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01)
의미 부여 (4)
“성창룡 벨브로크가 부활합니다.”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수도원 방문 4일차, 점심 때가 좀 지나서였다.
수도원 사람들 모두가 접근하기 꺼려하는 성녀의 개인실. 첨탑 꼭대기에 으리으리한 크기로 자리해있는 그곳에, 클라리스 성녀는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클레드릭 수도원에서 주관하는 최대 규모의 기도회가 만 하루 남았다.
각지에서 이름난 귀족가문의 대표 역할로 온 영애, 유력가의 대표자들이 각자 수도원 방을 하나씩 잡고 기도회를 기다리는 시기다.
매일 같이 찾아드는 귀빈들을 오스틴 수도원장에 해안가까지 나가 기다렸다가, 썰물 때가 되면 우루루 끌고 들어오는 일의 반복이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가주가 텔로스 교단의 세례를 받은 경우에는 꼭 가문의 핵심 구성원 한 명을 보내서, 그 신실함을 증명하고 신도들 사이의 신뢰 관계를 재확인하는 관례가 있곤 했다.
로스테일러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은 타냐가 도맡아서 기도회에 참석했던 모양인데, 본인한테는 썩 좋은 기억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그럴만 하다. 이 수도원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 이름난 귀빈이라 할지라도 얄짤 없이 쥐꼬리만한 방에 앉아 풀을 씹어야만 하는 곳이다.
그런 곳이니 만큼, 4일차가 되고 귀빈들이 방문하는 시기가 되자 알게모르게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방문객들이 많이 찾아든다는 것만으로도 일탈이 되고, 평소와는 다른 고양감 같은 것이 내부에 도는 느낌이다.
어쨌든, 이런 시기고, 상대적으로 성녀에 대한 시선이 약간이라도 줄어드는 잠깐의 틈이 내 이야기를 꺼내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다.
“…네?”
“사실, 이 이야기가 하고 싶었습니다.”
성녀의 생활이나 식사에 대한 관리는 내가 도맡아 하고 있었다. 하루 중 단둘이 될 수 있는 기회는 꽤 많았다. 적어도 실베니아 아카데미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비교적 성녀의 일정이 한가해지며, 수도원 내의 시선도 여러 귀빈들로 분산되는 지금이야말로 최고로 적절한 시기인 셈이다.
“이런 말을 가감없이 할 수 있는 상대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클레드릭 수도원까지 성녀님을 따라온 것입니다.”
“…”
“저는 미래를 봤습니다. 성창룡 벨브로크는 전조도 없이 부활해서, 아켄섬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클로엘 제국의 역사에 남을 재앙을 일으킬 겁니다.”
농담도 추측도 아니다.
딱 단정해서 이야기를 꺼내는 내 말에, 클라리스 성녀는 일단 식사를 그만두었다. 아니, 애초에 이미 다 식사를 마쳤지만, 나랑 담화를 나누려고 좀 더 앉아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근거를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근거가 없기에 아무에게나 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저는 근거 없는 신뢰를 요구해야하는 입장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봤던 미래의 편린을 함께 경험했던 성녀님께 직접 말하러 온겁니다.”
합동 전투 실습이 행해지던 날, 성녀 클라리스와 나는 몇 번이고 함께 시간을 돌며 벨브로크가 일으킨 재앙을 지켜보았다.
벨브로크의 어금니를 자훌 변경백의 영토로 반출함으로써 그 부활은 조금 미뤄졌지만… 벨브로크의 봉인식이 이미 한계에 달해있는 상태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저 혼자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클라리스 성녀님은… 그런 방면에선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시고요.”
이게 무슨 어이없는 소리냐고 반응하는 게 당연한 이야기다. 허나, 상대가 클라리스 성녀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그녀에게 있어서 벨브로크의 부활이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그 비늘이 아켄섬의 상공을 뒤덮는 광경을 몇 번이고 봐왔던 소녀다.
“…만약 에드 선배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군요.”
“최대한 많은 세력을 규합해야 합니다. 최소한 황실 세력과 교단 세력의 정예병들을 모두 아켄섬에 소집시킬 수 있어야 해요.”
“그 정도 규모의 일이라면… 제 아무리 성녀의 입장인 저라 해도 독단적으로 정할 수는 없어요.”
개인실 창밖으로 보이는 해안가 풍경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던 참이었다.
