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85)
에드 토벌전 (8)
에드 로스테일러.
1막 중간 보스.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테일리 맥로어를 갈구다가, 추잡한 모습을 보여주며 비참하게 몰락하는 쓰레기.
늘어지기 쉬운 이야기 초반의 템포를 좀 잡겠답시고 급하게 넣은 것 같은… 그런 소모적인 인물.
이후 나오는 온갖 배경을 가진 중간 보스들이나, 서로 다른 이유를 가지고 흑막의 역할에 오르는 각 막의 최종보스들까지.
별 별 종류의 적들이 주인공 테일리 맥로어의 앞을 가로막지만, 에드 로스테일러야말로 가장 별 거 없고 얕은 인물이었다.
예니카 페일로버, 글래스트, 루시 메이릴, 크레핀 로스테일러, 성창룡 벨브로크에 이르기까지.
어깨를 짓누르는 기대감의 무게가 되었든, 상실에 의한 아픔에 비틀려 버렸든, 떠나간 자와의 약속이 남아있었든, 살아남기 위해 순수악을 자처해야 했든.
각 막의 최종을 장식하는 흑막들은 나름의 이유를 대며 그 무대에 섰다.
그러니, 별다른 서사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어야할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무엇이 허락될 수 있었을까.
주인공이 아닌 삶에도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그 무게감은 확실히 다를 터.
만약 이야기가 비틀려, 최종 흑막의 자리에 올라섰다고 한들…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어떤 사정을 뱉어낼 수 있을 것인가.
가문을 나와 비관한 끝에 삶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랄게 뭐 얼마나 남아있겠는가.
그렇기에, 은 그에게 아무런 무대도 할당해주지 않았다.
무대의 뒤편으로 조용히 내려와,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며 삶을 반추할 뿐이다.
스포트라이트가 닿지 않는 곳에서 불행했던 삶을 되새김질 하는 자에게, 무대의 조명을 비춰봤자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조명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제 삶을 영위해나가는 모두의 이야기다.
어쩌다가 흐름이 비틀려, 한 막의 최종보스로서 무대에 오르더라도 바뀌는 것은 없다.
무대 초반에 꼴사납게 퇴장하는 삼류 악역에서부터, 한 막의 최종을 책임지는 마지막 흑막이 되기까지.
많은 것이 변했다고 한들, 결국 지금의 그가 움직이는 목적은 하나 뿐이다.
살아남자.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 툭, 투둑.
그 생각에 답하듯, 빗방울이 한 두방울 떨어졌다. 소나기가 내릴 것 같다는 생각은 했으나, 생각보다 이른 타이밍이었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앞에 있는 모닥불에도 한 두방울씩 툭툭 떨어져, 탁한 연기가 조금 피어올랐다.
조금씩 약해져가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서, 아일라 트리스가 그에게 언성을 높인다.
이렇게까지 할 거란 말은 안했잖아요.
별 거 아니란 듯이, 그냥 대련 한 번 해볼 거란 듯이.
그렇게 아일라를 꼬드겼던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아일라는 목소리를 드높여 이야기했다.
테일리한테 돌아가봐야겠어요.
아일라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무릎에 팔뚝을 얹은 채 대답하지 않는다.
아일라는 뒤를 돌아본다. 지금 즉시 달려나가면, 엘테 상회 건물에 도착하면 몇 시 쯤이 되어있을까.
고군분투하고 있을 테일리의 모습이 불현 듯 생각난다. 정말로 테일리는 그 모든 벽을 다 뚫고 넘어오려고 하는 것일까. 그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만 같다.
다시 고개를 돌려보면, 이 모든 일의 흑막 ── 에드 로스테일러가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빗줄기 속에서 가만히 아일라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아일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성적인 인물이다.
무슨 행동을 하든 간에 합리적인 이유가 동반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빗줄기가 드세진다. 엘테 상회 건물에서도 마찬가지다.
엘테 상회 3층. 예니카 페일로버를 목전에 둔 테일리가, 기어이 검을 꺼내든다.
