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81)
에드 토벌전 (4)
?- ‘참견 좀 하지 마.’
엘비라의 언니가 엘비라의 뺨을 걷어올리며 한 말이었다.
에니스턴 가문의 악동 엘비라에게 남아 있는 기억 중 가장 선명하게 각인된 것이다.
철 들 무렵에는 이미 시약 조합과 마공학용품 개량에 눈을 뜬 상태였다.
에니스턴 가문 저택의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하루에 서너번은 폭발을 일으켜대는 말썽꾸러기였던 유년기가… 그녀에게 있어선 그리 먼 과거는 아니다.
에니스턴 가문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이름난 연금술 명가답게 그녀의 자매들도 온갖 연금술에 조예가 깊었다.
다만, 이미 자기만의 체계를 창조하고 그 세계에 푹 매료되어 버린 엘비라와 비교해서는 대부분 평범한 재능의 축에 들었다.
언젠가부터 비효율적인 시약 조합식이나, 마공학용품 개량식, 쓸 데 없는 재료가 들어간 제조식을 보고 있으면 가만히 있질 못하게 된 이유였다.
그녀의 가문에서는 그녀 이상의 재능과 열정을 지닌 인물 없었기에, 모든 것이 그녀의 눈에 차질 않았던 것이다.
틈만 나면 자매들의 연구 성과를 보면서 툴툴대며 지적을 하거나, 불완전한 부분을 짚어대고만 있게 되었다.
아예 연구 성과를 넘어, 연금술사로서 삶의 태도나, 가치관, 연구에 대한 열의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헤실대며 자기 철학을 늘어놓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은 피어오르는 열등감을 참지 못했다.
신은 그녀에게 타고난 재능과 열정을 주었으나, 그에 맞는 처신과 처세를 주지 않았다.
사실 아직 어린 소녀에게 그런 어른스러운 처세술을 바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기도 했다.
결국 고이고 고인 열등감은 그녀의 언니 디엘라 에니스턴이 실베니아 입학 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을 때 터지고 말았다.
입학 시험 과제로 챙겨갔던 마공학용품을 엘비라가 하나 하나씩 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자, 엘비라의 재능에 눌려살던 디엘라는 차마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뺨을 후려치고 만 것이다.
엘비라에게 잘못은 없다.
그러나, 상심한 디엘라를 배려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 ‘너는 항상 네가 세상 만사의 주인공 같지?’
디엘라 에니스턴은 시험대 위의 시약병들을 전부 다 밀어서 깨트려버리고, 연구용 두루마리를 찢어버린 채 이를 갈고 이야기했다.
– ‘좋겠다, 너는… 우리 같이 평범한 인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잖아.’
– ‘언니…’
– ‘그래, 마음껏 네 능력을 펼쳐. 나는 어중간한 재주를 타고난 인간답게… 어중간하게 살다가 갈테니까.’
그 이후로 디엘라는 연금술을 완전히 관두고, 황도 클로에론으로 가서 회계와 경영을 배웠다.
에니스턴 가문에 얼굴을 비추는 일도 극도로 적어지더니, 이윽고 1년에 한 번조차 그 모습을 보기 힘들어졌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연금술이란… 실패의 기억을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방아쇠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온갖 연금술 장치가 가득한 본가에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겠지.
어린 시절이지만, 엘비라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잘못이 없다.
디엘라가 엘비라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자신의 길을 포기한 것은… 철저히 그녀 스스로에게서 기인한 열등감 탓이다.
엘비라의 참견은 언제나 옳은 방향이었다. 마력 흐름의 효율성이나, 조합 재료의 가성비, 시약의 능률 등… 언제나 엘비라가 말한대로 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러니까, 디엘라의 그 슬픔 어린 눈에 못이겨 자기 삶의 태도를 바꾸는 일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더 강하게 관철할 뿐이다.
이윽고 엘비라가 실베니아에 입학하고, 연금부의 수석이 되기까지…
제 한 몫 못하는 사람들에게 툴툴대며, 수도 없이 참견을 해대는 통에 참견쟁이라는 불명예까지 얻었지만… 엘비라는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고집을 부려서라도 제 길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문득 든 생각은, 클레비어스도 그 의견에 동조해줄까 하는 것이다.
