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82)
에드 토벌전 (5)
엘테 상회 건물 4층의 복도를 가로지르며 달려나가던 아일라 트리스는 이미 숨이 차오르고 있었다.
지하 감옥에서 탈출해 4층까지 달려서 올라오는 동안, 아일라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처음 에드의 제안을 받았을 때는 스케일이 이 정도가 될 거라고 생각은 못했다.
엘테 상회 건물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인부들과, 각 층을 지키고 있는 에드의 지인들.
2층에서 태세를 가다듬고 있는 직스는 익숙한 평소 모습 그대로지만, 3층의 귀빈 대기실에 앉아 있는 예니카는 왠지 모르게 무서워 말을 붙일 수조차 없었다.
난장판이 된 복도를 지나쳐 4층에 도달했을 때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머, 생각보다 일찍 왔네. 그래도 빨리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날씨가 우중충한 게 곧 소나기가 내릴 거 같거든.”
이윽고 계획대로 4층의 복도 끝에 왔을 땐, 4학년 마법부의 수석, 트레이시아나 블룸리버가 아일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트레이시아나 선배님.”
“학술회에서 몇 번 얼굴을 봤었지. 반갑네.”
“네, 네에… 에드 선배님이 이런 저런 사람들을 부른다고는 들었는데, 설마 트레이시아나 선배님까지 와계실 줄은 몰랐어요.”
에드 로스테일러가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두루 알고 있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실베니아 학술회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트레이시아나까지 튀어나올 줄은 아일라도 몰랐다.
“이대로 옥상으로 올라가서 비상구를 거쳐서 에드의 캠프 쪽으로 가면 돼.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할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처리한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아일라는 조심스럽게 트레이시아나에게 물었으나,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일 뿐이다.
“부탁 받은 대로 할 뿐이야. 나는 널 에드의 캠프로 보내고, 테일리를 막아설 뿐이야.”
아일라는 4층까지 올라오면서 봤던 사람들의 면면을 다시 떠올렸다.
테일리 맥로어는 근 몇 년 간 정말 말도 안되는 속도로 강해졌다. 검성의 후예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매일 매일 정말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 그 속도는 그를 잘 아는 소꿉친구 아일라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 벽들을 다 뚫어낼 수 있을 정도냐 하면…
“표정이 안 좋네, 아일라.”
문득, 트레이시아나가 예리하게 치고 들어왔다.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안 일어나. 굳이 이 난리를 피우는 이유도 따져보자면, 다 걜 위해서기도 하고.”
“그걸.. 트레이시아나 선배님이 어떻게 확신하실 수 있는거죠…?”
아일라는 의아한 얼굴로 트레이시아나를 쳐다봤다.
에드와 트레이시아나는 그렇게 각별한 사이도 아니다. 이름난 마법사들끼리 선후배랍시고 가깝게 지내는 일이야 흔하지만, 저렇게 에드를 깊게 이해하고 있는 듯한 모습은 이상했다.
사실 이 오밤중에 에드가 불렀다고 해서 튀어나온 것도 이상한 일이다. 사적인 빚이 있든 없든, 이 정도로 골치아픈 부탁은 제 아무리 선후배 지간이라 해도 들어주기 쉽지 않다.
“쓸 데 없는 생각하지 말고, 당장 에드의 캠프로 가. 아일라.”
트레이시아나는 구구절절 이유를 설명하려 들진 않았다.
그저 담백한 말투로, 아일라에게 그리 말할 뿐이었다.
*칼을 잡아 끌고서는 한 번 허공에 휙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달빛을 받아 빛이 나는 테일리의 검은, 다시 굳건해진 그의 의지를 드러내듯 날카롭게 날이 벼려져 있었다.
이미 피의 광기에 거의 잡아먹혀 가는 클레비어스. 자기 수준에서는 이길 수 없는 적인가.
테일리는 직감했다.
정말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이 이상부터는 나도 선을 지킬 자신이 없다. 테일리.”
조금씩 이성이 사라져가는 클레비어스의 목소리에 위압감이 깃든다.
클레비어스 노튼데일이 언제나 싸움을 회피하는 이유는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다.
광기에 빠져 검을 휘두르는 자신의 검술은 사람의 목숨을 너무나도 쉽게 앗아간다.
