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97)
내 이럴 줄 알았다 (5)
“몸은 괜찮으십니까.”
이제 좀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있겠다 싶어진 느낌이 들 때가 된 것은, 이미 심야시간이 되고 나서였다.
눈을 부릅 뜨고, 몸에 남아있는 미열을 이겨낸 채 상반신을 들어올리자 포근하고 푹신푹신한 침대에 눕혀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긴?”
“오필리스관에 마련된 제 개인실입니다. 예니카 아가씨와 로르텔 아가씨의 부탁으로 일단 이 쪽으로 모셨습니다.”
“…”
당연한 듯이 옆에 서있는 벨의 모습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일단 내가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물 한 잔 마셨다가 갑자기 어지러워진 것이 전부다.
이것만 가지고는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힘들었으므로, 나는 벨에게 더 설명해줄 것을 부탁했다.
“페트리시아나 아가씨가 말썽을 부린 모양입니다.”
“페트리시아나라면, 4학년의 그 괴짜 마법사?”
“예. 저번에도 한 번 뵙지 않으셨습니까?”
“…이전에도 썩 좋은 일로 엮이진 않았었지.”
일전에는 산책을 나간 메릴다를 잡아가더니, 캠프에서 학대를 하고 있니 어쩌니 하면서 난리를 부려댔던 것이다.
그녀의 언니 트레이시아나가 쏜갈같이 달려와서, 그 말썽꾸러기의 머리를 꾹꾹 눌러가며 연신 사과를 해대는 통에 그냥 넘어간 참이다. 그 뒤로 트레이시아나가 엘테 상회 탈환전에 가담해주기도 했고.
그랬던 소녀가 이번에는 시약까지 가지고 말썽을 부리다니. 역시 사람은 고쳐쓰는게 아닌 것일까.
나는 도끼눈을 뜬 채 한숨을 푹 쉬고 잠시동안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그래서, 걔는 지금 어디 있는데.”
“트레이시아나 아가씨의 방에 잡혀 있습니다.”
“잡혀있다고…?”
“인원 점검 삼아 방에 들렀을 때는, 트레이시아나 아가씨와 함께 무릎 꿇고 비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
“제법 각이 살아있더군요. 군인 가문도 아닌데 제식 훈련을 따로 받는 건가 싶었습니다.”
사실 트레이시아나는 이렇다 할 잘못은 없는데, 항상 페트리시아나의 말썽에 휘말려서 본인까지 같이 사과하러 다니는 느낌이다.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분명, 페트리시아나의 귀를 잡아 끌고 와서 고개를 푹푹 눌러대가며 세상 미안한 표정을 해대겠지.
“뭐, 조만간 선물이라도 잔뜩 싸들고 오지 않겠습니까. 에드 도련님은 몸 상태를 점검하는 데에만 집중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내 살다 살다 별 희한한 일을 다 당하네.”
“사후처리는 따로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트레이시아나 아가씨는 이 방면의 전문가라서…”
“…방면? 무슨 방면…?”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두통은 제법 가라앉았으나, 아직도 몸에 도는 미열은 좀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페트리시아나 아가씨께서 큰 사고를 치고 오시면,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사과를 하시는데… 상대에 따라서 그 방법이 얼마나 다양한지, 학사엔 사죄 전문가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
“뭐 이런 구설수에는 관심이 없으시겠지요.”
벨은 뭘 하고 있나 했더니, 테이블에 앉아서 자수를 놓고 있었다.
평소처럼 붉은 장미 문양의 장식이 잔뜩 달린 메이드장 복식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밤 늦은 시간이고, 남은 일거리도 더 없으니 좀 편한 복장이다.
무슨 일을 하든 항상 깔끔하고 단정하게 하고 다니는 벨이니 만큼, 일반 학생이 그녀의 일상복을 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봤자 수수한 드레스 잠옷이지만, 과연 복식만 바뀌어도 사람의 인상이 확 바뀐다.
