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89)
에드 토벌전 (12)
?붉은 나비 머리핀이 스테인드 글라스를 타고 넘어온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다 할 마법적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머리핀은 언제나 고귀해보이는 성녀 클라리스의 신실한 모습을 한층 더 고결해 보이게 만든다.
얼굴선을 타고 풍성하게 내려오는 백발이 교인을 위해 준비된 기도석에 펼쳐져 있는 모습.
순수함을 상징하는 그 순백색이, 머리칼부터 단아하게 차려입은 성녀복에까지 은은하게 물들어 있었다.
“아, 앗… 클라리스 성녀님. 귀, 귀교 하셨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학사 성당에 와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미리 언질을 주셨더라면…”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이다.
부지런한 성가대 당번은 이른 시간에 예배당 문을 열었다가, 간이 떨어질 뻔 했다.
텔로스 교단 소속의 신자라면, 평생 한 번 그 얼굴을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평생의 영예로 안고 살아간다던 그 고결한 성녀가… 혼자 예배당 안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언질 없이 와있어서 미안해요.”
철없는 귀족 자제 카일리 에크네로 있을 때와 달리, 성녀 클라리스로서 있을 때의 이 소녀는 언제나 그렇듯 고귀해 보인다.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갭이다.
“오, 올해 여름에는 클레드릭 수도원의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으셨군요.”
“학사 일정을 우선할 수 있도록 성황님께서 편의를 봐주셨답니다.”
“그,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기도하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할게 있나요. 제가 멋대로 들어와 있었던 건데요.”
사실 당황한 건 클라리스 또한 마찬가지다.
위장 마법을 각인시켜둔 펜던트를 잠시 풀고, 편안한 상태로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기도를 올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에 다른 신도가 들어올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 임기 응변으로 대응해야만 했다.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새벽기도라니, 어떤 심경에 변화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니면… 고민이라도…”
당번 학생은 그렇게 잠시 물었다가, 이윽고 다시 히익 대면서 자기 혀를 깨물었다.
“아, 아앗… 죄,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은 질문을 드렸네요. 이, 잊어주세요…. 지, 지금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이 헛나왔습니다…”
“어머, 너무 어려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이제 다시 개학이잖아요.”
클라리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학생을 진정시킨 뒤, 손을 모아 쥐고는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텔로스 교단의 대행사인 클레드릭 수도원의 기도회에도 빠지고, 성황도 건물에서 멀찍이 떨어진 이 실베니아 학사에서 생활을 이어나간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참 신기해지거든요.”
“그, 그런가요…”
“그래서, 이번 학기도 큰 일 없이 잘 넘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주신 텔로스님께 기도하고 싶었을 뿐이랍니다.”
그렇게 이야기 한 뒤, 클라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내리깔았다.
그 모습이 과연 텔로스 교단의 경의를 한 몸에 받는 성녀라는 것이 확 느껴져서, 당번 학생은 숨을 머금은 채 뒷걸음질 쳤다.
홀로 예배당에 앉아 텔로스께 기도를 올리는 성녀의 모습. 예배당 안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성가대 학생은 절대로 방해해선 안되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대로 학생이 예배당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작게 울려퍼졌지만… 조용히 기도에 빠진 클라리스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주신께 드리는 기도의 문구는 항상 달랐다.
낮인지 밤인지, 안식일인지 강림절인지, 성황도인지 아니면 일반 성당인지, 교도들과 함께하는지 아니면 비교도들도 섞여있는지, 기쁜 시기인지 슬픈 시기인지에 따라… 전부 다른 문구다. 그 수많은 문구들을 클라리스는 어렸을 때에 이미 전부 암기했다.
그러나, 사적으로 올리는 기도의 문구는 언제나 제멋대로였다. 제 아무리 텔로스 교단을 대표하는 성녀라 할지라도, 그 정도 쯤은 편한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갖은 시련도 가득했고, 아픈 경험도 많았지만, 어쨌든 학사 생활은 클라리스를 언제나 들뜨게 만들었다.
