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84)
에드 토벌전 (7)
심경이 복잡하다.
엘테 상회의 귀빈 대기실에 앉아 있는 예니카 페일로버의 마음을 한 줄로 요약해보면 그렇다.
[ 예, 예니카 아가씨. 그… 별 일 없을 겁니다. ]귀빈들이 대기하는 방인만큼, 층고가 높고 인테리어도 화려하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에는 온갖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잔뜩 재학하고 있기 때문에, 그 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엘테 상회도 이런 의전을 위한 공간 하나 쯤은 마련해두어야 했다.
생활내음이 물씬 풍기는 상회 전반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이 귀빈 대기실만큼은 고풍스럽고 깔끔한 이유다.
평민 출신인 예니카는 이런 분위기에 썩 익숙하진 않았지만, 오래 머무를 공간은 아니므로 별 신경을 쓰진 않았다.
금실로 자수가 된 소파에 가만히 앉아, 상회 직원이 내와준 차를 한 입 머금고 있었다.
워낙에 공간이 고풍스럽다보니 괜시리 귀부인처럼 행동해보았으나, 농장 일을 도맡아 하던 예니카에겐 아무래도 생활력 넘치는 공간 쪽이 더 어울리는 듯 했다.
찻잔의 받침대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멍하니 커다란 창문을 올려다 본다.
높은 층고에 어울릴 정도로 세로로 쭉 뻗어있는 창문에는 아리땁고 둥그런 달이 나를 봐달라는 듯이 떠있다.
귀빈용 소파에 홀로 앉아 멍하니 달을 바라보던 예니카는 또 다시 한숨을 푹푹 쉬고 마는 것이다.
그런 소녀의 주변에는 온갖 종류의 정령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몇몇은 현현되어 있었고, 몇몇은 그렇지 않았지만… 어쨌든 감응력이 뛰어난 예니카와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 그 불여우 같은 여상인이 수작질 할까봐 불안하긴 한데…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하는 여자잖아요? 설마 이런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에드 도련님이랑 시시덕댈 생각을 하기나 할까요? 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인데. ] [ 그, 그렇습죠…! 상인으로서의 제 명줄이 오늘 밤에 달려 있는데, 어찌 다른 쓸 데 없는 마음을 먹겠습니까?! ]작은 참새 형태를 한 바람 정령 카리스와, 푸르스름한 뱀 형태를 한 레논이 예니카를 격려하고 있었다.
정령들의 그런 필사적인 설득 속에서도, 가만히 앉아 차를 입에 몇 번 머금던 예니카는 별 말이 없다.
사실 정령들도 난처한 모습으로 예니카를 설득하고 있긴 하지만, 그 음흉하고 속이 꼬인 로르텔 케헬른이 이런 기회를 가만히 방치 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상황만 놓고 보면, 괴한들에게 잡힌 로르텔을 에드가 밀고 들어와서 데려간 것이다. 이 달밤에 둘만의 야반도주라도 하는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된 와중에, 정작 예니카는 길을 막는 역할로서 귀빈실에 앉아 홀로 차나 마시고 있는 중.
그 상황이 썩 마음이 들지 않아, 예니카는 찻잔 모서리를 우물거리면서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가장 심술이 오르는 부분은, 바로 자기 자신이 지금 상황에 고개를 끄덕였다는 사실이다.
테일리 맥로어의 성장세를 확인하고, 로르텔 케헬른을 빼돌리겠다는 두가지 목표.
그 상황을 구성하기 위해선 예니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본인조차도 납득해버리고 만 것이다.
좀 더 떼를 쓰고 심술을 부려도 괜찮았을 것인데, 늘상 심각해보이고 갖은 고민에 잔뜩 둘러싸인 에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 자신은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불쑥 피어오르고 말았다.
그 결과가 지금 이 꼴이다.
애초에 예니카 페일로버가 감정 갈등이나 주도권 줄다리기 같은 고급진 기술들을 구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상대가 심각해보이면 덩달아 풀이 죽고, 상대가 기뻐보이면 덩달아 자기도 기분이 좋아지는… 어떻게 보면 순수함 그 자체와도 같은 소녀 아니던가.