*흘러내리는 피에서부터 불길한 마력이 피어올랐다.
상반신을 늘어뜨리고 숨을 한 번 휙 몰아쉰 클레비어스가, 소름끼치는 눈매로 테일리를 슥 올려다 보았다.
테일리도 물러설 마음이 없다. 상대가 대화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면, 자신 또한 검을 집어들 뿐이다.
“잠깐! 멈춰! 너희 둘이서 이럴게 아니야…!”
엘비라가 재빨리 바닥을 짚고 상반신을 일으키며 소리를 치지만, 이미 클레비어스의 몸에는 혈검술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클레비어스 노튼데일의 혈검술에는 중간이 없다.
한 번 시동이 걸린 혈검술은 조금씩 조금씩 클레비어스의 정신을 좀먹어들어간다.
정신을 뒤덮는 광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져갈 뿐이다.
그 앞에서 피를 흘리지 않은 상대는 없다. 그 루시 메이릴조차도 자그마한 생채기 정도는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광기 그 자체에 가까운 검술이다.
“입 다물고 거기 나자빠져 있어.”
클레비어스의 박력은 평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말 한마디로 엘비라를 제압해버린 뒤, 그대로 바닥을 박차고 테일리에게 달려들었다.
검이 빠르다는 수준을 넘어섰다. 그냥 보이질 않는다.
테일리는 거의 감각적으로 클레비어스의 첫 번째 검격을 막아냈다. 보이지도 않는 검을, 그저 전투 감각만으로 막아낸 것이다.
보고 막은 것도 아니고, 예측한 것도 아니다. 거의 예지에 가까운 감각이 있어야 했다.
테일리는 클레비어스의 검격을 막아놓고도, 당황스러워 하며 이를 악물었다.
바로 앞에서 검을 맞대고 있는 클레비어스의 두 눈. 그 안광이 코앞에서 드러난다.
인간이 아니라, 한 마리 야수다.
아직은 약간의 이성이 남아있지만, 조금씩 사람의 탈을 벗어 던지고 귀신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클레비어스…! 너 사정도 모르면서….”
“사정은 모르겠지만…”
맞대어진 칼날이 부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서로 간의 힘겨루기는 호각이지만, 속도 그 자체는 클레비어스가 완전히 웃돌고 있었다.
그대로 클레비어스가 몸을 확 휘어 꺾으며 테일리의 복부에 돌려차기를 박아넣었다.
그렇게 큰 동작이건만, 테일리는 캐치할 수조차 없는 속도였다.
“커헉!”
그대로 테일리는 엘테 상회의 외벽 역할을 하고 있는 철창에 매다 꽂혔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멎고, 등허리를 타고 큰 충격이 밀려 올라왔으나… 고통에 몸부림 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보면 이미 도약한 클레비어스가 코 앞까지 도달해있었다.
검은 휘둘러지기 직전이었다. 허리를 확 휘어꺾으며 내려치는 일련의 흐름자체가 보이질 않는다.
그저 번개가 내려치는 듯한 일격.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공격이 들어와 있는 느낌.
테일리는 신들린 반사신경으로 직격타를 피했지만, 검에 스친 어깻죽지에서부터 출혈이 생겨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자기 어깨를 꽉 쥔 채, 테일리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테일리 대신 클레비어스의 공격을 얻어맞은 철창은… 굉음을 내면서 부서져버렸다.
“…네가 뭔 짓을 하려 했는지는 알지.”
클레비어스에게는 확실하게 느껴졌다.
단 한 순간이었지만, 테일리는 엘비라를 베어버리려 했다.
물론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치명상을 입히는 것도 불사한 일격이었다.
그렇다면 그 시점에서 더 이상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다.
클레비어스는 허리춤에서 꺼내든 단검으로 다시금 자기 반대쪽 어깨를 찔러버린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클레비어스의 어깨에서 새로운 출혈이 발생한다. 더 많은 피가 흘러내려, 그의 몸에 조금씩 더 많은 마력이 깃들기 시작한다.
기괴하게 몸을 비틀다가 다시 축 늘어뜨린 클레비어스가… 움찔거리며 한 번 몸을 떨었다.
──노튼데일 가문의 검귀를 상대하게 되거든, 반드시 일격에 승부를 내라.