직감이 그에게 속삭인다.
절대로 못 이긴다.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의 가능성이 작용하더라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고위 정령을 자유롭게 다루며, 중위 정령과 하위 정령까지 합치면 세자릿 수의 군세다.
그 본체를 공격할 수 있다면 승리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정령들이 제 주인을 건드릴 때가지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거기다가,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한 호신 수단까지 잔뜩 두르고 있다.
인지 가능한 속도로 달려들면 충격 강화 파동구가, 마법을 활용하려 하면 마력 위상 변이기가 작동할 터.
설령 모든 가능성을 뚫고 일격을 먹인다 할지라도… 예니카 페일로버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자그마한 모래시계가 그 일격조차 무효로 돌려버릴 것이다.
전설급 마공학용품 – 델 헤임 모래시계.
마공학에만 숱한 시간을 쏟아야 겨우 하나 만들어낼 수 있는 전설급 마공학용품.
인간관계가 넓은 에드 로스테일러조차도, 정말 믿을만한 아군 중의 아군에게만 건네주는 보물이다.
무대의 끝에 서있을 에드 로스테일러가, 가장 신용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
그 사실을 방증하듯, 소녀의 몸에 두르고 있는 갖가지 지원품들은… 하나 하나가 고성능을 자랑하는 것들이다.
나약해져가는 정신이 테일리의 귓가에 속삭인다.
검을 내려놓아라.
꽁무니 빠지게 도망쳐라.
세상 그 누구도 너를 탓하지 않는다. 이 앞에서 도망쳤다고 한들, 너를 겁쟁이라 욕할 자는 아무도 없다.
할만큼 했다. 몸에선 피가 철철 흐르고, 다리에서는 힘이 당장 풀리려고 한다.
여기서 쓰러져도 된다. 고생 많았다.
그러나, 테일리 맥로어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머리 위로 피어오르는 잡념들을 흩어버리고, 이성이 사라져가는 눈을 다시 똑바로 떴다.
─강해지는 빗줄기들이 상회 외벽에 부딪히고, 미끄러져서 바닥을 향해 나아간다.
상회 건물 앞마당에 나자빠져있던 클레비어스.
엘비라는 완전히 녹초가 된 그를 잡아 끌어, 상회 외벽에 붙어있는 작은 지붕 아래로 어떻게든 옮겼다.
철푸덕하고 바닥에 앉아, 클레비어스의 머리를 끌어안고… 차분하게 내려오는 빗줄기를 올려다 본다.
─상회 1층에서는 파편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킨 직스가 흙먼지를 털어낸다.
크게 다친 곳은 없다. 애초에 테일리는 직스를 다치게 할 마음이 없었다. 길에서 비키게 하고 싶었을 뿐.
설마 이만한 넓이의 바닥을 검격 한 번에 전부 무너뜨릴 거란 생각을 하진 못했다.
직스는 문득, 1층 복도의 창문들에 빗줄기가 부딪히는 걸 본다.
숨을 훅 한 번 내쉬고, 파편에 걸터 앉아서 부디 큰 부상자가 없기를 바라며 휴식을 취한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있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이 입을 앙다문다.
한밤의 숲속을 달려나가던 로르텔 또한 코 끝에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음을 느낀다.
잠시간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푹 쉬고 로브를 뒤집어 쓴다. 인기척이 적은 교수동 쪽으로 나아가면서… 밤의 어둠 속에 더 깊이 스며든다.
로르텔은 기도한다.
부디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기를. 상회의 실권을 돌려받고, 또 에드와 시답잖은 농담이나 주고 받으면서 모닥불을 쬘 수 있기를.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뭐라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듄 앞에서, 루시와 페니아 황녀도 빗줄기를 느낀다.
호위대가 호들갑을 떨며 뛰쳐나와, 가림천으로 페니아와 루시의 머리 위를 가려준다.
투둑 대며 떨어지는 빗소리가 페니아와 루시의 귓가에 스며든다.
듄은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벌었으나,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이란 사실은 변치 않는다.