“내가… 요즘 마가 끼었나…”
“표정이 좀 안 좋으시군요. 아직 약 기운이 좀 남으셨습니까? 필요하시면 좀 더 주무셔도 됩니다.”
“아니, 언제까지 남 침대 점거하고 있을 순 없지. 그냥… 요즘 내 상식이 모자란 건지 이 학사의 학생들이 이상한 건지 구분이 안 간다. 피랍 전문가에, 사죄 전문가에… 식수 테러범에…”
“…확실한 건 에드 도련님은 굉장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이신 분이라는 겁니다. 굳이 사고의 기준을 환경에 맞추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과연… 생각해보면 정상인이라는 작자가 손에 꼽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연금부 학생이나, 연금학에 매몰된 놈들일수록 뭔가 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연금학이란 대체 뭐냐… 제 아무리 괴짜들의 학문이라 해도 정도가 있지…
“그래서… 대체 어떤 경위를 거쳤길래 내가 네 개인실까지 와서 나자빠져 있는 거냐. 안 그래도 쉴 시간도 없을텐데 미안하게 됐네.”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늘 밤은 이것저것 할 일이 많습니다.”
“그냥 내 오두막에 눕혀놓으면 알아서 회복할텐데, 여기까지 데려오는 것도 일이었지?”
“뭐어… 가감없이 의견을 전달해드리자면, 오두막에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한 선택이었을 듯 합니다. 자세한 경위는… 설명하자면 복잡합니다만…”
벨은 자수를 놓고 있던 스카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서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그냥… 오늘 밤은 여기서 쉬는게 나으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야간 당직자 점검도 할 겸 주기적으로 나가봐야 하니까 상관 없습니다.”
“…넌 대체 잠은 언제 자냐?”
“새벽에 두어시간 자고, 낮에 일정 비는 동안 쪽잠을 자는 편입니다. 오전 일정 널널하거나, 방학 기간에는 숙면을 취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숙면이라는 것이 일상이 아니라 사건이구나.
제 아무리 체력 좋고 성실하다 하더라도, 저런 패턴을 유지하면서 살면 언젠간 고갈이 되기 마련이건만… 오히려 벨은 열심히 일을 할 때 더 피부가 번쩍거리고 생기가 넘치는 느낌이 있다.
일이 삶의 활력소고, 일이 최고의 영양제인 그런 인간들이 있다. 그런 사고 방식을 타고난 인간들이 보통 관료 사회에서 윗자리를 차곤 한다.
벨 마이아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나도 제법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진짜 독종이군.”
“…?”
“…아니다.”
이게 보통이다. 그렇게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나면, 오히려 왜 이렇게 열심히 사냐는 질문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거기다 대고 뭐라할 입장은 아니기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간단한 간식 거리라도 내드릴까요? 단 음식을 먹으면 사고 회복도 빨라질 겁니다.”
“됐다. 어느 정도 약 기운은 이겨냈어.”
“그렇군요. 이번 주 중으로 클레드릭 수도원에 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전까지 회복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그래봤자 미량이다. 이 정도는 어떻게든 이겨내지… 다만, 후유증이 있으면 어쩔까 싶긴 하네.”
“그런 부분은 제가 트레이시아나 아가씨께 따로 물어봤습니다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십니다. 아마 날이 밝으면 찾아와서 잘 설명해주실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선, 약간 남은 두통을 잘 찍어 누르면서 눈을 부릅떴다.
슬슬 몸과 마음이 안정이 되자, 그제야 벨의 개인실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상상과는 달랐다.
오필리스관 메이드장이라 하면 누가 뭐라해도 권위 있고 소득 높은 자리다. 관련 직종 종사자라면 누구나 원하는 꿈의 자리이기도 하다.
복식도 아리땁고 화려해서, 언제나 수수함이 미덕으로 통하는 메이드 치고는 눈에 띄는 편이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실베니아에 재학하는 온갖 귀빈들을 최전선에서 보좌하는, 사실상 이 실베니아의 얼굴과도 같은 자리다.