“나한테 있어서 결투라는 건… 한 번 한 번이 전부 다 목숨을 걸고 외줄을 타는 곡예였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도 물러설 맘은 없어, 클레비어스.”
“그러시겠지.”
클레비어스가 검을 고쳐 쥐고, 붉게 물든 두 눈을 테일리에게로 향한다.
“으, 크흑… 흐으으… 크큭…”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상반신을 푹 숙이고, 기묘한 소리를 내는 클레비어스. 피의 마력이 그의 몸을 다시금 감싼다.
모든 전투가 목숨을 거는 생사결이다. 그 사실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는 가늠조차 안된다.
목숨을 건 상대를 마주했다면, 자신도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 결사의 각오를 한 적에게 어중간한 마음으로 마주했다간 순식간에 패배하는 법이다.
테일리도 이를 악물었다.
이 싸움은 절대 길어져서는 안된다.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 피를 흡수한 클레비어스는 더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 한 합으로 끝낸다. 둘 중 누가 베이든, 이번에 결과를 봐야만 한다.
그렇게, 두 사내는 바닥을 박차고 나아갔다.
클레비어스가 사라졌다.
너무 빠른 도약에 그 모습이 없어진 듯한 착각이 든다.
공기의 기류와, 사라지기 직전의 움직임을 보고 클레비어스의 다음 행동을 예측해야만 한다.
예측이라기보다는 예지다. 오감에 정신을 집중하고, 날선 감각이 피부를 타고 흐른다.
― 카앙!!
테일리는 우측으로 꺾여들어오는 클레비어스의 검격을 기적적으로 막아낸다. 검과 검끼리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한차례 상회 앞마당에 울려퍼졌다.
― 화아아아아악!
그 충돌로 인해 발산된 마력이 주변에 퍼져나간다. 바닥에 널부러져있던 잡동사니와 인부들의 소지품들이 허공을 날았다.
맹수처럼 크르르 거리며 숨을 내쉬는 소리. 클레비어스의 입에서 나는 소리였다.
바로 면전에서 피에 미친 귀신을 본 테일리는… 맞대고 있는 검에 꽉 힘을 줬다.
“사정도 모르면서… 참견하지 마…!”
― 카앙!
검을 한 번 튕겨낸 테일리가, 다시 한 번 이를 꽉 깨물고 전진한다. 크게 한 번 휘둘러진 검격은 클레비어스에게 닿지 않는다.
“참견?”
걸걸해져가는 클레비어스의 목소리가 테일리의 귓가에 닿는다. 이미 바로 뒤에 와있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은 테일리는 얼른 검을 돌려 클레비어스의 검격을 막아냈지만, 그 검 끝이 쇄골 언저리를 찌르는 것을 막진 못했다.
“커헉!”
깊은 상처는 아니다. 어떻게든 막아냈다.
그러나 몇 센티미터 정도 박힌 상처에서부터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왔다.
“보나마나 뻔하지. 테일리 네가 이렇게까지 절실하게 움직이는 건, 학회의 그 아일라라는 애 때문일테고.”
클레비어스 또한 테일리랑 부대껴서 학사 생활을 한지 꽤 됐다. 어느 정도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네가 그 애 일 아니면 이렇게까지 난리를 피울 일이 어디 있겠어…”
“너… 알고 있으면서…”
“알고 있는 게 뭐?”
그럼에도, 테일리가 엘비라에게 검을 휘둘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일라가 네 역린인 것처럼, 나한테도 역린이란 게 있어.”
까드득 거리며 이를 가는 소리. 클레비어스가 검을 더 깊게 집어 넣으려고 검에 무게를 싣자, 테일리는 한 차례 더 비명을 질렀다.
― 카앙!
어렵사리 클레비어스의 검을 튕겨낸 테일리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 일격을 위해, 온 몸의 마력을 끌어냈다.
클레비어스의 의지가 그렇다 하더라도, 테일리는 물러설 마음이 없다.
뿌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쥔다.
“크르르………….”
그렇게 클레비어스는 완전히 이성을 놓아버린다.
피와 검에 이끌려 눈앞의 상대를 베어버리는 데에만 혈안이 된, 검귀가 그의 대신 전장에 자리한다.
