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83)
에드 토벌전 (6)
“직스.”
차갑게 내리깐 목소리로 테일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2층 복도의 한 켠에 앉아서, 조용히 테일리를 기다리고 있던 직스 에펠슈타인.
그는 테일리와는 꽤나 절친한 친구다. 1막 시점에서부터 결투 에피소드를 통해 서로가 서로의실력을 인정한 사이이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해나가는 테일리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동료 사이다.
결투의 대가이자, 2학년 마법부의 공동 차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실력자.
1학년 초반 시점에서는 테일리는 도저히 비벼볼 수도 없을 정도로 막대한 차이를 벌려놓았던 직스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테일리도 학년 강자 반열에 든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일리와 직스의 간극은 여전히 남아있다.
검성식은 완전히 개방되지도 않았으며, 실베니아 입학 이전부터 쌓아왔던 결투의 경험은 압도적으로 직스 쪽이 높기 때문이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네가 상상한 이유 그대로다.”
직스 에펠슈타인은 완전히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가담하고 있는 상태였다.
여러 가지 무기들 사이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직스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직스 에펠슈타인은 테일리를 뒤로 보내줄 마음이 없다.
필요하다면 무력을 행사할 준비도 끝나있다.
직스 에펠슈타인은 언제나 상식에 기반하여 행동하는, 듬직한 학년 차석의 모습을 보여주던 소년이다.
그런 그가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붙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 테일리는 검을 잡은 채 손을 떨었다.
“왜?”
그런 테일리를 보고 직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한다.
“이제 와서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나? 나는 학생회 소속이고, 회장인 타냐 로스테일러의 지시를 받는 입장인데.”
제 아무리 학생회 소속이라 할지라도, 직스 에펠슈타인은 본인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는 인간이다.
학생회장의 권위를 달고 있는 타냐 로스테일러도 직스 에펠슈타인은 완전히 컨트롤 하진 못했다.
직스의 행동에는 어느 정도는 제 의지가 들어가 있다고 해석해야 함이 옳았다.
“그녀의 오라버니인 에드 로스테일러에게도 어느 정도 협조적인 게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지?”
“아일라가 잡혀있어.”
“알아.”
짧은 대답에 테일리는 동공을 확 넓히고 그를 쳐다본다.
아무렇지도 않게 제 자리에 앉아 있는 직스의 모습에는 미동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가만히 앉아 테일리를 바라보는 모습엔 굳건한 의지조차도 느껴진다.
테일리는 검 손잡이를 쥔 채 깊게 심호흡했다.
차갑게 식은 머리에 이성이 되돌아 온다. 이미 엘비라와 클레비어스를 상대로 검을 맞대고 온 상태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다고 숱한 다짐을 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다.
이미 테일리가 엘테 상회에 진입한 지 시간이 꽤 흘렀다. 내부에서 어떤 일이 더 벌어지고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많이 다쳤구나, 테일리.”
반대로 직스는 꽤나 의아해하고 있었다.
1층에서 엘비라와 전투를 하고 왔으리란 사실은 예상했으나, 생각 이상으로 테일리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클레비어스와의 난투로 인해 꽤나 피를 흘리고 있는 테일리의 모습은… 당장 목숨을 건 결투를 하느라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느낌이다.
아무리 엘비라가 진지하게 상대했다 해도, 저 정도로 다칠 거란 생각을 하긴 힘들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직스는 내심 망설임이 생겼다. 테일리의 상태를 보아하니 이대로 에드 로스테일러가 있는 캠프까지 도달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적당히 상대하다가 보내주는 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문득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이 뒤로 3층으로 올라가면, 왜인지 모르겠지만 화가 잔뜩 나있는 예니카 페일로버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정령술에는 손대중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 심지어 손대중을 할만큼 머리에 피가 돌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저렇게 많이 다친 상태로 예니카 페일로버를 만났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이런 판을 벌린 이유는 테일리가 진심을 다한 실력을 내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하고 싶어서다.