학사 입장에서도 최대한 많이 보조하고 배려해줘야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녀의 인상이 곧 실베니아의 인상이 되니까.
그런 것치고는… 방이 많이 좁다. 예닐곱평 남짓한 공간에 작은 사이즈의 침대 하나, 목재 테이블과 작업용 의자, 적당히 채광 좋은 창문과 수납 효율 좋은 수수한 옷장.
그리고 벽에는 위인들 초상화 몇 장 걸려있고. 탁상 위에는 풍경화가 넣어진 액자, 그리고 살쾡이 문양이 새겨진 단검 하나가 장식삼아 진열되어 있는 게 전부다.
“메이드장 개인실은 창고로 쓰고 있습니다.”
방을 보고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챈 모양인지, 벨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저는 취침과 휴식을 위한 방이 과하게 넓으면 오히려 붕 뜨는 느낌이 들어서… 선임 메이드 시절에 쓰던 방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검소하구나.”
“평범한 편입니다.”
검소하다는 것도 어느정도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제 아무리 검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호화로운 오필리스관에서 몇 년 째 일하면서… 심지어 메이드장 직위까지 달고서도 그런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조금은 사치를 부려도 문제가 없는 자리이건만, 과연 천생 메이드라 부를만한 자다.
“대체 메이드 하기 전에는 뭘 하고 살았는데?”
나는 몸의 기운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팔을 이리저리 휙휙 꺾었다.
그러면서 은근하게 가슴 속에 자리한 질문을 슥 내밀어보았다.
오필리스관 여기 저기서 소문은 돌지만, 딱히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벨의 과거에 대해서 굳이 캐낼 필요는 없지만, 사소한 호기심 정도는 드러내도 큰 실례는 아닐 것이다.
“음…”
그러나, 벨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말했다.
“그리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라서… 딱히 말하고 다니진 않습니다.”
묻지 마세요.
그 태도를 보고 나면, 누가되었든 그 속뜻을 이렇게 해석할 것이다.
대충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겠구나 싶어서 나는 질문을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래, 실례였으면 미안하다. 뭘 캐내려고 한 건 아니다.”
개인사를 필요 이상으로 깊숙하게 묻는 것은 실례가 될 수 있다. 대충 이쯤해두자 라고 생각을 하고 의례적으로 사과를 하자, 갑자기 벨이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오히려 저 쪽이 더 당황한듯한 모습이었다.
“저런…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에드 도련님. 딱히 실례가 되는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뭐?”
“말한 그대로의 뜻입니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고… 끝이 우중충해서 굳이 어두운 이야기를 하고 다니진 않습니다. 딱히 숨길만한 이야기도 아닙니다만.”
벨은 내려놓았던 자수를 집어들더니 바늘을 다시금 만지작 거렸다. 이야기가 길어질 모양인가 싶기도 하다.
바늘을 꿰어넣고 있는 스카프를 보아하니 학생용이다. 수선을 해주는 김에 자수도 더 새겨넣어 주고 있는 모양인데, 그 정도 일은 말단 메이드에게 시켜도 될 법하건만 본인이 직접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한테 들어온 일은 자기 선에서 대부분 끝내버리려고 하는 벨의 방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제국 북동부 플란첼 가문의 사생아였습니다. 마이아라는 성은 어머니 쪽에서 따온 것이고요.”
그렇게, 벨은 아무렇지도 않게 훅 치고 들어온 것이다.
그 한 줄 대사만으로도 벨의 태생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면서도, 인생 또한 순탄치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플란첼 남작님을 아십니까?”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긴가민가한 이름이다.
허나 확실한 건, 로스테일러 영지의 사교회에서 본 적은 없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이름난 귀족부터 중소 귀족들까지, 직접 오지는 못했어도 선물 정도는 보내는 자리인데도 말이다.
“사실 기억 못하는 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플란첼 남작령에서는 주로 동부 대륙 국가와의 장거리 외교를 담당하는 관료들을 많이 배출했었지요. 지형적으로 제국 북동부에 자리하고 있었고, 험지가 많아 제국 내부로 통하는 마차보다는 바닷길을 많이 이용했으니까요.”
