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95)
내 이럴 줄 알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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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 말입니까? 따로 수선이 필요한 피복류가 있으면 세탁 담당한테 전달해주십시오. 제가 따로 언질해두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수선하려고. 연습도 할 겸.”
“…수선 같은 것에 취미가 있으셨습니까?”
마물 생태학 수업이 끝나고 오필리스관에 들렀을 땐, 당장 급한 일은 다 마무리 됐는지 메이드들 사이에도 여유가 생겨 있었다.
원래 개학 직후가 가장 바쁜 법이다. 학생들도 어느 정도 다시 학사에 정착하고, 안정적으로 생활을 이어나가기 시작하면 메이드들의 업무도 다시 정해진 루틴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개학 직후의 혼돈도 금세 수습되어서, 이제 좀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
“굳이 직접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저희 입장에서야 수선 의류 한 두개 늘어난다고 해서 업무량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니, 고맙긴 한데 매번 오필리스관까지 와서 사소한 수선까지 전부 부탁할 순 없잖아. 내 시간도 아끼려면 간단한 건 내가 직접 해야지. 여긴 너무 거리가 멀어.”
오필리스관의 자랑 중 하나인 장미 정원.
장미 뿐만 아니라 온갖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선선한 초가을 바람에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늦은 오후 특유의 한산한 기운이 부드럽게 자리한 교내. 그 묘하게 기운 빠진 느낌을 만끽하듯, 여러 학생들이 장미 정원을 거닐며 식물마냥 광합성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메이드 장 벨은 깔끔하게 정원이 잘 관리되어있는지 체크하고 있었던 듯 하다. 다소곳한 자세로 정원을 거닐며 가지치기가 덜 된 관목 식물의 잎사귀를 불만스러운 듯 쳐다보고 있었다.
오필리스관 내부를 관리하고 있었으면 말을 걸기도 힘들다. 그 이전에 출입 자체부터 고역이다.
다행스럽게도 바깥에 있었기에 쉽게 용무를 말할 수 있었다.
“폐기 예정인 피복류들은 많이 있긴 합니다. 대부분 내부 직원용 의류들이라 여성복이긴 합니다만… 간단한 수선 연습을 하는 데엔 별 문제가 없겠지요.”
“어차피 버릴 거면 좀 받아가도 되지?”
“예, 다만 다 들고 가시려면 거리도 좀 되고… 또, 여성복을 잔뜩 안아들고 귀가하시는 것도 썩 묘한 광경이니 제 부하 직원한테 나중에 전달해달라고 지시해두겠습니다. 대략 열 벌 정도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지. 신경 써줘서 고맙다.”
“별 일 아닙니다.”
수제 활을 제작하기 위해서 단련해야할 스킬은 이제 수선밖에 남지 않았다.
간단한 천이나 가죽 수선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본격적으로 수제 활 제작 스킬이 열릴 것이다.
연습이야 시간을 내서 하면 그만이긴 하지만,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은 마음에 밟힌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금일은 개학 축하 겸 해서 내부 연회가 있습니다. 2층 홀이 개방되어 있으니 식사 하고 가셔도 무방합니다. 직원들한테는 일러 두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저녁은 캠프에서 해결하기로 말해뒀거든. 별다른 언질도 없이 먼저 먹고 돌아가는 것도 좀 그렇지.”
“…”
내가 그리 말하자, 벨은 또 묘한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요즘 들어 만사 무표정한 인간들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읽어내는 기술이 늘어나는 기분이다.
루시도 그렇고, 벨도 그렇고… 감정 표현이라는 것을 잘 하지 않는 인간들일지라도 심경에 변화가 있으면 은근하게 티가 나곤 하는 것이다.
루시는 항상 멍하고 정신 머리 없는 느낌이고, 벨은 항상 차분하고 침착한 느낌이라 둘 사이의 결은 묘하게 다르다.
그러나, 잘 보고 있으면 어떻게든 티가 난다는 사실만큼은 같다.
“뭐냐.”
“…네?”
“아니. 뭔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잖아.”
“제, 제가 말입니까? 그렇게 보였다면 실례군요. 죄송합니다.”
“아니, 네가 무슨 표정을 짓든 네 맘인데 내가 사과 받을 일은 아니지… 그냥 뭐 용무가 있어서 그러나 싶었을 뿐이야.”