언제 또 이런 생활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꿈만 같은 하루하루였다.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 잔뜩 있었고, 그리고 가까워지고 싶은 인연이라 할만한 사람도 생애 처음으로 생겼다.
그러나,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닐테다. 쌓아왔던 경험 또한 마찬가지다.
──성녀 클라리스는 에드와 함께 성창룡 벨브로크의 부활을 목도했던 유일한 소녀다.
에드가 벨브로크에 대해 논하면, 아무런 근거가 없더라도 의심 없이 믿어줄 수 있고, 이야기의 정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그것만으로도 에드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 존재가 되었는지, 스스로는 아직 아무런 자각조차 없기에… 다만 그의 앞 길에 펼쳐진 일들이 잘 풀리길 기도할 뿐이다.
좋은 일만 있진 않을 것이다. 분명 힘든 일도 있을 것이다.
남은 시련이 가득할지라도, 그걸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클라리스는 조용히 읊조린다.
–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자애롭게 보듬어주시는 신이시여.
– 부디 우리 앞길에 가득한 시련들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의지와 굳은 용기를 주시옵소서.
–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이성을 주시옵소서.
빗줄기가 내린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에드를 보자마자, 페니아 황녀는 레이스가 잔뜩 달린 우산을 내팽개치고 빗속으로 달려나간다.
신하들이 화들짝 놀라서 우산을 들고 페니아를 쫓아가지만, 페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흙이 잔뜩 묻은 에드의 몸을 똑바로 한다.
깊은 검상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리치는 빗줄기 때문에 피는 이미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신하들이 깜짝 놀라서 뛰쳐 나오지만, 페니아는 신경쓰는 기색조차 없다. 억 소리가 날 정도로 비싼 황족 드레스가 진흙과 피에 범벅이 되고 만다.
그대로 옷깃을 찢어서 지혈을 시도해보지만 출혈량이 많아 어림도 없다. 페니아 황녀는 병사들에게 소리를 질러서 당장 의무병을 데려오리고 명한다. 학사 쪽에도 의무 요청을 하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외친다.
– 참기 힘든 분노가 밀려올라올 때에도, 차가운 머리를 유지할 수 있는 품성을 주시옵소서.
테일리를 움켜쥔 멱살에 마력이 밀려올라온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테일리를 앞에 두고, 루시는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비가 내린다.
기억 속 소녀의 스승, 글록트가 떠나던 날이 떠오른다.
이제는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가슴 속에 남았던 그리움도 새로운 인연으로 치환되어, 루시의 마음 속에는 다른 빈 자리는 남아 있지 않다.
공허함은 애먼 옛날에 채워졌다. 그렇기에, 이제와서 이성을 잃고 날뛰는 일도, 분에 못이겨 일을 저지르는 짓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피어오르는 분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테일리를 노려보는 눈빛에 서린 서슬퍼런 한기가, 그의 등줄기에 한 줄 소름이 내달리게 만든다.
루시의 뒤로 수십 덩어리의 얼음 창이 떠오른다.
얼음 창은 중위 마법으로, 마법에 능숙해진 상위권 학생들은 왕왕 쓰곤 하는 수준의 마법이다.
그러나, 그 규모와 마력의 크기가 완전히 다르다.
하나만 구현해내도 학생 수준에서는 기진 맥진해지는 수준의 마법이건만, 루시가 발현해낸 얼음 창은 대기를 가득 메우고 있다.
루시를 올려다보는 테일리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보이질 않는다.
영창 조차도 하지 않았다. 마력을 끌어올리는 기색조차도 없다.
분노에 의한 반사적인 움직임만으로도, 이만한 규모의 마법이 구현된다. 그것은 루시 메이릴과 테일리 맥로어의 격차가 얼마나 절망적인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든다.
만신창이가 아니라 만전의 상태일지라도, 테일리는 루시의 발끝에도 미칠 수 없다.
