하면 그건 그냥 인성 쓰레기 아닌가…
그래도, 반대로 너무 살갑게 대해서 좋을 게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는데?”
이곳은 학생들이 생활하는 학사동이나 생활동과는 무지하게 거리가 떨어진 곳인데다가, 넓디넓은 북쪽 숲의 구석에 있는 캠프다.
이런 곳에 내 거처가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래봐야 몇 없다.
“그 늑대가 알려줬냐, 혹시?”
그래도 가장 가능성이 높다면 바로 메릴다다.
고위 바람 정령 메릴다는 예니카와는 가족 같은 사이다. 거기다가 이 숲의 주인격인 존재니, 숲 구석에서 궁상맞게 서바이벌 중인 내 꼴을 예니카에게 털어놨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아니, 메릴다가 네 얘기를 아주아주 많이 하긴 하는데… 그래도 캠프 위치나 사적인 비밀 같은 건 안 알려주더라구. 그런 건 에드 너의 개인사니까.”
이 자식, 의외로 프라이버시 보호만큼은 확실한데? 척 듣기에는 수다쟁이라서 나에 대한 것들은 남김없이 예니카에게 다 털어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대체 누가 예니카에게 내 캠프의 위치를 일러주었단 말인가?
“정답은~ 두구두구두구두구~.”
머리를 베베 꼬면서 의기양양한 얼굴로 뜸을 들이지만,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소거법을 통해 결론이 나 있었다.
“벨이구만… 아오..”
“왓! 누, 눈치 빠르다!”
벨 메이아. 내 입장에서도 다소 생소한 그 이름은, 실베니아 아카데미 3대 기숙사 중에서 가장 호화로운 곳으로 유명한 오필리스관의 선임 메이드를 지칭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녀가 예니카에게 이 캠프의 위치를 일러주었는가. 그 사실을 논하려거든, 대략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 [ Name : 에드 로스테일러 ]
성별 : 남 나이 : 17 학년 : 2 종족 : 인간 업적 : 없음 체 력 6 지 력 5 재 주 9 의 지 력 8 행 운 6 전투 능력 상세>> 마법 능력 상세>> 생활 능력 상세>> 연금 능력 상세>> 모처럼 밀린 일을 하기 좋은 주말.
오전 내내 사냥하느라 완전히 땀에 절어버린 옷을 빨아서 냇가에 널어놓았다.
그 골치 아픈 합동 전투 실습을 잘 마무리 하고 나서 어느덧 2주 가까이 지났다.
일단 시나리오 메인 인물들과 직접적으로 엮이고 나면 거진 10년은 늙는 기분이다. 혹여나 메인 시나리오에 악영향이라도 끼칠까봐 조바심 내고, 줄타기 하고, 그러면서도 일상생활은 영위해야 하니 두 배는 피곤하다.
그래도 전투 실습 이후로는 메인 등장인물들과 거의 엮일 일이 없었으니, 그나마 마음이 편한 시기였던 것이다.
오롯이 내 학업과 생존에만 열중하는 시간을 가진 결과, 그 지지부진한 체력 스탯이 추가적으로 1 상승했다. 상대적으로 꽤 높아진 재주 스탯은 슬슬 변동성이 적어지기 시작했다. 10부터는 정말 1레벨 1레벨 올리기가 쉽지가 않아질 것이다.
체력 스탯 6정도면 이제 제법 나쁘진 않았다. 물론 전투부 학생들의 압도적인 전투 스펙에 비하면 새발의 피 일지 몰라도, 일반인으로서는 그럭저럭 제 몫은 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결국 고성능 스탯의 기준점은 10이다. 숙련도 레벨이든, 이런 기초 스탯이든 간에 일단 10을 넘어가서부터 변동성이 극도로 적어지고, 한 단계 한 단계가 뼈를 깎는 노력을 요하게 되니까.
엔드 스펙이 20 전 후로 형성 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직은 갈 길이 먼 셈이다.
그래도 그건 일반인의 기준을 넘은, 비범한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기준이다. 이정도면 지금 시점에서도 충분히 제 값을 할 수 있는 능력치는 되는 것이다.
노력의 성과 덕에 몸에도 잔근육이 어느 정도 붙었다.
나는 상의를 탈의한 채로 냇가에 서서 내 몸을 훑어 보았다.
“역시 체력 스탯이 꽤 유의미 하긴 하구나.”
지난 두 달간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스케줄을 계속해서 강요 받은 탓에, 내 몸은 적응을 위한 진화를 하기 시작했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마초남까지는 절대 못되어도, 배나 어깻죽지, 팔뚝 언저리에 생활형 잔근육들이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멸치를 넘어서, 그냥 아예 1자 몸매였던 에드의 원래 상태를 생각해보면 장족의 발전이다.