왜 그런 것이 궁금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에드 로스테일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섰을 정도면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다만, 시험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굳이 테일리가 이 상회 건물을 끝까지 뚫어낼 필요는 없다. 그냥 테일리의 힘을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왠지 모르게 상태가 위험해보이는 예니카에게 보냈다가는 더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슬슬 이쯤에서 테일리를 제압해버리는 게 그를 위해서도 더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직스 에펠슈타인은… 테일리가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무기를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한 손으로 창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목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 카앙!
테일리의 검격엔 망설임이 없다. 더 이상 시간을 끌려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반사신경으로 직스가 테일리의 검을 받아냈다. 창대에 막힌 채 부들부들 떨리는 검에 힘이 더 들어왔다.
눈을 부릅 뜬 테일리가 직스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 화악!
– 카앙!
그대로 직스가 창대 아래 부분을 발로 차서 창을 휙 돌려버리자, 그 움직임에 이끌린 테일리의 검이 휙 미끄러져 나가버린다.
그대로 직스는 몸을 휘어 꺾어서 창대로 테일리의 등을 후려치려 했으나, 이미 그곳엔 테일 리가 없었다.
“…?”
직스는 창을 회전시키며 갈무리 하고 얼른 자세를 잡았으나, 테일리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주변을 재빨리 스윽 훑어본 직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테일리의 위치를 놓친 것이다.
직스가 놓친 테일리의 위치는… 머리 위였다.
– 화아아아악!
– 카악!
– 콰아아앙!
갑작스러운 테일리의 위치 변화는 눈으로 좇기 힘든 것이지만, 직스는 어떻게든 동물적인 감각으로 반응해낼 수 있었다.
허리춤에서 롱소드를 역수로 꺼내들어, 테일리의 검을 어떻게든 흘려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속도는… 테일리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던 능력이다.
– 후우우욱
직스는 한 손으로는 창을 가지런히 들고, 나머지 한 손에는 역수로 쥔 롱소드를 굳게 집어든 채…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을 쳐다 보았다.
사람의 인지 능력을 초월하는 저 속도는… 직스의 기억으로는 테일리의 힘이 아니다.
오히려 저런 초월적인 속도를 내는 타입은… 다른 사람이다.
-파사삭
바닥을 긁어낸 채 일어선 테일리의 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진다.
마치 죽어있다 되살아난 시체처럼… 상반신을 늘어뜨린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
그 모습에선… 혈검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노튼데일 가문의 검귀가 떠오르고 만다.
직스는 눈살을 찌푸린 채 자세를 고쳐잡았다. 이제야 직스는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었다.
“하…”
초대 검성 루덴 맥로어는 검의 길에 통달한 괴물 중의 괴물로 이름을 날린 자다.
검을 쓰는 기술은 그 어떤 것이든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자다.
극한의 극한에 달한 테일리 맥로어의 습득력은… 가히 인간의 능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다.
본디 혈검술이란 제 몸에서 흘린 피의 마력을 이용해 신체 능력을 끌어내는 기술이다. 노튼데일 가문의 피를 타고난 자들이 아니면 흉내조차도 낼 수 없는 기술이기도 하다.
그런 피의 마력조차 없이, 클레비어스의 움직임을 거의 비슷하게 구현해낸 모습을 보고… 한줄기 소름이 피어올랐다.
극한의 극한으로 몰리면 몰릴수록, 더 강대하고 막대한 시련이 올수록… 어떻게든 이겨내고 그 다음의 경지로 나가는 자.
그것이 주인공의 삶을 사는 자이고, 시련의 검성이었다.
– 카앙!
직스는 역수로 쥐고 있던 롱소드를 대충 바닥에 집어던져버렸다.
──테일리 맥로어를 상대로는… 검을 써선 안 된다. 그대로 잡아먹혀버릴 가능성이 크다.