테일리는 당황하지 않는다.
죽음을 불사한 상대라면, 자기도 죽음을 불사할 뿐이다. 아일라를 두고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아예 처음부터 없기 때문이다.
완전히 이성을 놓은 클레비어스는 이제 걷잡을 수 없다.
눈 앞에 보이는 건 다 베어넘겨 버리면서, 제 체력이 다할 때까지 싸움을 반복하는 괴물이 된다.
― 화아아악!
드디어 클레비어스의 말도 안 되는 속도에 어느 정도 적응한 듯 하다.
아주 잠깐의 순간, 클레비어스의 준비 자세가 테일리의 망막에 똑바로 새겨진다.
공격의 방향도, 위력도 순간적으로 예상이 된다.
허나 맞받아 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한 번 해볼 뿐이다.
실패의 대가는 목숨이다.
폭발적으로 튀어나온 마력이 일대를 뒤덮는다.
희끗하게 물든 테일리의 머리칼이 한층 더 창백해진다. 붉은 눈동자에서 굳건한 의지가 흘러나온다.
검성식.
너무 깊고도 심오해 채 반의 반도 익히지 못한 수많은 기술들.
바닷속을 헤매는 듯한 부유감 속에서, 닿지 않았던 다음 경지가 테일리의 눈앞에 아른거린다.
서로 간의 역린을 걸고 마지막 검격을 주고 받는 두 사내의 사이.
어느 궤적을 타고 어떻게 검격이 오갈지, 그 누구조차도 예상치 못하는 찰나의 때.
이윽고 테일리가 검성식의 도리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 화아아악
마력의 충돌에 의한 충격파와, 그 탓에 휘날리는 오렌지색 머리칼이 테일리의 시야에 가득했다.
테일리와 클레비어스 사이에 뛰어든 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 없다.
“….뭣?!”
순간적으로 당황한 테일리는 팔뚝에 힘을 꽉 주면서, 공격을 멈췄다.
허나 이윽고 실수임을 깨달았다. 자신이 멈춘다고 해도, 완전히 광기에 물든 클레비어스는 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는 완전히 인간의 이성을 잃었다.
끼어든 소녀의 목숨 이전에, 함께 검격에 휘말린 자기의 목숨조차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검격을 이어나가는 것이 정답이었다. 허나, 마지막의 마지막에까지 와서 그는 망설이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달려든 엘비라를 베어낼 수가 없었다.
결투의 여신은 언제나 망설임 없는 자의 편을 들어주는 법이다.
테일리는 이윽고 날아들 클레비어스의 검격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으나…
“커억!”
이어지는 건 클레비어스가 바닥에 고꾸라지며 내지른 신음성 뿐이었다.
― 콰당탕!
“….뭐…?”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뜬 테일리의 앞에는… 클레비어스의 가슴팍을 꽉 끌어안고, 그와 함께 대리석 바닥에 넘어져 있는 엘비라의 모습이 보였다.
클레비어스가 흘린 피를 덩달아 뒤집어 쓰고서는, 그의 허리에 올라타서 가슴께의 옷깃을 꽉 쥔 채 그를 누르고 있었다.
“이건…”
“이렇게… 목숨 걸고 치고 박고 싸울 일 까진 아니잖아!”
클레비어스의 근력이 엘비라 하나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그는 혈검술의 광기에 물든 상태다.
완전히 이성을 잃으면, 자기 형조차도 베어버릴 정도로 앞 뒤 분간이 안되는 괴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비어스는 화들짝 놀라 자기 검을 제어한 것이다.
바닥에 고꾸라져 하늘을 올려다 보는 클레비어스의 눈에는 이성의 빛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시야에 들어온 얼굴이 누군지는 분간이 되는 듯 하다.
엘비라 에니스턴.
클레비어스에게 매사 쓸 데 없는 참견만 해대는 건방진 여자다.
클레비어스의 근력이 체구가 왜소한 엘비라의 무게 하나 버텨내지 못할 리가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엘비라를 밀쳐내버리고, 귀찮은 방해물을 베어버린 뒤 테일리와의 전투를 이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에 취한 클레비어스는… 그저 엘비라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괴로운 듯이 피의 마력을 뱉어 내고 있는 그를 엘비라가 내려다 본다. 어깨춤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그녀의 오렌지색 머리칼이 클레비어스의 뺨 끝을 계속해서 간질였다.