“남작가 치고는 제법 세가 있었던 편인 모양인데.”
“글쎄요. 어쨌든 이젠 지도에서 찾아볼 수 없을겁니다. 멜린 백작령으로 병합되었으니까요. 사실 로스테일러 공작가 출신이신 에드 도련님 입장에서는 미시적인 사건일 뿐이겠지만요.”
“…”
귀족의 영토가, 더 고위 귀족의 영토로 병합된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가.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볼 순 있지만, 대부분은 그 말로가 좋지 않다는 뜻이다.
“외교 가문이니만큼 해외 쪽으로, 특히 먼 동부 대륙 쪽으로 얼굴을 많이 트고 다녔습니다. 새로운 농기구나, 양잠업 같은 것을 영지에 도입하려고 시도도 해보시고, 험지를 평탄화하려고 거대한 토목 공사 같은 것을 추진하시기도 하셨지요.”
플란첼 가문이란 이름은 내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벨은 저런 세세한 부분까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때때로 그 괴리에서 기묘한 느낌이 들고 만다.
누군가에겐 스쳐지나갈 뿐인 변방의 남작가가, 누군가에게는 유년기를 책임져 준 요람이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영지를 윤택하게 만들어보려고 여러 시도를 하셨지만, 대부분 그 끝은 좋지 않았지요.”
“…네가 그 플란첼 가문의 사생아였다고…?”
“예. 정식 후계자이신 달베른 도련님의 혼외자식이었습니다.”
“썩… 인생이 순탄치는 않았겠네.”
“글쎄요. 권력 싸움이 치열한 중앙귀족이었으면 기를 쓰고 숨기려 했겠지만, 의외로 저는 무던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애초에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제 영지민만을 한껏 신경쓰는 변방귀족이니 만큼… 정치적 약점이나 해가 될 수 있는 혼외자식의 존재를 그렇게까지 눈엣가시로 여기지도 않았던 것일까.
“의외로 유년기는 저택에서 나름 배려받고 살았습니다. 수군대는 시선도 거의 없었지요.”
“…”
“그래서 딱히 이야기하면서 상처라 할 것도 없습니다. 신분을 부끄러워 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귀족가 출신이라 하면 놀라는 분들은 더러 계시더군요.”
나도 마찬가지다.
귀족의 수발을 드는 메이드장이 사실은 귀족가 출신이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근데 한 번 뒤집어 생각해보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귀족들을 대접하고 관리해야하는 직위이니 만큼, 오히려 귀족의 예절을 잘 알고 있는 자가 더 적임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렇긴 하네. 다만, 메이드직을 자처하는 귀족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만은.”
“그러니까, 저야말로 절호의 인선이었던 셈이지요. 때때로 사생아 신분이 야속했던 적은 있었지만, 근래에야 이렇게 자리 잡을 수 있게 해준 이 신분에 감사한 마음도 많이 듭니다.”
사실 귀족가 출신이라는 것보다는 그냥 일머리 좋고 성실하다는 측면이 더 강하게 어필된 것 같지만… 굳이 디테일한 부분을 따지진 않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대륙 북동부면 남서쪽에 붙어있는 이 아켄섬이랑은 완전히 정반대 방향 아니냐? 어쩌다가 집 떠나서 이 머나먼 타지에서 메이드 생활을 하고 있는 건데.”
“전대 메이드장이신 엘리스님이 아버님의 지인이셨습니다. 엘리스님이 동부 대륙 출신이시기도 했고, 갈 데 없는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다니시던 분이셨기도 하고… 또 가문 입장에서는 제 아무리 권력욕이 없다고 해도 사생아를 끝까지 데리고 있기도 뭐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삶 살 수 있도록 어느 정도는 풀어줘야지요.”
이 시점에서 나는 깨달았다.
벨은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음울하거나 어두칙칙한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휙휙 넘기고 있었다.