그 말에 벨은 당황한 듯한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표정에 신경을 좀 쓰긴 해야겠군요. 항상 인상 관리에 소홀해선 안되는데, 그런 기색이 느껴졌다는 건 저도 좀 해이해진 모양입니다. 포커페이스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만.”
“그건 좀 과다한 걱정이야.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일일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군요. 하긴 에드 도련님은 사람의 기색을 잘 읽으시니까, 유독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벨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탄하듯 이야기했다.
“다만, 에드 도련님이 예니카 아가씨와 동거하신다는 게 좀 실감이 나서… 아련한 기분이 되었을 뿐입니다.”
“…네가 아련할 이유는 또 뭐냐.”
“오지랖이라는 사실은 잘 압니다만, 예니카 아가씨가 막 실베니아에 와서 적응하기 힘들어 하실 때 부터 쭉 생활을 보조해온게 저이기 때문입니다.”
벨은 다소곳한 자세를 바꾸는 일도 없이, 깔끔한 몸가짐으로 단아하게 이야기했다.
“당시에는 선임 메이드 였고, 지금은 메이드 장이니 입장도 많이 바뀌었습니다만. 그래도 감개가 무량한 것은 변함 없습니다.”
“애초에 걔는 시골 출신에 생활력도 워낙 좋아서, 메이드들의 생활 보조가 없어도 너끈히 자기 앞가림 정도는 했을 것 같긴 해.”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생활하시면서 불편하거나 필요한 게 있다 싶으면 문의해 주십시오. 오필리스관은 항상 물자들을 대량 매입하기 때문에, 남거나 버려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이야기지만, 이미 벨과 오필리스관 쪽에는 충분하리만치 많이 도움을 받고 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외부의 도움에 의존하기만 해서는, 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을테지.
그러니, 일단은 감사 인사만으로 벨의 호의에 응답해주었다.
“보아하니 오필리스관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겠다. 루시는?”
“오전에 외출하신 뒤로는 귀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딘가 명당 자리에서 낮잠이라도 주무시고 계시겠지요. 루시 아가씨를 만나실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온 김에 안부나 물어본 거야. 방에 없으면 캠프에 와 있을 수도 있겠네.”
“개학 행사 치르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겁니다. 그래도 일단은 실베니아 전체 수석이니까요. 기대 받는 게 많은 자리입니다. 쌓인 벌점이 무색할 정도로.”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희대의 천재. 참으로 영광스러운 자리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루시는 오필리스관의 최다 벌점 기록자라는 희대의 오명도 가지고 있다.
한 학년 내내 개판으로 살아도 200점을 넘기기 힘들다는 누적 벌점을… 루시는 혼자서 1000점대를 넘기고 있는 것이다. 성적만큼이나 벌점 또한 어마어마 해서, 압도적인 1위의 자리를 수성 중이다.
그러나, 벌점에서 오는 불이익 만으로는 루시를 컨트롤 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슬슬 생활 벌점이 직접적으로 성적에 영향이 가는 시점이 됐지만, 그녀의 압도적인 성적은 생활 벌점가지고 뒤집어 엎을 수 있을만한 차이가 아니다.
“사실 용무가 있는 건 다른 사람 쪽이야. 전할 말이 있어서.”
“오필리스관에 말입니까? 하긴, 에드 도련님은 오필리스관 쪽 사용하는 학생들과 안면이 깊지요. 따로 말씀해주시면 불러드리겠습니다.”
“아니, 됐다. 불러낼 만한 사람이 아니야. 그냥 편지만 남기고 갈게. 만나기도 힘든 사람이니까.”
“…?”
*
“그래서, 클레드릭 수도원에 결국 가기로 했다구?”
“페르시카 황녀가 온다고 하는 것도 있고, 클라리스 성녀님한테 진지하게 자리 잡고 이야기 할 것도 있어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냥 가는 게 확실하겠더라. 이럴 때 아니면 길게 이야기 나누기도 힘들고.”
에드 로스테일러가 캠프로 돌아왔을 때, 예니카는 저녁 식사 준비를 끝마치고 모닥불 옆에 앉아서 정령학 서적을 읽고 있었다.
예니카는 캠프를 관리하거나 기본적인 가사를 할 때, 평소에는 땋아내리는 머리를 뒤로 모아묶고 팔을 걷어붙이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 시골 출신 아낙네 같구나 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평소에 교복 잘 차려입고 단아한 학년 수석으로 있을 때와는 또 묘하게 다른 느낌이라, 뭇 학생들은 생활동에서 장을 보고 있는 예니카를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오필리스관에서 생활 보조를 받으며 살았을 때랑은 다르다. 자기 앞가림을 하려거든 매번 바쁘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동화 속 공주님만으로 살 수는 없다.