더군다나 그 상대가 에드 로스테일러가 되고 보니,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는 예스맨이 되어버리고 마는 꼴이다.
유체 상태로 엎드려서 그런 꼴을 보고 있던 타칸은, 허공에 콧김을 훅 내뿜으며 탄식했다.
남녀 관계라는 것에도 주도권이 있는 법이고, 그 주도권이란 것이 엎치락 뒤치락하는 긴장감이 있어야… 비로소 권태감도 없고 쉬워보이지도 않는 법이다.
대체 언제쯤 예니카 페일로버가 에드 로스테일러를 상대로 한 번 이라도 감정적 주도권을 쥐어볼 수 있을까.
그런 헛헛한 생각이 들어서… 탄식만 흘러나오는 것이다.
“맛있다…”
그 와중에 야속하게도 차는 맛있다.
예니카는 찻잔을 다시 내려놓고는 한밤의 달을 올려다 보며 툴툴거렸다.
– 쾅!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테일리가 진입하면서 난리가 난 상회 상황이다. 귀빈실을 지키고 있던 직원들도 상황을 보러 다 뛰쳐나간 와중이었다.
테일리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온전히 예니카 혼자만의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리엔나 수석 비서였다.
로르텔 케헬른의 전 담당 비서이자, 지금은 듄 그렉스에게 넘어간 실무위원이다.
언제나 자신감 없어 보이고, 쭈뼛거리는 어조로 일을 처리하던 모습이 선명하다.
예니카 페일로버도 캠프에 찾아왔던 그녀의 모습이나, 종종 로르텔의 뒤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 읏…?!”
상회 주요 시설의 문단속 상태를 확인하고, 다른 건물에 피해가 없도록 조치를 취하라는 듄의 명령.
그 말을 듣고 상회 뒷문을 따라 들어와서 얼른 시설을 확인하며 뛰어다니던 리엔나 비서가… 귀빈 대기실에 홀로 앉아 있던 예니카와 마주친다.
꽤 넓은 방이건만, 정령들이 가득 들어차있다.
달빛을 받으며 방안을 가득 매운 정령과, 그 가운데 귀빈용 소파에 앉아 찻잔을 집어든 소녀.
슬쩍 창문 쪽에서 고개를 돌려 리엔나 비서를 보자, 그녀는 뒷걸음질 치며 어깨를 떨었다.
“히, 히익…”
어둠 속에 묻혀 눈만 빛나는 정령들이 한 가득.
그 중에서는 슬슬 유체화 상태가 풀려서 현현되어가는 고위 불 정령, 불도마뱀 타칸까지도 보인다.
귀빈 대기실은 정말 넓은 편이건만, 타칸의 몸집에는 너무나도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제 몸집을 온전히 현현하지도 않았고, 거기다가 몸을 꽉 쭈그려서 엎드리고 있는 형태임에도 천장을 가득 매우고 있다.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눈 앞의 모든 적을 물어 뜯을 준비가 되어있는 정령의 무리들.
그 틈바구니에서 소녀가 차를 마시며 앉아있었다.
*- 카앙!
“에드 로스테일러의 위치를 말할 생각이 없으면 비켜!”
테일리의 검격에 생각보다도 더 속도가 붙었다. 계속해서 직스를 밀어 붙이며 들어오는 테일리의 대검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직스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싸우는 와중에 계속해서 더 강해지는 기질.
1학년 때 전투 실습에서, 테일리와 싸워본 직스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궁지에 몰릴수록 더욱 더 성장해나가는 테일리의 모습에 직스는 감탄했고. 여러 시련 속에서도 끝끝내 제 의지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며 박수를 보냈다.
세상이 하나의 무대라면, 필시 이 소년이 주인공의 삶을 사는 자다.
시련과 역경에도 마음이 꺾이는 일 없이, 계속해서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사내다.
직스 또한 궂은 시련 속을 헤쳐온 사내로서, 테일리의 그런 정신력을 몇 번이나 고평가했다.
– 카악!
그러나, 세상에는 생각보다 드높고도 가혹한 시련이란 것이 많다. 몸을 다치게 하고 마음을 부수는 시련 또한 많다.