전투부 선임 교수 마이크가 전투 실습 전에 했던 이야기다.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강해지고, 죽어가는 한 계속해서 강해진다.
피에 이끌려서 조금씩 마력을 더 쌓아가는 그 귀신은… 죽음에 한 없이 수렴하면 수렴할수록 더 미친 괴물이 되어간다.
야금야금 적을 깎아먹으면서 승부를 내려한다면, 목이 베이는 건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까, 그 괴물이 더 피를 탐하기 전에, 갈증을 해소하고 완전히 귀신이 되기 전에 끝을 내라.
클레비어스 노튼데일의 혈검술은 죽음의 냄새가 가까워질수록 더 강해지는 광인의 기술이다.
정말 죽음의 직전, 단 한 끗의 검격만으로도 목숨을 잃게 되는 그 순간의 속도는… 희대의 천재 마법사도,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검사도 눈으로 좇을 수 없다.
“우욱, 후우…”
철창에 기대어 겨우 몸을 일으킨 테일리는… 눈앞의 광경을 본다.
달빛이 내리쬐는 엘테 상회의 대리석 마당.
피를 먹는 귀신이 서있다.
이미 속전속결이라는 선택지는 사라진지 오래다. 피를 탐할만큼 충분히 탐한 검귀는 소름끼치는 눈동자로 테일리를 슥 쳐다보더니…
그 다음엔 이미 테일리의 품속에 달려들어 어깨에 칼을 박아넣고 있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그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우리는 페니아 황녀 쪽에 붙어야 해.”
로르텔의 별장에 직접 들어와 본 적은 처음이다.
내 오두막에 비해서 엄청나게 화려하다 할 수준은 못되지만, 그래도 넓이가 꽤 되고, 내부를 채운 가구들이 훨씬 고급품이다.
방한도 더 잘 되어 있고, 내부의 공기를 순환시키는 마공학용품도 들어와 있어서 꽤나 쾌적한 상태다.
이 정도만 해도 캠프 생활이 아니라 일반 가정집에서 생활을 하는 느낌이 든다. 확실히, 돈이 있으면 어디서 살든 불편한 것이 없는 법이다.
“이번 건은 황실의 권력 싸움이 엮여있어. 로스테일러 가문 건과 엮여서, 더 일이 커질 수도 있을거야.”
별장에 들어온 나는 일단 모닥불에 불부터 지피고, 방 여기 저기에 있는 마공학용품에 미량의 마력을 밀어넣어 광원을 확보했다.
불이 들어오자 생각보다 더 아늑한 느낌이다.
나와 로르텔은 그대로 별장 중앙부 쪽에 있는 고풍스러운 목재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안 그래도 잡혀 있느라 체력적인 소모가 심했던 데다가, 한 밤 중에 마라톤까지 해서 로르텔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내가 대충 물을 떠다 주자 감사하다면서 벌컥 벌컥 들이키고는, 로브 모자를 내려 쓰고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린 채 숨을 추슬렀다.
“페니아 황녀님이요?”
“그래. 그나마 이번 분쟁 구도에서 우리 쪽 편을 들어줄만한 사람이야.”
“글쎄요. 이건.. 로스테일러 가문의 일이 아니라 엘테 상회의 일이잖아요…?”
“로스테일러 가문도 크게 보면 엮여 있긴 하지.”
“그래도…”
로르텔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예측이 같다.
“페니아 황녀님은 저를 달갑게 여기진 않을 거에요.”
“대체 얼마나 대립각을 세워놓은 건데?”
“페니아 황녀님은 제가 셀라하 황녀님 쪽에 붙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거거든요.”
내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로르텔은 부연 설명을 바로 덧붙였다.
“에드 선배님이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 엘테 상회 쪽으로 선배님 신병을 빼돌리려고 수작질을 좀 했거든요.”
“뭐?”
“선배님을 남한테 맡기고 싶진 않았어요.”
가감없이 말하는 바람에 나도 바로 대답이 튀어나가진 않았다.
“그렇다는 소리는…”
“굳이 숨기진 않았잖아요. 저와 페니아 황녀님은… 물과 기름 같은 사이에요.”
시나리오에서도 그랬지만, 거기서 초월해 생각해보더라도 사실 페니아와 로르텔은 그림이라도 그린 것처럼 정반대만을 보고 걷던 사람들이다.