엘비라의 부스스한 머리를 예쁘게 내려 묶고 있던 머리핀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다.
완전히 풀어헤쳐진 머리를 갈무리할 생각도 없이, 광기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클레비어스를 이를 악문 채 쳐다본다.
“가, 테일리.”
“뭐…라고…?”
“상회로 가라고! 아일라 구할 맘 없어?!”
테일리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지금 클레비어스는 완전히 피에 취한 상태가 되었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앞뒤 분간 못하는 클레비어스는 엘비라까지 베어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엘비라는 테일리에게 윽박을 질렀다.
“지금 너한테 제일 중요한 게 뭔데?”
“그건…”
“아일라는 에드 로스테일러가 데려갔어.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할 일이야.”
그렇게 말하며, 엘비라는 클레비어스의 옷깃을 꽉 움켜쥔 채, 그의 가슴께를 다시 꾸욱 눌렀다.
“이래저래 쌓인 사과는 다음에 할테니까. 그냥 가. 지나가도 좋아.”
그렇게 말하며… 엘비라는 더 이상 테일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테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마른 침을 삼키더니… 이내 상회 건물 쪽으로 달려나갔다.
뭐가 어찌됐든, 테일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일라였다.
*출혈이 심하다.
클레비어스에게 이 정도 출혈은 일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엘비라에게 있어서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애초에 혈검술이라는 것이 그렇다. 중간이란 게 없는 검술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피를 원동력으로 쓰는 건 너무 위험했다.
오필리스관에서 루시가 난리를 피울 때도, 엘비라는 클레비어스가 광기에 찬 모습을 똑똑히 봤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베어버리려 하는 그 괴물 같은 모습은 뭇 사람들의 공포를 자아낸다.
“크윽… 크륵…”
허파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
기괴하게 몸을 비틀며 엘비라를 올려다 보는 모습.
그럼에도, 엘비라를 베어내버릴 생각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자기 친형을 베어버린 적이 있는 클레비어스의 과거가 무게추처럼 그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일까.
이미 덩달아 피를 뒤집어 쓰고 있는 엘비라는… 아랑곳하는 기색조차 없이 허리춤에 매달린 시약 하나를 꺼내들었다.
진정 효과가 있는 시약이다. 하지만 혈검술의 마력에 효력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클레비어스의 입을 벌리고 흘려넣으려고 하지만, 괴물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는 클레비어스는 입을 열지않는다.
“정신 좀 차려, 이 멍청한 클레비어스!”
검붉은 피가 눌러붙은 손으로 클레비어스의 입을 벌려보려 하지만… 끝끝내 광기에 넘어간 정신이 그녀에 대한 적개심을 지우지 않는다.
그러자, 엘비라는 뚜껑이 제거된 시약을 자기가 들이켜버렸다. 물론 완전히 들이키진 않고 제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하나 없는 모습으로 제 밑에 깔린 클레비어스에게 입을 맞춰버렸다.
“우욱, 욱…!”
클레비어스의 허리춤 위에 올라탄 채로 입술을 포갠 모습. 클레비어스의 얼굴을 끌어안고서 그 입술 안에 시약을 흘려내는 동안… 조금씩 기괴하게 몸을 비틀던 클레비어스의 반응이 잦아들어간다.
시약의 효과일까,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의 충격에 의한 것일까.
그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조금씩 클레비어스의 몸에 감돌던 검귀의 마력이 차분해져가고 있었다.
“푸하…”
입술을 떼어낸 엘비라가, 대리석 바닥에 손을 지지한 채로 그의 얼굴을 내려다 본다.
“왜, 쓸 데 없는 참견을 해…!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반쯤 울듯한 얼굴로 그리 이야기하며 내려다 보자,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고 있었던 클레비어스의 호흡이 차분해져 있었다.
검붉은 안광도 잦아들고… 날이 선 감각도 천천히 진정되어갔다.
“내가 할 말이야, 이 시팔…!”
그러나, 이성을 되찾은 클레비어스는… 이를 악물고 이야기 했다…
“뭐, 뭐?!”