분노에 찬 루시의 모습에는 일말의 자비심도 찾아볼 수가 없다.
뜨겁기보단 차가운 분노. 눈물을 흘리는 일도, 욕을 하거나 악을 지르는 일도 없이.
그저 차갑고 시리게 스며드는 그 한기가… 차츰 더 큰 공포감으로 변해간다.
– 한시가 급한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일의 이치를 먼저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반파된 상회 복도를 가로지르며 뛰어가는 리엔나 비서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듄이 완전히 상회 밖으로 나가버린 상황이다. 수뇌부가 없는 상태에서 상회 건물이 무너져내리는 대참사를 맞딱트린 상회직원들은… 이미 혼비백산이 된 상태다.
질서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일단은 뛰쳐나가야만 한다. 이미 엘테 상회는 정상화 되기 힘든 시점까지 왔다.
일의 전말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듄은 로르텔 케헬른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그 능글맞은 여우 소녀를 완전히 옥죄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녀에게는 남아있는 탈출로가 있었다.
리엔나 비서에게 피어오른 기억은, 귀빈 대기실에서 보았던 예니카의 얼굴이다.
온갖 정령들을 잔뜩 현현해낸 상태로 대기실을 지키고 있던 소녀는, 리엔나에게 있어서는 공포 그 자체였다.
애초에 겁이 많은 리엔나 비서다. 이빨을 꽉 깨물고 복도를 달려나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에 달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복도 옆 면 벽이 폭발하면서 파편이 튀었다.
리엔나 비서는 화들짝 놀란 가슴을 싸매며 바닥을 굴렀다. 벽을 부수고 나온 것은… 방금 전까지 리엔나 비서가 도망쳐왔던 그 대상이었다.
몰아치는 빗줄기가 반파된 상회 내부의 복도로 밀려들어왔다.
여기 있었네.
벽을 부수고 나온 예니카 페일로버가, 리엔나 비서를 보며 이야기 한다.
– 궁지에 몰리는 일이 생기더라도, 타개할 수 있는 대책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해주시옵고.
조교수 클레어가 로르텔 케헬른을 이끌고 트릭스관의 부교장 실로 이끈다.
이제와서 로르텔과 레이첼이 만나는 것이 썩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엘테 상회와 학사 사이의 관계는 이미 틀어질대로 틀어져서, 여기서 더 악화될 게 없을 지경이다.
뿐만 아니라, 척 봐도 꽤나 위기 상황에 몰린 것 같은 로르텔이… 레이첼 부교장을 만나서 뭐 얼마나 대단한 협상을 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로르텔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일단은 부교장 레이첼의 집무실 쪽으로 연락을 넣긴 넣은 것이다.
의외로 흔쾌히 수락이 떨어지자, 오히려 클레어 조교수만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결국, 못 미덥지만 당직 근무실에는 칼레이드 교수만 혼자 남겨놓고, 클레어 조교수와 로르텔은 나란히 트릭스관 내부로 들어간다.
또각또각 복도를 걸어서 부교장실의 문을 열자, 검붉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초로의 여성이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다.
실베니아의 부교장 복식은 그리 호화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단출하지도 않다.
깔끔하게 잘 착장된 복식 위로 푸르스름한 망토.
지나온 세월을 보여주는 팔자 주름과, 쭈글쭈글해져가는 손등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빈 말로도 젊어 보이는 여성은 절대 아니다.
교장 오벨 포시어스와 대립각을 세우며, 끊임 없이 엘테 상회와도 부정적인 인상을 쌓아온 자다.
레이첼은 클레어 조교수를 따라온 로르텔의 모습을 보고선,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학사는 듄이 계획한 이번 엘테 상회 탈취전에 가담해주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눈 감아 주는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냥 엘테 상회 측에서 독점하고 있는 몇몇 품목에 대해서, 독점 해제 약속을 받았을 뿐이다.
대체 내부 신경전이 얼마나 치열하길래 상인이란 작자들이 돈 될 권리를 내려놓는가 했더니, 결국엔 하극상이었던 것이다.