주변에 열심히 정리해놓은 여러 종류의 무기 중 거의 절반은 쓸모가 없어진 셈이다. 직스는 창을 다시 휙 휘두르며 자세를 고쳐잡고는… 테일리의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흙먼지 속에서 피어오르는 테일리의 의지가, 직스에게 곧바로 향한다.
– 카아앙!
창대와 검날이 부딪히는 소리.
다시 한 번 근접해서 눈을 맞추고, 테일리가 직스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말해.”
뿌드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어디에 있지?”
*
“맥세스 대교 쪽으로 마차를 몰아, 빨리!”
엘테 상회 건물 뒷문으로 빠져나온 듄 그렉스는 한밤 중의 생활동 거리로 뛰쳐나왔다.
엘테 상회의 건물 내부 상황은 이미 듄의 손을 떠났다. 검성 테일리가 난입해서 깽판을 치기 시작한 시점에서, 아일라를 확보하는 것 말고는 그를 진정시킬 방법이 없다.
일의 우선 순위를 확실히 정해야 할 시점이다.
캠프에 있는 로르텔의 별장에 온갖 횡령 자산들을 전부 가져다 놓았다. 로르텔을 횡령범이자 대역 죄인으로 만들 수 있도록.
그 상황을 설명하는 횡령 문서들도 모두 위조가 끝나 있었다.
듄의 입장에서는 캠프의 광경을 황실의 호송대에게 보여준 뒤, 로르텔을 황실로 잡아가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로르텔은 상회 집무실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잡혀있어야만 했으나, 에드의 개입에 테일리의 난입까지 겹쳐지면서 상황이 너무 꼬였다.
그래도, 핵심은 변함이 없었다.
지금 당장 로르텔이 어디에 있든, 상회 건물 상황이 어떻든, 그 모든 건 나중에 수습하면 될 일이다.
가장 중요한 건 로르텔의 횡령 건을 황실 쪽에 공론화 시켜서 그녀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이미 황실 쪽과의 연결은 닿아 있었다. 페르시카 황녀가 힘을 써서, 귀교하는 페니아 황녀의 호위대에 황실 기사단의 호송대를 섞어놓았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로르텔의 횡령 건이 드러나자마자 딱 요령 좋게 황실 호송대가 나타나서 그녀를 잡아가는 상황.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다소 작위적이게 느껴질 정도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명분이 확실하다. 로르텔이 엘테 상회의 실권을 내려놓게만 만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은 상황이다.
그러니 가장 급한 건, 황실의 호송대와 접촉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캠프의 상황을 전달하는 것이다.
일단 로르텔의 죄가 명확해지면, 다른 모든 상황은 듄이 주도권을 쥘 수 있다.
“빨리! 지금 당장 맥세스 대교로 가!”
마차에 올라탄 듄이 인부들에게 외쳤다.
얼른 마차의 운전석에 올라탄 마부가 말 고삐를 쥐었다. 듄은 마차의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남아있는 직원들에게 외쳤다.
“물자 담당 브리슨! 창고 문 다 닫고, 재고에 영향 안 가게 해! 장부 담당 포엘! 증거로 삼을 장부 자료들 다 취합해서 꽉 쥐고 있어! 절대 유실되면 안돼! 그리고… 수석 비서 리엔나!”
리엔나 비서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대답했다.
“네, 네에..!”
“정신 똑바로 차려! 건물 피해 최소화 시켜야 하니까, 외부 시설로 향하는 모든 문 다 문단속 해!”
“네, 넵…!”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우린 이미 선을 넘어왔어!”
출발하는 마차의 창문 밖으로, 듄이 확실하게 소리쳤다.
“로르텔 케헬른이 다시 상회 운영권을 쥐면, 우린 싹 다 죽은 목숨이야! 오늘 밤 안에 모든 일을 다 마무리 해야 돼! 알았어?!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목숨줄이 다 오늘 밤에 걸려있어!”