그런 예니카가 생필품을 뭘 살지 고민하거나, 식재료를 매만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학사의 학생들에게는 마치 동화 속 등장인물이 현실에 튀어나온 것처럼 기묘한 느낌이 든다.
예니카는 오히려 그런 상황이 썩 마음에 들었다.
고향 땅 퓰란에서도 오냐오냐 둥기둥기 해주는 사람들의 호의를 굳이 거절하고, 자기가 스스로 앞가림을 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라리스 성녀님한테 소식 전하려고 오필리스관까지 갔는데, 역시 직접 만나보기는 쉽지 않더라. 벨한테 편지만 남기고 왔지.”
“수도원… 수도원…”
예니카는 무릎 위에 책을 펼친 채로 그렇게 몇 번 되뇌었다.
클레드릭 수도원에서 며칠 간 머물러 본 타냐 입장에서야 할 말이 많았겠지만, 예니카는 클레드릭 수도원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
다만, 제국 서쪽 해안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있는 바다 위 신성한 성소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수도원’이라는 단어에서 나오는 특유의 정갈한 이미지가 있다. 세파와는 동떨어진 곳에서 초연하게 앉아, 신의 뜻을 받는 사제들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딱히 뭐 위험한 것도 없는 곳이고, 단지 끔찍하게 재미 없고 조용한 장소라는 느낌이다.
예니카는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며 생각한 끝에, 이윽고 그녀다운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필요하다면 다녀와야겠지… 그래도 에드, 학기 중간에 그렇게 멀리까지 다녀오면 학사 커리큘럼 따라가는 데 너무 힘들지 않아?”
“딱 일주일 다녀오는 건데 그리 치명타도 아니야. 미리 대비도 좀 해두고 갈 거고.”
“그렇구나. 근데 클라리스 성녀님한테 용무라는 건 뭐야? 그 어마어마한 성녀님한테 개인적인 용무라니, 뭔가 대단해 보여…”
예니카는 신분이 고귀한 자들에 대한 묘한 동경이나 부담감 같은 것이 있다.
사실 코앞에 있는 에드 로스테일러도 일단은 가문에 복권한 귀족이긴 하지만.
“…”
“…?”
예니카의 그 질문에, 문득 에드는 잠시 고민에 빠진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뭔가 말을 해야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는 듯 하다.
예니카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에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졸업 전까지 꼭 마무리 해야만 할 일이 있거든.”
성창룡 벨브로크.
그 이름을 입에 올릴까말까 하던 에드는,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시 지금의 예니카라면 에드의 말을 온전히 믿어줄 것이란 느낌이 든다.
성창룡 벨브로크의 부활과, 그 저지는 에드 로스테일러가 짊어진 가장 무겁고도 중대한 짐이다.
안 그래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에드 때문에 매번 걱정이 훤한 예니카다. 벌써부터 다음 짐의 무게를 건네줘서 좋을 게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본격적으로 세력을 결집하고 일을 공론화 시키기 시작하면 예니카도 자연스럽게 알게될 것이다.
천천히 일이 구체화 되기 시작할 때 말을 해주는 게 차라리 낫지 않겠나. 에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예니카 입장에서 뭘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걱정의 무게추만 어깨에 더 얹어주는 결과를 만들테다.
“개인적인 목표가 좀 있어. 그리고… 또 클라리스 성녀님은 영향력이 대단한 사람이잖아. 안 그래도 로스테일러 가문의 위치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최대한 가까이 하고 싶은 인물이기도 해.”
“정치적인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나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안 돌아가서… 도움이 못 돼…”
순진한 예니카 페일로버에게 정치적 의사 과정이란 어려운 전문 서적 속 꼬부랑 거리는 글씨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언제나 천연덕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관계와 호의만을 주고 받은 소녀에게 그런 차원의 사고를 바라는 건 너무 도둑놈 심보다.
오히려 그런 건 잘 모르는 성격이기에, 예니카 페일로버 답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에드는 어깨를 으쓱하고 모닥불 위 철제 냄비에 데워져 있던 스튜를 그릇에 덜었다. 예니카가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오필리스관의 진수성찬을 마다하고 돌아와서 먹는 게 데워진 미트 스튜라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만, 애초에 에드는 미식에 그렇게 큰 뜻을 두고 있지 않는 사람이다.