레이첼은 로르텔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하는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로르텔과 레이첼의 대화는 별개다. 학사의 최전방에 있는 자와, 상회의 최전방에 있는 자 사이의 교섭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결론이 나지 않는 법이다.
두 사람은 협상테이블을 보고 마주 앉는다.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이건만, 이럴 때마저도 로르텔은 요염하게 웃는다.
– 의도대로 되지 않는 일이 생기더라도, 다시금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현명함을 주시옵소서.
아일라의 몸에 어린 성위 마력의 기운이 사라져간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상처를 입으면서, 마력에 대한 제어력도 완전히 사라져버리자… 그제서야 아일라는 제 정신을 차리는데 성공한다.
장소는 꽉 막힌 목제 쉼터 안이다.
한 때는 루시 메이릴이 낮잠 장소로 애용했던 이곳은, 바닥에는 푹신한 모피가 잔뜩 깔려 있고, 천장은 목제 틀에다가 잎사귀가 큰 나뭇잎을 두껍게 덧대어 만든 간이 쉼터다.
입구가 꽉 막혀있어서 어두운 상황.
눈을 뜬 아일라는 고개를 휘젓고 몸을 일으켜 본다. 빗소리가 내부에 가득해서 바깥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지만, 어쨌든 한차례 소란이 오간 듯 하다.
어두워서 입구를 찾을 수가 없다. 그래도 아일라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벽 언저리 여기저기를 만져 본다.
바깥에서부터 인파가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한참을 더듬어댄 끝에, 겨우 겨우 옆으로 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문을 찾아낸다.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힌 손잡이를 낑낑대며 밀어보지만, 문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에, 아일라는 계속해서 손에 힘을 꽉 쥐었다.
– 그리고….
“….”
거기서 클라리스의 기도가 잠시 멈춘다.
상정할 수 있는 위기에 대해서는 모두 신께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상정하지 못한 시련이 훨씬 더 많은 법이다.
시련이라는 것은 예측되지 않기에 시련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클라리스이기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손에 힘을 꼭 준채 지그시 이야기 했다.
– 이겨낼 수 없는 막대한 시련이 왔을 때도, 겁을 먹지 않고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크윽, 흐으….!”
테일리는 공포를 이겨낸다.
그 앞에 막아선 시련이, 이겨낼 가망성이 전혀 없는 것일지라 하더라도… 벽을 두들기는 것을 멈추지 않는 자들이 있다.
침몰하는 배의 선장들이다.
혹은, 패전할 것을 알고도 수도를 지키기 위해 대형을 유지하는 병사들이다.
몰아치는 홍수를 보고서도 도망치지 않고 댐을 수리하던 인부들이 그렇고.
흉기를 든 살인마 앞에서도 제 자식을 등 뒤로 보내는 아비들이 그렇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 대단한 철학적 사유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숭고한 의지도 아니다.
지켜야만 하는 게 있다는 점이다.
그 간단한 사실 하나가, 사람이 버텨낼 수 없는 공포를 이겨내게 만든다. 그 끝에서도 계속 저항하게 만든다.
테일리는 루시의 조막만한 손을 피가 가득 묻은 손으로 꽉 움켜쥔다.
제 절반 정도밖에 안되는 몸집과 무게의 소녀이건만, 전신의 힘을 다해도 뿌리칠 수가 없다.
그럼에도, 테일리는 뿌드득 이를 갈면서 의지를 다해 저항했다.
“로르텔 케헬른의 별장이 저쪽에 있습니다… 호송대 진입 준비 끝났습니다…!”
“첩보 받은대로 지하 공간 위주로 수색해!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무슨 술수를 쓸지 모른다…!”
한 편, 에드의 상처를 꾹 짓누르고 있던 페니아 황녀는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페르시카의 명을 받아 호위대로 파견된 선임 훈련관 튜네는, 이와중에 호송대를 이끌고 로르텔의 별장을 급습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호송대의 인원은 한정되어 있다.