육체적 재능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었던 몸에서 이 정도까지 왔으니, 꽤 많은 진전이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아직 활 숙련도 레벨도 엄청 낮고, 보조 무기 중 가장 유용하다고 평가 받는 단검도 제대로 숙련을 쌓질 못했다. 달려온 길도 꽤 길었지만, 아직은 가야할 길이 더 멀다.
“지금 단련을 해둬야 나중 가서 편하겠지… 괜히 나태해지지 말자.”
꽤나 유의미한 성과지만, 이 정도 성과만으로 만족해서도 안될 일이다. 나는 팔을 좌우로 흔들며 허리를 꺾어 몸을 풀고, 주중 동안 밀린 일들을 처리 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장작이 바닥났으니 통나무들을 다시 패어두고, 오후에 남는 시간을 통해 그물망을 꿰어 볼 생각이다. 남아 있는 명주실을 모두 동원해서 사선 형태로 겹쳐 얹고, 두 사선이 만나는 구간마다 베베 꼬아서 복잡한 그물망을 만드는 작업인 것이다.
왜 그물을 만드냐? 그물 낚시를 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생선의 보존을 위해서였다.
육류는 보존용 토굴을 파서 보관했지만 그래도 보존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금방 상하곤 했다. 그렇다고 죄다 소금으로 절여서 염장해버리자니, 암염에서 얻을 수 있는 소금의 양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식이 훈연, 즉 나무 연기로 표면만을 슬쩍 익혀서 말리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하고나니 고기의 보존 기간이 며칠 이상 길어져, 사냥에 쓸 시간을 학업에 투자하거나 다른 생존 활동을 위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생선은 훈연을 통해 보존 기간을 늘려도 그 효율이 육류만큼 좋지는 않았다. 또한, 맛의 변질도 훨씬 심해서 모처럼 낚은 생선들을 제대로 요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물망을 만들어 나뭇가지에 엮은 다음 냇가에 자체적인 양식장을 설치해보려는 것이다. 만약 잘 된다면, 낚은 생선들을 활어 상태로 보존할 수 있다. 생선의 신선도와 맛을 둘 다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충분히 해볼 만한 시도였다. 주중에는 수업 받느라 당장 하루 하루를 살기 위한 자원 수집에만 에너지가 다 빠지니, 이런 시도를 하려거든 시간이 좀 남는 주말이 적절했다.
얼른 장작 다 패놓고, 아까 세탁해놓았던 교복이 잘 건조 되었나 확인한 후, 그물망을 엮기 위한 작업에 착수할 마음이 가득했다.
“Zzz… Zzz….”
나는 상의를 탈의한 상태로 팔을 이리저리 휘어꺾으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 장작을 패기 위해 마련해두었던 나무 밑동으로 가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루시 메이릴이 그곳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루시 메이릴을 집어들어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어깨에 얹어서 짐덩어리처럼 나른 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목재 쉼터 안에 집어던졌다.
“우, 아각!”
쉼터 안에 매다 꽂힌 루시는 몸을 뒤척였지만, 어쨌든 그곳은 푹신한 담비 가죽과 다람쥐 가죽으로 덮인 침대였다. 이내 다시 퓌이 퓌이 하고 숨소리를 내쉬며 잠들었다.
시간대를 보아하니 루시 메이릴의 낮잠타임이었다. 잊을만 하면 한 번씩 나타나서 캠프를 제 침대처럼 쓰니, 이제는 맞닥트리고 나면 한숨도 채 나오질 않았다.
“딱 장작 쉰 개만 패고, 교복 확인하러 가야겠다. 한시간 안에 끝내야지.”
그렇게 양손에 침을 퉤퉤 바르고 도끼를 쥔 채, 첫 번째 장작을 내려친 순간이었다.
-쾅!
“우으악…”
뭔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나길래 돌아보니, 루시가 자기 이마를 스윽스윽 쓰다듬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면서 튀어나온 목재 지지대에 머리를 부딪힌 모양 이었다.
일단 한 번 잠에 들면 양 볼을 꽉 꼬집어대는 게 아닌 이상이야 일어나질 않는 루시가, 갑자기 칼기상을 하다니.
“… 뭐하냐?”
“… 냄새가 나…!”
그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더니, 자기 마녀모자를 휙 챙겨들고 캠프 밖으로 바람처럼 뛰쳐나갔다.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에 감탄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더니 그 왜소한 몸은 사라져 있고, 루시가 사라지면서 사용한 바람 마법의 여파만이 내 땀을 날려보냈다.