오히려 에드의 입에는 이 쪽이 더 맞았다.
“맛있네. 오후 수업 끝나고 와서 만든 거야?”
“응! 향신료가 많이 남아서 좋더라! 그리구 훈연해놓은 고기도 상하기 전에 다 먹어야 될 것 같아서 넉넉하게 넣었어!”
맛있다는 말에 흥이 오르는 것인지, 예니카는 책을 덮어놓고 칼질하는데 느낌이 어땠느니, 냄비를 새 걸로 사야겠다느니 하는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에드는 스튜를 입에 밀어넣으면서 맞장구를 치고선, 오두막 증축을 위해 통나무가 몇개가 더 들어가고, 얼마나 더 다듬어야할지 견적을 잡았다.
그리고선 식사를 마칠 때까지, 새로 증축된 오두막 구조는 어떻게 할지, 에드의 개인 마공학 공방은 2층에 놓을 것인지 1층에 놓을 것인지, 지하 공간을 만들 것인지, 울타리를 칠 건지 따위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는 평화로운 한 때, 그런 시덥잖은 이야기를 주고 받는 시간 만으로도 묘한 행복감이 피어올라, 예니카는 이유도 없이 빙긋 빙긋 웃었다.
“레시피는 벨이 알려줬었어. 이거 말고도 시험해보고 싶은 게 많아서… 음… 그래도 식재를 너무 낭비하면 안되려나…”
에드는 바닥까지 깔끔하게 비어있는 철제 냄비에 스푼을 던져넣고, 나무등걸에 걸터앉았다. 기분 좋은 포만감이 밀려 올라왔다.
“그러고보니 말 안했네. 벨이 사람을 보내서 옷을 몇개 줄 거야.”
“옷?”
“개인적으로 수선 연습을 하려고 부탁했었어. 아마 내일 쯤 메이드를 보낼 거야. 모르는 사람이 캠프에 나타나도 당황하진 마.”
“응, 그렇구나. 오필리스관을 총괄 관리하면서 캠프까지 신경 써주다니… 벨은 참 대단하네…”
벨 마이아는 예니카 페일로버가 아무것도 모르던 1학년 때부터 그녀를 관리하던 선임 메이드였다.
예니카와는 다소 나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오필리스관의 메이드 장이라는 막대한 직위에 비하면 어리다 못해 풋내기나 다름 없는 나이다.
그 정도로 젊은 나이에 그 정도의 위치에 올랐으면 거만해지거나 몸가짐이 해이해질 만도 하건만, 여전히 말단 메이드일 때처럼 빈틈이 없다. 사고관도 말단일 때에 비해서 크게 달라진 것 같지도 않다.
초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곤 하지만, 위치가 변하면 가치관도 변해야 하는 법이다. 보통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변하기 마련이고.
그렇게까지 뚝심있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엔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이윽고 느껴지는 것은 부자연스러움이다.
이상할 정도로 제 위치와 본분을 다하는 그 모습은, 일반적인 사람의 성실함이 아니다. 분명 그 계기라 할만 한 게 있을 것만 같다.
“애초에 오필리스관에 오기 전에는 뭘 하던 사람이야? 예니카 너는 뭐 아는 거 있어?”
“응? 글쎄… 애초에 벨은 철 들었을 때부터 이미 메이드 일을 했다는 것만 알아. 그리고 뭐어… 말단 메이드들 사이에 돌던 묘한 소문은 들었던 적이 있어.”
“묘한 소문?”
“글쎄에… 그래봤자 소문이지만, 이래저래 유년기 시절의 과거가 많이 어둡다곤 하던데… 구체적인 건 잘 모르겠어. 뭐든지 다 미스테리야.”
오필리스관의 학생들 중에는 과거가 어두운 인간들이 많다. 특히 권력 싸움에 진 변방 귀족들의 자제들이나, 유력 가문의 사생아, 입학 이후에 가문이 폭삭 망해버린 경우도 있다.
그런 오필리스관에서 일하다보면 불행한 유년기를 보낸 자들도 잔뜩 보게 될텐데, 그런 메이드들조차도 ‘과거가 어둡다’라고 평할 정도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영 가늠이 가질 않는다.
에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해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해결될 수 있는 호기심도 아니다.
