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99)
의미 부여 (2)
과연, 절경이라고 해도 좋을 풍경이다.
자훌 변경백의 영토에서도 가장 아리땁기로 이름난 해안.
한참동안 이어지던 숲길을 헤쳐나가, 대번에 탁트인 해안이 드러나자 몇 번이고 와보았을 인부들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오의 태양빛을 받아 낭만스럽게 빛이 나는 바닷가는 보석들이 줄줄이 박혀있는 듯 하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아켄섬 해안지대에서 보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무엇보다도 눈을 사로잡는 것은, 그 방대한 바다 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는 수도원의 모습이었다.
클레드릭 수도원.
투박한 벽돌로 지어진 수도원일지라도, 이렇게까지 규모가 크고 웅장하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 당하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쭉쭉 뻗은 첨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는데, 얼추 눈대중으로만 세어봐도 예닐곱개는 여유롭게 넘어간다. 그 밑에 높다랗게 세워진 바위 벽은 자연스럽게 성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실베니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오필리스관이나 트릭스관 같은 건물로도 빗댈 수가 없다. 정말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성이 바다 위에 둥둥 떠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아마 지금 들어가진 못할 거에요.”
맞은 편에 앉은 카일리 에크네… 즉, 변장한 클라리스 성녀가 창밖의 광경을 보더니 말했다.
“보아하니 밀물 때가 한창이라서… 해질녘 쯤 되고 물이 빠지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겠네요.”
“그래…?”
“아마 도보로 이동하겠죠. 간단한 짐 정도는 직접 들고 가야 할 수도 있겠네요.”
다소곳이 앉아서 교복의 매무새를 정돈하던 카일리가 빙그레 웃었다.
의외로 이동 시간은 길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반나절 정도일까. 마차가 속도를 좀 낸 느낌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상정했던 것보단 훨씬 가깝다.
애초에 아켄섬이 자훌 백작령에 딱 붙어있는 형세고, 이 클레드릭 수도원 또한 자훌 백작령의 영토 안에 있는 장소이니만큼 그리 멀진 않았다.
“그 누가 와도 일단은 마차에서 내려서 제 발로 걸어들어가야 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죠. 클레드릭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국의 황족도, 텔로스 교단의 성녀도 모두 공평하게 걸어 들어가야 해요. 썰물 때만 잠깐 생기는 길이니 마차가 다닐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생각 이상으로 번거로운 곳이구나.”
“주신 텔로스의 가호 아래에, 모두가 같은 인간일 뿐이라는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는 셈이죠.”
“…”
“뭐어, 사실 나중에 가져다 붙인 이유인 것 같긴 해요.”
성녀 본인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나로서도 뭐라 반박할 수는 없다.
다만, 근처에 앉아 있던 인부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으하하, 이 아가씨가 의외로 저 수도원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고 있네. 처음 보는 얼굴인데, 학사 소속인가?”
제 아무리 변장해 있다 하더라도, 일단은 변방 귀족을 자칭하고 있는 소녀다.
허나, 그 정도 신분의 소녀가 이런 인부들의 마차에 타고 있을거란 생각은 못하는지, 인부들은 허물없는 말투로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어왔다.
“마법부 소속 1학년이에요.”
의외로 이 소녀는 클라리스라는 신분을 감춘 채 움직일 때는 연기가 철저하다.
애초에 성녀로서의 신분으로 움직일 때 자기 자신을 더 죽이는 느낌이 강하지만.
“클라리스 성녀님을 보좌하려고 온 학사 학생 중 한 명이에요.”
“오오, 여기 이 쪽 도련님과는 같은 이유구나. 학사에서 클라리스 성녀님과 접점이 생긴 건가.”
“그 성녀님이 동석시킬 정도면 확실히 각별한 사이인가 싶구나. 이거, 우리 같이 힘만 쓰는 인부들이랑 같은 마차에 탈 인재가 아니었구만.”
껄껄대며 이야기하는 인부들은 이미 맥주 한 잔을 벌컥 대며 들이키고 있는 와중이었다.