“… 뭐냐?”
이윽고, 그 이유를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거기 누구죠?”
풀숲 사이를 헤치고 나온 사람은 실베니아 최고의 기숙사 오필리스관의 선임 메이드, 벨 마이아였다.
*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에 대한 설정이야 빠삭하게 알고 있다.
온갖 고귀하고 잘난 학생들이 생활하는 오필리스관의 관리인들인 만큼, 하나 같이 황실 사용인들에 버금가는 실력과 자부심을 가지고 근무하는 자들이다. 대개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은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교육을 받은 그 분야 최고의 스페셜리스트들이지.
근데 그거야 설정의 측면일 뿐이고, 실베니아의 낙제 검성 시나리오에서 큰 영향력이 있었냐 묻는다면, 딱히 기억에 남는 건 없다…
어쨌든 오필리스관의 특별함을 강조하는 장치로서 설명되었을 뿐이지, 메인 시나리오에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없었으니까..
즉, 지금 맞닥트린 벨 마이아도 ‘아, 이런 애가 확실히 있긴 했지…’라는 정도의 감상 말고는 더 들지 않는 수준의 인물이었다. 시나리오 비중을 보면 한 번 쓰다 버리는 악역인 에드 로스테일러와도 견줄 정도로 곁다리 인물인 것이다.
“모처럼 깊은 숲까지 들어가볼까 했는데, 이렇게 에드 도련님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 네… 오랜만입니다.”
“…굳이 존대는 안하셔도 됩니다.”
벨 마이아는 시나리오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 인물이지만, 그래도 잊을만 하면 한 번씩 나와 의미심장한 대사를 한 번 쳐주곤 하는 약방의 감초 같은 인물이긴 하다.
예시로 들자면, 시련을 맞딱트린 주인공이나 히로인을 보고 ‘그래도 눈빛에 그 의지가 살아있어요. 그라면 반드시 이겨내겠죠.’ 라거나 ‘그녀라면… 분명 이겨낼 수 있어요…’ 라는 둥.. 그런 의미심장한 복선 따위를 쳐주는 인물이다.
실질적으로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은 안 주지만, 어쨌든 문제는 해결될 거라는 모종의 확신을 심어주는, 시나리오 상으로는 은근히 필요 없는 듯 필요한 인물인 것이다. 그런 거 외에는… 뭐, 독고다이 마법사 루시 메이릴이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
뭐, 이런 저런 의미부여를 잔뜩 해봐야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에드 로스테일러 같은, ‘곁다리 등장인물’ 클럽의 멤버인 것이다.
“그냥 존대할게요.”
“존대는 제가 더 불편합니다.”
“어차피 저는 이제 귀족도 아닌데요.”
“여전히 실베니아의 학생 신분이시긴 하잖습니까.”
단정하게 쳐낸 흑단발과, 다소곳한 몸가짐은 진짜 프로 메이드들만 모아놓은 오필리스관에서도 그녀가 ‘선임’ 메이드 라는 직책을 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기초 마법 하나 쓰지 못하는 몸으로 이런 숲의 깊은 곳까지 들어왔음에도 단아하게 차려입은 메이드복에는 한 치의 구김도 없다.
“조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굉장히 놀랐습니다.”
눈꺼풀 떨림 하나 없는 주제에 입으로 그렇게 말해봐야 와닿지도 않는다.
“뭔가 어투도 많이 달라지시고, 다부진 체격이 되셨군요.”
그제서야 내가 상의를 탈의한 상태라는 걸 자각했다. 촌스럽게 부끄러워하거나 하진 않지만… 반대로 저쪽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차분하니 오히려 당황스럽다.
“좋은 변화이신 것 같아 기쁩니다.”
“아, 네…”
“존댓말 안하셔도 됩니다.”
“싫은데요.”
“…”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이라 잘 모르겠는데, 내가 그녀의 묘한 자존심이라도 건드린 모양이다.
“하대 하셔도 됩니다.”
“싫은데요.”
“오필리스관에 거주하실 때는 하대하셨잖습니까.”
“그 때야… 오필리스관에 살았을 때고요..”
하여튼 오필리스관 메이드들은 하나같이 뭔가 이해하기 힘든 묘한 고집이 있다.
나는 벨이 한쪽 손에 큰 바구니를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슬쩍 곁눈질로 그 내용물을 보아하니, 온갖 버섯이나 나물, 열매 따위가 잔뜩 들어차있었다.