“…”
사실 당장 벨브로크 토벌에 어떤 도움이 될 것도 아니고, 말이 개인적인 호기심이지 여기서 더 파고들어봐야 프라이버시 침해다.
사람한텐 숨기고 살고 싶은 과거도 있는 법이다. 그런 과거는 굳이 파고들어봐야 상대에게 실례가 될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에드는 고개를 훌훌 털어서 쓸 데 없는 생각은 날려버렸다.
“뭐, 벨 인생은 벨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지금 당장 닥친 내 일이나 먼저 신경써야겠다.”
“아하하… 사실 벨은 우리가 그런 걱정 안 해도 잘 할 사람이니까. 에드는 자기 전까지 통나무 손질할 거야?”
“그래. 아무래도 좀 더 베어올 필요가 있겠어. 생각했던 것보다 오두막 규모가 더 커질 것 같네. 역시 설계해보는 것만으로는 정확한 견적이 안나온다.”
“크면 좋지! 에드 살 집인데!”
예니카는 발랄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에드는 일으킨 몸을 이리저리 꺾으면서, 몸을 움직일 준비를 했다. 상처가 좀 남아있긴 했지만 몸을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식수 떠다 놓은 거 남아있나?”
“응. 양동이에!”
막 식사를 마친 참이다. 목도 축이고, 수분도 보충할 겸 에드는 식수를 모아놓은 양동이에 가서 목재 머그잔을 푹 담갔다.
예니카가 다시 정령학 책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서, 에드는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 울대를 넘기고 쭉쭉 들어가는 냉수 덕에 기분 좋은 청량감이 몸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어서 열이 휙 올라왔다.
“…?”
에드는 순간적으로 혀 끝에 감도는 묘한 단 맛에 위화감을 느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커, 헉…”
사레라도 들린 것처럼 재채기를 해대는 모습. 예니카는 깜짝 놀라서 에드를 보고 천천히 마시라고 걱정스러운 듯 이야기 했지만, 에드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잘 들리질 않았다.
“커헉! 커헉! 큭… 크윽…”
계속 재채기를 반복하던 에드는 양동의 언저리를 잡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계속해서 몸을 타고 오르는 열기를 버텨내면서 몸의 변화에 이상을 감지했다.
“에, 에드…? 괜찮아?”
위화감을 깨달은 예니카가 책을 덮고, 나무 등걸 위에 놓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물을 마시던 에드 쪽으로 달려와서 몸을 받쳐주는 순간, 에드의 몸을 타고 오르는 열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별 다른 이상 없이 멀쩡하던 에드다. 반지의 반동도 이젠 남아있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열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에, 에드…? 에드…!”
“큭, 허억… 잠시… 잠시만… 후우…”
물이 가득담긴 양동이에 겨우 몸을 기대고 앉은 에드는 힘겨운듯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예니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것인가. 심각한 질환이 아닌 이상에야 이렇게 급박하게 상태가 나빠질 일은 없을 터.
에드의 몸을 받쳐준 채로 그대로 자세를 낮춘 예니카의 눈에, 그제서야 풀숲 사이에 떨어져있는 시약병이 보였다.
“…….”
예니카의 팔 끝을 타고 소름이 돋아올랐다. 분명 그 시약병을 본 적이 있다.
딱히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단호하게 페트리시아나의 제안을 거절했던 예니카다.
그렇게 단호하고 굳건한 예니카를 보며, 페트리시아나가 묘하게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을 했던 기억이 있다.
연금술사들은 제 발명품에 대해서 묘한 자부심이나 확신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사실 혁신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발명가들은 다 그렇게 비슷하기 마련이다.
제 노력이 들어간 발명품이 무시 당하면 자존심이 긁힌 듯, 더 오기를 드러내는 자들이다.
페트리시아나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는 것인지, 그런 시약 같은 건 가지고 돌아가라는 예니카에게 약의 효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페트리시아나가 몰래 식수를 모아놓은 양동이에 시약을 타놓고 도망간 정황이… 어렵지 않게 유추된다.
“페트리시아나… 선배님….!”
예니카는 에드의 몸을 받치면서 원망스러운 어조로 그 이름을 불렀다.
말괄량이에 사고뭉치. 사실 연금술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은 그런 별명이 따라 붙는 경우가 많다. 직접 그 피해자가 되고 나니 한층 더 원망스럽다.
나중에라도 불만을 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일단은 힘겨워보이는 에드를 수습하는 것이 먼저다.