무슨 대낮부터 음주인가 싶긴 하지만, 사실상 해안가에서 짐을 내려주기만 하면 이 인부들의 업무는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철저한 금남구역인 클레드릭 수도원에 이 인부들이 들어갈 수 있을 리는 없으니, 짐을 수도원 안 쪽까지 옮기는 것은 그 쪽에서 나온 수도녀들일 것이다.
“우리 같은 범부들은 그저 성녀님의 짐을 옮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지. 직접 보좌한다고 하니, 마치 아득히 먼 나라 사람처럼 느껴지는구만. 아직 교복입은 학생 신분에 큰 영광을 손에 쥐었어.”
“성녀님께서도 늘 힘써주시는 인부 분들한테 항상 감사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실 거에요.”
“아가씨가 말을 참 예쁘게 하네. 꼭 교과서에나 나올 것 같은 신실한 품성이야.”
빙긋빙긋 웃고 있는 카일리 본인이, 지금 그토록 찬양하고 있는 성녀 클라리스 본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할 지경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마차 안에 듣는 귀가 워낙 많아서 클라리스와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애초에 언제나 호위 병력을 대동하거나, 여러 추종자들을 끌고 다니기 때문에 클라리스와 단둘이 길고 진중한 이야기를 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제 딴에는 사적인 얘기를 잔뜩 나누잔 의미에서 카일리의 신분으로 인부들 마차에 탑승한 것이겠지만, 이쪽은 이쪽대로 곤란한 입장인 것이다. 상대가 클라리스라는 것을 전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면 주변의 인부들이 이상하게 여길게 뻔하니까.
특히 성창룡이 어쨌니 하는 이야기를 당당히 하는 것도 웃길 일이다.
“그나저나, 도련님은 수도원 내부로 들어간다고 들었는데… 참 귀한 경험 하시네 그래.”
“그렇네. 우린 저 웅장한 외관만 알지, 내부 모습은 모르지 않나. 도련님께서는 그 내부도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두 눈으로 담을 수 있는 건가…”
“뿐만 아니라 내부에 세상 물정 모르는 수도녀들이 잔뜩인데, 세상 다 가진 기분이겠네 그래. 클클클.”
사내 놈들 하는 생각들이야 다 같은 거 아닌가.
그런 소리를 하며, 인부들은 내게 부럽다는 듯 즐거운 눈빛을 보냈다. 나라고 해서 딱히 뭐 할 말은 없었으므로, 그냥 본분을 다 하러 갈 뿐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점잖게 앉아서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는 내 모습을 보고 느끼는 바라도 있었는지, 인부들은 이윽고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알량한 호기심으로 성역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닌 것 같군.”
“뭐, 우리가 굳이 이해하려 들 필요가 있겠나. 높으신 분들이야 다 뜻이 있겠지.”
사실 나라고 해도 굉장히 숭고한 의미를 가지고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건만, 자기네들끼리 수군대면서 괜한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 거창한 이유도 아닙니다. 그냥… 성녀님의 생활 보조를 할 뿐입니다.”
“그 성녀님 일인데 별 거 아닌게 어디 있겠나. 다만, 수도원장 할망구 반응이 좀 궁금하긴 하군.”
“수도원장… 말입니까…?”
“아, 말 잘 나왔네! 그 왕할멈 오스틴!”
인부들 사이에서 오스틴이란 이름이 튀어나오자, 뭔가 짚이는 기색이 있는지 카일리가 쿡쿡웃어보였다.
“수도원장을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우리가 짐을 실어오면, 그걸 받으려고 항상 인력을 데리고 해안가로 나오시지요. 수도원 내부에서는 왕 할멈 왕 할멈 하고 부른다던데, 실물을 만나보면 그 이유를 도련님도 바로 알테지요. 올해로 109살이라고 했었나. 정말 징글징글하게도 오래 산다니까요. 그 할멈.”
“클클클, 그 왕 할멈은 진짜로 죽을 맘이 아예 없어. 저번에 식재료 납입하려고 들렀을 때는 피부미용에 좋다고 무슨 크림을 잔뜩 받아가던데… 아직도 그럴 기력이 남아있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니까.”
수도원장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신실하고 인자한 수녀의 모습이다.