오필리스관 식사의 대부분은 여러 상회에서 납품되는 최고급 식재를 사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재료조달이 생명일 때에는 이렇게 현지에서 식자재를 구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이런 일까지 도맡아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을 ‘인간 가축 제조기’라고 우스갯 삼아 부르던 인터넷 밈이 이해가 되고 만다.
못하는 게 없는 족속들이니, 부리는 입장에서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입만 벌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아직 학교에 다니고 계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예니카 아가씨의 채비를 도와드리곤 하는데, 에드 도련님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시곤 했습니다.”
“그래요?”
“그래도 이런 형태로 생활하고 계셨을 줄은… 오필리스관에서 나가실 때는 정말 세상 다 잃은 표정을 하셔서 그대로 학교를 나갈 줄 알았습니다만.”
그 말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처음 오필리스관에서 쫓겨나던 날, 내게 목재가방을 건네주었던 그 단발의 메이드가 벨이었던 것이다.
막 이 세계로 날아왔던 시점이라 정신도 없었고, 애초에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은 하나로 뭉쳐서 생각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잘 살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아, 네.. 격려 고맙습니다.”
“하대는 언제 하실 생각이십니까?”
“할 생각 없는데요.”
이 기묘한 족속들은 존대를 오히려 불편해하는 알 수 없는 기질을 타고났다. 대체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왔기에 저런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될 수 있는거냐.
어쨌든 내 시점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건, 선임 메이드 벨이 들고 있는 그 바구니였다.
온갖 버섯이나 식용 나물, 열매 따위가 잔뜩 들어있는 것이다.
학생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독학한 식용 식물 지식만으로는 한계를 느끼던 와중이다. 저 바구니의 내용물은 일단 다 먹을 수 있는 종류라는 이야기일테니, 하나씩만 받아낼 수 있다면 채집할 수 있는 식물의 종류가 획기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특히 버섯이나 열매는 독성있는 것들이 꽤 있어 아예 손도 못대던 식재들이다. 그걸 분간할 수 있게 될 기회인 셈이니, 군침이 돌지 않을 수가 없다.
뭐, 벨 마이아는 저렇게 차갑게 보여도 일단 성품이 꽤 좋은 편이니까 도움을 요청하면 흔쾌히 수락하겠지.
애당초 언급했듯이,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라 하면 시나리오에 별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곁다리 인물이 아닌가 좀 교류하거나 친하게 지낸다고 해서 그다지 큰 일이 일어날만한 존재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실보다 득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좀 친해지면, 오필리스관에서 남아도는 식재료나 옷감, 여러 작업도구 따위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쯤되면 차갑게 밀어내는 게 더 멍청한 짓이 아닐까?
시나리오 내내 얼굴 비추는 일 따위는 거의 없는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이다. 그래, 다소 가까이 지낸다 해서 뭐 얼마나 영향이 있겠어!
그렇게 결론을 내고,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편한 웃음과 함께 벨 마이아에게 다시금 반가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이런 깊은 숲까지 식자재를 조달하러 오다니, 고생이 참 많으시네요. 근데 그 바구니 말인데요…”
그래, 좀 친하게 지내도 되겠지!
그리고 나는 이 선택을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
“응, 응. 내가 벨한테 에드 네 이야기를 엄청 많이 하거든. 그래서 벨이 내 이야기에 맞장구를 자주 쳐주는데, 문득 에드 너를 여기서 만났다는 이야기도 해주더라구.”
인간도 아니고, 한낱 바람 정령도 보호해주는 남 사생활을 이렇게 뿌리고 다닌다고?
아니,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벨 마이아라는 인간은 과묵하고 말 수가 적어 함부로 남에 대해 이야기 하고 다니지 않는다. 애초에 무거운 입은 노련한 메이드에겐 기본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자질이다.
내가 알고 있는 벨 마이아는 그런 기본기 만큼은 확실하게 잘 갖춰져있는 엘리트 메이드란 말이다.
“모처럼 주말이니까 너 만나고 오라고 하더라고. 오늘 따라 머리도 이렇게 예쁘게 묶어주던데? 자 봐, 한쪽으로 이렇게 땋아 내린 것도 예쁘지?”
이 자식 봐라??
“어, 그래…”
“그래서 말야, 아까 말했던 고민 말인데…”
예니카는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듯이, 자기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타닥대는 모닥불을 바라보면서, 예니카는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처음에는, 왜 굳이 많고도 많은 사람들 중에 나한테 고민 상담따위를 하나 의아했으나.