천천히 말을 이어가는 듄의 앞에서, 루시는 스커트를 한 차례 털고선 그를 노려본다.
엘테 상회의 4층, 홀로 앉아 지팡이를 손질하던 트레이시아나 블룸리버도 마찬가지다.
뻥 뚫린 천장 구멍으로 밀려내려오는 빗방울에, 소녀는 머리를 탈탈 털고 복도 깊숙이 들어온다.
콧김을 한번 흥하고 내뿜곤, 근처에 턱을 괴고 앉아 빗줄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다.
이 하룻밤에 많은 것들의 운명이 달려있다. 개학 전 마지막 새벽.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빗줄기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은, 각자의 심경을 가지고 아침해를 기다린다.
테일리와 아일라 또한 마찬가지다.
– 카아앙!
검이 이빨과 부딪힌다.
몸을 꺾은 뱀 정령의 이빨이 테일리의 오른 팔뚝을 파고들었다. 테일리는 비명을 지르고 뱀을 손으로 잡아 뽑으려 했지만, 상처가 더 찢어진다.
그 직후 달려드는 사자와 호랑이 형태의 정령들. 그 이빨을 검으로 받아냈으나, 다리의 힘이 풀려서 몸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 와장창! 캉!
평소라면 버텨냈을 공격이지만, 테일리는 이미 만신창이다.
그대로 복도 외벽에 매다꽂히자, 창문이 깨지고 유리조각들이 테일리의 몸 위로 떨어진다.
테일리가 비명을 지르고, 깨진 창문으로 밀려들어온 빗줄기가 테일리의 몸을 때린다. 상처에 스며든 빗물이 한층 더 강한 고통을 이끌어낸다.
이제 좀 포기해라.
여기서 더 버티라고, 아무도 너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다시금 그런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테일리는 이를 악물고 다시 몸을 일으킨다.
열려진 대문. 그 너머 귀빈 대기실.
소파 앞에 가만히 서있는 예니카 페일로버는 표정이 그리 좋지는 않다.
이렇게까지 만신창이가 되어서 달려드는 테일리를 더 두들기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에드 로스테일러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그녀가 아니다.
그저 테일리가 적당히 포기해주길 바라는 듯한 얼굴이다. 만신창이가 된 상대를 계속해서 공격하는 건 그녀도 바라는 바가 아니다.
예니카도, 직스도, 심지어 아일라조차도 이제 그가 적당히 하고 쓰러져주길 바란다.
그럼에도 테일리는… 유리조각과 물이 잔뜩 묻은 몸을 일으키고 일어선다. 비에 젖은 몸에 검사 교복은 딱 붙어있고,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도 얼굴에 다닥다닥 붙어서 초라해 보인다.
타는 듯한 의지력. 그러나 물에 젖은 몰골로 겨우 버티고 서있는 모습은 꼴사납기 그지없다.
“테일리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는… 선배님도 아실 거 아니에요!”
다 꺼져버린 모닥불.
빗줄기 속에서 아일라가 에드에게 소리친다.
“이만하면 됐잖아요!”
“…”
“굳이 이렇게까지 시련을 거듭하지 않아도… 테일리는 잘 헤쳐왔단말이에요!”
에드 로스테일러가 준비한 벽들은… 제 아무리 의지가 강한 테일리라 해도 뚫을 수 없다.
단순히 테일리를 자극해 몇 번 대련이나 할거라 생각했건만, 아일라의 예상과 다르게 에드는 완전히 테일리를 짓밟아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에드에게 진 빚도 꽤 있고, 미안했던 부분들도 꽤 있다. 아일라가 테일리의 제안에 가담한 이유다.
그러나, 아일라는 이 이상으로는 에드에게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에드 선배님?! 이렇게까지 해서 테일리가 강해진다고 한들, 그게 걜 위한 일이에요?!”
빗속에서 아일라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이야기한다.
챕터의 최종전을 장식하는 흑막. 몰락 귀족 에드 로스테일러.
테일리가 그에게 도달해, 그를 이겨내고, 시련의 끝을 맞이한다고 해서… 그렇게 해서 더 강해진다고 한들, 그게 테일리를 위한 일이란 말인가.