“쓸 데 없는 곳에 끌고 다니고, 사람 묶어놓고 이상한 설교나 해대고, 구속하고, 쓸 데 없는 참견은… 네가 제일 많이 하잖아… 이 시..팔…”
혈검술의 반동이 클레비어스의 몸을 타고 오른다. 계속되는 출혈에 피가 퍼져나가지만, 클레비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매사에 참견해대는 건 너고, 부탁하지도 않은 짓을 해대는 것도 넌데, 왜 이번 한 번 좀 나서서 참견했다고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
엘비라는 문득 말문이 막혔다. 호흡도 마찬가지다.
― ‘참견 좀 하지 마.’
엘비라의 언니, 디엘라가 뺨을 걷어올리며 했던 대사가 은은하게 퍼진다.
― ‘너는 항상 네가 세상 만사의 주인공 같지?’
참견쟁이 엘비라.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그 이명이 엘비라의 어깨를 짓누른다.
자기 삶의 방식을 관철하겠다고 결심했지만, 그 굳은 결심은 사실 엘비라의 자기 방어 기제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조차 자기를 부정하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오기 때문이다.
언니 디엘라가 엘비라와의 관계를 끊고, 가문에서 나가버린 것도 어쩌면 제 탓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디엘라를 배려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피어 오르면,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팔… 마다할 수도 없고… 너는…”
그러나, 이윽고 이어지는 클레비어스의 말이 엘비라의 마음에 화살처럼 박혀들었다.
“그게 네 표현 방식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시팔… 개 같네… 진짜…”
“클레비어스, 너어…”
“너는… 날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 그러니까.. 뭐라고.. 싫다고 말할 수도 없고… 개같네 진짜!”
클레비어스가 이를 악물고 그렇게 말하자, 엘비라는 숨이 멎어들어갈 뻔 했다.
디엘라 에니스턴.
엘비라에 대한 열등감에 못 이겨, 폭언을 일삼고, 집을 나간 언니.
그런 디엘라를… 엘비라는 애초에 싫어하지 않았다.
에니스턴 가문에 부대껴 살면서 함께 연금술을 연구하던 언니의 존재는, 엘비라의 삶에 있어선 큰 축복이었다.
단지 엘비라는 표현할 줄을 몰랐다. 제 언니가 더 잘 됐으면 해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인 걸 알아서, 참견하고, 지적하고, 툴툴 댔던 행동들의 후회가 아직도 가슴에 사무치게 남아있다.
제 마음을 지키고자 강한 척 해봐도, 결국에 제멋대로 구는 참견쟁이일 뿐이다.
디엘라 에니스턴은 그런 엘비라를 이해해주지도, 그 속마음을 읽어내주지도 못했다.
둘 모두 어렸기에, 표현의 방식도 미숙했고, 그 미숙함을 이해해줄 어른스러움도 없었다.
그러나, 코앞의 한심한 사내는… 처음부터 그런 엘비라의 심리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엘비라의 참견과 심술에 전부 어울려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적당히 좀… 해… 엘비라…”
그렇게 말하며, 클레비어스는 입가에것부터 피를 흘렸다.
그의 허리춤에 올라타서 그를 내려다보던 엘비라는,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대로 허리를 숙여 클레비어스의 머리를 감싸안으며, 피칠갑이 된 그의 모습 때문에 코를 훌쩍여댄 것이다.
“너는… 진짜로 멍청한 남자야… 클레비어스… 이… 멍청이…”
“…”
한밤의 달이 빛나고 있었다.
어느새 정적만이 남아있는 상회의 앞마당엔, 두 사람 뿐이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힘이 잘 들어오지 않는 몸.
제 머리를 끌어안고 있는 엘비라의 어깨 너머로 탁 펼쳐지 밤 하늘을 보며, 클레비어스는 엘비라의 의견에 동감했다.
그렇게, 엘비라와 클레비어스는 한동안 몸을 포개고 있었다.
*
“일단 도망쳐라.”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로르텔의 지하 금고에 있는 이 금은보화는 지금 당장 어떻게 수습할 수 있는 수준의 양이 아니다.
시간과 여유가 충분하다면, 이 정도 수준의 수작질은 금방 해결할 수 있다. 그냥 이 재물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면 될 일이다.