뭐 그냥 살만했다. 그럭저럭 귀족가 출신이었다.
그런 입장을 견지하며 관조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 삶에 시련이란 게 없었을 리가 없다.
혹시라도 상대의 기분까지 음울하게 만들고 싶진 않다. 그런 배려가 몸에 배여있는 것이다.
그 모습에서 벨 마이아란 여자의 일생이 눈에 보이는 듯해… 오히려 나는 묘한 반발심리가 올라왔다.
“힘들었겠네.”
“딱히 힘들진 않았습니다.”
“힘들었잖아.”
“뭐 그런 시기도 있었습니다만, 귀족가 명함이라는 게 또 좋을 때는 좋습니다. 그 로스테일러 공작가에서 유년기를 보내셨으니, 제가 감히 명함을 내밀 수는 없겠습니다만.”
능숙하게 상대의 권위에 대한 칭찬으로 흘려 넘기는 것이, 처세에 어느 정도 통달해있는 어른의 모습이다.
“…그래.”
여기서는 내가 한 수 접어주었다.
그러나, 벨 마이아는 내가 그런 식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는 사실을 의식한 것인지, 자수를 잠시 내려놓고서는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사실 뭐, 힘든 시기를 보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들 인생사 흥망성쇠가 있는 법이고, 특히 오필리스관 같은 특수한 환경에서는 그런 광경을 더 자주 봅니다.”
“차마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 당장 나부터가 가문이 휘청휘청하는 상황이라.”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알량한 비극을 들이밀면서 제 불행에 공감을 요구하거나 동정을 호소하진 않습니다.”
창밖엔 둥그런 달.
스며드는 달빛은 늘 그렇듯, 세상을 공평하게 비춘다.
눈부시게 빛나는 한낮의 태양과는 다르게 아스라이 드리우는 불빛이지만,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은근하게 스며드는 빛이 오히려 더 사람의 마음에 평온을 주는 때도 있다.
빛이 밝으면 눈이 부시다. 때때론 등 뒤에서 은은하게 비추는 불빛이 필요할 때가 있다.
사실 벨 마이아는 그런 등불 같은 인간이었다. 드러나는 일은 없지만, 그곳에 명백하게 자리해 있는 부류의 인간이다.
“그래도, 에드 도련님의 호기심에 신경 쓰지 말라는 말로 일축해버리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요.”
“아니, 됐다. 오히려 알량한 건 내 호기심이겠지. 내 인생 살기도 바쁜데 남 인생 과거사까지 궁금해 할 여력도 없고, 굳이 싫다면 말하진 않아도 된다.”
“아뇨. 굳이 싫은데 말하는 건 아니고, 굳이 말하고 싶다는 게 오히려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
굳이 불행 자랑을 하진 않는다며.
몇 초전에 했던 말이랑 대치되는 태도에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벨 마이아도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방금 했던 말이야 일반론적인 것이고, 상대가 에드 도련님이라면 또 이 쪽에서도 심정의 변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심정의 변화? 굳이 나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거냐?”
“예. 뭐… 에드 도련님이니까 들어주셨으면 하는 이야기도 있는 겁니다.”
누구를 대하든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여자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 또 당황스럽다.
그렇다고 나한테 사적인 감정을 가질만한 인간도 아니다. 그 사실은 나도 알고 벨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사무적이기에 편한 관계도 있다. 그 사실에 대한 통찰이 있었기에, 나는 끈질기게 존댓말을 강요하는 벨에게 백기를 들고 말을 놓은 것이다.
“플란첼 가문의 최후에 대해 아십니까?”
누구든 간에, 인생사에 있어 비극과 희극은 교차하는 법이다.
살아온 길을 되새김질 하다 보면 분명 슬펐던 일도, 기뻤던 일도 잔뜩 있었을 테니까.
벨의 과거에 얼마나 많은 비극이 쟁여져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적어도 이번 건에 한해서는, 벨이 감춰두었던 어두칙칙한 과거사 중에서도 그 농도가 짙은 것이다.
