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00)
의미 부여 (3)
해 질 녘이 될 때까지, 일행들은 모두 해안가에 둘러 앉아서 기다려야만 했다.
챙겨온 짐들에 대한 인수인계는 진즉 끝났고, 수도녀들끼리 앉아서 자기들끼리 재잘재잘 담화를 나누는 와중이었다.
아리따운 해안가의 광경도 몇 시간 째 둘러보고 있으면 눈에 적응이 되어서,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여튼 사람의 시선이라는 게 간사한 법이다.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오스틴 수도원장과 수도원 내부 생활에 대해 여러 담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샌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는 시간이다.
해안 너머 수평선을 타고, 태양이 언제쯤 고개를 밀어넣을지 고민하던 차… 다시금 바다를 보면 물이 빠질만큼 빠져 모래톱이 올라와 있었다.
널찍하진 않지만 충분히 건너갈 수 있을만한 상태다. 슬슬 수도녀들도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고는, 자기가 챙겨들 짐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 때, 으리으리한 성녀의 마차에 달린 문이 열렸다.
어리숙한 수도녀들이 화들짝 놀라서, 다들 자리에서 일어서서 손을 모으며 고개를 푹 숙였고, 인부들도 경의에 찬 표정으로 마차쪽을 올려다 보았다.
차분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마차의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클라리스의 모습은, 마치 인세에 신의 사자가 도래한 듯 한 광경이다.
정갈한 몸가짐을 상징하듯 새하얀 성녀복의 옷자락이 바닷바람을 맞아 은은하게 흔들린다.
새하얀 머리칼과, 그에 대비될 정도로 붉은 눈동자, 그리고 아예 새빨간 나비 머리핀은 상상하던 모습 그대로다.
텔로스 교도들은 성녀의 모습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큰 영예로 여긴다. 그것도 대부분은 어마어마한 인파들 사이에 섞여서, 저 멀리 자그마한 모습을 겨우 확인할 뿐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고요한 분위기에 성녀 클라리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축복과도 같은 일인 것이다.
클라리스가 모래사장에 내려오자, 북적북적한 현장의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 앉았다.
그녀는 병사의 호위를 받아 해안가로 나와서는, 슬쩍 미소지으며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간단한 목례일 뿐이지만, 성녀 클라리스에게 선배로서 인사를 받았단 사실이 충격인 것인지… 현장의 분위기가 일순 얼어붙었다. 나로서는 썩 즐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클라리스는 드레스 끝자락을 슬쩍 쥐어서 잡아 올렸다. 보고 있던 수도녀들이 자기들이 옷깃을 잡아 올려드리겠다고 나섰지만, 은은한 미소와 함께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리고, 호위 인력들을 이끌고… 클레드릭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모래톱 위를 천천히 나아간다.
저무는 태양빛을 받으며 저 멀리 커다란 수도원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클라리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현장을 신성하게 만드는 묘한 기운이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수도녀들은 이미 일사분란하게 짐을 챙겨들고 길을 나서고 있었다.
해안가에 가만히 앉아 있었던 나도 로브 자락을 동여맨 채 자리에서 일어나 수도원을 향해 걸었다.
*
“클라리스님의 식사는 귀공자 나으리께서 체크하고, 챙겨주신다고 들었는데… 사실 그리 거창한 과정이 필요할까 싶긴 해. 우리 수도원 식사라고 해봐야 그냥 풀밭이거든.”
“그래도 기본적인 확인 과정이나 음식 들어가는 절차는 제가 주도할 듯 합니다.”
“뭐, 성녀님께서 용인한 절차라고 하니, 한낱 수도녀인 내가 뭐라 말하겠나. 원하는대로 다 하면 그만이지. 필요한 건 다 제공해줄테니 걱정 말고.”
클라리스는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첨탑 제일 꼭대기 층에 있는 기도실로 향했다.