“선배님의 독선을 테일리한테 강요하지 마세요.”
빗줄기는 계속해서 지면을 때린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세상의 소리를 반쯤은 가려버린다.
그럼에도 아일라의 목소리는 확실하게 에드에게 닿는다.
비에 젖은 에드는… 아일라의 그런 한스러운 외침에도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테일리는… 테일리는…! 이제 됐어요. 이만큼이면… 할만큼 했어요…”
“아일라 트리스.”
에드 로스테일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일라를 바라본다.
아일라는 생각보다 더 진중한 에드의 표정에 숨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언제나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움직이던 사내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감정이 서린 것을 보고나니, 아일라는 당황해서 호흡하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하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던 인물이다.
주인공 테일리의 곁에서, 언제나 그를 격려하고 긍정해줬던 동반자 아일라 트리스.
지옥과 같은 현실을 살았다. 전쟁터의 포화 속이든, 평화에 취한 도시의 광경이든. 그 무엇도 고통스럽지 않았던 적이 없다.
그렇기에 테일리를 보고 위안을 얻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몇 번이고 실베니아의 낙제 검성을 플레이 하면서, 궂은 시련과 야속한 운명을 헤쳐나가던 그를 보고 많은 격려를 받았다.
이제는 의미 없는 과거일지라도, 기억 속에는 확실하게 남아있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렇게 빗줄기 속에서 다가와, 아일라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다 치더라도, 네가 걜 안 믿으면 어떻게 하냐?”
“…크, 윽… 뭐…라고요?”
“걔는 이를 악물고 버티는데, 네가 걔한테 포기를 종용하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일라 네가…”
에드가 이를 악물며 아일라에게 이야기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까지 날 것의 감정을 드러낸 에드 로스테일러를 본 것은 처음이다.
분노도 아니고, 실망도 아닌… 그 사이의 무언가다.
학사에서 언제나 조용하게 자기 본분에 충실하던, 묘하게 신비롭던 에드 로스테일러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렇게까지 안하면 다 죽는다.”
“뭐라고요…?”
“애초에 믿어줄 거라 생각도 안하긴 했다만… 이제와서 네가 믿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다. 다만 네가 그렇게까지 재촉한다면, 나도 이유를 말 못할 건 없지.”
아일라의 멱살을 틀어쥔 채로 에드 로스테일러가 이야기 한다.
“날 미친 놈 취급하든,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는 비겁자 취급을 하든… 네 맘이겠지…”
성창룡 벨브로크.
그 이름이 에드의 입에 올라오자, 아일라의 동공이 크게 한 번 떨린다.
무대의 막을 장식하는 최종 보스들에게는 언제나 어깨에 짊어진 짐이 있는 법이다.
허나, 정해진 무대는 이미 다 어그러졌다.
4막은 끝이 났지만, 5막에 제대로 진입한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작금에 와서는 모든 것이 미궁 속이다.
각 막의 최종전은 이미 다 몇 달 씩이나 당겨져서, 정사라는 것도 의미를 잃은지 꽤 됐다.
당장 언제 벨브로크가 부활할지, 언제 이야기의 끝이 도래할지 알 수가 없다.
4막 다음이 5막일지, 아니면 그대로 이야기의 끝일지조차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졸업장 따는 것을 목표로 유유자적하게 살겠다는 목표조차도 무색해진지 오래다. 이미 세상은 에드 로스테일러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어깨를 짓누른 비의 무게 속에서, 멱살을 틀어쥔 에드 로스테일러가 비에 젖은 채 이야기한다.
아일라의 동공에 비춰진 그의 모습은… 한 없이 진지하다.
5막이라는 것에 제대로 돌입했다면, 결국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최종보스라는 작자도 정해진 것이다.
몰락귀족, 에드 로스테일러.
방향 잃고 뻗어나가는 이 무대를, 닫아야 하는 자의 이름이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미동조차도 하지 않는다.