“에드는 그 때 먼저 나가버려서 못 봤을지도 모르겠는데, 나 말야… 저번 달에 있었던 합동 전투 실습 때, 사람을 다치게 만들었거든.”
고위 불정령 타칸을 소환해 네일관을 화염으로 뒤덮어버린 그 이벤트는, 이번 학기에 일어날 이벤트 중에서도 특히 스케일이 큰 편이었을테다.
다치게 만든 상대가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다. 먼저 규칙을 어기고 중급마법을 구사한 사실을 생각하면 자업자득일테지만, 심성이 착한 예니카에게는 그런 건 부차적인 사실에 불과한 것이다.
왜 하필 고민 상담의 상대가 나인가?
애시당초, 학생들은 모두 예니카의 편이기 때문이다.
사랑스럽고 발랄한 예니카는 2학년생 모두의 소중한 보물 같은 소녀다. 그러니, 괜스레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책을 하는 일이 있거든 모두가 나서서 예니카를 격려하고 편을 들겠지.
그러나 예니카는 알고 있다. 그들이 내리는 평가는 모두 기울어진 저울 위에서 행해진 것이다.
예니카를 끔찍이 아끼는 사람들이니 만큼, 객관적이고 공평한 판단을 내려주지는 않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자기편을 들어주는 건 참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있었던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내게 찾아온 것이다. 상대적으로 예니카의 편을 드는 기질이 적은 나는, 무작정 예니카의 편에서만 판단하진 않을테니까.
참 착하고 바른 마음가짐을 가진 소녀라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로르텔과는 상성이 영 안 좋다.
“있잖아. 자꾸 잊으려고 해도, 역시 내가 너무 심했나… 그렇게까지 다치게 만든 건 너무 과잉대응이었나.. 하는 생각이 안 사라지는 거 있지?”
“그렇구나…”
“사과하러 갈까?”
“그러든가.”
“근데 그러면 친구들은 걔가 먼저 잘못했다고 절대 그러지 말라고 말린단 말이야.”
“그럼 그렇게 해. 네가 맞다고 생각하면.”
“우음~.”
자기 무릎을 끌어 안은 채 그 위에 턱을 올린 예니카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뒀다.
섣불리 내 가치판단을 예니카에게 강요하진 않기로 했다. 뭐가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영향을 미칠지 잘 판단이 안 서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함부로 옳고 그름을 속단해서 그녀의 행동에 영향을 주기에는 예니카 페일로버라는 인물의 비중이 너무 무겁다.
좀 야속한가 싶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역시 에드야.”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생각보다 의외였다.
“에드는, 절대… 무조건적으로 내 편을 들지는 않네.”
“기분 나쁘면 어쩔 수 없고.”
“으응? 아니야 아니야. 오해야.”
타닥대는 모닥불을 쬐며, 빙긋 웃는 모습이 평소보다는 텐션이 좀 더 낮아 보이긴 했다.
“기분 전혀 안 나빠. 절대, 전혀. 오히려 안심이 되는 걸.”
다만, 의미심장한 말만 이어갈 뿐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에드 같았으면 좋겠다.”
한 귀로 흘린 그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곱씹어볼 여유는 없었다. 오늘도 할 일이 산더미였기에.
*
“당신의 2시간을 구매하고 싶은데요. 에드 선배님.”
이튿날, 원소학 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먹으러 나왔을 때였다.
일견 예의 바르고 단아해 보이지만, 그 영롱한 청록색 눈동자에는 부를 향한 탐욕으로 가득한 소녀다.
말끔하게 빗어 어깻죽지에서 예쁘게 묶은 적갈색 머리칼이 어깨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합동 전투 실습에서 다친 것인지, 목 언저리나 팔뚝으로 자그마하게 삐져나온 붕대가 보였다. 합동 전투 실습이 끝난지가 얼마나 오래 됐는데 아직도 자잘한 상처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당시에는 얼마나 크게 다쳤을지 충분히 상상이 됐다. 그 착한 예니카가 발을 동동 굴렀을만 하다.
당신을 기다렸다는 듯이, 교수동에서 나온 나를 마주보며 다소곳한 자세로 벤치에 앉아 있는 저 소녀를 나는 안다.
이후, 페니아 황녀와 대립각을 세우고, 후일엔 아예 견원지간이 되어버리는, 실베니아의 낙제검성 4대 히로인 중 하나.
대륙 최고의 거상 엘테 케헬른의 외동딸이자, 부를 향한 열망만으로 금화의 탑 꼭대기에 올라서는 희대의 여상(女商).
후일 사람들은 경의를 담아 그 소녀를… ‘황금의 딸’ 이라고 불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