그녀가 먹고 자고 생활하는 방도 거기에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오필리스관에서도 맨 꼭대기 층을 쓰던 그녀인데, 아무래도 성녀에게는 신과 가장 가까운 꼭대기 층을 내주는 것이 관례인 듯 했다. 듣자하니 성황도에서도 꼭대기 층에 살았다고 하니까.
내게 부여된 역할은, 그녀에게 접하는 모든 환경적 요소에 대한 보고를 받고, 별다른 변화가 없도록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보통 성황도의 고위 성직자가 나와서 하는 일이지만, 성녀 클라리스는 이번에 대주교 쪽에 별다른 인선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미리 언질을 해둔 모양이다.
생각 이상으로 중직인 모양인데, 나한테 맡겨지니 썩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일의 중요성에 비해서 생각보다 업무량이 많지는 않을 듯 했다. 사실 아름답고 웅장한 외관을 제외하고는 별 것 없는 이 수도원에서 환경 변화라는게 쉽게 생길 리가 없기 때문이다.
“으리으리한 방을 내주진 못할 것 같아 미안하게 됐군. 뭐, 수도원 생활이란 게 다 그렇잖나. 금욕과 검소함이 기본이야. 이 클레드릭 수도원에서는 황족이 행차하더라도 풀떼기들만 입에 쑤셔넣고 살아야 하지.”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싫은 소리 안하는 건 좋지만, 그래도 공작가 나으리이니 만큼 식사 질은 가능한한 좋게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물론 진수성찬을 기대해도 곤란하겠지만.”
“됐습니다. 다른 수도자들이랑 같은 식사로 준비해주십시오. 다 노동력일텐데.”
“호오…”
클레드릭 수도원 내부는 외부만큼이나 웅장하다.
대리석과 하얀 벽돌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광경. 계속해서 위로 뻗어올라가는 입구 계단을 지나, 중앙 예배당의 웅장한 모습을 보니… 대체 처음 건축할 때는 어떻게 이 많은 자재들을 섬에 끌고 왔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뭐, 마법적인 수단을 동원했겠지만.
그리고 예배당 한 쪽으로 이어진 문을 지나와 쭉 걷다보면, 녹음이 우거진 작은 정원이 드러나고, 그 겉을 회랑이 둘러싸고 있었다. 경계를 따라 쭉 뻗어있는 대리석 기둥 사이로 정원의 모습이 보이는데, 과연 정원 또한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그 회랑을 따라 걷다보면 기분 좋게 들어오는 외풍까지도 수도원의 일부처럼 느껴져, 굳이 수도자가 아닐지라도 마음을 정돈하러 찾아와도 괜찮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그런 사적인 이유로 출입이 허가될만한 곳은 아니지만.
“확실히 요즘 보기 드문 귀공자 나으리라서 나도 썩 기분이 푸근해지는구만 그래.”
“그렇게 평가를 후하게 해주실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회랑을 따라 걷다가도 주변으로부터 느껴지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스틴 수도원장이랑 함께 걷고 있는 상황이라 그런지, 다른 수도녀들은 함부로 접근하진 못한다.
그러나, 채소들을 바구니에 가득 담은 채 지나가는 수도녀나, 정원 한 쪽에서 뛰어놀고 있던 어리숙한 수도녀, 아까부터 회랑의 대리석 기둥 뒤에 숨어서 흘끗흘끗 쳐다보는 아이 한 명, 회랑을 가로지르다 보면 필시 지나칠 수밖에 없는 행인들까지…
예배당에서 복도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동공을 흔들면서 내 쪽을 쳐다보는 시선에는 도저히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이방인이잖나. 신기해하는 시선은 감수해야지.”
“정말로 이 커다란 수도원에 남자가 저밖에 없습니까?”
“왜? 천국에 온 것 같아서?”
“…”
“농담이 안 통하는군 그래. 하긴, 척 봐도 이런 환경을 좋아할 것 같진 않다고 생각하긴 했지.”
오스틴 수도원장은 칼칼대며 웃더니, 회랑 끄트머리에서 내부 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아무래도 내 방은 최대한 안쪽으로 준비해준 모양이었다.