테일리를 바라보는 시선조차, 평소의 그녀 모습과는 비견이 되지 않을 정도로 차갑다.
– 카앙! 화아악!
측면으로 파고들던 테일리가 타칸의 꼬리질 한 번에 나가 떨어졌다. 귀빈 대기실의 벽을 타고 미끄러지며 한 번 구른 테일리가, 흙먼지 속에서 몸을 일으킨다.
의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거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형국이다. 당장 눈동자가 위로 밀려올라가고, 의식을 잃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예니카는 마른 침을 삼켰다.
두들기고 두들겨도 다시 일어나는 오뚜기와 싸우는 것 같다. 이만 하면 의식을 잃을 법도 한데, 절대 포기하질 않는다.
오히려 테일리의 공격 패턴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었다. 이성이 날아가지 않게 꽉 잡고 있는 와중에, 철저히 승리하기 위한 방법론을 모색해나가는 중이다.
단순 무력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그러나, 정령사라는 작자들을 이기는 법은 늘 정해져있다. 바로 정령이 아니라 정령사 본체를 제압하는 것이다.
예니카는 조용히 지팡이를 들어올린다. 새까만 목재에 이런저런 마공학용품이 매달려있었으며, 갖가지 정령식도 각인되어 있었다.
‘벼락맞은 천년 나무 지팡이’. 안 그래도 극한까지 올라간 예니카의 감응력이, 더욱 더 치솟아 오른다.
테일리가 이를 악문 채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천장 쪽으로 날아든 테일리는, 몸을 그대로 돌려 천장을 바닥처럼 밟는다.
바라보는 곳은 예니카 페일로버 본체다.
검성식 – 원소베기.
원소 정령들조차도 두동강 내버리는 테일리의 검격이, 주변의 하위 정령들을 전부 정리해버린다.
역소환 당한 정령들에 유체화 되어 사라져간다.
그대로 천장을 박차고 날아든 테일리가 예니카의 본체를 향해 나아갔다.
정령들이 그런 테일리의 동선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타칸이 그대로 꼬리를 휘둘러서 테일리의 움직임을 저지하려 했지만… 테일리의 원소 베기가 타칸의 꼬리를 동강내버린다.
원소 정령을 상대로 상성 우위에 있는 기술이다. 정사대로라면 1막 타칸전에서도, 타칸은 테일리의 원소 베기를 버텨내지 못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상성 우위라도 절대적인 무력차이를 이겨낼 수는 없다.
타칸이 포효를 내지르며 마력을 발산하자, 그 충격만으로도 테일리의 몸은 방향을 잃는다.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며 몸을 겨눠보지만, 중위 정령들의 원소 마법에 직격당하고 만다.
안 그래도 만신창이인지라, 작은 충격에도 의식이 왔다갔다 한다. 피칠갑이 된 몸이 비명을 지르지만, 테일리는 다시 몸을 겨누고서 예니카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다음 검성식이 발현된다.
공간절단.
한 번 한 번이 몸에 부하를 일으키는 검성식을, 몇 번이고 이끌어내며 정령들을 베어버린다.
그럼에도, 예니카 페일로버는 단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의 코앞까지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내 ‘충격강화 파동구’가 힘을 발현해 테일리를 밀쳐내버린다.
“크아아악!”
작은 충격으로도 몸이 찢겨져 나가는 것 같다.
그럼에도 테일리는 다시 정신을 부여잡고 일어섰다. 이를 갈면서, 예니카를 노려보았다.
“왜… 왜…”
피를 철철 흘리는 와중에도, 테일리는 이를 악물고 이야기 했다.
“이렇게까지… 그 남자한테… 가담할 이유는 없잖아요… 왜… 막아서는 거에요…”
피를 흘리는 테일리의 모습에, 예니카도 순간적으로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애초에 심성이 그렇게 독하지 못한 소녀다. 아무리 적으로 만났다할지라도, 저렇게까지 이를 악물고 버티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고 만다.
그럼에도, 예니카 페일로버의 마음을 꺾을 순 없다.