자기 또한 에드의 계획에 가담한 입장에서, 테일리의 입장에 공감해 동정하는 건 너무 이중적인 태도다.
무릇 사내라는 자가 하나의 길을 정했으면, 그 방향으로 무쇠의 뿔처럼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테일리 맥로어가 제 아무리 굳은 의지로 나온다고 해서, 지금의 직스가 그에게 손대중을 해주거나 봐주는 일은 없다.
창대의 방향을 휘어꺾어서 테일리의 옆구리를 후려치며, 직스는 이를 악물었다.
– 콰앙!!
직스의 창에 맞고 나가 떨어진 테일리는 그대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복도 내벽에 꽂혔다.
흙먼지가 한차례 피어올랐지만, 그게 흩어져 사라지기도 전에 그 속에서 테일리가 도약해 나온다.
직스는 바닥에 떨어져있던 건틀릿을 차올려서 휙 움켜쥐었다.
– 카앙!!
한차례 금속들 간의 충돌음이 복도에 퍼져나갔다. 직스가 한손으로 쥔 창을 크게 휘어꺾으며 다시 테일리의 측면을 공격했지만, 같은 수가 두 번 통할 리는 없었다.
– 콰각!
정신을 차려보니, 직스의 창이 두 동강 나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테일리의 대검은 직스의 건틀릿을 찍어누르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테일리는 그렇게 힘겨루기를 이어가면서 ‘동시에’ 직스의 창을 베어버린 것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검격.
벨 것인가 막을 것인가. 두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둘 모두를 선택해버리는 불합리의 영역.
‘검성식…!’
검성식 유파의 마력 검술 중 하나인 ‘환영(幻影) 베기’.
한 번에 두 대상을 베어버리거나, 있을 수 없는 타이밍에 방향을 꺾어 베어버리는…
힘의 움직임이나 물리 원칙을 아예 무시해버리는 비기.
초대 검성 루덴 맥로어에게 맞서던 두 마물이 마치 귀신에 홀린 듯 서로의 검상을 바라보며 사라졌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대처법은 없다.
적어도 화력전이 아닌, 서로의 기술을 겨루는 일대일 대인전에서는… 완전히 물리 법칙을 무시해버리는 상대의 움직임을 가늠할 방법이 없다.
– 파악!
일단 할 수 있는 일은 거리를 벌리는 일이다.
크게 뒤로 도약한 직스가 바닥에 있는 레이피어를 대충 주워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세를 취하자마자 다음 검격이 직스에게 날아든다.
이성조차 느껴지지 않는 테일리의 검격.
이를 까드득 갈며 직스를 공격한다.
레이피어를 집어든 것은 실책이다. 테일리 맥로어를 검으로 상대해서는 안된다.
그 사실을 방증하듯, 직스가 든 레이피어가 순식간에 두동강 나버린다.
검격은 피했지만, 그 충격이 남아있다. 직스는 이를 악물며 자세를 잡았으나, 검의 충격에 의해 바닥을 몇 번 굴러야만 했다.
“크, 후우….”
그 와중에 또 성장했다.
궁지에 몰린 시련의 검성은,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반드시 강해진다. 이제는 법칙이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당연한 사실이다.
“훌륭하구나, 테일리.”
직스는 건틀릿을 낀 한손을 한 번 휘어꺾고, 나머지 한 손에는 메이스를 들어올렸다.
“습득해나가는 속도가 말이 안되는걸.”
“제발 비켜, 직스. 너와 더 할 이야기는 없어.”
“아니, 넌 여기서 그만 멈춰줘야겠다.”
직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시련에 강한 테일리의 기질은 잘 알았다. 그러나, 그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직스가 지키고 있는 엘테 상회의 건물.
이 뒤로 더 나아가봐야, 테일리가 마주해야하는 건 더 압도적이고 막대한 규모의 시련들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시련에도 정도라는 것이 있다. 이 뒤에 남아있는 것들은 직스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자들이다.
이 이상으로 더 심하게 굴러봐야, 몸과 마음만 다치고… 잃는 것만 더 많아질 뿐이다.