그러나, 듄의 계획이 그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판을 짜놨으면, 황실의 호송대도 금방 들이닥칠 것이다.
“이렇게 상황을 연출해두고, 널 황실의 호송대에 넘길 생각이었던거야. 기사단 실권자를 자기 세력으로 둔 페르시카 황녀가 뒤에 있으니까, 일은 일사천리겠지.”
“방학이 끝나면 상회가 완전히 듄의 손에 넘어가 있을거라고 이야기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네요.”
로르텔이 표정을 굳힌 채 이야기했다.
“하지만… 황실의 호송대가 아켄섬까지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텐데. 그 시간동안 제가 이런 수작질 하나 수습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아니, 호송대는 이미 오고 있을 거야. 아마… 페니아 황녀의 호위대에 섞여서 오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말에 로르텔은 표정을 굳혔다.
꽤나 신빙성 있는 예측이었다. 굳이 딱 집어서 방학이 끝나면 로르텔이 몰락하리라 예언한 이유와도 연결이 된다.
방학이 끝날 때 쯤이 되면 페니아 황녀도 학사로 돌아올테니까, 그녀의 호위대에 섞여 들어온 기사단 호송대도 그 때 쯤 도착할 것이다.
즉, 로르텔이 황실 호송대에게 잡혀들어가는 건 방학이 끝날 무렵이 될 수밖에 없다.
그 타이밍에 맞춰서 모든 계획을 구축해놓은 것이다.
“당장은 황실 호송대와 맞닥트려서 좋을 게 없다. 내가 페니아 황녀를 설득하는 동안, 너는 호송대에게 잡히지 않도록 도망 다닐 필요가 있어.”
“그건 쉽죠. 아켄섬은 넓으니까.”
“작정하고 수색하면 도망다니기 쉽지도 않을거야. 거기다가 페니아 황녀는 널 신용하지 않으니까… 호송대의 수색을 딱히 저지하지도 않을테고. 학사까지도 적이 된 상태일테니, 널 도와서 숨겨줄 사람도 마땅치 않을거다.”
“그 동안 선배님이 페니아 황녀님을 설득하는 건가요?”
“그래. 나는 배신 안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는 로르텔의 팔을 이끌고 다시 캠프 쪽으로 돌아나왔다.
밤의 숲 사이로 스며든 특유의 공기가 폐를 간질였다.
한 밤 중의 로르텔은 평소와는 달리 묘하게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여우 같은 얼굴도 밤의 어둠 사이로 숨으면, 음흉한 기색이 한층 더 돋보이기 마련이다.
내 옷깃을 꽉 잡아쥔 로르텔은, 나와 눈을 맞추더니 이윽고 싱그럽게 웃었다.
“걱정 안해요. 선배님은 내 사람이니까.”
그렇게 읊조리듯, 행복하게 웃더니 로르텔은 까치발을 들어서 내 귀에 속삭였다.
“나도 선배 사람이고.”
그 별 거 아닌 한 마디가 마치 가슴에 묘한 행복감이라도 충족시켜주는 것인지, 로르텔은 넌지시 웃으며 로브 모자를 뒤집어 썼다.
“일 다 마무리 되고 다시 만나요. 나는 계속 엘테 상회의 회주로서 있을테니까. 선배님도 선배님으로 있어주세요.”
“그래.”
로르텔은 그렇게 밤의 어둠 사이로 스며들 듯 사라져 간다.
눈을 지그시 감는다.
나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 죽이고 앉아, 캠프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을 받아들였다.
맥세스 대교를 페니아 황녀의 마차가 건너온다.
한 밤의 공기를 가로지르며, 페니아 황녀와 루시 메이릴을 실은 마차는 아켄섬에 진입한다.
그리고 엘테 상회의 입구를 부수고 진입한 테일리는… 상회 계단을 타고 2층으로 달려나간다.
이야기는 그렇게 나아간다.
시련의 검성 테일리가 상회 건물 2층에 도달 했을 무렵이다.
온갖 무기가 가득히 퍼져있는 복도에, 홀로 고독히 앉아 있는 직스 에펠슈타인. 그가 새벽녘의 공기 속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테일리는 굳이 자기 눈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 앞길을 막아선 자는… 북방 초원지대의 수호자, 직스 에펠슈타인 본인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