그러나, 인부들의 묘한 반응에 나 또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시야를 돌려 카일리 쪽을 보자, 카일리는 즐겁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오스틴 수도원장에 대해서는… 너라면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럼요. 아마 한 번 만나보면 잊지 못하실 거에요.”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카일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하이고, 쥘른 이 양반은 결혼한지 15년이나 됐으면서 아직도 애처럼 구네! 안 사람이랑 밤 일 할 때에 절반만큼만 애써줬으면 서로 감정 상할 일도 없을텐데!”
“오스틴 할멈은 또 코헬톤의 상인이랑 한 판 하고 왔소?”
“내 하다 하다 굴 한 줌에 은화 서른 닢을 부를 줄은 몰랐지! 굴에 금을 발라놓았나! 성녀님은 굴을 좋아하시니까, 만찬회 식사 메뉴에 꼭 올려야 된다고 그리 말했는데!”
“허허허, 그 무법지대의 상인 나부랭이한테 자기가 얼마나 급한지 피력해봐야 약점만 잡히는 꼴이지. 왕 할멈은 그리 오래 살아놓고 그거 하나 모르나?”
“내가 그걸 모르나?! 콧물 질질 흘리고 다닐 때부터 봐왔던 쥘른이니까, 이 정도 사정은 딱하게 여겨주리라 생각했던 것 뿐이지!”
109살이란 나이를 들었을 때는, 오늘 내일 하는 오락가락한 늙은이를 생각했으나… 의외로 성량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박력 넘치는 자가 튀어나왔다.
“뭐, 울며 겨자먹기로 내고 왔지! 미안하다고, 자기 능력에선 이 정도가 제일 싼 매물이라고 연신 고개를 숙여대는데… 화낼 수도 없고 에휴…!”
“뭐, 쥘른 정도면 좋은 거래처니까 쭉 터놓고 있으시오, 왕 할멈.”
“내 그 쪽 인부들이랑도 오래 보고 지냈지만, 이놈이고 저놈이고 얼굴 본지 30년 넘어가면 싹 다 안면을 몰수한다니까! 수도원 건물이 크다고 해서 예산도 넉넉하리라고 착각을 하고 살아!”
씩씩 화를 내는 오스틴 수도원장의 목소리가 해안가에 울리고 있었다.
수도원 측 사람들은 이미 전부 해안가에 나와있었다. 아침 일찍 있었던 썰물 때에 나와서, 해안가에서 성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반나절이란 시간을 미리 나와 있었던 것이니, 슬슬 무료해질만도 한 시기였다.
나는 옷 매무새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로브 모자를 휙 내린 다음 마차에서 나왔다.
해안가의 푸석푸석한 모래사장으로 마차가 들어갈 순 없다. 그 앞에 나란히 도열해있는 마차의 무리 맨 앞에는, 으리으리하게 커다란 성녀의 마차가 있다. 뭐, 안에 성녀는 안 들어 있겠지만.
“으읏, 차!”
발랄하게 마차에서 뒤따라 내린 카일리가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그럼 저는 이만 성녀님의 마차 쪽으로 가봐야겠어요. 해질녘이 되고 수도원으로 가는 길이 나게 되면 ‘할 일’이 많아질테니까.”
“그래. 뭐… 동행해줄 필요는 없지?”
“오히려 동행하면 더 눈에 띌 거에요. 저는 지금부터 변신할 예정이라서.”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할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그냥 몸에 두르고 있는 마공학용품을 갈아낄 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열의 앞 쪽으로 슥슥 나아가는 카일리에게 팔을 휘두르며 인사를 해주었다.
“오호! 그 쪽이 로스테일러 가의 귀공자 나으리신가! 요즘 정국이 시끌시끌 하던데, 마음 고생 좀 하고 있겠네 그래!”
로스테일러 가문은 지금은 위기에 몰려있지만, 한 때는 제국 최대의 권력가이자, 공작가 중에서도 가장 이름을 날리는 대공가문의 이름이다.
제 아무리 휘청거린다고 해도 한낱 수도녀가 편하게 말을 풀어도 될만한 상대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오스틴 수도원장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을 풀어버린다.
로스테일러의 이름이 나오자, 함께 마차를 타고 오던 인부들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이런 허름한 마차에 아무렇지도 않게 동석한 사내다. 권위 없는 변방 귀족의 후계자 정도라고 생각했지, 설마 로스테일러 출신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다.