늘 그렇듯, 단아하고 깔끔한 어조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다.
“거시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습니다. 권력욕 없는 변방 귀족은 대개 비슷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고위 귀족의 권력 투쟁에 버림 패로 쓰였나.”
“비슷합니다. 구구절절 설명해봐야 뻔한 이야기입니다만, 그 결말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요. 제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딱 그 때 전대 메이드장 엘리스님이 귀빈으로 플란첼 저택에 와계셨었지요.”
벨은 눈을 지그시 감는다.
유년 시절의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벨 자신만이 알고 있다.
벨은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두루뭉술하게 퉁쳐서 이야기 할 뿐이다.
“더 이상 영지 내의 세수만으로는 주군이신 멜린 변경백이 요구하는 공물의 액수를 맞출 수 없다는 이야기가 오갔지요. 남작저의 귀중품을 팔아치우고, 사용인들을 해고하고, 개인 자산까지 다 털었지만 영지의 창고는 갈수록 비어가고 있었습니다.”
“…”
나는 짐작가는 내용이 있었지만, 잠자코 입 다문 채 듣고만 있었다.
“남작은 주군이신 멜린 변경백에게 직접 가서 호소를 해보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기어이 사람이라도 내놓으라고 했을 때 플란첼 남작은 깨달았지요. 멜린 변경백이 공물로 바치길 원하는 것은, 비교적 용모가 아리따운 것 빼고는 별 볼일 없는 남작의 사생아였습니다.”
마치 남 이야기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 사생아의 이름은 아마도─
“가계도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작자도 아니고, 그냥 피가 반절 정도 이어져 있을 뿐인 플란체가의 사생아 따위… 그냥 내어주면 그만인 일이지요. 의외로 변경백의 소유물로 살아가는 게 본인한테는 더 행복한 인생일지도 모르고요. 뭐, 손찌검이야 좀 당하겠지만.”
“…”
“다만, 그 남작은 왜인지 제 품에 끼고 키워냈던 사생아를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가족애라는 것이, 어떨 때는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는 저주로 통할 때도 있는 것이지요.”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는 손의 속도는 일정하다.
벨 마이아는 어떤 때라도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수행해내는 메이드였다.
“허나 그 남작은 획기적인 방법을 하나 떠올립니다. 변경백이 원하는 요구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한 방 먹이면서도, 중앙 귀족들도 쉬이 흘려넘길 수 없도록 일을 강력하게 공론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을요.”
“…”
“어찌나 획기적인 방법인지, 그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을 전부 없앨 수 있는 정말 혁신적인 대책이었습니다.
더 이상 영지민들의 고통어린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고, 그들에게서 눈 돌릴 때의 가책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며, 세상 물정 모르는 앳된 사생아의 슬픈 얼굴에 가슴 아파하지 않아도 되고, 자기의 어깨에 짊어진 온갖 책임의 무게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방법입니다.
”
“그게 뭔데?”
가볍게 물었다.
대답은 무겁게 돌아왔다.
“준비물 몇 가지만 챙기면 됩니다. 길다란 밧줄 하나와, 낡고 허름한 목재 의자지요.”
“…”
“밧줄은 고리로 만들어서 천장에 묶어두어도 될 정도로 충분한 길이가 좋고, 의자는 발로 차서 넘어뜨리기 쉽도록 가벼운게 좋습니다.”
거기서 말은 끝이났다.
침묵.
30초일까. 1분일까.
그렇게 서로 대화가 오가는 일 없이, 조용한 방 안에서 나는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우중충하게 끝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권선징악이라고 해야할까. 전래동화처럼, 나름 후련하다 싶을 정도로 멜린 변경백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니까요.”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 원로 교수들은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잖아.”
“그렇군요. 확실히 멜린 변경백의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2년 뒤에, 어줍잖게 재국의 재상을 매수하려다가 역풍을 맞고 성대하게 몰락하니까요. 그간의 악행도 쌓여있었으니… 당연한 귀결입니다. 다만… 그런 생각은 들곤 합니다.”