“뭐, 요즘에야 금남 성향이 훨씬 더 강해지긴 했지만… 정말 먼 옛날에는 이름난 사내 한 둘 정도는 들여서 구경시켜주기도 했지… 좀 아득한 옛날이긴 하지만…”
“수도원장께서 옛날이라 할 정도면, 대체 어느 정도 옛날입니까…?”
“글쎄. 전쟁영웅 ‘젤란’의 이름 정도는 들어봤겠지? 그도 이 수도원에 왕왕 들러서 기부하곤 했어. 좀 더 과거로 나가보자면… 전 세대 대마법사 글록트 또한 그랬고.”
과연, 텔로스 교단의 살아있는 화석답게, 불러대는 이름부터가 이미 책 속에나 등장할 인물들이다.
대현자 실베니아의 제자이자, 온갖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떠난 대마법사 글록트.
수호자 오벨을 따라 아인족 토벌에 앞장서, 클로엘 황실을 지켜낸 세명의 학술가 중 하나인 ‘절단자 젤란’.
이 할멈은, 그런 인간들과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인 것이다.
“뭐, 내가 ‘괜찮은 양반’이라고 평할만한 인간들은 그 정도가 다였지.”
“…”
“이 늙은이한테 괜찮다는 소리 들어봐야 썩 유쾌한 기분이 들지도 않겠지만 말일세. 카하학! 아, 이 쪽으로 따라들어오면 되네.”
해는 진즉에 져서, 이미 밤이라고 불러도 좋을 시간이다.
수도원 안에도 슬슬 하루 일과를 마무리 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분위기로 가득했다.
하루의 시작이 빠른 수도원인 만큼, 그 끝마무리도 한 템포 빠른 것이다.
수도원장이 안내해준 방은 생각보다도 더 단출했다.
다섯평 남짓한 공간에 침대 하나, 목재 테이블 하나, 옷장 하나, 창문 하나. 그 정도가 전부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해안 풍경은 과연, 방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절경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게 전부였다.
그래도 야외 생활이 주가 되던 캠프에 비하면 훨씬 나은 환경이다. 사실상 거주지라고 부르기도 힘든 야생에서 생존 생활을 몇 개월씩이나 해보지 않았나. 나한테는 과분할 정도로 안락하게 느껴졌다.
“그럼 내일부터 일정 시작하는 걸로 알고 있겠네. 귀공자 나으리. 따로 필요한 거 있으면 더 말하고.”
그리 말한 채 오스틴 수도원장은 문을 닫으려다 말고 말한다.
“아, 전에 이미 한 번 강조했던 것 같지만… 문단속 잘하고…”
샐쭉거리는 웃음이 섞여있었다.
– 쿵!
둔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나는 온전히 방에 혼자 남게 되었다. 일단은 어두컴컴한 방에 광원이 없어서, 촛대에 불을 붙였다.
– 쏴아아, 쏴아아.
창 밖에서부터 은은하게 넘어오는 파도 소리. 별이 가득 보이는 하늘.
촛대의 불꽃이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방 벽에 드리운 내 그림자도 함께 흔들리는 모습.
과연,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이런 광경 속이다. 속세의 일은 잊고 오로지 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기엔 이만한 환경이 없다.
나는 짐을 내려놓은 채 팔짱을 끼고 목재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갑자기 생활 환경이 달라지니, 몸도 적응기가 필요한 듯 하다.
아니, 애초에 취침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캠프 생활 할 때였으면 초저녁일 시간인데, 벌써부터 다들 취침 준비에 들어가는 이 수도원이 이상한 것이다.
“흐음…”
당장 내일 아침 식사를 들고 클라리스 성녀가 있는 첨탑 꼭대기에 들르려면, 일찍 취침해두는 게 좋을 듯 하다.