털털하게 맥주나 들이키다가 혹시나 실수를 하지는 않았는지 과거를 되새김질 하는 듯한 표정이다.
나는 로브 자락을 꽉 동여맨 채로 수도원장 쪽으로 가서 꾸벅 고개를 숙이곤 인사했다.
“…”
“에드 로스테일러입니다. 성녀님 보좌 건으로 며칠 신세지겠습니다.”
“…아니, 이야. 나도 백년 넘는 세월을 징글징글하게 살았지만, 다 늙어빠진 변방 수도원장한테 고개를 숙이면서 존대를 해주는 공자는 또 처음보네 그래.”
“애초에 복권한지도 얼마 안됐고, 그 전까지는 평민처럼 살았습니다. 그리고 백년 넘게 사신 분한테 기본적인 예우는 합니다.”
“사람 됨됨이가 생각했던 거랑은 완전히 다른데?! 황도의 오랜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만 들어보면, 로스테일러 공작가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신머리가 이상하다고 하던데…”
실례되는 말이다.
무엇보다 이 할멈은, 공작가 자제를 앞에 두고도 기가 죽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주변에 일하는 인부들이나, 수도원장을 따라온 수도녀들도 모두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람이 한 분야에 있어서 말도 안될 정도로 긴 연륜이 쌓이면, 그 자체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의 존중을 이끌어내는 힘을 가지게 된다.
심지어 권위적인 기색조차도 전혀 없다. 그 긴 인생을 평생 텔로스 교단에 귀의 했다면, 교단 내에서도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원로 중의 원로 취급을 받을 것인데, 이런 허드렛일을 하러 팔을 걷어붙이고 현장까지 나와 있는 시점에서 그녀의 본성을 알 수 있다.
시장 한 구석에서 몇십년 동안 틀어박혀 장사하던 옛 할멈들이 생각나는 그런 기백이다.
정갈한 수도녀 복장을 하고 있지만, 이미 완전히 희끗해진 머리칼과 자글자글한 주름살은 그 세월을 속일 수 없다.
머리칼 만큼이나 새하얗고 생기 없는 눈동자. 보아하니 한 쪽눈은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인지, 동공에 반응이 없다. 팔 끝에도 힘이 잘 안들어가는지 이따금씩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거의 두 사람 분의 수명을 혼자서 살아낸 몸이니만큼 여기저기 무리가 올 법도 하다. 그럼에도 오스틴 본인은 장수와 같은 기백을 내비치며, 양 팔을 허리춤에 붙이곤 가슴을 쫙 편 채 ‘많이 추워졌군!’ 하는 둥의 쓸 데 없는 독백을 흘리고 있었다.
왕 할멈 앞에서는 백작가 귀족 나으리들도 딱히 존대를 강요하지 않는다.
마차에서 오는 길에 인부들이 했던 말의 이유를 알 듯 했다. 이 할멈이 휙휙 내던지는 말에 품위와 교양, 예의라는 것은 찾아볼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신묘한 처세가 섞여 있다.
클레드릭 수도원의 큰 어른. 텔로스 교단에 80년을 넘게 귀의한 원로 중의 원로.
그리고 온갖 말광량이와 사고뭉치가 잔뜩 있는 젊은 수도녀들을 혼자서 통제하고 있는 암사자.
한 분야에서 80년 동안 박혀있으면 숨만 쉬어도 아예 통달하게 된다.
그녀는 성황도의 대주교보다도 더 많이 성서를 읽고 해독한 자다. 때때로 고위 주교들이 그녀를 찾아와 성서의 해설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고 하니, 사실상 고위 성직자들도 고개를 숙이는 동네 큰 어르신인 셈이다.
나는 가죽 주머니에서 벨이 준비해준 선물을 건네주었다.
“실베니아 아카데미 오필리스관의 메이드장 벨 마이아가 사적으로 전해달라고 한 선물입니다.”
“벨?! 그 꼬꼬마가 오필리스관의 메이드 장 자리를 꿰찼어?! 세월이라는 게 정말 야속할 정도로 빠르네! 엘리스가 데려왔을 때 죽은 듯이 공허한 눈을 하고 있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렇습니까?”