그렇기에, 테일리는 지금 여기서 직스 자신이 제압해둔다.
테일리의 성장세는 직스를 뚫지 못하고 2층에서 좌절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 정도 결말로 마무리 짓는 것이 테일리에게도 좋은 일이다.
– 휘이이이이익
고위 마법의 발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직스가 진심이 될 때만 꺼내는 마나 무장이… 하나 둘씩 허공에 부유하기 시작했다.
모든 종류의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직스는, 마나를 활용한 무기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수백가지 종류의 무기들이 허공을 부유하며 제 주인을 기다린다.
“여기서 끝내자, 테일리. 이 뒤로 더 올라가서 좋은 꼴을 보진 못할테니까.”
“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야, 직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순식간이었다.
세상이 암전했다.
테일리가 한차례 검격을 가한 직후의 일이다. 직스는 순간적으로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당황했다.
그러나, 한 차례 검을 휘두른 테일리의 모습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벨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베는 자, 최초의 검성 루덴 맥로어.
그가 바라마지 않았던 이상의 기술들을 모아놓은 검성식 중에서도… 가장 극한의 검격을 추구하던 기술.
검성식 – ‘공간 절단’.
직스가 불러놓았던 모든 마나 무기들이 전부 베여나간 상태다.
직스의 무기들을 베어낸 것이 아니다.
그 공간 자체를 전부 베어내어, 존재를 무로 돌려버린다.
붉게 물든 테일리의 눈이 직스를 바라본다. 양손으로 꽉쥔 대검의 손잡이가 다음으로 향하는 곳은, 직스 에펠슈타인의 몸이다.
직스는 눈을 부릅뜨고서는 다시 마력을 끌어모았다. 기초 바람 마법인 바람 칼날이 테일리를 덮치지만, 그조차도 베어버린다.
단순한 횡베기도, 원소 베기도 아니다. 공간 그 자체가 무로 화해 사라져버린다.
막아선 안된다.
흘릴 수도 없다.
반드시 회피해야 한다. 오로지 회피하는 것 말고는 파훼법이 없다.
그러나, 테일리의 속도는 이미 한계를 뛰어넘어가고 있다.
몸은 만신창이다. 근육은 비명을 지르고, 출혈은 멈출 기미가 안보이며, 온몸 가득한 격통이 더 이상 검성식을 발현하면 위험하다고 테일리를 뜯어말린다.
당장 직스를 이길 수 있을지 어떨지도 알 수 없다. 직스를 꺾는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자가 앞길을 더 막아설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시점에서 몸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내봐야, 자멸할 뿐 아니던가.
그럼에도 테일리는 멈춰서는 일이 없다.
의지력 가득한 눈을 부릅 뜬 채 자세를 낮추고 직스에게로 파고든다.
*- 스윽
북쪽숲의 어두운 길을 가로지르던 아일라가, 문득 불길한 듯 뒤를 슥 쳐다보았다.
왜 그런 기분이 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불길한 느낌이 아일라 트리스의 등허리를 엄습했다.
“…”
일단 여기까지 와버렸으니 에드 로스테일러의 캠프까지는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일라는 자꾸만 쌔한 느낌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 에드 로스테일러가 아일라를 불러 냈을 때는, 단순히 테일리를 좀 자극 해서 그의 실력을 봐야겠다는 투였다.
허나, 로르텔 케헬른이 엮이면서 이렇게까지 판이 커져버릴 줄은 몰랐다.
아일라가 상상했던 것은 기껏해봐야 대련 한 번 정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내 예상과는 너무 다르게 흘러가잖아…’
이렇게까지 됐으면, 오히려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따져봐야할 것만 같다.
애시당초 이야기 했던 것과는 규모가 너무 커지지 않았나. 그렇게 물으며 이만 테일리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의견 개진도 할 생각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엄습하는 불길한 기분이 아일라의 뇌리에 스며든다.
로르텔을 구해내고 싶다는 에드의 의도는 아일라도 잘 알고 있다. 그 과정에서 아일라를 납치해간 것도 좋다. 덩달아 테일리의 그릇도 가늠해볼 수 있고, 상황을 한층 더 혼돈으로 몰아갈 수도 있으니까.