그렇게 수도원에 있는 동안은 성녀의 환경을 관리하면서, 수도원 내부에 잘 섞여들 수 있도록 이런저런 일손도 도울 생각이다.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귀빈들이 참석하는 기도회는 5일 뒤다. 그 전까지는 완벽하게 수도원에 섞여 들어서, 기도회 자리에 참석하는 것에 위화감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가 되어둘 생각이다.
다만, 오스틴 수도원장의 부탁이 좀 신경쓰였다.
– ‘나는 굳이 신앙을 논하면서 아이들의 그런 인간적인 면모를 훼방놓고 싶진 않아’
– ‘요컨대, 이왕이면 왕자님으로 있어달라는 소리일세.’
그 숭고한 뜻은 알겠으나, 그 말대로 움직여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실 수도원에 자연스럽게 섞여들 수 있는 선이면 됐지, 필요 이상으로 인간 관계를 늘리고 복잡하게 만들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벽을 칠 생각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애초에 백마 탄 왕자님이 될 정도로 훌륭한 인간도 못 된다. 그 정도로 노력해줄 마음도 없다.
나한테 그네들의 꿈을 깨지 않도록, 동화 속 왕자님으로 있어줄 그런 의무가 있을리가.
무리한 부탁을 해봐야… 이 쪽만 난처할 따름이었다.
딱 기본만 하자, 기본만. 조금 날강도 같은 마인드지만, 누가 나를 욕하겠나.
*클레드릭 수도원 4층 손님용 방에는 왕자님이 산다더라.
본인이 들었으면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표정에 핏기가 사라질 소문이 돌았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클레드릭 수도원에 방문한지 3일만의 일이었다.
사실 그간 에드 로스테일러가 한 일은 별 것이 없었다.
식사 때 성녀의 방에 들어가서 그녀의 상태를 체크하고, 신변잡기적인 대담을 나눈다.
그리고 수도원 내의 텃밭을 가꿀 때 일손을 빌려주고, 메인 홀에서 평민들이 먹는 식사를 함께 나누어 먹은 다음, 여러 잡일들에 함께 부대껴서 일한 것이 전부다.
밭을 매고 수확을 하거나, 수도원 내부 청소를 하거나, 목공 기술을 통해 부서진 시설들 여기저기를 보수해주곤 했다.
특히 옷을 수선하는 일에는 기묘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도와주는데, 이제 막 성인이 된 수선 담당 수도녀가 밤 잠을 못이루고 잡생각을 할 정도로 수선실에 자주 드나들곤 했다.
본인 딴에는 이 정도는 신세지는 입장이니 당연히 해둬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지만, 수도녀들의 입장은 또 완전히 달랐다.
매년 성대한 기도회가 치러질 때 마다 오는 귀족 영애들은 하나같이 거만해서, 식사 메뉴만으로도 사사건건 싫은 소리를 하곤 한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귀족에 대한 적개심이 자리한 소녀들도 수도원 내부에는 꽤 많았는데,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런 인간들과는 궤를 달리할 정도로 젠틀한 편이었다.
화사하게 웃어주지는 않지만,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시크하게 일을 도와주곤 떠나는 모습이 귀족 하면 떠오르는 거만한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뭇 소녀들이 마른침을 삼키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1일차에는 아침에 일어나 가죽셔츠와 마법사 로브를 걸친 채, 성녀의 식사를 챙기곤 예배당에서 기도를 올렸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기도가 끝나자마자 텃밭 쪽으로 올라와 수도원장과 함께 밭을 관리하더니… 부서진 작업대와 쟁기들을 망치질 몇 번으로 수리 해주었다.
그리고 수도원 내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문의 고리가 헐렁하거나, 경첩이 엇나간 부분들을 전부 체크해서 수리해주고, 창틀의 엇나감도 모두 고쳐주었다. 적지 않은 작업량이었는데 오전 중에 전부 마무리 한 것이, 놀라운 속도였다.
고위 귀족, 그것도 로스테일러 출신의 귀공자가 팔을 걷어붙인 채 망치와 못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에… 수도녀 일동은 모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는 후문이다.