일단 땀이라도 닦아내줘야 할 것 같아, 수건 삼아 쓰던 천을 가져오려던 참이었다.
에드의 손이 예니카의 손목을 꽉 잡아 쥐었다.
예니카는 온몸에 전류가 타고 흐르는 듯한 감각이 들어, 숨을 확 집어삼켰다.
“에, 에드…?”
“후우… 후… 잠시, 내가 상태가 좀 안 좋은 것 같다. 예니카.”
“으, 응. 그, 그래 보여! 땀 닦아낼 거라도 가져올게!”
에드 로스테일러의 정신력은 이미 뭇 학생들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취기를 유도하고 자제력을 없애는 시약에 좀 당했다고 해서, 아예 무너져 내릴 만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시약의 기운을 이겨내면 이겨낼 소년이다.
그럼에도, 힘겹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일단… 지금 좀 힘이 들거든. 옆에 좀 있어라… 의식 잃으면 수습해줄만한 사람이, 너 밖에 없다.”
예니카는 눈동자를 휙휙 돌려가며 평소보다도 더 크게 동요했다. 시약의 효능을 잘 알고 있는 예니카 입장에서는, 지금 상태 에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너무 치명상이다.
무엇보다, 에드는 언제나 무심한 듯 무뚝뚝하게 예니카를 위해주던 소년이다.
적극적으로 내면을 드러내거나, 가까이 다가와준 적은 정말 손에 꼽는다. 그런 에드의 무뚝뚝한 기질 또한 좋아했던 예니카였기에 큰 감정적 갈등이랄 것도 없었다.
그런 에드가 가감없이 마음을 드러내준다고 생각하면, 안 그래도 그 나잇대 소녀 치고도 연애에 면역이 없는 예니카에겐 너무 치명타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져서, 예니카는 제 멋대로 휙휙 회전하려 하는 눈동자를 어떻게든 제어해내야만 했다.
“에, 에드…! 이, 일단 그… 땀부터 닦아…야…”
– 휙
예니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에드는 예니카의 손목을 휙 당겨서 제 옆에 앉혔다.
하릴 없이 풀밭에 안착한 예니카는, 제 몸이 마치 나풀대는 깃털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예니카를 부드럽게 대해주고, 배려해주던 에드의 손짓이었으나… 마음먹고 꽉 잡아당기니 저항할 수조차 없다. 언제나 둔중하게 느껴지던 제 몸의 질량이 겨우 이 정도 였나. 너무 실감나는 근력 차이에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뛰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배려하고, 배려받고.
따뜻하고 흐뭇한 인간관계만을 주고 받아온 예니카의 일생이었기에, 그녀의 의견따위는 묵살한 채로 꽉 잡아 끌어버리는 손짓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에드는 예니카를 배려할 수 있을만한 상태가 아니다. 밀려올라오는 시약의 기운을 어떻게든 버텨내면서, 예니카의 손목이 부숴져라 꽉 잡아쥘 뿐이다.
예니카는 그 옆에 이끌려서, 억지로 앉혀진 채로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아야만 했다.
배려라고는 단 한 톨도 없이 예니카를 휘둘러대는 에드의 손짓에 묘한 두근거림이 밀려올라온다.
손목은 뻐근하게 아파온다. 억지로 어디 가지 못하게 꽉 구속당한 느낌. 누가 뭐라해도 무섭고 두려운 상황이건만, 그 상대가 에드가 되고 나니 역설적이게도 심장이 뛰어댄다. 멋대로 휘둘려지는 그 묘한 감각에 알 수 없는 배덕적인 기분이 밀려올라오지만, 저항할 수가 없다.
“윽..?!”
아니, 애초에 저항하고 싶긴 한 것일까? 그런 자기 반문에 예니카는 스스로 반박할 수가 없다.
어느샌가 예니카도 덩달아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기분에 조금씩 눈가가 휘둥그레졌다.
그래도, 저항해야 한다.
한 손바닥으로 자기 얼굴을 꾹 누르면서, 어떻게든 시약의 기운을 버텨내고 있는 에드가 눈에 들어온다.
이미 예니카도 그에 지지 않을 정도로 얼굴에 열이 올라오고 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안된다.
일단 에드의 몸상태를 체크하고, 땀을 닦아내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오두막으로 데려가야 한다. 그리고 시약에 대해 이야기 해주고, 몸을 잘 추스를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주고, 벨한테 도움이라도 청해야 한다.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들이 예니카의 머리속에 피어올랐다.