“저도 페니아 황녀님을 그렇게 긍정하지는 않아요. 그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다른 방법을 강구하려고 하면 했지…”
“그래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왔으면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다. 네 처지를 생각 해야 해.”
결국 로르텔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나는 의자를 밀고 똑바로 선 뒤 로르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으면 다른 활로를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듄과 슬로그 뒤에 있는 뒷배는 페르시카 황녀야. 권위로 맞설만한 사람은 페니아 황녀 뿐이고.”
에서는 정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가까워 질 수 없었던 두 사람이다.
결국 그 두 사람을 한 세력으로 묶어 놓을만한 구심점은, 단 한 개도 없었다.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일단은 페니아 황녀랑 손을 잡아라.”
“…선배님 얼굴을 봐서라도요…?”
로르텔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다 말리고서는, 천천히 내 눈을 마주보았다.
영롱한 로르텔의 두 눈동자에 진중한 내 얼굴이 비쳐보인다.
페니아 황녀는 로르텔 케헬른의 역린과도 같은 인간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보고 있으면 없던 운명론도 믿게 만든다. 견원지간을 넘어서, 아예 사람의 결 자체가 맞지 않는다.
성장 배경, 가치관, 무리를 이끄는 방식, 원하는 걸 쟁취하는 방식, 의지를 관철하는 방식.
그 모든 게 정반대인 두 사람을 한 데 묶어 놓으려거든… 결국 감정에 호소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이래서, 먼저 좋아하면 지는 거라더니.”
로르텔은 자기 얼굴을 부비고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필요에 의한 계약 관계라면 어쩔 수 없는 법이긴 하죠. 적대세력과 잠시 손을 잡는 일이야 상도의 세계에선 비일비재한 일이고요.”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해준 건 고맙다. 어쨌든 지금 해야할 일은 듄을 잡는 거야.”
청록색 베레모를 쓰고, 상인 복식을 차려입은 채, 언제나 경박하게 웃어보이던 듄 그렉스.
사실 그 경박한 모습마저도 연기였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치밀할 거란 생각을 하진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뒤통수를 칠 정도면, 하루 이틀 준비한 계획은 아닐거야.”
“하지만… 엘테 상회 건물 내의 모든 물류 흐름은 속속들이 보고 받았어요. 하루 일과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매번 다시 검토했고요.”
로르텔의 일처리는 확실한 편이다.
일차원적인 방법으로 수작질을 했다가는 로르텔의 눈썰미에 전부 들통이 났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제 아무리 바쁘고 정신 없는 상태였다고 해도 로르텔의 시야 밖으로 벗어나서 수작질을 했다는 건…
“일단 상회 내부에서 융통된 물류나 자금 가지고는 제 눈을 벗어날 수는 없어요. 이건 자신할 수 있어요.”
“그럼… 상회 바깥은..?”
“상회 바깥이라 해봐야 아켄섬 내부인걸요. 아켄섬 내부의 자금 흐름 중 8할은 생활동 안에서 돌고요. 생활동 안도 제 영역이기 때문에 마찬가지…”
거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로르텔은 말을 끝마치지 않았다.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듯이 눈가를 떨었을 뿐이다.
“생활동 내부나 학사동 쪽 말고도, 상회 자금이 닿은 곳이 있어요.”
“…어딘데?”
“여기요.”
너무나도 미약한 규모라서 신경이 닿진 않았다.
그래봐야 사람 하나 살 자그마한 별장 짓는 일이다. 엘테 상회에서 벌린 수 많은 사업들에 비하면 민망한 수준의 업무다.
사실상 로르텔의 사적인 업무에 가깝기 때문에, 실무 담당 직원 한 명이 도맡아 했다.
기억이 난다. 로르텔의 별장을 짓겠답시고 캠프까지 와서 부지를 측량하고, 자재를 수배하고, 설계 도면을 제작했던 상회 직원이… 바로 듄 그렉스다. 겸사 겸사 선물로 증류주도 하나 놓고 갔었지.
“아무리 그래도 상회 일인데, 여기 건축에 들어간 자금이나 현황도 다 네가 보고 받았을 거 아니야?”