이윽고 수도녀들의 개인실에 있는 가구들의 결함도 수리해주기 시작하자, 수도녀들이 너도 나도 제 방에 있는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수리 요청을 해 한 차례 난리를 치렀다. 사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제 방에 들어와 주길 바라는 사심이 잔뜩 섞여 있는 요청이었다.
하루 만에 다 할 수 있는 작업량이 아니었으므로, 에드 로스테일러는 천천히 진행하겠다고 수도원장에게 이야기 해두었다. 피식대며 웃는 오스틴 수도원장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사실 1일차 까지만 해도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냥 성격 좋은 귀족’ 정도로 여겨질 뿐이었다.
2일차에 이르러서는, 마법에 관심을 가진 몇몇 수도녀들에게 간단한 정령술을 시연해주기도 했다.
으리으리한 크기의 불 박쥐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정원을 가로지르게 만들자 수도녀들은 하나 같이 제 양손을 감싸쥔 채 놀랐다.
애초에 변방의 수도원에서 밖으로 나가질 않는 수도녀들에게, 실베니아라는 이름난 아카데미의 수석 학생이라는 신분은 당연스럽게도 동경의 대상이다.
특히 마법과 성법술에 뜻을 두고 있는 수도녀들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를 쫓아다니면서, 마력 감응에 대한 조언이나 수련법을 요청하곤 했다. 그 때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성심 성의껏 대답을 해주고, 더 노력하면 잘 될 거라고 긍정적인 대답을 건네주었다.
귀족이라는 신분에 가려, 마법과 정령술 분야의 실력자라는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던 셈이다.
목공을 하는 귀족이라는 특이한 인물성 때문에 일꾼 이미지가 강했으나, 그는 명실상부한 실베니아 마법부 수석이다. 육체미에 눈이 팔려서 그의 지성을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거기다가 성녀님을 직접 보좌한다는 신비로운 이미지까지 덧대어지니, 이미 갈 데까지 간 셈이다.
사실 이쯤에서부터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평가는 멋진 귀족을 넘어서 ‘왕자님’이라는 호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지, 덕, 체를 두루 갖춘, 동화 속 왕자님 같다는 평이다.
멋진 왕자님. 분명 백마를 타고 다닐 거야. 지금은 수도원에 계시지만, 본가로 돌아가시면 으리으리한 궁전에서 수많은 신하를 데리고 사시겠지.
그러면서도 성품은 올곧으셔서, 누구한테나 귀기울여 주셔. 검도 다룰 줄 아시고, 활도 잘 쏘시는데, 마법에 대한 단련도 멈추시지 않잖아. 정말, 어디에서 저런 왕자님이 나타난걸까.
저런 완벽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귀족들의 정점에 설 수 있는 걸까. 한 번만 내 몸을 휙 안아들어 보면 안될까. 가볍게 휙 들어올리실 수 있겠지. 공주님처럼 안아 들어주면 하늘을 나는 기분일텐데.
본인이 들으면 숨이 막혀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는 찬사다.
고평가 받는 것을 싫다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만은, 그것도 너무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사실, 얹혀 사는 입장이 되었으면 이 정도 노동력을 제공하고, 예우를 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적어도 에드 로스테일러의 사고 속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그가 캐치하지 못한 변수가 하나 있다. 자기들끼리 뭉쳐서 거대하게 부풀어오르기 시작하는 소녀적 망상의 집합체는… 결국 방향을 잃은 채 폭주하게 되어있다.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우상화해서, 쓸 데 없는 단점들은 전부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화장실에도 가지 않고 눈곱도 생기지 않는 무슨 신화속 존재로 인간을 격상시켜 놓는다.
‘에드 도련님은 손짓 한 번으로 수도원 외벽을 다 부숴버릴 정도로 강한 마법을 부릴 수 있대.’
‘에드 도련님은 최고위 정령을 전부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정령술에 통달해 있대.’
‘에드 도련님이 쏘는 화살은 단 한 발로 바다를 가른대!!!!!!!’