갑작스럽게 치고들어오는 진지한 이야기였음에도, 클라리스는 잠시 숨을 머금는 것만으로 그 이야기를 받았다.
“성황님께 벨브로크에 대한 이야기를 납득시켜야만, 교단 세력을 온전히 움직일 수 있어요.”
“그건… 쉽지는 않겠군요.”
“성녀로서의 제 신분을 이용하면 신탁이 되었든, 예지몽이 되었든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있어요. 다만… 예언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는 제 권위에 영향이 가겠지만요.”
클라리스는 텔로스 교단의 성녀로서, 신의 목소리를 가장 가까이서 듣는 자다.
신의 대리인으로 군림해있지만, 그 목소리를 오독하는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잡혔다간 지금의 위치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단순한 일도 아니고, 세계가 위협받는 성창룡에 대한 예지다. 단순히 헷갈렸다든가, 잘못 생각했다든가 하는 핑계로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인물 하나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는 이야기에, 제 모든 것인 성녀로서의 자리를 걸어달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쉽지 않다.
그렇기에, 클라리스는 성황을 납득시키기 위한 근거를 요구했던 것이다.
클라리스 본인이 내 말을 신뢰하는 것과는 별개로, 성황을 납득시킬 수 있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그런 생각을 하긴 했어요. 하루 하루 바쁘게 사시고, 매일을 황금처럼 아껴가며 사용하는 에드 선배님이 어쩐 일로 수도원까지 절 따라와 주신 걸까.”
“…”
“정말로 저 하나만을 위해 와주셨다고는 생각 안해요. 여러 정국적인 판단이나 큰 그림을 위해서 움직이셨겠죠. 그 사실에 야속함을 느낄 시기는 지났어요. 이런 위치에 있다보면, 그런 일은 일상다반사니까.”
여기서 사과를 해도 이상하다.
클라리스 성녀는 그 모든 걸 감안하고서라도, 그냥 클레드릭 수도원에서 나랑 지낸다는 사실에 마냥 좋아해준 것이다.
“근거 없는 신뢰를 요구해야 하는 입장이라 면목 없다는 듯이 말씀하셨지만, 그런 건 걱정 안하셔도 돼요. 저는 근거 같은 게 없어도 믿어요. 에드 선배님이 그리 말씀하셨다면, 벨브로크는 정말 실질적으로 위협이 되겠죠.”
“성녀님…”
“적어도, 지금 바로 답을 내드릴 순 없는 문제긴 하겠네요. 제가 에드 선배님을 신뢰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로 텔로스 교단 전체를 제 손아귀에 쥐고 움직일 수 있는 근거가 되진 못하니까요. 하지만, 제 선에서 힘껏 노력을 다 해보긴 할게요.”
넉살 좋게 풍경에 대한 이야기나 나누고 있을 때랑은 또 다르다.
성녀 클라리스는 철 없고, 세상 물정 모르고, 묘한 낭만에 취해있는 것 같은 모습을 드러내곤 하지만… 아델을 잃은 뒤로는 한층 더 침착하고 이성적인 기질이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내적인 성장을 이루어낸 것과는 별개로, 상황 자체가 그냥 심각하기도 했고.
“생각보다 가감 없이 받아들여주셔서, 저 또한 당황스럽습니다.”
“성녀의 자리에 있으면서 어렴풋이 알게 된 게 있어요. 평화에만 취해있으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비극에 아무런 대처도 못한다는 거에요. 비극은… 항상 가장 평화로울 때 찾아와요.”
클라리스는 뭔가 아련한 눈망울을 하면서도, 확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주세요. 에드 선배님이 뭘 알고 계시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이야기 하자면 길어질 것 같습니다.”
“오히려 기뻐요. 저는 이제야, 에드 선배님이 내적으로 감당해왔던 짐을 제게 덜어내주는 것 같거든요.”
당황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오히려 클라리스는 은은하게 웃어보였다.
“나는 같이 짊어질 준비가 끝나있어요.”
*황족은 어느 자리를 가든 간에 주인공이다.
로스테일러 공작가의 사교회에서도 주인공처럼 군림하던 셀라하 황녀가 그랬고, 실베니아 신입생 중에서 모든 이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페니아 황녀가 그랬다.
그 사실은 페르시카 황녀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다. 수도원에는 온갖 귀족가에서 모여든 영애들이 서로 간에 소개를 하며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페르시카 황녀에게 말을 걸 수는 없었다.