“아이고. 그 애 과거사야 내가 이야기할 건 아니지. 하여튼 썩 순탄한 인생을 살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제 자리 잘 잡아서 한 몫하고 사는 것 같아 이 늙은이 마음도 헛헛해지는구만! 그래, 잘 될 애였지. 잘 될 애였어.”
“플란첼 남작가의 이야기라면 저도 본인한테 전해들었습니다.”
그 말에, 오스틴 수도원장은 잠깐 말문이 막힌 듯 침묵했다.
양팔을 제 허리춤에 올려 놓은 채, 대장부처럼 서있던 기색이 무색할 정도였다.
“귀공자 나으리는 이미 된 사람인가 보군 그래! 사람 속을 재기만 하던 그 꼬마 메이드가 역린처럼 여기던 자기 과거사를 제 입으로 털어놓을 정도라니. 어지간히 완성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인정 받기 힘든데 말이야.”
“…글쎄요. 벨은 타인을 그렇게 박하게 평하는 사람은 아닌 듯 했는데요.”
“표면만 보고 판단하면 안되지! 내가 이런 말 하면 그 꼬꼬마는 싫어하겠지만, 그 애는 누구보다도 사람을 경계하는 설치류 동물 같은 기질이 강했거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친절해보이는 것은, 누구에게든 공평하게 정을 주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그것은 또 의외의 이야기였다.
벨 마이아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진심으로 다가가서, 확실하게 일을 처리해주는 오필리스관의 최고 실력자로 통했으니까.
“뭐, 보아하니 애먼 옛날에 그런 기질은 벗어던진 것 같군 그래. 하여튼 젊은 것들은, 늙은이가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이 팔려있으면 쑥쑥 커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서 나타난다니까.”
오스틴 수도원장은 호탕하게 몇 번 웃더니, 자기를 따라온 수도녀들에게 짐을 잘 인계받아서 정리해두라고 얼른 지시를 내렸다.
성녀의 마차가 저 앞에 있다. 다들 알게 모르게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건만, 이 수도원장만이 긴장한 기색 따위는 벗어던진 채 일처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에게는 성녀와 귀빈들이 참석하는 이 큰 규모의 기도회조차 단순한 연례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긴 생애를 거치며 총 네 명의 성녀를 섬겼다고 하는 자다. 이런 행사 준비 하나에 허둥지둥할만한 인재는 절대 아닌 것이다.
“그나저나, 골치 아프게 되었군. 귀공자 나으리는 안 그래도 가문도 빠방한데, 생각보다 더 외모도 준수하고, 심지어 품성도 완성되어 있는 것 같으니… 이번 수도회 방문이 쉽게 넘어가지는 않겠군 그래.”
“…예?”
“딱 90년만 더 젊었어도 내가 비벼보는데, 요즘 좋은 남자라는 게 어디 흔하지가 않으니까! 카하하하!”
그리 말하고 다시금 호탕하게 웃어보이는데, 차마 웃음이 나오지가 않아서 나는 가만히 시선만 맞추고 있었다.
“…저런, 나름 재치있는 유머라고 생각했는데… 이 유머는 젊은이들한테 한 번도 통해본 적이 없군.”
“솔직히 난처합니다.”
“뭐, 어쨌든 이만큼 쓸데 없이 나이를 먹고 나면 사람 깊이야 한 눈에 스윽 훑으면 순식간에 가늠이 되기 마련이거든. 척 봐도 귀공자 나으리는 뭇 젊은 여자들이 남편감 삼고자 하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췄으니까, 수도원 안에서는 몸가짐에 좀 주의 해줬으면 좋겠다 이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오스틴 수도원장은 주변을 곁눈질로 스윽 훑어보았다. 시선을 이용해 말하는 것이다. 내게 주변을 한 번 보라고.
나도 곁눈질로 주변을 보자, 오스틴 수도원장을 따라나온 수도녀들이 하나 같이 긴장된 기색으로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략 스무명 남짓한 수도녀들이 짐을 인계받기 위해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흘끗흘끗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로 간에 긴장된 모습이 역력하다.
마차 뒤에 딱 붙어서 흘끗 고개만 내밀고 있던 어리숙한 붉은 머리 수도녀가 휙 얼굴을 집어넣었고, 새까만 머리를 단정하게 땋아내려서 성실해보이는 수도녀 하나는 부끄러운 듯 귀만 쫑긋대고 있었다.