직원 일동은 모두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듄은 창문을 쾅 닫고, 마차 안에서 손톱을 뜯으며 이를 갈았다.
– 화악!
어차피 맥세스 대교로 이어지는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입구동은 생활동 내부에 위치해있다. 마차를 타고 가면 순식간이다.
상회에 남아있는 직원들에게 행동 방침을 전부 설정해주고, 입구동까지 도달한 듄은 얼른 마차에서 내렸다.
새벽도 이제 끝물이다. 소나기가 좀 내릴 것처럼 하늘이 우중충 하긴 하지만, 그리 길게 쏟아지진 않을 것 같다.
어차피 금방 해가 뜰 것 이다. 그 전까지 상황을 수습하고 싶었다.
깔끔한 벽돌 바닥과 가로수가 이어져 있는 입구동. 평소에는 학생들이 가득한 거리지만, 늦은 시간이라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그 사이를 뛰어나온 듄은 맥세스 대교 쪽으로 이어지는 입구에서 으리으리한 크기의 마차를 보았다. 아켄섬에 들어오기 위한 수속을 밟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왔다…! 페니아 황녀의 마차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에는 기본적으로 사병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제 아무리 고귀한 가문의 자제들이라 할지라도 학사 내에서 사병을 끌고 다닐 수는 없다. 다 허용해줬다가는 학사 내부가 사병 세력들로 개판이 되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사병의 출입이 허락된 자들이라 해봤자, 페니아 황녀나 클라리스 성녀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황녀와, 성도의 성녀한테까지 제한을 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허나, 그 두 사람 마저도 학사의 학칙을 배려해서 호위 인력을 최소화하고 다닌다. 그나마 규모가 좀 되는 사병이 들어올 때라고는, 이렇게 방학 때 귀교하는 황녀를 호위하기 위한 호위 병대 정도다.
실베니아 내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규모의 병단이다.
호위대 치고도 그 사람 수가 훨씬 많았다. 필시 로르텔을 잡아가기 위해 페르시카 측에서 보낸 호송대가 섞여 있는 것이다.
듄은 미소를 지으며 얼른 호송대 쪽으로 달려 나갔다.
“멈춰라! 지금 이 마차는 클로엘 제국의 제 3황녀,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 님께서 타고 계신다!”
그 주변의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호위대 하나가 듄에게 외쳤다.
“저는 엘테 상회의 듄 그렉스라고 합니다! 이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호위대 쪽에 전할 것이 있어 왔습니다!”
“뭐? 상인? 상인이 황실의 호위대에게 무슨…”
“저희 쪽에서 맡지요.”
근엄해 보이는 호위대를 제지하고, 다른 색의 갑옷을 두른 병사 하나가 나타났다.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장미궁 제 3관, 페르시카 황녀님의 직속 기사 튜네라고 합니다.”
투구를 벗은 여인 하나가 붉은 머리칼을 늘어뜨리며 이야기했다. 듄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황실 쪽의 호송대였다.
듄을 제지하려고 했던 호위대가 투구를 벗은 튜네의 얼굴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간 계속해서 신분을 숨기고 있어서, 이런 자가 호위대에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듯한 눈치다.
튜네는 황실 기사단에서도 기사단장과 부기사단장, 그리고 선임 훈련관 다음가는 4인자다.
“미리 연락을 받았습니다. 페르시카 황녀님께서 아켄섬으로 가서 듄 그렉스라는 상인을 찾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게 접니다.”
“그렇군요. 다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입구동까지 마중을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상황이 급박합니다. 지금 엘테 상회가 난리가 났습니다. 로르텔 케헬른을 당장 호송하셔야 합니다.”
듄이 다급한 어조로 튜네에게 이야기했다.
“북쪽숲 캠프로 향하면 그녀의 횡령 증거가 남아있습니다. 지금 당장 로르텔 케헬른을 잡지 않으면 그녀는 도주할 겁니다. 저희 상회 쪽에서 신병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만, 모종의 사건이 있어서 탈출한 상태입니다!”