아일라 입장에서는 에드에게 진 빚도 조금 있다. 목숨을 빚진 적도, 이래저래 상황을 오해한 채 모질게 굴었던 일도.
허나, 그 부채를 갚는다고 쳐도 수지타산이 좀 안 맞는 것이 아닌가. 이 정도면 가혹한 걸 넘어서 잔인할 정도다.
한참을 풀숲을 헤쳐나가자, 드디어 아일라의 눈에 에드 로스테일러가 기다리고 있는 캠프가 들어왔다.
어쩌면 날뛰는 테일리의 최종 종착지가 되어야 할 곳. 그 마지막 무대.
에드의 북쪽숲 오두막 캠프.
사이좋게 서있는 예니카와 에드의 오두막. 그 한 켠에 있는 로르텔 케헬른의 별장.
중앙에 광장처럼 놓여있는 모닥불과, 그 주변에 가득한 여러 생존 장비들.
바닥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마공학 용품과, 제작용 도구들. 목재 제작대. 목제 쉼터. 여기 저기 묶여 있는 그물망과 사냥 도구들.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간의 생존 역사를 한 장면으로 요약한 듯한 캠프 정경.
그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에드 로스테일러를 보자, 아일라는 한층 더 불길한 기운이 강해져가고 있음을 자각했다.
“에드 선배님.”
낮게 깔린 목소리로 아일라가 에드의 이름을 부른다.
에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또렷한 눈이 앞머리로 그늘진 얼굴 사이에 드러났다.
모든 무대의 뒤에는 흑막이라 칭해지는 자들이 있다.
함부로 그 속내를 가늠할 수도 없고, 의도를 파악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자들이다.
완전히 파악한 줄 알았으나, 한층 더 깊은 함정을 파놓고 숨을 죽이고 있는 자들은… 언제나 그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이 가장 무섭다.
“왔냐.”
“할 말이 있어요.”
아일라가 그리 운을 떼자, 에드 로스테일러는 기다리기도 했다는 듯이 대답을 먼저 했다.
“넌 돌아갈 수 없다. 이 상황이 끝나기 전까지는.”
*무너져 내린 바닥이 보인다. 머리 위로.
직스는 얼른 정신을 차리자마자 상황 파악을 끝냈다.
“크윽!”
바닥에 내다 꽂힌 직스가 천장을 올려다보자, 그 위에서 직스를 내려다 보는 테일리의 모습이 보였다.
검성식의 반동으로 팔이 덜덜 떨리고, 여기저기 생긴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테일리 맥로어는 제 두발의 힘으로 똑바로 버티고 서있었다.
극한의 극한, 마지막 한 합을 주고 받는 상황 속에서… 테일리는 직스가 아니라 바닥을 베어버린 것이다.
길을 막고 있는 직스를 치워버리기 위해서.
직스는 얼른 몸을 가누고 일어섰으나, 테일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윗층을 향해 나아갔다.
“테일리! 멈춰! 거기서 더 나아가봤자, 너한테 더 좋을 게 없다!”
에드와의 의리가 있다. 최소한의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직스 에펠슈타인이, 에드의 계획 전반이나 모든 의도를 다 털어놓을 리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테일리가 더 다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최선의 수는 자기가 여기서 테일리를 제압해버리는 것이었을테다.
중간에 끼어 있는 입장이지만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직스라는 인간은 늘 그런 식으로 살았다.
그러나, 테일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앞에 뭐가 있는지는… 내가 잘 알아! 멈춰! 일단 멈추고 이야기를 들어, 테일리!”
그 앞에 뭐가 있는지. 직스는 알고, 테일리는 모른다.
그러나 테일리는 적어도 길의 ‘끝’에 뭐가 있는지는 안다. 바로 잡혀간 아일라 트리스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테일리는 계속 나아간다. 직스 에펠슈타인이 뭐라고 소리를 쳐봤자 그는 듣지 않는다.
그렇게 검성 테일리 맥로어는 직스 에펠슈타인을 뒤로한 채… 윗층으로 나아갔다.