‘그게 말이 돼??’
‘아…안되나…?’
‘아, 아니 에드 도련님이면 가능할지도 모르잖아?’
‘가능하지! 무조건 가능하지!’
‘그…그런가…?’
거기서 끝이면 차라리 다행인 일이다.
‘에드 도련님의 목소리를 한 번 들으면 뇌가 멈추고, 눈동자가 마음대로 안 움직이니까 조심해!!’
‘그거 알아?! 에드 도련님은 눈빛만으로 곰을 죽인 적이 있대!!!!!’
‘내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서서 말을 탈 줄 아신다는데?!!!!’
‘물을 보고 얼어라, 라고 명령하면 물이 얼음이 된다고 해!!!!!’
‘마음만 먹으면 하룻밤 만에 도서관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있다고 하더라!!!!’
‘실베니아가 에드 도련님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에드 도련님이 실베니아 아카데미를 가르치고 있다는 소문도 돌아!!!!’
‘역시!!! 그렇구나!!!!’
“…”
에드의 귀에 이 모든 소문이 들어간 것은, 3일차 아침이었다.
성녀의 방에서 나온 에드와 마주친 오스틴 수도원장은 폭소를 터뜨리기 일보직전이었다.
“좋은 아침이군. 눈빛만으로 곰을 죽이고, 서서 말을 타는 곡예도 할 줄 알고, 물에 명령을 해서 얼어붙게 만들고, 도서관 장서 전부를 하룻밤 만에 독파하고,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스승이신 에드 귀공자 나으리.”
“……”
“당황스러워 보이는군. 세상 물정 모르는 수도녀들이 펼치는 상상의 나래가 익숙치 않지? 귀빈 기도회 끝나는 날엔 어디까지 갈지 슬슬 나도 궁금해지는군. 주신 텔로스님과 비벼보는 것 아닌가?”
텔로스에 대한 신앙을 논하는 곳에서, 새로운 신앙을 탄생시켜서 어쩌자는 것인가.
에드 로스테일러는 도끼눈을 뜬 채 오스틴 수도원장을 보고 있었다.
“뭐, 한 때 유행하는 것 같은 소문이니 너무 괘념치는 말게. 나도 뭐 적당히 하라고 주의는 주고 있지만… 사춘기 소녀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통제하면 오히려 더 미쳐 날뛰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냥 적당히 받아넘겨주라고.”
“수도원은 늘 이런 분위기입니까?”
“당연히 이거보다는 텐션이 떨어지지. 신앙을 논하는 곳이지 않나. 자네 때문에 더 들뜬 감이 없잖아 있긴 해. 하지만… 그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긴 하지.”
에드의 외투를 받아든 오스틴 수도원장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요즘 수도녀들 사이에선 또 묘한 소문이 들거든. 수도원에 귀신이 든다나, 뭐라나.”
“…귀신이요?”
“간밤에 외벽 사이에서 쿵쾅 소리가 들리거나, 천장에서 사람이 걷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더군. 뿐만 아니라 수도원 주방의 식자재가 몇 없어져 있기도 하고, 새벽에 복도에서 기묘한 그림자를 봤다는 증언도 이어져서… 밤에 혼자 잠에 못 들겠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아이들도 왕왕 나왔지.”
에드도 대충 그에 대한 소문은 들었다. 밤만 되면 조그마한 사람의 그림자가 창가에 나타나곤 한다는 것이다.
“텔로스 님을 섬기는 수도원에서 그런 귀신 소문 같은 게 도는 건 썩 좋지 않지. 곧 귀빈들이 오실 기도회인데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는 좋지 않아.”
“그렇군요… 생각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래도 자네 덕에 마냥 분위기가 우중충 하지만은 않아서 다행인 일이지. 수도녀들 사이에서 기사 놀이 하는 것도 많이 노곤한 일이겠지만, 며칠만 더 부탁하네. 떠날 때에는 소소한 선물이라도 챙겨줄테니.”