뭐가 어찌됐든, 로르텔을 호송대로 넘기는 게 최우선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다.
듄은 최대한 다급하게, 한시가 바쁜 상황이라는 사실을 전달하려 했다.
“그건… 확실히 급한 상황이군요. 하지만 죄인을 잡기 위해선 먼저 현장 상황을 확인해야 합니다.”
“캠프로 바로 향하시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 상황이 많이 복잡해졌습니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에드 로스테일러가 주도해서 그녀를 빼돌렸습니다. 그도… 한 통속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렇게 듄이 외치는 순간이었다.
– 끼익
듄의 목적은 페니아 황녀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 따라온 황실의 호송대다.
페니아 황녀는 그냥 귀교하는 것일 뿐이니, 이번 사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러나… 상황은 듄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누구요?”
듄의 입에서 튀어나온 다른 사람의 이름이… 클로엘 제국의 고귀한 제 3황녀,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의 귀에 들어간다.
굳게 닫혀있을 거라 생각했던 마차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일국의 황녀가 행차한다.
수속을 처리하고 있던 학사 직원들과, 근처의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으리으리한 마차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페니아 황녀의 권위는… 근처의 평민들은 모두 고개를 드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정도로 막대하다.
“여기는 아켄섬이에요, 저는 이제 실베니아 학생으로 돌아왔고요.”
차분한 목소리로 페니아 황녀가 이야기 했다.
“이제 그렇게 예를 차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학업의 땅 실베니아에서는 신분의 격차로 인한 예절이 어느 정도는 간소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들과 직원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 말란다고 바로 안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신하의 예라는 것이 그렇다.
페니아 황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서는, 듄 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름 밤의 공기가 한 차례 밀려나고, 그녀의 뽀얀 피부가 달빛을 받아 빛이 났다.
듄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영광스러운 페니아 황녀님을 뵙습니다.”
“익숙한 이름이 귀에 밟혔네요. 로르텔 케헬른과… 에드 로스테일러라고요?”
여기서 페니아 황녀가 나타나리란 예상은 못했다. 제국의 고귀한 제 3황녀가 한낱 호위대와 상인과의 담화에 끼어들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로르텔 케헬른…”
그 이름을 듣자, 페니아 황녀의 시선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듄은 그제서야 지금 상황이 위기라기보단 기회였음을 자각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페니아 황녀와 로르텔 케헬른은 끔찍하게 사이가 나쁘다.
견원지간이라 봐도 될 정도로 둘 사이의 감정의 간극은 깊고도 깊었다.
뿐만 아니라, 페니아 황녀는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셀라하의 편을 든 로르텔에게 완전히 학을 뗐다.
그녀의 호송을 지원해줬으면 지원해줬지, 막을 입장은 절대 아니다.
이건 호재다. 그런 직감이 든다.
듄은 재빨리 눈치를 채고, 세 치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로르텔 케헬른과 에드 로스테일러가 붙어먹었습니다.”
로르텔 케헬른은 에드 로스테일러를 이용해먹고 버리는 버림말 정도로 여기고 있을 터.
페니아 황녀는 그리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구속 당해있던 로르텔 케헬른을 빼돌리고는… 상회 건물 쪽에도 술수를 써서 난리가 났습니다. 호위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디… 도움을 주십시오, 페니아 황녀님!”
그렇게 말하고 듄은 고개를 푹 숙였다.
페니아 황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생각에 빠졌다. 안 그래도 호위대의 병력 규모와 관련해도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던 와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학사에 도착하자마자 엘테 상회 측의 도움 요청이라니.
로르텔 케헬른을 중심으로 뭔가 기묘한 세력 구도가 형성된 느낌이다. 신중히 판단을 해야할 시점이지만… 로르텔과의 감정적 엇갈림이 계속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로르텔 케헬른에게 붙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로르텔이 세 치 혀로 그를 속여 넘긴 것인가.