실베니아 내부로 들어오면서 수속을 밟느라 두고온 인원이나, 마차를 지키는 인원들이 빠졌고, 숲 내부 공간 특성상 많은 인원들이 한 번에 움직일 수 없는 악재까지 겹쳤다.
이 이상 인원을 분산 시켜서 좋을 게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에요? 사람이 피 흘리고 있는 거 안 보여요?”
에드 뿐만이 아니라 테일리도 상당히 다친 상태다.
야금야금 상처를 누적해온 테일리의 상태도 상태지만, 당장에 에드의 출혈부터도 심상치 않다. 출혈향만으로는 에드가 압도적으로 심각하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이대로 에드를 방치해뒀다간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황명이에요. 지금 당장 움직이세요.”
“페니아 황녀님.”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경각이라고요. 제 말이 이해가 안되세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페니아 황녀는 튜네를 똑바로 노려았다.
투구를 벗은 채 붉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기사. 늠름하고 믿음직하지만, 그 충성심은 페니아 황녀를 향해있지 않다.
그녀는 페르시카 황녀 쪽에 붙은 기사단장의 최측근이다.
페니아 황녀의 호위대라는 명목으로 파견되어 왔지만, 결국 목적은 페르시카의 명을 행하기 위함이다.
황명을 거역하는 것은 극형에 처해질 사안이다.
페르시카 황녀의 명과 페니아 황녀의 명 사이에서 궁지에 몰린 여기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이야기했다.
“페니아 황녀님.”
“선임 훈련관, 튜네. 제가 그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지 마세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죄인의 행적을…”
튜네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고개가 확 돌아가버렸기 때문이다. 놀란 튜네의 동공이 한차례 넓어졌다.
자애의 황녀,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
제 아무리 천한 신분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포용하며 인정해주는 성향이 그녀의 이명을 만들었다. 그녀가 장미궁에 있을 때에는 사람을 오로지 능력과 품성만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황실 바닥을 청소하는 청소 인부부터, 황실 요리장의 삼류 보조 조리원, 신입 메이드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평하게 보듬으려 했던 그녀의 기질은 이 음험한 권모술수의 세계에서 피어난 하나의 기적이었다.
황족 중에서는 이런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용인들 사이에서 돌던 그녀의 평가와 소문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그런 그녀가, 아랫 사람의 따귀를 걷어올렸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보고 있는 장소에서.
그 광경은 희귀하다 못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튜네는 물론이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병사들도 모두 숨을 삼키고 말았다.
단련하며 살아온 여기사의 뺨을 한 번 걷어올렸다고 한들, 그게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리도 없다.
평생을 고귀하게 자라온 뽀얀 손만 더 붉게 물들였을 뿐이다.
그러나, 빗속에서 미간을 좁힌 채 튜네를 노려보고 있는 눈매는 여전히 굳건했다.
– 쏴아아
빗방울 하나가 그녀의 턱선을 타고 내려온다. 끄트머리에서 대롱대롱 매달릴 때 쯤, 페니아 황녀가 입을 열었다.
“제발… 선을 좀 지켜주세요.”
“…”
“사람이… 사람이 검에 베여서 쓰러졌다고요.”
몇 번이고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에드의 일생사를 페니아 황녀 또한 이해하고 있다.
견디기 힘든 사실은, 그토록 악착 같이 살아온 에드의 일생에 있어 페니아 황녀야 말로 가장 큰 짐이자 벽이였다는 점이다.
“이렇게까지 힘들게 버티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 그게 할 말이에요?”
자기가 뱉은 말이 자기 자신을 찌른다.
가장 처음 그를 퇴학시킨 것도 자신이다, 중요한 분기점에서 매번 그와 대척점에 서있던 것도 자신이다.
비난과 질타, 의심과 멸시, 시련과 아픔. 그 근원을 찾아가보자면 대부분은 페니아 황녀를 향하고 있었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어둠과,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던 야생 생활, 어딜 가든 조롱 받던 학사 생활까지.