“뭐, 저야 상관 없습니다만… 최근… 저를 보는 수도녀들의 눈빛이 좀 위험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정조는 자기가 지키는 거야. 자자 파이팅 외치고 가자고.”
내가 아련한 눈빛을 하자, 오스틴 수도원장은 오히려 즐거운지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맞다. 그걸 말해줬어야지. 내 정신 좀 보게.”
오스틴 수도원장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꽤나 중요한 소식을 전해왔다.
“페르시카 황녀께서 오늘 수도원에 도착하신다고 하는군.”
*썰물이 오기 전까지는, 제 아무리 황족이라 할지라도 수도원의 모습을 보며 해안가에서 기다려야 한다.
마음을 정갈히 하고, 성역에 들어서기 위한 준비를 한다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행위다.
페르시카 황녀는 그런 자잘한 의미 부여는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다. 그냥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무료할 따름이다.
커다란 황족 마차에 가만히 앉아, 측근들을 대동한 채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는… 수도원 내부에 대한 소식은 이미 어느 정도 전해듣긴 했다.
“그 에드 로스테일러가 와있단 말이지. 로스테일러 가문 참사에 깊이 연루되어 있고, 페니아의 세력에 가장 강력하게 조력하고 있다는 그 남자.”
“예. 성녀 클라리스님의 보좌로 들어와 계신다고 하는데, 어떠한 경위로 그리 된 건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뭐, 직접 보고 판단하면 될 일이지만… 그래도 그 남자에 대한 사전 정보가 너무 적기는 하구나.”
페르시카는 매사에 신중한 성격이다.
셀라하와 페니아. 다른 황권 주자들이 모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의식하고 있는 그 남자이기에, 뭔가가 있을거라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다.
페르시카 황녀가 클로엘 황제에게 강력하게 의지를 피력해가면서까지 이 수도원에 온 이유는, 텔로스 교단의 원로인 오스틴 수도원장의 약점을 쥐기 위함이다. 그 재료들도 모두 준비해왔다.
이 절묘한 시기에, 미리 수도원에 도착해 있는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남자. 이것은 과연 우연일까.
페르시카 황녀는 그 남자에 대해서 극히 제한적인 정보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황녀의 권위를 이용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 그 남자의 과거사, 출신 성분, 실베니아 내에서의 위치 따위가 전부다.
엘테 상회를 둘러싼 신경전을 치렀을 때도, 판단력이 비상하다는 사실 정도밖에 도출해낼 수 없었다. 결국 인간 그 자체로서의 세세한 정보는 직접 만나봐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만나도 좋을 리가 없다. 중요성이 높은 상대이니 만큼, 신중히 접근해야만 했다.
“튜네.”
“예, 페르시카 황녀님.”
“보아하니 그 남자는 며칠 전부터 이미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듯 하구나. 그렇다는 것은 내부 인간들과 어느 정도는 부대낄 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겠지.”
페르시카는 고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마차 안의 측근들을 둘러보곤 이야기했다.
“학사나 가문의 사람들은 제 뜻대로 입막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수도원은 그의 입장에선 완전히 타지거든. 그 의지대로 움직여주는 인간이라곤 거의 없는 환경이지.”
“그렇지요.”
“수도원 내에 자리하거든, 그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전부 수집해. 학사나 가문을 조사한 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정보도 우수수 쏟아져 나오겠지. 적어도, 이 손아귀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어야지.”
페르시카 황녀는 제 손을 쫙 펼쳐보고는 이윽고 꽉 움켜쥐었다.
“페니아 세력 쪽의 핵심인물이니 만큼, 이번 기회에 제대로 잡아두면 좋아. 회유를 하든, 강압을 하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자꾸나.”
“예… 알겠습니다…”
썰물까지는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았다.
페르시카 황녀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으리으리하게 커다란 클레드릭 수도원을 가만히 바라 보았다.
텔로스 교단의 총본산인 성황도. 바로 그 다음가는 규모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다.
그야말로 웅장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