“이미 수도원 안에서는 한차례 소문이 돌았거든. 성녀님께서도 인정한, 젠틀하고 품위 있는 귀족가 사내 하나가 수도원에 며칠 들어와서 살다 갈 거라고. 뭐라 했더라.
하늘조차 질투할 정도로 고풍적인 자태에, 새들의 지저귐 하나 하나에 모두 귀기울여 주는 신사다운 품성, 나잇대에 맞지 않을 정도로 능숙한 마법실력과 더불어서 학술적으로도 어찌나 그 경지가 높은지… 귀족가 영애들도 모두 추파를 던지는 왕자님 같은 자라고 하더군.
”
“…”
“소문이 부풀려지는 게 참으로 무섭지? 사춘기 소녀들의 동화적인 망상이란 것은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나조차도 정신이 아득해질 때가 참 많지 그래. 뭐 어때, 그 나잇대 소녀들이야 그 나잇대 답게 구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지 않나. 뭐, 기대 받는 당사자인 귀공자 나으리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겠지만.”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면서 골치 아프단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자 오스틴 수도원장은 그 모습이 썩 재밌다는 듯이 또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카하학! 그래도 말이야, 사타구니에 막대기 하나 달고 태어났으면 이런 상황도 즐길 줄 알아야지! 뭇 여성들의 관심을 한 번에 받는, 소문의 중심이 되는 경험을 어디가서 해보겠나 이거야. 어깨에 힘 좀 넣고, 나 이런 사람이오 하고 잘난체도 좀 해보고 하면 좋지! 다만…”
의외로 마인드가 오픈되어 있다. 속세와의 절연, 금욕 따위가 철저히 강조되는 수도원의 안주인이라는 이미지와는 정 반대를 달리는 작자였다.
“…밤 되면 문단속은 확실히 하고.”
“…침범해 들어오기도 합니까…?”
“내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이 나잇대의 여자애들은 코헬톤 무법지대의 투박한 용병단 놈들보다도 더 통제하기 힘들어.
다 늙어가는 몸뚱아리도 적당히 혹사시켜야 하는데,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일이 터진다니까. 외부에서 들어온 남자랑 정분이 나는 것도 연례행사나 다름없어져서, 이젠 인부들도 거의 들이질 않는 방침이지. 하물며 귀족가 도련님이라니. 안 봐도 뻔할 일이야.
”
오스틴 수도원장은 가슴께에 팔짱을 끼고, 흠흠대며 목을 가다듬더니 쭉 말을 이어갔다.
“뭐, 이런 상황을 즐기는 것도 귀공자 나으리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그래도 신중히 판단은 해줬으면 하네.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진 않지만, 클레드릭 수도원의 신세를 지는 수도녀 중에서는 뒷 이야기가 뒤숭숭한 친구들도 많거든.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귀족가의 사생아나, 저주 받은 혈족의 피를 타고난 아이도 몇 있지. 하여튼… 신의 힘을 빌리면 뭐든지 다 해결될거라 생각하는 작자들이 많아. 나몰라라 수도원에 박아놓는다고 해서 그 애가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
“축복 받지 못한 태생을 타고난 아이들도 많다 이걸세. 나야 죽을 때까지 걔네들 책임지고 안고 가기로 마음 먹은 입장이지만, 귀공자 나으리는 앞날이 창창하잖나. 금지된 사랑이 주는 배덕적 쾌감도 이 늙은이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인생을 멀리 볼 줄 아는 지혜도 있어야지. 뭐, 뻔한 소리지만.”
그리고는 팔짱을 풀지 않은 채 한숨을 푹 흘렸다.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해두긴 해둬야 하는 이야기였다. 말하는 본인도 썩 유쾌해 보이진 않았다.
“하아… 하여튼 젊은 귀공자 나으리가 이해해. 이 정도 나이를 처먹고 나면, 적당히 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꼭 뻔한 꼰대질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거든. 결국 인생을 멀리 내다보란 소리밖에 할 게 없어. 오래 산 거 하나 밖에 자랑할 게 없는 늙다리니까.”