“맞아요. 건축 그 자체에는 별 다른 문제가 없었어요… 다만, 제가 방학에 올덱으로 떠나 있는 동안은… 이 별장의 건축 현장은 듄 그렉스가 관리했을 거잖아요?”
로르텔은 그대로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브 자락을 여미고 침대 옆에 있는 자그마한 문 쪽으로 나아갔다. 고풍스러운 목재 문을 여니,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
“…여기는?”
“와인저장고로 쓰려고 만들었던 지하 공간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로르텔은 얼른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내가 뒤 따라서 내려가자, 로르텔은 낑낑 대며 지하실 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열쇠가 아직 로르텔에게 없는 것이다.
“벨 씨에게 부탁해서 와인을 가져와 저장고에 보관해놓을 생각이었어요. 윽, 윽…! 근데, 개학이 가까워지고 별장 건축도 끝났는데 듄이 지하 저장고 열쇠를 주지 않더라고요.”
“대충 이제 나도 알 것 같다. 비켜라.”
로르텔의 팔을 휙 잡아 끌어서 옆으로 가볍게 밀어버렸다. 그렇게 공간을 확보한 후, 어깨로 문을 쿵쿵 밀어냈다.
튼튼하게 만들어진 지하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로르텔에게 시선을 보내자, 로르텔은 마력을 이끌어내서 지하실 문을 통째로 부숴버렸다.
– 콰아아앙!
와인저장고 명목으로 확보해놨다고 하던 지하공간이 흙먼지 속에서 드러난다.
“…”
“…”
나와 로르텔은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서 있어야만 했다.
와인저장고 안에 가득한 것은… 금화의 산이었다.
한 두푼이 아니다. 척 봐도 막대한 금액의 금화다.
뿐만 아니라 엘테 상회 내부에서 관리하던 귀중품들이나, 고가의 마공학용품, 결정적으로…. 수많은 고급 증류주들이 여기 저기에 가득히 쌓여 있었다.
듄 그렉스는 틈만 나면 상회 장부를 조작해서 야금야금 횡령하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약삭 빠른 상인들과 일하다 보면 그런 얌체 같은 인간 몇은 쉽게 만날 수 있는 법이다. 일 처리만 확실하다면 사리사욕에 휘둘려서 몇 푼 빼돌리는 것 쯤은 눈감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조차도 연기였다고 하면.
베레모를 돌려쓰고, 실무위원석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듄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 날카로운 눈매는 먹잇감을 탐하는 독수리의 그것과 같다.
사리사욕과 탐욕에 휘둘려서 공금에 손을 대는 삼류 횡령꾼조차도 그가 구축해낸 캐릭터일 뿐이고.
해외의 희귀한 술 따위를 수집하며 졸부 흉내를 내는 것조차도 전부 유인수의 하나였다면.
로르텔 케헬른에게 ‘유능하긴 하지만, 뒷손으로 사리사욕을 챙기려 드는 삼류 사기꾼’이라는 이미지로 기억되어, 이용해 먹다 버리기 좋은 직원 중 하나로 인식 되려 했다고 한다면.
그렇게… 내가 상대를 완전히 컨트롤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드려고 했다면.
전부 가정법으로 이야기 하지만, 그 증거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 침착한 로르텔조차도 잠시 말을 잃고, 동공을 늘린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기나긴 세월동안 듄이 횡령해왔던 자금과 물품들이… 모두 하나도 빠짐 없이 이 지하실에 자리해있다.
듄은… 단 한 푼조차도 쓰지 않고, 모두 모아놓았던 것이다.
왜?
전부 로르텔의 횡령으로 뒤집어 씌우기 위해.
한 번에 큰 자금을 횡령하면 너무 티가 나고, 바로 로르텔의 제지가 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긴 세월 동안 야금야금, 횡령의 증거를 남겨 가면서…. 그 언젠가 다가올 반등의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로르텔 케헬른이 별장을 건축하라고 지시한 것은, 그저 이 소박한 캠프 생활에 함께 부대껴보고 싶었기 때문이겠지만.
듄 그렉스는 그 기회를 채서, 이 별장이 로르텔이 따로 횡령한 자금들을 모아놓는 비밀 저장고로 보이도록 연출해놓은 것이다. 아마 장부 쪽 작업도 이미 다 끝나 있겠지.