떠나버린 테일리를 바라보며, 직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제 손을 떠난 일이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드높이며 테일리를 불러대고 있었다.
이윽고 테일리 맥로어는 엘테 상회 건물 3층에 도달한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흔적을 찾아서,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몸을 가눈 채 복도를 가로지른다.
숨을 몰아 쉬고, 흐릿한 정신을 부여잡은 채… 아일라를 찾아 헤맸다.
쭉 뻗은 복도는 길고도 길었다.
상회 내의 여러 서류들을 관리하는 부서들이 사용하는 방들이 가득했고, 손님들을 응대하기 위한 접견실도 쭉 늘어서 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 쾅!
그러나 이윽고, 복도 저 편의 거대하고 호화로운 방문 하나가 열린다.
“히이이이익!”
-콰당탕!
문을 열고 뛰쳐나온 리엔나 비서가 바닥을 구른다. 꽤나 거나하게 넘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킨 리엔나 비서가 눈물을 머금으며 복도를 달려나갔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눈을 질끈감고, 테일리의 어깨를 툭 치며 복도 저 편을 향해 달려나갔다.
테일리는 도망쳐 나가는 리엔나 비서를 보며,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테일리는 힘든 몸을 이끌고 리엔나 비서가 뛰쳐나온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그곳에는… 테일리는 상상도 못했던 광경이 펼쳐져 있다.
리엔나 비서가 보았던 광경이 무엇인지, 그제서야 테일리는 눈을 부릅뜨고 확인한다.
으리으리한 크기의 귀빈 대기실. 그 거대한 공간을 혼자서 차지하고 앉아, 접객용 쇼파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연분홍빛 머리칼의 소녀.
테일리 맥로어는 그 소녀를 잘 안다. 테일리에게 있어서… 그 소녀는 극복할 수 없었던 공포의 대상이다.
네일관에서 글라스칸의 힘을 두르고 날뛰던 모습, 오필리스관에서 만신창이가 된 에드의 앞을 막아서던 모습, 글래스트의 지하 연구실에서 고위 정령들을 부리며 길을 나아가던 모습.
예니카 페일로버가 으레 보여주곤 하는 철 없는 소녀의 모습을, 테일리 맥로어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에게 있어 예니카 페일로버라는 인간은 숱한 고위 정령을 수족처럼 다루는 인간 병기와도 같다. 공포의 대상과도 같은 것이다.
달빛을 등지고 앉아 있는 소녀의 옆에는, 에드 로스테일러가 쓰던 것과 똑같은 모양새의 지팡이가 뉘여져 있다.
에드에게 지원 받았을 여러 마공학용품, 충격강화 파동구나 갈퀴손, 마력 위상 변이기, 심지어는… 델 헤임 모래시계까지.
정정당당한 결투장 위에서 서로간의 전력을 다해 부딪히는 싸움일지라도, 테일리에게 승산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거기다가 에드의 손길이 묻은 수많은 마공학용품까지 두르고 있다고 한다면… 상황은 더 절망적이다.
찻잔을 들고 심드렁한 눈으로 테일리 맥로어를 쳐다보는 예니카 페일로버. 그 뒤로 펼쳐진 정령들의 군세는 하나 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상대다.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도달할 수 있을지 어떨지 이전에, 가장 이름난 그의 최측근이자… 가장 가까운 동료인 예니카 페일로버를 꺾을 수 있는 것인가.
시련이라는 것은 언제나 드높고 힘든 것이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가 있는 법이다.
테일리를 말리려 들던 직스의 외침이 아직도 퍼져나가는 듯하다.
“왔네.”
달밤의 어둠속.
접객용 쇼파에 앉아있던 소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꺾을 수 없는 시련이 몸을 일으킨다.
“빨리 끝내자.”
손대중 할 마음조차 없다. 공포의 대상은 테일리를 신경쓰는 기색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정령들의 몸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테일리는 어렵사리 검을 쥐었지만,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정령사 예니카 페일로버.
3층 귀빈 대기실을 지키고 앉아 있던 소녀.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도달하기 위해선 반드시 뚫어내야할 상대.
허나, 그 막대한 시련에서 벗어날 활로라 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