이 뒤에는 에드 로스테일러가 서있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테일리를 에드에게 보낼 마음이 없다.
“그리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야.”
어둠 속에서 똑바로 선 예니카는 몸에 생채기 하나 없다. 테일리의 힘으로는 작은 상처하나 낼 수 없는 자다.
“에드가… 악역을 자처했다면…”
예니카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확실하게 이야기 한다.
“그럼 나도 악역이야. 그게 다야.”
뭐가 어찌됐든, 예니카 페일로버는 에드 로스테일러의 편이다. 그 사실은 지천이 뒤집히더라도 절대 바뀌지 않는다.
“너는 이대로 에드를 만나게 된다면, 목숨을 걸고 덤벼들겠지.”
에드 로스테일러는 지금 마력조차 온전하게 쓸 수 없는 상태다. 반지의 반동이 남아있는 것이다.
제 아무리 만신창이가 된 테일리라 해도,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거야, 당연하겠죠.”
“그럼 나도 널 에드한테 보낼 맘 없어.”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예니카의 어조에 망설임이란 없다.
“포기해. 너도 스스로 잘 알잖아. 네 여정은 여기서 끝났어.”
빗줄기가 주룩주룩 내리는 엘테 상회. 이제 건물 본연의 역할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난장판이 된 곳.
테일리 맥로어는 이 3층을 절대로 뚫을 수 없다.
그 무거운 현실이 테일리의 어깨를 짓누른다.
– 타당, 탕!
검을 쥔 손에 힘이 천천히 빠졌다. 한계까지 혹사당한 테일리의 대검이 바닥을 구른다.
후들거리는 다리에서도 완전히 힘을 빠져, 테일리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어깨도 축 늘어뜨리고, 그렇게… 천천히 테일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
예니카는 그런 테일리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나름대로 고생이 많았구나.
나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모든 상황이 다 마무리되었음을, 정령들을 통해 에드에게 보고하려는 찰나였다.
– 화악!
검성식 – 허검술.
검 없이, 오로지 마력을 이용해서 검격을 발현해내는 그 일격이… 대기를 갈랐다.
마력검술만으로는 예니카를 지키는 정령들의 군세를 뚫어낼 수 없다.
그러나, 거의 의식을 잃은 테일리는 본능만으로 다음 단계를 발현해낸다.
“…!”
예니카는 재빨리 몸에 마력을 두르며, 델 헤임 모래시계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테일리의 검격이 향하는 곳은 예니카의 본체가 아니다.
예니카의 몸을 지키고 있는 정령 군세의 총 사령관 역할을 하는, 거대한 불도마뱀.
잘려나간 꼬리조차도 순식간에 복구해낸 채… 거대한 귀빈 대기실의 거의 모든 공간을 차지하고 서있는 저 고위 정령.
– 콰악!
허검술에 이어지는 다음 검성식이, 테일리의 몸을 타고 발현한다.
검성식 – 용살검(龍殺劍).
그 어떤 두꺼운 피부와 비늘도 전부 베어 넘겨버리는 예리한 칼날이 순식간에 타칸을 두동강 내버린다.
교수진들도 애를 먹는 고위 정령, 타칸이 잠깐 눈을 감았다 뗀 사이에 조각나 있었다.
테일리의 눈에는 의식이 거의 없다. 그저 본능에 이끌린 채로… 정령 군세의 본체 역할을 하는 예니카에게로 검격을 향하려 했지만…
– 카앙!
그대로 테일리는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이젠 정말 몸을 겨눌 힘조차도 없는 것이다.
타칸을 베어버리는 것만으로도 거의 모든 생명력을 동원했다. 타칸의 몸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테일리의 몸이 먼저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을 굴렀다.
“…”
예니카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로 테일리를 바라보았다.
테일리는 어떻게든 바닥을 밀어올리고,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으, 허억… 크아아악…!”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악을 써보지만, 테일리의 몸은 더 이상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몇 번이고 이를 악무는 그를, 예니카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나, 테일리 맥로어의 눈빛에는 아직도 투지가 살아있다.
그것이, 마지막 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