회주 대리에서 끌어내리는 명분으로는 이만한게 또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몇 년의 세월 동안, 얼마나 칼을 갈고 닦은 것인가.
수많은 기회들이 지나갔음에도, 더 확실한 기회를 채기 위해 얼마나 긴 세월을 암약한 것일까.
상대는 거상 로르텔 케헬른이다.
이렇게 까지 하지 않으면, 그 뒤를 칠 수 없다. 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로르텔의 별장 아래에 잔뜩 쌓여있는 금화의 탑.
이대로 황실군이 들이닥친다면, 정황으로만 판단해도 바로 신병을 구속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확실한 증거였다.
*야밤의 엘테 상회 실베니아지부 건물.
그 정원에서는 검성 테일리와 검귀 클레비어스가 치고박고 싸우는 와중이다. 그 전투에서 나오는 소음이 상회 건물까지 울려퍼지고 있지만, 그 소리를 제대로 듣고 있는 자들은 거의 없다.
– 캉! 카앙!
2층 입구에서 목재 의자에 앉아 검을 다듬고 있는 직스 에펠슈타인.
느긋해 보이지만 표정은 진중하다.
주변에는 갖가지 무기가 가득했다. 들고 온 레이피어부터, 커다란 장검, 자그마한 쌍수 단검, 활, 건틀릿, 메이스, 창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무기를 닦고 있는 직스의 모습은 마치 야생 속에서 홀로 이빨을 세우고 있는 맹수와도 같다.
– 카아아앙! 파악!
3층의 으리으리한 귀빈대기실에서 홀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예니카 페일로버.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정령들이 쭈뼛대며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귀빈 대기실의 거대한 창문 앞에서, 정면을 등지고 앉아 달을 올려다 보고 있을 뿐이다.
그림자 속에 묻힌 그녀의 뒷모습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감이 흘러 나온다.
– 카앙! 카앙! 카앙!
4층의 복도 끝, 홀 쪽에서 지팡이를 든채 로브를 뒤집어 쓴 트레이시아나 블룸리버.
고위 마법을 구사하는 데다가, 근접 전사를 상대로 한 결투 경험이 풍부한 전투 마법사.
가장 수준 높은 학년인 4학년의 마법부 수석인데다, 전사가 마법사를 상대로 그나마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근접전조차… 이미 통달해 있는 상대다.
그리고 옥상으로 나와서, 상회 뒷문으로 이어지는 추격로를 따라 남아있는 에드 로스테일러의 도주 흔적. 그것을 따라 북쪽숲 방향으로 한참을 달려나가야… 비로소 에드 로스테일러를 잡을 수 있다.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도달하려거든, 한 명 한 명이 말도 안되는 수준의 무력을 지닌 그 모든 층을 다 뚫고 돌파해야만 한다.
시련이란 거대한 벽과도 같다.
뛰어 넘을 엄두조차도 나지 않는 벽이라야 비로소 시련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테일리의 생애는 언제나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렇기에, 이게 가능한가 싶은 시련으로부터… 고통을 버티고, 이를 악문 채 살아남아 왔다.
테일리 맥로어가 고통에 가득찬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 떨어진다.
클레비어스의 검에 밀려나 바닥을 구른 뒤… 겨우 몸을 가누어 한밤의 야수를 다시 올려다 본다.
피에 미친 검귀가 은은한 달빛의 아래에서 안광을 빛낸다.
테일리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이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생애.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라고 했나. 하지만, 그럼에도 고통스럽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도 두 다리 붙들고 서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아일라 덕분이다. 그렇기에 테일리 맥로어는 절대로 쓰러지는 법이 없다.
그가 검신에 몸을 기댄 채 겨우 일어선다. 이미 반 쯤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몸이다.
남아 있는 시련도 아직 잔뜩이다. 그래도 테일리는 절대로 꺾이지 않는다.
두 눈을 부릅뜨고 공포스러운 검귀를 또렷이 바라본다.
그의 두 눈에 생기가 돌아온다. 몸을 타고 흐르는 검성식의 마력이… 다시금 테일리의 몸을 다잡기 시작한다.
시련의 검성 테일리 맥로어.
가득한 출혈과 상처, 그리고 기운이 빠져가는 몸을 이끈 채… 그가 다시 일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