고고한 자태와 기품있는 행동거지는 황족이라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함부로 말을 걸 수 없게 만드는 기운 같은 것을 몸에 두르고 있는 느낌이다.
페르시카는 커녕, 그녀의 뒤를 따르며 호위하는 기사 튜네에게조차 말을 걸기가 힘들다.
그렇기에 수도원 복도에서 그녀와 마주치게 되더라도, 대부분의 영애들은 고개를 푹 숙이며 지나칠 뿐이었다.
“대부분은 성서나 종교서적들 뿐인가… 서가의 질은 역시 황실 도서관의 것을 따라오기가 힘든 모양이구나. 그럴만 하지.”
페르시카 황녀가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곳은 수도원 저층부에 있는 꽤 커다란 도서관이었다.
여러 오래된 장서들이 구비되어 있지만, 대부분 페르시카 황녀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도서관의 망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책과 지식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인물이었다.
지식과 정보야 말로 세상의 본질이다. 군림하는 자가 무지하고, 정보에 밝지 않으면 그 자리를 결코 오래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확고부동한 페르시카의 가치관이었다.
그렇기에, 페르시카 황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늘 도서관에 처박혀서 장서를 읽는데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내부에 준비된 도서관에 틀어박힌 것도 참으로 그녀답다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마냥 책만 읽고 있을 시기는 아니라는 점이다.
황권 분쟁도 완전히 격화되어 가고 있으니, 클로엘 황제 또한 슬슬 부담을 느낄 것이다.
가열되어가는 황권 분쟁을 종결 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정식으로 후계자를 선포하는 것이다.
다만, 대국을 이끌 후계자를 함부로 정할 수는 없는 법. 그도 그 나름대로 고뇌하고 있겠지만, 그 고뇌의 결론이 언제 나오는지는 신하들 사이에서 그럭저럭 소문이 돌았다.
아마도 곧 있을 황실 정기 회의에서 각 황녀에 대한 제국 유력자들의 지지를 조사할 것이다. 후계자를 정하는 자신의 판단에 참고하기 위해서.
클로엘 황제가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은 큰 잡음 없이 권력을 이어 받아, 제국의 전성기를 계속해서 이끌고 나갈 역량이 있냐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선 황실 내부 세력과, 제국의 여러 유력 세력의 지지를 두루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상도에서 가장 이름난 상회인 엘테 상회를 쥐려 했던 것도, 황실 기사단 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려 했던 것도 모두 그러한 점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 같은 핏줄을 타고난 두 자매, 셀라하와 페니아보다도 더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제 세력을 불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세력을 견제하는 것도 중요하다.
제 세력 하나를 늘리는 것보다, 상대의 세력 하나를 뺏어오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인 상황 아니던가.
그렇기에 페르시카 황녀는 기도회를 핑계로 이 머나먼 클레드릭 수도원까지 왔다. 뼛속까지 페니아 황녀를 지지하는 오스틴 수도원장을 회유하기 위해.
그 회유를 위한 준비도… 모두 끝나 있었다. 아마도 오스틴 수도원장은 절대로 페르시카 황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성품과 기질에 대한 조사는 이미 모두 끝나있었다.
“흐음…”
문제는 에드 로스테일러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생존자 중 가장 이름난 자로, 그 또한 페니아 황녀를 지지하는 자들 중 하나다.
그를 회유할 수 있으면 페니아 황녀의 핵심적인 지지자 중 하나를 더 빼올 수 있는 셈이다.
“생각이 복잡해지는구나.”
오스틴 수도원장은 성황과 성녀마저도 존중하는, 텔로스 교단의 큰 어머니 같은 존재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현재 황실 회의에서 논란의 구심점에 서있는, 로스테일러 공작가의 핵심 생존 인물이다.
이 두 사람만 제 세력으로 끌어와도, 황권 경쟁에서 정말 엄청난 진전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수도원 출장의 성과는 정말 대성공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에드에 대한 정보가 페르시카에게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셀라하와 페니아는 에드와 만나보았지만, 페르시카에게 에드 로스테일러란 남자의 존재는 완전히 안개 속의 인물이다.
전해져오는 정보와 소문만으로 판단해야하는 인물인 것이다. 사전 정보 없이 대면하는 것은 페르시카 황녀도 원치 않았으므로,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해 보았건만… 순탄치가 않다.