어느것 하나 고통스럽지 않은 게 없었던 일생임에도, 이를 악물고 삶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내. 언제나 그 반대편에서 사내의 눈을 노려보던 자가, 바로 페니아 황녀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 하나 남아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단 한 번도 페니아 황녀를 원망한 적이 없다.
심드렁하거나 무관심했던 적은 있었을지언정, 에드는 절대로 제게 주어진 처지를 남의 탓으로 돌린 채 삶을 비관하지 않았다.
튜네는 문득 페니아 황녀의 얼굴을 다시 마주보았다가 숨을 집어 삼키고 말았다.
그녀의 턱을 타고 흐르는 것은 빗물만이 아니었다.
코를 한 번 훌쩍이고서는 어떻게든 굳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속내를 파보면 그 나잇대의 유약한 소녀가 튀어나오고 만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간… 죽는다고요… 어떻게 부지해온 목숨인데…”
그 아득한 혈통과 권위 때문에,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최고로 고귀한 혈통을 타고 태어나, 으리으리한 장미궁에서 눈부신 드레스를 두른 고, 휘황찬란한 만찬회를 다닌다고 할지라도.
평민들의 집채만한 마차를 타고 다니며 세상을 내려다보고, 손짓 한 번으로 수백의 군세를 부리는 황족이라 할지라도.
한꺼풀 뒤집고 나면 보이는 것은 결국 자라다 만 소녀일 뿐이라는 사실이.
튜네의 머리에 장창처럼 날아들어 박혔다.
수년을 황실 기사단에 몸 담으면서 봐왔던, 황족들의 위세와는 완전히 반하는 모습에 그만 실감하고 만다.
황족 또한, 사람이다. 그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새삼 말도 안되는 반전이라도 된 것처럼 다가든다.
“…학사동 쪽으로 인원 편성하겠습니다.”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로 튜네가 이야기했다.
“튜네 훈련관님! 지금이 아니면…!”
옆에 있던 보조관이 뭐라 말을 하려 하자, 튜네가 손을 들어서 막았다.
이윽고 쓰러진 에드 쪽으로 가서 상처를 꽉 누르는 페니아 황녀의 모습에, 튜네는 잠시간 망설이다 이야기 했다.
“일단은 페니아 황녀님의 명을 따른다.”
“그, 그렇게 되면…!”
“로르텔 케헬른도 잡을 수 있다. 다만, 눈앞의 상황에 대처하는 걸 우선시 할 뿐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튜네는 병사들을 모았다.
의무 인력을 불러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테일리의 멱살을 쥐고 있는 루시 메이릴이다.
모든 상황을 끝내버릴 수 있는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소녀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테일리의 처우는 결정된다.
유일하게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소년도 의식을 잃은 채 피를 흘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발산된 마력이 하늘을 뒤덮어 가면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 아멘
마지막 기도를 끝마친 클라리스가, 그렇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스테인드 글라스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던 하늘엔 밤의 어둠이 어느덧 많이 물러가고, 슬슬 아침의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검붉은 먹구름도 꽤나 잦아들어서 외곽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엔 산들바람이 불고 있다.
아침이라 하기엔 너무 어둡고, 밤이라 하기엔 좀 밝은… 그런 경계 위의 시간.
클라리스는 새벽 공기를 느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크게 기지개를 한 번 해서 찌뿌둥한 몸을 한 번 풀고, 슬슬 예배당 밖을 나가려다가 신자들을 위해 준비한 목재 좌석에 발가락을 찍는다.
흐읍, 거리는 소리와 함께 혼자 아파서 끄응대다가, 이윽고 목걸이를 잡아들고서 다시 걸어나간다.
발가락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어떻게든 참아내고 다시금 고귀하고 성스러워 보이는 성녀의 모습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 뒤 짧게 심호흡.
폐속으로 들어오는 새벽 공기가 시원했다.
이쯤되면, 아침 공기라고 불러도 될만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