허나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물이, 속이고자 한다고 해서 그리 쉽게 속여지는 인물이던가. 그럴 리가 없다.
“페니아 황녀님!”
잠깐 헷갈려 하고 있는 사이에, 듄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지금이 바로 기회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페니아 황녀를 일시적으로라도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훨씬 일이 쉬워진다.
“에드 로스테일러와 로르텔 케헬른을 일단 잡아들여야 합니다!”
페니아 황녀는 지금 비교적 중립의 위치에 서있는 인물이다.
어떻게든 페니아 황녀를 끌어들이려고 악을 쓰다시피 외친 듄은…
…본인이 최악의 수를 뒀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를 잡아들인다고?”
황실의 호송 마차는 오로지 황족에게만 허가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페니아 황녀가 내렸던 마차 안에서는… 또 다른 소녀가 내렸다.
열려 있는 마차의 문을 지나서, 통통 튀듯 계단을 뛰어 내려온 자그마한 소녀는… 제 상반신만한 마녀 모자를 고쳐 잡고, 흩날리는 스카트 자락을 털어대고 있었다.
듄 그렉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로르텔과 에드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중립 위의 존재 페니아 황녀와는 다르게…
그 소녀는 명명백백한 에드 로스테일러만의 아군이며, 그 외의 인물들에게는 별 다른 관심도 없는 자다.
그녀의 존재는 카드게임으로 치면 조커다. 판을 제 멋대로 뒤집어 엎어버릴 수 있으며,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끔찍한 변수. 흡사 자연재해다.
에드 로스테일러와 로르텔 케헬른을 잡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이름을 언급했던 듄의 간언.
마녀 모자를 쓴 소녀에게 있어, 그 뒤의 이름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앞에 있는 이름이다.
밤의 별빛은 여전히 입구동의 마차 주변을 환하게 내리쬐고 있다.
그 푸르스름한 빛 아래에서, 루시 메이릴이 쭈그려앉아, 고개숙인 듄의 앞에서 멍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상황 설명 좀 해줄래.”
듄의 등에서 식은 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코 끝에 맺힌 땀이 바닥에 떨어졌다.
“말을 잘 골라서 해야 할거야.”
*에드는 망치와 톱을 가져와서 지하실 문을 고쳐두었다.
부서진 잠금쇠는 새로 구할 수 없어서, 목재 창고를 잠글 때 쓰던 자물쇠를 가져와서 설치해 두고, 판자 몇 개를 가져와 추가적으로 못질해두었다.
그리고 별장 안에 있던 책장을 밀어서 지하실 입구 쪽을 가려두고, 그 외 다른 가구들의 배치도 바꿔서 입구를 완전히 은닉해두었다.
그리고 에드는 벨에게 열쇠를 받아서 별장 문을 다시 잠갔다.
“저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필리스관으로 돌아갈까요?”
“그러는 게 낫겠다. 여기 있어봐야 좋을 건 없어.”
그대로 그는 캠프 쪽의 모닥불 옆에 자연스럽게 앉아서 불을 쬐고 있었다.
엘테 상회는 완전히 난리가 나있을 것이고, 맥세스 대교 쪽에는 황녀의 마차가 오고 있을 것이다.
이 쪽이고 저 쪽이고, 목적은 바로 에드 로스테일러일 터다. 상황의 핵심을 쥐고 있는 자가 바로 그니까.
에드는 숨을 한 번 휙 들이쉬었다가,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타닥대는 모닥불 가에 앉아서… 조용히 상황의 변화를 기다렸다.
벨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하고선, 다소곳한 자세로 캠프를 떠났다.
떠나는 길에 잠시 뒤를 돌아 에드 쪽을 보니, 늘 그랬듯 그는 캠프파이어 옆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을 뿐이다.
밤의 어둠 속에 묻혀서, 조용히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는 에드 로스테일러.
그를 목적으로 달려오고 있는 자들이, 학사에 한 가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