“돈으로 회유할 수 있을 것 같나?”
“수도원 내에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황금으로 지어진 거대한 성채에서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포도밭을 보며 와인을 마시는 게 취미라고 합니다…”
“로스테일러 공작령에 그런 규모의 포도밭이 있던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돈에 연연하는 인물은 아닌 듯 합니다. 엘테 상회의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은 점도 감안하면 확실합니다.”
수도원 도서관의 열람실에 자리해있던 페르시카 황녀의 옆에, 호위기사 튜네가 난처한 표정을 하며 서있었다.
사람을 회유하는 방법은 결국 셋 중 하나로 귀결된다. 돈, 명예 혹은 권력, 그리고 정의다.
“황실 권력을 잡으면 최소 재상급 이상의 자리를 약속한다고 제안하면 어떨 것 같으냐?”
“이미 공작가의 귀공자로 자란 신분입니다. 명예나 권력에 휘둘릴지는 솔직히 미지수라고 생각합니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수도원 내의 소문에 의하면 황실 내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수석 마법 연구원의 자리를 윽박질러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학술 연구의 고고한 업적은 권위로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고 일장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황실에서는 그런 제안을 한 바가 없을텐데?”
“…저도 의아했습니다.”
“뭐, 학술 연구에 대한 건은 장미궁에서 관리하지 않으니까… 내게 보고가 올라오지 않을 수도 있긴 하지만…”
페르시카 황녀는 어이 없다는 얼굴로 튜네의 보고 서류를 받아 들었다. 도착하자마자 발 빠르게 뛰어다니며 정보를 수집한 튜네의 일처리 솜씨는 확실했다.
“아니, 애초에 이 소문들은 대체 뭐란 말이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만 가득해 보이는데…”
“…보고 서류에서 누락시킨 것도 많습니다. 도저히 말이 안되서 보고할 거리도 안된다고 생각한 것들이 꽤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눈빛으로 얼음을 얼게 만든다든가, 목소리만으로 사람의 심장을 멈춘다든가…”
“…”
“단검을 한 번 휘두르면 벽이 갈라진다든가, 고위 정령을 몇 체나 다룰 수 있다든가, 올덱 암흑가의 권력자를 잔뜩 알고 있다든가, 성녀 클라리스가 그에게 완전 매료되어 있다든가…”
튜네가 하나 하나씩 읊고 있는 에드에 대한 소문들의 무서운 점은, 그 중 일부분 진실의 편린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또 기묘하게 에드에 대한 배경 지식과 맞물려서 판단을 힘들게 만든다. 연막이 쳐진 것처럼, 에드라는 인물에 대한 정확한 상이 머리 안에 드러나질 않는다.
“화살 한 발로 바다를 가를 수 있는 힘을 감추고 있다든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도 고위 마법이 튀어나간다든가…”
“그쯤 해두거라… 됐다…”
“…”
“이제 나도 잘 모르겠구나…”
솔직히 이게 다 사실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다.
가장 처음 드는 생각은, 머리가 꽃밭인 수도녀들이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매료되어서 제 멋대로 상상이 폭주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실 그게 정답이 맞다.
허나, 페르시카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배경지식이다.
셀라하 황녀와 페니아 황녀가 그에게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고 있다. 그는 멸문 위기에 놓였던 로스테일러 가의 생존자이자, 실베니아에서 몇 번이고 목숨의 위기를 버텨낸… ‘생존’ 그 자체의 전문가다.
실제로 에드 로스테일러는 엘테 상회를 쥐려고 하는 페르시카의 계획을 한 번 무산으로 돌린 적이 있고, 현 실권자인 로르텔 케헬른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받고 있다.
놀랄 정도로 후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고, 그런 일관적인 평가엔 필시 이유랄 것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비범한 인물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좀 해도 해도…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그래도 정도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닌가.
이 정도로 날고 기는 인물이 지금까지 페르시카의 정보망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역시… 한 번 만나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런 기회까지 왔는데 그냥 기도회만 참석하다 갈 수는 없는 법이지. 자리를 만들어 보거라. 다만… 조금 긴장되는 구나.”
페르시카 황녀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한숨을 푹 흘렸다.
“뭐, 어차피 다 헛소문이겠지만. 그걸 확인해보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지.”
일단은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소문을 전부 헛소문으로 일축하며, 아직은 상상 속의 존재인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이런 게 진실일 리가 없다.