제 아무리 상대가 에드 로스테일러라 해도, 그를 위해서라면 단호하게 말해야만 한다.
이 손 놓으라고. 너무 아프다고. 지금 너무 무섭다고. 조금만 배려해달라고.
일단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고. 내 이야기를 좀 들으라고.
예니카는 어렵사리 힘을 줘서 에드를 부르기로했다.
“헤, 드으!”
긴장한 탓에 어조가 빗나가고 말았다. 생각보다 목소리도 더 크게 흘러나와, 예니카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다.
“크윽!”
그러나 에드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오히려 예니카의 비명에 가까운 호명에 두통이 심해졌는지 미간을 좁혔다.
“너무 목소리 높이지 마라… 머리 아프다…”
“에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그냥 가만히… 옆에 있어…”
들숨 날숨을 몰아쉬며, 속삭이듯 말하는 에드의 목소리. 귓가에 곧바로 스며드는 그 목소리에 뇌가 녹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예니카의 얼굴을 지나는 혈관들이 비명을 지른다.
“어어…”
이윽고 예니카는 완전히 그 기세에 눌리고 말았다. 이윽고 개미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아, 알았어… 응…”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사가, 그렇게 백기를 들고 말았다.
누구한테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상태. 설상가상으로 어쩐 일인지 정령들은 반응조차도 하지 않는다. 평소엔 그렇게나 예니카의 주변에 몰려들어 있었던 정령들이건만…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
” ♪ ♬ ♩ ”
오필리스관의 꼭대기 층에 성녀 클라리스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개인실.
일반실조차도 으리으리한 크기로 유명한 오필리스관이지만, 성녀 클라리스가 쓰는 개인실 쯤 되면 아예 한 층의 절반이 그녀를 위한 공간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고풍스러운 레이스 장식이 잔뜩 되어있는 침대에, 클라리스의 자그마한 몸집이 파묻히듯 눕혀있었다.
이 오필리스관에서는 유일하게 그녀의 이중생활을 알고 있는 자.
메이드장 벨 마이아는 그녀의 옆에서 다소곳하게 서있었다.
“아까 오후 늦게 오셔서 전달해주고 가셨습니다.”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클라리스는 편지지를 머리위에 펼쳐놓고 즐거운 듯 읽어내리고 있었다.
“클레드릭 수도원에 동행해주신다고 하네요. 오늘 내내 학사 행사 참석하느라 너무 힘들었는데, 보답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클라리스는 세상 즐겁다는 얼굴이었다. 낙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클레드릭 수도원에서 며칠 내내 기도회만 주재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에드가 동행해준다면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
신실하긴 하지만 세파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하루종일 성서 얘기만 하는 고위 성직자들과는 달리… 그는 말동무로서도 훌륭하고, 개인적으로도 호의를 가지고 있는 상대다.
매년 클레드릭 수도원에 갈 때마다 각오를 했던 것과는 달리, 올해에는 꽤나 즐겁게 다녀올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 생각에, 클라리스는 흥이 올라서 옆에 서있던 벨에게까지 말문을 텄다.
“클레드릭 수도원 말입니까? 그러고보니 슬슬 기도회를 하는 시기가 되었군요.”
“네에. 저는 텔로스 교단의 얼굴이니까. 제 아무리 올해부턴 실베니아에 재학 중이라고 해도 기도회엔 참석해야겠더라고요. 학사에서 공결도 내주기로 했고요.”
“그런데… 에드 도련님을 클레드릭 수도원에 동행시켜도 괜찮습니까? 제가 알기로 클레드릭 수도원은…”
“뭐어, 제 권한이 있고… 동행시킬 이유는 만들면 얼마든지 생기니까요. 분명 수도원 내에서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도 않을거고요.”
클라리스는 콧노래를 하면서 에드가 손수 써내려간 편지를 즐겁게 읽고 있었다.
“에드 선배님은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자제력이 확실하신 분이잖아요? 그러니 수도원 내에서 별 다른 일도 없을 거에요.”
확신에 차서 그리 이야기하는 클라리스의 말에, 벨도 딱히 반박할 건수는 없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상황 판단이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수도녀들과 접점을 가지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일 학사 쪽에 공결 넣어달라고 문의 넣어야겠네요~.”
새하얀 발을 휘적대며, 클라리스는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뭐라 말을 덧붙이기도 좀 뭐해서, 벨은 조용히 서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