“아닙니다. 보고 들으신 게 많으니, 걱정되시는 부분도 많으신 거겠지요.”
“…어쨌든 귀공자 나으리는 여타 귀족들보다 정신적으로 많이 완성되어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되는구만. 성녀님이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확실하신 것 같아 여러모로 뿌듯하네. 그래. 그럼 그 인정에 한 번 기대서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 싶군.”
“부탁 말입니까?”
오스틴 수도원장의 호탕한 기질이야, 긴 세월 늙은 몸으로 살아남고자 발버둥쳤던 흔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스틴 수도원장이 수도원의 수도녀를 생각하는 진정성이 왕왕 느껴질 때가 있다.
어쩐 일인지, 오스틴 수도원장은 목소리를 한 톤 낮춘다. 주변에 들리지 않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일까.
“세상 어디에선가 환영받지 못해 이 수도원으로 들어와서, 세속과 떨어져 금욕적인 생활을 이어가는 수도녀들일지언정… 사람일세.”
“…”
“신의 뜻을 받드는 것은 참으로 고귀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 젊을 때에 꿈을 간직하고 있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 같은 거라 생각하거든. 그러니 나는 결국 지나갈 봄 같은 것일지라도, 수도녀들의 환상을 깨고 싶진 않아. 요컨대, 이왕이면 왕자님으로 있어달라는 소리일세.”
과연, 거기까지 나가면 나로서도 보장할 수가 없다.
나라고 해봐야, 그냥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한낱 인간 중 하나일 뿐이다.
“새벽 기도 중, 밤의 별을 올려다보며 흐뭇한 상상을 하는 수도녀를 본 적이 있나. 없겠지.”
“…”
“신의 종복으로 살지만, 그럼에도 한 명의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면, 내가 이 아이들을 거둬들여서 책임지고 있다는 실감이 나네. 나는 굳이 신앙을 논하면서 아이들의 그런 인간적인 면모를 훼방놓고 싶진 않아.”
그리고는, 다시 허리춤에 양팔을 댄 채 씨익 웃어보인다.
“내 가슴으로 낳은 딸들이거든.”
그리고는 머쓱했는지 농담을 덧붙였다.
“이 나이치고는 힘 좀 냈지. 딸이 270명 정도 있으니까.”
그 모습에, 진정으로 수도녀들을 제 딸처럼 키워낸 오스틴 수도원장의 과거가 느껴지는 듯 해… 나도 한 수 접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 말에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이 세상 누구보다 호탕하다.
80년을 텔로스 교단에 귀의해, 거의 50년동안 수도원을 책임지고 산 할멈이다. 왕 할멈이라 불리는 이유도 알 듯하다.
존중받아 마땅한 자다. 만인이 그리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나는 적당히 오스틴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건 그렇고, 귀공자 나으리가 한층 더 흡족해할만한 이야기를 해줄까.”
어차피 해안가에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다.
담소를 나눌만한 자도 마땅치 않은 것인지, 수도원장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이건 비밀이지만, 나는 자애로운 페니아 황녀님을 지지하네.”
페르시카 황녀가 방문한다. 내 목적 또한 그녀와의 대담이라는 것을 이미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는 듯 했다.
아무리 수도원에 처박혀 있더라도, 황도의 소식에 아예 무지하진 않을 터.
오스틴 수도원장은 스윽 미소를 지으며, 우리는 아군이라는 점을 확실히 상기시켜둔 것이다.
*
– 쾅!
상자 뚜껑이 하늘을 날았다.
짐 마차 안에서 고개를 쑥 내민 마법사 소녀가 머리를 탈탈 털었다. 상자 안에는 소녀가 챙겨왔던 여러 가죽 주머니가 덩달아 들어있다.
안에는 간단한 지팡이나 마법용품이 들어있고, 또 육포가 잔뜩 들어있는 것도 있었다.
일탈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것 치고는 낮잠밖에 안자서 평소랑 똑같다.
오히려 은근하게 흔들리는 마차의 짐칸은 생각보다 나른하고 좋은 낮잠터다.
“…”
루시 메이릴은 멍하고 나른한 얼굴로 어두침침한 짐칸에서 목을 쭉 뻗었다.
입가에 침 흘린 자국이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