*
“안녕하세요, 에드 도련님. 오스틴 수도원장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소문대로 수도원에 와 계시군요. 저는 플로신 백작가의 차녀 메리라고 합니다. 가주께서는 페니아 황녀님께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시어, 로스테일러 공작가와는 각별한 유대를 품고 있습니다. 부디, 좋은 관계가 쭉 이어지길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에드 도련님! 왕 할머니는 어디 가셨나요?! 그… 수도복 수선을 하려고 하는데… 수선 담당 엘리니르가 바쁜가봐요! 호, 혹시… 좀 부탁 드려도 되나요…?! 시, 실례가 됐으면 죄송해요!”
“에드 도련님. 식사는 하셨나요? 오늘 수도원 식당 쪽에 질 좋은 양고기가 들어왔다고 하네요. 수도녀들이 다들 즐거운 듯이 식당으로 가고 있더라고요.”
“오스틴 할멈 어디갔어?! 나 간밤에 방에 틀어박혀있는데 왜 벌점이 들어가 있는거야?! 갸아악! 아, 앗.. 에드 도련님. 계셨네요…”
“내일 기도회에 대한 진행 사항을 확인해봐야 하는데… 방으로 들어간 수도원장님께서 답이 없으시네요… 호, 혹시… 대신 봐주실 수 있나요…? 에드 도련님께서는 성녀님의 일정도 직접 관리하시니까… 권한은 있으시죠…?”
하루 왠종일 정무적인 접근을 해오는 귀족가 영애들과, 수도원 일상에 대한 건으로 이야기르 걸어오는 수도녀들 상대를 해주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단출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방문을 닫아걸었을 때는 이미 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아무것도 없는 변방의 수도원.
광원이 거의 없는 만큼, 하늘의 별도 웅장할 정도로 많다. 펼쳐진 은하수가 과장 좀 보태면 거의 대낮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후우…”
야생의 생존 생활과는 또 다른 방면으로 피곤하다. 나는 얼굴을 휙 쓸고, 허름한 목재 의자에 앉은 채 창밖을 잠시 올려다 보았다.
하루종일 소란과 관심의 중심에서 보내다가, 드디어 늦은 밤 어둠속에 홀로 앉게 된 시점.
그제야 올려다보는 밤하늘은 평소 그대로여서, 오히려 위안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시간이 흘러도 불변하는 것은 묘한 심리적 안정감을 주곤 한다. 커다란 마녀 모자를 고쳐 쓴 그 꼬마 마법사가, 늘 옥상에 앉아 별바다를 올려다보는 이유도 이해할 듯 하다.
“걔도 이런 묘한 안정감을 느꼈던 건가.”
루시와는 여러모로 많은 교류를 주고 받았지만, 아직도 완전하게 그 마법사를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길고양이처럼 여기저기 드러누워서 심드렁하게 있는 때가 있는고 하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신비로운 자태로 건물들 사이를 노니는 때도 있으니… 진지한 건지 늘어진 건지 알 수가 없는 인간이다. 뭐, 둘 다겠지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내일은 기다리던 기도회다. 수도원 어딘가에서 방을 배정받고 쉬고 있을 페르시카 황녀도 내일이 되면 기도회에 참석해서, 나와 얼굴을 맞댈 것이다.
기본적으로 수도원의 아침은 빠르다. 일찍일찍 잠에 들어야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페르시카 황녀를 맞대응 할 수 있을 것이다.
슬슬 잘까 싶어서, 이불을 휙 들어올렸다.
당연스러운 자태로 루시가 내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
아까 전부터 묘하게 쌔근대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듯 했는데, 환청이 아니었나.
내 배게를 감아안고는, 넉살 좋은 표정으로 침대에 눌러붙어서 잠들어 있던 루시 메이릴.
네가 왜 여기서 튀어나오냐? 라는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루시가 이불이 없어져서 허전해졌는지 멍한 눈을 휙 떴다.
그리고 그대로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식은 땀을 삐질 흘렸다.
“아, 안녕.”
“너 왜 여기 있냐…”
잠이 확 달아난 것일까.
루시는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쭈뼛대면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사, 산책하다가… 어쩌다 보니…”
“…”
척 봐도 수도원에 숨어든 모양새다.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이, 수도원에 유령이 드나든다는 소문의 정체는 이 소녀일 것이다.