벨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이야기했다.
일반적으로는 굳이 입밖에 내지 않지만, 상대가 에드 도련님이기에 꼭 하고 싶은 말이다.
난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닫는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그다지 좋은 판단이 아닙니다.”
“…”
“앞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때 그 남작이 눈 딱 감고 사생아를 변경백에게 넘겼다면, 2년 뒤에는 그의 몰락을 보고 호탕하게 웃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런 이야기를 하며, 벨은 지그시 눈을 뜨고선 스카프에 바늘을 찔러넣었다.
남작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어리숙한 소녀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녀의 앳된 눈동자에 어떤 광경이 비춰져 있었을지는 그 때의 벨만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었다.
“우중충한 이야기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할 일도 아니지. 그리고 말해두자면, 나는 가능한한 열심히 살고 있는 중이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에드 도련님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삶을 이어나가고 계시는 중이지요.”
벨은 잠시간 자수를 내려놓고선 달 밝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다행인 일입니다.”
“클레드릭 수도원으로 가실 때 저한테 일러주십시오. 가면서 드실 간단한 다과랑, 선물을 몇 개 드리겠습니다.”
“다과야 뭐 고마운데, 선물은 뭐냐?”
“수도원장님이 저랑 면식이 있으신 분입니다. 여러모로 도움도 많이 받고, 좋으신 분이지요. 이왕 가시는 김에 선물을 전해드리고 싶어서, 다과는 그 선물 전달을 부탁드리기 위한 뇌물인 셈입니다.”
“그런 거 가지고 뇌물까지 줄 필요는 없다… 간식이야 고맙게 받겠지만.”
이윽고, 벨은 야간 당직자를 체크하러 갈 생각인지 방 구석에 있던 촛대를 들어올렸다.
“이왕이면 아침 해가 뜨고 일어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몸 상태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밤의 숲을 걷는 건 안 좋습니다.”
“그럴까… 정신 좀 추스르고 나가는 게 좋을 것 같긴 하다…”
“뭐, 당황스러운 일을 많이 겪으셨으니까요. 저도 살다보니 어이 없고, 예상 외의 상황을 맞딱트릴 때가 참 많은데… 그럴 때마다 의식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벨은 편히 쉬시라는 듯이 드레스 자락을 슬쩍 들어올리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좀 당황스러워도, 스스로를 타이르 듯이 늘 속으로 버릇처럼 말하는 겁니다.”
벨의 과거사 대부분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그 편린을 잠시 보았다 하더라도, 그녀의 생애를 함부로 재단하려 들어선 안되겠지.
필시 상정하지 못했던 갖은 시련이 가득했던 삶이었을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늘 속으로 되새겨왔던 것이다.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이.
일이 이렇게 흘러가리란 것을, 처음부터 다 예상했었다는 듯이. 전혀 당황할 필요가 없다는 듯, 고고한 자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인 셈이다.
*
“…내 이럴 줄 알았다.”
페트리시아나와 트레이시아나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일단 고개부터 바닥에 처박은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죄! 송!!! 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문을 열고, 선물 더미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이 올려놓고, 바닥으로 스윽 미끄러지며 머리를 박는 일련의 과정이 거의 예술의 경지였다.
페트리시아나의 머리를 바닥에 쑤셔박은 채, 옆에 앉아서 덩달아 고개를 박고 있는 트레이시아나의 모습.
예술점수를 굳이 부여하자면 10점 만점에 100점에 가까운 자태였다.
“내 동생이!!!! 뭘 몰라도 너무 몰라서!!!!”
“…아, 앗…! 아파…! 으, 으읏… 죄, 죄송합…”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 죄송!!!!!!!! 합니다!!!!!!”
나는 침대에 앉아 어이가 없는 얼굴로, 고개를 쳐박고 있는 쌍둥이 자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아무리 그래도, 4학년 선배가 머리를 처박고 있는 모습은… 가만 보고 있기엔 좀 거북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