잠깐만 침대에 누워보려다 그대로 잠든 모양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산책 끝났으니까 이제 오필리스관으로 돌아가야겠다. 벨 한테 혼나겠어. 그럼… 이만…”
“…그냥 대놓고 솔직하게 말해 봐.”
“마차 짐칸 타고 따라왔어. 그냥, 수도원에 오고 싶어서.”
내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 루시는 결국 모두 털어놓았다.
“예전에 글록트 할아범한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이건… 아켄섬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독 수도원을 따라오고 싶어하던 이유가 뭔지, 나로서도 잘 가늠이 안가던 상황이었다.
루시는 자기 백발 머리칼을 손가락 끝으로 휙 꼬더니, 어렵사리 이야기 했다.
“이 수도원을 본 적이 있다고 했어.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한 광경이었는지, 기억에 남는다고 이야기 했던 기억이 있어서… 나도, 그냥 한 번 보고 싶었어.”
평소에 제 속사정을 거의 이야기 하질 않는 루시다.
이 수도원에 와서도 딱히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고, 그냥 건물 여기저기를 둘러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 거대한 수도원 옥상을 타고 노닐거나, 지하나 방 사이의 시설을 돌아다니고… 적당히 사람 구경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대충 유령에 대한 소문과 일치하기도 하고… 역시 그 유령 소문의 정체는 루시였던 것일까.
“그러다가 수도원장한테 들켰어.”
“당연하지… 언제까지 안 들킬거라고 생각했냐…”
“나이를 많이 먹어서 그런가, 글록트 할아범이랑도 면식이 있는 사이더라고… 글록트 할아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
나는 목재 의자에 걸터 앉아서, 루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내 침대에 앉은 채 베개를 꽉 안아쥐고서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는 루시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아련했다.
“사실 내가 수도원 내부를 돌아다니는 걸 그냥 모른 체 해주고 있었던 모양이야.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생각보다 이해심 있는 사람이었어.”
“그렇겠지. 척 봐도 호탕해 보이고, 호쾌해 보이는 분이시잖아.”
“응, 그래서… 수도원 옥상에 나란히 앉아서, 별을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거든.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고… 또, 고민하고 있던 걸 다 들어줬어.”
“고민?”
넉살 좋게 늘어져서 낮잠이나 자던 소녀에게 고민이라 할 것이 뭔가.
그러나, 루시는 숨을 한 번 삼키고서는 배게를 꽉 안아쥐었다.
그것은… 부끄럽거나 창피하다는 감정보다는, 오히려 슬픈듯한 모습이었다.
“…대체 오스틴 수도원장이랑 무슨 이야기를 나눴던 거냐?”
“…비밀이야.”
“…그래, 뭐 캐물을 이유도 없지.”
정말로 수도원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루시 나름대로 조용하게 수도원 구경을 다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야 뭐, 피해 본 것도 없으니 어이없다는 이야기만 하고 말 뿐이다. 그러나, 루시는 루시 나름대로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인지… 한창을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있잖아.”
내일 기도회 일정만 마무리하면 아켄섬으로 돌아갈 것이다.
돌아갈 때는 짐칸 말고 마차에 당당히 타라고 이야기 해둘까 하던 참이었다.
“의미 있는 삶이란 건 뭘까.”
갑자기 묘한 철학적 사유를 건네는 루시의 태도가 기묘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눴던 거냐.
당연히 나로서는 명확한 답을 제시해줄 수도 없기에, 그냥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할 뿐이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겠지. 응.”
“어쨌든, 내일 일정만 치르고 아켄섬으로 돌아갈거니까… 다음엔 짐칸에 타지 마. 마차 자리가 좀 모자라긴 하지만… 뭐, 무릎에라도 올라타는 게 짐칸 보단 편할 거다.”
그리 이야기하고, 내일 일정을 체크했다.
내일 치러질 일들을 모두 잘 마무리하면, 아켄섬으로 돌아가야지. 돌아가서 할 일도 잔뜩이다.
이런 저런 일은 많았지만, 어쨌든 잘 마무리하고 아켄섬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세상 만사가 항상 예상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도 정도라는 것이 있었다.
이튿 날 아침.
텔로스 교단의 원로 어르신이자 수십년 동안 클레드릭 수도원을 책임진 수도원장 오스틴.
그녀가 방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기도회가 치러지기 단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